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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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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납회식 때
이름 진필중(陳弼重 / Pil-jung Jin)
생년월일 1972년 10월 13일
출신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학력 역삼초 - 휘문중 - 휘문고 - 중앙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5년 2차 지명 2라운드 전체 11번(OB)
소속팀 OB/두산 베어스 (1995~2002)
KIA 타이거즈 (2003)
LG 트윈스 (2004~2007)
우리 히어로즈 (2008)
지도자 한민학교 투수코치 (2009~2011)
경찰 야구단 투수코치 (2011~2013)
롯데 자이언츠 드림팀 투수코치 (2016)
롯데 자이언츠 2군 불펜코치 (2016~2017)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5 2001
1999년, 2000년 한국프로야구 구원왕
임창용(해태 타이거즈) 진필중(두산 베어스) 신윤호(LG 트윈스)
OB/두산 베어스 등번호 35번
강병규 (1991~1994) 진필중(1995~2002) 박진철(2004)[1]
우리 히어로즈 등번호 39번
구단 창단[2] 진필중(2008) 전인환 (2009)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1기4. 해설자 커리어
4.1. 편파해설 논란
5. 지도자 2기6. 연도별 성적

1. 개요

OB-두산 베어스, KIA 타이거즈, LG 트윈스, 우리 히어로즈 소속의 투수. 전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별명으로는 진필패가 있다. 홍현우 - 진필중 - 마해영 - 박명환 - 이택근 - 정현욱 - 정상호로 이어지는 LG 트윈스 먹튀 산맥의 한 축.

150km/h를 넘나드는 강력하고 묵직한 속구가 주 무기로, 전성기 때만 해도 강력한 구위를 자랑했고 이 덕에 최고의 투수 중 하나로도 꼽혔다. 허나 계속된 혹사로 인해 구위를 잃어버리면서 몰락해 버린 비운의 투수다. 당대 비슷한 사례로는 같은 OB/두산에서 뛰었던 박명환이 있다. 다만 둘의 몰락에는 3년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LG 시절의 먹튀+삽질로 이미지가 크게 떨어졌지만, OB/두산에서 맞이했던 리즈 시절에는 오승환도 저리가라 할 정도의 특급 마무리였다. 김경원, 구대성, 선동열의 아성에 도전했던 몇 안 되는 선수. 이 당시 대항마로 유일한 마무리는 삼성의 임창용 정도가 있었다.[3] 야구에 만약은 없지만, 선발로만 계속 뛰었으면 혹은 1이닝 마무리로 철저히 관리받던 시절에 뛰었다면 좀 더 나은 업적을 나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선수다. 마무리로 뛴다는 선수가 선발로 등판하여 완투까지 하니... 철저히 분업화된 지금으로 보면 아무리 옛날이라도 상식 밖이다.

2. 선수 경력

2.1. OB/두산 베어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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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했던 OB 베어스 신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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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였던 두산 베어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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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후 홍성흔과 함께.

중앙대학교 시절에는 무명에 가까웠던 선수였다. 4년 간 거둔 승리가 고작 2승. 하지만 1995년 2차 지명에서 예상을 깨고 OB 베어스가 2차 2순위로 지명하여 계약금 6,000만 원에 입단했다. 사실 여기에는 비화가 있는데, 삼성 라이온즈에서 진필중을 관찰한 후 '2라운드에 뽑을 테니 실력을 숨기고 있으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진필중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OB 베어스가 기습적으로 2라운드에서 지명했다. 한편, 삼성이 진필중의 2라운드 이전에 1라운드에서 뽑은 선수는 동국대 포수 김영진(....). 그 이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OB 베어스에 입단한 후 김인식 체제에서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등판하며 활약했다. 특히 마무리 자리에서 묵직한 구위로 그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신인 시절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1995년 한국시리즈로, 3차전의 6이닝 1실점과 2승 3패로 뒤진 6차전 선발로 나와 완투승을 거두면서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촉망받는 선발 유망주가 된 진필중은 이듬해 191이닝, 13승을 거두며 선발 투수로 자리매김했고, 1997년에도 7승을 올렸다. 그런데 원래 OB 베어스의 마무리였던 김경원이 부상과 혹사로 1997년을 끝으로 내리막을 타자, 1998년 이후로 중무리 투수로 뛰게 되었다. 이후 마무리 투수로 전성기를 맞는다.

1998년 158 1/3이닝을 던지며 8승 19세이브, 평균자책점 2.33(4위)를 기록하며 OB의 극적인 4강 진출에 한몫했다. 1999년에도 114이닝, 16승, 36세이브를 적립하며 구원왕에 올랐고, 두산이 드림 리그 1위를 차지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때 임창용을 1포인트 차로 따돌리고 52 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해 구원왕을 차지했는데, 이 당시 기록한 52 세이브 포인트는 역대 1위이다.[4] 2000년에는 현대 유니콘스마무리 투수 위재영과 치열한 경쟁 끝에 5승, 42세이브를 올려 위재영을 3세이브 차로 따돌리고 2년 연속 구원왕을 거머쥐었다. 당시 42세이브는 1994년 정명원의 40세이브를 넘는 한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이었으며, 이 기록은 2006년 오승환의 47세이브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2000 시드니 올림픽에도 출전해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1년에는 이전보다는 다소 떨어지는 성적인 9승 23세이브 평균자책점 3.22를 기록했으나, 당시 약했던 두산 투수진에서 선발과 마무리 가리지 않고 등판하여 큰 힘이 되었고, 결국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을 당시의 투수도 그였다.

하지만 이 시기를 마지막으로 진필중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2.2. 메이저리그 포스팅 신청

진필중은 위의 성과에 힘입어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리고 2002년포스팅을 신청했다. 그러나 "저 선수는 3가지 구질을 던진다. 직구와 느린 직구, 더 느린 직구"[5] 응? 결국 스카우트들에게 50달러 등 반 장난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 실제 2002년 초에 신청했을 때는 무응찰이라는 굴욕적인 결과가 나왔고, 2002년 시즌 후 다시 포스팅을 신청했을 때는 포스팅 금액으로 25,000 달러(당시 KRW 3,000만 원)라는 굴욕적인 금액을 제시받았다. 이는 현격했던 한국프로야구메이저리그의 수준 차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진필중은 이미 전성기를 지난 시점이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153km/h까지 던진다던 진필중의 강속구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평균자책점은 3점대를 훌쩍 넘어갔다. 많은 세이브 갯수에 가려져 있었지만, 구속이 감소하며 자주 맞아 나가던 불안불안한 마무리 투수였다.

2.3. KIA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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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튀의 시작이었던KIA 타이거즈 시절.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결국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한 그는 2003년 1월 손혁, 김창희에 현금 8억 원을 얹어 당시 적극적으로 유명 선수들을 영입하던 KIA 타이거즈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이 트레이드 이후 진필중은 몰락하기 시작했고, 김창희는 새로운 인생이 꽃피는 계기가 되었다.[6]

KIA로 가서는 전성기의 구위를 찾지 못하고 4승 19세이브, 평균자책점 3.08로 이름값과 연봉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냈고,[7] '서울 연고 팀에서 뛰어야 한다'는 이유로 태업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먹튀로 까이게 된다. 가장 임팩트가 컸던 경기는 2003년 5월 27일, 1위 싸움 중이던 현대에 10:7로 앞선 9회 말에 등판해 아웃카운트 딱 하나밖에 못 잡고 5실점하며 10:12로 진 경기였다.진필중이 아닌 집필중[8] KIA 타이거즈는 이 경기에서 당시 '최다 점수차 역전패 허용' 기록을 세우고 말았으며[9] 이 기록을 내주면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KIA는 결국 반 게임 차로 1위를 놓치게 되었다. 그리고 반 게임 차로 1위를 차지한 팀은 현대 유니콘스였다. [10] 진필패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이 시기에 생겼다.

2.4. LG 트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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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먹튀로 각성해버린 LG 트윈스 시절.

결국 자신이 원하던 대로 2003 시즌 후 투수진 보강을 필요로 하던 LG 트윈스이순철 감독에게 러브콜을 받아 FA 대박을 터뜨리며 이적한다. 처음에 이순철 감독은 이상훈과 같이 더블 스토퍼로 기용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팀 분위기를 망친다는 이유로 이상훈양현석, 오승준을 상대로 SK 와이번스에 트레이드하고 진필중 단독으로 마무리를 맡게 된다.

그러나 2004 시즌 초반 똥줄 세이브를 몇 개 하다가 탈탈 털리고 마무리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본인의 요구에 따라 2005년에 선발로 전환했지만 선발로도 그다지 신통치 않았으며 결국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져 드러누웠다. 그 후에도 전혀 뛸 의욕을 보이지 않으며 구단과의 연봉 싸움만 일삼아서 LG 팬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그래도 2006 시즌에는 간만에 3점대 방어율을 올리며 괜찮게 해 줬다.[11][12] 하지만 그 해 LG는 최하위.

그러나 2006년 이후에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2007년 시즌이 끝나고 여러 선수들과 같이 방출당했다.

LG 시절 때에 화끈한 방화질과 함께 진필중만이 아닌 다른 선수들마저 같이 불놀이를 하는 덕분에, 타 팀 팬들은 이들을 묶어서 엘지의 방화신기라고 조롱했다. 멤버로는,

등이 있다. 물론 이후에 멤버들의 방출과 은퇴, 그리고 결정적으로 더 화끈하게 불질러 주는 유명 작가가 등장하고 난 이후로는 묻힌 별명이 되었다.

2.5. 우리 히어로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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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에서도 탈탈 털리던 우리 히어로즈 시절.

그리고 2008년 5월 우리 히어로즈신고선수로 이적했으나, 2군에서도 탈탈탈 털리다가[13] 한 달만에 신고선수 계약이 해지되어 다시 방출당했다.

그리고 2008년 말에 교통사고까지 당하면서, 선수 커리어는 완전히 끝나 버렸다.

3. 지도자 1기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도 열심히 재기를 노렸지만 결국 2009년 1월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한때 마추픽추로 유명했던 2009년 한민학교의 투수코치로 지도자로 첫 걸음을 내딛었다.

"투수코치 진필중"의 첫 작품으로는 포수에서 투수로 전향, 140km/h 중반대의 구속을 던지는 파워 피쳐로 변신하여 삼성 라이온즈2010년 2라운드 지명을 받은 우완투수 김현우를 꼽을 수 있다. 코치로 만들어낸 첫 선수의 잠재력을 봤을 때, 코치로서의 가능성을 기대해 봐도 될 듯했다.

2011년 11월 자로 경찰 야구단의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재미있게도 경찰 야구단의 전임 투수코치는 OB 시절의 선배인 김경원이었다. 김경원 코치가 두산 베어스의 투수코치로 옮기면서 진필중이 경찰 야구단의 투수코치로 들어가게 되었다.

4. 해설자 커리어

2013 시즌을 끝으로 코치직에서 물러난 후 2014 시즌에는 XTM에서 해설을 맡았고 베이스볼 워너B에도 출연했다. 2015년에는 SPOTV의 중계 방송에 해설로 참여했다.

4.1. 편파해설 논란

해설 수준은 그야말로 최악. 쉽게 말해 마해영의 LG 편파 버전이다. 거기에 본인의 커리어를 칭찬하느라 해설시간을 허비해서 그 수준은 심각했다. 결국 분노한 삼성 라이온즈 팬들이 마해영만 자르지 말고 진필중도 자르라고 워너B 게시판을 초토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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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현장
SPOTV 유튜브 채널에 XTM 해설이 나오면 마찬가지 반응인데, 모두들 분노했지만 그 중 한 사람은 20억 먹은 먹튀인데 저 같아도 편파해설 하지요.라고 비꼬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먹튀하고도 까기만 하는 다른 사람 보다는 양심적이다

똑같이 편파해설을 한 마해영 전 해설위원은 완전히 퇴출되었으나, 진필중은 2015년까지 해설위원을 했다.

5. 지도자 2기

2015시즌 후 염종석의 사퇴로 공석이 된 롯데 자이언츠의 드림팀(육성군, 3군) 투수코치로 선임됐다. 야구 팬들은 진필중의 해설을 안 듣게 됐다며 환호하는 중. 공교롭게도 염종석 전 코치는 진필중이 해설위원으로 있던 SPOTV에서 해설을 하게 됐다. 그리고 염종석 해설은...

2016년 8월 18일 코치진 개편으로 퓨처스(2군) 불펜투수로 올라왔다. 이 날 개편으로 크리스 옥스프링이 2군 코치에서 1군 투수코치로 올라오고, 주형광이 1군 투수코치에서 3군 투수코치로 보직 이동했다.

이후엔 양상문 체제로 재계약을 하지 않고 현장에 물려났으며 2019년 1월 7일부터 광진구 <Closer 35> 피칭트레이닝 센터로 오픈을 하였다고 한다. 블로그

6.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95OB 베어스 36 109⅓ 6 2 2 0 3.21 112 40 50
1996 32 191 13 10 4 0 3.11 186 47 69
1997 26 130⅔ 7 12 0 0 3.72 152 43 72
1998 61
(5위)
158⅓ 8 6 19
(5위)
0 2.33
(4위)
135 47 100
연도두산 베어스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99 73
(3위)
114 16
(4위)
6 36
(2위)
0 2.37 84 41 114
2000 59
(5위)
73 5 5 42
(1위)
0 2.34 64 25 61
2001 51 89⅓ 9 6 23
(1위[14])
0 3.22 87 41 88
2002 54 62⅓ 4 5 31
(1위)
0 3.47 60 19 58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2003KIA 타이거즈 46 64⅓ 4 4 19
(5위)
0 3.08 64 24 7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4 LG 트윈스 34 32⅔ 0 4 15 0 5.23 49 13 23
2005 13 51 3 7 0 0 5.82 58 28 27
2006 25 43⅓ 0 3 0 2 3.95 54 15 18
2007 1군 기록 없음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8 우리 히어로즈 1군 기록 없음
KBO 리그
통산(12시즌)
510 1119⅓ 75 70 191
(5위)
2 3.20 1105 383 751


[1] 심재학과 트레이드되어 기아에서 이적한 장신의 사이드암 투수다.[2] 현대 시절에는 유한준이 39번을 달았었다.[3] 그나마도 임창용2000년에 안식년을 갖고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선발로 전향했었다.[4] 참고로 일본프로야구 시즌 최다 세이브 포인트가 1998년 사사키 카즈히로의 46SP다. 이건 정말 엄청나다고밖에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고작 1개 차로 구원왕에서 밀린 임창용도..[5] 원래 1950~1960년대에 뛰었던 투수 Stu Miller에 대해 동료 투수 Milt Pappas가 한 얘기이다.[6] 참고로 이 시절 KIA 단장이 정재공이었는데, 그가 영입한 유명 선수만 봐도 이강철(트레이드), 박재홍(트레이드), 진필중(트레이드), 최향남(FA), 조규제(FA), 마해영(FA), 심재학(트레이드)인데 이 선수들 중 이강철을 빼면 하나같이 폭망했다. 이 선수들을 데려오겠다고 유망주인 정성훈을 날리고, 외야 수비 하나는 최고였던 김창희, 중심 타자로 가치가 있는 신동주, 쓸 만한 중간계투 박진철을 날렸고, 이 선수들에게 FA, 고액 연봉, 트레이드 머니로 쓴 돈만해도 상당하다. 여러모로 돈이 아까웠다.정재공 엥간히 말아먹어라[7] 겉으로는 준수해보일지 몰라도 숱한 분식회계와 전반기에만 8블론이라는 불쇼를 펼치면서 후반기 KIA는 사실상 이강철-신용운에 의존하는 게임을 해야만 했다.[8] 이 경기에서 끝내기 홈런을 친 선수는 바로 두산에서 한솥밥을 먹던 후배인 심정수였다.[9] 기존 기록은 8점차였지만 10:1에서 역전패를 당해 9점차 역전 경기를 써 버렸다. 하지만 2013년 508 대첩이 등장하면서 기록이 깨졌다.[10] 여담으로 이날 상대 팀 선발이었던 정민태는 패전을 면하면서 연승을 이어갈 수 있었다.[11] 우규민이 1점대 방어율을 찍고 김민기와 경헌호까지 3점대 방어율을 찍었다. 그리고 심수창도 10승을 찍었다.[12] 물론 2006 시즌이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인 건 감안해야 한다.[13] 2군 6경기 6⅔이닝 평균자책점 8.10.[14] 세이브 숫자로는 1위였으나, 당시 세이브왕의 기준은 세이브+승수의 개념인 세이브포인트 제도였고, 신윤호에 비해 승수가 밀리면서 세이브 1위에도 세이브왕을 수상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