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14 07:18:38

주형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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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11회말 3연속 삼진을 잡으며 경기를 끝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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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투수코치
롯데 자이언츠 No.76
주형광(朱炯光 / Hyung-Kwang Joo)
생년월일 1976년 3월 1일[1][2]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부산광역시 수영구
학력 수영초 - 부산중[3] - 부산고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4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94~2007)
지도자 롯데 자이언츠 1군 불펜코치 (2009~2010)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11~2012)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2013)
롯데 자이언츠 1군 불펜코치 (2014)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14)
롯데 자이언츠 육성군 투수코치 (2015)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15~2016)
롯데 자이언츠 3군 투수코치 (2016~2017)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2018)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18~)
1995년 한국프로야구 플레이오프 MVP
주형광(롯데 자이언츠) 최창호(현대 유니콘스)
1996년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이상훈(LG 트윈스) 구대성(한화 이글스)
주형광(롯데 자이언츠)
김현욱(쌍방울 레이더스)
1996년 한국프로야구 탈삼진왕
이대진(해태 타이거즈) 주형광(롯데 자이언츠) 정민철(한화 이글스)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8번
김종석(1993) 주형광(1994-2006) 장원준(2007~2011)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7번
조정훈(2005-2006) 주형광(2007) 조정훈(2008-2010)
보유 기록
최연소 세이브 만 18세 1개월 14일[4]
최연소 승리 만 18세 1개월 18일[5]
최연소 완투승 만 18세 1개월 18일[6]
최연소 완봉승 만 18세 3개월 7일[7]

1. 소개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시절
3. 지도자 경력4. 연도별 성적

1. 소개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선수이자 現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코치.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부산고에 입학해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입학 당시 3학년 염종석, 2학년 손민한, 1학년 주형광은 부산고 역대 최강의 트로이카로 꼽힌다.[8] 손민한이 3학년 시절[9] 부상으로 인해서 실질적으로 2학년때부터 에이스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때 혹사 때문에 팔꿈치 이상이 빨리 온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고 재학 시절 당대 경북고 좌완 에이스였던 이승엽을 상대로 홈런을 치기도 하였다. 뛰어난 이닝소화 능력과 더불어, 고등학교 선수 기준으로는 수준급의 완급 조절능력도 있어서 꾀돌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92년 대통령배우승, 황금사자기 준우승, 1993년 봉황대기 우승을 이끌어 내며 당대 최고의 고교 좌완으로 손꼽혔으며 이러한 실력 때문에 프로와 대학에서 스카웃 경쟁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동국대학교 측에서 입학하면 고교 동기들도 같이 입학시켜주겠다고 제안, 결국 동국대학교 입학을 선택하고 가등록까지 마쳤다. 그런데 이때 롯데가 당대 신인 최다금액을 주겠다며 나섰고 주형광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 사건 당시, 이미 대학에 가등록을 해놓은 선수에게 스카웃 제안을 한 롯데와 이를 받아들인 주형광에게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 롯데에서는 고졸 신인 역대 최대 금액을 제시하기 위해 LG와 입단계약을 맺은 김재현의 계약금 발표시기보다 늦게 발표하려고 했는데 LG측에서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신인 계약 발표가 늦어지는 헤프닝이 있기도 했다. 결국 주형광이 계약금 9,200만원과 연봉 1,200만원을 합쳐서 1억 400만원을 받아 계약금 9,100만원으로 총액 1억 300만원을 받은 김재현을 100만원 차이로 따돌리고 당대 고졸 신인 최고 몸값을 기록하게 되었다.[10][11]

2.2. 프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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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꽤 커보인다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0220000046957.jpg
(출처 : 포토로)

1994년에 데뷔했으며 고졸신인 역대 최초로 1억 이상의 몸값을 받고 입단했다. 정확히는 계약금이 9천 2백만원이었고 연봉 1,200만원을 합쳐 1억을 돌파한 것이긴 했지만 저 9천 2백만원의 계약금도 당시로서 고졸신인 역사상 최고액이었다. 데뷔전은 4월 13일 사직구장에서 OB 베어스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 그러나 이 경기에서 3이닝동안 5피안타 3볼넷 5실점으로 난타를 당해 패전투수가 되면서 역시 프로의 벽은 높은건가 라는 인식도 있었으나 다음 경기에서 구원등판해 깔끔하게 세이브를 따내며 우려를 불식. 뒤이은 세 번째 등판이자 프로 두 번째 선발등판인 한화전에서 9이닝 2피안타 9탈삼진 1실점(비자책)이라는 엄청난 피칭으로 완투승을 따내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인 시즌은 11승 5패 1세이브 3.04의 평균자책점으로 고졸 신인으로서는 엄청난 호성적을 올렸지만, 신인왕은 아쉽게도 유지현이 차지한다.[12]

2년차인 1995년에는 200이닝을 넘게 소화 하며 10승 7패 평균자책 3.05를 기록했으며, 특히 LG와의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하며 롯데를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특히 시리즈를 끝낸 6차전의 1피안타 무사사구 1:0 완봉승은 그 백미.[13]

3년차인 1996년에는 18승 7패 1세이브 3.36의 성적을 올렸으며, 216.2이닝을 던지며(볼넷 38개/탈삼진 221개)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석권한다.[14] 그러나 MVP는 아쉽게도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한 구대성이 가져간다.[15][16]

3년차를 마치고 현역 입대를 해서 1997년은 전력 외 상태였으나 신장 이상으로 입대한 지 얼마 뒤에 의병 제대 판정. 군입대 때문에 동계 훈련을 하지 못한 데다가 아마 때의 혹사와 더불어 지난 3년간 600이닝을 넘게 했던 투구, 심지어 의병 제대까지 받을 정도로 만신창이였던 몸 상태임을 감안하면 지금 같으면 당연히 쉬게 하며 선수를 보호했겠지만[17], 분업 야구가 조금씩 정착되어가던 1990년대 후반까지도 프로야구에 있어서 선수 보호에 관한 의식은 지금보다 현저히 낮았다. 주형광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즌 초반부터 꼴찌인 팀을 구하기 위해 중반부터 투입되었고 면도삭발까지 하면서 투혼을 불살랐지만 131이닝 6승 13패 3세이브 5.88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으며 팀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시즌의 휴식 대신 무리한 출장은 결국 몇 년 뒤에 탈이 나면서 커리어를 좀먹게 된다. 만약 이 시즌에 관리를 했었다면 이후의 부상도 없었을지 모른다.[18]

이듬해 절치부심하며 1998년1999년 2년 연속으로 200이닝 가까운 투구에 두자리 승수를 올렸고, 특히 1999년 플레이오프한국시리즈에서 고군분투하며 맹활약을 펼쳤다. 2000년 시즌에는 10승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그 때가 고작 만 24세. 그때까지 그가 쌓아놓은 누적스탯은 77승에 1200이닝 1천탈삼진 돌파. 2000시즌 종료 후 일본 진출을 꾀했으며 구단에서도 적극적으로 밀어줬고 자매구단인 치바 롯데 마린스로 2년 임대료 1억엔에 연봉 7천만엔의 구체적인 조건 이야기까지 나오며 이적이 확정되나 싶었으나 막판에 협상이 틀어지는 바람에 일본프로야구 진출에 실패한다.[19]

결국, 2001년에 팔꿈치가 탈이 나고 말았다. 그것도 시즌 개막하고 열흘도 안된 시점에서 2경기 등판하고 팔꿈치 통증으로 재활군으로 내려갔다. 휴식과 재활을 병행하며 8월부터 다시 공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복귀를 타진했으나 이 과정에서 인대가 완전히 파열되어 결국 시즌 아웃.[20][21] 시즌 후 토미 존 서저리를 받게 된다. 안타깝게도 수술은 결과적으로 실패였고 이는 최악의 토미 존 서저리 실패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시기부터 주형광은 길고긴 내리막길을 타게된다.[22]

1년 가까운 재활 끝에 2002년 시즌 막바지에 한타자씩만 상대하는 원 포인트 릴리프로 7경기를 시범 등판했지만 이미 그는 예전의 주형광이 아니었다. 2003년부터는 다시 풀시즌을 소화하게 되었지만 그는 더 이상 선발투수가 아닌 짧은 이닝을 던지는 중간계투가 되어 있었다. 62경기에 등판해 74와 2/3이닝을 소화하며 13홀드를 기록했지만 승리 없이 9패만 떠안으며 결국 3년 간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했다.[23]

2004년은 주형광이 마지막으로 불꽃을 태웠던 시기. 겨울동안 착실히 준비해 4년만에 다시 선발 로테이션에 복귀했으며 전성기 못지 않은 활약으로 시즌 초 마무리를 맡았던 손민한[24]을 대신해 팀의 선발 에이스로 활약했다. 무엇보다 구위가 다시 전성기 시절과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왔으며 신임 양상문 감독도 주형광의 부상 전력을 고려해 등판간격과 투구수를 철저하게 관리해주면서 재기에 성공하나 싶었지만... 6월 1일 대구구장에서 배영수와 맞대결에서 7과 2/3이닝동안 6안타 2실점(1자책)으로 호투하던 와중 다시 팔꿈치 부상을 입게 되고 그렇게 선발 투수로서의 주형광은 끝이 나고 말았다. 주형광 본인도 훗날 회고하길 "내 공은 그 때 완전히 죽었다" 라고 했을 정도. 바로 시즌 아웃되어 잔여시즌을 출장하지 못했으며, 토미 존 서저리를 다시 한 번 받는 게 좋겠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결국 주형광은 수술 대신 재활을 택했다.[25]

이듬해인 2005년 6경기에 선발 등판하며 마지막 몸부림을 쳤지만 전술했듯이 이후 다시는 선발로 재기하지 못했다. 재부상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흔히 하지 않는 방식이라는 힘줄을 쇠못으로 고정하는 형태의 수술을 받은 것도 큰 원인으로 꼽는다. 재활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복귀한 것도 부상 재발의 큰 원인.[26] 그 뒤로 3년간 좌완 중간계투원 포인트 릴리프 등으로만 뛰었고 가득염과 같이 불만 지르다가 2007년을 끝으로 결국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시점의 나이는 불과 32세.

롯데 자이언츠가 얼마나 투수를 막 굴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 2016년까지 현역으로 활약한 손민한보다 1살 적고, 2017년 까지 현역에 있던 이승엽, 애니콜임창용과 동갑이다.[27][28] 24세 시즌(2000년)까지 거둔 승수는 77승.[29] 만약 제대로 된 팀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았다면 지금쯤 현역으로(기복 등을 고려해도) 140-150승쯤 달성했거나 더 나아가서 정민철의 161승을 넘어섰을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할 정도.[30][31]

투구 스타일은 정교한 제구력을 가지고 승부하는 피네스 피처에 가까웠다.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두 구종만을 주로 던지는 투피쳐였으며,[32][33] 특히 슬라이더가 일품이었는데 직구와 슬라이더의 구속차가 크지 않았고, 우타자를 상대한 프론트도어 슬라이더가 절묘했다.

공이 가벼워서 홈런수가 많다는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충분히 메우고 남을만한 칼날같은 제구력과 날카로운 볼끝을 자랑했는데 만화에나 나올법한 3분할 투구를 했던 투수였다. 이 투구스타일 때문에 삼진을 굉장히 잘 잡아내는 타입. 신인 첫 해부터 7년차까지 정상적으로 시즌을 소화했을 때 늘 탈삼진 부문 순위권에 있었으며 특히 1996년에는 221개의 탈삼진으로 현재까지도 최동원의 223개에 이은 역대 단일시즌 탈삼진 랭킹 2위 기록을 보유중.(1, 2위가 모두 롯데 선수)

1990년대 롯데 자이언츠의 명승부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투수며[34] 걸출한 좌완 투수가 많이 없는 롯데 팬들에게는 아직도 안타깝게 단명한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3월 1일생이지만, 1년 일찍 학교를 다닌 덕에 투수 부문의 최연소 기록들을 대부분 그가 보유하고 있다.(최연소 승리, 최연소 완투승[35], 최연소 완봉승, 최연소 세이브.)

그가 쓰던 등번호 28번은 현역 마지막 해였던 2007년 부산고 후배 좌완 투수 장원준에게 물려 주었다.(그 해 주형광은 37번을 달았다.)[36]

프로 입단 전까지 부산 토박이였던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 윤성환이 가장 좋아했던 롯데 선수였다고 한다.[37]

3. 지도자 경력

일본으로 건너가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연수를 받고 귀국한 그는 롯데 자이언츠의 재활코치를 담당하다가 2011년에 롯데의 감독진과 코치진이 전부 물갈이되면서 투수코치가 되었다.[38][39] 초기에는 일단 별로 좋은 소리를 못 들었는데, 부상 이후 재활 훈련에 매진하지 않았고 선수 말년에 미니홈피 관리에 매진하며 상당히 게을렀던 데다 코치 선임도 겨우 9개월 연수를 받고 바로 시행된 것이라 믿음직한 인상이 들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주형광과 가득염이 투수코치로 부임한 후 롯데 투수진이 점차 안정세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평가가 나아지고 있는 편. 주형광이 투수코치를 맡게 된 이후로 금지어가 박살내놓은 불펜은 투수 영입 등을 감안하더라도 정상 수준을 넘어 리그 탑급이 되었으며, 특히 2012년 포스트시즌에서는 (포시 한정)원수같았던 두산을 불펜의 힘으로 꺾자 팬덤 내에서 지지여론은 더더욱 굳건해졌다. 2012 시즌 후 김시진 감독이 부임하면서 정민태 때문에 2군 투수코치로 보직 이동되자, 팬들이 난리쳤을 정도.

게다가 그렇게 할 수 없이 2군으로 밀려나 처음 맞이하게 된 첫 시즌인 2013년에는 남부리그 팀자책 1위를 만드는 등, 뚜렷한 성과를 하나 둘 계속해서 만들어 내면서 다시 한번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40]

근데 희한한 것은 주형광 코치의 성과, 능력에 대해 자세하게 취재해 놓은 기사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팬들 사이에선 '도대체 뭘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능력은 확실히 있는 코치'(...)의 이미지이다.

김시진 2년차부터는 1군 불펜 투수코치가 되었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21일 팀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육성군으로 내려간 정민태의 후임으로 1군 메인 투수코치가 되었다. 2014 시즌 후 이종운이 감독이 되자, 다시 육성군으로 내려갔다. 새 1군 투코인 염종석이 철밥통 소리를 듣는 반면 주형광의 능력이 좋은 편이라 팬들의 반발이 어느 정도 있는 편.

결국 전반기를 마치고 1군으로 다시 올라왔다. 염종석은 육성군행..... 이쯤되면 육성군이 아니라 집으로 가야할 것 같은데 드디어 집에 갔다!
그리고 주형광이 1군으로 합류하자 마자 귀신같이 선발진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9월에는 팀 ERA가 2점대, 특히 불펜ERA가 1점대를 기록하고 있다. 뭐?

그리고 2015년 9월 22일에 드디어 그의 업적을 다룬 기사가 났다. 요약하면 누구랑은 달리 경기 상황과 이닝마다 올릴 투수를 세분화 시킨 덕이라고 한다.

2016년에는 외야수 출신 감독인 조원우감독에게 투수교체 권한을 일임받았는데... 어째 전과는 다르게 좌우놀이와 한박자 어긋나는 투수교체, 김성배, 정대현같은 퇴물 투수들을 필승조로 쓰는등,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고 있다. 더군다나 5월 27~29일에 한화에게 3연패를 당하면서 더욱 장종훈 타격코치와 더불어 대차게 까이고 있다. 그냥 3연패도 아니고, 02롯데 수준의 한화에게 진게 컸다. 이닝을 쪼개며 하는 좌우놀이에, 툭하면 투수진 출석체크등 다방면에서 롯데팬들에게 까이고 있다. 당장에 선발에서 체력부담으로 내려왔다고 한 박진형을 3연투를 포함 왕창 부려먹는 모습을 보이며 언행불일치의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크게 지는 상황이나 이기는 상황에서 투수진을 이닝을 나눠가며 쓰는 장면은 정말.. 심지어, 좌완 핵폭탄좌타자 상대 원포인트 투수로 기용하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8월 16일 고척 넥센과의 경기에서는 선발이었던 린드블럼이 5이닝동안 111개의 많은 투구수를 기록하고, 3실점(2자책점)을 기록하고 올라온 투수는 홍성민 그 이후에는 이명우-이정민-김성재[41] 미칠듯한 좌우놀이를 보여줬고, 이 투수들 중에 실점을 하지 않은 투수는 이명우였다. 특히 8회말에 김성재가 데뷔 첫번째 등판을 치루고 있을때, 서건창에게 어려운 승부를 하며 카운트가 몰리는 상황이 왔을때 덕아웃을 잡아준 장면에서 한숨을 쉬었다. 이보세요? 많이 갑갑하다는 의미에서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데뷔 첫번째 등판이었고, 3명의 타자에게 삼진 2개와 볼넷 1개를 허용했을뿐 나쁜 투구를 하지는 않고 있는 중이었다. 김하성에게 홈런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8월 17일 고척 넥센과의 경기에서 선발이었던 박진형이 4 1/3이닝 6실점으로 강판당한 이후 올라온 투수는 홍성민[42] 그 이후 고질적인 문제인 이닝 쪼개기와 좌우놀이를 시전했다. 다행이라 해야할지 팀은 7실점 이후 더 이상 실점을 하지는 않았지만, 김유영-박시영-이정민을 등판시켰다. 이렇게 마구잡이식으로 등판시키는 모습을 보면, 패전조-승리조라는 구별은 있는 것인지도 궁금해지고 있다.[43]

승부처를 사랑하는 감독에게 투수쪽을 일임받은 이후, 정말 갈피를 못잡고 엉망진창의 투수기용을 보이고 있다. 작년에 염종석이 있을땐 이 사람을 찾게 됐었는데, 오히려 1군을 제대로 맡기고 보니, 더하면 더했지 덜한 모습은 아닌거 같다. 특히 정민태 코치와 김시진 감독이 미친듯이 하던 좌우놀이를 자기가 하고 있으니 더더욱. 차라리 크리스 옥스프링 2군 투수코치나, 현재 3군에 있는 진필중코치를 올려서 하는게 현재 투수를 기용하는 장면보다 훨씬 나은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2012년에 양떼불펜을 만들었을땐 가득염코치 덕분이었나 보다.[44] 더더구나 한 번 굴리기 시작한 투수인 홍성민이나 다른 젊은 좌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을 던질때 경기마저 던질 기세인 이명우를 아직도 기용하는 모습은 왜인지 아직도 의문부호가 붙는다(결국 이명우는 8월 17일자로 2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8월 18일 자로 드림팀(3군)으로 내려갔다! 그 대신 올라온 코치가 옥병장 2군 투수코치이다. 현재 2군 코치인 크리스 옥스프링, 진필중과 협력하여 젊은 투수들을 키워내고, 부진한 1군 투수들을 고쳐서 다시 올려보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후 2018년 7월 21일 김원형 코치에게 1군 투수코치를 넘겨받고 1군에 콜업되었다. 김원형은 수석코치만 담당한다. 그리고 8월 달 들어 갑자기 롯데가 정상적인 투수교체 타이밍을 보여주고 팀도 성적이 조금씩 올라가면서 주형광 코치의 평가는 2016년 전 형광매직 수준까지 회복되었다. 9월 30일 수원 원정경기에서는 5회말 박세웅이 제구난조로 볼질을 하자 교체하려고 조석두에게 물어보았지만 거절당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투수교체 권한은 온전히 석두의 권한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보기).

양상문 감독이 부임한 19시즌에도 메인 투수코치로 남게되었으나 양상문 감독 스타일상 투수교체는 직접 관여하는게 유력해서 투수 코칭에만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4. 연도별 성적

  • 진한 글씨는 리그 5위내 기록이고, 붉은 글씨는 1위 기록이다.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1994 롯데 28 186⅔ 11 5 1 0 0.688 3.04 147 15 66 142
(4위)
75 63
1995 30 200⅓
(3위)
10 7 0 0 0.588 3.05 170 18 56 152
(4위)
73 6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1996 롯데 30 216⅔
(2위)
18
(1위)
7 1 0 0.720 3.36 196 20 47 221[45]
(1위)
86 81
1997 32 131⅔ 6 13 3 0 0.316 5.88 138 25 63 84 91 86
1998 31 183⅓
(4위)
11 7 1 0 0.611 3.63 179 17 50 148 90 74
1999 31 190
(3위)
13 12 1 0 0.520 3.98 190 25 47 177
(3위)
88 84
2000 26 149⅔ 8 6 0 0 0.571 3.49 136 18 52 127 60 58
2001 2 3 0 1 0 0 0.000 15.00 6 3 4 2 6 5
2002 7 1⅔ 0 1 0 1 0.000 16.20 3 0 0 1 3 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2003 롯데 62 74⅔ 0 9 1 13
(4위)
0.000 4.58 85 13 29 49 42 38
2004 11 63⅓ 4 4 0 0 0.500 3.41 53 8 23 45 26 24
2005 11 34⅓ 3 2 0 0 0.600 6.03 39 7 15 23 24 23
2006 52 67⅓ 3 6 1 7 0.333 4.14 82 6 18 26 38 31
2007 33 21⅔ 0 2 0 1 0.000 4.15 24 3 6 12 10 10
KBO 통산(14시즌) 386 1524⅓ 87 82 9 22 0.515 3.83 1448 178 476 1209 712 648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4 4완투 1완봉
1995 5완투 0완봉
1996 10완투
(2위)
1완봉
1997 3완투 0완봉
1998 6완투
(1위)
1완봉
1999 4완투 0완봉
통산 33완투 3완봉


[1] 실제 생일은 3월 1일생이지만 음력 생일인 1976년 2월 1일로 호적에 오르는 바람에 빠른생일로 19세인 1994년에 프로에 입단했다. 그 해 해태에 입단한 이호준도 이런 케이스이다.[2] 손민한보다도 어리다![3] 옛 초량중학교(염종석과 같은 학교.)[4] 1994년 4월 15일 LG전[5] 1994년 4월 19일 한화전[6] 1994년 4월 19일 한화전[7] 1994년 6월 8일 삼성전[8] 그리고 포수는 진갑용 ㄷㄷㄷ ㅎㄱ![9] 그 당시 손민한은 몸쪽 볼을 잘 못던져서 주형광을 실질적인 에이스로 보는 시각이 꽤 있었다.[10] 당시 롯데는 신인들에게는 후하게 쳐줬다. 주형광 이전 대졸신인인 김경환에게는 1억원을 지불하기도 했고 손민한차명주가 입단했을때도 상당히 좋은 대우를 받고 왔다.[11] 이때 신인들 몸값이 억원이상 받아가자 몸값 거품이라는 목소리가 야구계 안밖에서나왔다.[12] 신인최초 20-20을 했던 김재현이 묻힐 정도였으니.....(김재현은 0.289-21HR-21SB 이었지만 유지현은 0.305-15HR-51SB을 찍으며 확실히 신인왕에 부족함이 없는 활약을 보였다) 거짓말 하지 않고 92년도 부터 98년도 까지 리그 내에서 걸출한 신인들이 많이 나왔던 시기였다.[13] 그 안타도 빗맞은 안타였고, 바로 다음타자를 병살로 잡아내며 정확히 27타자를 상대했다.[14] 한 시즌 221 탈삼진은 대선배 최동원에 이은 역대 2위 기록이다.[15] 이해 구대성 말고도 최초의 30-30인 박재홍도 MVP후보에 올랐으나, 당시 분위기는 "신인왕,MVP 동시석권은 안된다" 였던지라 MVP는 구대성이 받는다. 그럼 2006년의 류현진은? 아마 이 이후로 신인왕, MVP 동시석권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카더라[16] 주형광이 이 시기에 순수 선발로 뛰었다면, 구대성은 강병철에게 선발,구원 안가리고 굴려졌다.[17] 이러한 상태는 92년 우승의 주역이던 염종석의 재활 주장 했던 강병철 감독이 추진했지만 역시 말안듣는 구단 답게 주형광도 이렇게 무너질지 누가 알았을까?[18] 이 해에 팀내 프랜차이즈가 확실했던 발빠른 한 선수를 인천의 모 구단에게 건내주며, 실상 이 때 부터 롯데의 시즌이 꼬이기 시작했다.[19] 동년도에 구대성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진출한다.[20] 주형광의 이탈로 김명성 감독이 마음 고생이 심했고 이것을 주변 지인들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명성 감독 장례식장에 주형광이 갔을때 한 지인이 "너 때문에 감독님 돌아가셨다" 란 말을 듣고 죄책감에 많이 시달렸다고 한다[21] 야만없이지만 만일 주형광이 시즌 초반에 부상당하지 않았더라면 2001 시즌에 최하위를 안 했을수도 있다. 뭐... 2001 시즌은 감독의 급사와 4번타자가 경기 중 타팀 투수죽빵때려그 해 남은 잔여경기 출전정지를 먹는악재가 겹친것도 한몫했지만....그런데 호세 빠지고 1군 올라온 선수가 훗날 롯데의 대스타로 성장하는 내야수라는 게 함정 그리고, 두 사람은 2006년 함께 팀 타선을 이끄지만, 투수들이 병신이라 망했었다.[22] 반대 사례 중에 배영수? 정도 성공한 사례이지만, 배영수는 2년 재활 중 1년 쉬고 1년 뒤에 개폭망 하더니 그 다음 해 조금씩 부활을 하고 결국, 2년 뒤 10승 투수로 돌아와 어느정도 조짐을 보여줬다. 비슷한 실폐 사례는 전병두가 있다. 전병두 항목 참고.[23] 여담으로 03시즌 10선발-52구원등판으로 10-40 클럽에 들어가있다.[24] 손민한이 당시 시즌 초 마무리 투수로 잠시 알바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25] 토미 존 서저리를 3번씩이나 받은 권오준이 여러번 재기하는데 성공하는 걸 생각하면 수술을 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다만 말년에 자포자기하고 재활을 포기한 걸 보면 또 모르겠다. 현재, 2019년 5월이 지난 권오준은 아직 현역으로도 뛰고 있다.[26] 본인은 이 점을 가장 아쉬워한다고.[27] 다만 주형광의 경우는 빠른생일이라 학번으로 따지면 94학번이다. 그걸 감안해 한 살 올려 33세라고 쳐도 너무 일찍 은퇴한 건 확실하다.[28] 동기인 박지철이 그보다 롱런했으며(2009년 완전 은퇴), 또 다른 동기인 임경완이 40세까지 현역(2015년 까지 한화 이글스)으로 활동하는 걸 생각해보면 아쉬울 따름.[29] 류현진이 2012년 25세 시즌까지 달성한 승수가 98승이다.[30] 사실 몸이 안 좋을 시기에 군에 입대를 했는데 하필 군에서도 면제 판정이 나와서 휴식 기간이 없이 바로 투구를 시작했다. 투수에 따라 군 복무 기간은 휴식, 재활 기간(예로 SK의 채병용)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럴 기회가 전혀 없었다. 정말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 된다.[31] 손민한은 물론이요 2년 선배인 가득염보다도 빨리 은퇴할 줄 아무도 몰랐으니. 거기에 혹사로 인해 주형광보다도 더 많은 재활,수술을 거친 염종석마저도 주형광보다 1년 더 뛰었다. 허나, 염종석 마저 가득염 보다 일찍 은퇴한다.[32] 이는 메이저리그의 투수인 톰 글래빈과 비슷하다.[33] 커브나 포크같은 종방향 변화구가 없었다. 그런데도 탈삼진 개수가 무시무시하다.[34] 1995년 플레이오프 6차전 1피안타 완봉승, 1999년 플레이오프 마지막 3타자 연속삼진 등등. 사실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주형광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나마 제일 잘막은 게 저 플레이오프 7차전.[35] 첫 승리가 완투승이었다.[36] 하지만, 현재는 두산 베어스 선수이기 때문에 장원준 이 후 김원중, 고원준, 김유영(야구선수), 정대현, 안태경이 사용하였고 돌고 돌아 현재 2019년의 등번호 주인은 장시환이 쓰고 있다.[37] 윤성환부산상고 재학 시절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의 주형광을 직관으로 보며 '저렇게 멋진 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입단한 팀은 그 해 맞붙은 상대 팀이라는 것....[38] 로이스터 감독이 잘리면서 박영태, 양상문, 한문연같은 무능한 코치들이 이 때 다 잘렸다. 야! 신난다! 이제 공필성만 잘리면 된다, 아니 2014 시즌 끝나고 불명예스럽게 나갔다.[39] 전 버전에는 이강돈, 양용모도 해임됐다고 기술했으나, 정작 이 둘은 2012 시즌 끝나고 윤학길, 조원우 등과 같이 손잡고 나갔다.[40] 뭐 진지하게 따지자면 2군 방어율은 큰 의미는 없다. 삼성같은 구단이 매년 1군감 투수가 한두명이라도 계속해서 나오는 것은 2군에서도 팀 방어율이 좋기 때문은 아니다.[41] 데뷔 첫번째 등판이었다. 데뷔전이었다는 이야기.[42] 이 근래에 홍성민이 계속 2번째 내지 3번째 투수로 올라와서 많이 구르고 있는 중이다. 작년에 어떤 분에 의해서 부상에서 돌아온 이후 릴리스 포인트도 높히면서 부활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작년만큼의 위력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작년에 비해서 더 안 좋은 상태인 것 같아 보인다.[43] 윤길현 - 손승락이 7-8월들어 많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승리조라고 하더라도 크게 믿음이 안 가는 부분이 있는것만은 사실이다.[44] 실제로 양승호 감독 재임기간(2011~2012) 선발진의 상황은 불펜진에 비해 안습 그 자체였다.[45] 단일시즌 탈삼진 2위 기록, 1위는 최동원의 223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