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혁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KBO 리그 올스타 | |||
1995 | 1996 | 1998 |
임수혁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0번 | ||||
이요섭 (1993) | → | <colcolor=#fff> 임수혁 (1994~2000) | → | 최준석 (2005~2006.5.16.) | |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0번 | |||||
최영환 (2016) | → | 임수혁 | → | 임시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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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1e42> 롯데 자이언츠 No.20 | |||
<colcolor=#fff> 임수혁 任秀爀 | Im Soo-Hyeok | |||
출생 | 1969년 6월 17일 |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現 서울특별시 서초구 지역) | |||
사망 | 2010년 2월 7일 (향년 40세) | ||
서울특별시 강동구 길동 강동성심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서울방배국민학교 (졸업) 강남중학교 (졸업) 서울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 88 / 학사[1]) | ||
포지션 | 포수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 입단 | 1994년 2차 1라운드 (전체 4번, 롯데) | ||
소속팀 | 롯데 자이언츠 (1994~2000)[3] | ||
병역 | 상무 피닉스 야구단 (1992~1993) | ||
정보 더 보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41e42><colcolor=#fff> 본관 | 풍천 임씨[4] | |
가족 | 배우자, 슬하 1남 1녀 | ||
종교 |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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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선수 시절 포지션은 포수로, 심재원-한문연-김선일-강성우-임수혁-최기문-강민호로 이어지는 롯데 자이언츠 포수 계보의 한 축이었다.
경기 중 심정지가 일어나 쓰러진 충격적인 사건의 당사자로서 경기장 내 의료진 배치 의무화, 경기장 내 앰뷸런스 배치 의무화 등 여러 프로 스포츠 연맹의 의료 시스템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하나 안타깝게도 임수혁 본인은 골든아워를 놓쳐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2루 주자가 되었다.
2. 선수 경력
2.1. 데뷔 이전
1969년 6월 17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지금의 서초구 지역)에서 아버지 임윤빈(任胤彬, 1937. 9. 5 ~ )[5]과 어머니 진주 강씨 강경애(姜敬愛, 1939. 9. 8 ~ )[6]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서울방배국민학교, 서울 강남중학교, 서울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경영학과(88학번)를 졸업한 뒤 1992년 LG 트윈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입단을 거절하고[7] 상무에서 군 복무를 한 후, 1994년 롯데 자이언츠의 2차 1순위 지명을 다시 받아 프로에 데뷔하였다.
2.2. 롯데 자이언츠 시절
공격형 포수였던 그는 당시 롯데 주전 포수였던 강성우에 비해 수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입단 첫 해인 1994년에는 지명타자와 대타로 주로 활용되었으며, 시즌 동안 48타석밖에 기회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95년부터는 롯데의 고질적인 거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주전 포수로 나섰으며, 무려 15홈런을 때려내며 1995년 입단한 마해영과 총 33개의 홈런을 합작하여 1982년 김용철-김용희의 용용포에 이은 마림포[8]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당시 롯데의 다른 포수들인 김선일, 강성우는 수비력은 정상급이지만 타격은 많이 아쉬웠으며, 특히 박정태, 김응국, 김민호로 대표되던 롯데의 중심타선이 단타위주의 선수들이었기에 그의 부드러운 장거리포는 무척이나 반가운 옵션이었다. 특히 1996년에는 이전해보다 타격에서 훨씬 진일보한 모습을 보였으며, 113경기에 출장하며 3할 1푼 타율에 11홈런을 기록하여 롯데의 안방마님 자리를 공고히 차지했다.표면상으로 10개 중반대의 홈런은 그리 크지 않아보이지만, 임수혁의 전성기인 95년과 96년은 투고타저가 매우 극심한 시기라 타자들의 기록이 전체적으로 잘 나오지 않던 시기였다. 1995년 홈런왕인 OB 베어스의 김상호의 홈런 갯수는 겨우 25개에 불과하며, 프로야구 원년부터 1995년까지 30홈런 이상을 친 홈런왕이 단 3회[9]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임수혁이 어느 정도의 거포였는지 알 수 있다. 강민호 등장 이전 롯데 자이언츠 최초의 공격형 포수였던 셈. 이를 반영하듯 스탯티즈 기준 95년 임수혁의 wRC+는 122.0에 96년은 무려 143.2이고, 98년에도 기록이 좀 떨어졌다지만 380타석 가까이를 소화하며 9홈런에 wRC+ 97.1을 찍었다. 전성기 시절인 95년과 96년은 정말 중심타선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공격력이며, 98년의 성적도 포수임을 감안하면 충분히 준수한 공격력이다.
이렇게 안방마님 자리를 굳히는 듯했으나, 무릎 부상을 안고 출전해 온 탓에 1997년부터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부상의 여파로 1997년에는 49경기에 출전한 것이 전부였고, 1996년 이후 단 한번도 타율 2할 6푼 이상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롯데의 주전 포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클러치 히팅 능력 때문이다. 안타 대비 타점만 봐도 클러치 능력이 대단한 선수인지 알수 있다. 그는 큰 경기에 강하고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는 선수였다. 1995년 OB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10회초 희생플라이로 결승타점을 기록한 것이나,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9회 대타로 나와 동점 투런 홈런을 때려내는 등(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참고)의 중요한 경기에서의 결정적인 활약으로 인해, 그는 롯데팬이 열광하는 선수가 되었다. 큰 경기에서 기대감에 부족함이 없었던 그의 활약들을 보자. 임수혁 최고의 순간 top10
3.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 |||||||||||||||
<rowcolor=#ed1c24> 연도 | 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1994 | 롯데 | 29 | 40 | .250 | 10 | 1 | 0 | 0 | 7 | 4 | 0 | 8 | 7 | .375 | .275 |
1995 | 104 | 271 | .247 | 67 | 9 | 2 | 15 | 68 | 34 | 2 | 24 | 59 | .310 | .461 | |
<rowcolor=#000000> 연도 | 팀 | 경기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볼넷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1996 | 롯데 | 113 | 373 | .311 | 116 | 18 | 2 | 11 | 76 | 43 | 4 | 46 | 46 | .385 | .458 |
1997 | 49 | 145 | .248 | 36 | 5 | 0 | 6 | 25 | 15 | 1 | 28 | 32 | .368 | .407 | |
1998 | 110 | 336 | .247 | 83 | 13 | 3 | 9 | 55 | 35 | 0 | 39 | 50 | .327 | .384 | |
1999 | 73 | 112 | .250 | 28 | 6 | 1 | 3 | 19 | 14 | 0 | 11 | 34 | .310 | .402 | |
2000 | 10 | 19 | .263 | 5 | 1 | 0 | 3 | 7 | 3 | 0 | 1 | 6 | .300 | .789 | |
<rowcolor=#373a3c> KBO 통산 (7시즌) | 448 | 1296 | .266 | 345 | 53 | 8 | 47 | 257 | 148 | 7 | 157 | 234 | .345 | .428 |
4. 사건사고
4.1. 경기 중 심장마비
1999년 플레이오프의 감동이 이어진 2000년 4월 18일, 롯데는 잠실에서 LG 트윈스와의 경기를 가진다. 2회초 타석에 들어선 임수혁은 유격수 류지현의 실책으로 1루에 안착했고, 이어진 테드 우드의 우전 안타로 2루에 진루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음 타자였던 조성환이 타석에 들어선 그 때, 갑자기 2루에 있던 임수혁이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채 다리를 떨며 쓰러진 그의 모습을 본 구단 트레이너가 달려 나왔으나, 대처법을 몰랐던 트레이너와 선수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들것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10] 들것을 통해 덕아웃으로 옮겨진 후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에 실려 수십 분 후 강남시립병원(現 서울의료원 강남분원)으로 옮겨졌고, 간신히 맥박과 호흡을 살려내는 데 성공했으나 그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식물인간 판정을 받고 말았다.원인은 그가 프로 입단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지병인 부정맥이었다.[11] 2루에 진루한 후, 그의 심장이 갑자기 느리게 뛰면서 뇌로 올라가야 할 혈액이 부족해져서 쓰러졌던 것. 임수혁은 쓰러진 직후 유니폼 윗단추랑 허리띠만 풀어주는 조치만 받았고 들것에 옮겨지는 중에도 산소마스크만 씌워진 채로 실려나갔다. 폐에서 산소와 섞인 혈액이 심장에서 펌프질되어 전신으로 공급되기 때문에, 심정지 환자에게 마스크만 씌웠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만약 그 당시에 주변에서 심폐소생술을 바로 해줬더라면 살 수도 있었다.
KBO는 임수혁이 심장 부정맥으로 쓰러진 뒤, 약 2달만인 2000년 6월 2일에 임수혁 돕기 행사를 열어 잠실에 방문하는 팬 1인당 500원을 적립하여 임수혁의 치료비로 전달하였다. 이 날 벌어진 두산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는 '같이 뛰자 임수혁'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성금과 임수혁의 쾌유를 비는 팬들의 메시지를 임수혁의 가족에게 전달했다.
2000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에는 여러 선수들이 임수혁의 쾌유를 바라면서 올스타전 1차전을 시작하기 전, 모임을 가지고 승리팀 감독에게 전해지는 상금과 감독 홈런레이스 입상자 상금을 임수혁의 치료비로 보태기로 했다. 이에, 선수들도 성금 모금에 동참하여 선수들이 승리 팀 수당 1,000만 원씩을 임수혁의 치료비로 보태기로 해, 임수혁 치료비 성금이 2,550만 원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후, 축구선수 김병지도 2000년 8월 16일 임수혁에게, MVP 및 캐넌슈터왕으로 얻은 상금 중 300만 원을 임수혁의 치료비에 보탰고, 임수혁을 위한 인터넷 경매까지 열렸다.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도 임수혁을 위해 성금 1,000만 원을 전달했다. 이 때 2000년 4월에 은퇴식을 치렀던 고려대 1년 선배인 염경엽 당시 현대 유니콘스 2군 매니저도 자체적으로 야구용품을 팔아서 만든 돈 500만 원을 보탰다.
특히 현대 유니콘스의 경우 1회성 성금 전달로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매월 선수단이 자체적으로 모으는 상조회비에서 일정 금액을 떼어 치료비에 보태도록 롯데 자이언츠 상조회 쪽으로 송금해 주는 일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었다.[12] 이후 현대가 해체되었으나, 현대 선수단을 승계하여 창단한 히어로즈가 이를 이어받아 매년 롯데와 벌이는 첫 번째 목동 3연전은 팀 이름답게 'remember the hero'라는 이름으로 모금 행사, 가족 시구 등 임수혁을 기억하는 행사를 벌여왔고, 이 행사는 임수혁의 사망 이후인 2011년까지 매년 지속되었다.그러나 2000 시즌 후 임수혁은 롯데 구단으로부터 자유계약 공시되었다.
2001년이 되자, 1년이나 지난 임수혁 사건은 서서히 묻히기 시작하였으나,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롯데 자이언츠는 4월 18일을 '임수혁의 날'로 정하고 4월 18일날 열리는 경기의 수익금의 전액을 임수혁의 치료비로 전하고, 임수혁의 아들이 시구를 하게 되었다. 롯데 자이언츠와 같은 연고지를 쓰는 부산 아이콘스는 '임수혁의 날'을 맞아 임수혁을 위해 치료비를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2002년 롯데는 '생활비 지원에 대한 어떠한 언질도 받지 못했고, 병원비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지급하기 힘들다'는 의견을 임수혁의 가족에게 전달하는 추태를 저지르고 만다. 당연히도 이는 이상구 단장의 경력에서 최악의 흑역사이다. 이후 롯데는 임수혁과 관련된 행사를 구단 차원에서 벌이는 일은 없었으며, 롯데 선수단 사비를 털어 일일호프 등을 통해 성금을 마련하게 되었다.
롯데 자이언츠가 생활비 지원과 치료비 지원을 하지 않는다면, 가족들이 엄청난 생활비와 치료비를 감당해야 되는 상황. 결국 선수협이 임수혁 돕기 자선 경매를 열게 된다, 선수협이 총 6차례의 경매에서 얻은 임수혁 돕기 성금은 총 2,900만 원이었고, 이 성금은 전액 임수혁의 가족들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구대성도 한화 이글스를 통해서 성금 2,000만 원을 전달했다. 일본 선수 노조위원장을 맡고 있던 후루타 아츠야도 이 자선경매를 위해 물품을 기증한바가 있다.
그리고 임수혁이 쓰러진 2000년부터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이 모인 롯데 자이언츠 상조회의 주관으로 매년마다 임수혁 돕기 자선행사를 하고 있다. 행사 장소는 고성범 연탄구이[13]에서 주로 이루어지는데, 주인장인 고성범도 같은 롯데 자이언츠 출신 선수이다.
2003년 초순, 결국 임수혁의 가족들이 응급 구호조치 등 안전의무를 소홀히 한 당시 소속 팀 롯데 자이언츠와 홈구단이었던 LG 트윈스를 상대로 8억 원의 보상금 지급을 골자로 한 민사조정을 신청했다. 롯데 측은 '법률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도의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보상을 할 의사는 있으나, 3년간 총 2억 원 상당을 이미 지원했으며 소송을 제기한 이상 임수혁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라는 입장을 밝힌다. 법원은 롯데와 LG에 각각 2억 1,300만 원을 배상하여 총 4억 2,600만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에 불복한 LG 트윈스에 의해 이의 신청이 진행되어 2004년에 롯데, LG에서 각각 2억 2,000만 원과 1억 1,000만 원의 보상금안을 임수혁 가족이 수용함으로서 끝나게 되었다.
4.1.1. 이후 개선점
그가 쓰러진 2000년 이후 3년이 지난 2003년이 되어서야 KBO는 선수협의 요청으로 경기장 내 의료진 배치를 의무화하였다.[15] 그러나 구장에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다고는 하나, 구장 내의 적재물로 인해 진입이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는 등, 아직도 해외야구에 비해서 안전 면에서 뒤떨어지고 있다. 딱딱한 펜스로 인한 펜스플레이 시의 부상이나[16] 베이스의 노화, 인조잔디 문제[17] 등으로 인한 부상 또한 여전하다. 봉중근이 "한국 야구장은 싱글A 수준"이라고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은 제2, 제3의 임수혁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기에, 앞으로 한국야구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비단 야구 문제로만 치부될 것은 아닌 게, 2011년 K리그의 신영록 선수가 경기 도중 부정맥으로 갑자기 쓰러지는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도 임수혁 선수 사건 이후 다른 프로스포츠 연맹에서도 도입된 구급요원의 빠른 조치와 앰뷸런스의 신속한 후송 등으로 다행히 생명을 건졌다.
4.2. 디시인사이드 해외축구 갤러리 임수혁 악플 사건
2008년, 디시인사이드의 야구 갤러리(이하 야갤)와 해외축구 갤러리(이하 해축갤) 간의 갤러리 전쟁이 활발했을 무렵, 야갤의 한 유저가 얼마전 축구 그라운드에서 심장병으로 숨진 푸에르타 선수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해축갤에 올리기 시작했고 해축갤 유저들은 야갤에 대한 맞대응으로 임수혁 선수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하며 야갤러들의 분노를 받게 되었다.갤러리간의 공격의 선이 도를 넘어가기 시작하자, 야갤러들은 증거자료를 모아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먼저 선수를 친다. 얼마 후, 일련의 사건들이 모 스포츠기자에 의해 기사화되면서, 디시인사이드 내에서만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큰 이슈가 된다. 급기야 임수혁의 가족들이 해충갤러들을 고소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해충갤러들은 데꿀멍하며 사과문을 남기고 선처를 빌었고, 악플러의 대부분이 예비 고등학생[18] 이라는 것을 안 임수혁 선수의 가족들은 고소를 취하하였다. 다만, 시작은 야갤이 먼저 했으므로 야갤러들도 이 사건의 비판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 뒤 2010년 초, 모 축구사이트에서 한 회원이 자신의 신상이 유출되었다며 도움을 요청했는데, 조사해보니 뻔뻔하게도 바로 그 악플러였다. 당연하지만 오히려 더 털렸다. 그야말로 인간 말종들. 그런데 당시 고소당하고 취하 되고서도 계속해서 야갤에 어그로를 끌던 모 해축갤러는 닉네임 세탁을 하고 야갤에 정착해 야갤질을 하다 걸리고는 야갤러들에게 가루가 되게 까이고 있다. 더불어 동일 인물임은 인정하지만 야갤은 계속 하겠다고 한다.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뻔뻔하게 갤질을 하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야구 팬덤에서 이런 드립은 금기시되어 있다. 심지어 2010년경까지는 막장화된 야갤에서조차 금기시되던 드립이었다. 지역드립이나 정치 떡밥은 야갤에서는 그냥 씹을 거리나 웃고 즐길 수있는 떡밥으로 치부하지만 임수혁 사건은 말 그대로 한국 야구의 어두운 부분이 드러난 안타까운 비극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1년 리그 전반기 LG 트윈스가 선전 할 때 LG 트윈스 갤러리 유저들이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 유저들을 상대로 이 드립을 쳤다.[19] 아무리 꼴갤에서 패드립을 쳐서 그렇다느니 먼저 시비 건거라느니 말이 많았지만... 이것은 제대로 확인된 바가 없다곤 하지만, LG 트윈스 갤러리 항목을 보면 거의 기정사실. 병마와 싸우고 있던 조인성의 아버지를 지속적으로 건드렸다고. 그러나 제대로 된 LG팬이라면 아무리 선시비가 걸렸어도 저런걸로 드립을 쳐서는 안 되었다. 임수혁의 사망에는 잠실 홈경기에서 선수들의 안전을 보장했어야할 LG 측의 책임도 있기에 더더욱.
하지만 2011년 이후 야갤의 막장성이 더 심해지면서 롯데팬이 조금만 나대는 성향만 보여도 식물인간 판정을 받은 임수혁 선수를 '야채인간'이라며 조롱하는 야채드립같은 리플이 달릴 정도로 보편화되고 말았다. 이는 통구이 드립도 마찬가지. 더 아이러닉한 것은 임수혁 관련 드립을 처음 당하여 고소를 먹이려던 갤은 바로 야갤, 그 야갤이었다는 것이다. 2009년에 시작된 막장화로 인해 갤러리의 성격이 크게 변하게 되어 나타난 아이러니.
5. 여담
- 롯데 의료진은 임수혁 사건 이후에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2015년 7월 1일 김민하의 골절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결국 시즌 아웃되었다. 이 때문에 선수생활이 제대로 꼬인 김민하는 2017년 방출당했다. 다행히도 김민하는 이듬해 한화에 입단해 2019년에는 준주전급 외야수로 출전하여 70경기 100타수 넘게 출장하는 등 재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또한 롯데 의료진은 7월 3일 짐 아두치의 부상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나마 아두치는 큰 부상이 아닌 걸로 밝혀졌다.
- 마구마구에서는 임조혁[20], 컴투스 프로야구 for 매니저에서는 임숭민, 슬러거에서는 임석훈,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신민수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여담이지만 사망 전[21]까지 프로야구매니저에 선수카드로 등록되어 있었다.우월한 2성포수[22][23] 논외로 삼진왕의 업데이트 소개 다음팟 방송에서 누군가가 임수혁선수의 레전드 카드는 안 나오냐고 묻자 개발진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는 있으나 언제 될지는 모른다고 답했다.
- 이사만루2019에서 롯데 추억의 선수 카드로 등장한다. 뛰어나진 않지만, 무난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며, 롯데의 유이한 포수 추선이다. 다만, 스탯이 더 뛰어난 96년 스페셜 에디션이나 베스트포지션 카드도 있어서, 이사만루에서 임수혁을 쓰고 싶다면 스에나 베포를 쓰는 것을 추천한다.
- 민방위 훈련이나 각종 소방교육, 심지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심폐소생술을 교육할 때도 빠른 응급처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예시로 자주 언급된다. 당시 현장에서 심폐소생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살아났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을 것이라고 한다.
- 2000년대~2010년대 롯데 자이언츠의 안방을 지키던 후배 강민호의 등번호인 47번은 임수혁의 개인 통산 홈런 개수인 47홈런을 상징한다.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 뒤에도 동일하게 47번을 달고 있다.
- 2018년 4월 18일, 네이버 뉴스에서 추모 영상을 업데이트하였다.
- 임수혁을 지칭할 땐 '돌아오지 못한 2루 주자'로도 표현되고 하는데, 모티브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인 듯. 김은식 작가가 이 제목으로 임수혁을 추모하는 칼럼을 쓴 바가 있다. 이 후 이 칼럼과 동명의 책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임수혁만을 추모하는 책은 아니고 전작 야구의 추억 처럼 여러 칼럼의 모음집 쯤 되겠다.
- 임수혁의 등번호 20번은 자유계약 공시 이후 4년간 결번이었다가, 2005년부터 여러 선수들을 거치다 2016년 최영환(現 최설우)을 마지막으로 다시 결번으로 남아 있다. 진승현이 고교 시절 등번호이자 아버지의 등번호이기도 한 20번을 달려고 했으나 구단 측에서 임수혁의 등번호라 달 수 없다고 반려하며 사실상 준영구결번으로 관리되고 있음이 밝혀졌다.[24] 추모의 의미로 공식 영구결번이 된 사례로는 OB의 김영신이 있다.
- 제이통의 곡 '사직동 찬가' 도입부에서 최동원과 함께 언급된다. 또 첫 EP '부산'에서도 "임수혁 아저씨, 돌아와요 부산항으로."라는 가사로 언급된다.
6. 관련 문서
[1] 1992 졸업.[2] 지명 거부 후 상무 입단.[3] 2000 시즌 종료 후 자유계약 공시.[4] 승지공파(承旨公派) 30세손 ○혁(○爀) 항렬.(족보)[5] 제5대 풍천임씨문하부사공파종회 회장, 제12·13대 풍천임씨승지공파종회 회장, 풍천임씨중앙종친회 부회장 고문, 2021년 신축보 발간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6] 강석일(姜錫一)의 딸이다.[7] LG 트윈스에는 1990년에 입단해 한국 최고의 포수로 자리잡은 서울고 선배 김동수가 있었기에, 임수혁은 LG로 간다면 주전 확보가 힘들었으리라 판단했을 수 있고 고교 선배와 주전자리를 다퉈야 하는 처지를 피하려 했을 수도 있다. 만약 임수혁이 자신을 지명한 LG에 그대로 입단했다면 그의 중-고-대학교 1년 후배로서 훗날 야생마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어느 좌완투수를 이듬해인 1993년에 LG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르고, LG는 라이벌인 OB처럼 명포수 왕국으로 거듭났을지도 모른다.[8] 정확히 말하면 마임포라고 해야 맞다. 任씨는 두음법칙과는 관계 없이 '임'으로 발음한다. 그래서 영어 이름도 Lim이 아닌 Im이다.[9] 1988 김성한, 1991~1992 장종훈[10] 요즘은 야구장 외야 출입문 앞에 홈 구단과 협약을 맺고 있는 병원의 구급차가 상시 대기 중이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병원에서 파견된 응급의료진도 야구장 내에 대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구급차가 야구장에 즉시 대기하지 않았고 응급의료진 대기도 미흡했다. 만약 응급의료진이 즉시 출동해서 심폐소생술을 하고 바로 구급차를 통해 대형 병원으로 후송됐다면 임수혁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실 구급차 상시 대기나 응급의료진의 대기가 의무화된 것도 임수혁이 쓰러진 후 야구장의 응급 상황 대처가 미흡하다는 지적에 따른 보완조치였다.[11] 염종석의 말에 의하면, 협심증도 있었다는데 아마도 그 때문에 부정맥이 온 듯하다.[12] 임수혁의 사망 이후에는 유가족의 학비 지원 명목으로 바꿔 계속해서 보내준다고 한다.[13] 본점을 비롯해 부산경남에 프렌차이즈화되어서 지점이 자리잡고 있다.[14] 아무래도 구름의 위치를 봐서 임수혁이 달리는 곳이 2루, 가고 있는 곳이 3루, 저 멀리 있는 태양이 홈인 것 같다.[15] 거기에 절대 KBO의 자체적 판단이 아니다. 선수협에서 여러 번 요청한 끝에야 이루어졌다.[16] 외야 펜스플레이 도중 큰 부상을 당해 선수 생명의 운을 다한 선수가 꽤 많았다. 대표적으로 1998년 플레이오프 도중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펜스에 부딪혀 골절상을 당한 후 비운의 선수 생활을 이어가야 했던 강동우.[17] 천연잔디에 비해 충격흡수율이 적고 마찰에 의한 화상 및 그로 인한 감염 문제가 천연잔디보다 매우 심하다. 대표적으로 박진만과 이현곤, 홍세완과 김종국이 이러한 인조잔디와 열악한 내야 흙 상황 때문에 현역 시절 동안 무릎 부상으로 고생했다.[18] 해충갤 92라인이라고 불리던 소년들이었다.[19] 패드립으로 극에 달한 쥐갤러들인지라 드립 자체는 꽤나 웃겼고 야갤러들 다함께 강건너 불구경. 야갤의 막장성은 이미 2009년 KIA 우승부터 지역드립으로 시작해서 일베의 베이스가 되는 드립이 당시에 이미 성립이 되었다.[20] 단, 마구마구 2015에는 임수형으로 등장한다.[21] 1차 CBT 당시에는 아직 사망 전이었기 때문에 카드등록이 되어있었다.[22] 2성인데 장타력 80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래 2성에선 저런 능력치가 안나와야 정상인데 저러니 우월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라지만, 사실 베타 기간에는 능력치를 좀 퍼주는 경향은 있었기 때문에 판단은 알아서. 나중에 나온 것이지만 이 능력치는 출전 경기수에 따른 능력치 보정 전의 능력치 배정이다. 보정 전 01 이종범 능력치는 교타, 장타가 80이 넘는다는 얘기도 있으니 뭐(...)[23] 2011/08/25 패치로 이상훈과 함께 실명이 아닌 신민수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물론 추측일뿐인데 거의 맞는 것 같다. 이상훈으로 추정되는 비 실명 선수는 신철수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24] 또한 임수혁 이전에는 삼성 라이온즈에서 넘어온 장효조가 달았던 등번호이기도 하기 때문에, 20번이 결번이 된 사연에는 임수혁뿐만 아니라 장효조를 추모하는 의미도 어느 정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