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4-14 00:12:36

김성한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김성한(동명이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성한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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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3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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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1986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1987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1988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1989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1991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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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1988 KBO 리그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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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988 KBO 리그 최다 안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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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988,1989 KBO 리그 홈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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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88 KBO 리그 타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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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1988,1989 KBO 리그 장타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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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KBO 리그 미스터 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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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의 역대 등번호 / 감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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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틀:KIA 타이거즈 감독|{{{#FFFFFF '''해태-KIA 타이거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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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50403 '''1대'''}}}
김동엽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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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조창수
-1 {{{#050403 '''2대'''}}}
김응용
(198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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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50403 '''3대'''}}}
김성한
(2001~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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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유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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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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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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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환
(2006~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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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현
(2008~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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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2012~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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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201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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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박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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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1번
창단 김성한(1982~1995) 김상진(1996~1999)
KIA 타이거즈 등번호 90번
결번 김성한(2001~2004) 유남호(2005)
한화 이글스 등번호 71번
정민철(2010~2012) 김성한(2013~2014) 김종수(2015~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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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 알바 뛰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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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스승인 김응용 감독과 함께.
이름 김성한(金城漢 / Sung-han Kim)
생년월일 1958년 5월 18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전라북도 군산시
본관 안동 김씨[1]
학력 군산중앙초-군산중-군산상고-동국대
포지션 1루수
2루수, 3루수, 유격수 (1982)[2]
투수 (1982~1983, 1985~1986)
투타 우투우타
신체 178cm, 85kg
프로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2~1995)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1997~2000)
해태-KIA 타이거즈 감독 (2001~2004)
군산상업고등학교 감독 (2004~2005)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09)
한화 이글스 1군 수석코치 (2013~2014)

1. 소개2. 선수 시절3. 지도자 시절
3.1. 해태 타이거즈 코치 시절3.2. 해태 타이거즈 감독 시절3.3.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3.4. 휴식기3.5.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 시절3.6. 다시 야인생활
4. 여담5. 연도별 성적


1. 소개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멤버로, 은퇴할 때까지 해태에서만 선수생활을 했던 타이거즈의 레전드. 1980년대 해태 타이거즈, 더 나아가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를 대표했던 스타 선수로 기록의 사나이다.[3]

선수 시절 등번호는 11번. 은퇴 후에는 코치로 활동하다가 김응용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로 자리를 옮기며 감독직을 이어받기도 했다.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감독이자 KIA 타이거즈의 첫 감독이다.

2. 선수 시절

1980년대 해태 타이거즈의 중심 타자이자 최고의 스타. 이 표현도 부족한 야구 천재로 해태 타이거즈 레전드 중 한 명으로 해태 초창기를 이끈 개국공신. 해태 타이거즈의 선수가 부족했던 탓에 창단 초기에는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였다. KBO 리그에서 투타겸업을 하면서, 양쪽에서 모두 좋은 성적을 낸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선수다.

원래 투수 출신으로 대학시절까지 투수를 했으나, 타격에 더 재능이 있어 타자로 완전 전향했다. 고교 때는 김시진과 대결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nimg.nate.com/200910271006220574.jpg
마운드에서 투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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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전설의 오리궁뎅이 타법.

파일:/image/311/2010/10/30/1288425685325.jpg
21세기에도 여전한 오리궁뎅이 타법.

투수로서 4시즌 동안 통산 방어율 3.02를 기록, 총 167이닝을 던졌고 1982년에는 무려 106.1이닝을 소화했다. 1982년에 타자로서는 타자로 타율 0.305, 13홈런, 69타점, 10도루, 투수로서는 규정이닝을 넘기면서[4] 10승(5패 1세이브), 방어율 2.88을 기록하며 프로데뷔.[5] 다만 세간에서 당시 선발 투수로 활동했다고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 26경기 출장 중 5경기만 선발로 나왔다. 물론 80경기 체제 중에 5경기를 선발로 나온 것이 생각보다 적은 비율은 아니었겠으나, 주로 나온 포지션은 구원 투수라는 것.

엉덩이를 뒤로 내민 상태로 타격을 하는 특이한 타격폼으로 인해 오리궁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타격폼이 정형화되지 않아 각종 기상천외한 타격폼이 넘쳐났던 당시 기준으로 봐도 이상한 타격폼이었다. 게다가 타점왕까지 탔다. 현재까지 본인 한 명밖에 없는 10승 - 10홈런 - 10도루 - 3할 타율 - 타점왕이라는 진기록 보유자.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투타 10-10-10클럽을 개설하고 현재 그 유일한 회원이며, 투수도 타석에 서는 일본 센트럴리그나 미국의 내셔널리그식으로 경기운영을 바꾸지 않는 한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승환도 10-10-10 클럽인데 이쪽은 승리, 홀드, 세이브. 다만 이때 투수를 겸업하면서 휴식없이 타자와 야수로도 계속 출장한 결과 팔꿈치에 뼛조각이 떨어져나오며 이후 기량하락의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체계적으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던 시대 투수와 타자의 겸업은 선수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이후 타선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중심 타순을 이끌어 해태를 7번이나 우승시키는 데 큰 공헌을 쌓았다. 1991년에는 KBO 리그에서 개인 통산 1,000 안타를 기록한 첫 선수가 되었다.

홈런왕 세 번(1985, 88, 89)[6], 타점왕 두 번(1982, 88), 최다안타 두 번(1985, 88), MVP 두 번(1985, 88), 올스타전 MVP 한 번(1992),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30홈런과 20-20 클럽[7]등등. 특히 홈런왕과 타점왕은 타이거즈 선수들이 오랜기간 해내지 못했었는데 2009년에 와서야, 김상현이 홈런왕과 타점왕에 올랐다. 리그에서 한시즌 30-30을 최초 달성한 선수는 1996년의 박재홍이지만 한 시즌 30홈런과 한 시즌 30도루를 달성한 최초의 선수는 둘 다 김성한이다. 그것도 100경기 남짓한 경기만을 치뤘던 1980년대에.

백스윙을 거의 생략한 간결한 타격폼 덕분에 특히 속구에 강해서 프로에서 최동원한테 가장 많은 안타를 얻어낸 선수였으며,[8] 제 1회 한일 슈퍼게임에서 일본 올스타에 큰 점수차로 밀리던 8회초 이라부 히데키의 직구를 받아쳐 도쿄돔 상단으로 넘겨서 한국 야구의 자존심을 그나마 세웠던 적도 있다. 게다가 4차전에서도 홈런을 날리며 일본 올스타를 상대로 한 첫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덕분에 대회 당시 그의 배트가 도쿄돔의 일본 야구 박물관에 전시되는 영예를 누렸다. 또한 1993년에 열린 한일프로야구 친선경기[9]때도 잠실구장에서 이라부에게 홈런을 뺏은 바 있다.

1991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노쇠하기 시작했다. 1991년 3할에 가까운 타율(.294)과 홈런리그 3위(23개)를 기록하던 방망이는 1992년 15홈런으로 꺾이더니[10] 1993년 이후 다시는 두자릿수 홈런을 치지 못했다. 은퇴년도인 1995년에도 잠실에서 홈런을 기록했을 정도로 펀치력은 그대로였으나 스윙스피드가 따라주지 못한 것이다. 결국 김성한은 그해 은퇴를 하게 된다. 그의 은퇴식에는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이만수가 꽃다발을 건내주는 훈훈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초창기의 해태 타이거즈 웹사이트에는 명예의 전당이라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김봉연이나 김종모, 선동열 등의 레전드를 제치고 김성한 혼자 당당히 올라있었다. 그래서인지 내용도 김성한에 대한 것들만 가득... 이는 당시 김성한의 타이거즈 레전드로의 위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영구결번만 안 되었다 뿐이지

그가 남긴 통산기록은 .286 1389안타 207홈런 781타점 762득점 247 2루타 2285루타 143도루. 1389안타 762득점 247 2루타 2285루타는 은퇴당시에도 프로통산 최고 기록이었으며 이만수가 은퇴할때까지 이 기록은 넘지 못했다. 이만수가 포수였다는 점때문에 커리어 대부분을 1루수로 보낸 김성한이 폄하될 법 하지만 통산 15승을 거둔 투수라는 점에서 그 역시 야구천재라는 사실에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둘다 원년부터 뛰었으면서 한국프로야구를 업그레이드시킨 영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3. 지도자 시절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최종순위
2001 KIA 타이거즈 133 60 68 5 5위 -
2002 133 78 51 4 2위 3위[11]
2003 133 78 50 5 2위 3위[12]
2004 88 41 43 4 5위[13] -
통산 487 257 212 18

3.1. 해태 타이거즈 코치 시절

은퇴 후 1996년은 코치 연수로 한 해를 보냈으며 1997년부터 타격코치 직을 맡았다. 이 시기에 장성호, 홍세완, 이호준 등을 키워냈다. 이 당시에도 군기반장하던 기질이 여전해서 이호준장성호가 제일 무서워하는 코치였다고 한다. 이호준의 더그아웃 인터뷰에서보면 지금도 상당히 그 카리스마가 남아있는 듯.

1997년 한국시리즈 영상을 보면 이종범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장면이 있는 걸로 보아, 선수시절 호타준족이었던지라 수석코치 및 1루코치도 겸했던 것 같다.

1루 코치 사진

3.2. 해태 타이거즈 감독 시절

2000년 말 김응용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로 떠나자[14] 2001년 해태의 마지막 감독을 맡게 된다. 당시 해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던 비밀번호 5-7-6을 찍던, 다 무너져가던 팀이었다. 홍현우마저 FA가 되어 LG 트윈스로 갔다. 말 그대로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현우도 없던 시기[15][16]

하지만 남은 선수들로 기적같은 투혼을 발휘한다. 사실 5월까지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창단의사를 뚜렷히 밝히지 못하는 상태였다. 5월 하순까지 22승 1무 19패로 4위를 마크하며 IMF는 개나 줘붜리라며 타격의 힘으로 승승장구했다. 문제는 투수진, 점점 힘이 떨어졌다. 6월까지 3위 두산 베어스와 더불어 승승장구하며 3, 4위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팀은 6월말부터 힘이 떨어지면서 7월에는 그야말로 힘없는 팀이 돼버린다. 팀은 7월 29일에 마지막 게임을 치뤘지만 마지막 승리는 7월25일 사직구장 대 롯데전이며 해태의 마지막 승리투수, 마지막 완투승 투수이자 마지막 완봉승투수도 그때 완봉승을 거둔 최상덕이며 팀의 마지막 승리타점도 그때 2점홈런을 쳐낸 해태의 루이스 산토스이다. 마지막경기는 공교롭게도 당시 김응용 감독이 이끌던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였다. 그 경기는 6:8로 졌다. 그리고 모기업은 KIA로 바뀌고 나머지 시즌을 치뤘다.

3.3.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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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이 KIA 자동차 그룹으로 인수되고 자연스럽게 KIA의 첫 번째 감독으로 임명된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페넌트레이스에서 해태 타이거즈시절에도 달성하지 못했던 2년 연속 승률 6할[17]을 달성했다. KIA 감독 시절 김성한 감독의 야구 스타일은 일명 '감의 야구'라고 불리며 데이터에 따른 기계적인 선수 운용 대신 선수의 컨디션 및 상황에 따라 감독의 직감으로 교체카드를 쓰는 스타일. 그리고 대체로 강공 위주로 공격을 지시하고, 투수를 가능한한 최대한 믿고 오래 끄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 잘 나가던 감독들인 짜내기 야구 및 지키는 야구의 대가 김재박, 벌떼계투진으로 대표되는 상대 맞춤형 전술의 김성근 감독, 데이터야구의 전도사 조범현 감독의 스타일과는 극단적으로 반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그놈의 강공 위주 공격 때문에 일명 '짜내는 야구'를 잘 시도하지 않다보니[18] 이길 때는 화끈한 타격의 힘으로 크게 이겨주나, 질 때는 강공 실패가 반복되며 결국 수많은 잔루를 남기며 스스로 자멸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단기전에 약했다. 또한, '감의 야구'의 영향으로 당시 기아 타이거즈는 구단 내에서 '정보분석팀'의 영향력이 많이 약했고 이 당시 기아는 정보분석을 통한 확률놀이보다 감독이 관찰한 컨디션이나 감을 중시하다보니 부족한 인원으로 기껏 정보를 구해와도 그 정보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편이었다. 실제로도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조범현 감독 시절의 SK 와이번스에게 현미경 야구를 당하며 스윕으로 털리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정보분석팀의 차이'가 지적되기도 했다.그리고 이미 악명(?)을 떨쳤다시피 선수들을 무지하게 폭행했으며, 정신력을 다잡는다는 이유로 선수들을 국토대장정[19]을 시킨다든지 하는 기행을 벌였다. 승률 6할을 찍을당시엔 성적이 나오니 이거에 대해 별말이 없었지만,성적이 조금씩 떨어지던 2004년에는 바로 이것이 발목을 잡아 김성한 감독의 명줄을 앞당기는 사유가 됐다.물론 당시 정재공 단장하고 사이가 안좋기도 했고.

결국 2002, 2003년 연속으로 플옵에서 털리고, 2004년에는 전년도 2위 팀을 4위로 떨어뜨린 성적부진(?)으로 비판을 받았다. 2002년 시즌중 팀의 2군 포수이던 김지영의 머리를 방망이로 때려 머리가 찢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난적도 있었다. (김성한 구타 사건), 2004년 시즌에는 갑자기 데이터 야구랍시고 트레이드로 데려온 방동민[20]을 계속 올려서 불을 화끈하게 지른 끝에 시즌 도중 중도사퇴했지만 결국 단장과의 알력으로 인해 잘린셈.

참고로 네임드인 검증된 타자인 신동주를 7번에 박아가면서 까지 김경언을 6번타자로 중용했다. 기아에서는 빛을 못봤지만 10년도 넘는 세월이 흐른 후 한화에서 각성했다. 김경언은 김성한에게 감사해야할 듯.

3.4. 휴식기

휴식기 들어서 광주CMB에서 KIA 타이거즈 홈 경기 중계를 하는데, 해설을 맡게 되었다. 군산상고 감독 [21] 등을 맡으며 '카리스마'가 넘쳤다는 증언을 듣기도. 이 시기에 그의 제자였던 차우찬삼성에 지명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는데, 당시 삼성 감독이 팀 후배였던 선동열이어서 가능했다. 그 후 KBO 기술위원으로 재직. 미국 연수를 끝내고 나서는 천하무적 야구단에 자주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기술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고정 확정, 매 경기 해설을 맡기도 했다. 해설 이외에도 연습경기에 참여하는데, 연습경기에 참여하면 매번 삼진아웃을 당한다고 한다. 2009년에는 WBC 대표팀 수석코치로도 참가했다.

참고로 기아의 감독에서 성적부진 명목으로 불명예 퇴진했으나 나름대로 팀 성적은 좋았던 터라[22] 이후 유남호, 서정환 감독 때에도 팬들 사이에서 수없이 김성한 감독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고 그동안 해태-기아를 맡아왔던 감독들보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조범현 감독이 2008년 팀을 맡고 역시 하위권을 기록하자 팬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고 역시 김성한 감독을 다시 데려오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결국 조범현 감독이 2009년 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에야 이는 어느정도 잠잠해졌다. 본인 역시 인터뷰 등에서 감독 복귀를 꿈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위에서 나오는 폭행 사건이라든지 국토 대장정 병크들을 생각해보면 그의 복귀는 사실상 제로에 수렴한다. 2008년 7월 광주광역시 상무지구에서 중식당 하이난을 오픈해 부인과 같이 운영했으며 식당일을 돕고 계신다고. 심지어 손님이 많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직접 손님들 차 발레파킹 해주러 온다. [23]

2011년 군산상고 VS 경남고 30주년 리매치에서.

NC 다이노스KT 위즈가 창단했을때 그 구단들의 감독으로 여러 사람들이 거론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김성한 전 감독의 이름은 어디서도 거론되지 않고 있다. 업적이나 공과로 놓고보면 지금 NC 다이노스KT 위즈 감독 후보들 중 김성한 전 감독보다 훨씬 흠결이 많은[24] 감독 후보들이 적지 않음에도 김성한 전 감독이 거론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올드팬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는 듯 하다. 김성한 전감독 본인은 강력히 복귀를 열망하고 있지만 해태시절 선수생활을 보냈고 여러가지 강압적으로 비쳐질수 있는 방식등등. 본인이 강력하게 변해야 한다는 의지가 수반되어야 할듯하다.

당장 프로감독이 못 된다해도 고교 & 대학팀 등에서 지도자 오퍼가 온다면 현장감각도 다시 살리는 의미에서 수락하는 것도 좋을듯하다. 김성한 감독이 강성인건 맞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서 더 크게 비친 면도 있고 다 드러난다면 감독할 사람 아무도 없긴하다. 더군다나 군기로는 사상최강급인 해태에서만 선수생활을 보낸 해태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그에 따른 야구관정립문제도 있을 터이니 억울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본인이 철저히 변해야 한다는 의지표현 역시 필요하기도 할 듯하다. 신생구단 창단소식에도 자신의 이름이 거론조차 안되는건 김성한 전 감독의 책임도 어느 정도는 있으므로.

또한 루이스 안두하를 잘 던지는데도 뜬금없이 강판시켜 그가 짐싸들고 가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

2012년 7월경 교원그룹의 상조 브랜드인 '물망초'의 광고에 김용철 전 롯데감독과 함께 출연하여 주목받기도 했다. 광고 슬로건인 "떠나도 남는다 가슴에 남는다"가 김성한 본인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터라 짠해지는 느낌이다.

2012년 10월 15일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로 복귀하게 되었다.

3.5.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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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긴 하지만, 적어도 취임 직후 시점에서 한화팬들의 반응은 그런대로 호의적이었다. 이미 해태의 상징 김응룡 감독이 부임한 마당에 해태 출신이라고 거부반응을 보일 이유도 없으며, 김성한이라는 인물 자체도 순수하게 능력만 따진다면 유능한 인물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일지도.[25] 다혈질의 성격이 불안요소라면 불안요소이긴 한데...5년동안 꼴칰야구를 보면서 혈압이 오를대로 오른 한화팬들은 "최소한 실책이나 병살, 주루사 나왔을때 쪼개는 꼴은 안 보겠네" 하면서 은근히 좋게 보는 분위기.

공백기가 좀 길었지만 능력 자체는 검증된 인물이기 때문에 김응용 감독과 함께 많은 기대를 받았다.

2013년 시즌이 시작된 이후, 투수진의 붕괴로 팀이 총체적 난국에 빠지며 김응룡 감독과 함께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그나마 타격 코칭은 괜찮다는 말도 나오긴 했지만, 여기에도 의구심을 보이는 이들도 많다. 특히, 송창식 문제로 대표되는 한화 불펜진의 고질적인 소진 문제에도 불구하고 김응용 감독에게 이렇다할 진언이나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 하나 없이 손 놓고 있는 느낌도 강하다.

2014년, 5월 14일, 4연패(기아전 3연패+삼성에게 패배) 끝에 "감독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며 사임했다. 자진사퇴의 형식이지만, 김응용 감독의 인터뷰에 의하면 김응용 감독과의 트러블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만한 점으로는, 김성한이 수석코치를 맡기 불과 4개월 전에 MBC 정보석의 쥬얼리하우스 이종범 편의 초대손님으로 등장했을 때, 이종범 보고 절대 코치는 하지 말라고[26] 만류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인데, 김응용의 한화 감독행에 맞물려 강제 소집(?)되자 어쩔 수 없이 이종범과 함께 한화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는 거다. 나이나 경력 등을 고려할 때 김성한은 결코 코치 정도로 그칠 인물이 아니고[27] 감독 후보군이었는데 김응용 감독에 대한 의리로 억지로 한화 수석코치를 맡았었는데[28] 결국 김성한의 인내심과 김응룡에 대한 서운함이 폭발하여 이 지경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29][30][31]

3.6. 다시 야인생활

야인이 다시 되고, 2014년 2월 무렵 음료광고를 하나 찍었다. 그리고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가 되기 전에 했던 CMB광주방송 KIA 타이거즈 홈경기 해설을 다시 맡게 되었다.

선동열 감독이 부진한 성적으로 계약기간이 끝나고 사실상 재계약이 불가능하리라 여겨졌을 때는 새 감독 후보군으로 오르는 듯 했었으나 선동열의 재계약으로 결국 소문으로 끝났다. 그러나 선동열이 2014년 10월 25일에 사퇴하면서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비록 흑역사가 존재했지만 2년연속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은 김성한 감독이 복귀하면 환영할 기아팬들이 많을 듯하다.[32][33] 하지만, 김기태가 부임하는 바람에 복귀는 당분간 요원해졌다.

그리고 상무지구에 차렸던 중국집 '하이난'을 넘겨주고[34], 나주혁신도시 휴먼스프라자 건물 4층에 새롭게 '더 하이난'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중국집을 열었다고 한다. 중국집도 하면서, 나주시의 유소년야구와 아마야구 육성에 온 힘을 다하겠다고 한다.

요즘엔 야구칼럼을 쓰는데, 김성한의 눈이라는 타이틀로 엑스포츠뉴스에서 연재를 하고 있다. 상당히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논점으로 글을 풀어나가서 한번 읽어볼 만 하다.

2017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지지연설을 했다.영상[35] 이 때문에 2018 시즌이 끝나고 kt 위즈의 단장으로 선임된다는 썰[36]이 네티즌은 물론 선수단 내에서도 돌았고, 정권에서 앉힌 낙하산 단장이라고 야구팬들에게 비난받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김진욱 감독과 임종택 단장이 모두 나가면서 새로 인선된 단장으로 이숭용 타격코치가 확정되면서 김성한 전 감독이 kt 단장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

이번엔 진천선수촌의 새로운 선수촌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이 2018년 12월 19일에 전해졌다. 하지만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은 이 소식을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대중의 반응은 당연히 안좋다. 야구팬들은 모두 김성한의 배트 폭행 사건을 기억하고 있고, 최근 심석희 폭행사건으로 체육계의 폭행 악습들을 끊자는 목소리가 커져가는 와중에 폭행을 앞장서던 사람이 선수촌의 촌장으로 낙점 되었기에 반발은 더 커져가는 중. 2019년 1월 4일 보도에 따르면 신치용, 김호곤과 함께 선수촌장 복수 후보로 올라있다고 한다. SBS의 보도에 따르면 김성한은 2017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문재인 후보를 공식 지지했고 TV 찬조연설자로 나섰음에도 유세 활동이 보잘것 없던 사람들에 비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측근들을 체육회 요직에 앉혔다가 정부와 여권에 미운털이 박힌 이기흥 회장이 김성한을 통해 정권과의 연결고리를 만들려고 하는 보은 인사 차원의 내정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다만 체육계 인사들의 대부분 불만스럽게 애기하는 의문점은 태릉선수촌과 전혀 관련없는 프로출신 사람이 회장 유력시가 되는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한국 스포츠 망치는 현 정권 낙하산 인사

이후 신치용 고문이 2019년 2월 7일부로 선수촌장이 확정됨에 따라 없는걸로..

4. 여담

  • 참고로 조카가 시각 장애인 가수인 이민석[37]이라고 한다.
  • 1998년 개봉된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 출연하였다. 코치 역으로 출연하여 이 분을 떠오르게 하는 대사를 쳤다. 물론 손발이 오글거리는 발연기를 피하기 힘들었지만, 야구 팬들은 덕분에 김응룡 감독까지 같이 어색하게 치는 개그를 감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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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년 시즌, 타임 요청을 받아주지 않은 심판과 말싸움을 한 짤방이 유명하다. 자세한 스토리는 기사 참조.
  • 대우 티코 CF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 짬뽕에 관한 일화가 있다. 본인의 타격감이 좋지 않다 싶으면 구단 직원을 구장에 일찍 불러서 짬뽕 한 그릇 사주고 배팅볼을 던지게 했다고... 코치 시절엔 이호준장성호를 일찍 불러 짬뽕 한 그릇 먹이고 훈련시켰던, 야구에 열정적이었던 사람이다.김성한 홈런은 짬뽕국물 덕이었네 지금은 중국집을 경영하고 있으니 짬뽕과의 인연은 야구계를 떠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셈.
  • 연차가 높던 시절, 해태의 라커룸에는 개인당 의자가 배치된 대신 평상이 있었는데 신입들은 눈치 보여 앉지도 못하는 평상에 누워 있거나 앉아서 부채를 부쳤다고 한다. 상기 언급한 짬뽕도 베테랑들만이 라커룸에서 시켜먹을 수 있었다. MBC스포츠플러스의 엠스플 텔레비전 9화 참조.
  • 어린 시절의 가난 탓인지 자산 관리에 신경을 기울였다.
  • KBO 최초의 원조 멀티플레이어라 할 수 있는 이건열이 1루수 연습을 하러 1루에 가면 김성한이 '아따 너는 저기(외야)로 가라잉∼'하며 쫓아냈다고 한다. 이건열은 해태 입단 전 1루수로 활약했으나, 입단하고 보니 고교-대학 직계 선배인 김성한이 1루를 지키고 있었다.
  • 홍현우의 수비력 향상에 일조했다. 수비 연습 시 3루수인 홍현우가 송구를 하면 정면으로 오는 것만 받고 옆으로 오는 것은 받지 않았으며 뒤로 빠진 공은 홍현우가 뛰어가 주워와서 공손히 김성한의 글러브에 갖다 바쳐야 했다. 물론 머리통 한 대씩 맞는 건 당연.
  •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자로 알려져 있으며 19대 대선때 전북지역 유세에 동참하기도 했다. 방송 연설도 했다.해당 동영상 20대 대선에서도 마찬가지.

5. 연도별 성적

역대 타자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해태 80 318 .305 97
(3위)
17
(5위)
4
(4위)
13
(4위)
69
(1위)
48 10 17 .506 .340
1983 96 339 .327
(3위)
111
(4위)
20 0 7 40 59
(3위)
13 42 .448 .402
(3위)
1984 98 365 .258 94 16 2 12 41 48 7 43 .411 .336
1985 105 400 .333
(3위)
133
(1위)
29
(1위)
1 22
(1위)
75
(2위)
66
(2위)
8 45 .575
(1위)
.400
(3위)
1986 104 404 .280 113
(4위)
16 0 18
(2위)
57
(5위)
64
(2위)
10 38 .453 .340
1987 81 306 .314 96 22
(3위)
0 15
(3위)
46 43 3 33 .533
(3위)
.378
1988 104 404 .324
(3위)
131
(1위)
12 0 30
(1위)
89
(1위)
72
(2위)
16 42 .577
(1위)
.382
1989 118 414 .280 116
(3위)
18 0 26
(1위)
84
(2위)
93
(1위)
32
(3위)
93
(1위)
.512
(1위)
.407
(2위)
1990 89 331 .281 93 17 2 11 49 61 14 45 .444 .361
1991 112 411 .294 121 25
(3위)
5 23
(3위)
83
(4위)
69 16 66 .547
(5위)
.388
1992 117 410 .261 107 18 0 15 59 62 6 44 .415 .331
1993 107 362 .273 99 23
(5위)
0 6 52 45 4 33 .387 .331
1994 45 157 .236 37 10 0 1 14 17 4 12 .318 .288
1995 82 229 .179 41 4 0 8 23 15 0 18 .301 .236
KBO 통산
(14시즌)
1338 4850 .286 1389 247 14 207 781 762 143 571 .471 .358
역대 투수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2 해태 26 106⅓ 10 5 1 - 0.667
(4위)
2.88 88 6 51 49 44 34 1.25
1983 4 17⅓ 1 1 0 - 0.500 2.08 13 1 6 8 6 4 1.04
1984 1군 기록 없음
1985 10 40⅓ 4 3 1 - 0.571 3.35 35 1 19 12 18 15 1.31
1986 1 3 0 1 0 - 0.000 9.00 2 0 3 0 3 3 1.67
KBO 통산
(4시즌)
41 167 15 10 2 - 0.600 3.02 138 8 79 69 71 56 1.25


[1] 27세 한(漢)자 항렬이다. 즉 야인시대김두한덕혜옹주의 김장한이 형제 뻘이란 소리(...). 나이에 비해 항렬이 상당히 높다. 신(新) 안동 김씨이다. 참고로 본인과 클린업 일원 중 한명인 김종모도 안동 김씨인데 33대손이다.[2] 포수를 제외하고 내야수 모든 포지션을 원년에 뛰었다. 당시에 해태는 14명으로 시작한 초미니구단이라서 선수 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3] KBO 최초로 '시즌 30홈런', '20-20 클럽', '통산 1,000 안타', 'MVP 2회 이상 수상' 등을 달성했다.[4] 이때는 80경기만 했기 때문에 규정이닝을 넘긴 수치이다.[5] 이 사람의 야구능력을 엿볼수있는, 대단한 기록인데 당시 10승과 2.88은 해태 팀내에서 평균자책점 1위에 다승 1위였다. 더군다나 그때 80경기 체제에 타자로서도 13홈런 10도루면 오늘날은 거의 2~3점대 평균자책점에 15승, 20-20클럽을 달성한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20-20 클럽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상황에서 제일 먼저 달성한 것도 김성한이었다.[6] 특히 한국프로야구 시즌 30+홈런은 김성한이 가장 먼저 달성하였다. 1988년 30홈런.[7] 1989년 26홈런 32도루를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야구전문지 <주간야구>만이 대서특필했을 뿐, 그 외에는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8] 통산 31개[9] 주니치 드래곤즈치바 롯데 마린스의 방한 시험경기, 3차례의 경기를 가졌었는데, 1,2차전은 LG 트윈스롯데 자이언츠 연합팀이 주니치, 치바 롯데 연합팀과 친선경기 가진바 있었다. 1차전 사직 경기는 2:2로 무승부였고, 2차전 잠실 경기는 승리하였다. 김성한 선수가 속한 해태 타이거즈는 1993시즌 한국시리즈 우승팀 자격으로써 단독으로 일본팀과 3차전 경기를 치렀다. 그 경기는 일본팀이 승리하였다.[10] 그래도 그해 올스타전에서 팬투표로 베스트10에 올라 인기를 과시했고, 결승 홈런을 날리는 활약으로 미스터 올스타를 수상했다.[11] 플레이오프에서 LG에게 패하며 최종 3위[12] 플레이오프에서 SK에 패하며 최종 3위[13] 시즌 도중 사퇴 당시[14] 이 무렵 유남호, 김종모, 이상윤 등의 코치들이 김응용 감독을 따라 삼성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서정환, 최해식, 김봉근, 이건열, 백인호가 새 코치로 오게된다.[15] 홍현우는 대단한 선수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고졸 신인으로 입단해 입단 2년차부터 노쇠화 기미를 보인 한대화를 밀어내고 주전 3루수를 차지했고 1996년 그는 .332의 타율에 .453의 출루율을 찍는다. 당시는 세이버메트릭스가 전해지지 않았었기에 묻히긴 했지만, 해태 역대 최대 출루율은 1994년 196안타 51볼넷 .452의 출루율을 기록한 이종범이 아닌 1996년의 142안타 97볼넷 .453의 출루율을 기록한 홍현우였다!![16] 또한 홍현우는 1999년 김종국의 부상으로 2루수 자리가 비자 2루수로 포지션을 옮겨 3할-30홈런-30도루-100타점을 찍으며 커리어하이를 찍는다. 이 시절 장타력도 높은데,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키운 덕분이다. 그러나 잦은 웨이트 트레이닝은 결국 부상을 낳았고 결국 LG에서 먹튀가 된다.[17] 2002~03시즌 6할 달성.그러나 2002시즌때는 4위 LG 트윈스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패퇴했고 2003시즌에는 4위 SK 와이번스에게 스윕으로 업셋당하며 한국시리즈에 못가봤다.[18] 타고투저인 지금과는 다르게 이때는 강공위주 플레이는 장단점이 극명하다고 평가받았고 짜내는 플레이를 섞어쓰는게 권장되는 분위기였다.[19] 극도한 피로감으로 정신력을 오히려 저하시킬 우려도 있고, 야구하는거랑 군대식 행군을 시키는거랑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선수 고문에 가까운 병크.[20] 참고로 이 선수를 데려오기 위해 LG에 준 선수는 김상현. 사실 방동민은 부상이 있었지만 김성근 감독이 부상전력을 숨기고 기아에 넘겼다는 설이 있었고, 그 때문에 김성한은 김성근 감독을 향해 야구계 선배가 해도 너무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21] 이 시기의 제자는 차우찬, 원종현, 황선일, 이준호였다. 김성한은 부임하자마자 2005년 대통령배에서 팀을 4강으로 이끌었다.[22] 2-2-4를 기록했다. 다만 포스트시즌에서 2002년(對 LG), 2003년(對 SK) 2년 연속 업셋을 당했다.[23] 벽마다 김성한의 선수시절 사진들이 걸려있다. 다양한 팀의 후배들이 찾아와서 사인을 남기고 갔다.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2015년 6월에 나주시에 '더 하이난'을 오픈했다. 상무지구의 하이난은 '시안'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24] 야구 외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감독으로서의 지도능력만 따졌을 때[25] 순수하게 야구 내적인 능력만 판단했을 때 김성한 수석코치는 분명 강한 카리스마를 가졌으며 최연소 2000안타의 장성호, 인생은 로또 이호준, 100타점 유격수 홍세완 등을 키워내고 팀을 3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고 2년 연속 6할 승률을 찍는 등 타격코치와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검증된 인물이다. 적어도 2013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진 그랬다.[26] 이 발언은 이종범을 강제은퇴시킨 선동열의 밑에서 코치를 하지 말라는 것으로 선동열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27] 50대 중반이면, 이미 감독도 몇년 해봤으니 어딜 가도 감독급 레벨이다. 사실 기아 감독 시절 성적도 무난한 편이였다. 2015이면 선동열 감독과 김응용 감독의 계약기간이 종료되는지라, 감독으로 복귀할 가능성도 생겼다.[28] 첫 수석코치 등용당시에는 폭력사건으로 인해 막힌 야구계 커리어를 김응용 감독이 해결해 주려고 한 거 아니냐는 게 대다수의 견해였다.[29] 사실 해태선수 말년에도 불화가 있었다. 1994년 시즌 전 전지훈련지에서 김성한 특유의 오리궁뎅이 타법을 감독이 강제로 뜯어고치려다가 실패해 은퇴로 내몬 것도 있고, 2000년 시즌이 종료된 뒤, 주요 코치진을 김응용 감독이 줄줄이 빼간 것, 그리고 김응용 감독이 과거 박동희 기자 와의 인터뷰에서 김성한 구타 사건을 대놓고 디스한 적도 있는지라, 겉과는 달리 속으로는 상당히 곪아 있던 게 터진 건지도 모르겠다.[30] 사실 김응용 감독은 과거에 수석코치와 트러블을 빚고서 그 코치를 내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90년 김인식쌍방울 레이더스 초대 감독으로 가면서 수석코치가 된 백기성은 김감독이 자신을 선수들 앞에서 종종 갈구고, 이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자, 김 감독에게 육두문자를 들어야 했고 결국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1991년 시즌이 끝나고 사임하고 말았다.[31] 이와 같은 케이스로는 유남호도 있다. 원래 해태에서 같이 삼성으로 옮긴 유남호는 수석코치로 1992년과 2002년 그를 보좌했으나, 그와의 사이가 틀어져, 2003년 시즌 중 기아 코치로 자리를 옮긴다.[32] 지금 기아 상황이 답이 없긴 해도, 김감독 초기도 상황은 비슷했다.[33] 다만 이당 시엔 젊은 선수인 김상훈, 홍세완, 장성호, 이현곤, 정성훈,김진우 등이 있었다는것. 과연 김감독이 와도 잘 할지 의문.[34] 지금은 '시안'으로 상호를 변경했다.[35] 참고로, 스승인 김응용 감독 역시 문재인 지지를 선언했다.[36] 여기에 감독으로 해태출신이 같이 온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LG의 금지어이순철이나 대학야구 감독으로서 호성적을 거두던 장채근, 이건열이 온다는 썰이 돌았다.[37] 임요환과 2004년 경기를 가졌던 그 사람. CCM 가수로 RickyP와 같이 앨범에 참여한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