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3-10 01:17:35

이상윤(야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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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시절의 투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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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마트 사장님!
이름 이상윤(李相潤)
생년월일 1960년 12월 21일
출신지 광주광역시
학력 광주일고-한양대 중퇴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멤버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2~1989)
지도자 해태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1990~2000)
해태-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01~2003)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04)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5)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3 1986 1987
1988 1989

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프로 시절4. 이모저모

1. 개요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 멤버이자 해태 왕조 초대 에이스. 포지션은 투수였다. 초창기 프로야구의 미남선수로 유명했다. 위력적인 직구 때문에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등번호는 16번.

2. 아마추어 시절

광주 출신. 광주일고의 에이스로 출발하여 한양대학교 재학 중 프로야구가 창설되자 중퇴하고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였다. 학창시절에는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의 주역으로 베스트 10에 뽑히기도 했다.

3. 프로 시절

1982년 해태의 원년멤버였으나, 부상때문에 원년에는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3년에 다승2위, 20승을 거두는 대활약을 펼치고 해태 타이거즈의 첫번째 우승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1] 그해 한국시리즈의 마지막 5차전에서 해태의 첫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마운드에 있었던 투수도 이상윤이었다.

당시 145km/h의 강속구를 던졌는데, 지금이야 대부분의 에이스급 투수는 그 정도 던지지만, 당시에는 최동원이나 선동열을 제외하면 저정도 던지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130km/h 후반을 던지면 강속구 투수라고 일컬어졌으니...[2] 그 다음해에도 10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선수층이 빈약한 팀 사정 때문에 심지어 14완투를 거두며 20승을 일궈냈던 83년 시즌에도 출장 경기수의 거의 1/3 가까이 구원 알바도 병행해야 했다. 80년대 에이스 투수의 숙명이라고도 할수 있지만, 최동원급의 초인이 아닌 이상 2년 간 440이닝을 던지며 전천후로 등판하니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자연스럽게 1985년에는 부상으로 거의 쉬다시피 했으며 그의 에이스 자리는 선동열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도 1986년 다시 10승을 넘어서며 해태 타이거즈의 두번째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며 1988년 16승을 거두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으나, 부상 때문에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KBO 리그 통산 8시즌 175경기 843.2이닝 65승 46패 14세이브 33완투 6완봉 3.13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

4. 이모저모

  • 한국에서 최초로 복싱 세계챔피언이 되었던 김기수의 사위였다.[3] 당시 해태의 김응용 감독은 같은 실향민 출신으로서 광주에 정착했던 김기수와 친했고 함께 술을 자주 마셨으나, 선수단에서 "누군 장인 잘 둬서 맨날 주전이네.."라는 소문이 돌자 오랜 친구와의 만남을 끊어버렸다고 한다.[4]
  • 은퇴 후 해태 타이거즈, 선동열 감독 시절의 삼성 라이온즈에서 각각 투수코치를 했다. 해태가 KIA로 바뀐 2002년에는 이전까지 3년간 팀 방어율이 5점대나 될 정도의 약체 투수진을 수습, 3점대로 복구시키면서 2위로 5년만의 가을야구 잔치에 참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5] 야구선수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골프에도 능해서 몇 년간 중국 옌타이에서 골프장 사업을 했고, 이후 귀국하여 2011년부터 광주광역시 광산구 운남동에서 지역 프랜차이즈 마트인 '영암마트' 운남점 사장이 됐다고 한다.


[1] 그러나 당시 삼미의 너구리 장명부가 무려 30승이라는 유일무이한 기록을 세우는 바람에 이 기록의 빛이 바랜다.[2] 그러나 최동원은 원년에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출전하지 못했고, 다음 해에 프로에 진출했으나 그 해에는 이상윤 만한 활약은 펼치지 못했다. 선동열은 아직 고려대 재학중이었다.[3] 그러나 후에 이혼함.[4] 김응용은 선수단의 단합과 공정함을 제일로 쳤고, 그래서 뜬소문이 돌아서 선수단의 분위기가 나빠질까봐 친구조차 멀리한 것이다. 괜히 김응용이 명장소리를 듣는게 아니다.[5] 물론 거기에는 마크 키퍼, 다니엘 리오스의 원투 펀치의 공이 제일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