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15:30:22

윤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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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학길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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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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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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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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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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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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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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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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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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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0번
조용철
(1984~1985)
윤학길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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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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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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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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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문
(1994~1997)
윤학길
(1999~2001)
양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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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998)
윤학길
(2002)
결번
결번 윤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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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번 윤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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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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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학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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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9번
양상문
(2009~2010)
윤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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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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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age3.inews24.com/1287727114868_1.jpg
윤학길
尹學吉|Yoon Hak-gil
출생 1961년 7월 4일 ([age(1961-07-04)]세)
경상남도 울산군
(現 울산광역시 남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장생포초등학교 (졸업)
부산동성중학교 (졸업)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 / 학사)
신체 187cm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4년 1차 지명 (롯데)[1]
1986년 1차 지명 (롯데)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86~1997)
지도자 치바 롯데 마린즈 연수코치 (1998)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1999~2001)[2]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01~2002)[3]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03)[4]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03)[5]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04~2006)[6]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2006)[7]
경찰 야구단 투수코치 (2007)
우리-서울 히어로즈 1군 투수코치 (2008)
서울 히어로즈 2군 감독 (2009)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2010)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11)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2012)
LG 트윈스 2군 투수총괄코치 (2015)
한화 이글스 육성군 투수코치 (2017)[8]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17)[9]
한화 이글스 육성군 총괄코치 (2018)
한화 이글스 육성군 투수총괄코치 (2019)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 (2009)
병역 상무 피닉스 야구단 (1984~1985)
경력 KBO 재능기부위원 (2023~)
가족 아내, 아들, 딸 윤지수[10]
본관 파평 윤씨 (坡平 尹氏)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
3.1. LG 트윈스 1기 시절3.2. 롯데 자이언츠 3기 시절3.3. LG 트윈스 2기 시절3.4. 한화 이글스 2기 시절
4. 피칭 스타일5. 고독한 황태자
5.1. 최동원과의 비교5.2. 당대 롯데 마운드의 한계와 윤학길의 가치
6. 여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사람들은 저를 고독한 황태자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롯데 팬분들이 계셨기에 전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롯데 자이언츠 소속 우완 투수. 現 KBO 재능기부위원.

팀의 상징적인 존재인 철완 최동원에 이어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롯데 자이언츠의 마운드를 이끌었던 에이스이자 마찬가지로 팀을 상징하는 레전드 투수.[11] 롯데 자이언츠 최다승 투수이기도 하다.

특히 통산 100완투(KBO 완투 역대 1위)[12]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의 보유자다. 또한 KBO 역대 완봉승 공동 2위(20완봉승)[13]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 선수 경력

윤학길의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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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선수 경력: 윤학길/선수 경력
파일:KBO 리그 로고(1982~2012).svg
1986~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 ||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롯데의 자매구단 일본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1년간 코치 연수를 받았고, 1999년 시즌을 앞두고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코치로 부임해 2002년까지 있었다. 2003년에는 롯데를 떠나 잠시 한화 이글스에서 투수코치를 맡다가 1년만에 다시 롯데 자이언츠로 돌아와 2006년까지 1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이후 경찰청 야구단 코치를 거쳐 2008년 우리 히어로즈 창단 당시 투수코치로 합류했고, 히어로즈에서는 2군 감독까지 역임했다.

하지만 여러 팀에서 코치를 맡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로서의 평가는 상당히 나쁘다. 몸담은 팀마다 제대로 키워낸 투수는커녕 있던 투수진조차 망쳐놓는 등 처참한 기량만 보여 주며 계속 떠돌았다.

양상문, 이상군, 정민태 등의 화려한 삽질에 묻혀 있어서 그렇지, 여태껏 제대로 키운 투수가 거의 없는 크보 최악의 막장 투수코치 중 한 명이다.[14]

선수 시절만 해도 미칠듯한 완투 퍼레이드와 롯데 에이스로써 미친 존재감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코치로서는 영 실적이 없다. 양상문이나 이상군처럼 자팀 투수진을 박살내놓는 등 대형 사고를 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키웠다 할 선수도 없다. 한마디로 딱 욕먹지 않는 수준의 코치라고나 할까? 거기가 코치로서의 존재감은 오로지 공셔틀로만 기억되고 있다. 빵셔틀이 일진한테 빵 갖다주듯이 투수 교체할 때 공들고 셔틀노릇하는게 별명으로 남을 정도.

하지만 야구 코치의 역량을 팬들이 알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코칭 모습을 실제로 볼 수도 없고, 특별히 기사가 나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2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꾸준히 여러팀을 거치며 코치 커리어를 이어가는 점을 비춰볼 때 현장에서는 코칭 능력을 어느정도 인정 받고 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프로야구단은 자선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선수 시절의 화려한 경력과 기나긴 코치 경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감독 물망에 오른 적이 없다는 것은 그의 코치로서의 역량이 가진 한계 역시 보여준다고 미뤄 짐작할 수 있다.

3.1. LG 트윈스 1기 시절

2009년 9월 30일 박종훈 신임 감독 체제로 출범한 LG 트윈스의 투수코치로 영입되었다. 정작 LG의 프랜차이즈 출신이자 기존 투수코치였던 김용수스카우트 팀으로 좌천되었다.

한편 윤학길이 LG 투수코치로 온다고 하자 LG 팬들 사이에서는 완투 능력이 제로인 LG 투수진에서 이닝이터 하나만 제대로 키워줬으면 하는 기대도 컸다. 윤학길 본인이 애초에 KBO 최고의 이닝 이터였으니 말이다.

정작 기대와는 다르게 윤학길은 LG에서도 결국 투수 한 명도 제대로 키우기는커녕 기존에 있던 투수진조차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2010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하며 1년만에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LG는 공석이 된 1군 투수코치 자리에 박종훈 감독과 나름 인연이 있는 최계훈을 영입해 메꿨다. 2011 시즌 최계훈 코치 체제에서 LG 투수진이 전년도와 다르게 성과를 내자 그 전임자였던 윤학길은 무능하다며 한번 더 까였다.

3.2. 롯데 자이언츠 3기 시절

LG에서 나온 후 친정 팀 롯데 자이언츠의 코치로 합류한다는 소식이 나왔다. 이로써 지난 2002년, 2006년에 이어 3번째로 롯데에서 코치를 맡게 되었다. 막상 롯데 팬들 사이에서는 양상문과 재계약 안한다고 해서 축제 분위기였는데 양상문 내치고 기껏 데려온 인물이 양상문만큼 무능하기로 유명한 윤학길이라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렇게 사람보는 눈이 없냐고 롯데 프런트를 깠다. 그런데 정작 롯데 복귀 후 맡은 직책은 투수코치가 아닌 수석코치로, 양승호 신임 감독을 보좌한다고 한다. 박영태와 수석코치라는 단어가 한 문장 안에 없으니 어색하다

2012년에는 롯데 자이언츠의 2군 감독으로 보직을 옮겼다.[15] 롯데 2군 감독 시절에는 퓨처스 리그에서 막장 성적을 찍으며 역시 고도칸이라는 평가를 받다가, 그나마 박준서, 이정민 등 2군에서 콜업된 선수들의 포텐이 뻥뻥 터지며 재평가 분위기가 슬슬 돌았다.고도칸 매직? 둘 다 2012년 기준으로 서른 넘은 노망주라는게 함정

그러나 2012 시즌 종료 후 양승호 감독이 물러나고 코칭스태프 개편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롯데와 재계약하지 못했다. 이유는 2군 리그 꼴찌라는 성적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애초에 롯데 자이언츠 2군팜에 야수가 너무 부족했던 것과 NC 다이노스의 약진을 생각하면 다소 아쉬운 부분.

3.3. LG 트윈스 2기 시절

롯데에서 나온 후 약 2년간 야인으로 있다가, 2014년 9월 30일 LG 트윈스의 코치로 영입되면서 약 4년만에 LG에 복귀했다. 보직은 2군 투수 총괄코치.

대부분 팬들의 반응은 노찬엽과 마찬가지로 왜 또 실패한 사람이 돌아왔느냐 하는 반응과, 그래도 이번에는 다르겠지라는 반응이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나 2군이 주목을 못 받는 상황에 가려져서 그렇지, 비상식적인 투수 운용으로 인해 2군까지 가서 보는 몇몇 골수 팬들에게 비판받고 있다.

유원상의 경우 부상으로 인한 1군 말소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21명의 타자를 상대시켜서 삼진0, 볼넷0, 10안타로 피안타율 0.611의 환상적인 기록을 남긴 채 재활군으로 보내 버렸다.

이외에도 양상문 감독이 굴려서 관리가 필요하던 김선규도 환상적인 운용으로 결국 2군의 평범한 불펜 투수로 만들었다. 심지어 김선규의 경우 작년에 2군에서 0~1점대 방어율을 왔다갔다 하면서 2군을 씹어먹던 걸 생각하면 두 감독 코치의 행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선규 2군 등판 기록 결국 2015 시즌 후 김선규는 2차 드래프트로 NC 다이노스에 끌려갔다.

물론 가장 이해가 안 되는건 이렇게 실패했던 전적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프런트의 인사가 더 문제지만.

결국 2015 시즌 후 장광호 배터리코치와 함께 LG에서 해임됐다.

3.4. 한화 이글스 2기 시절

2017년 5월 30일 한화 이글스의 육성군 투수코치로 부임하며 지난 2003년 이후 약 14년만에 한화 유니폼을 다시 입게 됐다. 때마침 2017 시즌 감독대행을 맡고 있는 이상군과는 과거 2003년 한화에서 같이 코치로 일했던 적이 있고, 박종훈 한화 단장과도 2010년 LG에서 감독-투수코치 사이였다는 인연이 있다.

6월 14일 정민태와 자리를 맞바꿔 1군 투수코치로 승격되었다. 허나 부임 후 투수진의 성적과 팬들의 평가는 바닥을 치고 있다. 휴식을 주어도 불을 지르는 걸로 봐서 코치로서의 능력은 도저히 써먹을 수준이 여전히 아닌 듯. 롯데 팬들도 왜 굳이 가서 욕을 먹냐며 안쓰러워하고 있다.

사실 윤학길 코치가 시즌 중 할 수 있던게 많지 않았다. 시즌 도중이던 5월 30일에 한화 코칭스태프로 합류한 뒤 6월 14일에 1군 투수코치로 빠르게 승격했는데 이 사이에 1군 선수단 전원과 2군 선수단에 대한 분석을 하기에는 역시 쉽지 않고, 또 마무리캠프와 스프링캠프를 모두 겪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선수가 어떤 스타일인지 파악을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비난의 화살이 윤 코치로 몰리는 이유는 역시 6-7-8월 투수진의 대붕괴 때문이다. 투수코치는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 그때의 한화 투수는 누가 나와도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을 것을 감안하면 까이는 강도는 상당했던 편. 물론 답이 없던 투수진의 1차 원인을 아는 일부 팬들은 딱히 까지 않고 그저 재계약 불가 정도의 입장.

시즌 후 한화가 코칭스태프 개편 과정에서 2017 시즌 코치진 중 무려 절반 가까이에게 재계약 불가 통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 살아남았다.

정확한 능력 평가는 2018 시즌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것이다. 항간에 의하면 2년 계약을 했다는 이야기. 그 추측이 맞았는지 2017 시즌이 끝난 뒤 보직이 육성군 총괄코치로 강등됐다.

2019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하며 한화를 떠났다.

4. 피칭 스타일

같은 팀 후배였던 염종석과는 반대로 혹사당하면서도 굉장히 장수한 타입이다.

체격 조건이 워낙에 좋았던 데다가 투구폼이 무리가 없었고 완급 조절에 능했던 덕분이다. 맞춰잡는 타입이라고 하지만 실제 전성기의 윤학길은 상당한 수준의 강속구를 던졌으며 세 자릿수 삼진을 어렵지 않게 기록하는 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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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 동작이 매우 간결하여 야구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아주 편히 던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간결한 투구폼 덕분에 100개 이상을 투구해도 구위 저하가 크게 없었다. 선수 시절 그의 독보적인 완투 능력, 그리고 엄청나게 던져대면서도 오랫동안 롱런할 수 있었던 비결인 셈이다.

전반적으로 커맨드가 좋은 강속구 투수에 가까운 스타일이었다. 아마 시절에는 150km에 달하는 강속구로 유명했고, 프로에서도 꽤나 혹사를 당하면서도 평균 140km대 초반의 속구를 계속 뿌릴 수 있었다.[16] 당시 속구 최고 구속은 140km대 후반까지도 나왔고 슬라이더도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130km대 초중반을 찍기도 했던 파워피처에 가까운 스타일이었다. 당시 KBO 리그의 평균 구속을 고려할 때 이는 빠른 편에 속한다.

게다가 제구도 나쁘지 않았다. 코너워크에 능했으며 공의 탄착점도 낮은 편이었다. 경기 초반부터 윤학길의 공이 낮게 형성된 스트라이크와 볼의 경계로 날아가면 그 날은 분명히 호투하는 날이었다. 물론 영점이 잡히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이런 날은 어김없이 난타를 당했다.

현역 시절 몸이 늦게 풀리는 투수로도 유명했다. 초반 3이닝만 잘 버티면 그날은 거의 완투나 완봉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특히 1회에 실점이 많았는데 이닝이 지날수록 안정감이 높아지는 투수라며 1회만 버티면 완투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 [17] 투구수 절약에도 굉장히 뛰어났는데 보통은 130구 이내로 완투를 하는 편이었다.

윤학길의 통산 100완투는 선동열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다.[18] 100완투가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설명하자면 10시즌 만에 100완투를 했으니 1시즌에 평균 10완투를 했다는 것인데, 이는 데드볼 시절에나 나올 만한 기록이다. 랜디 존슨도 22시즌 만에 100완투를 기록했다. 투수 분업화가 이루어진 현대 야구에서는 나오기도 어렵고 함부로 나와서도 안 될 기록이다. 당연히 통산 완투 부문 1위이며, 75승을 완투승으로 기록하였다. 완봉승은 20승을 기록하여 2위[19]에 올랐다. 당연하게도 이닝도 많이 소화해서 통산 1,863⅔이닝을 기록했다.

덤으로 윤학길은 통산 308경기에 출전했는데, 이 중에 구원으로 등판한 경기도 상당수라 선발 등판 횟수는 총 231회이다. 즉, 231번 선발 등판해서 100완투를 했다는 건데 세 경기 중 한 경기는 무조건 완투라는 소리다. 통산 이닝 1위인 송진우가 672경기에 출전하여 3,003이닝을 기록하였는데 윤학길의 평균 소화 이닝과 송진우가 출전한 경기 수를 곱하면 4,000이닝이 넘는다. 물론 단순한 계산일 뿐이지만 그만큼 엄청나게 많은 이닝을 소화하였다는 것이다.

꾸준함을 중요시하는 팬들에게는 송진우와 함께 손꼽히는 선수다. 이닝 수 자체는 2000이닝이 안 되므로 많긴 해도 최상위권은 아니지만, 10년 동안 100완투라는 혹사를 당하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팀을 든든하게 떠받쳤기 때문이다.

거기에 윤학길 자신의 몸관리도 8, 90년대 선수 답지 않게 굉장히 선진적이었다. 완투를 한 다음날에는 공을 절대 던지지 않고 가벼운 웨이트 트레이닝만 하는 식으로 어깨를 관리했으며, 반대로 선배인 최동원은 완투 다음날 롱토스를 했으며 윤학길의 지적에 "그래야 팔에 힘이 생긴다"고 답했다고 한다. 체계적인 스포츠 과학은 커녕 최동원의 말마따나 투수의 팔은 쓰면 쓸수록 강해지는 것이 정론이던 시기에 굉장한 선진적 관리가 100완투라는 전설적인 기록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5. 고독한 황태자

5.1. 최동원과의 비교

면면히 살펴보면 통산 기록, 92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업적 등 최동원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면모를 가지고 있다. 장기간의 팀 기여도 측면에서는 오히려 최동원을 능가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 통산 WAR도 윤학길이 최동원보다 조금 더 높다.[20]

FIP 랭킹으로 봤을 때 통산 FIP가 500이닝 기준 15위, 1,000이닝 기준 8위, 1,500이닝 기준 3위다. ERA 랭킹은 그보다 훨씬 떨어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수비의 도움을 별로 받지 못했지만, 투수 자체의 실력은 굉장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FIP+ 랭킹도 상위권. 그렇다고 최동원보다 높다는 얘기는 아니다. 최동원의 FIP은 500이닝 기준으로도 3위.

최동원과 비교될 때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한국시리즈 우승 과정인데, 1984년 우승을 최동원 거의 혼자서 책임지다 시피했다면 1992년 우승은 윤학길과 염종석, 박동희 세 명이서 골고루 나눠서 책임졌기 때문이다.
전력상의 열세를 딛고 팀을 우승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최고의 선수이자 팀의 상징이던 최동원은 롯데에 몸담던 6년간 리그 극상위권의 투수로 군림하며, 길진 못했어도 강렬한 기여와 기록, 기억을 남겼다. 윤학길은 이러한 최동원의 뒤를 이은 선수로 최동원이 팀을 떠난 후 팀의 에이스로 자리잡았다. 최동원만큼 강렬하진 않았지만 꾸준히 리그 상위권의 활약을 보이며 약팀이었던 롯데를 지탱하였으며, 최동원과 임팩트면에서 차이는 있었지만[21] 통산 100완투와 6번의 200이닝 소화가 보여주듯 팀을 위한 헌신과 투혼에 있어서 맥을 같이 했다.

하지만 1984년과 92년 한국시리즈는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는데, 84년의 경우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우승팀이 바로 7전 4선승제로 맞붙게 되어있다. 즉 한국시리즈 7경기가 포스트시즌의 전부라는 얘기다. 게다가 당시에는 정규리그가 끝나고 무려 한 달 이상의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한국시리즈가 시작되었다.

반면 92년의 경우 시즌 종료와 함께 시작된 포스트시즌에서 롯데는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단계적으로 올라오며 포스트시즌을 치렀다. 때문에 92년의 경우 84년과 같이 단 한 사람의 활약만으로 우승하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92년의 경우 최동원처럼 하루 걸러서 등판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력 투수들은 두 경기 정도 휴식 후 등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5.2. 당대 롯데 마운드의 한계와 윤학길의 가치

프로야구 초창기인 1980년대의 롯데는 페넌트레이스 1위를 못 해서(…) KBO 포스트시즌이나 KBO 한국시리즈를 못가서 그렇지 성적은 나쁜 편이 아니었고, 당시 롯데는 투수 왕국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선동열을 제외하면 80년대 중후반의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 계보는 거의 롯데 투수들이 이어받았다. 최동원은 말할 것도 없고, 윤학길도 선동열에 가린 면이 있으나 국가대표 에이스였다. 박동희는 아마 시절의 재능이 선동열, 최동원을 넘어선다는 평가를 들었던 선수이니 당연히 국가대표 에이스다. 이 계보는 90년대에까지도 일정 부분 이어져서 문동환, 손민한 등도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였다.

하지만 윤학길이 데뷔했을 때에는 황제 최동원이 아직 선수생활을 하고 있었고,[22] 1988년 다승왕에 올랐지만 최동원급의 위력을 보이지는 못 했기 때문에 당시 롯데팬들에게 에이스로는 어딘가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동원의 은퇴 이후에는 박동희가 역대 신인 최고 계약금을 받고 데뷔했고, 당연히 롯데팬들의 관심도 박동희에게 쏠렸다.

게다가 선수 시절 내내, 윤학길은 한용덕, 이강철 등과 더불어 선동열에게는 결코 미치지 못 하는 2인자 그룹에 있었다. 2년 연속 17승을 올리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1992년에도 팬들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신인 염종석에게 돌아갔다. 별명대로 줄곧 고독한 황태자였던 것.

이 부분은 윤학길의 비극이자 롯데의 문제점이었다. 많은 이들이 롯데와 투수 왕국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 중 대표적인 것은, 롯데의 팀 투수력 전체가 강한 것이 아니라 롯데의 에이스가 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롯데에 있어서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인 제리 로이스터 감독[23]이 취임하기 이전의 롯데 자이언츠 에이스 계보는 노상수 - 최동원 - 윤학길 - 박동희 - 염종석 - 주형광 - 문동환 - 손민한으로 이어지며 로이스터 이후 장원준 - 송승준 - 박세웅[24]이 에이스 계보를 잇고 있다. 이 중에서 선동렬과 함께 역대 최강으로 꼽히는 최동원을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투수들의 전성기 활약상은 리그의 지배자라고 하긴 힘들어도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는 않았던 투수들이다. 문제는 윤학길을 제외하면 이 선수들의 전성기가 겹치는 시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원년 노상수가 반짝한 뒤 최동원이 입단했고, 이후 최동원이 롯데를 떠날 때가 되어서야 윤학길이 빛을 봤으며, 박동희와 염종석, 특히 문동환[25]은 전성기가 극히 짧았다. 손민한은 부상과 여러 사정으로 전성기가 미뤄졌고, 그 사이에 문동환이 급격한 하락세에 들어가고 주형광이 방전되고 만다. 참고로 염종석, 손민한, 주형광은 부산고 각 1년씩의 선후배다. 즉, 염종석이 3학년일 때 손민한이 2학년, 주형광이 1학년이었다. 그런데 이 세 선수가 롯데에서 동시에 제 실력을 같이 발휘한 해는 단 1년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전성기가 겹치는 유일한 인물이 윤학길이다. 윤학길만이 최동원과 1년을 뛰어봤고, 박동희와 염종석의 전성기와 하락세를 목격했고, 이후에는 주형광이 에이스로 올라왔다.[26]

이 부분이 고질적인 롯데 선발진의 문제로, 윤학길과 쌍두마차를 이룰만하다 싶은 투수가 나오면 이내 혹사의 후유증으로 성적이 떨어졌고, 다시 윤학길만 믿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투수들 중에서 3명 이상이 동시에 전성기급 기량을 선보인 유일한 시즌이 1992년으로 롯데의 마지막 우승이 있었던 시기이다.[27] 그리고 롯데의 다른 우승은 그 유명한 최동원이 만들어낸 우승 1984년 뿐이다.

그리고 이 배경은 당연히 투수를 혹사시킨 것도 원인이지만, 롯데의 불펜진이 대대로 약했던 것도 원인이다. 과거(로이스터 이전)롯데의 계투라고 하면 기억나는 선수가 거의 없을 것이다.[28] 그나마 유명한 인물이 마무리 투수로 전업했던 시절의 박동희, 그리고 삼성에서 건너온 노장진과 마무리만 안하면 참 좋았던 임경완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불펜투수가 나눠서 이닝을 소화해야 하는 것을 선발 투수, 그것도 대부분은 에이스가 감당해야 했던 것이 롯데의 특징이다. 이것 역시 최동원 시대 이래 반복되어 왔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롯데의 역대 코칭스태프, 특히 투수코치들이 책임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윤학길이 많은 이닝을 소화해야 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친 윤학길을 내리고 대신 올릴 마땅한 계투가 없으니, 그냥 선발투수 윤학길이 끝까지 던진 사례가 많은 것이다.

윤학길은 포스트시즌이건 정규시즌이건 항상 로테이션을 지키면서 등판하여 충분한 이닝을 소화했던 투수다. 다만 1984년 한국시리즈의 최동원처럼 특정 대회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줄 정도는 못되었고, 그 결과 잦은 등판만큼 많은 패전을 당하기도 했다. 특히 포스트시즌에서 많은 패전을 뒤집어 쓴 덕택에 '윤학길은 큰 경기에 약하다'는 이미지가 박히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91년 준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 구원등판해 역전 홈런을 두들겨맞으며 패전투수가 되어 팀의 탈락과 운명을 같이 했고, 1992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는 9회말 구원등판해 막판 위기 속에 간신히 승리를 확정짓는가 하면, 3차전에서 선발 등판해서 9이닝 5실점 완투패를 당하며 그 해 한국시리즈의 유일한 패전을 기록했다. 심지어 1995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선 선발등판해서 아웃카운트 하나 못잡고 연속 3안타를 맞고 바로 강판되는 굴욕을 맛보며 팀의 우승 실패에 대한 책임을 통감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의 이면에 있었던 윤학길의 활약과 헌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91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선 8이닝 무실점으로 선발승을 거두어 팀을 탈락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 윤학길이며, 1992년에는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호투해 팀의 선승에 공헌했던 것도 윤학길이고, 최종 5차전에서는 승리투수로 롯데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견인했던 것도 윤학길이다. 1995년 한국시리즈의 경우 롯데 선발진이 전반적으로 큰 역할을 못 한 편이었지만, 윤학길은 3차전에서 9이닝 2실점으로 버텨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윤학길이 포스트시즌에서 패전을 기록한 경기들은 포스트시즌 탈락이나 한국시리즈 우승 실패 등 너무나 아픈 순간들이었기에, 그 이전에 보여준 호투는 묻히고 실패만 부각되어 '큰 경기에 약하다'는 편견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1984년 전설을 써내린 최동원, 1992년 정규시즌은 죽쒔으나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해낸 박동희,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 해에 데뷔하여 염라대왕이란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맹활약한 신인 염종석, 1995 플레이오프 MVP였던 주형광에 비해 윤학길이 큰 무대에서 남긴 족적이 다소 미미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 자신이 맡은 경기에서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해 주었고, 절대 약했다고 폄하당할만한 수준이 아니다. 오히려 정규 시즌에서의 수많은 완투와 다수의 경기 출전 등을 감안하면, 포스트시즌에서도 변함없이 로테이션을 지키며 충실히 여러 이닝을 소화해준 것만으로도 그는 대단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윤학길 이후 시즌 최다 이닝을 경신해낸 롯데의 투수는 2015년의 조쉬 린드블럼. 그것도 무려 22년 만이다.

6. 여담

  •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이들 중 둘째인 딸 윤지수펜싱(사브르) 국가대표 선수로, 세계선수권 단체전 은메달리스트, 아시아 선수권 개인전 금메달리스트이다. 아시안 게임에서는 단체전 2연패를 이끌더니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꿈에도 그리던 개인전 금메달을 따냈다. 올림픽에서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시작으로 2020 도쿄 올림픽에서 단체전 동메달 획득에 기여[29]했고, 2024 파리 올림픽에서는 대표팀의 올림픽 사상 첫 사브르 단체전 결승행을 이끌면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버지의 별명이 고독한 황태자이기에 야구팬들, 특히 롯데 팬들 사이에서는 공주님 혹은 고독한 황태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 울산 장생포 출신이었고, 아버지가 포경선의 선주였었다. 윤학길은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어린 시절부터 고래고기를 즐겨 먹었다.
  • 장생포에 있는 고래문화마을에 보존된 장생포초등학교에는 윤수일과 윤학길의 전성기 시절을 기록한 사진들이 전시되어있다.
  • 성적에 비해 상복은 없어서 1988년 최다승(18승)으로 다승왕을 따낸 정도가 최고의 기록이다. 심지어 구단으로부터의 대우도 인색했는데, 일례로 1993 시즌에 203이닝 12완투 4완봉 12승 12패, 평균자책점 3.01이라는 호성적을 올렸음에도 구단에서는 윤학길이 7,800만 원의 고액 연봉자로서 성적 부진을 이유로 연봉 재계약시 연봉을 깎으려 들었다. 윤학길은 12승 투수의 연봉을 깎는다는게 말이 되나며 항의했고 결국 2백만 원 인상으로 마무리했다. 1993년의 윤학길은 저 엄청난 이닝과 완투 횟수, 그리고 훌륭한 평균자책점에 비해 승운이 정말 따르지 않았던 시즌이었지만, 당시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적만을 기준으로 이닝 소화 등의 팀 공헌도는 무시하며 연봉 삭감의 트집을 잡으려 했던 당시 프런트의 근시안적 태도에 부딪힌 결과였다.
  • 본인의 최다 완투 및 롱런 비결로 완투한 다음날에는 공을 잡지 않고 간단히 웨이트를 했다고 한다.#
  • 롯데 팬덤에서 영구결번 떡밥이 돌 때마다 아무런 논란 없이 모두가 인정하는 영구결번 후보이다.[30] 여담으로 은퇴 후 한 번도 빈 적이 없었던 그의 등번호 29번이 2022년부터 다는 선수가 없어지자 팬들이 설마를 외치며 기대하고 있다. 또한 2022년은 이대호의 현역으로서 마지막 시즌이라 이대호와 함께 영구 결번을 지정해 주는 것이 아니냐고 기대하고 있다. 일단 이대호와 동시 결번은 안 되었지만 2023년과 2024년에도 임수혁의 20번과 윤학길의 29번은 등번호 소개에서 아예 비워두며 아무도 달지 않는 걸로 결정났다. 몇 년간 이렇게 유지되다 보면 임수혁의 20번과 함께 준영구결번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31] 이후 2023년 12월 20일 롯데 자이언츠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에서 팀의 영구결번인 10번11번, 비공식 결번으로 관리 중이던 20번과 똑같이 29번 또한 회색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윤학길의 29번 또한 구단 차원에서 비공식 임시 결번 처리 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2024시즌을 앞두고 영입된 외인 빅터 레이예스가 29번을 등번호로 달면서 잠시 임시결번이 해제되었다. 당초 레이예스는 다른 번호를 달고 싶었는데 그 번호를 기존에 달고 있던 선수가 개인적인 의미를 이유로[32]내어주기 힘들다고 해 어쩔 수 없이 임시결번이던 29번을 달았다. 99번까지는 이미 기존 선수단과 코치진들이 싹 다 달고 있어 29번이 아니었다면 세 자릿수 등번호 밖에 남는게 없었다고.
  • 웃음소리가 특이한 편. 웃을 때 희희희 웃는데 진명호스톡킹에서 밝힌 일화로는 한화 코치 시절 그에게 다가오더니 누가 니 얼굴에 침 뱉었어 희희희희' 장난스럽게 웃기는 말을 하니까 뒤에 팬 하나가 마시고 있던 음료를 뿜을 정도였다고.
  • 2024년 7월 13일 관중 3000만 명 달성 기념으로 사직 야구장에서 시구를 했다. #

7. 관련 문서



[1] 상무 피닉스 야구단 입대와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참가로 인해 입단을 보류한 듯.[2] ~6월 9일[3] 6월 10일~[4] ~8월 12일[5] 8월 13일~[6] ~5월 21일[7] 5월 22일~[8] 5월 30일~6월 13일[9] 6월 14일~[10] 펜싱 선수로 2020 도쿄 올림픽 단체전 동메달,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2024 파리 올림픽 단체전 은메달을 따냈다.[11] 강병철, 임수혁, 박정태, 염종석 등과 함께 영구결번 후보로 여겨지며, 그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언급이 많이 된다. 이후 29번은 2022년부터 임시결번으로 지정되었으나 2024년 외국인 선수 빅터 레이예스의 등번호로 선택되며 일시적으로 결번이 풀렸다.[12] KBO 역대 2위는 81완투를 기록한 팀 선배 최동원.[13] KBO 역대 1위는 29 완봉승을 거둔 선동열. 또한 윤학길과 같이 공동 2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민철이다.[14] 다만 정민태는 넥센과 롯데 시절 평가가 나빴지만 한화 투수코치 시절에는 3시즌 연속 6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송은범을 2018년 필승 셋업맨으로 고쳐내면서 평가가 조금 좋아졌다. 이상군과 양상문은 감독대행/감독으로서는 그래도 평은 괜찮은 편. 2020년대 이후에는 이들을 넘을 후보로 황두성, 정현욱, 송신영이 등장했다.[15] 반대급부로 권두조 전 부경고 감독이 1군 수석코치로 합류했다.[16] 그러나 고교 시절만 해도 150km에 달하는 공을 뿌렸던 선수가 많은 이닝소화를 위해 구속을 140km 초반까지 줄인 것은 당시 롯데 투수진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17] 그런데 이는 많은 이닝을 던지기 위한 완급조절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18] 선동열은 통산 146승 중에서 절반인 73승이 구원승이다. 이는 선동열을 조커처럼 활용했던 김응용의 기용법 덕분이기도 하다.[19] 1위는 29승을 기록한 선동열. 한참 후에 정민철이 20승을 거두며 공동 2위가 되었다.[20] 다만 부상도 거의 없이 12시즌을 뛴 윤학길과 다르게 최동원은 8년 선수생활을 하면서 그마저도 막판 3년(롯데 1년,삼성 2년)은 부상과 계약문제로 거의 뛰지 못했음에도 거둔 성적이라 평가는 최동원이 압도적으로 높긴 하다.[21] 수치상으로 최동원의 6년간의 기여가 윤학길의 12년간의 그것과 비슷하다. 물론 두 수치 모두 영구결번급이다.[22] 윤학길의 별명이 '마운드의 고독한 황태자'인 이유도 결국 황제라 불린 이는 최동원이었기 때문이다.[23] 로이스터 감독을 통해서 롯데 팬들이 된 이들은 과거 롯데의 역사를 뒤져보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로이스터 감독 시기처럼 장타가 펑펑 터진 적도 없고, 손민한을 제외하면 에이스가 마땅치 않았다고 하지만 10승대 투수가 3, 4명씩 나온 적도 없다.[24] 현역 롯데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다.[25] 1998년에 이어 1999년의 17승-ERA 3.28로 다승 3위-평균자책점(방어율) 4위의 반짝 활약을 했다. 이후 2000년 선수협 문제로 구단과 갈등을 빚어 성적이 하락한 후 이후 롯데에서 더는 예전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26]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해 롯데가 8888577을 탈출한 2008년 시즌에는 손민한, 송승준, 장원준이 시즌 10승을 거두면서 이번에야말로 뭔가를 보여주는가 했지만, 바로 다음 해인 2009년부터는 손민한이 내리막길에 들어섰고, 2009년 14승으로 공동 다승왕에 올랐던 조정훈 역시 2010년 이후 부상으로 기나긴 재활을 하게 되었으며, 장원준 또한 14시즌 후 FA 자격으로 두산 베어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이후 조쉬 린드블럼, 브룩스 레일리가 나타났지만 린드블럼은 15년의 혹사로 하락세를 탔고 구단과 갈등을 빚었으며, 그동안 박세웅과 레일리가 궤도에 올랐지만 박세웅은 18년 버두치 리스트로 인한 부상으로 아웃, 그 동안 린드블럼이 두산으로 가버렸으며 박세웅이 에이스로 돌아왔을 땐 전년 에이스 댄 스트레일리가 2020년의 혹사와 노쇠화로 하락세를 탔다. 그나마 라이언 사도스키, 쉐인 유먼이 시즌 10승을 올리기도 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외국인 투수이고, 실제로 팀에서 머무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원투펀치 이상의 선발진이 나오는 듯 하다가 꼭 누군가가 쇠락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27] 윤학길, 박동희, 염종석이긴 한데, 이때도 박동희는 전반기를 날리고 후반기부터 등판했기 때문에 정규시즌 성적은 결코 좋다고 하기 어려웠다. 단지 그 해 한국시리즈 MVP로 대표되는 포스트시즌의 대활약으로 인한 것이었다.[28] 박석진, 기론, 강상수 등이 있긴한데 모두 전성기가 짧았으며, 매년 4~5점대 방어율을 찍던 가득염이 그나마 유명한 편이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그런데 강상수는 가끔 사람같이 던질때도 있었고, 2000년엔 커리어하이를 찍었다.[29] 특히 단체전 동메달 결정전에서 10점차 뒤지던 6바우트에서 혼자 11점을 쓸어담으며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이는 동메달 획득의 큰 발판이 되었다.[30] 염종석, 주형광과 함께 무조건 영구결번 거론되는 1순위로 앞의 둘 보다 더 지지도가 높다.[31] 20번은 진승현이 아버지 진갑용의 등번호와 같아서 학창 시절 내내 달았던 등번호이며, 프로에 와서도 달려고 했으나, 구단 측에서 임수혁의 등번호라 달지 못하는 번호라고 말하면서 구단 측에서 사실상 영구결번에 준하는, 비공식 영구결번으로 관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32] 그 선수 어머니의 기일과 관련된 번호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