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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호

장광호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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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8

{{{#fab93d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25번}}}
김바위
(1985~1991)
장광호
(1992~1999)
필립스
(2001)
SK 와이번스 등번호 52번
팀 창단 장광호
(2000)
이우인
(2001)
{{{#fab93d [[현대 유니콘스|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32번}}}
한동희
(2000)
장광호
(2001)
심정수
(2002~2004)
{{{#fab93d [[현대 유니콘스|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44번}}}
심정수
(2001)
장광호
(2002)
박기범
(2004)
{{{#fab93d [[현대 유니콘스|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82번}}}
하기룡
(1996~1997)
장광호
(2003~2007)
팀 해체
{{{#fff [[우리 히어로즈|우리]]/[[서울 히어로즈|서울 히어로즈]] 등번호 82번}}}
팀 창단 장광호
(2008)
김필중
(2009~2015)
LG 트윈스 등번호 82번
최계훈
(2006)
장광호
(2009~2015)
안상준
(2018~2021)
SK 와이번스 등번호 82번
강혁
(2014~2015)
<colbgcolor=#ff6600><colcolor=#fff> 장광호
(2016)
김필중
(2018~2020)
}}} ||
파일:덕적고 장광호.jpg
<colbgcolor=#000050><colcolor=#fff> 덕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장광호
張光鎬 | Jang Kwang-Ho
출생 1967년 4월 14일 ([age(1967-04-14)]세)
인천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서림초 - 동산중 - 동산고 - 인하대[1]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2년 2차 1라운드 (전체 5번, 태평양)
소속팀 한국화장품 야구단 (1990~1991)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1992~1999)
SK 와이번스 (2000)
현대 유니콘스 (2001~2002)
지도자 현대 유니콘스 2군 배터리코치 (2003~2007)
우리-서울 히어로즈 2군 배터리코치 (2008)
LG 트윈스 2군 배터리코치 (2009~2012)
LG 트윈스 1군 배터리코치 (2013~2014)[2]
LG 트윈스 2군 배터리코치 (2014~2015)[3]
SK 와이번스 2군 배터리코치 (2016)
덕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22~)
가족 아들 장승현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경력
3. 지도자 경력4. 연도별 성적5. 기타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태평양-현대, SK 와이번스 소속의 포수이자 前 현대 유니콘스, 우리 히어로즈, LG 트윈스, SK 와이번스의 배터리코치.

인천야구의 프랜차이즈 선수지만 태평양 시절에는 김동기의 존재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가 현대 유니콘스가 되면서 주전 자리를 굳히려는 와중에, 큰 부상과 쌍방울에서 영입된 박경완에 밀려버린 비운의 선수.

차남인 장승현 역시 포수로, 제물포고를 거쳐 두산 베어스 소속이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아마 시절에는 김동수 다음가는 공격형 포수였다. 동산고를 거쳐 인하대 4학년 때는 1989년에 대학 포수 최초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고, 실업야구 한국화장품 시절에는 타격 트리플크라운을 기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1992년 KBO 드래프트에서 태평양 돌핀스의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아 입단한다.

2.2. 프로 경력

1993시즌 종료 후 현역 입대하면서[4]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았으나 생계 유지 곤란 사유[5]의가사 제대하면서 팀에 복귀해 계속 백업 포수 역할을 수행했다.

현대로 팀의 간판이 바뀌고 베테랑 김동기가 오른발 마비 증상으로 일찌감치 시즌아웃이 되었고 끝내 33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프로 은퇴 수순을 밟으면서 1996년 부동의 주전 포수가 돼[6] 팀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해태 타이거즈와의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큰 부상을 입기도 했는데 광주 2차전에서 중견수 박재홍이 홈으로 송구한 공이 홈플레이트 앞 그라운드에서 크게 한 번 튀었고 그 공이 장광호의 얼굴을 직격으로 강타했다. 이 부상으로 장광호는 눈썹 주변 부분을 11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남은 한국시리즈 경기는 백업인 김상국과 백업의 백업(...)인 신인 포수 김형남이 치러야 했는데 한국시리즈 최초의 노히트 노런정명원의 노히트 노런을 도운 것은 사실 장광호가 아니라 김형남이었다. 김형남이 1회부터 8회부터 볼을 받았고 김재박 감독이 9회초에 장광호를 내보내 정명원의 노히트노런이 완성됐다.[7] 5차전부터는 장광호가 마스크를 썼고 결국 팀의 준우승으로 그 시즌이 끝났다.

그러나 1997년에는 부상으로 팀 내에서 꾸준히 주전으로 활도한 것은 1996년이 유일했다. 결국 1998년 박경완이 이적하여 에 합류하자 백업으로 밀렸다. 그나마 그해 팀이 우승한 것이 위안이랄까.

2000년 SK 와이번스가 창단하면서 신생팀 전력보강선수로 지명되어 현금 10억에 SK로 트레이드되었다.[8] 그러나 5,000만원에 재트레이드 형식으로 다시 현대로 돌아왔고[9] 2002시즌 후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이후 현대 유니콘스, LG 트윈스에서 배터리 코치를 하다가 2016년, 고향팀에서 배터리 코치를 맡았지만, 시즌 후 재계약 불가로 인해 팀을 떠났다.

2021년 12월에 창단된 전국유일의 도서지역 야구부인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의 덕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에 취임했다. 첫 시즌인 2022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팀을 16강전에 올려놓는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

4. 연도별 성적

역대 성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1992 태평양 67 .281 47 8 0 4 19 20 0 15 0 24 .341 .401 .742
1993 98 .172 48 10 0 4 24 17 1 30 2 56 .256 .251 .507
1994 78 .212 48 9 0 6 29 22 1 14 1 45 .257 .332 .589
1995 49 .176 18 4 0 1 3 7 0 8 0 29 .236 .245 .482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1996 현대 107 .212 53 9 0 2 13 18 0 17 1 37 .263 .272 .535
1997 81 .218 43 9 1 3 13 20 1 12 0 24 .262 .320 .582
1998 65 .259 15 5 0 2 10 15 1 0 0 11 .254 .448 .703
1999 65 .274 20 5 0 3 18 11 1 4 0 10 .308 .466 .77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2000 SK 12 .136 3 0 0 0 3 0 0 0 0 6 .130 .136 .267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2001 현대 27 .154 2 0 0 0 0 1 0 2 0 1 .267 .154 .421
KBO 통산
(10시즌)
649 .214 297 59 1 25 132 131 5 102 4 243 .268 .312 .580

5. 기타

태평양 - 현대 시절 같이 한솥밥을 먹었던 염경엽LG 트윈스 감독 못지 않은 물방망이였다. 통산 타율이 염경엽보다 겨우 1푼 9리가 높았을 정도. 물론 장광호의 포지션인 포수나 염경엽인 포지션인 유격수가 전부 수비가 중시되는 포지션이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물방망이였던 건 사실이다.

이 점은 아마 시절 타격 부문에서도 뛰어났던 것과는 대조적인데, 프로 입단 후에는 나무 방망이에 적응을 하지 못해 타격 성적이 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10]

6. 관련 문서



[1] 1986학번[2] ~5월 11일[3] 5월 12일~[4]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고등학교 때 양친이 모두 돌아가셔서 당연히 면제될 줄 알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가 영장이 왔다고 한다(...).[5] 병역법 상 3명 이상의 부양 가족이 있어야 제2국민역 처분을 받는데, 이등병이던 94년 3월에 부인이 둘째 아들을 출산한 덕에 94시즌 개막을 며칠 앞두고 극적으로 제대했다고 한다. 그 둘째가 바로 장승현.[6] 1996년 신인 김형남은 미완의 유망주였고, 투수 박은진을 내주고 한화에서 데려 온 김상국은 장광호의 백업에 그쳤다.[7] 노히트 노런의 수모를 당한 해태 타이거즈 선수단은 잠실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몽둥이찜질을 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최해식김정수는 한국시리즈 당시 정명원의 구위가 노히트노런을 기록할 만큼 뛰어나지는 않았으며 김호인, 허운 등 인천 지역 심판이 알게 모르게 도와준 것이 아닌가 의혹을 제기했다. 그해 현대가 한화와의 준플레이오프를 이기고, 쌍방울과의 플레이오프에서도 2패 후 3승으로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온 것도 심판 덕을 본 것 아니냐는 주장을 펼쳤다.[8] 장광호와 더불어 기존 7개 구단 선수 중 보호명단에서 제외된 선수를 인당 10억원씩 주고 신생팀 SK가 데려갈 수 있었는데, 두산 투수 강병규, LG 외야수 김종헌, 삼성 내야수 송재익, 해태 투수 권명철, 한화 포수 김충민, 롯데 김태석이 이 과정을 거쳐 이적했다.[9] 당시 현대의 주전포수는 박경완이었지만, 1군 경험이 있는 백업포수가 이재주 밖에 없었다. 2군에서 올라온 김필중이 18경기를 나왔지만 존재감이 없었다.[10] 당시 아마추어 야구에서는 알루미늄제 금속 배트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