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16:54:22

김호인

김호인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삼미 슈퍼스타즈 등번호 18번
팀 창단 김호인
(1982~1983)
최홍석
(1984~1984.7.1.)
}}} ||
파일:김호인.jpg
KBO 비디오판독센터장
김호인
金浩仁 | Kim Ho-In
[1]
<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1954년 9월 11일 ([age(1954-09-11)]세)
인천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인천고 - 건국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 창단멤버
소속팀 한국화장품 야구단 (1977~1978, 1981)
삼미 슈퍼스타즈 (1982~1983)
빙그레 이글스 (1985)
경력 KBO 심판위원 (1987~2007)
KBO 심판위원장 (2006~2007)
KBO 규칙위원 (2006~2012)
KBO 경기운영위원 (2008~2014)
KBO 심판학교장 (2015)
KBO 비디오판독센터장 (2017~)
병역 육군 경리단 (1979~1980)
1. 개요2. 선수 경력3. 심판 경력4. 연도별 주요 성적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삼미 - 빙그레 소속의 야구선수이자 KBO 리그 심판위원 및 경기운영위원, 현 KBO리그 비디오판독센터장.

2. 선수 경력

파일:삼미김호인.jpg
선수 시절 김호인.

인천고등학교 시절 조흥운과 함께 팀 중심타선에서 홈런을 양산하는 대형타자였고, 1973년 건국대학교에 입학 후 같이 입학한 조흥운과 더불어 이해창, 김우근, 조종규 등과 함께 건국대 야구부 타선을 구성하던 타자였다. 1974년 제 8회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에서 결승전 결승홈런을 날리면서 건국대의 우승을 견인하던 강타자였다.

졸업 후 1977년 한국화장품 야구단 창단 멤버로 선발되어 김재박, 심재원, 조흥운과 함께 타선을 이끌며 77시즌 한국화장품의 전기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한국화장품에서도 김호인은 중심 타선에 배치되며 한국화장품의 전성기를 이끌던 타자였다. 1979년 육군 경리단 야구부에서 군생활을 보낸 후 1981년 시즌까지 실업야구에서 뛰다가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 창단 멤버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아마야구, 실업야구에서의 명성과는 달리 김호인은 프로에서 성공하지 못하였다. 물론 82시즌 당시 나이가 28세로 당시 야구선수들의 기량 측면에서는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였지만, 팀 동료였던 김재박 등 다른 선수들과 달리 김호인의 프로 생활은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김호인은 82시즌 개막전 5번 좌익수로 선발 출장하며 삼미의 중심타선을 맡아줄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받았지만, 팀의 중심타선을 맡았던 양승관, 금광옥의 부상과 김경남의 슬럼프로 인해 빈약해진 타선을 김호인 혼자 책임질 수 없었다. 얇디 얇은 선수층의 삼미에서 많은 경기에 출장해야했지만 시즌 80경기 중 64경기만 출장하였다. 이미 노쇠화가 진행된 탓인지 83년 시즌엔 삼미의 전기리그 2위 돌풍에서 아예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하면서 결국 83년 시즌 이후 팀에서 임의탈퇴로 유니폼을 벗게 되었다. 최초 84시즌 보류선수 명단엔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미 해태, 삼성에서 김우근과 정구왕을 영입하여 외야 자원을 보강한 삼미는 김호인을 임의 탈퇴하였다.

임의탈퇴로 2년간 다른 팀에 부름을 받지도 못하고 허송세월을 할 수 밖에 없던 김호인에게 마지막 기회가 온 것은 1985년 창단한 빙그레 이글스였다. 신생구단으로서 역시 빈약한 선수층을 가질 수 밖에 없던 빙그레에게 김호인의 실업야구 시절 커리어를 믿고 김호인을 영입하였다. 그러나 빙그레에서도 85시즌 2군리그에서만 출장하였을 뿐 1986년 시즌 전 빙그레에서 방출당하고 커리어를 마감하게 되었다. 김호인은 실업야구에선 쏠쏠한 활약을 보여준 강타자였지만 노쇠화와 더불어 프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잊혀진 비운의 선수였다.

3. 심판 경력

은퇴 후 1987년부터 2005년까지 KBO 심판위원을 맡다가 2006년 KBO 심판위원장으로 승진하였다.[2] 그러나 2007년 허운[3]과의 심판 파벌 싸움 논란으로 허운과 같이 심판위원직을 사직하였다. 이후 2008년 경기감독관을 거쳐 2017년 비디오판독센터장으로 부임하였다. 참고로 파벌싸움으로 인해 같이 나간 허운도 2020년 KBO 심판위원장으로 부임하였다.

2023년 8월 1일 포항 KIA:삼성 경기에서 류지혁 홈런 관련 비디오 판독 오독 사건으로 인하여 5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다.

아들 김용우도 야구선수였다. 인천고를 졸업하고 1998년에 LG에 지명을 받았고 연세대를 거쳐 2002년에 LG에 입단했다. 그러나 병역비리 사태에 연루되었고, 선수 생활을 그리 오래하지는 못 했다. 아들이 출전한 경기에서 구심을 맡은 바 있었으며 이후에 KBO는 규정을 개정하여 부친이 아들의 경기 때 구심을 맡을 수 없도록 하였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삼미 64 215 .279 60 16 0 6 24 23 4 17 .437 .332
1983 1군 기록 없음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5 빙그레 1군 기록 없음(소속팀 1군 미참가)
KBO 통산
(1시즌)
64 215 .279 60 16 0 6 24 23 4 17 .437 .332

5. 관련 문서


[1] 위키백과에는 한자 이름이 金鎬寅으로 되어있지만 옛날 신문기사에는 金浩仁으로 표기되어 있다.[2]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최해식이 출연해 1996년 한국시리즈 6차전 당시 김호인 구심의 편파판정에 강력하게 항의하다가 퇴장당했다고 술회했다.[3] 김호인과 같은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의 야구선수출신 심판으로 허운이 3살 더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