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2 16:40:31

삼미 슈퍼스타즈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코미디빅리그에 출연했던 안영미 & 강유미 & 김미려로 결성된 개그팀에 대한 내용은 코미디빅리그/2012-2013 문서의 2.17번째 문단을 참조하십시오.
파일:attachment/sammi_superstars_1.png
삼미 슈퍼스타즈
Sammi Superstars
창단 1982년 2월 5일
매각 1985년 5월 1일
모기업 삼미그룹
연고지 인천직할시, 경기도, 강원도, 이북 5도 (1982~1984)[1]
홈 구장 도원야구장 (1982~1984)
마지막 경기 1985년 6월 21일
vs. 롯데 자이언츠
구단명 변천사 삼미 슈퍼스타즈 (1982~1985)
청보 핀토스(1985~1987)
태평양 돌핀스(1988~1995)
현대 유니콘스(1996~2007)
해체
삼청태현
삼미 슈퍼스타즈
(1982~1985)
청보 핀토스
(1985~1987)
태평양 돌핀스
(1988~1995)
현대 유니콘스
(1996~2007)

1. 소개2. 구단 창단과 매각
2.1. 눈물겨운 기록들
3. 팬덤4. 마스코트5. 삼미그룹, 그 후...6. 기타7. 역대 성적

1. 소개

1982년에 창단해서 1985년 여름 풍한그룹에 매각되어 이후 청보 핀토스로 팀명이 변경되었다. 연고지는 인천-경기-강원. 참고로 인천 도원야구장 보수 공사관계로[2] 1982년 홈경기 개막전도 춘천에서 열렸으며, 이후에도 제2연고지로서 춘천 경기가 계속 있었다. 지금의 군산 야구장, 청주 야구장이나 포항 야구장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모기업 삼미그룹은 무역, 해운, 광업, 철광 등이 주종목으로 프로야구의 홍보효과를 누릴 만한 소비재 분야 계열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3] 구단 운영을 통해 시너지를 낼 만한 요소가 없었지만, 당시 30대였던 김현철 회장이 스포츠를 좋아했고, 미국 유학시절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광팬이어서 메이저리그가 미국의 국민스포츠로 자리잡은 것과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이 그 지역사회의 저명인사가 되어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걸 목격했으며, 프로야구의 발전 가능성과 당시 KBO 사무총장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야구팀을 창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야구계에선 인천-경기-강원 지역연고팀으로 강원도가 고향인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에 접근했으나 거부당하였다.[4] 이후 급하게 대타를 찾는 와중에 삼미가 아무런 준비 없이 뛰어든 것이다. 다른 기업을 낀 창단이 여의치 않아 5개팀으로라도 준비하려는 찰나에 KBO 첫 총회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참가의사를 밝혔다.

팀명은 악의무리로 부터 지구를 지키는 슈퍼맨에서 따온 슈퍼스타즈인데 정작 1982년 프로야구 개막전에 등장한 것은 치어리더 원더우먼 이었다. 당시는 여성이 피켓을 들고 나오는게 상식이었기 때문에 슈퍼맨과 동급 내지는 동료로 인식되는 원더우먼이 대신 참석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982년 2월 5일 인천 상공회의소 강당에서 23명의 슈퍼맨이 참석한 삼미의 창단식이 열렸다.

2. 구단 창단과 매각

프로야구 출범 전, 많은 인천 야구팬들의 기대와 함께 기적을 기대하며 프로야구 경기를 지켜 봤는데, 첫 경기에서는 인호봉의 3실점 완투와 양승관의 3타수 2안타 2타점의 활약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5:3으로 이겼지만, 이후 삼미는 전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최하위로 추락했다. 특히 4월 25일 춘천에서 열린 OB전에서는 경기 초반 8대0으로 앞서다가 11대12로 대역전패 당하며 분위기가 급락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4윌27일 박현식 창단감독이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퇴진했고 이후 이선덕 코치가 감독대행이 되어 팀을 이끌었지만 탈꼴찌는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멀리 있었다. 이 해 전 후기리그에서 거둔 승률 0.188(15승65패)은 프로야구 역대 최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삼미는 프로야구 출범당시 유일하게 국가대표 출신이 단 한 명도 없는 자타공인 최약체팀이었다.[5][6] 매년 꾸준한(?) 성적부진으로 매각될 때까지 6개 구단들 중에서 항상 6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1982년 삼미가 원년팀 OB에게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16전 전패를 기록하는 등 상위권과 하위권의 전력차가 크게 나자 KBO는 결단을 내렸다.

해외동포 선수에게 문호를 개방하기로 한 것. 애초 1985년부터 시행할 방침이었지만 전력균형을 위해 1983년으로 앞당겼다. 이에 삼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91승 84패을 거둔 장명부와 1982년 2군 웨스턴 리그 타율 2위(0.339)에 오른 이영구를 영입했다. 여기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인 임호균, 김진우, 정구선, 이선웅 등이 가세하면서 전력이 탄탄해졌다. 또 박현식 초대감독과 함께 인천야구의 대부이며 맹장인 김진영 인하대 감독을 사령탑에 올리는 둥 일련의 움직임은 재창단에 방불케 했다.

예외적으로 프로야구 출범 이듬해인 1983 시즌에 427이닝 30승 16패 6세이브라는 말도 안 되는 괴력을 발휘한 장명부와 임호균의 활약으로 전후기 2위씩 차지하는 등의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당시에는 전후기 1위 두팀만 한국시리즈 티켓을 가져가는 제도라 삼미는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7] 전기리그에서 시즌의 1/5 가량 남은 무렵 2위 해태에 2.5 경기차로 앞서있어 전기리그 우승이 유력해보였지만 김진영 감독이 청룡과의 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하고 머리로 주심의 배를 들이받고 유니폼 상의를 풀어헤친 채 폭언을 퍼붓고 급기야 백스톱 그물 뒤에서 경기 속개를 종용하는 이기역 경기 감독관의 넥타이를 잡아 끌다가 드롭킥을 선사하는 추태를 벌이다 퇴장당하는 사태로 구속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고 결국 해태와의 광주 3연전에서 스윕패를 당하며 2위로 내려간것이 뼈아팠다.

그리고 다음해부터 장명부가 혹사의 여파로 무너지자 삼미는 다시 부동의 약팀으로 돌아가버렸다. 거기다 장명부는 감독이상으로 팀을 좌지우지 했다. 투수 육성은 그렇다고 해도 트레이드, 전지훈련 까지 깊숙이 개입하면서 삼미의 장명부가 아니라 장명부의 삼미가 된것이다. 1983년 10월 27일 삼미는 이 해 12승을 올린 임호균을 롯데로 보내고 박정후(투수), 김정수(1루수), 권두조(유격수), 우경하(외야수)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전력강화를 위해서 센터 라인을 강화해야 한다는 장명부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임호균의 공백은 박정후, 신태중, 정성만으로 메우겠다는 복안이었지만 1984년 시즌에 이들이 거둔 성적은 14승 27패에 그쳤다. 여기에 장명부 또한 전년도 30승에 따른 1억원 보너스롤 주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984시즌은 태업성 플레이로 일관하며 13승 20패7세이브로 추락했다. 필드에 나서기도 전에 내부 싸움에 지친 삼미는 전 후기리그 에서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1985년 은 더 비참했다. 3월 30일 롯데와 치른 개막전에서 5대1로 승리를 올릴 때만 해도 분위기는 again1983 이었다. 그러나 이후 한 달간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하며 18연패라는 프로아구 사상 최다 연패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4월 30일 에서야 MBC를 상대로 최계훈이 4대0 완봉승을 거두며 기나긴 연패의 악몽에서 겨우 벗어 날 수 있었다. 이날 인천 도원구장은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한 듯 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연패 탈출의 기쁨도 잠시 5월 1일 결국 전기리그를 끝으로 성적부진과 모기업의 재정난을 이유로 청보식품에 70억원으로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1985년 6월 29일, 청보 핀토스로 탈바꿈했다. 당시 삼미 구단주였던 김현철 회장은 매각 협상이 끝나고 매각서에 사인한 뒤 그날 밤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웠다는 얘기가 있다. 얼마나 아쉬웠으면...

2.1. 눈물겨운 기록들

아래의 기록은 삼미 슈퍼스타즈가 보유한 독보적 기록으로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불멸의 기록들이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1982년에는 통합성적 15승 65패(전기리그 10승 30패, 후기리그 5승 35패)를 기록하며 세계 프로야구 어디에도 없는 전무후무1할승률(승률 .188)[13][14] 유일무이특정 구단 상대 전패(OB 베어스[15]전 16전 전패) 기록하기도 했다.

2018시즌 LG 트윈스가 두산 베어스에게 0승 15패까지 몰리며 삼미에 이은 두번째 대기록을 달성할 뻔 했지만 마지막 16차전에서 LG가 이기는 바람에 여전히 유일무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1985년 3월 31일부터 4월 29일까지 무려 18連敗[16]를 기록, 연패 기록의 전설로 군림하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1999년 시즌에는 쌍방울 레이더스가 그 기록을 깰 뻔했으나 LG 트윈스가 패배하는 바람에 명예(?)를 안지 못하였고, 2002년 시즌에는 롯데 자이언츠가, 2010년 시즌에는 기아 타이거즈가 16연패로 그 기록에 도전(?)했지만 각각 LG 트윈스, 한화 이글스가 그 기록을 막았기(?) 때문에 아직 최다 연패 기록은 삼미 슈퍼스타즈이다.

김은식의 저서에 따르면 선수단 등록에 필요한 최소 엔트리를 못 채워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선수단 모집을 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프로야구단에 사회인 야구 뛰는 사람들이 1군 선수로 낙점받았다는 소리. 이는 선수 풀이 좁았던 것도 있지만 운동선수 그 자체를 직업으로 삼는 프로와 달리 야구단을 운영할 여건이 되는 수준의 기업 내지는 은행에서 안정적인 직장인 신분으로 선수를 할 수 있는 실업야구가 더 높게 평가 받고 있었던 게 큰 영향을 끼쳤다. 현대 야구는 프로 선수가 FA로 수억~수십억을 벌면 그 것으로 퇴직 이 후를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지만 당시에는 프로 야구가 출범한 직후기 때문에 선수 생활 은퇴 후에도 사원 신분으로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으며 고위 임원까지도 노릴 수 있는 실업야구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수 1명이 아쉬운 판에 들어왔던 선수를 내치기도 했다. 심석종고(현 심석고,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야구부 운영) 시절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던 투수 이하룡이 훈련 태도 불성실을 이유로 원년 시즌 개막 전 퇴출되었을 정도.

암흑기 막장 시절 한화가 이 팀의 기록을 경신한 건 시즌 팀 방어율뿐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세운 기록의 비범함을 엿 볼 수 있다. 비슷한 의미에서 한국야구의 전설로 기록되는 선수인 감사용[17]도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이었다. 뭘 좀 해보려고 했던 박현식 감독도.. 통산 55승 79패의 단일 시즌 30승 투수도 있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매각된 후 청보 핀토스(1985)-태평양 돌핀스(1988)-현대 유니콘스(1996)로 이름이 바뀐다. 문제는 삼미의 후속팀인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의 성적도 시원찮았다는 점이다. 현대 유니콘스는 성적은 앞의 인천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지만 팀 말년에 인천을 버리고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려 시도한 점이 있고, 때마침 일어난 현대그룹의 왕자의 난으로 인해 지원이 끊겨 팀이 해체되어 결국 삼청태현의 명맥은 끊기게 되었다.

1982년의 방어율은 6.23으로 당연히 최하위였으며, 이 팀 평균자책점 기록은 한화 이글스2014년6.35를 기록하며 갱신할 때까지 32년간 최악의 기록이었다. 또한 1982년 6월 12일에는 삼성 라이온즈오대석에게 KBO 리그 1호 사이클링 히트를, 7월 21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김일권에게 KBO 리그 1호 단독 홈스틸을 허용했다.

3. 팬덤

2000년대에는 박민규의 소설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삼미 슈퍼스타즈의 패전처리 투수[18] 감사용의 일화를 각색한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타카하시 겐이치로의 소설인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와 모티브가 비슷해서 표절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19]

그러나 꼭 그게 아니라도 삼미 시절부터의 팬으로 시작한 이들 중에서 문학성이 끝내주는 경우가 많다. 야구의 추억을 연재한 김은식[20]이나 인천 출신으로 인천 야구에 대한 책을 여러편 적은 고 이종남 기자 같은 널리 알려진 인물들 말고도, 인터넷상으로도 삼미에 대해서 글을 써놓은 문서들을 보면 유달리 필력들이 좋다.

4. 마스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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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호랑이(해태 타이거즈), 곰(OB 베어스), 원더우먼(삼미 슈퍼스타즈), 용(MBC 청룡), 검을 든 거인(롯데 자이언츠), 사자(삼성 라이온즈).

팀의 심볼로 다른 팀이 동물이나 상징 로고를 그려넣는 것과 달리 삼미는 "배트를 든 슈퍼맨"을 선택했다. 마침 영화 슈퍼맨이 전세계적으로 대흥행할 때라 창단 당시 최고의 인기 팀으로 군림했었다.[21] DC 코믹스: 너 고소 넥센 히어로즈마블과 손을 잡았다는 게 함정 스파이더맨은 여기서도 어벤져스에 못 꼈다.

5. 삼미그룹, 그 후...

구단 매각 당시 삼미그룹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재정위기에 몰려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골칫거리는 해운업이었는데, 70년대 말 해운경기가 호황을 누리자 이에 편승하려고 소유 선박 및 용선량을 무리해서 늘렸다가 얼마 안 가 해운업에 극심한 불황이 찾아오고 석유파동이 겹치면서 선단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헐값에 다 팔아치우고 아예 해운업에서 철수를 해야 했던 것. 결국 해운사를 비롯한 그룹 계열사들, 야구단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고도성장의 상징이기도 했던 그룹 사옥까지 팔아치우는 구조조정 끝에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무리한 다각화로 피를 봤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그룹의 노선을 특수강 분야에만 집중하기로 했고 때마침 찾아온 3저 호황과 철강수요 증가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전성기에 버금가는 재계순위를 되찾았으나, 92년 찾아온 철강산업의 불경기는 특수강 분야에 올인했던 삼미그룹을 또 한번 통째로 뒤흔들었다. 또 다시 부동산과 주요 계열사들을 매각해가며 꾸역꾸역 부채비율을 줄여가고 있었는데...

97년 1월 한보사태가 터졌고 결국 한보그룹부도가 났다.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제일은행은 급한 대로 거래기업 중 가장 만만한 삼미의 목을 졸랐다. 쉽게 말해 부도가 나도 그나마 국가경제에 큰 타격이 없을 기업이라 생각했던 것. 그렇게 97년 3월, 삼미그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22]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금시장의 경색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 그렇게 진로(기업), 기아자동차, 해태그룹 등 재벌들의 부도가 이어지고, 여기에 정부의 정책 실패가 곁들여져 환율이 급등하면서 외환위기가 찾아왔으며 결국 대한민국은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외환위기 문서를 참고할 것.

6. 기타

  • 워낙 프로야구사에서 독보적으로 저조한 성적을 거둔 탓인지, 일반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사실상 아마추어, 직장인 야구팀'이란 식의 인식이 박혀 있고, 심지어 나무위키의 본 항목에도 그런 식의 서술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삼미는 승률 2할에도 못미쳤던 원년 창단 당시에도 국대 멤버가 없었을 뿐, 엄연히 고교 및 대학, 실업야구에서 활동했던 멀쩡한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재미를 빙자하여 프로야구 역사의 한획을 그었던 팀과 선수들에게 결례를 저지르는 몰지각한 행태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 오래된 팀이라 최근 유입된 사람들은 이 팀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지만 요즘 신세대들에게는 코미디빅리그에 출연하는 개그우먼 3명 트리오 이름으로 알려져 있을지도...
  • 팀의 상징색은 파란색, 하늘색 등을 사용했다.

7. 역대 성적

­ 우승
­ 준우승
­ 포스트시즌 진출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 순위 팀이름 경기수 승률
19826위/6팀[23] 6위 삼미 슈퍼스타즈 80156500.188
19833위/6팀[24][25] 3위 100524710.525
19846위/6팀[26] 6위 100385930.392
19856위/6팀[27] 6위 55154000.273
이후 역사는 청보 핀토스


[1] 당시에는 광역 연고제였다.[2] 당시 도원야구장은 1982년 9월 한국에서 열렸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보조 경기장으로 쓰였다. 이 때문에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3] 82년 부산의 대명목재를 인수하면서 대명목재 소유의 유나백화점도 인수해 유통업에도 진출하긴 했다. 본사였던 서울 삼일빌딩 지하에도 매장을 운영했지만 결국 지방 향토 백화점 브랜드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고 이를 해결하려 이태원동에 세웠던 비바백화점은 슈퍼스타즈을 매각하고도 한참 뒤인 91년에야 문을 열었다. 그나마도 얼마 못 가 삼미그룹의 해체과 함께 사라졌는데...그 건물을 사서 리모델링해 들어온 것이 바로 제일기획 되시겠다. ...어?[4] 당시 정주영 회장은 대한체육회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1988 서울 올림픽 준비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렇다고 현대그룹이 야구를 싫어하거나 무관심하지는 않아서 실업야구 시절 현대건설 야구단을 창단한 바 있고, 현대 피닉스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14년 뒤 현대그룹이 인천 연고의 프로야구팀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4년후 인천을 버렸고[5] 창단식 당시 박현식 감독이 "우리 팀은 모두가 슈퍼스타입니다."라는 변명을 한 적이 있다(...). 정작 박현식감독은 감독제의가 들어왔을 때 스타는커녕 국대출신 한 명도 없다고 디스한 적이 있는 게 함정. 단 이땐 하필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때문에 난다 긴다,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죄다 국가대표 합숙으로 프로에 입단이 힘들었고, 그 국대출신들은 1983년에 입단하게 된다. 삼미도 당시 인천출신 국대스타였던 투수 임호균, 포수 김진우를 어떻게 해서든 데려오려고 갖은 수를 썼지만 끝내 실패했다. 인천야구 골수팬들은 이 둘만 데려왔어도 삼미의 원년 굴욕은 있지도 않았을꺼라고 지금도 얘기하고 다닌다.[6] 의외로 삼미가 원년에 압도적으로 밀린 팀들은 OB, 삼성, MBC 뿐이었고 롯데와 해태에게는 각각 5승, 6승을 거두고 삼성과 MBC에게는 각각 2승씩 거두었다. 근데 OB한테 전 경기 내주며 우승을 선물한 건 안 비밀.[7] 2위가 해태였는데 마지막 3연전 2.5경기차에서 3연패하며 전기리그 준우승[8] 1982년 페넌트레이스 15승 65패[9] 1982년 페넌트레이스 후기 리그 5승 35패[10] 1985년 3월 31일 구덕 롯데 자이언츠 전 ~ 4월 29일 인천 롯데 자이언츠[11] 16전 0승 16패(...)[12] 2003년 롯데가 KIA전 상대 18연패, 2018년 LG가 두산전 상대 17연패를 당하여 특정팀 상대 최다 연패 기록은 갱신됐다.[13] 이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최저승률은 1999년 대구 동양 오리온스가 0할대 승률로 경신한다. 당시 시즌 승률은 0.067. 물론 0할 0푼 0리 승률을 기록한 팀도 프로 스포츠에서 나왔으나 부정 행각에 대한 징계 차원으로 준 것이라 기록에는 집계되지 않는다.[14] 1899년에 메이저리그에서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라는팀이 20승 134패(승률 .130)로 최하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단, 이때는 한 구단주가 두 구단을 운영할 수있는 신디게이트 방식이 허용되던 때라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와 세인트루이스 퍼펙토스를 같이 운영하던 구단주가 우승가능성이 더 많아보이던 세인트루이스에다 클리블랜드의 주축선수들을 다 넘겨버린거라 가능했다. 이 당시 사이 영도 세인트루이스로 이적. 그리고 이 시즌이 끝나고 신디게이트 경영은 금지되었고,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는 해체를 하게 된다.[15]두산 베어스[16] 이 국내 프로스포츠 최장연패 역시 1999년에 대구 동양 오리온스가 두 배 가까이 되는 32연패를 기록하며 갈아치웠다. 이후 2008~2009년 V리그에서 수원 KEPCO 45가 지난 시즌 포함 시 27연패로 삼미의 기록을 3위로 끌어내렸다.[17] 그러나 감사용은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영향 때문에 일반인 출신으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엄연히 전문 선수였다. 전문대 졸업 후 실업팀의 콜을 받지 못해 직장인 야구팀(오늘날의 사회인 야구)에 몸담았을 뿐. 축구로 치면 무리뉴와 빌라스-보아스가 비선수 출신 감독으로 오해받는 것과 마찬가지다.[18] 물론 삼미 슈퍼스타즈가 있었던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패전처리 투수는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았다. 인원이 적었던데다가 선발, 중간, 마무리라는 분업 체계가 희박했던 시절이었으니.[19] 결국 작가인 박민규가 표절을 인정하긴 했다.[20] 유년 시절 인천에서 자랐다고 전해진다. 그 덕에 KBS N 스포츠에서 제작한 스포츠 다큐 인천야구의 추억에서 스토리 텔러의 역할을 맡았다.[21] 참고로 삼미의 여성 마스코트는 원더우먼이었다.이벤트가 열리면 다른 팀들은 동물옷을 입고 나오는데 삼미만 늘씬한 미인 언니가 나와서 주목을 받았다. 롯데는? 롯데는 카우보이 옷을 입은 아재가 나왔다. 진짜다![22] 한 분야에만 집중한 덕분인지, 기업 자체의 저력은 인정받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상황은 면했다. 지금의 현대비앤지스틸이 바로 옛 삼미특수강. 이외에 삼미건설이라는 중소건설사가 있다. 여기는 본래 삼미그룹과의 연관성은 없으나, 과거 삼미그룹의 중심이었던 (주)삼미를 인수하고 삼미그룹의 부도 전 마크를 사용하고 있는 건설사다.[23] 전기 6위, 후기 6위[24] 전기 2위, 후기 공동 2위[25] 물론 다들 알다시피 한 선수가 거의 다 만들었다.[26] 전기 6위, 후기 6위[27] 전기 6위, 후기부터는 청보 핀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