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06 18:37:26

김용희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에 대한 내용은 김용희(축구선수) 문서를, 대한민국의 배우에 대한 내용은 김용희(배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김용희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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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4

1973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MVP
홍재진
(중앙고등학교)
김용희
(경남고등학교)
장정호
(경북고등학교)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dywc2m8WK1sqk8veo4_r1_540.png
1982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1983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dywc2m8WK1sqk8veo4_r1_540.png
1985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

파일:5p4rcEr.png 1982,1984 KBO 올스타전 미스터 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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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희의 역대 등번호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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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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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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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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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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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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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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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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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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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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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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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7번
팀 창단 김용희(1982~1983) 조성옥(1984)
조성옥(1984) 김용희(1985~1989) 김응국(1990~2003)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4번
김종근(1983) 김용희(1984) 이동완(1985)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90번
결번 김용희(1994~1998) 백인천(2002)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8번
이태준(1994~1995) 김용희(1999~2000) 김용국(2006~2009)
SK 와이번스 등번호 75번
박상열(2007~2012) 김용희(2012~2013) 손지환(2014~ )
SK 와이번스 등번호 88번
성양민(2013~2014) 김용희(2015~2016) 힐만(2017~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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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용희의원.jpg
한국야구위원회 경기운영위원으로 KBO 37년 역사상 최초의 미세먼지 경기 취소 결정을 내린 직후의 모습 아싸 칼퇴다
KBO 경기운영위원회 위원장
김용희(金用熙)
생년월일 1955년 10월 4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부산광역시 중구
학력 부산동광초[1] - 경남중 - 경남고 - 고려대[2]
십이지 양띠
별자리 천칭자리
혈액형 O형
신체 키 190cm, 체중 96kg
포지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롯데 자이언츠 창단 멤버
소속팀 포항제철 (1977~1981)
롯데 자이언츠 (1982~1989)
지도자 롯데 자이언츠 1군 플레잉코치 (1989)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1990~1992)
롯데 자이언츠 감독 (1994~1998)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1999)
삼성 라이온즈 감독 (2000)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01~2002)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2004~2005)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05)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2006)
SK 와이번스 2군 감독 (2012~2013)
SK 와이번스 감독 (2015~2016)
프런트 SK 와이번스 육성총괄•스카우트 팀장 (2014)
종교 불교

1. 소개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선수 시절2.2. 프로 선수 시절
3. 지도자 경력
3.1. 롯데 코치 부임: 지도자 1기 시작3.2. 롯데 감독3.3. 삼성3.4. 다시 롯데로3.5. 해설가 시절3.6. SK 2군 감독 부임: 지도자 2기 시작3.7. SK 육성총괄 겸 스카우트 팀장 부임3.8. SK 와이번스 감독
4. KBO 경기운영위원5. 감독으로서의 평가6. 기타

1. 소개

2018년 현재는 한국야구위원회 경기운영위원을 맡고 있으며, 선수시절에는 롯데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출신 스타 내야수, 가장 최근인 운영위원 전까지는 前 SK 와이번스의 감독이었다. 김응용, 김성근, 백인천, 김재박 등의 감독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아서 그렇지 그 또한 한국프로야구의 초창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슈퍼스타이자 감독으로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줬다. 적어도 1995년까지는.... 구단의 대우를 떠나 선동열 이전 원조 588을 찍은 감독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면 1998년도 중도 해임되어 故 김명성 감독이 유지를 이어받았다. 어찌됐건 롯데는 1996년 5위-1997년 8위-그리고 1998년 8위를 기록하여 롯데 자이언츠쌍방울 레이더스 이후 사상 두번째로 2년연속 8위(꼴찌)를 기록하고 말았다.

하단에도 나오겠지만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대내외적으로 잡음이라는 것이 잘 나오지 않은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강헌주 기자의 기사김은식 작가의 칼럼이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선수 시절

현역 시절 별명은 '미스터 롯데'. 롯데 자이언츠프랜차이즈 선수이자, 롯데 선수 출신으로 롯데 감독에 오른 첫 인물. 그 전임 감독들은 모두 프로야구 출범 이전 세대였다.
파일:attachment/1979kimyonghee024.png
1979년, 포항제철 야구단 선수시절.[3]

경남고 시절부터 이미 주목받았던 촉망받던 인재였다. 1973년 경남고청룡기 우승을 이끌면서 타격과 타점 부분 1위, 그리고 MVP에 선정될 정도로 이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고려대에 진학한 무렵부터 국가대표로 발탁, 프로에 진출하기 전까지 계속 국가대표로 활약한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주로 3루수였고, 가끔 유격수를 봤다. 키가 190cm로 당시로서도, 그리고 지금으로서도 상당히 큰 키였지만 괜찮은 수비력과 타격 실력을 자랑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포항제철 야구단의 창단 멤버로 입단해서 주전 4번타자 자리를 꿰찼었고, 이후 1982년 롯데 자이언츠가 데려갈때까지 포항의 간판으로 활약했다.

특히 한국프로야구의 원형이 된 야구대제전[4] 에서 모교인 경남고 소속으로 나와 후배 최동원과 함께 팀을 이끌면서 우승을 안기고, 그 자신은 최다안타상과 타격상, 대회 MVP에 오른다.

그리고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에서 주전 3루수로 출전하기 시작, 그 대회에서 일본 전 역전 적시타를 쳐내면서 대한민국의 준우승에 큰 기여를 하는 등, 최고의 활약을 펼치면서 대회 베스트 9에 선정된다. 이때부터 시작된 인생은 한방 참고로 그에게 밀려서 대회 베스트 9에서 빠지게 된 일본의 3루수가 하라 타츠노리 전(前)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다.

2.2. 프로 선수 시절

파일:external/blog.koreadaily.com/12065516_1.jpg
최동원, 유두열구덕야구장에서.

1982년 프로 출범 이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한국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대표로 묶이지 않은 것에 대해 최동원, 심재원 등이 대표로 뽑히면서 프로 입단이 1년 늦어져 전력에 타격을 입은 롯데에 대한 배려라는 말과 이미 당시에 대표로 뛰기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김용희의 몸 상태는 당시 디스크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한다.[5]

그럼에도 1982년 초대 KBO 올스타전 MVP로 선정된다. 당시 3차전까지 열린 올스타전에서 2차전까지 3홈런을 치며 맹활약한 김용철을 제치고 선정된 이유는 그가 3차전에서 날린 역전 만루홈런의 힘이 컸다. 역시 인생은 한방. 역전의 사나이! 그리고 1984년에도 4타수 4안타를 치면서 다시금 올스타전 MVP의 영광을 안는다. 부상으로 받은 차만 두 대. 미스터 올스타로 뽑힌 후 동, 서군 선수와 코칭스태프 전원에게 한턱을 쏘고, 남는 차 한 대는 후배가 달라고 졸라서 그냥 줬다대인배스러운 일화를 남겼다. 결국 상으로 받은 차는 그냥 자기 돈으로 산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고(...). 아울러 실업야구 시절은 1980년에도 실업야구 올스타전 MVP를 받았다니, 올스타전과 인연이 깊은 선수라고 하겠다. 당시 실업야구 올스타전 부상은 전축이었다고.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842066_STD.jpg
엄청난 기럭지! 190이라는 키는 지금도 그렇지만, 80년대 초반 한국인들의 기준에서는 더더욱 어마어마한 장신이었다. 그야말로 팀 이름(자이언츠)에 아주 잘 어울리는 선수.

골든글러브를 세 번 받았을 정도로 활약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허리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 무대에서는 아마시절처럼 슈퍼스타로 군림한 것은 아니다. 일곱 시즌 동안 뛰었지만 3할을 넘긴 시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풀시즌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했고, 20개 이상 홈런을 친 적도 없다. 하지만 최초로 롯데를 상징하는 선수였고 롯데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후덕한 인품과 원만한 대인관계로 구단 고위층부터 팀 동료와 후배까지 믿음을 산 선수였다. 축구로 따지면 FIFA 발롱도르 초대 수상자인 스탠리 매튜스와 비슷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최동원, 유두열 등 당시 잘나가던 팀 동료들과 함께 모기업인 롯데제과의 빼빼로 광고에 나왔다.

3. 지도자 경력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94 롯데 자이언츠 126 56 67 3 6위 -
1995 126 68 53 5 3위 준우승
1996 126 57 63 0 5위 -
1997 126 48 77 1 8위 -
1998 55 20 32 3 8위 -
통산 559 249 292 12 ­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0 삼성 라이온즈 127 65 59 3 3위[6] -
통산 127 65 59 3 ­
연도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15 SK 와이번스 144 69 73 2 5위 5위 [7]
2016 144 69 75 0 6위 -
통산 288 138 148 2 ­
총계 980 463 497 14 ­

3.1. 롯데 코치 부임: 지도자 1기 시작

현역 은퇴 시즌 플레잉코치를 겸업했고 은퇴 다음해부터 바로 롯데 타격코치로 부임했다. 특히 92년 남두오성이라고 불리는 3할타자 5명을 배출하는 성과로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 당시 김용희의 손에는 항상 선수들의 타격과 관련된 자료들이 종이 뭉테기 단위로 들려 있었다고 한다.

한국시리즈 우승 후 지도자 공부를 더 하길 원해 재계약 대신 미국 연수를 희망했고, 당연히 구단서는 만류했지만 결국 자비로 연수를 가게 됐다.

3.2. 롯데 감독

파일:external/db.kookje.co.kr/L20080417.22022222355i1.jpg

강병철 감독이 예상을 깨고 빙그레 이글스로 이동하면서, 롯데 구단은 고민 끝에 김용희의 감독 승격을 발표한다. 본인은 이르다고 고사했지만 당시 구단주 신준호가 다 도와줄테니 무조건 맡아달라고 밀어부쳤다고 한다. 첫 감독 취임 당시 나이가 39세라 다소 이르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8] 어차피 차기 감독감 1순위였던 탓에 야구계에선 크게 놀라워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만, 괜찮은 인재이기 때문에 너무 일찍 감독 데뷔를 시키기 보다 좀 더 경륜을 쌓는 것이 어떻냐는 이야기는 나왔다고.

미국 연수를 경험해서인지, 그의 모토는 자율야구였다. 김용희의 자율야구는 팀훈련시간을 대폭 단축하면서 선수들에게 집중력있고 생각하는 야구를 요하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제리 로이스터 체제가 등장했을 때, 그가 지지를 보낸 것은 그가 추구하던 야구와 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감독 첫해 롯데는 1군 붙박이 주전이 무려 8명이나 방위복무를 해 전 시즌보다 전력이 많이 약화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중반 잠깐 4위 싸움에 뛰어들 정도로 선전했다. 최종순위는 6위. 덤으로 이 시즌에 롯데구단 역사상 최초의 투수 분업화를 구축했다. 방위복무에서 제대한 박동희를 마무리투수로 기용했고, 박동희는 6구원승 31세이브를 기록하며 기대에 부응했다.

1995년에 이 자율야구 시스템이 비로소 성공을 거두는데 윤학길주형광이 팀의 주축 투수로서 활약하고, 마해영의 합류와 박정태의 재기로 팀 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 3위로 PO에 진출한 것이다. 7전 4선승제로 열린 PO에서 1차전 강성우의 활약으로 이상훈을 무너뜨리면서 이변을 연출하더니 주형광의 역투 속에 4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오른다. 당시 준PO는 3위와 4위의 게임차가 3.5게임 이상이면 무산되도록 규정되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당시 4위는 해태. 한국시리즈에서도 굉장히 선전해서 1, 4, 5차전을 잡고 먼저 3승에 오르지만, 6차전 진필중에게 완투패를 당하고, 7차전 2:0으로 뒤지던 3회말 2사 2,3루 상황에서 박정태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러 2점을 더 내주는 악재가 겹치면서 아쉽게 OB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다. 이 때 만일 우승했다면 장기집권도 가능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9]

1996년부터 주전 선수들의 부상 돌림병으로 인해 주전 투수들을 제대로 가동하지 못했다. 염종석은 전 시즌을 마치고 팔꿈치 수술을 받아 아예 개점휴업했고, 박동희도 부상으로 부진했으며, 윤학길은 노쇠했다. 신인 차명주는 먹튀였고, 문동환은 계약금 문제로 현대 피닉스에 입단했다. 4위와 큰 차이로 5위를 기록하며 포스트시즌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냈지만, 1995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성과 때문에 3년 재계약에 성공했다. 이게 좀 흠좀무한게 롯데 역사상 최초이자 유이하게 재계약에 성공한 감독이었다는 점.[10]

그러나 이듬해 1997년, 롯데 프런트는 개막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서 문동환을 데리고 오기 위해 전준호현대 유니콘스로 5억을 받고 팔아버리는 최악의 현금 트레이드를 단행한다. 여기에 신인 손민한도 부상으로 쓰러지고, 팀 내부적으로도 많은 선수들이 단체로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팀분위기가 뒤숭숭해지면서 이 시즌은 일치감치 꼴찌로 내달렸다. 아울러 프런트가 원정 기록원도 돈이 없다고 짜르는 등, 슬슬 막장 지원을 줄이더니, 1998시즌도 여전히 꼴지에 머물다가 2년 연속 최하위에 머무른다는 이유로 해임되어 롯데 감독과의 인연을 마치게 된다. 롯데는 해태에서 김응용을 데려오려고 애를 썼지만 데려오지 못해 당시 롯데의 투수코치였던 김명성을 감독 대행으로 임명하였다. 선동열 이전에 588을 최초로 찍은 선임

3.3. 삼성

파일:/image/241/2015/05/20/htm_201505191639261006120_99_20150520175707.jpg

찾기 정말 힘들었다 꽁꽁 숨겨두신 김감독님

롯데 감독에서 해임된 후, 실업팀 시절의 팀 동료였던 서정환의 추천으로 1999 시즌 삼성 라이온즈의 수석코치에 임명되었다.

1999 시즌 PO에서의 패배 책임을 지고 서정환 감독이 사퇴하자, 2000 시즌 그 후임으로 내부 승진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권위는 강할 수 없었다. 바지감독 1군 타격코치에는 삼성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장효조, 2군 감독에는 김성근, 타격 인스트럭터에는 백인천, 사장 보좌역으로는 전 시즌 감독에서 물러난 서정환이 임명되는 등 감독으로서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바지감독 무슨 지거리야[11] 이미 삼성은 김응용 해태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고, 일단 김응용 감독이 한 해 더 해태에 남기로 하자 땜방으로 대타로 임명된 것이었다. 어째 후임이 항상 김응용으로 거론되네

하지만 김용희를 견제하기 위해 장효조, 김성근을 영입했다는 서술은 단락은 야구판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다. 김용희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기 위해 장효조, 김성근을 임명한 것이 아니라, 김용희와 마찬가지로 김응용이 오기 전 1년간 땜빵을 시키기 위해 기용한 것일 뿐이었다. 당초 김응용은 2000시즌을 앞두고 삼성에 오기로 구두합의가 되어 있었으나 막판에 일이 틀어지면서 1년 후에 오게 되었던 것. 때문에 삼성은 2000년 1시즌 동안만 팀을 맡아줄 임시직 코칭스태프들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당시 삼성 프런트는 장효조김성근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장효조는 삼성 구단과 악연으로 유명하다. 삼성 시절 장효조는 매년 연봉 협상에서 삼성 구단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던 것으로 유명했다. 1988년 롯데로 트레이드된 후 장효조는 거의 삼성 구단과는 척을 졌다. 장효조는 롯데로 트레이드되고 나서 고향인 부산으로 집을 옮겼고, 죽을 때까지 거주지를 부산에서 대구로 옮긴 적이 없었다. 삼성 구단 역시 장효조를 코칭스태프로 기용하라는 팬들의 열화를 무시하고 2000년을 제외하면 무려 2010년까지 장효조를 한번도 코치로 기용한 적이 없었다. 2000년 장효조가 삼성의 코치로 영입된 것은 김용희와 함께 1년 때우다가 나가라는 의미였다. 삼성 프런트와 껄끄러웠던 장효조가 타격코치로 영입된 것은 김용희와의 인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김용희가 롯데 감독을 맡았던 시절 타격코치만큼은 장효조를 신뢰하여 김용희 본인이 롯데 감독에서 경질될 때까지 장효조 타코를 교체하지 않았다. 김용희가 롯데 감독에서 경질되면서 장효조 또한 롯데 타코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삼성 구단 역시 장효조가 못마땅했지만 어차피 1년만 쓰고 버릴 것이었기 때문에 장효조를 타코로 임명한 것.

삼성 프런트는 2000시즌이 끝나고 장효조를 경질하고 나서 무려 10년 동안 삼성 최초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장효조를 코치로 재기용하지 않았다. 장효조를 코치로 기용하라는 팬들의 요구가 빗발쳤지만, 삼성 프런트는 언론에 성격이상설까지 제기하면서 장효조는 코치로 기용하기에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팬들의 요구가 빗발치자 마지못해 2000년대 중반 장효조를 스카우트로 기용하긴 했지만, 당시 스카우트의 처우는 정말 열악했다. 당시 장효조는 대구구장에서 삼성 경기가 열릴 때 기자실에서 TV를 보며 기자들에게 야구를 해설해주었다고 한다(...). 장효조는 2010년에야 2군 코치로 복귀하게 되었으나, 2011년 사망했다.

김성근 역시 삼성 구단과 매우 껄끄로운 인물이었다. 김성근은 과거 삼성 감독으로 있으면서 선수단 및 프런트와 각종 트러블을 일으켰고, 이에 선수단 항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삼성 출신 코치들과 프런트까지 선수단 항명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OB 선수단 항명사태와 다르게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김성근은 1991년~1992년 시즌 삼성에서 참담한 실패를 겪은 후 감독으로는 재기 불능 상태에 빠졌다. 수년간 야구 인스트럭트로 연명하고 있다가 1996년 친분이 깊었던 이용일 쌍방울 구단주대행에 의해 영입되면서 간신히 야구판에 복귀할 수 있었다. 김성근은 쌍방울 감독에 있는 동안 자신과 척을 졌던 삼성에게 여러 차례 빈볼을 던지는 등 많은 트러블을 일으켰는데,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일화로는 이만수 추격 사건, 부정배트 소동 등이 있다. 삼성 구단이 이렇게 껄끄로운 관계에 있던 김성근을 영입한 이유 역시 1년 땜빵으로 있다가 나가라는 의미였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해태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이순철도 삼성 주루코치로 영입되었는데, 이순철 역시 김응용 감독과 매우 껄끄러운 관계였다. 2001시즌 김응용이 마침내 삼성으로 오게 되면서 김용희, 김성근, 장효조, 이순철은 모두 정리되었다.

물론 삼성 프런트도 이강철김동수를 FA로, 외국인 선수로 MLB 레전드급 선수인 훌리오 프랑코[12]를 영입해서 할 만큼 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선수단을 장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양대리그 체제에서 드림리그 3위를 기록해, 당시 매직리그 2위였던 롯데보다 승률이 좋아서 준PO를 거친다. 여기서 승리하고 PO에 오르는데, 이 당시 91승을 거두면서 최강 팀이었던 현대 유니콘스와의 대결에서 4연패로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재계 라이벌에게 4패로 물러났다는 점 + 김응용 감독의 영입이 확정되었다는 점으로 인해 자연히 감독에서 물러나게 된다. 여태껏 혹사당하던 임창용도 관리해 주는 등 무리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운영했지만, 삼성의 실적 제일주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성적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기도 했고. 참고로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전자업계 라이벌에게 4연패로 졌다는 이유로 정동진 감독이 짤린 적이 있다. 삼성의 전과는 화려하다! 그리고 10년 뒤에는 선동열 감독이 SK와의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하고 감독직에서 짤렸다. 10년 주기설?

스트레스가 많았던지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이해 6월 25일 김용희 감독은 심판의 멱살을 잡고(…) 항의한 탓에 6경기 출장정지+최고 제재금 200만원을 물어야 했다.[13]

잘 한 점이 있다면 임창용의 투구 이닝을 조절해 주며 임창용이 풀타임 주전이 된 후 처음으로 100이닝에 미달하도록 이닝 소화를 배려해 줬다는 점이다. 임창용이 해태에서 김응용에게, 트레이드로 삼성에 온 첫 해에 서정환에 의해 마무리면서 3년 연속 규정 이닝을 충족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때에 와서야 임창용은 제대로 된 관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임창용이 2000년마저 계속 전처럼 굴려졌다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나 일본 진출은 고사하고 재기불능 수준으로 망가졌을 가능성이 컸다는 평가를 듣는다.

3.4. 다시 롯데로

삼성 감독에서 해임된 이듬해 2001년 롯데 자이언츠의 1군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2002년 우용득 감독이 경질되고 백인천 감독이 임명된 후 백감독이 선수단에 합류하기 전인 6월 21일~23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3연전에선 잠깐동안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다. 이후 양상문 감독 시절엔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강병철 3기 체제 하에서는 다시 수석코치로 활동했다. 롯데 감독이 바뀔 때마다 단골 후보로 거론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1군 감독으로서의 복귀는 쉽지 않을 듯 싶었다.

3.5. 해설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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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를 나간뒤에는 SBS ESPN의 해설가를 지냈다. 타격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한 이론과 식견을 보여주는 해설을 했으며 현역 시절에 인품이 좋은 걸로 유명했던 것 답게, 까는 해설보다는 조용히 칭찬하는 해설자 타입에 더 가깝다. 가끔 들리는 부산 사투리와 롯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애정이 보이기도 한다. 사직 구장에서 중계를 할 때 마다 구장이 배 모양이라고 설명해주는게 일종의 패턴화 되었다.

2011 시즌에도 새롭게 영입한 양준혁안경현의 안정성이 아직은 높지 않기 때문에 케이블에서는 주역으로 뛰고 있다. 그리고 올스타전에서 임용수, 양준혁과 함께 신개념 개그 해설을 선보였다.

목소리와 억양, 해설 톤이 씨름이만기와 비슷하다. 옆방에서 들으면 씨름중계인지 야구중계인지 헷갈릴 정도. 그래서 포털 사이트에서 "김용희 이만기" 검색해보면 '김용희는 이만기 보이스' 혹은 '오늘 야구 해설은 이만기' 등의 글을 많이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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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0일 경남고군산상고 레전드 매치 촬영. 경기 때는 허구연이 감독이고 김용희가 수석코치였다. 이 경기가 최동원이 살아 생전에 대중들에게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경기였다.

3.6. SK 2군 감독 부임: 지도자 2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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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가 감독 대행을 맡게 되자 2011년 9월 7일 SK 와이번스 2군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추석연휴가 지나간 후 선수단에 합류했다. 퓨처스 개막전 때는 고양 김성근 감독과 배우개그 감독개그를 주고받았다. 박재홍과 카톡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등 세련된 감각으로 소통하고 선수들을 챙겨주는 모습에 과연 덕장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민경삼의 파워협박은 부록

처음 부임 당시만 해도 회의적인 시선이 있었는데, 이는 SBS 해설위원 시절 김성근 감독 체제 하의 SK를 많이 깠던 것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2013년까지의 모습을 보면 이만수 감독에 비해서는 지도력이 낫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실제로 계형철 감독이나 이만수 감독이 2군 감독하던 시절의 성적에 비하면 상당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군과 2군 성적 등가교환 SK 퓨처스 팀은 2007년 2위를 한 이후 줄곧 하위권을 맴돌았다. 2007년 우승 이후 상위권 독주로 상위 라운드 신인지명에서 계속 밀린데다, 김성근 감독의 스타일 상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는 신인은 2군 경기장에서 직접 컨디션을 확인한 후 군입대도 한계 시점까지 연기하고 1군에서 뛰도록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2군의 전력이 좋다고는 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조범현 감독이 kt 위즈의 감독으로 선임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기사에서 당초 물망에 올라 제의까지 받았으나 "현재 팀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 고사한 2군 감독 K씨로 추정되었다. 2013년 당시 퓨처스리그 감독 중 이니셜을 K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김 감독을 제외하면 롯데의 권두조, 넥센의 김성갑 감독 정도였다.여기에 '이미 이만수 감독은 시즌 후 경질이 확정적이고, 후임 감독을 내부승격으로 처리할 것'이란 살이 붙어서 여러가지 말이 오고가는 상황. 결과적으로 이 말들은 사실이 되었다.

3.7. SK 육성총괄 겸 스카우트 팀장 부임

시즌 종료 후 은퇴한 박경완이 바로 SK 와이번스 2군 감독에 선임됨에 따라 김용희 감독은 새로 설치한 육성군 총괄 겸 스카우트 팀장으로 보직이 이동되어 신인지명과 육성을 전담했다.

3.8. SK 와이번스 감독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용희/201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2014년 시즌 후 계약이 만료된 이만수 감독의 뒤를 이어서 SK 와이번스의 후임 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SK 프런트 쪽에서 아직 내정된 바는 없다고 해명기사가 나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은 10월 21일, 계약기간 2년, 총액 9억 원SK 와이번스의 5대 감독으로 공식 선임되었다.

2000년 삼성 라이온즈를 1시즌 맡은 이후 1군 감독으로는 자그마치 15년 만의 복귀다. 내심 김경기 타격코치나 박경완 2군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기대하던 SK 팬들은 다소 뜻밖이라는 반응이 다수. 다만 시즌 종료 직후부터 SK의 후임 감독은 내부 승격이 유력했다는 점에서 김용희 육성팀장 역시 감독 후보군으로 오르내리고는 있었다.

김용희 감독이 발표되고, 일단 그분이 아닌, 새 감독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많은 응원과 기대를 받고 있다.

롯데와 삼성에서 감독을 맡았던 시절과는 이제 강산이 한번 반 바뀔 10여 년 이상 흘러가 버렸기 때문에 감독으로서의 감각과 역량이 살아날 수 있을지 미지수란 점에서 불안 요소는 어느 정도 상존하는 상황. 물론 2011년부터 2년 간 SK 와이번스 2군 감독을 맡으며 이전까지 하위권을 맴돌던 퓨처스 팀을 맡아 2위까지 올려놓은 적이 있는 만큼 김응용처럼 지도자로서의 감이 완전히 녹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소속 선수들의 해외 진출과 FA로 인한 전력 유출이 확정적인 2015년 시즌을 앞두고 김경기박경완을 섣부르게 1군 감독으로 앉히는 불확실성보다는 그나마 감독을 경험해 본 김용희 쪽이 당장의 리빌딩을 맡기기에는 더 적합하기도 하다는 점에선 현 상황에서의 차선책으로 보아도 괜찮을 듯. 취임 후 인선에서 김경기 타격코치가 수석코치, 박경완 2군 감독이 육성총괄로 확정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김용희 감독 체제에서의 2년은 김경기박경완 체제로 전환되기 전의 과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하지만 후임 감독은 둘 다 아니고 힐만

지나간 다른 팀이나 현 소속팀 2군 감독 시절에도 덕장으로 인품이 좋았던 지도자이지만 2군과 1군은 또 다른 만큼, 남은 마무리캠프와 내년 스프링캠프, 2015년 시즌에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전통적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식 '매니저'에 가까운 스타일의 지도자이므로 FA를 다 잡는 등의 프런트 지원만 충분하다면 기본 전력만큼의 성적은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솩런트가 그 시절 꼴런트보다는 좀 낫겠지만 그 지원이 가능할 지는 두고 봐야지 그리고 민경삼 단장이 박동희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사실 만수감독 재신임 할까 생각도 했음 ㅋ이라고 해서 팬들의 속을 또 뒤집어 놓았다(...)

한편 1군 감독으로 선임되고 나서 SK 와이번스 갤러리에서 얻은 별명은 용감이다.

3.8.1. 2015 시즌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용희/2015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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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동님

아직 부임 초반이긴 하지만 김용희 감독에 대한 전반적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보단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은 편. 5월까지의 행보는 SK를 왕조 시절로 다시 돌려놓고 있다고 평가받았다.[14] 그러나 귀신같이 5연패(...)를 당함과 동시에 투타 밸런스 붕괴로 좀처럼 5위 이상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고 부진하면서 다시 까이고 있다. 부진했지만 시즌 막판에 나름대로 비축해뒀던 전력으로 다른 5위 경쟁 팀보다 한 발 더 나가는 데에 성공하면서 가을야구 니가 가라 결국 3년만의 가을야구에 성공했다. 좋지 않은 수비가 발목을 잡으면서 와일드 카드 매치에서 패배를 하면서 와일드 카드에 만족을 해야 했지만. 한 경기라도 더 한 것에 만족해야지...

SK 팬 중에서는 경질을 바라는 팬들도 소수 있었지만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SK 와이번스는 2016 시즌 또한 김용희 감독과 같이가기로 결정. 애초에 2년 계약이었다 보니 경질 가능성도 낮은 상황이였다.[15]

김성근과는 매니징 타입이 완전히 극과 극. 김성근 감독이 이런저런 혹사로 오늘날에 안 좋은 쪽으로 재조명이 되고 있었지만, 김용희서진용 등 일부 선수를 제외하면 좋지 않은 여론에서도 이렇다할 혹사 논란이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좋지 않은 수비가 발목을 잡으며 결국 이 수비로 인해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많았다는 반응. 다만 "팬 여러분에게 죄송합니다." 라며 시즌을 마감짓는 말을 한 것에선 전임 감독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좋지 않은 여론에서도 감독 본인이 입을 잘못 놀려서 구설수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3.8.2. 2016 시즌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용희/2016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계약 2년차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해. FA 자격을 얻은 이 대거 팀을 떠나면서 작년보다 더 험난한 시즌이 예상된다. 어찌 보면 강제 리빌딩 시즌이라고 할 수 있을듯. 신진 선수들을 발굴하고 성적까지 낼 수 있다면 감독으로서의 평가도 반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졌지만... 후반기에 엄청난 삽질으로 인해 평가가 바닥을 치고 있다. 특히 9월에 9연패를 당한 것이 결정타였다. 마지막 임기라는 압박감에 따른 조급증이 결국 발목을 잡을 수도 있게 된 현 상황.

결국 SK 구단에서 재계약을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을 하였다고 한다.

4. KBO 경기운영위원

감독 재계약 실패로 물러난 후에는 KBO 경기운영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16]

2018년 4월 6일 잠실야구장에 열릴 예정이던 두산-NC전을 미세먼지로 취소 결정하면서, KBO 리그 37년 역사상 최초의 미세먼지 취소 결정을 하는 업적을 남겼다. 당시에는 미세먼지 수치가 300㎍/m³이 넘어서 취소시켰고, 팬들에게 나름 팬들과 선수들의 건강을 생각해주는 취지로 칭찬을 받았다.[17]

하지만 2018년 4월 14일 오후 3시 12분,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KIA-롯데의 시즌 2차전을 우천취소했다. 김용희 위원장은 경기장에 도착한 지 10분 남짓 만에 취소 결정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경기가 열리기 거의 2시간 전인 이른 시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천 취소 시점에서 비가 거의 잦아들고 있었고, 일기 예보상으로 비가 그칠 것으로 예보되었다. 실제로 당일 김용희 위원장이 우산을 쓰지 않고 그라운드 상태를 살피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으며, 3시 30분경 광주에서는 비가 완전히 그쳤다. 최근에 지어진 광주 챔피언스필드는 뛰어난 배수 시설을 갖추고 있어 경기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이날 챔피언스 필드에는 대형 방수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성급한 우천취소 결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타구장들도 이날 모두 광주와 비슷한 날씨였으나, 나머지 네 개 구장에서는 모두 경기가 진행되었다.

이날 3연전은 MBC SPORTS+였으며 MBC SPORTS+에서 경기 종료이후 갑자기 급편성을 하여 팩트체크를 하였다. 즉 한명재 캐스터 - 허구연 해설위원이었는데 이해가 가지 않은 상황이라 그런지 베테랑PD인 이석재PD가 직접 그라운드에 내려와서 리포트를 하면서 다시 한번 김용희 위원장의 언급을 통해를 이야기가 왜 그런지 위에 서술한 대로 체크를 하였고 즉 이해가 가지 않은 우천취소라며 아쉬운 멘트를 남겼다.

2018년 4월 15일 중계 전 김용희 위원장과의 통화를 하였으며 다시 한번 어제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3차전 KIA-롯데전을 관전하기 위해 만원 관중이 들어찬 광주 경기를 미세먼지를 이유로 뒤늦게 취소시켰다. 경기 시작 시간 29분 후까지 취소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만원 관중들이 미세먼지를 마시고 앉아 있도록 방치한 후에 뒤늦게 취소를 발표했다. 일찌감치 광주에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된 상황에서 미리 경기를 취소해서 관중들이 미세먼지를 마시지 않도록 조치했어야 했으나, 경기 시작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뒤늦게 경기를 취소시키면서 관중들이 미세먼지를 마시도록 방치한 것에 대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미세먼지가 비처럼 금방 잦아드는 것도 아닌데도 굳이 29분이 넘도록 판단을 하지 못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견이 있었다. 경기 시작 시간이 지난 후라도 신중하게 결정을 내렸어야 할 우천취소는 경기가 시작되기 2시간전에 10분만에 졸속으로 취소 결정내리더니, 신속하게 결정해야 할 미세먼지 취소 결정은 경기가 시작되고서도 30분이나 지연해서 결정을 내리면서 관중들은 미세먼지 마실 거 다 마시고 귀가하게 되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징계위원회에서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 팬들의 불만이 가중되고 있다. 이는 2년 전 김재박보다 더 심각한 수준으로 여론이 악화되었다.

훗날 5개월 후에 두 팀은 5강 전쟁을 진행중이라는..

5. 감독으로서의 평가

김용희 감독의 상징이자 모토는 자율야구, 시스템 야구다. SK에 부임하기 전 롯데, 삼성 감독 시절에는 자율야구를 주창했었고, SK 감독으로 부임하면서는 시스템 야구를 주창하였다. 자율야구와 시스템야구는 그 본질은 같았고, 시대가 흐르면서 자율야구 철학을 더욱 업그레이드한 것이 시스템 야구라 할 수 있다. 시스템 야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모든 것이 알아서 돌아가는 야구다.

하지만 시스템 야구는 현 SK 와이번스의 팀 사정에는 맞지 않다는 평가가 있다. 사실 롯데 감독 시절에도 비슷한 평가를 들었다.[18]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의 가장 큰 문제점은 현재 고척을 연고로 하는 옆 구단과는 다르게 SK 와이번스에는 2군 유망주의 풀이 넓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는 '모든 선수가 1군 즉시 전력감으로 활용될 수 있는 야구' 를 모토로 한 것인데, 2015년 부임 시기까지 SK 와이번스는 주전과 비주전의 기량차가 굉장히 심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팀이었다.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를 구사하기엔 현 SK 와이번스의 2군 팜이 그만큼 녹록치 않다는 이야기이며, 현 SK 와이번스의 팀 사정을 고려했을 때 이는 만화에서나 나올 수 있을 법한 야구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의미.[19]

그리고 2군에서는 크게 대두되지 않던 선수 기용이 1군에서는 큰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정우람을 마무리로 내리고 윤길현을 다시 주먹구구식으로 그 자리에 넣은 것은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에는 분명히 어긋나는 형태의 선수 기용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갓 군에서 제대한 서진용을 필승조로 무리하게 쓰다가 결국 팔꿈치가 나가게 된 것,[20] 현재 구위가 불안정하면서 과부하의 조짐이 보이는 문광은을 계속 필승조로 쓰고 있는 것은 김용희 감독의 선수 기용의 문제가 맞다.[21] 진해수가 다시 1군에 등록된 이상 지켜봐야할 것 같지만, 현재 SK 와이번스 팬들 사이에서 김용희 감독의 선수 기용에 대한 의견은 상당히 좋지 않다. 이럴 거면 윤길현을 왜 마무리로 썼니[22][23]

따라서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가 SK 와이번스에서 확실하게 정착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며 길게는 5시즌 이상까지도 걸린다는 이야기인데, 성급하게 시스템 야구를 도입하려고 한 것은 김용희 감독이 2군 감독과 육성총괄 시절 때와는 다르게 1군 감독으로는 SK 와이번스의 1군 팀 사정을 폭 넓게 보지 못한 것이 크다는 것이다. 15년의 공백이 여기에서 굉장히 크게 작용한 것. 역으로 보면 감을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필승조를 아끼는 등 나름 전략적인 운용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9월부터 의외로 선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SK는 분명 2015시즌 최상위 전력을 보유하고 시작했으며 삼성과 함께 2강을 달릴 것으로 예측되었는데, 안정되지 못한 운용으로 1위와의 승차를 20 가까이 벌려버린 기대이하의 감독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팀 안팎에서 모두 동의하는 그의 최대 단점으로는 경기를 너무 쉽게 던져버리는 듯한 운영을 한다는 것.[24] 본인 나름대로는 길게 보고 당장의 한 경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생각인 것 같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영 맥이 빠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최상위권 전력을 가지고 시작해서 상위권을 달리다 4위와의 승차가 8, 1위와의 승차가 17이 되도록 하며 프런트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한 감독의 입장은 상당히 난처하게 될 수밖에 없다.

다만 시즌 초기 서진용의 조기 아웃과 관련해 혹사 논란에 시스템 야구의 무용론 얘기가 나왔던 상황까지 갔음에도 김용희 감독이 자랑하던 혹사없는 시스템 야구는 결국 후반기 5위 경쟁에서 그 진가를 드러냈고, 결국 5위를 차지하면서 오랜만에 팬들에게 포스트시즌 경기를 선사해 준 업적은 높게 평가할 수 있다고 봐야한다. 경기 종료 후에도 "팬 여러분에게 죄송합니다." 라는 언급을 하면서 전임 감독과는 다른 인성을 보여준 것도 어찌보면 팬들 입장에선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의 가장 큰 요인.

요약하자면 세세한 경기 운영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지만 그래도 감독으로써 나름대로의 역할은 하고 있다는 것이 총평이다. SK에서 이렇게까지 무너진 가장 큰 요인은 이전 소속팀 감독 시절의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가 2군 감독 시절이나 육성총괄 시절의 명성에 비해 1군 감독으로는 한계가 굉장히 뚜렷하게 드러난 것.

결론적으로 2015년 와이번스 팬들의 총평은 대체로 기대에는 못미치는 감독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싫지도 않은 감독. 실제 2015시즌 종료 이후 비판이 많았지만 대부분 임기를 지켜줄 것을 주장했고, 구단도 받아들였다. 다만 2016년에는 재계약으로 인한 조급증 때문인지 서서히 문제가 생겨났다. 시스템이 망가지면서 성적이 하락하는데에 대한 대처가 부족하고 타선은 뻥야구 일변도가 되면서 부침이 심해지고 투수진도 롤러코스터에 혹사는 그나마 적던 감독이 시즌 중반부터 채병용을 필두로 조짐을 보이고...어느 정도 한계가 뚜렷한 감독이란 것을 다시 한 번 스스로 보여준 셈이다.

상술한 SK 시절의 경력 이전의 롯데나 삼성 시절을 되돌아보더라도 이 시스템이란 것을 꽤나 강조했는데, 그 당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리대로 돌아가는 야구'이다. 시즌 초에 구상된 전력을 토대로 플랜이 짜지면 그에 따라 시즌을 소화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세세하게 채운다, 변칙없이 순리대로 간다는 식의 행동원리인데, 이것이 잘 구현된 경우가 1995년 롯데 자이언츠의 경우이다. 이 해 롯데는 승률 .560을 마크하며 한국시리즈 준우승까지 차지할 정도로 강팀이었는데 이는 김용희 감독의 플랜대로 부상 등으로 인한 선수 이탈이 없으면서 박정태가 재기에 성공하는 등 굉장히 순탄하게 시즌을 소화할 수 있었다. 즉, 플랜을 구성하고 변수가 없다면 나름 괜찮게 돌아간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러한 계획, 플랜 A가 잘 돌아가면 괜찮은데 각종 변수로 인해 그 계획이 틀어졌을 때의 대처 능력이 상당히 떨어졌었단 점에 있다. 흔히 말하는 '플랜 B'에 대한 준비가 미흡하다는 뜻인데 그 이후의 롯데 성적이 688이라는 것이 이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96년만 봐도 전해 한국시리즈 준우승팀인 만큼 시즌 초 전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한 선수 이탈 및 부진과 그로 인한 운용 미스 등으로 인해 타자들이나 투수들의 세부 스탯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5할 승률에 미달되었고, 1997년이나 1998년 역시 부진을 거듭한 결과 2년연속 최하위라는 참담한 성적을 받아들여야 했다. 특히 1998년은 시즌 도중 경질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뭔가 계획이 틀어질 때 '아직은 순리대로 간다'라고 거듭 인내하다가 도저히 계획이 정상대로 돌아오기 힘든 지경이 되어서야 무언가 해 보려고 하는데, 그 시점은 이미 늦어버려서 시즌 전체를 망쳐버렸었다는 것이다. 시스템 야구를 표방하지만 그 시스템의 모든 것이 정상이라 전제된 플랜 A만 있을 뿐, 부진이나 부상처럼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가 굉장히 미흡했다는 문제는 이미 과거부터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롯데 시절 내내 부상이나 선수의 부침이 잦았다는 것도 되돌아 볼 문제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혹사가 많은 감독은 아니지만 선수 관리 측면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삼성 시절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김응용 부임 이전까지의 땜빵 성격이 강한 부임이긴 했지만 적어도 시즌내내는 순리대로 풀어나갔고 임창용은 선수 생활 최초로 심하지 않은 기용으로 그나마 관리받았다. 다만 투수진 문제는 심각해서 정규시즌까지는 그럭저럭 풀고나가던 것이 포스트시즌에 현대를 만나서 합산 스코어 26:4로 말 그대로 처참할 정도로 당하는 동한 손도 쓰지 못했다. 적어도 정규시즌에선 이 정도까지 처참할 정도로 당하지도 않았고 그 해의 현대 유니콘스는 역대급 팀이었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대처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단지 누구나도 알고 있는 1년짜리 땜빵 감독이었기 때문에 많이 회자가 되지 않을 뿐.[25]

정리하자면, 감독 경력 내내 일관적으로 시스템과 순리를 강조하는 편이다. 심한 무리는 하지 않고 주어진 전력 구상에 공을 들이며 그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타입이라는 것. 하지만 이 전력 구상에서 무언가 틀어질 경우에 대한 대비가 미흡하고 그 대처 역시 심하게 떨어진다. 어떻게 보면 대처없이 팔짱끼고 끄덕끄덕 아직은 순리대로 가자만 되뇌이다가 이미 늦은 시점에서 뭔가 해보려하지만 이미 틀어진 상태에서 그것이 악영향을 주기도 하는 등 단점도 굉장히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이러한 점이 2군 감독으로는 큰 능력을 발휘했으나 1군 감독으로는 한계가 굉장히 뚜렷한 모습으로 드러난 가장 큰 이유였다는 것.

이외에도 타자를 잘 키운다는 장점이 있다. 롯데에서 남두오성을 만들었으며, SK에서는 뻥야구 핵타선을 만들기도 했다.

6. 기타

롯데 감독 시절 마산아재들이 경기 후 즉석 청문회를 연 적이 있었다.
아재들 웃통까고 버스 나오는 길 앞에서 가부좌 틀고 앉아서 대기하고 있음.
다른 아재들이 버스 존나 두들기면서 "감독 나온나! 어이! 감독 나온나!"
이러니까 김용희 나옴...ㅋㅋㅋㅋㅋㅋ
김용희 "와예?" (존나 개좆밥 새끼 내가 프로야구 감독만 아니었어도 척추를 접어버렸을거라는 짜증 섞인 표정)
아재1 "마! 우예 된기고? 박정태 절마저거 살 와 저렇게 마이 찌가 게임 뛰는데???"
김용희 "살 아입니더, 다 근육입니더"
아재2 "내 어제 호프에서 박계워이 봤는데, 선수들 관리 안하는갑제?"
김용희 "아이라예...잘못보신깁니다."
아재2 "내가 봤는데?"
김용희 "따블헤다 하고 오늘 새벽에 내려왔다 아입니꺼...지금 부상선수가 쪼매 있어가 이라지 쪼매만 참고 기다려주이소"
아재3 "아따 근데 김용희 미남이네~키 메시고?"
김용희 "90입니더" (곧 끝날것을 직감하고 씩 쪼갬, 버스기사 반 시동 걸음)
아재3 "어이 아재들요, 우리 롯데 잘하라고 화이팅 함 해주입시더 으이? 자! 롯데 화이팅! 김용희 화이팅!"
아재들 일동 만세 삼창하고 젤 앞에 서 있던 아재랑 김용희랑 악수하고 김용희가 버스에서 생수 가져와서 아재한테 주니까 모세가 바다 가를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길이 쫙 생김.

PC 통신 시절부터 돌아다니던 글이었는데, LG가 상위권을 찍다 처참하게 무너지던 2011년 8월 잠실 청문회 사건이 용두사미로 끝나자 이 해프닝에 비교되는 사례로 다시금 발굴되어 야구 커뮤니티를 비롯한 도처에 글이 퍼졌고, 이후 롯데의 상황을 제대로 표현한 명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덤으로 경상도 사람은 음성지원까지 된다. SK 감독 취임 후 다시 회자되는 중.

해당글은 국내 야구 갤러리의 나이 많은 고정닉 유저가 처음 작성했으나 원 출처는 표기가 안 되고 글만 돌아다니고 있다. 카더라가 아닌가 하는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이태일 NC 사장이 기자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증언도 한 만큼 실제로 벌어졌다는 건 확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SBS 야구본색에서 이 사건에 대한 김용희 감독과 당시 롯데 버스 운전 기사의 인터뷰도 했다. 엠팍의 한 댓글에 따르면 1995 시즌 하반기에 롯데가 연패에 빠져 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고 한다.[26]

엄청난 주량을 자량한다. 고대 신입생 시절 3시간 만에 소주 24병을 마셨다는 얘기가 있다.

노안에다가 한국프로야구 초기부터 코칭스탭을 해서 나이가 굉장히 많은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1955년 생으로 2018년 현재 대한민국 나이로 64세밖에 안 되었다.

SK 와이번스 감독으로 부임한 후 흠잡힐 곳 없는 인터뷰 스킬과 무난한 행보로 인해 용감 등의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팬들의 마음을 훔치겠다는 발언 때문에 루동님, 도동님 등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끄동님 인터뷰 스킬 만렙으로 유명한 염경엽과 입터는데 전문인 입동님과 인터뷰로 붙으면 누가 이길까나??

190cm가 넘는 장신때문인지 최훈 프로야구 카툰에서는 얼굴이 길쭉하고이문세?? 안경 쓴 비룡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에피소드 상 쌍댕이가 안경을 쓰고 비룡 옆 에서김용희가 양상문보다 5살 많은 형이라서 형님 형님 거리는 묘사가 LG와 SK가 만나면 유난히 감독들의 병림픽이 벌어지기 때문에많다.

박철순과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다. 가족들과도 왕래가 빈번하고 막역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27]

[1] 현재의 부산광일초등학교. 1998년, 남일초교와 동광초교가 통합되어 광일초등학교가 되었다.[2] 행정학과 74학번. 1년 선배로 홍준표가 있다.[3]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뭐요!? 42가 아니고?[4] 실업과 대학을 망라해 모든 선수들이 모교의 유니폼을 입고 벌이는 대회. 프로야구의 원형 격이고, 이 대회를 주도한 이용일, 이호헌은 뒷날 KBO의 초대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이 된다.[5] 이 디스크 통증은 프로 선수 생활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 롯데 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인 1994년엔 앉아있기도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해져 결국 전반기 종료 후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올스타전은 각 팀의 감독들이 코치로 출전하게 되지만 이 디스크 수술탓에 김용희는 불참하고 대신 권두조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올스타전에 참가했다.[6] 드림리그[7] 와일드카드 결정전 敗[8] 허구연 다음으로 빠르다. 참고로 그 다음이 선동열로 43세였던 2005년에 삼성 감독을 맡았다.[9] 본인은 당시 한국시리즈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고 한다. 다만 상대팀 감독이 산전수전 다 겪은 김인식이었고, 자신은 겨우 감독 2년차라 지략적인 면이 모자라 여러 경우의 수나 경험 등에서 자신은 우승까지 시간이 더 필요했던 거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10] 롯데 감독으로 재계약에 성공한 나머지 한 사람은 제리 로이스터 이후 2017년 조원우감독도 재계약을 한다.[11] 장효조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전부 당시 삼성 1군 감독 경력이 있었다.[12] 참고로 공식 프로필은 1958년생이라서 당시 주루 코치였던 이순철(1961년생)보다 나이가 분명히 많은데 출생신고가 늦어서 실제로는 1956년생이라고 하며 심지어는 김용희와 동갑인 1955년생, 심지어는 1954년생이나 그보다 더 일찍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나이가 많은 탓인지 당시 후배들한테 타격 기술 과외를 가르치며 코치들이 불만을 품었다고 하며 삼성 시절 프로필은 1961년생으로 등록.(...)[13] 김용희 감독이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6경기는 당시 1군 타격코치였던 장효조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14] 2015년 개막 때 SK는 우승전력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초반에 안 좋은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15] 현 KBO의 추세상 감독 계약은 2년 계약이 로우리스크 하이리턴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기 때문이다. 구단 입장에서도 2년 계약으로 지켜보는 것이 중도 경질을 최소화하고 구단 운영 비용의 손실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16] 2018 시즌 경기운영위원장이 따로 있었으나, 위원장으로 칭하는 기사도 나오고 있어 혼선이 있다.[17] 이 때 잠실야구장으로 향하던 팬들은 일제히 황당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2호선, 9호선에서 방향을 틀어 돌아갔는데, 경남권에서 온 NC 팬들은 휴가 하루를 다른 곳에서 보내야 했다.[18] 과도기 감독이었던 삼성 시절에는 이렇다할 평도 없었다.[19]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김용희 감독이 추구하는 시스템 야구를 가장 잘 구사하고 있는 구단은 바로 저 고척을 연고로 하는 옆 구단이라는 것이다. 4월 서건창의 부상 이후 김지수, 서동욱 등의 선수가 재등장했으며 송성문이라는 유망주까지 등장한 상태다. 그리고 최근 이택근의 부상이라던가 혹은 기존 주전 외야수의 휴식시 누가 그 자리를 훌륭하게 메웠는지 생각해 봐라. 바로 고종욱, 박헌도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군에서 제대한 홍성갑, 현재 2군에서 몸을 만드는 중인 거포 유망주 강지광도 있는 이상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20] 서진용은 결국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2016년 후반기에서야 복귀할 수 있었다.[21] 단 이는 필승조로 등판을 자주 하다보니 과부하가 걸린 것일 수도 있는 것이, 현재 문광은이 먹은 이닝이나 투구수 모두 올 시즌이 커리어 통산 최다라는 점이다. 정우람이 주자를 삭제한 덕이 있었음을 감안해도 평균자책점이 한 달만에 2 가까이 수직 상승한 것은 과부하가 가장 큰 요소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22] 단 이는 윤길현이 블론세이브는 단 2개밖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것은 현 SK 와이번스의 불펜투수진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5월 윤길현이 마무리를 보던 시절 윤길현의 기록을 살펴보면 블론세이브는 딱 2개뿐이었지만, 이는 수비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이 5월 당시 윤길현의 평균자책점과 WHIP 수치는 각각 2점대 후반과 1.5대의 WHIP로 10개 구단 마무리 투수 중 최하위에 해당되는 기록이었으며, 당시까지 5개의 블론세이브를 기록했던 윤명준보다도 더 나쁜 기록이었다 ! 수비의 도움이 없었으면 윤명준보다 더 심하게 당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김용희 감독이 아무 생각없이 윤길현을 마무리에서 내린 것이 아니다. 세상에 어느 구단의 감독이 1.5라는 높은 수치의 WHIP가 나오는 불펜투수를 마무리로 믿고 맡기겠는가? 불펜투수는 한 점도 내주지 않는, 거기에 마무리 투수라면 한 명도 내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피칭을 해야 한다.[23] 참고로 현 10개 구단 마무리 투수 중 정우람을 제외한 마무리 투수의 WHIP (이닝당 출루 허용율).가 가장 낮은 선수는 공교롭게도 양대극장미미극장의 봉꽃놀이는 어째서...이 둘의 7월 현재 WHIP 수치는 단 1.11밖에 되지 않는다. 정우람의 WHIP는 7월 현재 0.91인데, 문제는 마무리를 그래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수치인 1.20대를 기록하고 있는 선수는 공교롭게도 이재영과 채병용 단 두 명뿐이다. 이재영은 정우람의 도움을 받아서 저 정도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실질적으로 남는 것은 채병용 단 한 명이라는 사실인데 채병용은 밴와트가 전력에서 이탈한 현재는 대체 외인 선발이 등록되기 전까지는 임시 선발 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이며 평시에도 롱 릴리프를 거의 유일하게 맡고 있는 상황. 쉽게 말해 정우람을 제외하고 WHIP 수치상으로 마무리를 믿고 맡길 선수가 SK에는 현재 단 한 명도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2016시즌 그 정우람이 한화로 떠나면서 아예 한 명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박희수가 건강하게 돌아온 것이 다행이지만, 지금도 박희수까지 가는 과정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24] 물론 시즌 후반에는 당연히 그런 거 없었지만, 그때는 5강 다툼 하는 상황이라...[25] 이 해에는 실제로 삼성 라이온즈 구단에서 김용희 감독에게 동기부여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은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당시 삼성 구단이 김응룡 한 명을 잡기 위해 사활을 걸었던 사정을 생각하면...[26] 당시 롯데의 성적은 3위로 나쁘지 않았기에 청문회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회기애애했던 것. 당시에는 3~4위 승수가 4게임차 이상 차이가 나면 준플레이오프를 생략하고 3위가 플레이오프로 직행할 수 있었던 엄청난 혜택이 있었는데, 당시 롯데가 연패에 빠지면서 4위 해태와의 격차가 좁혀지면서 청문회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고 한다.[27] 파일:external/image.sportsseoul.com/20160913014055_9.jpg
본인은 감독, 박철순은 선수인 시절. 1995년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