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1:23:15

스탠리 매튜스

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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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매튜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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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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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인
파일:stanley-matthews-4215389.jpg
이름 스탠리 매튜스[1]
Sir Stanley Matthews
출생 1915년 2월 1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스태퍼드셔 스토크온트렌트 핸리
사망 2000년 2월 23일 (향년 85세)
영국 잉글랜드 스태퍼드셔 스토크온트렌트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5cm | 체중 71kg
직업 축구선수 (윙어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스토크 시티 FC (1932~1947)
블랙풀 FC (1947~1961)

→ 토론토 시티[2] (1961 / 임대)
스토크 시티 FC (1961~1965)
→ 토론토 시티 (1965 / 임대)
감독 포트 베일 FC (1967~1968)
국가대표 54경기 11골 (잉글랜드 / 1934~1957)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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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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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은퇴 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3.1. 전설들의 전설
4. 매튜스에 대한 헌사5. 사생활6. 여담7. 기록
7.1. 대회 기록7.2. 개인 수상7.3. 서훈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축구감독. 발롱도르 초대 수상자다. '50세까지 현역'으로 뛴 축구계 산신령의 원조격의 인물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준 최고령 선수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스탠리 매튜스는 1915년 2월 1일, 스토크 핸리의 시모어 가(Seymour Street)에 있는 테라스 하우스에서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매튜스의 아버지 잭 매튜스(Jack Matthews)는 프로 복서였는데, 매튜스가 6살 무렵에 빅토리아 그라운드[3]에 아들을 데려가 공개 테스트에 응시시켰고 합격했다. 이때 잭은 아들이 테스트에 합격할 것이라고 내기를 걸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매튜스는 집 뒷마당에 놓아둔 주방 의자들 사이로 드리블 연습을 하곤 했다. 매튜스가 어릴 때 잭은 아들을 강하게 키우고픈 마음과 자신의 뒤를 이어 복싱 선수로 데뷔시키기 위해 매튜스에게 복싱 풋워크를 가르쳤다. 그런데 이것은 나중에 스탠리 매튜스의 축구 선수 생활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13살의 매튜스는 복싱대신 축구를 선택했고 이 풋워크로 인해 주위의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운동 능력에 있어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매튜스의 어머니 엘리자베스의 회고에 의하면 매튜스가 토할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 세션을 소화하는 것을 보고 축구 선수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매튜스에게 잉글랜드 스쿨보이스[4]에 합격하면 축구를 계속하게 할 것이라는 제안을 했고 매튜스는 합격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2.2.1.1. 초기 선수 생활. 스토크 시티 FC
스쿨보이스에 합격한 매튜스에게 많은 클럽들이 매튜스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14살 매튜스의 선택은 1929년 당시 2부 리그에 속해 있던 고향팀 스토크 시티였다. 매튜스는 스토크 시티와 주급 1파운드짜리 계약을 맺었는데 이 계약에는 당시 스토크 시티의 감독 톰 마서(Tom Mather)가 매튜스의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설득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스토크 시티의 리저브 팀에 소속된 매튜스는 얼마 안가 번리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를 지켜본 아버지는 매튜스에게 그의 성격대로 현실적인 충고를 던졌다.
나는 네가 더 좋은 플레이를 한 것을 보았지만, 네가 더 나쁘게 플레이한 것 역시 보았다.

이 말은 매튜스의 가슴에 남아 그의 플레이에 있어 일희일비하지 않게 하는 일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했다. 1931~32 시즌에 매튜스는 리저브 팀에서 22경기에 출전하며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기 시작했는데, 이 당시에는 자신의 포지션을 확실히 정하지 못해서 레프트 하프 등 수비수로 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매튜스는 이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비수들이 플레이하면서 가질 수밖에 없는 약점들을 깨우쳐가며 그를 공략하는 자신만의 드리블을 완성해냈고, 그의 재능은 더욱 일취월장했다.

이어 매튜스는 1932년, 17세의 나이에 주급을 5파운드[5]로 올리면서 정식 프로 계약을 맺었고 그 시즌에 데뷔전을 치렀다. 데뷔전의 상대도 번리였는데, 시합에서는 1:0으로 이겼지만 매튜스는 여기서 상대 선수들이 얼마나 거칠고 더럽게 플레이하는지를 깨달았고, 여기서 살아남을 방도를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매튜스는 경험을 쌓아가면서 훈련에 매진했는데, 그의 팀 동료와 의견 차이 때문에 싸우기도 했었다. 사유는 팀 동료가 골프치러 가자는 것을 매튜스가 거절해서(...)

예나 지금이나 스토크 시티는 뭐 하나 볼 건덕지가 없는(...) 약체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는데, 매튜스가 1군에 합류한 1932~33 시즌 스토크 시티는 곧바로 토트넘을 1점차로 따돌리면서 2부 리그 우승과 함께 1부 리그[6]로 진입했다. 그리고 이 시즌 종반 무렵, 매튜스는 지역 라이벌 포트 베일을 상대로 데뷔골을 넣기도 했다.

1부 리그에 올라간 스토크 시티는 중위권 언저리에서 놀았지만 매튜스의 기량은 빛났다. 매튜스는 1부 리그 데뷔 시즌인 1933~34 시즌에 총 33경기에 출전하여 15골을 넣었는데, 의외로 이것이 매튜스의 커리어 하이 골 기록이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1934년 9월에 꿈에 그리던 대표팀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지션에도 정착하는 데에 성공한다.

결국 1935~36 시즌에 스토크 시티는 매튜스를 앞세워 리그 4위로까지 점프하는데 성공한다.[7]약관의 플레이어가 팀을 1부로 승격시킨 것은 물론이요, 1부 4위까지 끌어올렸다는 말도 크게 과장된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1937년에 매튜스가 처음 팀을 떠난다는 소식이 언론에 퍼지자 3000여명이 넘는 팬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반대시위를 벌였을 정도였다.[8]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영국 공군 소속으로 블랙풀에서 복무하며 강제로 커리어에 잠시 휴식기를 둔 매튜스는 전쟁이 끝나고 다시 축구계에 복귀했다. 하지만 매튜스는 아버지의 사망과 번든 파크 참사[9]의 아픔을 겪게 된다. 매튜스는 참사 유가족들에게 30파운드를 전달했지만 이것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겼다.

여기에 매튜스가 무릎 부상에서 복귀하던 시점에 아스날과의 시합에서 스타팅 라인업에서 빠지게 되자 매튜스는 팀에 다시 이적 요청을 했고, 팀은 이를 받아들였다. 매튜스가 선택한 팀은 전쟁 당시 군복무를 했고 자신이 살던 지역을 연고로 하는 블랙풀 FC였다. 원래 스토크 시티의 보드진은 리그 레이스를 치르는 팀의 사기에 영향을 줄 것을 염려해서 시즌이 끝날 때까지 이를 비밀에 부칠 것을 조건으로 매튜스의 이적을 수락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가 언론에 매튜스의 이적을 제보하는 바람에 이 비밀 유지는 단 하루도 가지 못했다.
2.2.1.2. 블랙풀 FC
2010년대 블랙풀의 행보를 기억하는 축구팬은 알겠지만, 블랙풀 역시 스토크 시티와 다를 것 없는 약팀이었다. 블랙풀은 당시도 마찬가지였고 1부 끝자락과 2부를 왔다갔다하느라 바쁘던 팀이었지만 그런 팀이 매튜스의 이적료로 11,500파운드를 투자했다. 이적 당시 매튜스는 32살이었고 매튜스의 입단 당시 블랙풀의 감독이었던 조 스미스[10]는 매튜스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다소 짖궂은 질문을 던졌다. "너 지금 32살이네. 앞으로 한 2년쯤은 더 뛸 수 있을까?" 그러나 스미스 감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매튜스에게 자신의 제대로 된 속내를 드러냈다.
여기에는 족쇄가 없어. 자신을 표현해라. 자신만의 게임을 하고 경기장에서 무엇을 하든 나는 전적으로 너를 지원할 거야.

이 말대로 스미스 감독은 자신이 추구하던 재미있는 축구의 구현에 매튜스를 중심으로 팀을 맞춰주었고, 매튜스에게 피치의 모든 권한을 일임하다시피 했다.

블랙풀이 투자한 이적료는 바로 효과를 봤고 매튜스가 합류한 1947-48시즌에 곧바로 FA컵 결승전까지 올라갔다. 비록 블랙풀은 상대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2:4로 패배하긴 했으나 지금 생각해도 블랙풀로서는 기적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그렇기에 해당 시즌에 최초로 제정되었던 FWA 올해의 선수상의 첫 수상자가 스탠리 매튜스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매튜스는 잉글랜드 1부 리그가 제정한 최초의 시즌 MVP가 된 것이다.

자선 경기에 출전했다 입은 부상으로 인해 잠시 주춤했던 시즌도 있었지만 매튜스는 블랙풀의 1부 리그 잔류는 물론, 1950-51시즌 다시 한 번 FA컵 결승으로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뉴캐슬재키 밀번의 두 골에 밀려 다시 준우승(...) 이분도 은근 콩라인이시다 1951-52 시즌의 매튜스는 발목 부상으로 인해 리그의 대부분을 날려 먹게 되었고 그와 아내가 운영하던 호텔에서 일하며 재활을 위해 힘썼다. 그리고 이때 매튜스는 채식주의로 그의 식단을 바꿨고 친정팀 스토크 시티에서 매튜스의 재입단을 추진하기도 했다. 매튜스의 스토크 귀환은 상당히 진전이 있었지만 조 스미스가 아직 매튜스의 기량이 쇠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지막에 이적을 반대하면서 실제 귀환은 더 뒤로 미뤄지게 된다.

블랙풀은 1952-53시즌 다시금 FA컵 결승전에 올랐다. 매튜스의 블랙풀 커리어에서 세번째 도전이었고 상대는 볼턴 원더러스였다. 이 대결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동료이자 신예 스트라이커였던 냇 로프트하우스와의 맞대결로도 관심을 끌었다. 사실 당시의 매튜스는 1부 리그 우승은 몰라도 FA컵 우승에 상당한 가치를 두고 있었는데 이는 아버지 잭의 유언때문이었다. 잭은 임종 직전에 어머니를 잘 모시고 선수 생활 중에 FA컵에서 꼭 우승하길 바란다는 2가지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떴고 이는 매튜스의 인생에서 큰 목표가 된 것이다.

하지만 후반 15분 정도가 되었을 때의 스코어는 1:3. 천지가 개벽할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블랙풀이 승리할, 그리고 잭의 유언이 실현될 일은 이번에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천지가 개벽했다.

스탠리 매튜스의 스피드 그리고 시대를 앞서갔던 드리블과 절묘한 패스는 기세등등하던 볼턴 수비진의 틈을 노리기 시작했고, 후반 23분에 그 첫 결실이 나왔다. 매튜스는 치고 달리기로 볼턴의 왼쪽 측면을 파고들다가 크로스를 날렸는데 그 크로스를 볼턴의 골키퍼 스탄 한센이 놓치고 말았고, 뒤에 있던 스탄 모텐슨이 밀어넣어 추격의 불씨를 마련했다. 그리고 경기 종료 직전, 블랙풀이 프리킥을 얻어냈고 모텐슨이 키커로 나섰다. 모텐슨은 강력한 킥으로 골을 성공시켰고 해트 트릭을 완성했다. 그렇게 스코어는 3-3 동점이 됐다. 그리고 인저리 타임, 볼턴의 왼쪽 측면을 초토화시키던 매튜스는 다시 한 번 볼턴의 수비수 랄프 뱅크스를 순간 스피드로 제치고 기막힌 패스를 찔러넣어 주었다. 그 패스는 아웃사이드 레프트 빌 페리의 발에 걸렸고 상황은 종료됐다. 최종스코어 4:3.
파일:external/i.telegraph.co.uk/stanley_matthews_1449538c.jpg
“The Matthews Final”
블랙풀의 클럽 역사상 처음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메이저 대회 우승 타이틀이었고, 매튜스의 숙원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종가의 상징인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세계 최고(最古)권위를 자랑하는 잉글랜드 FA컵 파이널 무대에서의 위대한 승리. 이 때 매튜스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해트트릭까지 기록하여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한 센터 포워드 스탄 모텐슨의 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경기는 현재까지 “매튜스 파이널(The Matthews Final)”[11]로 불린다. 그리고 그 때 그의 나이 38살이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매튜스는 그야말로 나이를 거꾸로 먹기 시작한다.
파일:external/cs411020.vk.me/BDjdhE4CaAI.jpg

매튜스는 꾸준한 활약을 보였지만 기자들은 매튜스의 나이를 들먹이며 부진한 경기를 펼치면 매튜스를 폄하하는 기사들을 대서특필하곤 했다. 이 때 아스날이 편법과 불법에서 줄을 타며 매튜스를 영입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하기도 했다.

매튜스와 블랙풀의 1955-56시즌 최종 성적은 1부 리그 2위. 이것이 블랙풀 클럽 역사상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본 성적이다. 신예 라이트 백 지미 암필드와 함께 한 오른쪽 측면은 당시 어떤 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으며 당시가 되었던 지금이 되었든 블랙풀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못했을 성적이었으니 블랙풀 팬들로서는 눈물까지 흘릴만한 발전이었고 그들에게 스탠리 매튜스는 영웅 그 자체였다. 이것이 매튜스와 블랙풀 리그 커리어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즌은 유럽 최강자를 가리자는 취지의 유러피언 컵 이 처음으로 기치를 올린 시즌이었다. 또한 그에 발맞춰 프랑스풋볼紙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 즉 발롱도르가 처음으로 제정된 시즌이었다.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축구판 최고의 영예를 최초로 차지한 플레이어가 바로 나이 40살의 스탠리 매튜스다.[12] 당시 매튜스와 함께 최종후보 3인에 오른 플레이어들을 보면 더욱 입이 벌어진다. 한 명은 바로 그 유명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Alfredo Di Stefano)[13]였고, 또 한명은 프랑스의 원조 레전드 플레이어라 불리던 레몽 코파(Raymond Copa)였다. 심지어 이 둘은 처음 개최된 유러피언컵 결승전(레알 마드리드 VS 스타드 드 랭스)에서 맞붙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톱 플레이어들이었다. 최초의 유럽 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겨루던 두 클럽의 에이스를 뒤로 하고 잉글랜드 리그 2위에 간신히 턱걸이한 블랙풀의 나이 40 스탠리 매튜스에게 갓 만들어진 황금공이 돌아간 것이다.[14][15]

매튜스와 블랙풀의 동행은 1961년, 매튜스가 스토크 시티 복귀를 선언하면서 끝났다. 스미스 감독이 1958년에 물러난 이후 블랙풀의 새로운 감독으로 취임한 론 수아트(Ron Suart)는 매튜스의 영향력을 줄여나갔고 출전 횟수도 줄어들었다. 1961년 시즌 아스날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블랙풀에서 440경기 출전의 기록을 남겼다.
2.2.1.3. 친정팀 복귀
매튜스가 선수 생활의 황혼기에 친정팀으로 복귀한 이유는 2부 리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친정팀의 처지를 가엾게 여긴 영향도 크다. 스토크 시티는 매튜스가 블랙풀로 떠난 때를 기점으로 날개 없이 추락했다(...). 그와 함께한 마지막 시즌이던 1946-47시즌 리그 4위에 올랐던 스토크 시티는 다음 시즌 15위로 순위가 곤두박질쳤다. 이후 10위권 이내는 어림도 없을 만큼 바닥을 떠돌다가 급기야 1952-53시즌, 그러니까 매튜스가 블랙풀을 이끌고 FA컵에서 우승할 동안 스토크 시티는 결국 22개 팀 중 21위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강등당하고 말았다. 그리곤 내내 2부 신세였다. 사실 운동선수로는 할아버지뻘인 46살 스탠리 매튜스의 복귀로 뭐가 달라질까 싶었던 전력이었다. 그런데...

1960-61시즌 2부에서도 18위에 그쳤던 스토크 시티는 매튜스의 합류와 동시에 1961-62시즌 8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다음 시즌, 놀랍게도 매튜스의 스토크 시티는 2부 리그 챔피언이라는 전리품을 들고 당당히 1부로 복귀한다. 1962-63시즌 FWA 올해의 선수상이 48살의 2부 리거 스탠리 매튜스에게 돌아간 배경이다.

그러나 매튜스는 두번째 올해의 선수상 수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지하게 은퇴를 고려하게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부상 회복 속도 저하였다. 매튜스가 철저히 몸관리를 했음에도 젊었을 때는 며칠이면 나았을 정도의 가벼운 부상 회복에도 주단위가 걸리게 되자 그는 1964-65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매튜스의 50회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았던 1965년 4월, 축구인으로서는 최초로 기사 작위(Knight Bachelor)를 받는 상징적 대목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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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이를 잊은 전설 스탠리 매튜스 경은 50살에 공식적으로 필드를 떠났다. 그런데 은퇴한 그 후로도 필드를 잊지 못하고 플레잉 코치로 몇년 더 뛰었다니, 여러모로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스토크 시티는 그의 공적을 기리고 퇴직금을 챙겨주는 의미[16]에서 은퇴 경기를 열어주었는데 매튜스 팀과 세계 올스타 팀의 경기로 치러졌다. 그런데 여기에 모인 선수들의 이름값이 무시무시했다.

매튜스 팀에는 지미 암필드, 조니 헤인스, 데니스 로, 지미 그리브스, 보비 찰튼, 레이 윌슨, 로저 헌트 등 역대 최고의 영연방 선수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 선수들만 해도 후덜덜한데 세계 올스타팀 멤버들은 더 무시무시했다. 레프 야신, 카를하인츠 슈넬링어, 요제프 마소푸스트, 짐 백스터, 레몽 코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스, 에우제비우(...) 심지어 후보에 우베 젤러, 볼프강 오베라트, 프란시스코 헨토, 라슬로 쿠발라 등이 있었다. 보비 찰튼이 2023년에 사망하면서, 현재 볼프강 오베라트 빼고는 2024년 현재 모두 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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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경기에서의 스탠리 매튜스

경기는 올스타 팀이 6:4로 이겼으며, 경기가 끝난 후 푸스카스와 야신의 어깨에 올라타 필드를 돌았다.

2.2.2. 국가대표

매튜스는 1934년 9월 29일, 카디프에서 웨일스를 상대로 잉글랜드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후반 39분에 대표팀 데뷔골도 터뜨렸다. 잉글랜드는 웨일스를 4:0으로 대파했다. 매튜스의 다음 A매치 상대는 이탈리아였는데 이 경기는 다른 의미로 지금까지도 유명한 경기이다. 매튜스는 1년 후인 1935년 12월 4일에 독일전에 3번째 A매치 경기에 출전했다. 경기는 잉글랜드가 3:0으로 이겼지만 매튜스는 뮌첸베르크에게 막히는 바람에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경기 이후 다시 대표팀과 멀어졌던 매튜스는 1937년 4월에서야 대표팀에 복귀했고 같은 해 12월 런던에서 열린 체코슬로바키아와의 A매치에서 대형사고를 쳤다. 1명이 퇴장당한 상황에서 싸워야 했던 경기의 최종스코어는 5:4. 약관을 갓 넘긴 스탠리 매튜스는 종가의 심장에서 해트 트릭을 달성했고, 덕분에 잉글랜드는 승리를 챙겼으니 자연 잉글랜드 전역에 명성이 울려퍼졌다.

1938년의 유럽 원정길 때 독일에서는 잉글랜드 선수들이 FA에게 유화책으로 나치식 경례를 할 것을 제안받기도 했다. 결국 매튜스를 포함한 잉글랜드 선수들은 정치적 싸움으로 번지게 하기 싫어서 마지못해 경기 전에 경례를 하기는 했지만 이에 크게 반발했다. 매튜스는 나름 뮌첸베르크에 복수를 했고 경기도 6:3으로 잉글랜드가 승리했다.

1939년에도 매튜스는 잉글랜드 대표팀 경기에 참가했지만 산시로 원정 경기에서 골반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대표팀 경기에서 빠졌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매튜스의 대표팀 커리어는 휴식기에 들어갔다.

매튜스의 대표팀 복귀는 1947년 4월 12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있었던 스코틀랜드전에서 이뤄졌고 그해 여름에 있었던 잉글랜드의 유럽 투어에 매튜스도 참가했다. 잉글랜드는 스위스에게 일격을 당했지만 포르투갈을 10:0, 벨기에를 5:2로 꺾어 체면치레를 했다.

1948년 4월 10일에 있었던 스코틀랜드 원정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2:0 승리를 챙겼지만 매튜스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경기 후 매튜스가 자신의 비용 6펜스에 대해 스콘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그는 FA의 조사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다음 달에 있었던 이탈리아전에 매튜스는 문제 없이 출전했고 잉글랜드의 4:0 승리에 기여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 매튜스가 이 경기에서 알베르토 엘리아니(Alberto Eliani)를 제압한 후 유니폼 하의 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머리를 빗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은 햇볕으로 인해 났던 이마의 땀을 닦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소문은 상당히 오랫동안 매튜스를 따라다녔고 그것을 직접 봤다는 사람도 많았다.

1949년은 매튜스의 국가대표팀 커리어에 위기가 찾아온 한 해였다. 월터 윈터보텀은 매튜스보다 더 수비적인 역할을 해줄 아웃사이드 포워드를 찾았고 매튜스의 출전 기회는 줄어갔다. 이렇게 되면 이듬해에 있을 잉글랜드의 첫 월드컵 출전도 남 이야기가 될 터였지만 매튜스는 캐나다 투어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 월드컵 대표팀 명단에 합류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 상대팀을 얕보았고 매튜스는 미국전까지 출전하지 못했다. 잉글랜드는 미국에 0:1로 패하는 개망신을 당하고 나서야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 매튜스까지 출격시키며 총력전을 펼쳤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스페인에 0:1로 또 지며 일찍 보따리를 싸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53년 FA컵 결승에서 매튜스 파이널이란 화려한 업적을 남긴 매튜스였지만 그도 11월 25일, 잉글랜드 축구에 굴욕의 역사가 쓰이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나마 매튜스 본인에게 다행인 것은 잉글랜드가 복수의 칼을 갈고 떠난 부다페스트 원정에서 1:7로 대패할 때 매튜스는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잉글랜드는 1954년 월드컵에 출전했고 매튜스도 대표팀에 합류했다. 이로써 39세의 매튜스는 톰 플로리를 제치고 FIFA 월드컵 최고령 참가 선수가 되었다.[17] 잉글랜드는 이 대회에서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에 패하면서 8강 진출에 만족해야했다.

1954년 10월 2일, 잉글랜드는 북아일랜드를 2:0으로 꺾었지만 매튜스는 돈 레비와의 호흡에서 문제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해결되었고 잉글랜드는 12월에 있었던 월드컵 챔피언 서독과의 경기에서 3:1 승리를 따내 약간의 자존심 회복에 성공했다.

1955년 4월의 스코틀랜드전 7:2 승리는 매튜스와 레비의 호흡에 문제가 해소되었음을 드러낸 경기였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비운의 천재가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에드워즈는 매튜스가 프로에 데뷔할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선수였으니 세월의 흐름과 매튜스의 뛰어난 자기 관리를 알 수 있게 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었다. 매튜스는 이후 잉글랜드의 1955년 투어에 제외되었다가 10월에 있었던 웨일스전에 대표팀에 복귀했다.

1956년 5월 9일, 매튜스는 잉글랜드 대표팀 역사상 처음으로 맞붙게 된 브라질과의 친선 경기에 출전했고 경기는 잉글랜드의 4:2 승리로 끝났다. 이 해에 황금공 초대 수상의 영예를 안은 매튜스는 10월 6일, 북아일랜드전에서 득점을 기록해서 잉글랜드 대표팀 내 최고령 출전[18]과 득점 기록을 동시에 경신했다.

매튜스의 잉글랜드 대표팀내 최고령 출전 기록은 1957년까지 본인이 계속 경신했고 그의 마지막 대표팀 경기는 1958년 월드컵 지역 예선 덴마크전이었다. 당시 매튜스의 나이는 42세 103일로 그가 갖고 있는 잉글랜드 대표팀 최고령 출전과 득점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잉글랜드 언론은 1958년 월드컵 대표팀에 매튜스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이뤄지지 않았고 매튜스는 덴마크전을 마지막으로 23년간의 대표팀 기록을 매듭지었다.

2.3. 은퇴 후

매튜스는 친정팀 스토크 시티의 라이벌 중 하나이자 어린 시절 본인이 응원하던 팀인 포트 베일에서 감독을 맡기는 했지만 시원치 않아서 금방 잘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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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953년 FA컵과 함께(가운데 인물)

하지만 매튜스가 스토크 시티와 블랙풀에서 워낙 상징성이 큰 인물이다 보니 스토크 시티에서는 회장, 블랙풀에서는 명예 부회장의 직함을 주었다.

스탠리 매튜스는 2000년 2월 23일에 사망했는데 이 때 공교롭게도 잉글랜드 대표팀아르헨티나와 친선경기가 예정되어 있던 날이었고 매튜스의 부고는 경기 시작 직전에 방송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보비 찰튼잭 찰튼 형제, 고든 뱅크스, 냇 로프트하우스, 톰 피니 등 축구 원로들이 참가했고, 그 외에도 10만이 넘는 조문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또한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스토크 시티의 홈 구장 bet365 스타디움의 센터 서클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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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중 한 명이자[19], 세계 축구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불멸의 존재이다.

스탠리 매튜스의 포지션상 위치는 당시 용어로 오른쪽 '아웃사이드 포워드(Outside Forward)'[20]였다.

처음 축구판에의 주를 이룬 포메이션 기조는 2-2-6(...) 같은 극단적인 공격축구로 시작되었지만 이건 19세기 시절 이야기이고, 그나마 20세기 초엽의 몇 차례 수정을 거친 것이 피라미드 또는 메토도라 불리는 2-3-5 포메이션이었다, 즉, 1명의 센터 포워드와 그 밑에서 센터 포워드와 함께 공격을 풀어나가는 역할의 인사이드 포워드, 그리고 다시 양쪽 측면으로 1명씩의 아웃사이드 포워드가 위치하는 그림이다. 현대식으로 치환하면 4-4-2나 4-2-3-1 포메이션의 '측면 미드필더'라 보면 거의 들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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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런 식. 중앙에 위치한 하프백이 그 유명한 포지션인 센터하프 되시겠다.

그리고 스탠리 매튜스는 이전 그리고 동시대에 활약했던 수많은 아웃사이드 포워드 중에서 언터처블 그 자체였고, 현대축구에서 칭하는 윙어의 개념을 확립시킨 플레이어라 평가받는다. 현대 축구판에서 윙어로서 가장 필요한 개념이라 꼽히는 드리블 돌파력과 정확한 크로스에 있어서 스탠리 매튜스는 당대 최강이었다. 공 좀 몰고 다닌다는 선수를 흔히 일컫는 드리블의 마술사라는 찬사를 최초로 받은 플레이어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

상술했던 포메이션에서 드러났듯 닥돌이 대세였던 초창기 축구에서 그는 자신의 템포는 물론 경기 자체의 완급을 조절할 줄 아는 드리블러이자 플레이메이커였다. 이런 선수가 스피드까지 빨랐으니...

이렇듯 그에게는 최초의 현대판 윙어이자, 세계축구의 기조를 완급조절과 중앙에서의 허리싸움으로 바꾸게 만든 최초의 플레이라는 평가도 따른다.

3.1. 전설들의 전설

시대를 앞서나간 드리블 스킬, 말 그대로 전방 공격수에게 갖다 떠 주는 패스, 마치 숨쉬듯이 경기 자체의 완급을 조절할 줄 아는 플레이메이킹, 팀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분위기를 뒤바꿔 버리는 한방 등, 측면에서만 플레이하지 않고 중앙에서도 플레이하고 때로는 포지션 스위칭까지 해치웠던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의 토털 패키지라 불리던 선수이다.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인프라이다. 말도 안 되는 무게에 반발력 최악인 축구공, 무거운데다 착화감 최악의 빳빳한 축구화[21]를 신고 방목장을 연상케하는 필드에서 차원이 다른 테크닉을 선보였으니 그의 축구센스는 가히 시대를 초월하는 경이 그 자체였다.

단지 이것만으로 스탠리 매튜스라는 선수의 설명이 끝난다면 전설 위에 군림한 전설이라는 무시무시한 찬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 이후에 매튜스 이상의 드리블러나 플레이메이커들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스탠리 매튜스라는 선수는 자신의 능력을 50세에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갈고 닦던 노력형 천재였는데 블랙풀에서 뛰던 당시 그는 스피드의 향상을 위해 신발에 납덩이를 붙이고(...) 조깅을 했다. 참고로 그의 나이는 블랙풀 이적 시즌에 이미 32세... 그리고 매튜스는 당시로서는 "그게 필요한거임?"이란 소리를 들었던, 그러나 현대축구에서는 선택 아닌 필수인 식단을 통한 컨디션 조절을 앞서 행하던 선수였다. 그는 술과 담배를 선수 생활 내내 멀리했고 선수 시절에 유일하게 술을 마셨던 때가 매튜스 파이널의 축하연에서 샴페인을 마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매튜스는 축구를 배우려는 자세도 항상 갖추고 있었다. 1950년 월드컵 당시 잉글랜드가 조기 탈락하자 다른 선수와 스태프들은 모두 잉글랜드로 돌아갔지만 매튜스는 혼자 브라질에 남아 남은 월드컵 경기들을 관전하며 공부했다고 전해진다.[22]

이러면서 30년이 넘는 현역시절 동안 옐로카드 한 장 조차 받지 않은 훌륭한 인품과 멘탈을 지닌 선수였다. 당연히 매튜스에게도 수많은 상대 선수들의 보복이나 도발이 가해졌지만 지미 암필드는 매튜스가 그에 말려드는 걸 한번도 본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그는 경기장에서 냉철한 태도를 유지해서 그의 감정이 경기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항상 경계했다. 그렇기에, 말 그대로 아들뻘 되는 어린 선수들과 함께 뛰고 또 그들을 상대하며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노력하는 천재를 감히 누가 막겠는가.

종목을 막론하고 프로 선수에게 '스탯'이라는 기록은 뗄 수 없는 꼬리표 같은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솔직히 스탠리 매튜스 역시 스탯만 따지고 본다면 딱히 내세울 것이 없다. 길고 긴 프로생활 동안 넣은 골이라고는 71골 뿐이며 국가대표에서도 11골이 전부다. 다만 측면 미드필더라는 포지션 특성상 골 수가 많지 않은 것은 한편으론 당연하며, 예나 지금이나 축구에서 어시스트 수는 딱 부러지게 집계하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막연한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매튜스가 본인이 직접 득점하는 것보다 정확한 크로스를 통해 동료들의 득점을 돕는 플레이를 1930년대 중반부터 펼친 이유도 있다.

무엇보다, 앞서 적었듯이 당대 최강의 플레이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레몽 코파마저 한 수 접어야 했던 스탠리 매튜스의 그 포스는 5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로서는 피부에 와 닿지 않지만, 그를 직접 보고 그와 함께 플레이했던 동시대 사람들은 다름아닌 스탠리 매튜스를 선택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4. 매튜스에 대한 헌사

우리에게 축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 사람
펠레
잉글랜드 축구史에 있어 그보다 위대한 플레이어는 없다.
고든 뱅크스[23]
게임에서 거의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다.
프란츠 베켄바워
내가 본 최고의 크로서, 그리고 그는 낡고 무거운 공과 싸워야만 했다.
존 찰스
그는 모든 것을 가졌다. 좋은 컨트롤과 훌륭한 드리블 능력, 그리고 빛과 같은 스피드까지. 또한 어떻게 패스할 줄도 아는 현명한 선수였다.
조니 자일스

5. 사생활

매튜스는 1935년 8월 19일, 자신의 소속팀 트레이너의 딸인 베티와 결혼했다. 그들은 매튜스가 15살 때 처음 만났다고 한다. 매튜스는 1939년생 딸 진(Jean)과 1945년생 아들 스탠리 주니어를 두었고 스탠리 주니어는 주니어 테니스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1967년에 매튜스가 통역사였던 밀라와 사랑에 빠지면서 이혼하게 되었다.

6. 여담

  • 1953년 FA컵 결승전 당시 입장권 10만장 중 블랙풀 서포터들에게 단 12,000장만 할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매튜스는 팬들이 곧 게임의 생명선이라고 말하며 비판했다.
  • 1958년 7월에 매튜스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더 타임스에 보낸 인종차별 철폐 서한에 서명하기도 했다.
  • 매튜스는 선수 생활 도중은 물론이고 은퇴 후에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직접 날아가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무료로 축구를 가르쳐줬다.
  • 1985년, 나이 70이던 스탠리 매튜스는 브라질 레전드들과의 친선경기에 참가했다. 여기에서 그는 연골 부상을 입었다. 그 나이에 뛰었으니 부상을 안 입는게 신기하기는 하다(...)

7. 기록

7.1. 대회 기록

7.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56[24]
  • FWA 올해의 선수: 1948, 1963
  • PFA 세기의 팀[25]: 2007
  • 월드스포츠 1950년~1970년 세계 베스트 XI: 1970
  • PFA 메리트상: 1987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 IFFHS 올타임 잉글랜드 드림팀: 2021

7.3. 서훈



[1] 외래어 표기법상으로는 매슈스가 맞으나, Matthew, Matthews 등의 이름이 매튜, 매튜스로 많이 알려져 있어 이 프로필의 이름도 매튜스로 둔다.[2] 1961년에 창단되어 1967년에 해체된 토론토 연고로 하던 클럽이며, 2006년에 창단된 토론토 FC와는 다른 클럽이다.[3] 스토크 시티bet365 스타디움 개장 이전에 쓰던 홈구장이다.[4] 1904년에 설립된 학원 축구를 관리하는 기관이다.[5] 매튜스의 이 계약은 웬만한 프로 선수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단, 여름방학기간에는 3파운드를 받았고 아버지는 매튜스에게 승리 수당만 생활비로 쓰고 주급은 저축하라는 조언을 남겼다고 한다.[6]프리미어 리그에 해당한다.[7] 참고로 이때의 리그 4위가 스토크 시티가 1부 리그에서 세운 역대 최고의 성적이다. 그만큼 예나 지금이나 스토크 시티의 전력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8] 매튜스가 이적 요청을 한 원인은 선수 본인은 우승을 원했는데 스토크 시티의 성적이 떨어져 우승권에서 멀어지자 매튜스가 참지 못하고 이적 요청을 먼저 한 것이었다. 팬들의 성원에 매튜스는 팀에 남기로 결정했지만 결국 나중에 이는 블랙풀 이적의 불씨가 되고 만다.[9] 헤이젤 참사힐스버러 참사의 원조격인 사고. 1946년 3월 9일, FA컵 8강 2차전에서 있었던 일로 볼턴의 홈구장에 8만 5천의 인파가 모여들었고, 경기가 시작되면서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한 팬들이 경기장에 밀어닥치면서 방벽이 무너져 33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볼턴팬이었다.[10] 블랙풀에서 1935년부터 23년간 감독 생활을 했다.[11] 정작 매튜스 본인은 생전에 이 경기를 회고할 때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매튜스는 본인의 활약보다 팀의 승리였다는 태도를 보였으며 특히 모텐슨의 활약을 치켜세웠다.[12] 당연한 이야기지만 매튜스는 역대 최고령 발롱도르 수상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 역시 축구계에서 불멸의 기록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일단 축구 역사를 통틀어서 40살까지 발롱도르는 고사하고 팀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했던 선수가 몇 명이나 되는지 생각해보자. 40세는 커녕, 20대 후반들도 팍팍 나가떨어지는게 오늘날의 축구다.[13] 당시 투표 결과는 매튜스가 47점, 디 스테파노는 44점으로 상당히 박빙이었다.[14] 다만 이 수상은 매튜스에 대한 경의의 의미에서 받았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디스테파노는 30살의 나이로 라리가 득점왕에 오르고 레알 마드리드를 유러피언컵 초대 우승팀으로 이끌었다. 그런 디 스테파노가 당시 매튜스보다 못했다고 말하는건 다소 힘든 감이 있다.[15]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당시 초회차 대회를 치른 유러피언컵의 위상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는 점이 꼽힌다. 유러피언컵 창립 시점에서 80년이 넘은 FA컵이나 70년이 넘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영국 1부 리그의 권위가 이제 막 시작된 유러피언컵의 권위보다 아래라 보긴 힘들었다. 실제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1954-55시즌 우승으로 1회 유러피언컵에 초청받은 첼시에게 격이 떨어지니 참여하지 말라는 권고를 했고, 첼시 역시 군말없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16] 잉글랜드 리그는 오랫동안 선수들의 임금에 상한제를 유지했었기 때문에 당연히 잉글랜드에서만 선수 생활을 했던 매튜스는 이 제도의 가장 큰 피해자라 할 수 있었다.[17] 현재의 최고령 월드컵 참가 선수는 45세의 에삼 엘하다리이다.[18] 1873년에 기록된 알렉산더 모텐(Alexander Morten)의 41세 174일의 기록이었다. 여담으로 모텐의 A매치 기록은 이 경기가 유일하다.[19] 보통 바비 찰튼, 조지 베스트, 바비 무어 등과 함께 최전선에서 언급된다.[20] 세월이 흐르면서 축구 전술이 변하고 그에 맞춰 포지션의 임무가 변하면서, 어떤 포지션을 가리키는 단어가 시대마다 뜻이 달라진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글자 그대로 의미밖에 없었다. 막말로 '맨 앞줄 한가운데 놈', '맨 앞줄 끄트머리 놈', '맨 앞줄 끄트머리보다 안쪽 놈' 이런 식으로 붙인 것이다(...)[21] 그래서 매튜스의 선수 생활은 자신에게 맞는 축구화를 찾는 것의 연속이었다. 잉글랜드에서 자신이 원하는 가벼운 축구화를 구하지 못하니 외국에서 커스텀 축구화를 구입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매튜스 본인 역시 매우 민감해서 수많은 축구화를 바꿔가며 신었다.[22] 그래서 매튜스는 본인의 자서전을 포함한 여러 차례에 걸쳐 FA의 보수성을 비판했다.[23] 1966년 잉글랜드의 첫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자,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골키퍼로 꼽히는 레전드.[24] 최초 발롱도르 수상자[25] 1907~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