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7 20:07:20

펠레

파일:2DBC40C8-DA7B-4B46-9DC8-56B8F9D6697B.pn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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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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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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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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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코파 아메리카 MVP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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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1962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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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코스모스 명예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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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칭 펠레 (Pelé)
본명 에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3][4]
(Edson Arantes do Nascimento)
출생 1940년 10월 23일[5] ([age(1940-10-23)]세)/
트리스 코라송이스[6]
국적 파일:브라질 국기.png 브라질
종교 가톨릭
가족 2남 1녀 중 첫째, 슬하 2남 5녀
신체 174cm | 체중 72kg
주발 양발
등번호 10번[7]
포지션 공격수
소속 팀 바우루 AC (1952~1956/유스)
산투스 FC (1956~1974)
뉴욕 코스모스 (1975~1977)
통산 득점 767골
국가대표 91경기 77골[8](브라질 / 1957~1971)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png 파일:트위터 아이콘.png
파일:bicycle-kick-pele-hand-signed-limited-edition-5876-0-1430262718000.jpg
파일:780w.jpg
1968년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나온 바이시클 킥
파일:Pelé_1960.jpg
1960년 5월 브라질 대표팀에서 뛰면서 수비수를 따돌리고 있는 펠레

1. 소개2. 생애
2.1. 어린 시절2.2. 클럽2.3. 국가대표
2.3.1. 1958년 월드컵2.3.2. 1959년 코파 아메리카2.3.3. 1962년 월드컵2.3.4. 1966년 월드컵, 유럽 텃세 최대의 피해자2.3.5. 1970년 월드컵. 황제로 등극하며 축구를 정립하다.
2.4. 은퇴 이후
3. 플레이 스타일4. 평가
4.1. 펠레에 대한 말, 말, 말4.2. 펠레의 현역 시절 세계 축구계4.3. 비판
4.3.1. 선수시절과 기록에 관한 비판적 의견 그리고 반박4.3.2. 인성, 사생활적인 부분에 관한 비판
4.4. VS 디에고 마라도나
5. 어록6. 펠레의 저주7. 이야기거리8. 수상 기록
8.1. 대회 기록8.2. 개인 수상8.3. 개인 기록

1. 소개

파일:PELE.jpg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일명 축구 황제(The King of Football)[9]영어권 국가에서는 최고의 존칭으로 황제라는 단어 대신 'King'을 더 자주 쓰기 때문이다. 브라질 월드컵 조 추첨식에서 "축구공 호나우두(...)"와 같은 말실수로 구설수에 올랐던 SBS 동시통역사가 펠레를 "축구왕"이라고 통역한 건 해외에서의 명칭을 직역했기 때문. 이 왕이라는 칭호는 1958년 2월 26일 쓰여진 칼럼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유서깊은 별명이다. 기사.]로 불리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10][11]이자 역대 최고의 운동선수 중 한 명이다.[12]

본명은 에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Edson Arantes do Nascimento). 펠레(Pelé)라는 애칭으로 더욱 유명하다. 브라질에서는 축구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브라질 정부에서 펠레의 선수 생활 당시에 레알 마드리드 CF, 유벤투스 FC,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등 최고의 유럽 구단의 펠레 영입을 막기 위해 공식적으로 그를 국보로 지정했을 정도다. 또한 발롱도르를 선정하는 프랑스 풋볼에서 못 받는 국적도 포함, 2016년 재심결과 펠레는 7개를 수상했다.[13] 그와 가장 많이 비견되는 축구선수인 디에고 마라도나가 사생활 문제로 끊임없는 구설수에 오르는 것과 비교하면 은퇴 이후에도 큰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한 적도 없고 축구 진흥 및 홍보에 계속 힘쓰는 등 모범생의 이미지가 강하다. 까르도수 대통령 시절 브라질의 체육부 장관으로 입각되어 국정에도 참여하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위에도 썼다시피 펠레는 별명이다. 아버지 돈지뉴[14]의 친구였던 골키퍼 "빌레(Bilé)"를 어렸던 펠레가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하고 "펠레"로 발음해서 생긴 별명이라 카더라. 1977년에 발간된 펠레의 자서전에서조차 펠레라는 별명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적혀져 있다. 한참 후인 2010년 10월 경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는 이와 같이 밝혔다. 참고로 빌레는 포르투갈어가 아니라 히브리어기적이라는 뜻이다. 펠레는 흑진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펠레는 어릴때 자신의 별명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펠레가 살던 골목의 동네친구들이 그를 펠레라고 부르며 놀려대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싸우기도 했다. 펠레의 원래 이름인 에지송(Edison)은 아버지 돈지뉴가 지어준 이름인데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붙여준 것이다. 이는 돈지뉴가 에디슨을 존경하여 그와같이 위대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으로, 이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던 펠레는 에지송이라는 이름을 무지 사랑해서 이상한 별명을 부르는 주위 사람들과 싸운 것이다. 덧붙여 돈지뉴는 호적에 올릴 때 i자를 빼고 "에드송(Edson)"으로 올리려고 했지만 서류 절차상 실수가 생겨서 기록상으로는 에지송이 되었다.

어찌저찌 펠레란 칭호가 굳어져버렸고 학교에서도 그를 펠레라 부르기 시작하자 그는 학교에서도 싸웠고 이틀간 징계를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급기야 아버지까지(...) 그를 펠레라 부르게 되자 아버지랑도 싸우고 그걸로 게임 끝. 후에 스타가 된 후 그는 펠레란 이름을 신이 주신 이름이라며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펠레의 가족들은 그냥 에지송의 애칭인 지쿠(Dico)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거의 빈민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준프로 선수로 보잘것없는 선수 수당 때문에 시간제 근무를 하며, 생활비를 보탰다. [15] 펠레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헤딩 실력만큼은 더 뛰어났었다고 회고했다.아버지는 축구 역사상 손에 꼽는 타겟터였음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선수 생활 시절 헤딩으로만 5골을 넣었던 적도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못했다고 말했다.[16] 하지만 아버지는 부상 때문에 제대로 활약은 못했다. 상대 팀과의 경기에서 태클 때문에 무릎이 부서진 것. 하지만 그의 아버지답게 결국 축구를 다시 시작하여 시청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고, 바우루로 이사하여 펠레가 축구를 배울 수 있게 했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축구를 좋아하고 공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파일럿을 비롯한 여러 꿈을 꾸기도 하며 가끔 무서운 일이 있을 때면 어머니에게 응석도 부리는 평범하고 조금은 소심한 아이였다. 당시의 펠레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멘토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자신이 못 이루었던 꿈을 아들에게 물려주어 그를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로 만들고자 하였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노하우를 모두 주었다. 축구 선수로서 가져야할 기본적인 스킬과 마음 가짐은 물론이고 심지어 관중을 다루는 법까지 가르쳤었다.아버지는 축구 역사상 손에 꼽힐만한 코치였음 또한 분명하다.

펠레가 9살이 되던 해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난다. 당시 펠레는 라디오로 경기 중계를 듣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고, 아버지를 위해서 브라질월드컵에서 우승시킬 것을, 그리고 우루과이에 복수할 것을 예수상 앞에서 맹세한다. 자서전에 보면 예수상 앞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고 나와있다.한니발이냐 실제로 펠레는 신앙심이 매우 두텁다.

그렇게 동네에서 축구를 열심히 하다가 아버지의 전 소속팀이었던 바우루 AC에서 유소년 팀을 만들었고, 그 코치로 위대한 멘토 바우데마르 지브리투[17]를 데려왔다.

그리고 바우데마르의 소개로 산투스 FC 유소년팀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브라질의 축구클럽인 산투스에서 17년 동안 뛰었다. 그리고 미국의 축구증진을 위하여 뉴욕 코스모스에서 3년간 뛴 적이 있었다.[18] 참고로 펠레는 나중에 간 뉴욕 코스모스를 빼면 산투스 죽돌이였다.

산투스 유소년팀에서 훈련을 받던 펠레는 2번 탈출을 감행한 적도 있었다. 한 번은 자신의 작은 체격에 좌절감을 느꼈을 때, 다른 한 번은 경기에서 페널티 킥을 실축하였을 때였다. 한낱 페널티 킥 실축 갖고 뭘 그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시합은 4살은 더 어린 선수들과의 시합이었다.[19] 이 시합 내내 삽질만 하다가 페널티 킥까지 날렸기 때문이다. 이 때마다 팀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허드렛일을 하던 사부라는 친구에게 걸려서 다시 숙소로 반송되었다.
사실 간단하게 표현하다보니 걸린 거라 썼을 뿐 사부는 사실 멘탈이 깨진 펠레를 잘 달래서 다시 축구에 전념하게 만든 인물이다. 작은 체격에 좌절감을 느꼈을 때는 "네가 바우루 시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거다. 만약 지금 먹는 속도대로 계속 먹다보면 조만간 너는 산투스 제일의 뚱보가 될 거다"라는 식으로 말하며 가방을 빼앗아 다시 펠레의 방 안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페널티 킥 실축 사건 때에는 펠레의 방에 쳐들어갔다. 펠레가 울면서 짐을 싸고 있는 모습을 보자 대뜸 사부는 좋은 구경했다는 식으로 펠레의 속을 긁었다. 펠레가 페널티 킥 놓친 걸 말하느냐고 답하자 사부는 그렇다. 그렇게 페널티 킥을 날리는 건 거의 처음 보았다는 식으로 말했고 당연히 펠레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하지만 사부는 침착하게 네가 모델로 삼고 있을 산투스의 스타플레이어들도 연습이든 실전이든 페널티 킥 엄청나게 실축하던 거 난 봤다. 누구나 다 하는 실수니 풀 죽을 필요 없다라는 식으로 화나 있던 펠레를 달랬다. 그는 배움의 혜택을 받지 못해 허드렛일만 했을 뿐 지혜롭고 설득을 어떻게 하는지 아는 자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브라질을 넘어 세계 축구계의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도망쳐왔는데 지브리투 코치가 집까지 찾아와서 끌고 갔다고 한다.

2.2. 클럽

펠레는 1956년 산투스 FC에 데뷔한다. 보통 선수들보다 훨씬 빠른 15살이라는 나이에 SC 코린치안스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올리며, 펠레라는 이름이 브라질 전체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20]

1958년 시즌에 38경기에 출전 87골을 때려박아 산토스를 리그 우승으로 이끈다.[21] 그리고 1959년 시즌에는 44골을 넣었지만 파우메이라스에게 밀려 우승에는 실패한다.[22]

1962년에는 펠레는 주립리그에서 32골을 넣어 주립리그 우승을 차지하였고, 컵대회에서 가린샤보타포구 FR을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여, 승리를 이끌기도 하였다. 결정적으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디펜딩 챔피언이자 우루과이 리그 우승팀, 우루과이의 명문팀인 CA 페냐롤을 상대로 2골을 넣으며 3-0 승리,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이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건 남미 챔피언과 유럽 챔피언이 대결하는 인터컨티넨탈컵에서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SL 벤피카를 상대로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2골을 넣으며 3:2 승리를 이끌었고, 벤피카의 홈인 리스본에서 열린 2차전에는 해트트릭을 달성하여 5:2 승리를 이끌었다. 결국 총합 8:4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에우제비우는 후반 85분 1골을 넣는데 그친다.

1963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결승전 가린샤가 버티던 보타포구 FR과 1:1로 비기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2차전에서 펠레는 보기좋게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결국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아르헨티나의 명문이자 아르헨티나 리그 챔피언인 보카주니어스였다. 이 경기에서 펠레는 1차전 홈에서 1어시스트를 하며 산토스의 3-2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2차전 부에노스아이레스 원정에서 1골 1도움으로 2-1승리를 이끌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연패를 달성한다.#

이후 인터컨티넨탈컵에서 AC 밀란과 대결하는데, 첫 경기에서 2골을 넣었지만 팀은 4대2로 패한다. 결국 다음 경기에서 4대2로 산투스가 이겨서 똑같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최종전까지 치렀고 여기서 산투스가 1대0으로 이겨서 우승했다. 펠레가 첫 경기에는 나왔지만 다음 2경기에는 전부 빠진걸로 보아서 부상일 것으로 추측된다. 2010년 축구잡지 포포투에서 펠레를 다룬 기사에서는 해당 대회에서 마라도나신의 손 사건은 애들 장난으로 만들 법한 펠레의 분노의 주먹사건이 있었다고 하는데 언급과 함께 펠레가 안전요원들에게 붙들려 나가는 사진만 있어 상세한 정황을 알기가 힘들다. 정확히 아는 사람은 추가바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66px-Pel%C3%A9_cosmos.jpg
1977년, 축구를 그만둘 때. 펠레가 울자 동료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가 위로하는 장면이다.

1971년에 브라질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었고, 1974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산투스의 유니폼까지 벗은 펠레. 하지만 미국 축구의 발전을 이끌겠다는 사명과 금전적 문제로 뉴욕 코스모스에 갔고,[23] 1977년까지 뛰다 정말로 축구화를 벗게 된다. 참고로 마지막 경기에서는 가족과도 같았던 산투스 팀과 현 소속인 코스모스 팀의 축구복을 전후반 번갈아 입고 뛰었다고.

1977년 은퇴할 때까지 이렇게 넣은 골이 통산 1375경기에 1284골, 여기서 현재의 기준으로 리그 등의 공식 경기만 빼내 기록할 경우 클럽과 기타팀 합산기록 739경기 690골, 국대 경기는 91경기 77골[24] 통합하면 830경기 767골이 된다.# 거의 경기에 나갈 때마다 골을 기록한 셈이고 집계되지 않은 어시스트까지 합한다면...

2.3. 국가대표

2.3.1. 1958년 월드컵

1957년 7월 아르헨티나와의 A매치를 시작으로 브라질 국가대표팀에도 데뷔한 펠레는[25] 1958년 월드컵 대표팀에 곧 선발이 된다. 17살의 어린 나이지만 당시 가장 큰 브라질 주 리그인 상파울루 주 리그에서 득점왕까지 차지하여 브라질 전국에 신동의 등장을 알렸고 그런 그에게 월드컵 대표팀 발탁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브라질 대표팀에 동석했던 심리학자가 펠레와 가린샤가 대표팀에 선발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었다. 펠레는 너무 어린아이 같아서 선수로서 반드시 가져야할 호전적인 정신이 부족하고 책임감도 없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펠레의 나이가 17살이었는데 12살 수준의 정신연령(다른 기록에서는 정신 연령이 아니라 사회성 점수라고도 알려져 있다)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26]

반면 페올라 감독은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몸이 빠르고 찬스에 강한 둘을 기용하는 게 좋을 거라고 추천했다.
당신의 의견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축구를 알지 못하며, 나는 펠레의 플레이를 보았다.
비센치 페올라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브라질은 펠레와 가린샤가 포함된 22명의 명단을 FIFA에 제출했고 스웨덴으로 떠났다.

브라질은 소련, 잉글랜드, 오스트리아와 함께 4조에 속했다.

첫 상대는 오스트리아로 브라질은 3대0으로 승리하며 상큼한 출발을 보였다. 하지만 펠레는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회복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상대는 잉글랜드였는데 여기서는 0대0으로 무재배를 하여 불안한 위치가 되었다.[27]

그리고 다음 상대는 소련이었다. 당시 소련은 역대 최고의 골키퍼라 불리는 레프 야신이 버티고 있었다. 소련은 월드컵에는 첫 출전국이었지만 1956 멜버른 올림픽에서 우승한 대표팀의 주축 멤버들을 그대로 끌고 온터라 그들의 실력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있던 팀이었다. 게다가 여기에서 만약 소련에게 지게 된다면 다음 상대는 개최국 스웨덴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아니 소련에게 지고 동시에 잉글랜드가 이기게 되면 아예 탈락할 수도 있는 미묘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이 꺼려졌던 비센치 페올라에게 펠레가 부상에서 회복되어 경기에 출전 가능하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고 그에 맞춰 신의 한 수를 두게 된다.

파일:external/d8944743d74c2cecf6fa2a2761293fb4f833e235172020e89d147f8bba2f823a.jpg
페올라는 펠레와 가린샤를 공존시키고 최대의 활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4-2-4 진형을 고안해냈다. 이것이 축구 역사에서 최초로 나온 포백 수비라인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훗날 데트마어 크라머가 페올라에게 이 진형에 관해 물어보자 '사실 그건 4-2-4가 아니라 극도로 유동적인 4-3-3이었다'라고 대답했다는 모양이다. 지지가 공격에 전념할 때 지투가 아무리 수비력이 절륜한 미드필더라 할 지라도 혼자 중원을 다 떠맡기 벅찰 수 있으므로 아웃사이드 레프트였던 마리우 자갈루에게 반쯤은 미드필더, 반쯤은 포워드라는 포지션을 맡겼다.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둬 물 만난 고기마냥 신나게 레프 야신을 괴롭힌 펠레 1어시스트와 더불어 가린샤의 활약으로 브라질은 2대0으로 소련을 이기고 조 1위로 8강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그리고 소련은 개최국 스웨덴에게 패하고 탈락했다.

8강에서 만난 상대는 웨일스. 이 경기에서 브라질은 1대0으로 승리하게 되는데 펠레는 여기에서 결승골을 넣는 활약을 보이며 만 17세의 나이로 월드컵 최연소 득점 선수라는 기록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게 된다.

다음 4강의 상대는 프랑스. 프랑스에는 쥐스트 퐁텐[28]레몽 코파[29]라는 사기 유닛을 앞세워 순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성에 걸맞게 퐁텐의 선제골로 프랑스가 앞서나가게 된다. 그러나 퐁텐은 골을 넣었고 펠레는 해트트릭을 했다. 결국 브라질은 펠레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프랑스를 5대2로 꺾고 결승에 올라가게 된다. 월드컵 최연소 해트 트릭 기록이다.[30]

대망의 결승전 상대는 개최국 스웨덴. 당시 스웨덴은 개최국이라는 이점 외에도 닐스 리드홀름군나르 그렌을 앞세우고 있는 팀이었다.[31] 그리고 리드홀름의 선제골로 스웨덴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닷새 전과 비슷한 구도였는데, 17세의 펠레는 월드컵 결승전에서까지 2골을 넣었고 1어시스트까지 기록하며 스웨덴을 5대2로 이긴 브라질은 첫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것은 195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펠레의 존재를 전세계에 각인시킨 골로 역대 월드컵 명장면의 필수요소.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FIFA에서 전세계 네티즌에게 역대 월드컵 최고의 선수와 최고의 골을 뽑는 투표를 했었는데 이 골은 전체 3위를 차지했다.[32]

펠레가 첫 월드컵에서 한 일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만 17세의 나이에 월드컵에 출전하여 4경기 출전 6골 2어시스트로 팀 내 득점 1위+전체 득점 2위+최연소 득점+해트 트릭+결승전 출전 및 득점+우승[33]월드컵 실버볼 수상[34]. 그리고 월드컵 결승에서 나온 역대급 골은 덤이다. 월드컵 데뷔 참 쉽죠? 단연 역대 축구 선수 중 가장 센세이셔널한 데뷔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런 데뷔는 없다.[35]

2.3.2. 1959년 코파 아메리카

1959년 코파 아메리카 6경기 8득점이라는 미친 활약을 통해 득점왕과 MVP 타이틀도 가지고 왔다.[36] 하지만 정작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에게 밀려 준우승에 그쳤다. 이 당시 코파 아메리카의 시스템은 지금과 많이 달랐는데 토너먼트 방식이 아니라 7팀을 모아 단일 리그 식으로 경기를 치르고 순위에 따라 우승팀을 나누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펠레의 활약으로 비겼지만 브라질은 4승 2무, 아르헨티나는 5승 1무로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차지했다.

2.3.3. 1962년 월드컵

리그에서 매년 득점왕을 쓸어담은 펠레. 그리고 1959년을 제외하면 상파울루 주 리그와 브라질 전국리그에서 우승만 차지했던 소속팀 산투스.


펠레가 리그에서 이런 골[37]도 넣고하니 아주 사기충천한 채로 1962년 월드컵에 나간 브라질 대표팀. 1958년 월드컵 멤버들이 그대로 나온 상황에서 펠레의 기량은 더욱 물이 올랐으니 두려울게 무엇이었으랴.

브라질은 1962년 월드컵에서 당시 스페인, 체코슬로바키아, 멕시코와 3조에 속했었다. 이 예선전에서 최고의 빅매치는 브라질과 스페인의 경기였다. 브라질은 말할 필요도 없는 당대 최강팀이었고, 스페인에도 유러피안 컵 5연패를 차지한 저승사자 군단 레알 마드리드의 멤버들이 대부분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레알의 황금 콤비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페렌츠 푸스카스까지 귀화시키는데 성공하여 브라질을 견제할 만한 팀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했다.

첫경기인 멕시코전에서 펠레는 겨우(?) 1골 1어시를 올렸고 브라질은 2대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 펠레는 멕시코의 오른쪽 측면에서부터 대략 30미터를 돌파하며 수비수 4명을 제끼고 골을 넣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두 번째 경기인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 하지만 펠레는 중거리슈팅 도중 갑작스럽게 통증을 호소하며 그라운드에 쓰러지게 된다. 펠레는 빨리 뛰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계속 쉬게 되었다.[38] 다리근육을 무리하게 사용해서 마비가 온 것이라고들 한다. 다른 나라 같으면 망했어요겠지만 브라질은 역시 강했다. 가린샤의 각성, 그 밖의 다른 멤버들이 그대로인데다, 펠레의 부상으로 대신 들어온 아마리우두가 예상 외의 활약을 펼치며 펠레의 빈자리를 성공적으로 메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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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우승 당시 브라질의 포메이션. 중앙수비수 바뀌고, 펠레 대신 아마리우두 들어간거 빼면 차이가 거의 없다. 라이트백의 자우마 산투스도 1958년 월드컵 우승 멤버로 1954년 월드컵부터 주전으로 뛰었던 베테랑이었다.

그렇게 펠레가 없이도 브라질은 결승에서 다시 만난 체코슬로바키아를 3대1로 꺾고 월드컵 2연패에 성공한다. 이로써 브라질은 1934년 월드컵1938년 월드컵을 연속으로 들었던 이탈리아의 기록을 재현해냈다.

2.3.4. 1966년 월드컵, 유럽 텃세 최대의 피해자

펠레의 득점력은 여전했다. 1965년 시즌에는 총 47골을 넣었는데 팀 득점의 거의 절반을 혼자 넣는 하드캐리를 선보이기도 했다. 펠레는 월드컵 대표팀에 당연히 또 선발되었다.

그런데 지난 2번의 월드컵과 뭔가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일단 브라질팀의 연습 게임이 지나치게 많았다. 뭔 쓸데없는 연습게임을 이리 많이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게다가 주전과 비주전이 가려지지 않아서 뭐가 뭔지도 하나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감독도 툭하면 바뀌었다. 이런 내홍 속에서 결국 1966년 월드컵 본선에서 브라질을 이끈 감독은 1958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우승시켰던 비센치 페올라였다.

이래저래 팀 분위기가 정상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선수들이라도 남아 있으면 좋을텐데 가린샤도 옛날 같지 않고 지지도 없었다. 선수들의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펠레의 자서전에 의하면 축구를 하다보면 힘든 건 당연한 것이지만 이 대회를 뛰면서는 정말 심하게 힘들었다고 회고했으며, 경기를 뛰며 이런 몸 상태가 왔다는 것 자체가 준비가 덜 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평했다.

게다가 잉글랜드 월드컵 조직위원회에서는 브라질이 토너먼트에 올라오면 자기네들이 절대로 우승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면서 브라질이 뛰는 3경기 중 2경기의 심판을 자국 출신 심판으로 배치하면서 브라질에게 대놓고 불리한 편파판정을 일삼게 했다. 사실 더블 디펜딩 챔피언(2연속 우승한 전 대회 우승팀)인 브라질이라서 굳이 잉글랜드가 아니라도 누구든 브라질 상대로 공포에 질릴만 했다.[39]

브라질은 포르투갈, 헝가리, 불가리아와 함께 3조에 속했다.

첫 경기 상대는 불가리아였다. 브라질이 비록 불가리아를 상대로 펠레와 가린샤가 각각 프리킥으로 한 골씩을 넣어 2대0으로 이기기는 했지만 불가리아의 선수들은 물론 경기를 지켜본 팬들마저 브라질이 지난 월드컵 같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게다가 여기에서 펠레는 불가리아 수비수 체체프의 거친 파울성 수비에 경기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심판이 서독의 커트 천셔였는데 이 커트 천셔는 이미 잉글랜드에게 매수된 인간이었다. 그래서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체체프에게 경고를 줘야 했으나 커트 천셔는 체체프를 아예 가만히 냅둬버렸다.

결국 펠레는 다음 경기에서 부상으로 출전할 수 없었고 이 경기에서 브라질은 헝가리에게 3대1로 패배하였다. 역시 잉글랜드 출신 심판인 켄 다그날이 배치되었는데 썩어도 준치라고 펠레가 없어도 브라질은 브라질이었지만 켄 다그날은 판정에 애국심을 발휘해서 커트 천셔보다 더한 편파판정을 일삼았다.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다음 상대는 포르투갈. 포르투갈에는 에우제비우를 비롯한 벤피카 선수들을 필두로 모든 선수들이 독기를 잔뜩 품고 있었다. 벤피카는 4년전 1962년 인터컨티넨탈컵에서 펠레를 앞세운 산토스에 참패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

페올라 감독은 펠레가 부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이겨야 하니 내보냈다.[40] 그러나 부상에서 완쾌되지 못한 펠레는 시종일관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하지 못했고 경기 도중 포르투갈 수비수 모라이스의 태클에 걸려서 다시 부상을 입게 되었다. 모라이스의 이 더블 백태클은 월드컵 역사에서 악명높기로 손꼽히는 반칙으로 펠레도 이 때 입은 부상이 커리어에 있어 최악의 부상이었다고 회고한다. 실제 많은 전문가들이나 고전 축구 매니아들은 펠레의 신체적 능력의 정점이 끝난 시기를 이 시기로 꼽는다. 모라이스의 태클은 아예 대놓고 펠레를 (축구선수로서)죽여 없애려고 한, 명백한 퇴장감이었지만 역시나 심판이 잉글랜드 출신의 조지 맥카베였는데 맥카베 심판은 이를 또 그냥 냅뒀다.[41]

펠레는 잠깐 밖에 나가서 치료를 받고 경기는 끝까지 뛰었다. 이 때는 선수교체 제도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에이스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던 이 경기에서 브라질은 악전고투했지만 포르투갈에게 3대1로 패배하며 짐을 싸고 말았다. 월드컵 우승팀이 다음 대회(4년 후)의 예선에서 짐을 싸는 경우는 이것 말고도 1950년의 이탈리아, 2002년의 프랑스, 2010년의 이탈리아, 2014년의 스페인, 2018년의 독일이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1966년 월드컵에서도 브라질이 우승을 했다면 펠레는 거의 어쩌면 축구 역사상 영원히 깨지기 힘든 "월드컵 4연패"를 이루었을 지도 모르며, 실제 역사에서 12골인 득점도 더 기록해 월드컵 최다골의 주인공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펠레와 브라질 대표팀에 있어서 가장 아쉽고 안타까운 대회라 할 수 있다.

이 대회에서 플레이는 커녕 수비수들에게 얻어맞기만 하고 온 펠레는 분통을 터뜨렸다. "유럽 선수들은 풋볼이 아니라 풋복싱을 한다 두 번 다시 월드컵에 출전하는 일은 없을 것"

펠레의 분노는 누구나 이해할 만 했는데, 사실 당시 에이스 공격수에 대한 보호책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누군가 한 명이 경기에 빠지면 선수 교체가 없던 시절엔 상대팀은 10명이 싸워야 하니까 전력에도 손실을 입게 된다. 게다가 그 한 명이 (펠레와 같은)에이스라면 그야말로 1명을 내보내는 값으로 팀 전력은 물론이고 심리적인 효과까지 더해 2명을 내보내는 듯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안 그런 수비수들도 많았지만.. 그래서 몸이 약한 축구 선수들은 자주 부상을 입곤 했다. 1958년 월드컵에서 잠깐 소개했던 쥐스트 퐁텐의 경우도 커리어 내내 수비수들의 악질적인 태클에 시달리다 결국 28살의 나이에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은퇴를 하게 된다. 또한 60골로 잉글랜드 리그 한 시즌 역대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는 딕시 딘한쪽 고환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심판의 구성으로 알 수 있듯 3경기 중 2경기의 심판이 잉글랜드 출신이었고 그나마 나머지 한 명인 서독 출신도 역시 유럽 출신이라 어쩔 수 없이 잉글랜드 조직위원회에 매수당했다. 잉글랜드는 어떻게든 우승을 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래서 브라질 떨어뜨리기에 혈안이 되어 유럽끼리 대동단결을 시전했다. 특히나 모라이스의 태클은 명백히 퇴장급 반칙임에도 이걸 그냥 넘어갔다는 것은 정상적인 판정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렇게 펠레는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집어 던졌다.

2.3.5. 1970년 월드컵. 황제로 등극하며 축구를 정립하다.

하지만 펠레의 월드컵 복귀를 바라는 팬들은 브라질 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 깔려있었다. FIFA에서도 선수 교체와 카드 제도를 만드는 등 선수 보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펠레의 마음도 슬며시 움직였다. 처음에는 계속 거절하다가 1969년에 슬그머니 월드컵 예선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6경기에 나와서 6골을 넣었다.[42] 그러다가 당시 브라질의 감독이었던 살다냐가 펠레를 빼겠다는 둥 독선적인 태도[43]를 일삼다가 결국 축출되고 1958년에 함께 뛰었던 마리우 자갈루가 감독으로 오게 되었다. 그 무렵에 있어 펠레는 1000번째 골을 넣게 되었는데 이것도 월드컵을 명예롭게 마무리하기 위한 욕심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브라질은 1970년 월드컵에 새로운 팀이 되어 출전했다. 브라질은 잉글랜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와 함께 3조에 속했다.


첫 경기의 상대는 체코슬로바키아. 여기에서 펠레는 멋있는 골도 1골 넣고, 2어시스트, 하프라인에서 쏜 슛이 살짝 빗나가는 등의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이 경기는 브라질이 4대1로 이겼다.

다음 상대는 잉글랜드. 리뉴얼 된 브라질과 디펜딩 챔피언 잉글랜드와의 대결은 그야말로 당시까지 월드컵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빅 카드였다.


이 경기에서 펠레는 역시 명장면을 많이 만들어내는데 펠레의 헤딩에 이은 뱅크스의 선방은 지금도 역대 최고의 선방으로 꼽히는 명장면이다. 그리고 결승골이 된 자이르지뉴의 골도 펠레의 어시스트에서 나왔다. 보비 찰튼은 이 경기를 일컬어 "축구의 교과서적인 경기로 축구의 모든 것이 이 한 경기 안에 들어있다." 라고 했을 정도였다.

다음 경기인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도 펠레는 2골을 넣는 활약으로 3대2로 승리를 이끌어 3전 전승으로 8강에 진출한다. 8강의 상대는 페루. 페루의 감독은 지지여서 누구보다 브라질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경기에서도 펠레는 직접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1어시스트를 하고 공격을 진두지휘하며 브라질의 4대2 승리를 이끌었다.

다음 상대는 우루과이. 펠레는 이 경기를 가장 고대해왔다고 술회한다. 그 이유는 마라카나조를 자신들의 손으로 되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펠레는 호베르투 히벨리누의 쐐기골을 어시스트하고 또 놀라운 트릭을 선보였다.[44] 경기는 브라질이 3대1로 승리함으로서 20년 전의 비극을 고스란히 갚아주었다.

그리고 결승전 상대는 이탈리아.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경기라고 할 수 있다. 최강의 창과 최강의 방패가 만나는 대결인 동시에, 양 팀이 2번씩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였기 때문에 줄리메 컵의 은퇴 경기이기도 했다.[45]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펠레의 브라질은 이탈리아를 4대1로 학살해버렸다. 그리고 펠레는 결승전에서 1골 2어시를 기록하여 월드컵 우승의 1등 공신이 되었다.[46]


여기에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가 넣은 결승전 마지막 골은 당시 브라질의 위용을 상징하는 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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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브라질 팀 포메이션. 여기에서 펠레는 토스탕의 위치에서 살짝 밑으로 내려와 공격형 미드필더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에서 펩 과르디올라 시절 FC 바르셀로나의 전술이나 선수들의 역할 등을 비교해보면 상당히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지금 돌아보면 매우 믿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1970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가 매우 많았다. 그 이유는 전 대회인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의 광탈의 추억에다 감독 자갈루가 뽑아놓았다는 베스트 11을 보면 펠레를 포함하여 토스탕, 호베르투 히벨리누, 제르송 등 무려 4명이 소위 말하는 10번 유형의 플레이메이커였다. 이들을 모두 함께 공존시키는게 힘들텐데 어찌 좋은 성적을 기대하겠느냐가 이 의견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펠레는 이들의 중심에서 신기에 가까운 경기 조율을 보여주며 이 브라질 대표팀을 역대 최강의 대표팀으로 만들어 그 우려를 건넨 사람들을 철저히 데꿀멍시켰다.

마지막으로 출전한 월드컵에서 줄리메 컵을 가져오면서 펠레는 명실공히 축구 황제로 칭해졌고 이 브라질 대표팀은 역대 축구 역사를 통틀어 자타공인 최강의 팀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는 기록으로도 증명이 가능한데 역대 월드컵에서 예선에서부터 전승을 거두고 우승한 팀은 현재까지 이 브라질이 유일하다. 브라질의 통합 성적은 12전 12승, 42득점 9실점. 본선에서의 성적은 6전 6승, 19득점 6실점이다. 그리고 4골 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월드컵 단일 대회 최다 도움을 기록했고 월드컵 골든볼도 받게되었다.

그리고 이 결승전에서 펠레가 입었던 유니폼은 축구 역사상 가장 비싼 유니폼으로 15만 7750파운드에 팔렸다. 환율이 매일 바뀌니까 정확하게 이야기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3억 조금 안되는 가격이다.

또한 이 대회는 축구적으로도 중대한 의의를 지니는데, 기존의 흑백 중계를 탈피해 전세계의 거리와 안방에 생생한 컬러 중계를 전달하는 첫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펠레는 최강팀 브라질의 에이스에 걸맞는 원숙한 기량으로 세계인에게 충격과 경이로움을 안기며 우승을 따냄과 동시에 축구와 월드컵이란 대회가 얼마나 환상적이고 멋있는 것인가를 전세계인에게 각인시켰다. 펠레가 축구와 브라질에 있어 결코 퇴색될 수 없는 불멸의 업적을 남기며 진정한 축구 황제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2.4. 은퇴 이후

은퇴 이후 부패로 얼룩진 브라질 축구계와 대립각을 세우다가 브라질의 체육부 장관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브라질 축구계를 정화하는 대규모 개혁을 시도한다. 축구협회와 클럽등의 회계를 투명하게 하려고 했고,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도 힘을 썼다.관련 네이버캐스트[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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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플레이 스타일


축구 황제라는 별명에 걸맞게 축구에 관한 모든 덕목이 정점인 역대 최고의 선수이다.

펠레의 플레이 스타일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모든 능력이 정점에 가까워 무결점인 역대 최고의 컴플리트 포워드라 할 수 있다. 컴플리트 포워드는 완성형 공격수라는 뜻으로 공격수가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을 모두 가지고 있는, 다른 표현으로 하프 라인에서부터 적 골대까지 영향을 미치는 만능 공격수를 뜻한다. 약점이 없다는 표현은 시대가 지나면서 기준이 낮아지고 멀티 플레이어나 육각형 선수들이 많아져 그 의미가 남발되고 있지만, 펠레야말로 이 컴플릿 플레이어의 원조이자 역대 최고이다. 마라도나, 메시, 디 스테파노, 크루이프, 굴리트같은 다른 무결점의 칭호를 얻은 역대급 선수들을 놓고 생각해 봐도 반대발, 공중볼 경합 능력 등 세부적으로 선수들을 분석해보면 적어도 하나쯤은 상대적인 약점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펠레같은 유형의 공격수를 상대하게 되면 수비수들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골치가 아파진다. 상대팀 선수들도 바보가 아닌지라 자신이 상대할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이나 주로 사용하는 발 정도는 파악하며 수비 방법을 생각하고 나오는데 특히 상대 공격수에게 주로 사용하는 발이 아닌 반대발 사용을 유도하는 것은 수비의 기본 중 기본이다. 공격수가 페렌츠 푸스카스, 디에고 마라도나, 히바우두, 아르연 로번 급으로 한쪽 발만으로도 상식을 무시하는 플레이를 펼치는 수준이 되지 않는 이상 모든 수비 기술의 기본인 이 방법을 따르게 되는데 이걸 쓸 수 없게 만드는 양발잡이 선수들은 존재만으로도 수비수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 수준에 붙으면 초인적인 운동 능력이나 환상적인 볼컨트롤로 수비수를 제껴버리고 떨어지면 동료를 이용한 킬패스나 중거리 슈팅으로 상대 수비진의 허점을 파고들며 점프력이 좋아서 공중볼에도 강력한 식이니 말 그대로 수비수들에게는 환장할 노릇이 된다.

한편으로는 그 때가 지금 같은 빡빡한 수비전술을 쓰는 시대가 아니냐며 펠레가 대단치 않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그건 펠레의 전술이해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의견이다. 1970년 4-3-3[48]을 채택한 브라질 대표팀은 당시 기준으론 혁신적으로 유기적이고 화려하면서도 공격, 중원, 수비의 밸런스가 잘 잡힌 팀으로, 토탈사커의 단초를 제공한 팀이었다. 펠레는 그 팀의 중핵이었고 심지어 그 때 펠레는 이미 마지막 월드컵일 정도로 노장이었다. 노장이 되어서도 혁신적인 전술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춘 인물에게 현대의 전술 앞에 무력할 것이란 의견은 시대착오적, 인물착오적 억지다.

그리고 1:1로는 펠레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종종 3~4명씩 펠레를 에워싸거나 펠레의 돌파지점을 미리 선점하고 막고자 한다거나, 맨마킹을 포기하는 대신 공간을 차단하는 등, 수많은 동시대 최고의 수비수들이 시대를 앞서나가는 각종 수비방식으로 펠레를 막으려 노력했지만 펠레를 막을 수 없었다.[49]

그는 단순한 골게터가 아니었다. 펠레는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 크랙인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팀 플레이어이자 플레이메이커였다. 1970년 월드컵에서 절정을 보여준 경기 조율 능력 또한 골과 화려한 기술에 가려져 있을 뿐 실로 놀라운 수준이었다. 옵타에 따르면 1970년 월드컵 6경기에서 28회의 플레이메이킹 횟수를 기록했는데 이는 제대로 기록이 집계되기 시작한 1966년 대회 이후 역대 월드컵 3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50] 1966년의 부상 이전, 골에 주력하던 어린 시절에도 패스에 많이 신경을 써서 동료들을 활용하는 이타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 펠레였다.

화려한 득점 기록 때문에 펠레를 스트라이커나 포처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펠레는 자서전에서 스스로를 공격형 미드필더라 칭했다. 이는 메시와 비슷한 플레이 스타일로 펠레는 브라질식 4-3-3 포메이션 하에서 스트라이커와 두 윙어를 지원하는 역할을 주로 플레이했고, 때로는 3선까지 내려와서 중원장악을 돕기도 했다. 현재의 전술 및 포지션과 1대1 대응은 힘들지만 지금의 세컨드 스트라이커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와 비슷한 역할[51]을 수행했으며, 그의 포지션은 단순한 득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팀의 전체적인 조율과 플레이메이킹이었다. 펠레가 고평가받는 이유는 이처럼 플레이메이킹을 주 업무로 하면서도 엄청난 득점까지 수행한, 그야말로 컴플리트 포워드였기 때문이다.

또 펠레는 골을 한 경기에 몰아넣는 타입이라기보다는 골을 꾸준히 넣어주는 타입에 가까웠다. 월드컵에서 통산 14경기[52] 12골 10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964년 리그의 보타포구[53]를 상대로 8골을 넣은 것이 펠레의 단일 경기 최다골 기록이다. 하지만 해트 트릭 91회, 4골 31회, 5골 6회 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54]

기술적으로 그는 바이시클 킥을 비롯, 현대축구에서도 묘기라고 찬양받는 여러 기술을 모두 사용했으며, 머리, 가슴, 오른발, 왼발, 엉덩이 등등 손을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분을 현대축구의 기준으로 봐도 놀랄 정도로 완벽하게 사용하며 골을 넣었다. 펠레의 영상을 보면 돌파 외에도 경기 조율을 하거나 직접 연계로 도움을 주는 등의 이타적인 플레이도 많이 가져간다.[55] 그리고 피치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팀 동료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예측과 경험으로 더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운동능력과 볼컨트롤로 상대 수비진의 틈을 뚫어 골을 넣어야 이긴다라는 축구의 황금률을 생각해보면 고금의 그 어떤 공격수도 펠레만큼 최상위 클래스의 선수들을 상대로 그 정의 하나하나에 정확하게 그리고 수준 높게 부합하는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또한 이 시기의 장비들이 오늘날 수준으로 보면 놀랄 정도로 낙후된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지금보면 축구의 기초적인 개인기인 드래그 백 조차도 푸스카스가 실제로 웸블리에서 보여주기 전에는 거의 뜬구름 잡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푸스카스조차 그 드래그 백을 실전에 쓰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연습했는데 동료들이 비웃을 정도였다. 이 원인이 바로 낙후된 장비였다. 푸스카스가 옛날 선수라해서 기술이 별로 뛰어나지 못한 선수라 생각할 수 있는데 호주에서의 크로스바 챌린지 일화[56]라든가 샤워장에서 동료 프란시스코 헨토가 던져주는 물 묻은 비누를 장난치듯 가지고 놀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컨트롤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던 선수다. 그리고 당연히 필드라 할 수 있는 축구장도 오늘날에 비교하면 매우 질이 낮다. 잔디부터가 그 질이 다르다. 유럽은 그나마 덜했지만 남미 축구 경기에서는 흙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것이 가끔 보일 정도였다.

펠레는 그 시대 기준으로 최고의 피지컬을 소유하고 있었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57] 스피드가 매우 빨랐고,[58] 급격한 방향전환과 엄청난 가속력만으로도 상대팀 수비수들을 쉽게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면서 몸싸움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59], 키가 작았음[60]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점프력으로 헤딩골도 많이 넣었다.[6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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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의 압도적인 점프력

또한 화려한 테크니션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현대 선수들이 사용하는 공중에서의 볼 컨트롤, 알까기[63], 라보나 킥, 라 크로케타(일명 팬텀 드리블), 헛다리 짚기, 사포, 노터치 드리블 등 각종 최고난도 기술들을 1960년대 즈음부터 모두 정교하게 시연해 보였다. 그 전에도 사포의 창시자 디디나 드래그 백의 창시자 푸스카스같은 선수들이 한 가지 기술을 창조하고, 피치 위에서 투박하게 시험해보았다면, 펠레는 모든 테크닉을 피치 위에서 정교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최초이자 최고의 테크니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드리블링에 있어서 펠레는 172의 크지 않은 키와 마라도나와 같은 육중한 몸매가 아닌 체격에도 불구하고 100m를 10초대에 주파하는 당대 최고의 스피드, 엄청난 가속력과 순발력, 단단한 신체와 절대 무너지지 않는 밸런스, 섬세한 볼 컨트롤과 날렵한 몸놀림 등으로 선수들을 자유자재로 제칠 수 있는 크랙이었다. 한 경기에서 2-3명의 선수들을 제치는 장면은 허다하게 나왔으며, 때로는 11명까지도 단번에 제치는 역대급의 어마어마한 드리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실제로 펠레를 상대해 본 보비 찰튼, 프란츠 베켄바워, 코스타 페레이라(1962년 인터컨티넨탈 컵 당시 벤피카의 골키퍼), 바비 무어, 마리우 자갈루(프란츠 베켄바워, 디디에 데샹과 함께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 축구인), 우고 가티(보카 주니어스 시절 디에고 마라도나의 동료이자 CA 보카 주니어스 역사상 최다 출전 골키퍼 기록 보유자) 등의 선수들은 그가 피치 위에서 얼마나 공을 자유자재로 몰았는 지에 대해 생생히 증언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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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팀 모두를 제친 골 상황에 대한 묘사[64]펠레의 베스트 골은 오히려 영상에 남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이 경기에서도 녹화가 허용되지 않아서 이 골은 영상으로 남지 않았다.]#

게다가 프리킥에도 매우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2번의 월드컵에서 프리킥으로 득점한 5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65] 1966년 월드컵에서는 가린샤와 1970년 월드컵에서는 호베르투 히벨리누와 함께 브라질의 프리킥을 도맡아 찼으며 지쿠, 히벨리누, 지지, 주니뉴 등과 함께 브라질의 역대급 프리키커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프리킥은 적당한 구석으로 강력한 슈팅을 날리는 유형이다. 사실 상술했듯 당시 공의 낮은 품질 때문에 오늘날처럼 회전을 걸어 골문 구석으로 꽂아넣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1966년의 부상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중거리 슈팅을 가져가며 중거리 슈팅의 비율이 크게 늘었다. 부상으로 인해 신체 능력이 조금 떨어지게 되자 펠레 본인이 스타일의 변화를 가져간 것으로 추측된다.

기술적으로 최고 수준의 플레이를 보여주는 선수들이 의외로 나약할 수 있는 반면 그는 승부근성이 강해 상대의 반칙에는 반칙으로 맞받아칠 줄 아는 타입이었다.[66] 또한 그는 최고의 주장감이었다고도 하는데, 보통 최고 레벨의 선수는 실력만으로도 선수들의 존경심을 얻어 주장이 되는 시나리오도 있지만 그를 뛰어넘어 말빨과 리더십도 최고라는 동료들의 증언이 있다.[67] 노년기의 활발한 언론활동이나 정치활동을 보면 빈 말은 아닌 듯하다. 또한 최고 레벨의 플레이어들이 자신만의 세계가 강고하고 외골수적인 면이 있는 것에 비해 경기 중 동료의 조언에 따라 포메이션이나 플레이스타일을 바꿔서 재미를 보는 등 유연한 태도를 보여줬다고 한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펠레는 공격수 중에서는 수비 능력까지 꽤 뛰어난 선수였다. 어록 부분의 바비 무어의 증언이나 밑에서 자세히 서술되어있는 골키퍼로서의 능력 또한 뛰어났고, 펠레는 1970년 월드컵 당시 6경기에서 태클 9회를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메시의 2014년 월드컵 당시 총 태클 횟수와 같다. 경기당 횟수로 치면 오히려 펠레가 더 많은 셈. 또 다른 예로는 2018년 월드컵에서 앙투안 그리즈만의 총 태클 횟수가 11회였다. 그리즈만의 수비 가담 능력을 감안한다면 펠레의 태클 횟수 역시 시대를 앞서는 기록이라 할 수 있고 이 시대의 공격수가 수비 모음집까지 유튜브에 존재할 정도면 말 다한 셈이다.

사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펠레의 플레이 영상은 인터넷 상에도 돌아다니는 것이 거의 없던 탓에, 현대의 축구팬들 중에는 펠레의 실력에 의문을 가지는 이도 많았고, 과거의 레전드라고 너무 띄워준다는 말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러나 이후 동영상 미디어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펠레의 영상이 지속적으로 발굴되면서 현재의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플레이를 펼치는 펠레를 보고 그런 소리는 모두 묻혀버렸다.

그가 축구황제라 불리는 것은 괜한 소리가 아니라는 이야기.

4. 평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할 수 있겠다. 축구 황제로 현재까지도 그 명성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올타임 레전드 GOAT(Greatest-Of-All-Time)이니, 축구의 신이니, 축구 그 자체니 하는 수식어도 어울리지만 사람들에게 달린 최고의 미칭이자 펠레와 동의어가 돼버린 축구 황제야말로 펠레의 근엄함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인류 역사상 유일한 월드컵 3회 우승 선수다. 달리 말해 월드컵을 두 번이상 캐리 우승한 것도 펠레가 유일하다.[68]

클럽에서도 득점왕 11회[69], 리그[70] 우승 10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인터컨티넨탈컵 우승 2회의 업적을 남겼다. 펠레 때 브라질축구협회 측에서 코파리베르타도레스, 코파아메리카 등 남미축구협회 주관 대회에 불참하거나 2군을 보내서 펠레의 코파아메리카 참가는 1번, 코파리베르타도레스 참가는 3번 뿐인데 그 3번 중 2번을 우승하고 특히 1번은 세계 최초의 트레블이자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남미에서 유일한 트레블인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이다.

국가대표와 클럽을 포함한 팀 커리어, 득점왕과 MVP와 같은 개인 커리어, 중요 경기 내에서의 활약도 등 모든 면에서 역대 최고급의 성공을 거둔 케이스로 커리어상으로는 비슷한 선수를 찾기조차 불가능하다. 각종 대회 결승전에 출전하면 스타 본능을 발휘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주인공이 되곤 했다.[71] FM식으로 따지면 중요 경기 활약도 20 펠레가 커리어 내내 클럽, 국가대표를 통틀어 출전한 결승전은 총 14회인데 단 2번을 제외하면 모두 소속팀에 우승을 안겨주었다. 그러면서 총 23경기 동안 29골을 넣었고, 그 안에는 월드컵 결승전 2경기의 3골도 포함된다. 이는 지네딘 지단, 제프 허스트와 더불어 갖고 있는 월드컵 결승전 개인 최다 득점 기록이며 어시 3개까지 포함한다면 최다 공격 포인트 기록은 펠레가 갖게 된다.

또한 펠레는 결승전에서 매우 강한 모습을 보였는데, 월드컵 결승전 2경기 3골 3어시스트, 코파리베르타도레스 3경기 3골 2어시스트,인터컨티넨탈컵 (클럽월드컵의 전신) 3경기 7골 2어시스트, 총합 8경기 13골 7어시스트로 경기당 2.50공격포인트라는 엄청난 기록도 남겼다.[72] 게다가 축구 역사상 월드컵 결승전, 챔스 결승전, 클럽월드컵 결승전에서 모두 3골 이상 넣어본 선수는 펠레가 유일하다.

기량이야 당시 라이벌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수준에 커리어까지 독보적으로 최고이니 당연히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를 꼽으면 첫 손가락에 꼽히게 된다. 굳이 표현하자면 현재까지 전해지는 '축구 제국' 브라질의 위상을 처음으로 개척한 선구자이자 세계 국제 축구 대회의 축을 브라질로 옮겨놓은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세계인의 머리에 축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를 브라질로 각인시켰다는 이야기.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축구에 관심 없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축구하면 어떤 나라가 떠오르는지 물어보라. 아마 한 나라로 선택지를 좁히면 거의 대부분 브라질이 나올 것이다. 아무나 외국 농구 선수 이름을 하나만 대보라고 하면 조던이 나오는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지쿠, 소크라치스, 카레카, 둥가, 호마리우, 히바우두, 호나우두, 호베르투 카를루스, 카푸, 호나우지뉴, 히카르두 카카, 마르셀루 비에이라, 다니 아우베스, 네이마르 주니오르 등 수많은 전설적인 선수들이 있고 그들이 브라질의 명성을 이어왔지만 펠레를 뛰어넘는 선수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당시 브라질이 세계 최강의 팀이었던 것도 사실이나, 1958~1970년까지 주전으로 활약하며 월드컵 3회 우승을 모두 경험한 선수는 펠레밖에 없다. 펠레가 월드컵에 14경기 출전해서 총 12골 10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경기에 나오기만 하면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 못한 62 월드컵 체코슬로바키아전과 66월드컵 포르투갈 전만 제외하면 전 경기 스탯을 찍은 것이다.

2004년의 펠레 에테르노[73]를 시작으로 펠레의 영상 자료가 과거에 비해 많이 발굴되었다. 또한 적은 표본이긴 하지만 옵타 등 스포츠 통계 사이트에서 골 기록 외에도 키패스 등 다른 스탯에서도 현재의 슈퍼스타들에 모자를 것 없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골 기록만 존재하고 영상 자료는 없던 과거에는 축구팬들이 펠레가 단순히 골만 많이 삽입하던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영상 자료들로 인해 축구팬들에게 축구 전반에 뛰어난 컴플리트 포워드로서의 모습으로 각인될 수 있었다. 덕분에 현재는 펠레의 평가가 많이 올라간 모습이다.

축구사에 길이남을 떡밥인 VS 디에고 마라도나에서 2005년을 기점으로 영상 자료들이 발굴되어서 골 기록과 도움 기록, 동료 전설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경기력에 대한 증언이 거품이 아니었음이 증명되고, 펠레의 평가가 상대적으로 많이 올라가게 되었다. 확실한 것은 펠레는 그 시대에 현대축구에서도 구사하는 사람이 몇 없는 각종 기술을 모두 구사하고 확립한 선수라는 것이다.

21세기 초반 축구신의 재림이라 불리던 아르헨티나리오넬 메시포르투갈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경우 메시는 월드컵 준우승 1회와 골든볼, 호날두는 월드컵 4강과 유로 우승 1회에 네이션스리그 1회에 그치며 한참 부족한 국대 성적을 보여주었다. 아직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월드컵에서 보여준 펠레와 마라도나의 모습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했고, 그래서 반대로 펠레와 마라도나의 위대함은 더욱 올라갔다.

펠레하면 득점으로 유명하지만 30세의 노장으로서 참가했던 1970년 월드컵에서의 6경기 4골 7어시스트 기록이 말해주듯이 펠레의 신체적 기량이 떨어지고 나서는 골스코어러보다는 플레이메이커로서의 면모가 부각되었다. [74]

4.1. 펠레에 대한 말, 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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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Do You Spell Pele? G - O - D
The Sunday Times(1970년 브라질의 세번째 월드컵 우승 소식을 전하면서)[75]
내가 넣은 가장 위대한 골은 셀레스트[76]와의 원-투야. 그리고 우리는 그 골을 에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라고 이름 지었지.
돈지뉴(펠레의 아버지)
리어왕인지, 황제 존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황제처럼 보였다. 타당하게도 완벽한, 그의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망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어떤 농촌에다가 데려다 놓더라도 그의 왕조의 위엄은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넬슨 로드리게스(스포츠 평론가. 1958년 2월 26일에 나온 칼럼으로, 펠레를 최초로 '황제'라고 불렀다.)#
오늘에서야 펠레가 나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알았다.
무하마드 알리(펠레의 은퇴 경기에서 펠레를 향해 관중들이 손수건을 흔드는 것을 보며. 알리는 바비 무어와 함께 펠레의 은퇴 경기에 초청받았다.)
축구는 잘 모른다. 음... 하지만 펠레는 안다.
마이클 조던(1994년 미국에서 월드컵이 열릴 당시 축구에 대해 관심이 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나는 무하마드 알리와 펠레를 넘어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 선수가 되려고 노력한다.
우사인 볼트
제 이름은 로널드 레이건입니다. 저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본인이 누구인지 밝히실 필요가 없습니다. 펠레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로널드 레이건
펠레는 내 이론(미래에는 누구나 15분간 유명해질 수 있다)을 반증하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15분간의 명성 대신 1500년의 명성을 누릴 것이다.
앤디 워홀
당신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축구를 알지 못하며, 나는 펠레의 플레이를 봤다.
비센치 페올라
눈을 깜빡일 때도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가면서 깜빡여야만 했다. 두 눈을 동시에 깜빡이면 펠레는 어느새 골을 넣고 있었다.
브리투
경기에 임하면서 그도 마찬가지로 피부와 뼈로 된 사람이라고 몇 번이고 내 자신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타르치시오 부르니치(1970년 멕시코 월드컵 결승전 당시 펠레를 막는 임무를 맡았던 이탈리아 수비수)
그는 위대한 컨트롤과 시야를 갖춘 엄청난 재능을 지닌 선수였다. 그는 경기를 읽고 포지션을 읽었다. 그는 거만했지만 그걸 나쁜 방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는 위대한 선수였으니 뽐 좀 내면 또 뭐 어떤가?
난 가끔 이 축구란 스포츠가 이 마법같은 선수를 위해 발명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바비 찰튼
루이스 피구, 히바우두, 지네딘 지단 같은 선수들 모두 훌륭하지만 그들에게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 그건 바로 펠레다.
펠레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선수다. 그는 20년간 최고로서 군림했다.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미셸 플라티니는 그의 밑이다. 펠레와 비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내게 가장 영광스러웠던 때는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때가 아니라 펠레와 함께 뛰었던 때였다.
지금 리오넬 메시는 세계 최고의 선수이며, 그의 선수생활 내내 그랬다. 그러나 역대 최고는 펠레다. 나는 펠레와 같은 선수를 본 적이 없다. 나는 그가 뉴욕 코스모스에 있을때 같이 뛰었는데, 그에게 공을 주면 그가 너무 빨라서 다신 볼 수 없었다. 펠레는 모든 것이 본능이었다.
그는 내가 본 가장 완벽한 플레이어였다.(펠레 에테르노 중에서)
프란츠 베켄바워[77]
나는 제2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될 수 있어도 제2의 펠레는 될 수 없다. 그의 축구는 우리 모두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크루이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이다. 하지만 나는 펠레는 선수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축구에 관한 한 그는 단순히 최고의 선수가 아닌 그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페렌츠 푸스카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펠레. 리오넬 메시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모두 특별한 자질들을 지닌 위대한 선수들이다. 하지만 펠레가 더 뛰어났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펠레는 펠레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세자르 삼파이우
펠레를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펠레는 펠레이다. 그는 완전히 다른 레벨에 있는 선수이다.
신은 펠레에게 모든 걸 주셨고, 나머지 찌꺼기를 우리에게 주셨다.
호베르투 히벨리누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펠레를 상대했던 순간이 내 커리어 최고의 순간이었다.
경이로운 운동 선수(펠레 에테르노 중에서)
고든 뱅크스
나는 이제 자식들, 가족들, 친구들에게 말해 줄 수 있다. 내가 역사상 최고의 선수와 플레이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말이다.
대회 전부터 우리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펠레가 우리가 우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펠레가 그렇게 말했다면 우리는 결국 월드컵을 우승할 터였다.
그의 가장 거대한 비밀은 바로 그의 즉흥성에 있다. 그가 해낸 그 모든 일들은 한 순간에 일어난다. 그는 축구에 관한 한 비범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이라 꼽히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브라질 대표팀의 주장이자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
먼저 펠레라는 인간이 있다. 그리고 나서 펠레라는 선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펠레처럼 플레이한다는 것은 처럼 플레이하는 것을 뜻한다.
미셸 플라티니
어두운 방을 밝게 밝힐 수 있는 예술가. 1970 월드컵 결승전에서 펠레로부터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에게로 이어진 패스는 랭보의 시와 같았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보는 이들에게 영원함을 느끼게 한다.
에릭 칸토나
펠레가 날 보고 세계 최고의 선수라고 말해줬다. 이는 내 인생 최고의 영예이다.
조지 베스트
난 우상이랄게 딱히 없는 사람이지만 난 선량한 브라질 사람이고 또 그러므로 펠레를 우러러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우리에게 있어 신과 같다. 뭐,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내 생각에 이 게임은 축구가 아니라 펠레라 불려야한다.
리오넬 메시는 최고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타고났다. 하지만 그는 먼저 디에고 마라도나와 나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펠레를 뛰어넘어야겠지.
호마리우
펠레는 위대한 선수가 가득했던 시기에 가장 빛났던 최고의 선수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수였을뿐 아니라 훌륭한 인간이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젊고 훌륭하며 아직 많은 시간을 남겨두고 있는 선수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내가 본 선수 중 펠레에 견줄 수 있는 선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에우제비우
세기의 선수에 대한 논쟁은 말이 되지 않는다. 가능한 대답은 오직 하나뿐이다. 펠레. 그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추가될 수 있겠지.
신이 펠레를 만들 때, 축구선수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을 집어넣었다. 슈팅하는 법, 드리블하는 법, 헤더 슈팅을 하는 법, 몸을 쓰는 법 등. 축구계에서 그가 성취한 것을 다른 사람이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전술적으로든 기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마음가짐으로든 어떤 관점에서 보든 펠레는 최고이다.
마라도나와 비교해서도 펠레가 더 뛰어났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말하자면 공중제비를 넘는 광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펠레는 무엇보다 팀을 먼저 생각했으며, 팀이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공중제비를 넘을 수 있는 선수였다.
지쿠
펠레는 22년간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전세계의 어떤 외교관보다 더 세계 평화에 공헌했다.
J.B. 피녜이루 (주미 브라질 대사)
펠레가 결승전에서 5번째 골을 넣었을 때 솔직히 말해서 나조차도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어.
지게 팔링 (1958 스웨덴 월드컵 당시 결승전에서 펠레를 상대했던 스웨덴의 미드필더)
난 위대한 선수를 막는다는 희망을 갖고 도착했으나 우리와 같은 별에서 태어나지 않은 선수로 인한 완전한 실패에 설득되어 돌아갈수 밖에 없었다.
코스타 페레이라 (1962년 인터컨티넨탈 컵 당시 SL 벤피카골키퍼)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이 땅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펠레는 하늘에서 만들어졌지.
제프리 그린 (영국의 저명한 축구 기고가)
Q: 직접 본 선수 중 최고의 선수는 누구인가?
A: 펠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Q: 그 순서대로인가?
A: 그렇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알렉스 퍼거슨
브라질에서는 펠레가 누군지, 네이마르가 누군지 모두 안다. 우리는 오직 한 명의 펠레만 알고 있다. 어떤 누구도 펠레가 될 수 없다. (네이마르는) 아주 좋은 선수다. 때로 스펙타클한 경기력을 보인다. 바르셀로나 시절에 많이 발전했다. 그러나 절대 펠레와 같을 수 없다. 누구도 그와 동등할 수 없다.
펠레는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 그의 움직임은 컴퓨터 게임으로도 재현해 낼 수 없다.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저는 펠레 = 축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진정한 스페셜 원, 펠레를 가지고 있죠.
주제 무리뉴
나에게 두 명의 최고의 선수는 알프레도와 펠레다. 알프레도는 펠레보다는 한 걸음 정도 아래다. 월드컵에서 플레이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펠레가 플레이하는 것을 보고 축구화를 벗어야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있다.
쥐스트 퐁텐
펠레는 내가 본 선수 중에서 가장 완벽했다. 그는 모든 것을 지녔었다. 뛰어난 양발과 마술같은 공중에서의 능력, 민첩함, 강력함까지. 그는 기술로도 스피드로도 선수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173cm밖에 되지 않았지만 피치 위에서 그는 마치 거인처럼 보였다. 완벽한 균형과 비현실적인 시야도 지녔었다. 그는 피치 위에서 모든 것을 무엇이든지 보여줄 수 있었기에 가장 위대했다. 브라질 기자가 사우다냐[78]에게 스쿼드 내 최고의 골키퍼가 누구냐고 묻던 것이 생각난다. 그는 펠레라고 대답했다. 그는 어느 포지션에서건 플레이 할 수 있었다.
바비 무어[79]
10번이 지구상 최고의 선수인 펠레의 것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난 펠레가 아니었기에 왼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정말 완전한 선수였다. 그는 위대한 양발과 당해낼 재간이 없는 볼 컨트롤을 소유했고 골문 앞에서는 무자비한 선수였다.
펠레는 축구에 있어 모든 것을 대변했다. 그가 피치 위에서 보여준 모든 것들 때문에.
마리우 자갈루
비교하는 것은 추잡하지만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였다. 그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그리고 리오넬 메시의 혼합체였다.
만약 우리가 신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면 신께선 흑인 펠레를 완벽하게 만드셨다. 신은 그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는 전혀 모자란 것이 없었다. 헤딩, 체력, 드리블, 피니시, 영감, 천재성, 성질, 시야, 골. 모든 것을 지녔다.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디에고 마라도나는 위대한 공격수이자 플레이어였지. 하지만 그는 펠레가 아냐. 나는 디에고를 펠레와 비교할 수 없어.
지투(1958 스웨덴 월드컵, 1962 칠레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월드컵 2연패 당시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펠레의 산투스 시절 동료이자 펠레가 초기 선수 시절 존경했던 선수)
펠레는 마라도나보다 더 영특한 선수였다. 그는 축구를 더 잘 이해했다.
다니엘 파사레야
축구 역사에서 펠레가 마라도나보다 훨씬 더 나은 선수이다. 펠레와 다른 나머지 선수들 사이에는 천 마일의 간극이 있다.
아마데오 카리소(1950~1960년대 활동한 아르헨티나의 레전드 골키퍼)
몇몇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펠레를 만져보고 싶어하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키스를 하고싶어 했다. 심지어는 펠레가 걸었던 땅에 입을 맞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클루두아우두(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브라질의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펠레는 선수의 피부, 헤딩, 스피드, 모든 것을 지녔다. 내가 그와 경기를 했을 때 그는 마치 하얀 옷을 입은 흑표범과 같았다. 그는 마지막 몇 분을 남기고 플레이하러 입장했는데 그러고도 그는 경기를 뒤집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큰 차이는 펠레는 필드 위에 공포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마라도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게 있어 최고의 선수는 펠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그리고 디에고 마라도나, 이 순서이다. 난 디에고를 인정하며 그는 위대한 선수이다. 그러나 다른 별에서 온 선수는 바로 펠레였지 그가 아니었다.
메시? 그보다는 펠레, 마라도나, 디 스테파노, 크루이프와 지단이 더 뛰어나다. 만약 펠레와 마라도나, 크루이프의 시대였다면 메시는 뛰지 못했을 것이다. 메시는 벤치에 있었어야 할 것이다. 펠레가 역사상 최고다. 당신이 축구에 대해서 논할 때, 당신은 펠레를 논외로 두고 나머지에 대해 말해야한다. 그리고 또 알프레도, 크루이프, 디에고가 있다.
펠레, 그 흑인은 퓨마였고, 무서운 존재였다. 펠레는 2단 점프를 한다. 일단 잔디에서 점프를 한 뒤엔, 공중에서 한 번 더 뛴다. 그는 마치 농구 선수 같았다. 그는 라디슬라오 마주르키에비츠를 상대로 헤더 골을 넣기 위해 내가 일생에서 본 것 중 가장 높은 점프를 보여줬다.
우고 가티(보카 주니어스 시절 디에고 마라도나의 동료이자 보카 주니어스 역사상 최다 출전 골키퍼 기록 보유자)
메시는 엄청난 선수이다. 나는 메시를 보려고 TV를 켤 때마다 그의 플레이에 놀란다. 그러나 최고는 펠레이다. 펠레는 메시보다 더 크고, 강했으며, 헤딩에도 능했다. 펠레가 메시보다 더 뛰어난 선수다. 펠레는 마치 ‘외계인’ 같은 선수였다. 지금까지 나는 펠레보다 더 뛰어난 선수를 보지 못했다. 펠레는 메시의 능력과 호날두의 장점을 모두 가진 선수다. 메시는 디스테파노와 같은 위대한 선수들을 넘어섰다고 생각하지만, 펠레만은 넘을 수 없다.
주제 마시아 페페(1954~1969년 산투스에서 활약하던 왼쪽 윙어)
나의 왕, 지구 최고의 선수.
다다 마라빌랴(1970년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팀 후보 선수)
나는 그와 필드에서 몇 번 대면해 보았는데 내 생각엔 그와 같은 선수는 없다.
테오필로 쿠비야스(페루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펠레는 축구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선수이다. 세계에서 펠레는 단 한 명만이 존재한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펠레가 있던 시절의 브라질은 007영화에서 나오는 온갖 신기한 장치가 달린 자동차와 같았다. (중략) 하지만 펠레가 은퇴하고 난 후의 브라질은 모든 장치를 다 떼고 의자가 튀어나가는 장치만 남은 자동차가 되었다.
닉 혼비(영국의 소설가. 자신의 저서 '피버피치' 중에서)
나는 펠레가 50살이 되었을때 그를 상대로 뛰어본 적이 있는데[80], 그는 여전히 완벽한 플레이어였어. 그는 여전히 축구의 백과사전과도 같았다.[81]
게오르게 하지
펠레는 1970년 월드컵에 출전하면서 우승하는 것에 집중했다. 마치 그것이 그의 운명인 것으로 알고 있는것 같았고, 그는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아이와 같았다.
마리우 아메리쿠(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마사지사)
저는 펠레가 최고의 축구 선수라는 제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는 궁극적인 운동 선수였고, 피치위의 절대적 존재였죠. 펠레는 모든 것을 지닌 선수였습니다. 그라운드를 너무나 빠른 속도로 쓸고 다녔고, 무브먼트들은 훌륭하였고, 마크맨들을 너무나 쉽게 따돌리곤 했죠. 폭발적 슈팅의 소유자이었지만 공중볼 처리도 수준급이었고 어떤 포즈에 있던 간에 득점을 올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녔었죠. 음 통산 1283 골이라는 기록만 보고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펠레는 묶어두기가 무척 힘들었고(could not be contained) 17살의 나이에 출전한 1958년 스웨덴 월드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단지 17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브라질 대표로 뛰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당시 최고로 꼽히던 팀들과 대전하면서 날라다닌 것이 반증해 주지 않을까요? 예선에서 저는 잉글랜드 대표로서 브라질과의 경기에 출장했지만 다음 경기에 펠레가 출전했었죠. 브라질과 우린 0-0으로 비기고, 골에 목이 말랐던 브라질은 한 번 펠레에게 기회를 주는 모험을 합니다. 그 뒤로 펠레는 뒤돌아 볼 틈없이 승승장구했죠. 저번 달 442에서 호마리우는 자신이 펠레 다음으로 축구사의 2번째로 위대한 선수라고 자평하더군요. 네, 호마리우는 뛰어난 선수였지만, 전 그말에 동의할 수 없네요. 미셸 플라티니, 보비 찰튼, 조지 베스트,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루이프, 페렌츠 푸스카스, 존 찰스 등등을 꼽자면요. 제가 생각하는 리스트엔 펠레 뒤로 디에고 마라도나를 No.2로 꼽을 수 있겠고, 호마리우는 아마 20위 안 쯤에 있을 것 같습니다.
바비 롭슨(<Four Four Two> 2005년 8월호 인터뷰에서)
그러나 최고의 스포츠 선수는 펠레
타임즈(마이클 조던의 은퇴기사 중)
나는 낙후된 환경에서도 그런 기적을 일으킨 펠레나 가린샤 같은 1950년대의 스타들이 오늘날의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상상하곤 한다. 반대로 내가 펠레가 쓰던 장비를 쓴다면, 10배는 더 적은 골을 넣었을 것 같다. 분명히.
알렉산다르 케르자코프(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을 상대로 골을 넣은 러시아 선수)
우리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조언을 해주셨다: "앞으로도 누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하든, 펠레가 최고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위르겐 클롭
하지만 나는 지금의 리오넬 메시보다도 뛰어난 선수가 있다고 생각해. 그건 바로 펠레야. 펠레는 피치 위에서 양발을 모두 사용했어. 그는 그의 왼발이 위험한만큼 오른발도 위협적이었지. 그는 공중에서조차 강력했어. 그리고 많은 찬스들을 창조해냈지. 게다가, 그는 정말 상상 이상의 존재야. 어느 날 난 펠레가 골키퍼로 뛰는 것까지 봤어. 글쎄, 난 그걸 보고 '펠레가 원래 골키퍼였나?' 하고 착각했다니까. 그는 그만큼 다재다능해.
지아니 리베라
나의 롤모델은 펠레였다. 나의 아버지는 펠레의 영상을 많이 가지고 계셨고, 나는 그 영상을 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클로드 마켈렐레
펠레는 단순하면서도 완벽한, 축구의 집합체다. 펠레는 메시가 가지지 못한, 피지컬 능력을 가졌다. 그는 들소였다. 그래야 한다면 그는 수비수들을 밀고 들어가서 박살냈다. 펠레는 메시가 가진 것과 동등한 테크닉, 기술, 창의력을 지녔고, 더 힘이 강한 선수기도 했다. 그리고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펠레는 야수가 된다. 그 관점에서 보면 메시는 좀 더 조용하다. 펠레는 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정신적인 강함이 있었다. 더 어려운 경기일수록, 그는 더욱 위험해졌다. 내 생각에는 아마 이 것이 펠레가 메시보다 우월한 점일 것이다.[82]
펠레가 가장 위대했다. 그는 간단히 말해 결점이 없었다. 피치 밖에서도 그는 항상 웃었고 긍정적이었다. 그가 화난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는 펠레로 사는 걸 사랑했기 때문이다.
토스탕(1970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펠레의 파트너) [83]
메시는 아직 펠레나 마라도나의 체급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디디에 드록바
한 번은 내가 메시가 특별하다고 말한 적은 있다. 그러나 창의성에서 특별하다고 한 것일 뿐이다. 메시는 특별하지만 인간들 사이에 있다. 펠레는 인간을 넘어섰다. 그에게 단점을 찾을 수 없다.
티테
메시는 현세대 최고의 선수지만 마라도나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지전증한 존재이다. 이 전에도 이후에도 마라도나에 비견할 선수는 찾을 수 없다. 마라도나보다 우위에 있는건 펠레겠지. 나는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 메시 순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top 10에는 브라질 선수가 두 명 더 있는데, 그건 호마리우호나우두이다.
클라우디오 카니자(1990년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멤버로 16강전에서 마라도나의 어시를 받고 브라질을 침몰시킨 선수)
1위는 펠레, 2위는 마라도나, 3위 크루이프, 4위는 메시 그리고 그와 동급인 디스테파노.
알피오 바실레 감독(유일하게 메시와 마라도나를 모두 지도해본 감독으로 최고의 선수를 뽑으라는 질문에)
축구 역사상 3대 영웅은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 입니다. 월드컵에서 우승하면 메시도 이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1986, 1990년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감독)
펠레, 마라도나, 메시는 거의 같은 레벨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펠레는 엄청났고 한 단계 더 위에 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다.
오마르 라로사(1978년 월드컵 우승멤버)
Q: 펠레를 정의 내린다면?
A: Perfect.
메시는 그의 시대에서는 최고이나 역사상 최고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호나우두가 있기 때문 입니다.
호나우지뉴
그는 축구 기술이 총집합되어 있는 완벽한 도서관과도 같다. 역대 최고의 선수는 펠레이고, 그 다음은 마라도나와 디스테파노이다.
로베르토 페르푸모
펠레는 '왕'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자친토 파케티
역사상 최고의 선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펠레와 다른 위대한 선수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펠레는 옐로카드와 레드카드가 없던 시절에 전성기를 보냈다는 것이다.
미겔 앙헬 브린디시, 펠레와 함께한 아르헨티나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의심의 여지없는 역대 최고의 플레이어. 세계 축구의 상징이다. 펠레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엘리아스 피게로아
나는 운이 좋게도 그가 미국 팀에서 뛰고 있을 때 펠레의 경기를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전에는 텔레비전에서만 그를 보았기 때문에, 실제로 보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 경기 동안, 나는 정말 인상 깊은 두 장면을 보았고, 그가 정말 모든 선수 중 가장 위대한 선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파비오 카펠로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이다.
로타어 마테우스(2014년 브라질 tv프로그램 캄페앙 쇼에서)
나는 펠레와 몇 년 동안 함께 플레이했는데, 그는 수비수였다. 골을 가장 많이 넣는 수비수.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수였다. 또 다른 펠레가 나타나려면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지지
메시가린샤와 펠레의 수준에 다가가려면 한참 멀었다. 그 두 브라질리언은 내가 살면서 본 축구선수 중 최고였다.
후안 호세 피수티
역사상 최고. 이 이상의 수식어는 그에게 필요 없다.
아데미르 다 기아
펠레는 명백하게 누구와도 비교 불가능한 선수이다. 그가 생각하는 속도는 놀라울 정도이다. 펠레는 당신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드리블을 시작할 것이고 당신이 한 쪽 눈을 깜빡인다면 그새 당신을 제치고 다른 선수 한 명을 추가로 제친 상태일 것이다. 나는 펠레에 근접한 선수조차 보지 못했다. 그는 놀라움 그 자체다.
디노 사니
펠레는 발명가였다.
비센테 델보스케
내가 생각하기에는 펠레가 넘버원이다. 그는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선수이다. 그는 정말 결점이 없다. 신체적으로 완벽하며, 아주 기술적이고 헤더도 잘한다. 오른발도 잘 쓰고 왼발도 잘 쓴다. 절대 예상할 수 없는 플레이를 펼치며 지능적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에게 있어서 펠레는 언제나 넘버원일 것이다.
네비오 스칼라
신체적인 능력과 기술적인 면을 생각해 보면, 펠레는 누구와도 비교 불가능한 선수이다.
파올로 로시
당신이 최고의 브라질 풀백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펠레라고 답하겠다. 최고의 하프백과 윙어가 누구냐고 묻는다 해도 펠레를 답하겠다. 그는 심지어 우리 스쿼드 안에서 최고의 골키퍼이기도 할 것인데, 그 같은 선수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주앙 사우다냐[84]
비교 대상이 되는 선수들의 세대는 각각 다르지만, 각자 이룬 것으로 비교하여 말한다면 펠레가 마라도나&메시보다 위대하다. 내가 플레이를 본 선수 중에는 이 세 명이 가장 뛰어났다.
파울로 포를란[85]
펠레와 바비 찰튼이 내가 여지껏 본 선수 중 최고이다.
후안 라몬 베론[86]
펠레는 마라도나와 메시보다 완성된 선수이다.
리카르도 보치니[87]
스피드, 가속력, 힘, 폭발력, 헤더, 협응성, 시야, 반응 속도, 경기를 읽는 능력, 왼발, 오른발. 모든 것에 능통했다. 그는 아주 뛰어난 선수다. 역대 최고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펠레는 모든 세대를 통틀어 기술적으로 가장 재능 있는 선수였다.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펠레가 마라도나보다 낫다.
안토니오 라틴
압도적인 클래스와 부러워할 만한 신체 능력의 소유자였다. 사실, 그에게는 아무런 결점이 없었다.
마르첼로 리피
펠레는 천재였다. 엄청난 킥 능력을 양 발에 가지고 있었으며 가슴에 용수철이 있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공을 잘 받았다. 망치로 치는 듯한 헤더 슈팅 능력도 가지고 있었고, 먼 거리에서도 득점했다. 필드 위의 코치였으며 전략가이자 해결사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선수였다. 그러나 공을 가지고 하는 일에서만큼은 마라도나가 더 뛰어났고, 그러므로 기술적인 면에서는 마라도나가 역대 최고라고 본다.
호르헤 발다노
바이에른에 살고 있는 나의 오랜 친구들은 모두 펠레의 플레이를 보았고 그가 코스모스와 산투스, 그리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언제나 팀을 승리로 이끄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의 플레이를 좋아했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좀 더 어려운 환경에서 플레이했다. 이탈리아에서 지내는 동안 마라도나는 나폴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펠레는 나에게 있어 축구의 왕으로 언제나 남아 있으며,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입니다.
로저 밀라
펠레와 디스테파노에게 차이점이 있다면 디스테파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펠레는 모든 것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로헬리오 도밍게스
축구의 왕, 가장 위대한 펠레.
아베디 펠레
그의 축구는 모두를 앞선 것이다.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다리오 페레이라
역대 최고의 선수 세 명? 펠레, 디스테파노, 푸슈카시. 이 순서겠지.
알시데스 기지아(2005년 마르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40세였던 펠레와 딱 두 경기를 함께 뛴 경험이 있다.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왜 넘버원인지 알 수 있었다.
레오베지우두 주니오르
펠레는 축구괴물이다.
히우데라우두 벨리니[88]
완벽한 선수. 기술, 시야, 트릭, 신체능력을 겸비했던 유일한 선수이다.
레오나르두 아라우주
펠레는 평범한 골을 예술작품으로 바꿀 수 있는 존재였다.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펠레는 닮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다른 세상에서 왔다. 모든 기술을 사용할 수 있던 선수였고, 무엇보다도 점프 능력이 아주 탁월하여 헬리콥터처럼 보였던 선수이다. 나에게 그는 농구선수처럼 보였으며 공중에서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절대 닮을 수 없는 것들이다. 펠레는 완벽한 선수였다.
실비오 마르솔리니
마라도나와 펠레 중에서는 펠레가 더 뛰어난 선수였다. 펠레는 사실상 완벽한 선수였다. 양 발과 머리를 사용해서 슈팅을 때릴 수 있었다. 마라도나는 환상적인 곡예사이다. 오른쪽 다리를 거의 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왼발로 하는 플레이들은 헛웃음이 나오는 수준이었다. 마라도나가 양발 사용 능력이 뛰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두 선수 모두 환상적인 선수였다.
카레카
그는 가장 완벽한 10번이었다. 그는 완전하게 완벽한 선수였다.
즈보니미르 보반
나와 펠레의 차이? 간단하지 않은가? 나는 그저 지나가는 '스타'일 뿐이였고 그는 천재이다.
레오니다스 다시우바
그의 눈을 보고 공포를, 아주 심각한 공포감을 느꼈다. 그의 눈은 불타고 있었고, 맹수의 눈과 같았다.
볼프강 오베라트
감히 내가 펠레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왕이다.
지에구 타르델리
메시는 2010년대의 펠레이다.
줄리아누 벨레티
모든 브라질인에게 있어 펠레는 '세기의 선수'이다.
카푸
세월이 흐르고 수많은 위대한 선수들이 있을지라도 펠레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페르난도 토레스
펠레는 글로벌 맨이자 아이콘이자 모두의 우상이다. 역사상 최고이다.
네이마르
나는 펠레의 플레이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역대 최고의 선수가 펠레라는 말에는 당연히 동의한다.
호나우두
펠레는 피치에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최고의 수비수들이 그를 마킹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언제나 요리조리 잘 빠져나갔다. 그를 저지하기 위해 두세 명이 달라붙어도 금세 4야드가량 마킹하는 선수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이것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플레이였으며, 나는 그보다 뛰어난 축구선수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산드로 마촐라
매우 많은 선수들이 플레이를 만들어나가야 할 때 패스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펠레의 머릿속에서라면 패스라는 것은 영화가 진행되듯이 흘러가는 일이다. 펠레는 축구를 이해한다.
니우통 산투스
펠레 같은 선수는 앞으로 1000년이 지나야 나타날 것이다. 내가 100년이 아니라 1000년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꼭 염두에 두길 바란다.
산도르 코치슈
역대 최고 선수에 대한 논쟁에서 나를 고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분명 펠레의 플레이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선수는 펠레이며, 마라도나는 마라도나일 뿐이다. 앞으로 메시가 은퇴한다면 어떻게 될까? 메시가 은퇴한 지 10년이 지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젊은 사람들은 마라도나를 모른다.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메시를 더 자주 보며, 그래서 메시를 위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나와 펠레에게 일어났던 일과 같다. 나와 펠레는 함께 카타르에 방문했던 적이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며,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고 "디에고! 디에고!"하며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자고 했다. 펠레를 알아보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펠레에 대한 호응은 나에 비해서 미적지근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시 현역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플레이만 봤다. 젊은 사람들은 항상 오늘날의 선수를 고평가한다. 그렇기에 시대가 다른 선수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에 뛰는 선수와 과거의 선수를 비교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이다. 나도, 메시도 역사상 최고는 아니다.
디에고 마라도나

4.2. 펠레의 현역 시절 세계 축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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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교하는 표에서 고려해야 할 점이 있는데 브라질 전국 대회 (현재 브라질레이루 세리에 A)는 펠레의 데뷔 3년차인 1959년에 창설되었고 1966년까지 주립 리그 챔피언끼리만 토너먼트로 붙었기 때문에 FA컵, 리그컵 규모였다. 펠레가 주로 뛴 리그는 상파울루 주립 리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였고 리그를 계산할 거면 사실 이쪽을 보는 것이 맞다. 상파울루 리그 수준에 의구심을 품는 팬들이 있는데 펠레가 1974년까지 뛴 16년 동안 18번의 전국 대회 중 상파울루 클럽들이 무려 12개의 트로피를 차지했다. 역사적으로 상파울루와 함께 브라질의 양대 주립 리그로 인정 받는 리우데자네이루 리그가 그 사이 3회 우승에 그친 것을 보면 펠레가 뛰던 상파울루 리그가 브라질 1부 리그와 같은 수준이었다 봐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89] 참고로 펠레의 주립 리그 우승 횟수가 10회, 프랑스 풋볼이 선정한 재평가 발롱도르가 7회이며, 브라질 리그와 국가대표 통산 기록은 RSSSF 기준 767경기 730골이다.[90]

최근 커리어의 우열을 가리는데 펠레의 유럽 무대 경험이 없음을 지적하는 경우가 있는데 오류라고 보는 것이 옳다. 펠레가 뛰던 당시 리그와 연봉 수준에서 브라질이 아쉬울 게 없었고[91][92] 클럽간 국가대항전의 경우 펠레가 챔스와 서로 데뷔 동기일 정도로 역사가 짧아 권위가 덜했다. 실제로 산투스는 1966년과 1969년에 다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참가 자격을 얻었음에도 이를 불참했다.

거기다 펠레는 산투스와 브라질 국대로 전세계의 클럽팀과 국가대표를 실신시킨 경력의 소유자다. 펠레는 현재의 피스컵이나 옛날 박대통령컵 같은 여러 국제 컵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쭉쭉 쓸어담았다. 그러니 유럽 커리어가 없는 펠레에 대한 의문은 사실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거기다 당시 펠레가 능가하지 못하는 인물도 유럽 축구계에 없었으니 굳이 건너갈 이유도 없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황금콤비의 경우 사실 펠레가 10대 때 이미 30줄을 넘긴 인물들이고, 에우제비우보비 찰튼이니 루이스 수아레스등 당시 유럽에서 날린다는 선수들 대부분이 국제 대회에서 다들 펠레보다 하수 인증을 한 위인들이다.[93] 요한 크루이프프란츠 베켄바워도 동시대긴 한데 전성기를 보여준 시기가 달라 같은 시기를 뛰었다고 말하기는 조금 애매한 경우이다.[94]

단적인 예로 펠레가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던 1958년 월드컵 당시 펠레에게 밀려 벤치멤버가 되었던 주제 아우타피니AC 밀란 등에서 뛰며 세리에 A 역대 득점 랭킹 공동 4위에 올라있다. 아우타피니가 그렇다고 유럽 무대에서 못했느냐? 1963년 AC 밀란에서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95],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이전에 14골을 기록, 한 대회 최다 득점 기록도 가지고 있던 선수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아우타피니에게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했던 발렌티노 마촐라의 이름을 따 마촐라라는 별명까지 지어줄 정도로 세리에 A에서 사랑받던 레전드 공격수이다. 지금이야 세리에 A가 정상에서는 한 풀 꺾였지만 1960년대에는 유러피안 컵 우승만 4번을 차지할 정도로 유럽에서 알아주는 리그였고 지금도 무시받을 리그는 아니다. 그 외에도 지지도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면서 19경기 6골을 넣고 돌아오는 등 당시 브라질 선수들이 유럽 선수들보다 못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우타피니와 지지 외에도 다른 브라질 선수들이 유럽에서 활동하며 브라질 축구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지만 득점 등의 랭킹에 남아있거나 어지간히 뛰어난 활약을 보이지 못한 선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잊혔다. 리오넬 메시 진출하지 않았다고 바르셀로나 동료들 빨이라 우기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겠다. 메시 EPL 검증설=펠레 유럽 리그 검증설. 메시는 그나마 아르헨티나 국대에서는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이라도 보였지 펠레는 그것도 아니다

또한 펠레의 1000골은 친선경기 포함이라 인정 못한다고 하지만 그 친선경기 중 국제 컵대회가 많았음을 인지해야 한다. 이러한 컵대회는 피파 주관의 공식 클럽 대항전이 자리잡으며 점차 사양길을 걷긴 했지만 당시엔 그렇게 만만한 위상은 아니었고, 펠레가 출전한다는 소식 하나만으로도 대회의 위상이 엄청나게 올라갔다. 같은 대륙 다른 리그의 클럽과 대결할 일도 드문 시대에 다른 대륙의 클럽과 대결하는 것도 모자라, 그 펠레와 대결함에 있어서 어느 팀, 어느 선수가 긴장을 늦추고 여유를 가질 수 있겠는가?[96]

펠레가 어찌나 세계를 쏘다니며 여러 팀들을 박살냈는지, 이 시기 정말 아시아 오지였을 한국에도 펠레가 와서 경기를 치렀다.[97] 사실 이 양반이 넣으려면 더 넣을 수도 있었던 게 브라질 무대에서 물러나던 순간도 10골을 찍었고, 그 전 시즌에도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미국에선 3년 뛰었는데 그 마지막 해에도 20골을 넘겼다. 은퇴전도 친선경기가 아니라 실제경기였는데 심지어 골까지 넣었고, 풀타임을 뛴 것도 아니라 전반전만 뛰다 골 넣고 들어간 것이었다.

4.3. 비판

4.3.1. 선수시절과 기록에 관한 비판적 의견 그리고 반박

비판에 앞서 유념할 것은, 펠레가 단순히 골 기록만으로 높게 평가받는 선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펠레는 FIFA 월드컵에서 유일하게 3회 우승을 달성한 선수이고 브라질을 축구의 나라로 발돋움케 한 1958~1970년의 독보적인 스타플레이어이다. 이것은 펠레를 까는 사람이더라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뛴 시대를 꾸준히 대표했던 선수라면, 그에 걸맞는 높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펠레 이전의 브라질 역시 강팀이었으나 펠레가 등장하고 나서야 축구 최강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98]
펠레가 3번의 월드컵 우승 모두에 크게 기여한 것은 아니다. 1958, 1970년의 우승은 펠레 본인이 각각 실버볼, 골든볼을 수상했을 정도로 크게 활약했다. 그러나 1962월드컵에서 펠레는 조별 2경기만에 부상으로 낙마[99]하였는데, 이후 경기들에서 가린샤가 엄청난 기량을 선보이며 1958년의 우승 멤버, 즉 1958년 당시보다 4년 더 늙어버린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던 브라질 스쿼드[100]를 말 그대로 멱살 잡고 끌어올렸고, 브라질은 펠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승했다. 펠레도 "사람들은 1958, 1962, 1970년의 월드컵을 나의 월드컵이라고 하지만 사실 1962년 월드컵은 가린샤의 월드컵이라고 불리는 것이 맞는다."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가린샤를 포함한 대부분 주전급 선수들이 노쇠화되고 펠레까지 부상으로 이탈하자 브라질은 1966년 월드컵에서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비극을 맞이했고, 그가 은퇴하자 다시 월드컵을 우승하기까지 24년이 걸렸다.

펠레가 공식적으로 대륙간 클럽경기에서 활약한 것은 1962년과 1963년 SL 벤피카, AC 밀란과의 인터콘티넨탈 컵, 1968년의 인터콘티넨탈 슈퍼컵이 전부다. 물론 펠레의 기량이 절정이었던 1962, 63년 두 차례 인터콘티넨탈 컵에서 펠레는 3경기 7골을 넣으며 대활약했지만,[101] 그 이외의 유럽 클럽과의 대륙간 클럽경기는 대부분 프리시즌에 치뤄지는 친선 경기였다. 그러나 유럽경험이 없다고 치부하기에는 당시의 브라질리그 수준이 유럽 유수리그 못지 않았다.

펠레의 골기록은 100%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위키피디아에서 767골로 산정된 통산 공식 골 기록은 추산된 집계가 포함되어 있다. 70년 이전기록들 때문인데 자료가 부족하고 교차검증이 안되어서 정확히 산출이 어렵다. 몇경기 몇골일것이다라고 추산되어서 통산골이 다수의 유력매체들은 757골 포브스, 아스,골닷컴]로 10골차이를 보이고 있다. 공식경기조차 정확한 데이터가 나오지 않는데 친선경기의 데이터들은 신뢰도가 더 낮을 수 밖에 없다.
또 펠레의 대부분의 득점 (60%이상)은 주립 리그에서 나온 것이라는 비판이 있는데[102] 자세히 말하면 펠레가 전성기를 맞이할 당시에는 전국 대회가 창설 초창기였고[103] 각 주립 리그의 챔피언들이 토너먼트 형식으로 붙었던 컵 대회 규모라 현재 같은 전국 규모의 정규 리그가 아니었기에[104] 주로 뛰는 리그가 주립 리그였던 것. 하지만 위에서도 설명했다시피 펠레 시절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18차례의 전국 대회 중 12회 우승을 기록하며 다른 리그들을 압살하는 수준이었기에 이 비판은 그다지 펠레의 커리어에 약점이 될 수 없다. 리그 수준 뿐만 아니라 1970년 월드컵의 브라질 멤버로 봐도 22명 중 산투스 5명, 파우메이라스 2명, 포르투게자 1명, 코린치안스 2명, 상파울루 1명 등 절반이 상파울루 리그 소속 선수들인데 리그 수준에 비해 오히려 적게 뽑힌 것처럼 느껴진다. 결정적으로 펠레가 뛰던 당시에도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주 자체적으로 4부 리그까지 있으며 강등제도 존재했다. 이미 큰 규모의 하부리그 시스템을 갖췄다는 것은 그만큼 하위권 팀들과 주의 하부리그 팀들도 높은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현재의 리그 형식 처럼 전국에서 최고의 팀들을 뽑는 게 더 퀄리티가 있었겠지만[105] 그와 비견될 수준을 갖췄다는 건 사실이고 당시의 전체적인 대회 시스템이나 수준 자체가 완전히 다른데 단순히 현재의 상파울루 리그에 전국 리그의 1~4부급 팀들이 있다고 해서 펠레가 하부리그 팀들과 붙어서 쌓은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1차원적인 추측은 그저 펠레를 깎아내리고 싶은 악의적인 주장으로 볼 수 밖에 없다.[106] 참고로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전국 대회 (현재의 세리 A) 우승 횟수 1~4위를 모두 차지하고 있어[107] 현재도 브라질 내 최고의 명문 리그에 위치해 있으며 전신인 인터콘티넨탈컵을 포함해 클럽 월드컵에서도 EPL 클럽 (3회[108])보다 2배 많은 6회 우승을 달성하며 세계적으로 봐도 명문 리그라 평가할 수 있다.[109]

유럽 클럽팀들과 130경기, 그것도 전부 원정경기에서만 144골을 넣은 기록 또한 펠레가 상대를 가리는 선수가 아니었다는 걸 의미하며 국가대표에서는 오히려 강팀에게 더욱 강한 면모를 보여줬다. A매치 77골 중 유럽, 남미 국가가 71골로 그 비율이 무려 92%이며 그 상대국들은 대부분 유럽, 남미 중에서도 강호에 속한다. 당시 브라질은 친선 경기도 주로 남미 국가들, 유럽 상위 국가들과 잡았고 월드컵도 16개국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데다 아시아, 아프리카, 북중미 같은 상대적 약체 대륙들에게 티켓을 1장 이하로 배분했기 때문에 정말 강팀들 밖에 상대할 수 없었기에 강팀 대비 득점 비율도 높은 것. A매치 골 중 1/3이 비유럽남미 상대인 메시, 유럽 예선에서 하위 랭킹 국가들을 상대로 많은 득점을 올린 호날두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펠레의 통산 골 기록은 경기당 1골에 근접하지만, 주립 리그가 아닌 전국 대회에서의 골 기록은 173경기 100골로 경기당 골 수가 통산 기록에 비해 떨어진다. 하지만 이 또한 항변이 가능한데, 전국 리그는 펠레의 전성기가 끝난 1971년부터 출범했고 펠레의 전국 리그 출전 기록을 살펴보면 1971년부터 브라질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1974년까지의 출전 기록이 84경기로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1970년 월드컵이 펠레 전성기의 마지막 대회였으며 월드컵 이후의 펠레는 혹사의 여파까지 더해져 30대에 접어든 이후엔 신체적 능력에서 훨씬 더 심한 노쇠화를 보였다.[110] 국가대표 경력도 1971년 친선 2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했고 주립 리그에서의 기록조차 60년대 전성기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 정도로 큰 하향세를 그렸다. 60년대까지의 전국 대회 기록은 76경기 62골, 1966년 월드컵에서의 큰 부상 이전에는 전국 대회에서도 28경기 28골로 경기당 1골의 기록을 세운 반면, 1970년부터 1974년까지 5시즌 동안 전국 대회 기록은 97경기 38골로 펠레의 이름값에 확실히 미치지 못했고 1971년 리그 출범 시즌에는 21경기 1골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래도 1973년 시즌 30골을 달성,[111]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유종의 미를 거둔다. 브라질에서는 은퇴해야 할 수준이었던 커리어 말년 폼이었지만 브라질보다 수준이 낮은 미국 리그로 이적하여 3년 동안 56경기 31골을 넣으며 커리어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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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가 뛰었던 시대와 현대시대와의 단순 골 기록 비교는 큰 무리가 있다. 당시 유럽 주요리그의 경기당 평균득점을 보면 1970년대 이후와 비교하면 상당히 높았다. 1970년대 이전은 토탈 풋볼 붐 이전이기 때문에 선수들의 뛰는 거리가 지금의 두 배 가까이 적었다. 지역 방어 개념이었고, 압박이 적었다. 이로 인해 수비수의 개인 기량만이 수비의 요소가 되는 경우가 많아 골이 많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70년대에 들어서고 축구판에는 토탈풋볼의 바람이 불면서 압박 전술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상대팀에 대한 분석이 발달했는데, 이로 인해 해당클럽에서 뛰는 주요선수를 직접 상대하거나 경기장에서 직접 플레이를 보지 않아도 상대의 장점과 약점, 파훼법을 연구하기 쉽게 되었다. 이러한 미디어의 발전은 그동안 뛰어난 공격수들을 잘 막지 못했던 수비수들에게 큰 득이 되었고, 수비수들의 기량은 전반적으로 크게 상향되었다. 1970년대 이전에 득점하기 더 쉬웠던것은 역대 탑 골스코어러들의 기록을 살펴봐도 알 수 있는데 통산 500골 이상 득점한 28명의 선수 중 70년대 이전 선수가 17명, 70년대 이후의 선수는 10명으로 비교적 적다.[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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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리그 역시 그런 경향이 나타났는데, 펠레 또한 수비 전술이 발달한 축구판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60년에서 70년대로 갈수록 브라질 리그의 수비력 수준이 상향되는것에 반비례해서 펠레의 득점이 적어지는것을 볼 수 있다. 브라질리그 평균실점이 3.66에서 1.91까지 절반 가까이 떨어지는동안 펠레의 경기당득점은 1.63에서 0.37까지 80%가량 심하게 떨어졌다. 이처럼 펠레의 전성기와 브라질 경기당 실점율 변화는 유의미한 관계가 있다. 물론 이 시기는 펠레 나이로 30대가 되는 노쇠화 시기로 수치를 그대로 보는 건 무리가 있으나 수비 전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가 마침 자신의 최전성기였고, 더 많은 득점기록을 세우는데 이득을 본 것은 확실하다. 단 60년대 선수들 모두 이런 이득을 보았지만 당시 브라질에서 펠레의 득점페이스는 독보적이었다. 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득점 기록에서 최정상을 다투는 수준이었다.[113] 그리고 유럽 감독들이 토탈 풋볼, 빗장 수비 등 전술을 발전시킨 목적이 펠레와 남미 선수들의 압도적인 개인기에 대항하기 위해서인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 당시 의학수준, 선수교체 제도가 없었던 점, 지금 수준에선 퇴장인 파울도 단순히 넘어가는 등 이러한 요소들을 배제할 수만은 없다.[114] 그렇기 때문에 선수로서 활동한 시대가 다른 메시 같은 선수와 펠레의 골 기록을 비교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것이 펠레의 평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월드컵에서 세 번 우승한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말할 것도 없고, 펠레가 속했던 클럽팀 '산투스 FC' 조차 당대 최고의 팀이었기에 소위 말하는 '팀빨'이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산투스 FC는 1956~74년이 황금시기이고 펠레의 데뷔 전년인 56년에 이미 전국컵대회에 우승한 팀이었다. 1960년대에는 말그대로 브라질을 호령한 강팀이었고 1962, 1970 월드컵 브라질 대표팀에 산투스 선수는 8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이런 형식의 비판은 기본적인 부분에서 오류가 있는 것이, 보통 펠레와 함께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거론되는 메시를 비롯하여 디스테파노, 푸슈카시, 베켄바우어, 크루이프, 호날두 등의 선수들 역시 레알 마드리드 CF, FC 바르셀로나, FC 바이에른 뮌헨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구단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이들이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그러한 팀의 쟁쟁한 선수들 중에서도 가장 빛났기 때문이다. 또한 브라질이 당대 최고의 팀은 맞지만, "1958~1970년까지 12년 동안 주전으로 활약하며 월드컵 3차례 우승을 전부 경험한 선수는 펠레밖에 없다." 축구는 개인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적당히 걸러들어야 한다.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언급되는 선수 중 이런식의 비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선수는 디에고 마라도나 한명 뿐이다.
펠레의 기록을 전체 골 기록인 1,281골로 잡든, 현재의 공식 경기의 기준에 맞춰 767골로 잡든, 지역 리그의 한계를 거론하며 이를 조정한 수치로 잡든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시대 배경을 무시한 채 과거 선수들의 플레이나 스탯을 현대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아예 논리적인 오류라는 것이고 이는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스탯 조정이 일상화된 야구계에서도 조정방어율이나 WAR같은 스탯을 구할 때 같은 시즌을 뛴 선수들과 비교해서 얼마나 잘했는지를 간접적으로 따지지 시대가 다른 선수들의 스탯을 있는 그대로 비교해서 누가 낫다는 비교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따지면 1920년이나 1923년의 베이브 루스가 2001년의 배리 본즈보다 홈런을 못 쳤으니 당시의 본즈보다 아래라는 헛소리가 나온다.[115] 이런 식이라면 나중에 메시나 호날두의 대단한 기록들도 만약 축구 규칙, 대회 시스템, 판도 등이 바뀌면 후손들에 의해 얼마든지 평가절하될 수 있다.
친선을 포함한 1000골이 넘는 펠레의 골기록으로 다른 선수들의 기록[116]과 대조하여 펠레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증거로 나타내는 것이 타당한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나 아프리카와도 경기를 벌였는데 그들의 축구실력이 산투스와 비교가 안 되는 건 당연지사다.[117] 호마리우의 1,000골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펠레라고 해도 그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특히 펠레 자신이 1,000골 드립을 치며 호마리우리오넬 메시를 공격하는 상황에서는 펠레 자신의 골 기록도 엄정히 평가받을 여지는 존재한다.

4.3.2. 인성, 사생활적인 부분에 관한 비판

축구 황제로서의 자부심이 지나치기 때문인지, 자신과 비교되는 선수들에게는 좋은 소리 안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118] 펠레 자신과의 대척점에 있는 세기의 라이벌인 마라도나와는 서로 디스를 주고 받는 사이이며, 호마리우, 호나우두 등의 브라질 출신 후배들도 잘 나갈 때는 펠레에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리오넬 메시가 그 대상. 축빠들의 반응은 대개 "안 그래도 그 영감이 최고인거 다 아는데 왜 속좁게 저런 소리를 하지" 쯤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메시가 네이마르부터 넘고 오라는 소리는 메시까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개드립이었다는 평.[119]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을 두고 무조건 닥치고 개최해야 한다며 개최 거부 시위를 비난하면서 엄청나게 욕을 먹기도 했다. 국회의원이 된 호마리우가 월드컵 개최를 놓고 엄청난 비난을 하면서 시위를 옹호하던 것과 비교했을 때 대조적이라서 더 욕을 먹었다.[120] 이 때문인지 아르헨티나 기득권자들에 허구헌날 쓴소리하는 마라도나와 달리 기득권자들에게 아첨하고 빈민층이던 자신의 과거는 잊었다는 비난도 많다.
또한, 가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법정에까지 끌고 갔던 이 싸움에서 법정은 펠레가 아닌 딸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 딸은 펠레의 성(姓)인 두 나시멘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펠레는 그 딸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했으며 딸이 유방암으로 사망했지만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121] 의아한 것은 펠레에게 다른 혼외자식이 또 있었는데 그 때는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4.4. VS 디에고 마라도나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펠레 vs 마라도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어록

베토벤음악을 위해 태어났고 미켈란젤로미술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나는 축구를 위해 태어났다.
나는 미드필드 라인으로 자주 내려가 미드필더들을 돕곤 했다. 그때는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았지만, 난 분명히 내가 넣은 골보다도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축구는 팀플레이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스포츠이다.
Q: 당신이 현대에 뛴다면 1,000골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A: 아니다. 현대의 장비는 나의 현역 시절보다 훨씬 발전해 있다. 또한 스타플레이어들에 대한 보호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약 현대에 선수생활을 한다면, 두 배 많은 2,000골을 넣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요즘 비행기에서 직접 자신의 짐을 옮기는 축구선수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이제 축구선수들이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좋은 환경에서 다닐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머리는 가슴에게 이야기하고, 가슴은 발에게 이야기한다.
브라질은 축구를 통해 먹고 자고 마신다. 브라질은 축구로 살아간다.
모든 것은 열정에 달렸다. 그것은 팽팽한 기타 줄과 같다.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며, 항상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나는 축구로서 얻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신께서 나에게 모든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상대보다 0.5초 빨라야한다.
가난에서 어린이를 구해내는 것이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는 것보다 기분 좋은 일이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나와 함께 외칩시다. 러브-러브-러브!
현재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의 미래를 만든다.
나이는 상관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배움을 그만두어서는 안된다.
누구라도 좋은 선수가 되려면, 무의식 속에서도 양 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축구는 하나의 종교이다. 나는 축구공을 숭배하며, 축구공을 신처럼 다룬다. 많은 선수들은 축구가 그저 공을 차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좀 더 공을 예쁘게 다룰 필요가 있으며 공을 찰 때 귀중한 보석을 대하듯 해야 한다.
사람들은 늘 내게 묻곤 해. "제 2의 펠레는 누구죠? 언제 나타납니까?" 사견을 밝히자면 '제 2의 펠레'같은 건 태어나지 않을 거야.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미 공장 문을 닫으셨거든.
축구는 한두명의 스타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 늘 경기 안에 어우러져 있어야 하며, 누군가가 소극적으로 군다면 이길 수 없다. 이것은 팀 게임이므로 누구도 혼자 플레이할 수 없다. 11명이 1명처럼 플레이해야 승리가 찾아온다.
나는 가끔 잠을 자지 않고 그저 누워서 궁금해한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아직도 '펠레'가 그리 유명한 이유가 뭘까?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른다.

6. 펠레의 저주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펠레의 저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명성이 자자한 펠레이지만 또한 악명을 떨치고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말을 하면 언제나 그것이 반대로 이루어지는 펠레의 저주 때문이다. 이놈의 저주 때문에 그는 단 한번도 축구감독을 해본 적이 없으며, 평생동안 엄청난 정신적 압박에 시달렸다. 그렇지만 그저 이건 농담삼아 하는 얘기니 너무 진지하게 펠레를 까는 건 자제하자. 틀린 것이 부각돼서 그렇지 정확하게 예측한 것도 많기 때문.

어쨌든 펠레의 저주 희생양들에겐 흑마법사라고 왕창 까인다. 이게 펠레의 잘못이라곤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펠레가 무언가를 예측할때마다 지목당한 선수들의 팬들은 그만좀 하라고 원성이 자자하다. 우리나라 역시도 펠레가 월드컵에서 한국의 승리를 예상하자 펠레를 까면서 펠레에게 질문을 던진 기자까지 세트로 까였고, 네이마르가 메시보다 낫다는 개드립을 듣고도 기겁한 쪽은 오히려 네이마르의 팬들이었다(...). 메시팬들은 심지어 좋아하는 사람마저 있을 정도(...).

7. 이야기거리

  • 펠레는 1961년 3월 이른바 역사에 남을 만한 골을 기록했다. 플루미넨시 FC를 상대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펠레는 상대편 선수 모두를 혼자서 제치고 득점을 기록했다. '마라카낭 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로 극찬을 받은 이 골을 기념하기 위해 상파울루 지역 스포츠 신문인「우 에스포르치」는 기념판을 제작해 마라카낭 스타디움 입구에 걸어 놓았다.
    파일:GOL-DE-PLACA_ARQUIVO.jpg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에 있는 기념판
  • 펠레는 909경기만에 1000골을 달성했으며 그 대기록은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미국에서는 베이브 루스가 2000회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것과 마찬가지라 평했으며, 자국 브라질에서는 두 번씩이나 달에 착륙했던 미국인 조종사 콘라드와 빈의 사진이 펠레의 1000번째 득점 사진과 나란히 실렸다. 이 당시 펠레의 득점은 페널티 킥이었는데 한 브라질 언론인은 "세계인들이 모두 함께 집중해서 보려고 시간을 잠시 멈추어야 했기에 하늘이 그러한 상황(페널티 킥)을 만들어주었다"라고 썼다.
  • 콜롬비아에서의 일이다. 그 날 따라 수비수들이 펠레에게 거칠게 몸싸움을 걸어왔고 평소에 매너 좋은 펠레도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그러다 펠레가 파울을 당했지만 심판이 오히려 펠레에게 파울을 선언했고 펠레는 가만히 넘어가지 않고 심판에게 항의했다. 심판은 이런 펠레에게 퇴장을 주었는데 펠레가 이렇게 퇴장을 당하자 관중들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오히려 주심이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경기장에서 나가야만 했다. 관중들이 쏟아져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펠레보러 비싼 돈 주고 표 사서 경기보러 왔는데 펠레를 퇴장시켜? 장난하니?" 결국 남은 경기는 부심을 주심으로 임명하여 경기를 진행시켜야만했다. 물론 펠레는 경기를 끝까지 소화했다.
  • 이란 국왕은 펠레를 만나기 위해 공항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으며 중국의 국경 수비대는 그와 인사를 하기 위해 초소를 버리고 홍콩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들은 중징계를 받았다.
  • 펠레가 아프리카로 투어를 갔을 때의 일이다. 펠레는 그 날따라 엄청난 팬들의 환호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친선 경기를 뛰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기까지는 미담인데 그 이후에 해프닝이 벌어졌다. 펠레는 평소에 잘 쓰지 않던 각종 묘기들을 선보이며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골 폭풍을 쏟아부었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 그런데 환호성이 커질수록 상대팀 수비수들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갔다. 급기야 골키퍼는 아예 경기를 포기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그걸 본 펠레는 아차 싶었다고 한다. 저 골키퍼도 가족들이 있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을텐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있는 힘껏 그를 바보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크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고.. 경기가 끝난 후 펠레는 골키퍼에게 사과하러 상대팀 라커룸에 방문했지만 골키퍼는 펠레를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 펠레를 주인공으로 하는 아타리 2600의 게임 Pelé's Soccer는 스포츠 스타를 등장시킨 최초의 게임이다.
  • 1962년 펠레가 두 번째로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벤피카를 깨박살내자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인터 밀란 등 유럽의 수많은 축구 클럽들이 펠레를 영입하려고 노력했으나, 브라질 정부는 펠레를 '국보(國寶)'로 선언하고 펠레가 계속 브라질에 남도록 했다.[122] 펠레는 한평생 동안 단 하나의 프로팀에서 활약했는데, 그것은 산토스 팀이었다. 은퇴 후에 미국의 축구 붐 조성을 위해 북아메리카 축구 리그에서 뛰기는 했다.
  • 월드컵에서 3번을 우승하여 월드컵의 대명사같은 선수지만 실제로 부상 또는 부상의 후유증이 없는 풀 컨디션으로 월드컵을 뛰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1997년 펠레는 영국에서 명예 KBE훈장을 받았다. 2등급 훈장이기 때문에 작위급 훈장이다. Sir칭호가 안 붙는 명예 작위이긴 하지만 현재 축구계의 유일한 KBE 수훈자이다.[123][124]
  • 은퇴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펠레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강도를 만났었다. 그런데 택시기사의 돈을 빼앗고 펠레의 돈도 뺏으려고 뒷문을 열었을때 놀란 얼굴로 있는 펠레를 보자 그들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펠레씨,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당신의 돈을 빼앗을 수는 없죠."# 하지만 약 10년 뒤 또 강도를 만난 모양이다.#
  • 펠레가 어렸을 적 이야기다. 친구들과 축구를 한 뒤 으쓱해져 함께 담배를 피웠는데, 이 장면을 아버지에게 딱 걸리고 만 것. 저녁이 되어 들어온 펠레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오늘 담배 피웠냐?" 펠레는 뜨끔해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야단맞을 줄만 알았던 펠레에게 아버지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축구에 소질이 있으니 장차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벌써 담배를 입에 대다니. 흡연은 몸을 망가뜨려 경기에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한다. 나는 아버지로서 네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가르칠 책임이 있고,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갈 때는 그것을 막아야 할 책임도 있다. 하지만 네가 좋은 길로 가느냐 나쁜 길로 가느냐는 어디까지나 네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너는 담배를 피우고 싶으냐? 아니면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으냐? 네 스스로 선택하거라." 그리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펠레에게 건네며 "뛰어난 축구 선수가 되길 원치 않고 굳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면 이 돈도 담배 사는 데 보태거라."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 펠레는 한바탕 울고 난 뒤 아버지에게 가 돈을 돌려주며 당연히 이렇게 말했다. "담배는 피우지 않겠어요. 그리고 꼭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겠습니다!" 그의 말처럼 된 것은 물론이다. 오오 아버지 오오. 물론 그는 지금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 펠레와 술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펠레가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어른이 즐기는 향긋하면서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액체를 조금씩 먹다보니 큰 나무통 한 통을 거의 비워버릴 정도로 마셔버렸다. 친구는 술을 조금 즐기던 인물이라서 별 탈이 없었지만 펠레는 취했을 때 어지러운 것이 이대로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결국 술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매타작을 각오한 채 아버지께 가서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 애원에 아버지는 멍석말이 몽둥이 찜질로 답을 주었다. 그 이후로 역시 술도 마시지 않는다. 술냄새만 맡아도 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토 나올것 같다고 한다.
  • 공격수로서의 펠레의 실력은 모두가 알지만, 펠레의 또 다른 장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골키퍼로서의 능력이었다. 당시에는 선수 교체가 없었던지라 주전으로 나왔던 골키퍼가 부상을 입으면 다른 골키퍼를 교체 투입시킬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필드 플레이어 한 명이 골키퍼로 투입되곤 했는데 그것이 산토스의 경우는 주로 펠레였다. 1000번째 골을 페널티킥으로 넣기 바로 전 경기에서도 산토스의 골키퍼가 부상을 당하자 펠레는 남은 시간을 골키퍼로 뛰었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조차 예비 골키퍼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산토스 팀에서도 2군 골키퍼 훈련을 받기도 했으며 제법 잘 했다고 한다.[125]
  • 펠레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노력하는 천재였다. 세계 역사에서 손가락에 꼽을만한 빛나는 발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펠레는 자신의 발 모양에 심각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이유는 못생겼다고. 축구선수들의 발이 못생긴거야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펠레는 특히 심하다. 발마디의 굳은 살은 기본이고 발톱도 거의 흔적만 남은 수준. 밑의 사진은 현재 일반에 유일하게 공개된 펠레의 맨발 사진이며 이것 역시 펠레 본인이 한사코 촬영을 거부하다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다.
    파일:펠레 맨발.jpg

    펠레의 맨발 사진
  • 아들 에지뉴도 축구선수였으며,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하지만 이 아들내미가 마약이나 팔고 다니는 사고뭉치여서 펠레의 속을 꽤나 썩히고 있다. 막내아들인 1996년생 조슈아도 산투스 FC에서 축구를 했었는데 2015년 미국의 탬파 대학교에 진학했다가 중퇴하면서 축구도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 1959년 펠레는 브라질 병역법에 의해 군대에 징집되었고 1년간 군복무를 했다. 펠레는 이 시절을 매우 환상적인 경험(...)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아이들에게 가끔 군대를 가라고 충고를 한다.군대스리가?
  •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이후 펠레는 20세기를 빛낸 세계의 위대한 축구선수 100명을 선택해서 FIFA 100을 만들었다. 아무리 펠레가 빗나가는 예측을 자주하는 위인일 지언정 그래도 세계 축구 역사에 두 획이나 그어버린 장본인이니 만큼 그의 축구안목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뛰어난 안목에 의해 펠레에게 선택받은 위대한 축구선수들이 FIFA 100인 것이다.
  • 펠레는 승리의 탈출이라는 영화를 찍었고 그 영화는 1981년에 개봉되었다. 여기에는 영화 배우 실베스타 스텔론, 막스 폰 시도우[126] 등이 출연했으며 펠레 외에도 보비 무어등의 유명 축구 선수들이 출연했었다. 스토리는 2차대전 당시 나치장교들이 선전용으로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포로 대표팀과 자신들의 정예 축구팀과의 경기를 주선하였는데 포로 대표팀 선수들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탈출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모티브는 데스메치로 알려져 있는 FC start 선수들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 펠레가 선수 시절에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면 7회를 수상했을 거라는 보도가 나왔다. 다름아닌 프랑스 풋볼[127]에서 내보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기사이다.[128]
  • 과거 마라도나가 진행하던 토크쇼[129]에 펠레가 게스트로 초정된 적이 있었는데[130], 이 토크쇼에서 둘은 서로의 이름과 등번호가 마킹된 유니폼을 교환하고 마라도나는 펠레를 칭찬(이라기보다는 까지 않는)하고, 펠레는 마라도나의 마약 끊기 노력을 크게 칭찬하는 등. 둘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을것만 같은 일이 진행되었지만... 마라도나가 먼저 헤딩 대결(서로에게 헤딩해서 공을 넘겨주는 것)을 제안하고, 즉석에서 성사되었다. 길게 가지 않고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펠레가 이겼다저주는 빼고 마라도나가 실수를 해서 공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마라도나에게서 한 30cm 올라갔다가 바닥으로 직행... 하던 것을 마라도나가 재빨리 캐치해서 펠레와 뜨거운 포옹하는 애드립으로 넘기며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제대로 봤다면 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고, 마라도나는 자신이 진행하던 토크쇼에서 굴욕을 당했다.
  • 현재 근 80세가 되어가긴 하지만, 아직 크게 나이들어 보이지 않는다. 아마 동안속성을 지닌듯 하다.
  • 카포에라를 익힌 적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 세이부 컵 축구의 최종보스인 GOD 팀의 주장으로 등장한다. 1~7스테이지에서는 부심으로 뛰다 8스테이지에서 선수로 돌변하여 경기장에 난입한다!
    파일:seibugod.png
  • 한국과도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편이다. 1972년 선수로서 한국을 방문해서 친선 경기를 치뤘다.대한뉴스 친선경기에서 펠레가 속한 산토리팀이 3:2로 이겼다. 1998년에도 방한했다. 부산에서 열린 2002년 한일 월드컵 조추첨 행사에도 참여했다. 2002년 월드컵때 한국팀에 대해 좋은 멘트를 많이 남겼다. 브라질에 있는 펠레가 만든 팀인 리토라우FC에서 10번을 달고 뛰던 한국 축구 선수 임규혁에게 칭찬을 하기도 했다. 2003년 피스컵 대회 고문을 맡아 방한했다.
  • 보비 찰튼도 언급한 바지만,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선수기도 했다. 17살때 브라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를 묻는 질문에 나라고 대답했으며, 세계 최고의 윙어를 묻자 그것도 자기라고 대답했다. 다른 선수였다면 농담이라고 웃었겠지만, 펠레는 진정으로 믿고 대답했고, 다른 이들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해 누구도 웃지 않았다고 한다.#
  • 펠레의 등번호는 10번으로 유명하다. 펠레는 1958년 월드컵 개최 당시 17세의 유망주 소년일 뿐이었는데, 때문에 그가 대회 실버볼을 차지하고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 주축 공격수가 될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발렌티노 마촐라를 닮은 플레이로 인해 유럽에서도 유명했던 주제 아우타피니도 있었고 여러모로 펠레가 낄 자리는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의 통념상 10번은 다른 선수에게 주어지는 것이 타당해 보였는데, 당시의 브라질 축구협회에서 등번호 등록을 쌩뚱맞게 하는 바람에 팀의 주전 골키퍼 지우마르는 이례적으로 3번을 달고 뛰었고(다른 팀 다 멀쩡한 와중에 브라질만 골키퍼가 3번을 달았다.다행히도 후보 골키퍼였던 카스티유는 정상적으로 1번을 받았다.), 8번이나 10번을 받아야 했을 팀의 플레이메이커 지지는 6번을 받고(지지는 전 대회인 1954년 월드컵에서 8번을 달았었다), 라이트 윙이 아닌 레프트 윙어 마리우 자갈루가 7번을 받고 반대로 라이트 윙인 가린샤가 11번을 받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 터졌다. 당시에는 페렌츠 푸스카스 같은 스타선수나 달 수 있었던, 중심 인사이드 포워드에게 돌아가야 할 10번의 영광이 뜬금없게도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유망주 스트라이커에 불과했던 펠레에게 주어진 것이다. 펠레로서는 굉장히 우연한 기회에 받게 된 10번이었는데, 이 10번 셔츠를 입고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10대 선수가 되는 바람에 이후에도 그 번호를 입을 수 있게 되었고, 그가 대표로 뛰었던 당시에 누구도 그의 등번호를 달 수 없었다.
  • 2020년 2월, 건강이 악화되어 항시 휠체어를 타고 있으며 그에따라 바깥출입을 꺼리게 되어 우울증까지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8. 수상 기록

8.1. 대회 기록

  • 뉴욕 코스모스
    • 북아메리카 축구 리그: 1977
    • 사커보울: 1977

8.2. 개인 수상

8.3. 개인 기록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우승 3회 (1958, 1962, 1970)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신인상 (1958, 17세)
  • FIFA 월드컵 통산 결승전 최다골 2경기 3골[134] (1958, 1970)
  • FIFA 월드컵 통산 결승전 최다 공격포인트 2경기 3골 3도움 (1958, 1970)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공격포인트 14경기 12골 10도움
  • FIFA 월드컵 통산 최다 도움 14경기 10도움 (1958, 1962, 1970)
  • FIFA 월드컵 통산 단일 대회 최다 도움 6경기 7도움 (1970)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해트트릭 (1958)
  • FIFA 월드컵 통산 최연소 우승 (1958)
  • 인터컨티넨탈컵[135] 통산 최다 득점 3경기 7골 (1962, 1963)

[1] 헬무트 란과 공동 득점 2위. 골든슈, 실버슈, 브론즈슈는 1982년부터 최초 증정. 비공식 상[2] 최초 수상자이자 최연소 수상자[3] 영어를 제외한 로망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4] 펠레의 아버지가 이름을 지을 때 당시 유명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는 유행에 따라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등록하려 했을 때 실수로 i를 빼먹어서 에디송이 아닌 에드송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바슷한 예로는 마이콘이 있다.[5] 펠레의 출생신고서에는 10월 21일로 올라가 있지만 본인은 21일은 관청 측의 실수고 원래는 23일이라 주장한다.[6] Três Corações. 한국어로 번역하면 세 개의 심장이란 뜻이다.[7] 사실 펠레가 10번을 달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당시에 브라질 축구협회가 등번호를 제출하는 것을 잊었고, 이에 FIFA의 어느 직원이 자기 마음대로 브라질 선수들에게 등번호를 부여했던 것이다. 이 월드컵에서 펠레는 최고의 활약을 보였고, 그때부터 10번은 에이스의 번호가 되었다.[8]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다 득점.[9] 혹은 'King Pele', 브라질에서는 'O Rei do Futebol', 'O Rei' 해외에서는 황제가 아니라 으로 써서 오역처럼 보이지만, 당장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도 영어로는 King of Pop이다. 동아시아와는 달리[10] 공신력이 어느 정도 보장된 기관에서 내놓는 역대 축구선수 랭킹을 보면 십중팔구는 펠레가 1위를 차지했고, 지금도 그렇다. 예를 들면 펠레가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1981년에 플라카르에서 세계 각국의 축구 전문가 70인에 의뢰하여 역대 베스트 11을 뽑았을 때에는 단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펠레를 자신의 베스트에 집어넣었다. 20세기 말에도 각종 세기말 조사에서 펠레가 축구 선수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고 엘 그라피코와 같은 아르헨티나 축구 잡지에서조차 디에고 마라도나가 아닌 펠레를 1위로 깔고 들어갈 정도였다. 그리고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인을 뽑으면 축구계 대표로는 펠레가 들어가고 복싱무하마드 알리농구마이클 조던, 야구베이브 루스 같은 타 종목 최고 선수들의 위에 랭크되는 결과도 자주 나온다. 실력이야 시대 차이가 많이 나니 마라도나와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그렇다쳐도 축구 황제의 위상만큼은 도전자가 현재로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이다. 마라도나가 알리, 조던, 루스 등과 비슷하거나 그들의 위에 설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11] 사실 펠레의 활동 시기가 워낙 오래돼서 펠레의 플레이를 담은 영상은 거의 소실된 상태인데, 그래서 실력 논쟁이 펼쳐질 때마다 펠레가 불리 할 수 밖에 없다. 펠레의 플레이를 라이브로 본 세대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펠레 시절의 선수들 역시 대부분 축구계 자체에서 은퇴했거나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른 역대급 선수들인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 요한 크루이프 등 타 선수들과의 비교 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요즘 세대들에게는 상당히 저평가 받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펠레의 플레이를 직접 목격한 세대들은 다른데, 알렉스 퍼거슨 경이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슈카시, 프란츠 베켄바워 등 축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선수들이나 감독들은 "역대 최고는 펠레다"라고 치켜세운다. 다른 부분들을 떠나서 축구라는 하나의 스포츠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상 펠레의 자리를 넘볼 선수는 앞으로 나타나긴 힘들 것이다.[12] 펠레가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인 이유[13] 물론 받은 사람의 상을 다시 빼앗진 않는다.[14] Dondinho. 본명은 주앙 하무스 두 나시멘투-João Ramos do Nascimento(1917~1996.11.16)[15]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유스 출신의 스트라이커로 1935년부터 1952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였다. 키는 돈지뉴가 펠레보다 9cm가량 크며 , 돈지뉴도 선수생활동안 605골을 기록했는데 브라질 대표팀에 소집된 적이 없는 것을 보면 당시 브라질 리그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16] 사실 이것은 축구 역사상 단일경기 최다 헤딩골 기록이다[17] 1934년 월드컵에 출전한 경험도 있는 브라질 국가대표 출신이다.[18] 그러나 뉴욕 코스모스는 9년 뒤에 망했다(...). 현재의 뉴욕 코스모스는 펠레 시절의 뉴욕 코스모스를 모체로 2010년 무렵 재창단 된 팀이다.[19] 참고로 일반적인 유소년 레벨에서 나이 차는 그야말로 넘사벽이다. 어린 나이에는 신체 발달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아웃라이어에 따르면 같은 나이면 1월에 태어난 아이가 12월에 태어난 아이보다 프로 선수가 될 확률이 50% 이상 높다고 한다. 성장속도의 차이를 재능의 차이로 착각해 1월에 태어난 아이가 계속해서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20] 다만 공식 리그 기록에는 없는 경기라 일종의 친선 경기 또는 리저브 매치일 가능성이 높다.[21] 1957년 시즌에는 17골로 득점왕이었다. 그것도 1958년의 반 정도만 뛰고.. 펠레의 공식 리그 데뷔는 1957시즌 시즌이었는데 데뷔 시즌에 최상위 리그의 득점왕을 차지하는 케이스는 펠레와 이탈리아의 펠리체 보렐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22] 1959년에 리그에서 준우승한 산투스의 성적표#. 골득실이 1위 팀에 비해 20 이상 앞서는데 준우승이라는 해괴망측한 기록이다.[23] 이 때 펠레의 미국행을 설득한 사람이 그 유명한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키신저는 독일 출신이라 열혈 축빠였고 북미 최초의 프로 축구 리그 NASL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리고 펠레의 에이전트가 사기를 당하여 펠레에게까지 금전적 피해가 가게 된 것도 은퇴 번복의 한 이유였다.[24] 브라질 역대 A매치 골 수 1위[25] 이 경기에서 펠레는 데뷔골을 넣었고, 브라질은 2-0으로 승리했다. 만 16살하고 259일로, 현재까지 브라질 역사상 최연소 A매치 골 기록이다.#[26] 그런데 가린샤무학력자인데다 8살 수준의 정신 연령을 가진게 정설로 되어 있다.[27] 이 경기는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무득점 경기이다.[28] 이 경기 이전의 4경기에서 9골(...)을 때려박았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토탈 13골을 넣어 월드컵 한 대회 13골이라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불멸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29]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이민자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페렌츠 푸스카스와 더불어 레알 마드리드의 챔스 5연패 등 최초 전성기를 이끈 선수이다. 추가로 1958년 발롱도르 수상자이다. 별명은 나폴레옹.[30] 그야말로 독보적인 기록으로, 최연소 해트트릭은 커녕 월드컵 10대선수 멀티골 기록조차 60년이 지난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프랑스의 킬리안 음바페가 기록할때까지 나오지도 않았다. 60년만에 명단에 오른 음바페는 당시 펠레보다 두살 많은 만 19세였다.[31] AC 밀란과 스웨덴을 이끌던 그레-놀-리 트리오의 2명이다. 노르달은 이 월드컵에 출전하지 않았다. 리트홀름이 2년 만에 산 시로에서 패스미스를 하자 산시로의 관중들이 5분동안 기립박수를 쳤다는 ㅎㄷㄷ한 기록이 있다.[32] 2위는 1998년 월드컵 16강 잉글랜드 VS 아르헨티나 경기에서 나왔던 마이클 오언의 골, 1위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에서 나온 디에고 마라도나의 유명한 오관돌파 골이다.[33] 당시에는 최연소 출전 기록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1982년 월드컵에서 북아일랜드노먼 화이트사이드에 의해 깨졌다.[34] 골든볼은 팀 동료 지지. 현재와 같은 방식의 골든볼은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이 때에는 기자단 투표로 최우수 선수를 선발했다. 이 투표는 초대 월드컵인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에서부터 시작되었다.[35] 10대의 나이에 월드컵 무대를 밟아본 선수들을 대라면 리오넬 메시, 사무엘 에투, 마이클 오언, 킬리안 음바페 등을 댈 수 있다. 이런 선수들은 선발 당시에도 탈유망주급 기량을 가졌고 부상 같은 돌발 변수가 없는 한 소속 국가의 최고급 선수로 성장한다. 하지만 차기 월드컵을 염두에 두고 경험치를 쌓으라 선발한 것이지 팀에 당장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 선발한 것은 아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영 플레이어 상을 수상한 마이클 오언이 오히려 특이한 케이스이며 마라도나처럼 아예 뽑히지 못하는 경우도, 호나우두시오 월콧처럼 엔트리 한 자리만 차지하고 출전은 못 하는 사례도 많다. 즉, 10대의 나이에 팀의 주역으로 월드컵을 우승시킨 선수라면 펠레가 유일하다. 펠레만큼의 비중은 아니지만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레전드 수비수 주세페 베르고미와 프랑스의 킬리안 음바페도 10대의 나이에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었다.[36] 이게 펠레의 처음이자 마지막 코파 아메리카 대회였다. 당시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는 쇠락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현재의 대회는 1975년에 재창립되어 명맥을 잇고 있다.[37] 일치하는 증언은 있지만 영상이 남아있지 않아 사람들의 묘사를 토대로 CG로 재구성했다. 상대팀은 이탈리아의 명문 유벤투스 FC가 아닌 브라질 상파울루 주 리그의 팀 주벤투지. FM에서 팀 이름을 검색해보면 우리가 흔히 아는 유명한 팀과 이름이 같은 팀이 전세계 방방곡곡에 꽤나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38] 펠레의 부상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선수들이 매우 매너 좋은 플레이를 펼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페어플레이상을 수상한다. 펠레는 아직도 그 당시 체코 선수들이었던 요세프 마소푸스트, 얀 포플야르, 얀 랄라 등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39] 물론 1950년 대회 당시의 이탈리아도 더블 디팬딩 챔피언이긴 했지만 지난 대회와 무려 12년 씩이나 차이나는 긴 간극도 그렇고 1949년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스타 플레이어의 과반수를 잃은 이탈리아였기에 축구팬들은 이탈리아니, 잉글랜드니 우루과이니 이런 식으로 누가 우승할 것이다라고 서로 옥신각신하는 수준이었지 이탈리아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1966년 대회 당시의 브라질은 바로 4년전과 8년전에 우승한 그 브라질인데다가 펠레라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축구선수였던 인물이 있었던지라 브라질 하면 모두가 공포에 떨던 시절이었다.[40] 이것은 36년 후 2002년 월드컵에서 프랑스가 부상중이던 팀의 에이스 지네딘 지단을 억지로 내보냈던 상황과 일맥상통한다.[41] 이런 식으로 유럽이 비유럽에게 잔인한 반칙을 저지르고도 심판이 가만 냅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2006년 월드컵 8강전 아르헨티나 대 독일 전에서도 독일의 공격수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아르헨티나의 골키퍼 로베르토 아본단시에리에게 고의로 마치 죠 히가시타이거 킥을 연상케 하는 무릎찍기를 시전했고 이로 인해 아본단시에리는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들것에 실려나갔지만 심판은 클로제에게 그 어떤 판정도 내리지 않고 냅뒀다. 이 때의 상황은, 아르헨티나가 독일을 1-0으로 앞서고 있던 상황이었고 로베르토 아본단시에리는 당시 남미 최고의 골키퍼로 이 월드컵에 나와서 코트디부아르에게 1골, 멕시코에게 1골을 내준 게 전부일 정도로 철벽 수비를 자랑했다. 이것 때문에 골키퍼가 바뀐 아르헤티나는 결국 실점을 했고 승부차기까지 가서 패하고 말았다.[42] 이 6경기에서 브라질은 6전 전승, 23득점 3실점의 성적을 거두었다. 상대팀 다 죽게 생겼다 이놈들아[43] 무려 한꺼번에 7명을 교체했다[44] 이게 만약 골이 들어갔으면 이것도 월드컵 역대 베스트 골 중 충분히 상위권에 들어갔을 것이다. 게다가 저 골키퍼는 야신이 공식적으로 실력을 인정하고 우발도 피욜, 지우마르 등과 함께 남미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를 다투는 라디슬라오 마주르키에비츠였다.[45] 줄리메컵을 처음 만들 때 3번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팀이 있다면 그 팀에게 줄리메컵을 영구히 소유하도록 규칙이 만들어졌었기 때문이다. 사실 줄리메는 이 컵을 만들면서 한 팀이 3번 우승하려면 최소한 100년은 걸릴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한 사기 유닛 때문에 너무도 빨리 끝나버리고 말았다. 뭐, 그 예측이 완벽히 틀린 것도 아닌게 월드컵이 시작된지 80년이 넘었지만 현재 월드컵에서 3번 이상 우승한 나라는 브라질, 이탈리아, 독일 이 3개국 밖에 없다.[46] 사실 이런 최고의 시합에서 일방적으로 브라질이 승리한 것은 준결승에서 있었던 서독과의 혈전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준결승에서 이탈리아는 서독을 상대로 연장 혈투 끝에 4대3으로 간신히 승리하고 올라왔는데 종료 직전에 서독이 동점골을 넣어 1대 1로 연장에 갔다. 거기서 서독의 역전골→이탈리아의 동점골→이탈리아의 재역전골→서독의 재동점골→이탈리아의 결승골이라는 패턴으로 연장 30분간 무려 5골이 터진 명승부 중의 명승부였다. 역대 월드컵 최고의 명승부로 손꼽히는 경기이며 이 경기를 보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축구팬들도 여럿이라고 한다. 이 경기가 열린 아스테카 경기장에는 이 경기를 기념하기 위한 동판이 있다.[47] 하지만 여기에 대해선 반박의 여지가 있다. 펠레가 만든 일명 '펠레법'이 오히려 브라질 리그를 망친 원흉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48]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11번이었던 호베르투 히벨리누가 펠레의 밑에서 공미의 롤을 수행할때는 4-3-3, 왼쪽 측면으로 올라가 윙포워드로 활약할 때는 4-2-4로 변형되었다.[49] 펠레와 마라도나를 메시 등의 현대 선수들과 비교할 때 '과거 선수들이 현재 선수들보다 능력이 떨어지니까 현대 선수들이 더 대단하고 위대한 선수이다.' 라는 이야기로써 현대선수 우월론을 주장하는 경우들도 종종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부분들이 펠레와 그 동시대를 뛴 선수들의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증명이 되기도 한다. 항상은 아니지만 자신이 뛰는 전술 트렌드에서 시대를 한 발 앞서가는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선수들인데 그 수준이 떨어질리가 없다. 애초에 그 우월하다고 이야기하는 현대 선수들의 플레이는 이러한 선대 플레이어들의 노력과 연구, 실전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50] 참고로 1위는 1974년요한 크루이프로 33회, 2위는 2010년차비로 30회였다. 다만 크루이프와 차비는 해당 대회에서 7경기, 펠레는 6경기를 소화했다.[51] 당시 펠레의 포지션은 브라질에서 Ponta de Lança(창날)이라 불렸던 포지션이다. 하프라인과 박스 사이에서 중원싸움을 돕거나 볼배급을 하고, 드리블로 라인을 부순 뒤 이름 그대로 창처럼 침투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동 포지션의 선수로는 지쿠 등이 있다.[52] 4번의 대회에 출전했음에도 경기수가 적은 이유는 2번의 대회에서 입은 부상 때문이다.[53] 가린샤, 니우통 산투스 등이 소속되어 있던 히우 지 자네이루 주 소속의 강팀 보타포구 FR이 아니다. 상파울루 주 리그에도 같은 이름의 팀이 있다.[54] 이 기록 역시 말도 안되는 기록인데 브라질 후배 호나우두의 통산 해트 트릭 횟수가 24회다. 메시호날두가 50회 정도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55] 1970년 월드컵에서 기록된 드리블 돌파 횟수는 19회로 53회의 마라도나, 46회의 메시 등과 비교하면 확실히 적다.[56] 데니스 로조지 베스트와 함께 유소년들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푸스카스가 늙고 배가 나왔다고 무시했다고 한다.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차는 놈들일세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자 베스트의 제안으로 크로스바 맞추기 내기를 했고 푸스카스는 10개 중 10개를 모두 맞춰 아이들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마지막에는 아예 공을 띄워서 어깨와 머리로 트래핑하고 발꿈치로 띄우더니 발리 슈팅으로 강하게 차서 크로스바를 강타했다.[57] 어느정도로 자유자재였나면 프리킥은 주로 오른발로 차긴 했지만 종종 왼발로도 찼고, 왼발로 프리킥 골을 넣은 적도 있는 선수다.[58] 노장으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 월드컵에서 그의 스피드는 선수들 중 가장 빠른 축에 속해 있었다. 부상 이후에 스피드가 줄었음에도 말이다.[59] 1958년 월드컵의 펠레와 1970년 월드컵의 펠레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958년에는 다소 빼빼마른 체구였지만 이후의 펠레는 상체가 매우 두꺼워졌다. 격렬한 몸싸움을 가장한 살인적 태클에 견디기 위한 적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58년 월드컵에서도 유럽 선수들 사이에서 힘으로 볼을 지킬 정도의 몸싸움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60] 공식 프로필에는 171cm, 언론에 따라 173cm로 표기되는 곳도 있다. 어찌됐든 큰 키는 절대 아니다.[61] 펠레의 헤딩능력은 당대 최고 수준으로,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수비수 지아친토 파케티도 "펠레와 공중볼 경합에 나섰다. 내가 더 크고 힘도 셌다. 땅에 떨어져서 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펠레는 그때까지도 공중에 떠서 헤딩을 하고 있었다. 원하는 만큼 공중에 머무를 수 있는 선수 같았다."라고 놀라워한 적이 있었다. 참고로 파케티는 펠레보다 무려 20cm나 더 크다. 그래서 펠레 자신이 마라도나와 메시보다 낫다고 주장할 때 단골로 사용하는 논리가 양발 사용과 헤딩을 못 한다는 것이다.[62] 펠레의 서전트 높이가 어느정도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뉴욕 코스모스의 골키퍼로서 펠레와 같이 플레이했던 셰프 메싱은 그의 서전트 높이가 측정불가였다며 48인치 이상 뛰었으며, 역시 48인치인 마이클 조던보다 높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다만 이 증언 외에 기록이 확실히 남아있지는 않고, 이 증언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브라질에서 측정했는데 그랬다더라 식인지라 신빙성이 떨어지는 편이기는 하다.[63] 알까기는 펠레의 주력 개인기 중 하나였는데 1968년 서독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나온 알까기가 특히 유명하다. 무려 프란츠 베켄바워를 엉덩방아찧게 만들어버렸으니..[64] 1961년 3월 이른바 역사에 남을 만한 골을 기록했다. 플루미넨시 FC를 상대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펠레는 상대편 선수 모두를 혼자서 제치고 득점을 기록했다. '마라카낭 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로 극찬을 받은 이 골을 기념하기 위해 상파울루 지역 스포츠 신문인「우 에스포르치」는 기념판을 제작해 마라카낭 스타디움 입구에 걸어 놓았다. 펠레의 경우는 영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대략 절반 이상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되고 위에서 영상이 링크된 주벤투지전에서의 리프팅 골처럼[65] 나머지 4명은 호베르투 히벨리누, 데이비드 베컴, 테오필로 쿠비야스, 베르나르 젱기니이다. 이들 중 펠레가 가장 먼저 성공하였다. 그리고 연속 프리킥 득점으로 범위를 더 좁히면 펠레와 히벨리누, 단 2명에 불과하다.[66] 대표적인 예로 1970년 월드컵 우루과이전에서 펠레는 우루과이의 미드필더 다고베르토 폰테스에게 파울을 당하자 아예 팔꿈치로 폰테스의 얼굴을 가격하기도 했다. 폰테스는 그 상황 이전에도 펠레가 돌파하다 파울을 당해 쓰러진 상황에서 펠레의 다리를 밟은 적도 있었고 돌파 중에 뒤에서 또 파울을 걸자 펠레가 아예 팔꿈치로 찍어버린 것. 요즘 같으면 동반 퇴장을 당할 상황이겠지만 심판은 폰테스의 파울로 판정하고 브라질은 프리킥을 얻어내었다. 여담으로 폰테스는 머리가 움직일 정도로 꽤 크게 얻어맞았지만 다행히 팔꿈치에 정통으로 맞지는 않아서 잠깐 통증을 호소하고 문제없이 경기를 소화했다. 오히려 폰테스가 쓰러지면서 펠레를 몸으로 덮치는 바람에 펠레가 훨씬 오래 그라운드에 누워 있었다.[67] 다만 실제 축구 경기에서 펠레가 주장으로 나선 경우가 많지는 않다.[68] 쉽게 말해 월드컵 최다 우승 선수. 그 밑으로 월드컵을 2회 우승한 선수들은 축구 역사를 통틀어 주세페 메아차로 대표되는 1930년대 중반의 이탈리아 선수들, 가린샤지지로 대표되는 1950년대 후반의 브라질 선수들, 그리고 호나우두카푸, 아르헨티나의 다니엘 파사레야를 합쳐서 총 20명이다.[69]게르트 뮐러분데스리가 통산 득점왕 기록이 7회이다. 그러면서 1966년의 부상 이전의 펠레는 9년간 상파울루 주 리그에서 1시즌 평균 40골을 넘기는 압도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펠레 이전의 상파울루 주 리그 득점왕들의 9년간 1시즌 평균 득점은 26골 수준이고 단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메시의 2018년까지 9년간 라리가 평균 1시즌 득점은 36.6골이다.[70] 상파울루 주 리그이다. 산토스의 통산 우승 횟수가 2011년 우승까지 포함하여 19회이니 아직 통산 우승의 반 이상을 펠레 시절에 이룬 것이다.[71] 펠레 외에 이런 스타 본능을 발휘한 선수라면 지네딘 지단이 있다.[72]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football_new6&no=6686121[73] 펠레의 다큐멘터리 영상. 현존하는 펠레의 스페셜 영상 출처의 대부분은 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5년 쯤 펠레 에테르노에서의 펠레의 플레이가 아이러브사커 같은 축구 동영상 카페에 소개 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74] 펠레는 20대 초반에도 다수의 매체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분류되었다. 궁금한 사람은 이 링크 참고.[75] FIFA 홈페이지의 기록에 따르면 1970년 월드컵을 중계하던 영국 중계진 팻 크럴랜드(맨유 출신 수비수)가 말콤 앨리슨이 던진 질문에 대해 남긴 대답이었다.[76] 돈지뉴의 부인, 그러니까 펠레의 어머니이다. 풀네임은 도나 셀레스트 아란테스.[77] 입에 침이 마르도록 펠레에 대한 헌사를 아끼지 않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대단한 펠레의 이다.[78] 前 브라질 감독.[79] 바비 무어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조별경기에서 펠레와 만난 적이 있는데 말 그대로 축구 역사의 남을 명경기 of 명경기를 펼쳤다. 방패의 대결과도 같았으며, 잉글랜드의 위대한 전설 바비 찰튼경은 이 경기는 축구의 모든것을 볼 수 있는 위대한 경기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펠레, 토스탕, 호베르투 히벨리누, 자이르지뉴라는 역대급 공격진 그리고 그것을 막아서는 바비 찰튼, 바비 무어, 고든 뱅크스로 이어지는 잉글랜드의 3인방이 있었다. 브라질은 위에 4선수 중 한 명도 이기심을 표출하지 않고 팀 플레이 위주의 경기력을 펼치며 완전히 한 몸인것 처럼 경기장을 휘저었고, 무어와 뱅크스는 거의 완벽의 가까운 경기를 보여주며 저 무적의 4인방을 막아냈다. 바비 찰튼경도 브라질의 4명에 꿀릴것 없는 경기를 단신으로 보여줬지만, 축구는 11명이 하는 게임. 잉글랜드는 3명의 선수에게 전적으로 의지했지만, 브라질은 사정이 달랐다. 브라질은 저 4명 외에도 중원 사령관 제르손에다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인 카를로스 아우베르투 등 말 그대로 초호화 선수진이였다. 비록 잉글랜드가 1-0으로 브라질에게 패하지만, 이 당시의 브라질은 예선 전승도 모자라 본선 전승... 그 마저도 본선은 잉글랜드를 제외하면 모든 팀에게 3득점 이상씩 득점했다. 이로서 그 때 당시 브라질의 파괴력과, 그 파괴력을 그나마 1실점만으로 막아낸 잉글랜드 삼인방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다.[80] 1990년 로마에서 열린 '펠레와 친구들'이라는 제목의 친선 경기. 펠레의 50살 생일을 맞아 특별히 개최된 친선 경기이다.[81] 뒤는 메시에 관한 칭찬. 그 중에서 일부를 따왔다.[82] 이 점은 디에고 마라도나 역시 지적했던 적이 있다. 2016년에 메시의 성격에 대해 펠레가 묻자 마라도나는 성격이 좋지만 리더감은 아니라고 평한 것이다.[83] 이전 경기에서는 펠레가 혼자서 다 해먹다 보니 자연스레 제재 및 반칙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2인 1조로 축구를 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토스탕이 펠레와 같이 한 조를 짜게 된 것.[84] 위에서 바비 무어가 언급한 내용의 원문이다.[85] 우루과이의 전 축구선수이며 디에고 포를란의 아버지이다.[86]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선수이며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의 아버지이다.[87] 인디펜디엔테의 전설적인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의 어린 시절 우상으로 알려져 있다.[88] 1958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89] 현재는 브라질 전국 리그가 4부리그까지 활성화되면서 주립 리그의 하위권에 전국 4부리그 이하 수준의 팀들이 있기 때문에 이에 과거 펠레 또한 4부리그 수준의 팀들과도 경기해 쌓은 기록이라고 멋대로 추측하여 주장하는 팬들이 있는데 전혀 근거가 없는 소리다. 기본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브라질 리그 수준도 다른데다 유럽을 압도적으로 지배했다고 평가 받는 1990년대 세리에 A와 2010년대 라리가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횟수도 10년 동안 각각 3회, 6회다. 그 라리가의 하위권 팀들이 유럽대항전 참가를 못했다고 아스타나, 아포엘 같은 하위 리그 클럽보다 수준낮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도 말이 안 된다.[90] 뉴욕 코스모스와 친선경기 기록을 제외한 공식 기록[91] 인터컨티넨탈컵1960년에 처음 시작되었고 펠레가 남미에서 선수 생활을 끝낸 1974년까지 15전 8승 7패로 비등비등했고, 굳이 따지자면 남미가 조금 앞섰다. 즉, 8승이 남미쪽.[92] 결정적으로 펠레를 중심으로 모인 브라질 리그 출신의 선수들로 구성된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을 무려 3번이나 우승한 시점에서 유럽과 남미간 클럽축구의 수준차이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93] 푸스카스는 30대 중후반에도 레알에서 30골 넘게 찍으며 결국 40까지 해먹고 최전방에서 살짝 내려오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디 스테파노 역시 30대 중반까지 20골 넘게 찍으며 펄펄 날아다닌 양반들이긴 하다.[94] 호나우두(1976년생)와 네마냐 비디치(1981년생), 로빈 판페르시(1983년생)를 놓고 비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 차로 따지면 이들은 의외로 동시대 사람이지만 전성기가 다른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 펠레가 먼저 활약했기 때문에 굳이 펠레가 저들을 잡으러 유럽으로 가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95] 그리고 이 AC 밀란이 바로 펠레의 산투스에게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패했다.[96] 1959년 산투스 FC의 유럽 투어 당시 레알 마드리드 CF는 산토스의 경기를 앞두고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후원을 등에 업은 채 2주간 리그를 중단하고 산투스와의 경기에 대비했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산토스를 5대3으로 이기는데 성공하는데 이후 레알 마드리드는 펠레가 있을 때에는 단 한번도 산투스와 경기를 다시 치르지 않았다. 라이벌인 FC 바르셀로나가 산토스와 3번 경기를 치러 2승 1패로 우위를 점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97] 1972년 6월 2일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시합이다. 이 경기에서도 당시 국가대표 수비수였던 김호이차만이 펠레 한 번 막아보려고 모든 것을 쏟다 못해 거친 플레이를 선보였고, 관중석에서 우리가 펠레 골 넣는거 보러 왔지 너희들 수비하는거 보러 왔냐라는 식의 격한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98] 펠레 등장 이전 10년간 남미 강호들과의 전적을 살펴보면 VS우루과이 16전 7승 4무 5패 골득실+10 / VS아르헨티나 7전 2승 2무 3패 골득실+4 로 전혀 밀리지 않았다. 월드컵과 친선전에서도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스페인을 꺾는 등 유럽강호들과의 대전에서도 강했다. 하지만 자국에서 개최된 19, 22, 49 코파아메리카 우승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뚜렷한 성과는 없었고, 월드컵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58월드컵은 브라질이 처음으로 원정에서 이룬 우승이다.[99] 멕시코전에서 1골 1도움의 활약으로 첫경기 승리의 주역이었다.[100] 일례로 주전 레프트백이었던 니우통 산투스가 1925년생으로 당시 만 37세였다.[101] 현재의 FIFA 클럽 월드컵까지 범위를 넓혀도 7골을 넣은 선수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밖에 없다.[102] 이런 이유로 제2의 전성기 시절의 호나우두가 브라질 축구협회에 펠레의 골 기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103] 펠레의 데뷔 시즌이 1957년, 전국 대회의 창설이 1959년으로 펠레의 데뷔가 더 빠르다![104] 브라질 국토가 넓었던 것에 비해 당시 교통 시설이 열약했던 것도 영향이 있었다. 브라질의 군부 독재 시절 군사 정권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축구로 돌리기 위해 전국 리그를 재빠르게 창설한 것이고 이는 10여년 후 대한민국에서도 그대로 일어났다.[105] 이는 분데스리가 출범 전 독일 지역 리그와 분데스리가의 ELO 레이팅을 보면 간접적으로 상황이 비슷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106] 위키피디아만 뒤져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펠레 시절 브라질 축구의 시스템이나 리그의 위상을 전혀 찾아보지 않고 그저 추측만으로 이러한 주장을 많이하는 라이트 팬들이 많으며 펠레가 저평가 받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진지하게 과거의 축구 선수들을 평가할 때 이러한 추측성 날조는 절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직접 선수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다.[107] 2019년 기준. 1위 팔메이라스 (10회), 2위 산투스 (8회), 3위 코린치안스 (7회), 4위 상파울루 (6회).[108] 맨유 2회 (1999, 2008), 리버풀 1회 (2019)[109] 산토스 2회 (1962, 1963), 상파울루 2회 (1992, 2005), 코린치안스 2회 2000, 2012)[110] 클럽 기록을 보면 1970년부터 펠레의 기량이 현저히 저하되었고 1970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활약은 그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고 볼 수 있다.[111] 전국 리그에서 30경기 19골, 지역 리그에서 19경기 11골을 기록했다.[112] RSSSF 기준. 호마리우 (772골),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현역), 게르트 뮐러 (735골), 리오넬 메시 (현역), 툴리오 마라비냐 (575골),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현역), 우고 산체스 (541골), 지쿠 (522골), 한스 크랑클 (514골), 호베르투 디나미테 (512골). 페렌츠 베네는 60, 70년대 모두 전성기를 보냈기 때문에 양쪽 수에서 제외.[113] 1964년의 데니스 로처럼 일시적으로 펠레보다 많은 골을 넣은 선수는 있었지만 펠레만큼 꾸준히 득점페이스를 유지했던 선수는 없다. 그나마 근접했던 선수가 지미 그리브스, 에우제비우 정도. 거기에, 데니스 로지미 그리브스같은 경우에는 펠레, 에우제비우와 달리 최전방 공격수였다.[114] 1986년 월드컵 당시 마라도나와 붙었던 조민국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 룰이었으면 서너 명은 퇴장당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그렇게라도 버텨야 했던 거지. 난 당시 수비에 서서 마라도나의 플레이를 정면에서 생생히 봤어요. 이야, 저 정도 갖다 받으면 부러졌겠다 싶었지. 그런데 태클을 피할 때 몸 중심을 살짝 띄우더라고. 그걸 어려서부터 접해왔던 선수다 보니 상대가 들어올 타이밍을 다 알고 충격을 완화하더만. 그리고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게 무슨 종아리가 우리 허벅지만 한 거야. 나도 한 허벅지 했는데. 가만 보니 정강이 보호대를 앞뒤로 했더라고. 얼마나 견제가 심했으면 저렇게까지 했나 싶었죠."[115] 2001년 본즈는 73홈런을 기록해서 역대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갖고 있다. 반면 1920년의 루스는 54홈런을 기록했는데 웬만한 팀 전체의 홈런을 혼자 때려낸 수준이었고 1923년의 루스도 타율 .393을 기록하며 WAR 15를 기록,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WAR 역대 1위를 기록하였다.[116] 대부분의 선수들은 친선경기를 공식 골 기록에 포함시키지 않는다.[117] 다만 상술되었듯 레알 마드리드가 2주간 리그를 쉬었다든가, 당시의 컵대회 위상은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다든가 등도 생각해 보긴 해야 한다.[118]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도 생전에 가끔 이런 경향이 있어서 현 시대 축구팬들에게 반감을 살 때가 있었는데 펠레는 훨씬 더 심하다. 오죽하면 펠레가 디스하는 선수들이야말로 펠레의 진짜 라이벌 자격이 있는 선수들이라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119] 다만 네이마르가 메시와 동료가 된 이후에는 메시에 대해 현역 최고의 선수라는 코멘트를 종종 남기는 편이다. 당장 리오넬 메시 항목만 가 봐도 메시는 기술적으로 볼 때 자신과 동급 운운하는 코멘트가 달려 있는 판이니 말이다. 메시가 바르셀로나의 브라질리언들과 매우 친하게 지내다보니 브라질에서의 평가가 상당히 좋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호나우지뉴가 갓 데뷔한 메시를 팍팍 밀어 준 건 이미 유명한 일이고, 네이마르와의 관계를 보면 거의 의형제 수준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이게 다 브라질리언 슈퍼스타에 대한 펠레의 애정이 지나쳐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라 할 수 있다.[120] 하지만 이것도 펠레의 저주와 마찬가지로 기자들의 편집 조작이 있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브라질 국민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평화적 시위에 피해를 주고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는 말도 했으나 이 부분은 방송되지 않았던 것. 결국 시간이 지나서 '과격 시위와 국가대표팀에 대한 야유에 반대한 것이었을 뿐이며 평화롭기만 하다면 브라질 시위를 지지한다'라고 진화 성명을 냈지만 이것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는 여기[121] 성격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펠레가 직접 장례식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는 펠레 본인이 밝히기로는 1996년에 아버지 돈지뉴가 사망하였을 때에도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고... 아마 펠레가 장례식장에 가지 않는 이유는 어린 시절에 동굴이 무너져서 친구를 잃고 친구의 시체를 꺼내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비행기 사고로 죽은 파일럿의 시체를 보고 트라우마에 빠져 파일럿을 포기함은 물론 한참을 고생했었던 과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심약한 소년이어서 10대 초반까지 악몽을 꾸면 어머니 품에 안겨서 응석을 부렸다고 한다.[122] 펠레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때 이적료로 백지수표를 준비했다는 구단도 있다고 한다.[123] 그 밑의 등급인 CBE, OBE, MBE 등(얘들은 작위가 아니라 그냥 훈장이다)은 영국 축구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많이 들어있다. CBE에는 빌리 라이트, 앨런 시어러. OBE에는 바비 무어, 데이비드 베컴, 라이언 긱스, 아르센 벵거(외국인 명예훈장). MBE에는 스티븐 제라드, 페테르 슈마이헬(외국인 명예훈장), 헨릭 라르손(외국인 명예훈장) 등이 있다.[124] 단, Knight Bachelor를 따로 받은 경우는 Sir를 붙인다. CBE + Knight Bachelor로 알렉스 퍼거슨, 바비 롭슨, 보비 찰튼. MBE + Knight Bachelor로 제프 허스트가 있다.[125] 1964년 1월에 있었던 그레미우와의 경기에서 펠레는 해트 트릭을 기록했지만 산토스와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였던 지우마르가 퇴장을 당하였고, 펠레는 남은 시간을 골키퍼로 뛰었다. 여기서 펠레는 2개의 극적인 선방을 기록하며 팀을 브라질 컵 결승으로 이끌었다고. 본격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활약[126] 엑소시스트 시리즈의 진주인공 메린 신부로 유명한 바로 그 배우이다.[127] 발롱도르가 피롱도르로 합쳐지기 전에 수상자를 선정하던 기관이다[128] 구체적으로 1958년~1961년까지 4회, 이후 1963, 1964, 1970년 수상했을거라는 것이다. 이 가정대로면 펠레는 17살의 최연소, 4회의 최다연속, 7회의 최다수상 기록까지 세우게 된다.[129] 라 노체 델 디에스(10시의 밤)[130] 펠레가 첫 초청자였다[131] 펠레가 뛰던 당시에는 공식적인 영 플레이어 상은 없었다. 실제로 수상했다면 현재까지 단연 최연소 수상 기록.[132] 디에고 마라도나와 공동수상[133] 스포츠계 인물 중에서는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134] 제프 허스트와 타이기록[135] 현 FIFA 클럽 월드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