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13 07:33:29

아우베르투 산토스뒤몽


파일:SBT 로고.svg 선정 위대한 브라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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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7월 11일 브라질의 민영 방송사 SBT가 BBC의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을 바탕으로 브라질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브라질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df00> 1위 2위 3위 4위 5위
시쿠 샤비에르 아우베르투 산토스뒤몽 브라질 황태녀 이자베우 제툴리우 바르가스 주셀리누 쿠비체크
<rowcolor=#ffdf00>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일톤 세나 오스카르 니에메예르 페르난두 카르도주 펠레 치라뎅치스
11위~100위
<rowcolor=#ffdf00>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이르마 두우시 에지르 마세두 시쿠 아니지우 호나우두
<rowcolor=#ffdf00>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데르시 곤사우베스 지우다 아른스 호베르투 카를루스 주제 알렝카르 네이마르 주니오르
<rowcolor=#ffdf00>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에이키 바치스타 후이 바르보자 프레이 가우방 마누에우 자싱투 코엘류 오즈와우두 크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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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라스 말라파이아 페드루 2세 치쿠 멘지스 루이스 곤자가 헤나투 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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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지소자 파드리 시세루 지우마 호세프 탄크레두 네베스 루시아누 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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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데미르 산치아구 에우데르 카마라 헤나투 아라강 호드리구 파루 슈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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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샤두 지 아시스 루앙 산타나 이베치 상갈루 엘리스 헤지나 마우아의 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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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 세이샤스 레오네우 브리졸라 치리리카 구구 리베라투 호제리우 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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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지파이바 네투 카를루즈 드루몽 지안드라지 줌비 호미우두 히베이루 소아리스 파울루 프레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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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 카마르구 몬테이루 로바투 호베르투 마리뉴 마르쿠스 마르셀루 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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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쿠 아마시우 마자로피 데데 울리시스 기마랑이스 헤이나우두 지아니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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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루스 샤가스 조나스 아비비 카시아스 공작 안토니우 에르미리우 지모라이스 칸지두 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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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아 블랑쿠 미셰우 텔로 가린샤 람피앙 클라우지아 레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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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카를루스 프레스치스 마르쿠스 폰치스 페르난두 콜로르 주제 세하 소크라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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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루이스 다테나 호나우지뉴 조엘마 치쿠 부아르키 샤크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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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두 바치스타 윌리암 보나르 카주자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앤더슨 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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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베르투 랑데우 지모라 호마리우 조르지 아마두 호나우지 골리아스 이타마르 프랑쿠
<rowcolor=#ffdf00>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호베르투 주스투스 아나 파울라 발라당 비탈 브라질 조 소아리스 마리아 다페냐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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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ddd> 아우베르투 산토스뒤몽
Alberto Santos-Dumont
파일:알베르토 산티스뒤몽.jpg
출생 1873년 7월 20일
사망 1932년 7월 23일 (향년 59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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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비행사, 발명가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브라질의 비행사. 라이트 형제와 더불어 비행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2. 생애

그의 아버지 헨리크는 프랑스계 브라질인 2세로서 파리에서 대학 졸업 후 브라질에 철도를 건설하였다. 이후 거대한 커피농장을 운영하여 브라질의 3대 커피왕이라 불릴만큼 부자가 되었다. 이런 부잣집에서 자란 산투스 뒤몽은 1888년 15세의 나이로 상파울루에서 15세의 나이로 상파울루에서 첫 유인 비행을 보았고, 이로 인해 그는 비행에 관심이 많아졌다. 1891년 뒤몽 가족이 파리로 여행을 간 후, 산투스 뒤몽은 기계 분야, 특히 " 내연 기관 "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엔진이 없는 풍선 제작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나중에 비행기 제작으로 이어졌다. 산투스뒤몽이 비행기 제작에 열을 올린 이유 중 하나는 프랑스의 소설가 쥘 베른의 작품을 읽어서 있다. 쥘 베른의 소설에 매료된 산투스뒤몽은 꼬인 고무 스프링으로 구동되는 프로펠러로 동력을 얻는 연과 소형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성인이 된 산투스뒤몽은 프랑스로 이주하였고, 피라에 정착하여 기술 및 발명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토스뒤몽은 파리에서 항공 연구와 실험에 전념하며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18살이던 1891년 당시 그는 파리 전체에 단 두 대밖에 없던 푸조 자동차의 오너이기도 했다.

이후 그는 최초의 동력 비행선을 설계, 건조, 비행했고 1901년 도이치 상을 수상했는데 당시 그의 비행선 6번을 타고 에펠탑 주변을 비행하면서 세계적인 유명인이 되었다. 이 업적으로 인해 유럽과 전 세계에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됐고, 항공 실험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파일:Alberto-Santos-Dumont-flights-Brazilian-Europe-airplane-1906.webp
그의 비행기 산토스뒤몽 14-bis

이후 산투스-뒤몽은 비행선만이 아니라, 날개가 있는 무거운 공기의 비행체(비행기)에 도전하였다. 1906년 14-bis (포르투갈어/프랑스어에서는 종종 Oiseau de proie, “맹금류” 같은 별명)라는 비행기를 제작하였다. 이 비행기는 1906년 10월 23일, Bagatelle 운동장(파리 근교)에서 약 60미터를 높이 2-3미터 정도를 날았다. 이어서 11월 12일에는 약 220미터를 높이 약 6미터에서 비행하였다. 이 비행은 프랑스 항공 클럽(Aero-Club de France)의 공식 기록원들이 목격했으며, Fédération Aéronautique Internationale(FAI) 인증도 받았다. 이 비행은 스스로 이륙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발사 장치나 레일 등을 이용하지 않고 비행기가 자체 동력으로 활주하여 떠오른 것으로 인정되었다. 이 점이 특히 브라질 내에서 “산투스-뒤몽이 최초의 실용적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주장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데모이젤(Demoiselle)”이라는 소형 경비행기를 설계하였다. 1909년에 이 비행기는 무게가 가볍고 단순한 구조였으며, 비교적 조종하기 쉬운 기체로 평가됨과 동시에 항공 대중화 가능성도 보였다. 이로인해 벨 에포크시대에 꽤 유명 인사였고, 사교계에도 참여했다. 그의 조종 가능한 비행선으로 파리 상공을 날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언론 매체에서도 자주 다루어졌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전후로 비행기 기술이 전쟁용으로 많이 이용되자, 산투스-뒤몽은 기술의 군사화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가졌고,[1] 그의 이상주의적 성향과 평화주의적 태도가 강해졌다.

1928년에 브라질로 돌아온 산투스뒤몽은 거의 은둔 생활을 하였다. 브라질로 돌아오기 이전인 1927년 5월, 그는 프랑스 항공 클럽으로부터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을 기념하는 연회를 주재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지만, 우울증으로 인해 거절하기도 했다.

산투스뒤몽이 귀국한 브라질은 정치 갈등이 매우 심했고, 특히 제툴리우 바르가스가 사실상 무력으로 정권을 차지하자 상파울루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시위 중 학생 몇 명이 경찰에 의해 사망하였고, 이는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해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이 때 바르가스 정권은 시위를 막겠다면서 비행장을 폭격하기도 했다. 이 모습을 본 산투스뒤몽은 우울증이 더 심해졌다. 결국 산투스뒤몽은 1932년 7월 23일, 브라질 상파울루 주 구아루자 소재 Grande Hôtel La Plage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3. 여담

  • 1936년 10월 16일, 리우데자네이루 최초의 공항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1976년 국제천문연맹(IAU)은 산투스-뒤몽의 이름을 달 분화구에 명명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영예를 얻은 유일한 남미인이다.
  • 이름과 교육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국적은 브라질이었지만,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2]
  • 유명 시계공 루이 까르띠에와는 친구 관계로, 까르띠에는 산토스뒤몽의 이름을 따서 시계 브랜드를 제작하기도 했다.

[1] 사실 이는 비단 산투스뒤몽만의 우려가 아니었다. 많은 항공 기술자들이 항공 기술의 군사화를 우려했고 이게 현실화되자 일부는 항공업계를 영원히 떠나버렸다. 프랑스 항공 기술의 선구자였으나 동생의 죽음과 비행기의 군사화에 트라우마를 격고 항공 사업에서 자동차 사업으로 전환한 가브리엘 부아쟁이 대표적인 케이스.[2] 이름 아우베르투와 모계성 산투스는 포르투갈어인 반면 부계성 뒤몽은 프랑스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