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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69947><colcolor=#ffd700> 브라질 제국 제2대 황제 페드루 2세 Pedro II | |
이름 | 페드루 지 아우칸타라 주앙 카를루스 레오포우두 사우바도르 비비아누 프란시스쿠 샤비에르 지 파울라 레오카지우 미게우 가브리에우 하파에우 곤자가 (Pedro de Alcântara João Carlos Leopoldo Salvador Bibiano Francisco Xavier de Paula Leocádio Miguel Gabriel Rafael Gonzaga) |
출생 | 1825년 12월 2일 |
브라질 제국 리우데자네이루 | |
사망 | 1891년 12월 5일 (향년 66세) |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 |
재위 | 브라질 제국의 황제 |
1831년 4월 7일 ~ 1889년 11월 15일 | |
배우자 | 양시칠리아의 테레사 크리스티나[1] (1843년 결혼 / 1889년 사망) |
자녀 | 아폰수, 이자베우, 레오포우지나, 페드루 |
아버지 | 페드루 1세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네 |
형제 | 마리아 2세, 미겔, 주앙 카를루스, 자누아리아, 파울라, 프란시스카 |
종교 | 가톨릭 |
서명 |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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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 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관대왕(O Magnânimo)이라는 별명이 붙었다.2. 생애
아버지가 포르투갈의 페드루 4세와 브라질의 페드루 1세를 겸임하면서 브라질 국민들이 포르투갈과 통합될 것을 우려해 전쟁이 일어나자, 갑작스레 황위에서 퇴위하면서 5살에 황제가 되었다. 포르투갈 왕위는 페드루 2세의 누나인 마리아 2세가 이었다.1824년 헌법에 의거해 만 15세 미만의 황제가 즉위 시, 25세 이상의 황족이 섭정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적합한 인물이 없어 3명의 섭정들이 정치를 했다.[2] 당시 브라질은 복고주의, 급진 자유주의, 온건 자유주의파 등 3개의 정치세력의 갈등으로 섭정 기간 동안 여러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했다.
1831년 10월, 법무부 장관인 지오구 안토니우 페이조(Diogo Antônio Feijó)[3]는 국가 경비대를 설립했다.[4] 1840년부터는 친정 정치를 시작했고, 1841년에 중앙 집권화를 시도하다가 반발을 사자 의회를 해산했다. 이에 반발하여, 1842년에 상파울루, 미나스제라이스 등에서 봉기가 일어났다.[5]
1843년에 양시칠리아 왕국의 공주 테레사 크리스티나[6]와 결혼해 2남 2녀를 두었으나, 아들들은 모두 일찍 죽었기에 장녀 이자베우(Isabel) 공주가 후계자가 됐다. 그녀는 페드루 2세의 외유 기간 중에 3번 섭정을 맡았으며, 3번째 섭정 기간엔 노예제 폐지를 전결했다.
1864년에 파라과이 전쟁이 일어나자 1865년에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동맹 조약을 체결했으며, 이후 승전으로 엄청난 국민의 인기를 얻었다. 1871년에 제정에 반하는 공화당이 결성됐는데, 군부가 적극 참여했다.[7] 하지만, 1889년의 쿠데타 이전까지 공화정 수립과 관련된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사실 군부가 원한 것은 보나파르티즘적 군사 독재 국가이지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당시 브라질 사람들은 빈부를 막론하고 노예 소유가 일반화되어 있었으나, 페드루 2세와 이자베우 황태녀는 노예제 폐지를 추진했고, 1886년에 사라이바 코테지피 법[8]을 통해 60세 이상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뒤이어 1888년에 노예제를 완전 폐지[9]했다. 노예제 폐지에 불만을 품은 대지주들이 군부를 사주, 1889년 11월 15일 데오도루 다 폰세카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강제로 퇴위 후 브라질에서 추방당했다. 당연히 군부와 대지주 이외에 대다수 민중으로부터는 지지받지 못한 쿠데타였으며, 쿠데타에 참가한 세력도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측근들이 쿠데타 세력을 진압할 것을 간언했다. 그러나 페드루 2세는 브라질을 분열시킬 결정이라는 이유로 거절하고 군부의 요구를 수용하여 자발적으로 브라질을 떠났다. 그 후 황제는 사위의 나라인 프랑스로 망명하여 호텔을 전전하며 살다가 66세로 사망했다.
장례는 프랑스 정부에서 대신 국장으로 치러주었는데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던 군주를 강제로 쫓아낸 후 망명지에서 객사시킨 행위에 대한 후폭풍이 두려운 나머지 공화정부는 조문단을 보내지 않고 장례식 언급도 금지하였다. 하지만 황제의 공적은 황제를 쫓아낸 공화 정부도 부정할 수 없었거니와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군주였기 때문에, 사후에도 국민들의 여론은 황제의 유해를 브라질로 가져오기를 원하였다. 결국 1921년 황제의 유해를 포르투갈에서 가져와 현재는 브라질에 묻혀 있다. 그의 유언은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브라질의 평화와 번영을 빈다는 것이었다.
3. 평가
페드루 2세는 공화국 직전의 군주이지만 훌륭한 내치와 업적, 노예제 폐지 추진 등으로 인해 브라질에서 매우 평가가 좋은 지도자다. 페드루 2세를 강제 퇴위시키고 세워진 공화 정부는 민주적이지 않았고[10] 이후로 브라질은 페드루 2세의 마지막 숙원이었던 토지개혁을 하지 못한 채 심심하면 쿠데타가 일어난 데다 경제 위기와 헌정 위기까지 여러 번 있었다. 페드루 2세는 유능한 행정가였고, 심지어 본인이 군주제를 계속 유지할 의지도 없었다. 페드루 2세에게는 이자베우 공주가 후계자로 있었고 딸을 굉장히 유능하다고 인정하였으나, 브라질의 분위기에 여황제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고 실제로도 그랬다.헌법에서 여성 후계자를 제한하는 내용은 없었지만 이자베우 공주 본인부터가 제위 계승을 원하지 않았고 지지세력을 만들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딸 모두 페드루 2세의 사망과 함께 자연스레 브라질의 제정도 사라질 것이라 믿었다. 또한 이자베우 공주가 프랑스 귀족과 결혼한데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점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브라질에서 페드루 2세에 대한 여론이 좋은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페드루 2세가 군주제를 유지할 의지가 없었던 이유는 아버지 페드루 1세가 고국 포르투갈을 배신하고 브라질을 독립시켜서 브라질 제국을 건국하면서 브라질 의회에 의해 퇴위되기까지 길지 않은 치세 동안 브라질 내외부의 정치적 외교적 분쟁에 휘말린 극도의 불안정한 모습을 지켜봐온 것도 있고, 자국인 브라질은 본인이 퇴위하기 전까지는 본인의 치세에서 안정화되기는 하였으나 모국인 포르투갈은 누나 마리아 2세와 숙부 미겔 1세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어린 시절부터 봐 온데다 누나 마리아 2세의 죽음 이후 외조카 페드루 5세-루이스 1세 때 잠시 안정화되었지만 자신의 말년에 외조카손자 카를루스 1세 때부터 포르투갈 정치권이 정치적 외교적으로 다시 갈등과 불안정에 휩싸이는 것을 보면서 군주제 자체에 회의감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파라과이 전쟁에서의 일은 계속 지탄받는다. 파견된 사령관이 승리도 확실시 되었으니 협상 맺고 끝내자고 주장함에도 자존심때문에 파라과이를 밟아버리라고 지시했기 때문.
4. 기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고종사촌 형이다. 어머니 마리아 레오폴디네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고모다. 또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들 나폴레옹 2세의 이종사촌 동생이다.
5. 가족관계
황후 테레사 크리스티나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두었으나 왕자인 아폰수와 페드루는 모두 2세로 단명하였다. 거기다 둘째딸인 레오폴디나도 아들 4명을 낳고 만 23세로 단명해서 이자베우 황태녀만 75세로 유일하게 당대 기준으로는 장수했다.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아폰수 황태자 (Afonso, Prince Imperial) | 1845년 2월 23일 | 1847년 6월 11일 | |
1녀 | 이자베우 황태녀 (Isabel, Princess Imperial) | 1846년 7월 29일 | 1921년 11월 14일 | 가스통 도를레앙[11] 슬하 3남 1녀[12] |
2녀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공자비 레오폴디나 (Leopoldina, Princess Ludwig August of Saxe-Coburg and Gotha) | 1847년 7월 13일 | 1871년 2월 7일 | 루트비히 아우구스트 폰 작센코부르크고타[13] 슬하 4남[14] |
2남 | 페드루 아폰수 황태자 (Pedro Afonso, Prince Imperial) | 1848년 7월 19일 | 1850년 1월 9일 |
현재 바수라스 계통의 수장은 베르트랑[19]이고[20] 페트로폴리스 계통의 수장은 페드루 카를루스[21]이다.[22]
6. 창작물에서의 묘사
- 문명 시리즈
문명 5와 문명 6에서 브라질의 지도자로 등장하는데, 이 시리즈에서 브라질이라는 문명은 5편에서 처음 나오므로 아직까지 브라질의 유일한 지도자인 셈이다. 그가 등장하는 창작물은 이게 가장 유명하며, 이 악마의 게임 덕에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페드루 2세가 이 타국에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5에서의 모습은 말년의 초상화에서 따왔고 6에서는 젊은 시절의 모습인데 5편과 달리 머리는 길고 어깨는 좁아져 동화에나 나올 법한 꼴이 되었다. 그래도 최약체급이던 전작에 비해서는 훨씬 강한 문명을 이끌게 되었다.
- Victoria 시리즈
Victoria II에서는 인물을 묘사하지 않는 본작의 특성 상 직접적인 등장은 없으나, 브라질 제국은 게임 시작시 섭정 패널티를 가진 채 시작하며, 이는 랜덤한 시간이 지난 뒤 사라진다.
Victoria 3에서 브라질의 초기 국가원수로 나온다. 지식인 소속에 꼼꼼함 트레잇이 있어 군주로서의 성능은 좋은 편이다. 하지만 남미 팩 추가 이후 브라질의 난이도가 증가하고 군주제 관련 일지가 추가되어 군주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부정적인 점수가 쌓이면 역사대로 퇴위당한다.
[1] 여담으로 그녀가 시집오면서 폼페이 유적의 프레스코를 포함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물들도 가져왔지만, 불행히도 2018년 9월 2일 발생한 브라질 국립박물관 화재 사고로 소실당했다.[2] 어머니도 1826년에 사망했다.[3] 1835~1837년까지 국왕의 섭정을 맡기도 했다.[4] Guarda Nacional; 법무부 산하 조직이며 헌병의 성격이 강했다.[5] 자유주의 폭동으로 불리며 왕실의 보수주의적 체제와 지방의회의 자유를 제한하자 반발하여 발생했다. 전직 섭정이던 지오구 페이주도 참여했다.[6] 양시칠리아 왕국의 2대 국왕 프란체스코 1세의 7녀이자 페르디난도 2세의 여동생, 이사벨 2세의 이모이기도 하다. 페드루 2세에게는 5촌 이모뻘이었다. 어머니 마리아 레오폴디네의 외사촌. 또한 부황 페드루 1세의 이종사촌이기도 하다.[7] 파라과이 전쟁을 계기로 브라질군이 창설되었고 그 영향력이 급증했다.[8] '60세법'이라고도 한다.[9] '황금법'이라고도 한다.[10] 애초에 이 공화정부는 황제가 추진한 노예제 폐지를 비롯한 개혁들에 반대해서 반란을 일으켜 세워진 것이었다. 황제는 이 쿠데타를 짓밟을 수 있었음에도 국가를 분열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폐위를 받아들이고 브라질을 떠났다.[11] 부르봉 왕조 방계 가문인 오를레앙 가문 출신. 루이필리프의 손자이다.[12] 차기 명목상 제위 계승권자 페드루(1875 ~ 1940) 포함.[13] 페르난두 2세의 조카(동생 아우구스트의 차남)이자, 불가리아 왕국 초대 차르 페르디난트 1세의 작은형이다. 어머니 클레망틴 도를레앙이 루이필리프의 4녀이기에, 언니 이자베우의 남편인 가스통 도를레앙과는 사촌간이다.[14] 장남 페드루 아우구스투(1866 ~ 1934) 포함. 페드루는 친가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이 아닌 외가인 브라질 황가를 따랐다.[15] 생몰년도: 1909년 ~ 1981년[16] 루이스는 1920년에 어머니 이자베우보다 1년 일찍 사망했다. 루이스는 양시칠리아 국왕 페르디난도 2세의 손녀인 마리아 디 그라치아와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장남이 페드루 엔히크이다.[17] 생몰년도: 1913년 ~ 2007년[18] 귀족과 결혼한 아버지와 달리 양시칠리아 왕가 출신인 마리아 데 라 에스페란사[23]와 결혼했다.[19] 생몰년도: 1941년 ~[20] 페드루 엔히크의 3남, 형 루이스가 사망한 2022년에 수장이 되었다. 미혼이고 자녀가 없어 동생 안토니우(1950년 ~ )가 후계자다.[21] 생몰년도: 1945년 ~[22] 페드루 가스탕의 장남, 두 아들이 있고 장남 페드루 치아구(1979년 ~ )가 후계자다. 여담으로, 현재 포르투갈 브라간사 왕가의 수장인 두아르트 피우(1945년 ~ )는 이 페드루 카를루스의 고종사촌이다.
[23]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이모이자 페드루 엔히크의 외사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