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펠레
1. 개요
펠레는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수십년 전에 은퇴한 선수인 만큼 여러 의문점과 비판 또한 많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아래는 이와 관련해 펠레를 다방면에서 보고,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한 서술이다.1.1. 주요 경기 활약상
중요 경기에서의 활약도 또한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각종 대회 결승전에 출전하면 스타 본능을 발휘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주인공이 되곤 했다. 펠레가 커리어 내내 국가대표팀과 클럽을 통틀어 출전한 결승전은 총 14회인데 단 2번을 제외하면 모두 소속팀에 우승을 안겨주었고, 본인은 총 23경기 동안 29골을 넣었다. 그 안에는 FIFA 월드컵 결승전 2경기의 3골도 포함되는데, 이는 바바, 지네딘 지단, 제프 허스트와 더불어 갖고 있는 월드컵 결승전 득점 2위 기록[1]이며 도움 2개까지 포함한다면 월드컵 결승전 최다 공격 포인트 기록이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 3경기 3골 2도움, 인터컨티넨탈컵 3경기 7골 2도움 등 다른 주요 결승전에서의 활약상들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대륙 레벨 이상의 결승전들을 종합하면 8경기 13골 7도움으로 경기 당 2.5공격 포인트라는 엄청난 기록도 남기게 된다. 더 나아가 월드컵 결승전, 대륙별 최상위 클럽대항전 결승전, 클럽 월드컵 결승전에서 모두 3골 이상을 넣어본 선수는 축구 역사에서 펠레가 유일하다.[2]거기다 현재도 깨지지 않은 단일 월드컵 최다 도움(6도움)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58년에 기록한 토너먼트 6골은 동 대회의 쥐스트 퐁텐의 7골에 이어 단일 월드컵 토너먼트 최다 골 2위 기록[3]이며, 월드컵 결승전 통산 최다 도움(3도움) 및 최다 공격 포인트(6개) 기록도 가지고 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A매치 77골 중 유럽, 남미 국가가 71골로 그 비율이 무려 92%이며 그 상대국들은 대부분 유럽, 남미 중에서도 강호에 속한다. 당시 브라질은 친선 경기도 주로 남미 국가들, 유럽 상위 국가들과 잡았고 월드컵도 16개국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데다, 아시아, 아프리카, 북중미 같은 상대적 약체 대륙들에게 티켓을 1장 이하로 배분했기 때문에 강팀들 밖에 상대할 수 없었고, 강팀 상대 득점 비율도 매우 높았다.
또한 100년에 가까운 월드컵 역사에서 통산 20개 이상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선수는 펠레와 메시가 유일하다. 토너먼트로 한정해도 출전한 6경기에서 모두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으며 도합 7골 5도움으로 경기 당 평균 2개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4]
1.2. 전술
자료 출처: 축구 그리는 광개토TV
펠레의 위상과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자 낮은 평가를 내는 의견들의 대표적인 근거라고 볼 수 있다. 펠레가 뛰었던 시대와 현 시대의 단순 골 기록 비교는 큰 무리가 있다. 당시 유럽 주요 리그의 경기 당 평균 득점은 1970년대 이후와 비교하면 상당히 높았다. 1970년대 이전은 토탈 풋볼 붐 이전이기 때문에 선수들의 뛰는 거리가 지금의 두 배 가까이 적었다. 지역 방어 개념이었고 압박이 비교적 적었다. 이로 인해 수비수의 개인 기량만이 수비의 요소가 되는 경우가 많아 골이 많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고 축구판에는 토탈 풋볼의 바람이 불면서 고도의 압박 전술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자료 출처: 축구 그리는 광개토TV
브라질 리그 역시 그런 경향이 나타났는데, 펠레 또한 수비 전술이 발달한 축구판에서 전과 같은 득점력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1960년에서 1970년대로 갈수록 브라질 리그의 수비력 수준이 상향되는 것에 반비례해서 펠레의 득점이 적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브라질 리그 평균실점이 3.66에서 1.91까지 절반 가까이 떨어지는 동안 펠레의 경기 당 득점은 1.63에서 0.37까지 80%가량 심하게 떨어졌다. 특히 1966년 월드컵에서의 부상은 펠레가 지녔던 신체능력을 다소 앗아간 때이기도 하다. 노쇠화와 부상으로 인한 신체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펠레가 전과 같지 않은 득점력을 보였고, 마침 수비 전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가 자신의 최전성기였으며,[5] 이는 펠레가 더 많은 득점을 기록하는데 이점이 되었다.
그러나 위는 득점 기록에 대한 피상적인 비판이고 이걸로 펠레의 실력 자체가 현대에서 뛰면 뒤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하는 건 섣부르다. 과거 축구에서 득점 난이도가 쉬웠다는 것과 펠레의 전술 이해력은 별개의 문제다. 당시 브라질의 1970년 월드컵 대표팀의 공격수들 펠레, 토스탕, 자이르지뉴, 호베르투 히벨리누 네 명은 다른 공격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기는 했지만 모두 플레이메이커 성향의 선수들이었는데, 이들 중 4-2-4에서 전방 플레이메이커(10번) 역할을 맡을 선수로 펠레가 선택되었다. 이 위치는 파트너 스트라이커(토스탕)와는 다르게 단순히 공격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으로 내려와 미드필더들을 지원하고, 수비에도 가담하는 전체적인 경기 조율의 역할을 맡는다. 공격수의 수비 가담 즉, 위에서 펠레의 기록을 비판할 때 이야기한 토탈 풋볼의 이론 일부를 먼저 구현했다는 말이 된다. 기술 뿐만 아니라 포지션의 단조로운 역할에서 벗어나 유기적인 플레이가 가능한 축구 지능도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위에서 올려진 펠레의 수비 영상이나 인터넷에 도는 펠레의 볼터치 영상들을 보면 그는 수비 가담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미헬스의 토탈 풋볼이 축구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탈 풋볼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펠레 시대에도 축구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었으며, 당시 유럽 감독들이 카테나치오, 토탈 풋볼 등 전술을 발전시킨 목적이 펠레와 남미 선수들의 개인기에 대항하기 위해서인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득점 기록만 떨어졌을 뿐 펠레는 1971년부터 남미 올해의 선수 랭킹에 은퇴 시즌까지 아무리 못해도 6위 안에는 들어 갔었고 적어도 펠레의 은퇴 이전엔 그의 소속팀 산투스에 10위 안에 드는 선수도 없었다.
1.3. 분석 환경
미디어의 발달은 상대 팀, 상대 선수에 대한 분석을 강화시켰다. 해당 클럽에서 뛰는 주요 선수를 직접 상대하거나 경기장에서 직접 플레이를 보지 않아도 상대의 장점과 약점, 파훼법을 연구하기 쉽게 되었다. 그 결과 그동안 뛰어난 공격수들을 잘 막지 못했던 수비수들에게 큰 득이 되었고, 수비수들의 기량은 전반적으로 크게 상향되었다.문제는 그 시점이 언제부터인지를 알아봐야 하는데, 펠레가 선수로 활동했을때는 손쉽게 영상을 복사해서 구할 수 있던 때가 아니었다. 비디오 테이프는 비싸서 방송이나 기업용으로나 썼기 때문에 주로 필름으로 촬영된 영상을 공수해서 분석하는 식이었는데 이 당시에 필름이 비디오 테이프보다 훨씬 대중적이었어도 마냥 싼 것은 아니었으니 나름대로 비용상 수고는 들었다 할 수는 있겠다.
1.4. 남미 클럽들의 수준
첫 대회인 1960년부터 펠레가 남미에서 선수 생활을 끝낸 1974년까지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남미 클럽들의 성적은 15전 8승 7패였으며, 우승 횟수도 남미가 8회, 유럽이 7회로 유럽을 상대로 근소 우세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유럽 클럽들은 남미 클럽들을 상대로 원정 경기에서 승리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반면에 남미 클럽들은 유럽 클럽들을 상대로 치른 원정 경기에서 해당 시기에 3번의 승리를 거뒀다. 당시 원정 경기가 현 시대의 원정 경기보다 피로감이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남미 클럽들이 유럽 클럽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봐도 무방한 셈.당시 남미 축구 수준이 마치 펠레의 산투스 이외에는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CA 페냐롤과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 등의 경우도 산투스 못지 않은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유럽 리그 못지 않은 경쟁력을 보여줬었다. 특히 펠레의 산투스와 알베르토 스펜서, 페드로 로차의 페냐롤은 인터컨티넨탈컵에서 수차례 우승하며 1960년대 최강 클럽임을 입증했다. 거기다 해외 이적에 보수적이고 보스만 룰이 없던 시기라 남미 최고의 선수들은 대부분 자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브라질 리그 선수들로 구성된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을 무려 3번이나 우승했으니 남미 리그 수준, 그 중에서도 특히 브라질 리그의 수준이 당시 유럽 리그의 이하라 보긴 어려웠다.
또한 펠레는 산투스와 브라질 국대로 전세계의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실신시킨 경력의 소유자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다수의 마이너 국제대회에서 우승컵을 쓸어담았으니 유럽 커리어가 없는 펠레에 대한 의문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유럽 클럽들과 130경기, 그것도 전부 원정경기에서만 144골을 넣은 기록 또한 펠레가 상대를 가리는 선수가 아니었다는 걸 의미한다. 당시 유럽 축구계에 펠레를 능가하는 인물도 없었다. 에우제비우, 바비 찰튼, 루이스 수아레스 등 당시 유럽에서 날린다는 선수들 대부분이 국제 대회에서 다들 펠레보다 하수 인증을 했다.
한편 최고의 선수들이 모두 유럽으로 쏠리고 있는 현재의 유럽 축구와 비교한다면 밀리는 것이 맞다. 현재의 축구계는 보스만 룰 이후 유럽 빅클럽 위주로 판이 돌아가게 되면서 스타들이 모여 있는 형세이고 현재 UEFA 챔피언스 리그의 경기 수준, 상금은 FIFA 월드컵마저 상회한다.[6] 결국, 펠레를 포함한 20세기의 모든 선수들은 챔피언스 리그와 리그에서 현재의 빅리그 선수들보다 인터넷도 없던 느슨한 환경에서 경쟁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유럽 리그들이 남미는 물론이고 세계의 우수한 선수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 이후로는 질적으로 유럽 리그가 남미 리그를 압도하고 있다.[7]
즉, 당시 남미 리그(및 유럽 리그)의 수준은 현재의 유럽 리그처럼 모든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뛰는 별들의 전쟁은 아니었지만 현재의 남미 리그처럼 남미 유망주들과 유럽에서 경쟁력이 애매한 선수들 위주로 돌아가는 2군급 리그 수준보다는 높았다고 볼 수 있다. 펠레는 이 남미에서 최고 수준의 팀인 산투스에서 뛰면서 산투스에 비견되는 경쟁팀과도 경기했지만, 대부분의 경기는 산투스보다 몇 수 아래인 상파울루 주립 리그 팀과 이루어졌다.
1.5. 주립 리그의 수준
브라질은 영토가 워낙 넓은데다 교통 시설이 열악하다보니 특이하게 각 주마다 주립 리그들이 먼저 창설되었고 그 이후 전국 리그가 늦게 창설되어서 주 단위와 전국 단위의 리그를 서로에 영향이 미치지 않는, 아예 별개의 리그로 운영하고 있다. 축구 선수들이 가장 많이 치르는 경기는 클럽 경기이고, 펠레의 득점 60% 이상이 다른 나라 선수들과는 다르게 주립 리그에서 나온 기록이다보니 이 주립 리그의 수준에 관해 논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제2의 전성기 시절의 호나우두가 브라질 축구협회에 펠레의 골 기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자세히 말하면 펠레가 전성기를 맞이할 당시에는 전국 대회가 창설 초창기였고 각 주립 리그의 챔피언들이 토너먼트 형식으로 붙었던 컵 대회 규모라 현재 같은 정규 리그가 아니었고,[8] 주로 뛰어야 할 리그는 주립 리그였다.
이렇게 되면 지역에 한정된 리그의 수준은 전국 단위 수준과 차이가 크다고 생각될 수 있으나, 당시 상파울루주의 수준을 고려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펠레 시절 상파울루주의 클럽들은 18차례의 전국 대회 중 12차레를 우승하며 다른 주립 리그들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역사적으로 상파울루 리그와 함께 브라질의 양대 주립 리그로 인정 받는 리우데자네이루 주립 리그가 그 사이 3회 우승에 그쳤다. 또한 브라질 국가대표팀 자리의 절반을 상파울루 주 선수들이 차지한 만큼 선수들 수준도 높았다. 펠레가 참가한 4번의 월드컵에서 브라질 국가대표팀을 보면 1958년 월드컵은 10명, 1962년은 13명, 1966년은 10명, 1970년은 11명이었다. 심지어 펠레가 뛰던 당시에도 이미 상파울루 리그는 주 자체적으로 4부 리그까지 있었으며 강등제도 존재했다. 큰 규모의 하부 리그 시스템을 갖췄다는 것은 그만큼 하위권 팀들과 주의 하부 리그 팀들도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다른 주들은 현재도 2부 리그까지만 보유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전국 대회 성적, 선수 수준, 리그 규모를 볼 때 당시 상파울루 리그가 다른 주립 리그들과 차별화된 평가를 받을 자격은 충분하다. 현재의 리그 형식처럼 전국에서 최고의 팀들을 뽑는 게 더 퀄리티가 있었겠지만,[9] 그와 비견될 수준을 갖췄다. 그러나 브라질 리그의 수준이나 형식은 크게 변화했고 라이트 팬들이 과거 시스템과 환경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는 브라질 전국 리그가 4부 리그까지 운영되고 있는데, 전국 1~4부 리그에 참가하지 못한 팀들 중 주립 리그와 주립 컵 대회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한 팀들에게 4부 리그 참가 자격을 주고 있다. 상파울루의 일부 팀들도 4부에 소속되거나 아예 전국 리그 참가 자격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과거 펠레 또한 4부 수준의 팀들과 경기해 쌓은 기록이라고 추측하여 주장하는 팬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1차원적인 추측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전체적인 브라질의 수준, 그 브라질 내에서 상파울루 리그의 위상도 다르고, 리그 시스템의 차이점도 알아봐야 하는 등 고려할게 많은데 지나치게 경솔한 생각이며, 그저 펠레를 깎아 내리고 싶은 악의적인 주장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주립 리그 관련 비판은 펠레가 과소평가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선을 지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저 추측만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라이트 팬들이 많다.
펠레의 통산 골 기록은 경기 당 1골에 근접하지만, 주립 리그가 아닌 전국 대회에서의 골 기록은 173경기 100골로 경기당 골 수가 통산 기록에 비해 떨어진다. 하지만 이 또한 원인이 따로 있다. 전국 리그는 펠레의 전성기가 끝난 1971년부터 출범했고 펠레의 전국 리그 출전 기록을 살펴보면 1971년부터 브라질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1974년까지의 출전 기록이 84경기로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60년대까지의 전국 대회 기록은 76경기 62골, 1966년 월드컵에서의 큰 부상 이전에는 전국 대회에서도 28경기 28골로 경기당 1골의 기록을 세웠다. 반면 1970년부터 1974년까지 5시즌 동안 전국 대회 기록은 97경기 38골로 펠레의 이름값에 확실히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때는 주립 리그에서의 득점율도 절반 이상이 감소했기 때문에 딱히 리그마다 차별적으로 활약한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또한 득점왕 횟수에서 주립 리그 득점왕은 11회지만 전국 대회 득점왕은 3회에 그친 것을 비판하는 경우도 있으나 당시 상파울루 주립리그 우승팀은 1959년~1968년 동안 전국대회였던 타사 브라지우에 4강까지 자동진출이었고 타사 브라지우 디펜딩 챔피언은 8강에 자동진출이었다. 주립리그 우승을 워낙 자주 하다보니 전국대회에서는 4강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서 득점왕 횟수가 적은 것이다.[10]
상파울루 리그를 대표하는 네 팀은 산투스와 상파울루, 파우메이라스, 코린치안스다. 이들은 전국 리그에서도 우승 횟수 1~4위를 모두 차지하여 브라질을 대표하는 팀들이기도 하다.[11] 이 네 팀은 유럽 6대 리그로 투어를 가기도 했으며 우수한 상대 전적을 거두었다.
상파울루 주 최상위 4팀 vs 유럽 6대 리그 상대 전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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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당대 라이벌
역대급으로 거론되는 축구 선수들은 대부분 시대의 정점 자리를 두고 엎치락 뒤치락하던 라이벌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50년대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 1970년대는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워가 시대를 양분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은 호나우두와 지네딘 지단이 선두에 있는 와중에 수많은 선수들이 두 선수를 위협하는 군웅할거 시대였다. 대부분 현재 위상에 비해서 당시 정점에 오른 기간이 짧은 편이다.1960년대의 펠레는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전설들 중 에우제비우, 잔니 리베라, 산드로 마촐라, 바비 찰튼이 실제로 펠레와 맞대결을 가졌음에도 패배하면서 레벨 차이를 느껴야 했고, 산투스와 남미의 패권을 다툰 CA 페냐롤의 에이스들인 알베르토 스펜서와 페드로 로차, 후안 호야, 아르헨티나의 호세 산필리포 역시 펠레와 비교하면 한 수 접어야했다.
펠레에 가장 가깝게 근접했던 당대 선수는 보타포구 FR의 가린샤다. 클럽에서 펠레와 가린샤는 펠레가 산투스 FC에 입단한 이후부터 같은 리그에서 경쟁했고, 국가대표팀에서 이들은 파트너로 출전하며 역대급 국가대표 활약상을 쌓았다. 둘이 함께 브라질의 월드컵 2연패를 달성한 직후엔 동일한 우승 횟수에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월드컵 최고의 단일대회 퍼포먼스 중 하나[12]를 선보인 가린샤의 우위였으나, 펠레가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우승으로 월드컵 3회 우승을 달성한 이후엔 커리어는 펠레의 우위, 단일 대회 퍼포먼스는 가린샤의 우위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가린샤의 포지션이었던 클래식 윙어는 골을 많이 기록할 수 있는 포지션이 아니었기에 득점 페이스만큼은 펠레가 독보적이었다. 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득점 기록에서 최정상을 다투는 수준이었다. 1964년의 데니스 로처럼 일시적으로 펠레보다 많은 골을 넣은 선수는 있었지만 펠레만큼 꾸준히 득점 페이스를 유지했던 선수는 없다. 그나마 득점이라는 기록 측면에서 근접했던 선수는 지미 그리브스, 에우제비우 정도. 그마저도 펠레나 에우제비우와 다르게 데니스 로나 지미 그리브스는 최전방 공격수였다.
그런데 현재 21세기의 선수들은 철저한 자기 관리로 기량을 상승시키고 있는 반면, 과거의 선수들은 그러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위 선수들 중에서도 가린샤는 알코올 의존증, 크루이프는 골초, 마라도나는 마약 중독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훈련까지 안하고 평범한 신체 능력으로 경기에 임한 것은 아니겠지만, 시대가 지날 수록 전체적인 인류의 신체도 진화하고 있는데 이렇게 자기 관리도 부실했던 과거 선수들과 경쟁했다는 것은 펠레의 평가에 좋게 작용되지 않는다. 물론 과거에는 훈련이나 식단 조절, 의료 등이 열약했기 때문에 현대처럼 체계적인 관리를 받긴 힘들었고, 당연히 펠레 본인도 기술적인 관리를 통한 기량 상승을 바랄 수 없이 본연의 재능을 통해 업적을 이뤄야했다.
펠레의 파트너였던 가린샤는 알코올 중독 뿐만 아니라 지적 장애와 하체에 장애까지 있었다. 슬럼가에서 태어나 어릴적 소아마비를 겪는 등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으며, 오죽 장애가 심했으면 의사가 보조장치를 달지 않으면 평생 휠체어 신세를 질 수도 있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이마저도 당시 외과의사가 수술을 단행해서 나아진 것이었다. 이에 대해 가린샤를 장애를 극복한 선수라고 칭송하는 반응들이 있는 반면, 당대 축구 수준에 의문을 가지는 반응들도 있다.
물론 시대적으로 스포츠 과학이나 인프라 환경이 현대만큼 발달하지 못한만큼 펠레 역시 남들과 같은 환경에서 경쟁한 것이고, 중요한 것은 펠레가 당대에 가장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는 점이다.
1.7. 장비
펠레 시대에는 장비들도 오늘날 장비들에 비해서 낙후된 것들이었다. 지금보면 축구의 기초적인 개인기인 드래그 백 조차도 페렌츠 푸스카스가 실제로 웸블리에서 보여주기 전에는 거의 뜬구름 잡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푸스카스조차 그 드래그 백을 실전에 쓰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연습했는데 동료들이 비웃을 정도였다. 이 원인이 바로 낙후된 장비였다.푸스카스가 옛날 선수라해서 기술이 별로 뛰어나지 못한 선수라 생각할 수 있는데 호주에서의 크로스바 챌린지 일화,[13] 샤워장에서 동료 프란시스코 헨토가 던져주는 물 묻은 비누를 장난치듯 가지고 놀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컨트롤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던 선수다. 그리고 당연히 필드라 할 수 있는 축구장도 오늘날에 비교하면 질이 매우 떨어지는데, 잔디부터가 좋지 않다. 유럽은 그나마 덜했지만 남미 축구 경기에서는 흙먼지가 풀풀 일어나기까지 했다. 축구공의 경우도 현재와 많이 달랐는데, 당시 축구공은 잘못하면 선수 생명에 지장이 갈만큼 질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14] 토스탕의 경우, 당시 축구공에 눈을 잘못 맞은 뒤 망막 박리라는 병이 생겨 선수 생활에서 은퇴해야했을 정도다. 따라서 과거의 선수들은 현재 선수들보다 정교한 기술을 구사하기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
1.8. 축구 규정
펠레 시대에는 체계적인 퇴장 제도와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고, 오프사이드의 동일선상이 인정되지 않는 등 규칙 면에서 공격수에게 불리한 점들이 많았다.특히 체계적인 퇴장 제도가 없었던 당시에는 지금 기준으로 퇴장감인 태클들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과거에도 퇴장 제도가 존재하기는 했는데, 상대 선수에게 직접 폭력을 가하는 등 규칙을 심각하게 위반할 경우 심판이 구두로 선수를 내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경기 중에 주로 일어나는 비매너 플레이들은 여기에 해당이 안 됐다.[15]
펠레는 1966년 월드컵에서 그의 신체능력에 하락세를 걷게 만든 심각한 더블 백태클을 받았지만 상대 선수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고, 선수 교체룰도 없었던 탓에 부상을 당한 채로 경기를 풀타임 소화했다.
레드/옐로카드 제도는 1970년 월드컵부터 정식으로 채택되었으며, 선수 교체 제도 역시 1970년에 월드컵이 정식 채택함으로써 다른 축구 리그 및 대회에 광범위하게 채택되기 시작할 수 있었다.
펠레의 부상이 옐로/레드카드 제도와 선수 교체 제도를 만든 계기가 된 것이다.
축구라는 종목 자체가 선수 생명을 고려하지 않고 운영되었으며, 이런 열악한 운영은 선수가 개인기나 전술을 구현할 때 제약이 따를 수 있다. 1986년 월드컵 당시 디에고 마라도나와 붙었던 조민국의 증언이 있다. "지금 룰이었으면 서너 명은 퇴장 당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그렇게라도 버텨야 했던 거지. 난 당시 수비에 서서 마라도나의 플레이를 정면에서 생생히 봤어요. 이야, 저 정도 갖다 받으면 부러졌겠다 싶었지. 그런데 태클을 피할 때 몸 중심을 살짝 띄우더라고. 그걸 어려서부터 접해왔던 선수다 보니 상대가 들어올 타이밍을 다 알고 충격을 완화하더만. 그리고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게 무슨 종아리가 우리 허벅지만 한 거야. 나도 한 허벅지 했는데. 가만 보니 정강이 보호대를 앞뒤로 했더라고. 얼마나 견제가 심했으면 저렇게까지 했나 싶었죠." 그리고 정말로 유튜브에 이 경기가 하이라이트로 올라오자 우리나라 채널임에도 불구하고 마라도나를 동정하거나 우리나라 선수들이 여러 명 퇴장당해야 했다는 댓글 반응이 줄을 이뤘다. 마라도나 시절도 이 정도인데 파울에 제재가 없었던 펠레 시절은 더 자주 살인태클 위험에 노출되었다. 1940년대의 브라질 레전드 축구 선수 지지뉴는 1970년대 선수들이 축구 환경이 거칠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이 숙녀분들은 우리 시대에 뛰어 봤어야 했다"는 답을 주기도 했다.
1.9. 팀 내 비중
당시 브라질은 세계 최강의 팀으로 평가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펠레가 동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수혜자가 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펠레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확인해보면 된다. 브라질에 훌륭한 선수가 많았다고는 하나 1958년부터 1970년까지 계속 주전으로 활약하며 월드컵 3회 우승을 모두 경험한 선수는 펠레가 유일했다. 펠레가 월드컵에 14경기 출전해서 총 12골 8도움을 기록했는데, 1958년 월드컵 소련전과 그리고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 못한 1962년 월드컵 체코슬로바키아전, 1966년 월드컵 포르투갈전만 제외하면 모든 경기에서 공격 포인트를 찍었고, 경기에 나오기만 하면 무조건 득점에 기여해줬다. 또한 1958년부터 1970년까지 월드컵에서 브라질 선수들의 스탯을 보면 2위인 가린샤가 5골 5도움, 총 10개로 뒤를 잇는다. 가린샤마저 공격 기여도는 펠레의 절반에 그쳤고 팀 내에서도 펠레의 기록은 압도적이었다.펠레가 3번의 월드컵 우승 중 1958년, 1970년의 우승은 펠레 본인이 에이스 역할을 하며 활약했으나, 1962년 월드컵에서 펠레는 조별 리그 2경기만에 부상으로 낙마하였는데, 이후 경기들에서 가린샤가 엄청난 기량을 선보이며 1958년 당시보다 4년 더 늙어버린 멤버들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펠레도 "사람들은 1958, 1962, 1970년의 월드컵을 나의 월드컵이라고 하지만 1962년 월드컵은 가린샤의 월드컵이라고 불리는 것이 맞다"라고 밝힌 바 있다. 위의 논란을 꺼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사례를 근거로 든다. 그러나 1957년 남미 챔피언십에서 펠레를 제외한 1958년 월드컵 멤버들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에게 연달아 패배했다. 이 팀에 펠레가 합세하고 월드컵을 우승했다 1966년 월드컵에서 똑같이 펠레가 부상으로 이탈했지만 브라질은 16강 조별 리그에서 충격적인 탈락을 맞이했다. 1966년의 브라질은 기존의 가린샤, 자우마 산투스, 지우마르에 떠오르는 신예들인 자이르지뉴, 토스탕, 제르송이 합세해 신구 조화를 이뤘음에도 말이다.
펠레가 은퇴하고 나서는 호베르투 히벨리누, 자이르지뉴가 건재함에도 1974년 월드컵 우승에 실패했고 브라질이 다시 월드컵을 우승하기까지 24년이 걸렸다. 전체적으로 펠레의 공백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1962년 월드컵 하나의 사례만으로 이를 주장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1970년 멤버들은 현재 역대 최강이라 평가 받지만 이는 결과가 따라준 뒤의 평가이고, 대회 직전까지는 같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주앙 살디나 감독이 도중에 마리우 자갈루 감독으로 교체된 점에, 아르헨티나와의 평가전에서 로베르토 페르푸모가 "이 브라질은 내가 본 브라질 중 가장 최약체 팀"이라 발언할 정도로 전망이 썩 좋은 팀은 아니었다.[16]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고 브라질에게 줄리메컵 영구 소유권을 가져다 준 선수가 펠레다.
펠레의 우승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속했던 클럽인 산투스도 당대 최고의 팀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펠레의 합류 이전의 산투스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것과는 다르게 리그를 압도하던 팀이 아니었다. 1956년 펠레의 입단시점엔 이미 주립리그 10회 이상씩을 우승한 코린치안스와 파우메이라스가 리그를 양분하는 형세였고 이를 상파울루가 쫓아가는 양상이었다. 이 시점에서 산토스의 주립리그 우승은 고작 2회에 불과했다. 그러나 산투스는 펠레가 합류한지 4시즌이 되던 해부터 세계구급 강팀으로 변모하게 된다. 펠레가 이끄는 산투스는 1962년 월드컵 대표팀에 7명, 1970년 팀에는 5명을 차출시키기도 했고 73경기 연속 득점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는 2017년 레알 마드리드가 유일하게 동률을 이뤘는데 기록을 깨지는 못했다. 그러나 경쟁팀에 해당하는 파우메이라스에게 7:1과 5:0으로 대파당한 일이 있었으며 전자의 스코어는 펠레가 결장했을 때의 결과다. 브라질 내 절대적 강자까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굳이 팀 수준만을 놓고 비판을 한다면 여기서 자유로운 선수는 몇이나 될지 볼 필요가 있다. 최근의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포함한 역대 상위권 선수들은 대부분 최고 수준의 클럽이나 국가에서 뛰었으며 소위 얘기하는 '팀빨'을 안 받은 선수가 오히려 찾기 더 힘들다. 특히 현재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빅클럽으로 쏠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는 과거의 클럽들은 물론이고 국가대표팀의 전력도 능가한다. 애초에 당대 최고의 선수를 최고의 팀이 영입하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선수는 SSC 나폴리 소속이었던 디에고 마라도나 정도 밖에 없으며 마라도나도 세부사항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나폴리가 마냥 약체로 불리울만한 전력은 아녔다는 관점 역시 상당수 존재한다.그 이후에도 지쿠, 소크라치스, 베베투, 호마리우, 히바우두, 호나우두, 카푸, 호나우지뉴, 카카, 네이마르 등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 2007년 이전의 남미 올해의 선수 세 개의 개인상 중 하나 이상을 수상하여 당대 최고 중 한 명으로 평가 받던 전설들이 끊임없이 나왔고, 그들이 브라질 축구의 명성을 이어왔지만 누구도 펠레와 비교될 만한 업적을 세우지 못했다.
1.10. 득점 기록
펠레는 자신의 기록으로 1283골을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매체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펠레의 골 기록은 매체 별로 차이가 나는데, 흔한 매체들은 812경기 757골로 보고 있고, 이탈리아어 위키피디아는 821경기 761골, RSSSF는 841경기 775골로 기재하고 있다. 이렇게 골 수가 차이가 나는 이유는 특정 대회를 공식 대회로 보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우선 1968년과 1969년에 인터컨티넨탈 슈퍼컵이 열렸는데, 이 대회는 1960년대 인터컨티넨탈컵 챔피언들이 모여 왕중왕을 가리기 위해 개최되었다. 여기서 펠레는 1968년 대회를 우승하고 두 번의 대회 통산 8경기 3골을 넣었다. 이 대회는 2005년 남미축구연맹에서 공식 대회로 인정한 바 있다. 실제로 두 대륙의 연맹이 주최했으니 공식으로 인정하는게 맞긴 하다. 또한 1968년 브라질 전국 리그에서 펠레의 18경기 12골 기록은 영문 위키피디아를 포함한 대다수 매체에 17경기 11골로 잘못 기록이 되었다. 이렇게 기존의 812경기 757골에서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8경기 3골과 1968년 리그 1경기 1골을 추가하면 821경기 761골로 위에 언급한 이탈리아어 위키피디아와 동일한 기록이 되며, 현재를 기준으로 산정하면 이게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RSSSF의 경우에는 상대 팀도 동일한 성격일 때, 리저브 리그, 국가대표 B팀, 국가대표 군인팀, 리그 올스타, 지역대표팀, 도시대표팀 등 과거의 특수한 기록들의 일부를 공식 기록으로 수용하여 펠레의 기록이 더 높게 기재되었다.
펠레가 주장하는 1283골은 현재 기준 비공식 경기나 클럽 친선 경기들을 포함해 모든 경기를 산정했을 때 나오는 기록이다. 그런데 이것도 기관마다 통계가 다르다. 펠레는 역대 최다 골을 기록한 선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는데, 기네스북은 펠레의 득점 수를 1279골로 인정했다. FIFA는 펠레의 통산 득점을 1281골로, RSSSF는 비공식 기준 1301골로 인정했다. 또 일부 언론들은 펠레의 기록을 1289골로 보도하는 등 숫자가 참 다양하다.
그리고 본론에 들어가자면, 이 문서에서 나열한 사항들만 봐도 과거와 현재 선수들의 시대적 환경에 매우 많은 차이가 있는데다 공식 경기의 기준도 다르니 시대가 다른 선수들의 득점 기록을 나열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행동이긴 하다. 거기다 펠레가 주장하는 기준처럼 선수 커리어의 모든 경기를 인정할 때 정작 펠레가 역대 최다 득점을 기록한 선수가 아니다. 자신이 넣은 득점 중 500골 가량이 말소되는 것이 아깝기야 하겠지만 기록은 둘째치고 자신이 가장 많은 골을 넣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RSSSF가 커리어 통산 득점을 기준으로 기재한 비공식 순위에서 펠레는 8위에 그쳤다. 비공식 1위 선수는 헝가리의 러요시 티치인데, 펠레보다 600골 이상을 더 득점했다. FIFA 또한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가 1329골을 넣었다고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는 펠레보다 많은 득점 수다.
1969년 펠레가 1000번째 골을 넣는 순간 기자들이 에워싸 경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한국에서도 펠레의 1000번째 골에 대한 기사가 실리는 등 펠레의 현역시절엔 이 득점기록이 제대로 된 기록으로 인정받았다.[17] 나중에 득점기록에 대한 변화는 이후 축구 환경이 바뀌면서 생긴 시대적인 차이로 볼 수 있다.
1.11. 혹사
과거의 축구가 활동량이 적다고는 하는 반면, 커리어 전체 경기 수를 볼 때는 과거 선수들이 현재 선수들보다 많은 출전 수를 가지고 있다. 펠레는 1390경기, 페렌츠 푸스카스는 1270경기, 게르트 뮐러는 1228경기, 호마리우는 1209경기를 치렀다. 현재 선수들은 나이 40이 될 때까지 철강왕 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1000경기 이상을 찍기 어렵다. 그만큼 과거의 선수들은 현재와는 다른 의미로 혹사를 당했는데 그 중에서도 펠레는 돈을 벌기 위해 장시간 비행기를 타며 세계를 돌아다녔다.월드 스타였던 펠레를 산투스가 가만히 둘 리는 없었고, 그는 산투스의 마케팅에 적극 활용되었다. 22일 동안 9개의 국가를 돌아다니며 15경기를 치르기도 했으며 한 해동안 무려 109경기를 소화하는 기록도 세웠다. 1965년 이후부터는 브라질 축구 협회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스리그 2번 불참하먼서까지 세계 투어를 잡기 시작했다. 물론 산투스 구단 입장에서도 펠레를 필두로 천정부지로 치솟는 선수들의 몸값을 맞추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가 있었다. 한번 투어를 나가면 10개국 이상을 다녔고 한 국가의 안에서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복잡한 일정을 시즌 일정도 미루고 참여해야 했다.[18] 심지어 내전 중인 국가에도 들어가서 경기를 뛰기도 하거나 시즌 도중에 악명 높은 해발고도 약 4,000m의 볼리비아 라파스에서 뛴 적도 있다. 1972년에는 우리나라에도 찾아와서 전반전을 소화하며 골을 넣었다.
이러한 경기들의 목적은 펠레를 통한 마케팅으로 수입을 올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펠레는 건강에 크게 이상이 없는 한 선발로 나와서 풀타임으로 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술된 일화 중 콜롬비아에서 심판이 펠레를 퇴장시켰다고 오히려 관중들이 심판을 쫓아내는 사례도 있을 정도였으니 투어에 펠레가 빠지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친선 경기라고 해도 당시는 A매치 수나 리그 교류가 적었기 때문에 펠레를 상대하는 선수들, 특히 제3세계 선수들은 자기의 기량을 시험하는 겸 펠레 한번 막아보겠다고 펠레에게 거칠게 달라붙는 경우도 많았다. 가뜩이나 파울에 대한 제재도 느슨했던 시기였던 걸 감안하면 경기 양상이 어땠는지 상상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이렇게 경기 수가 많기도 했지만 그보다 문제인 건 계속되는 장시간의 비행과 시차 변화였다. 이 혹사는 펠레의 선수 생명을 갉아먹는 큰 원인이 되었다.
2. 비판
펠레에 대한 평가절하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당시 축구의 수준에 기인한다. 이에 대해서도 위의 문단들이 반론을 제기하지만, 결국 눈에 보이는 수준 차이는 의견을 엇갈리게 하며, 실력으로 펠레보다 마라도나를 우위에 두는 전문가들도 다수 존재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물론 펠레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온 것도 아닌만큼, 당시 시대에서 이견의 여지 없는 최고의 모습을 보인 것으로 충분하다는 반론도 있다. 당시 수준이 낮았다 치더라도 동시대 다른 선수들은 펠레만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준으로 퉁쳐서 말하지만 의료, 인프라, 훈련 등도 현대에 비해 떨어졌던만큼 현대의 선수들이 과거에서 활약했으면 펠레만큼 활약할거라 보장하기는 힘들다.하지만 펠레가 자신의 기록에 지나치게 자부심을 가지고 현대 선수들을 저평가하는 경향을 보인 적이 있어서, 유독 당시 시대에 대한 논쟁이 뒤따르는 편이다.
또한 월드컵 3회 우승이라는 업적에 관해서도 비판이 있다. 1962년 월드컵 당시에 펠레가 출전한 경기는 16강 조별 리그 2경기 뿐이었다. 첫번째 경기에는 확실히 1골 1어시스트로 활약했지만, 두 번째 경기는 부상으로 전반전에 아웃되었다는 점이 지적을 받는다. 다만 월드컵 3회 우승이라는 업적이 과장되었다는 비판이지[19] 월드컵 활약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될 수는 없다.[20] 그리고 이런 식으로라도 월드컵 3회 우승을 달성한 선수는 펠레가 유일하기 때문에 모든 대회를 꾸준히 캐리하지는 못했을 뿐 대기록임은 분명한 사실이다.[21]
3. vs 디에고 마라도나
자세한 내용은 펠레 vs 디에고 마라도나 문서 참고하십시오.세기의 라이벌인 펠레와 마라도나의 대결.
[1] 1위는 4골을 넣은 킬리안 음바페이다.[2] 다만 당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컨티넨탈컵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이고, 3차전 연장 경기를 치르는 경우도 있어서 경기수가 지금보다 많았다.[3] 다만 퐁텐의 토너먼트 7골은 3·4위전에서 넣은 4골이 포함된 것이다.[4] 58년 8강 웨일스전 1골, 58년 준결승 프랑스전 3골, 58년 결승 스웨덴전 2골 1도움, 70년 8강 페루전 1도움, 70년 준결승 우루과이전 1도움, 70년 결승 이탈리아전 1골 2도움.[5] 1959~1965년[6] 물론 희소성, 인기 등의 면에선 월드컵에 밀리며, 국가대항전은 기본적으로 감독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선수의 개인기량이 더 중요해지는 무대이기 때문에 선수 평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반대로 감독의 경우에는 국가대항전이 위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은 편이다.[7] 인터컨티넨탈컵과 FIFA 클럽 월드컵에서는 2000년대 중반까지 남미와 유럽 클럽들이 엇비슷한 전적을 남겼지만 2000년 후반부터는 2012년 코린치안스를 제외하면 유럽 클럽들이 클럽 월드컵을 독식하고 있다.[8] 브라질의 70년대 군부 독재 시절 군사 정권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축구로 돌리기 위해 전국 리그를 재빠르게 창설한 것이다.[9] 이는 분데스리가 출범 전 독일 지역 리그와 분데스리가의 Elo 레이팅을 보면 간접적으로 상황이 비슷하다고 추론할 수 있다.[10] 단 이는 전성기였던 59~65년까지에 한정하여 가능한 반론으로, 67년부터 산투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74년까지 상위 라운드 자동 진출 없이 1라운드에서 시작한 전국대회가 있었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는 전국 대회 득점왕을 한 적이 없다. 66년 부상을 기점으로 클럽에서의 일관성이 하락한 것은 맞다.[11] 따라서 같은 주립 리그라는 이유로 카탈루냐 주립 리그로 비유하는 주장도 오류가 있다. 라리가를 대표하는 클럽들을 뽑자면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아틀레틱 빌바오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카탈루냐 리그에 있던 팀은 바르셀로나 밖에 없으며 그 외의 카탈루냐 클럽들 중 비슷한 수준의 클럽은 없었다.[12] 1986 마라도나 다음가는 퍼포먼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3] 데니스 로와 조지 베스트와 함께 유소년들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푸스카스가 늙고 배가 나왔다고 무시했다고 한다. 갈수록 무시하는 정도가 심해지자 베스트의 제안으로 크로스바 맞추기 내기를 했고 푸스카스는 10개 중 10개를 모두 맞춰 아이들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마지막에는 아예 공을 띄워서 어깨와 머리로 트래핑하고 발꿈치로 띄우더니 발리 슈팅으로 강하게 차서 크로스바를 강타했다.[14] 방수도 안 돼서 비라도 오면 공이 물을 흡수하는 바람에 매우 무거워지기도 했다.[15] 이렇게 비매너 플레이를 잡지 않다보니 나온 전술(?)이 있는데, 이른바 '에이스 죽이기'다. 상대 팀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를 마크하는 건 현대에도 흔한 일이지만, 펠레 시대에는 마크 정도가 아니라 수비수 서너명이 한명에게 살인태클을 걸어댔고, 당연히 펠레도 여기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16] 출처: 축구철학의 역사, 조나단 윌슨 저, 2012년, 324P.[17] 이 1000번째 골은 국제 친선경기 269골과 국내 친선경기 79골이 포함된 수치로 1959년 1년 동안 국제 친선경기에서만 46골을 넣었다. 아래에 혹사 문단에서 나오듯이 친선전 일정을 엄청나게 소화해야했음이 드러나는 대목.[18] 출처: 『축구의 세계사: 공은 둘글다』 데이비드 골드블라트 저, 실천문학사, 2014년.[19]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았던 1962 월드컵조차 조별리그 첫 경기를 캐리하며 우승에 기여했다.[20] 1958 월드컵은 4강전 해트트릭, 결승전 멀티골로 역대 최고의 월드컵 데뷔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1970년 월드컵은 플레이메이커로서 단일 월드컵 최다 어시스트, 기회창출 4위를 기록했다.[21] 호나우두도 1994년 월드컵에서 쟁쟁한 선배들에게 밀려 대회 내내 한 번도 투입되지 못하고 벤치 자원으로 있다가 우승하고 1998년 월드컵에서는 준우승, 2002년 월드컵에서는 본인의 활약으로 우승을 차지했으나 3회 우승까지는 달성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