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27 23:31:52

요한 크루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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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네덜란드 가톨릭방송 KRO가 네덜란드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100명'을 선정
1위2위3위4위5위
핌 포르튀인 빌럼 1세 빌럼 드레이스 안톤 판 레이우엔훅 에라스무스
6위7위8위9위10위
요한 크루이프 미힐 데 로이테르 안네 프랑크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
빈센트 반 고흐
11위부터는 영문 위키 참조.
같이 보기: 위대한 영국인, 위대한 독일인, 위대한 러시아인, 위대한 프랑스인
위대한 인도인, 위대한 미국인, 위대한 핀란드인, 위대한 그리스인, 위대한 이탈리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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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루이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33대
아드 데 모스
파일:Ajax.png 34대
요한 크루이프
파일:Ajax.png 35대
안토니 콘
1982년~1985년 1985년~1988년 1988년

52대
루이스 아라고네스
파일:Barcelona.png 53대
요한 크루이프
(감독대행: 카를레스 레샤크)
파일:Barcelona.png 54대
바비 롭슨
1987년~1988년 1988년~1996년 1996년~1997년

FC 바르셀로나 역대 주장
조아킴 리페
(1971~1973)
요한 크루이프
(1974~1978)
후안 마누엘 아센시
(1978~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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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루이프의 수상 이력
{{{#!folding ▼
월드사커 역대 베스트 XI
FW
펠레
FW
리오넬 메시
MF
요한 크루이프
MF
지네딘 지단
MF
디에고 마라도나
MF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DF
파올로 말디니
DF
바비 무어
DF
프란츠 베켄바워
DF
카푸
GK
레프 야신
FIFA 월드컵 역대 올스타 XI
FW
펠레
FW
호나우두
MF
요한 크루이프
MF
디에고 마라도나
MF
로타어 마테우스
MF
가린샤
DF
니우통 산투스
DF
프란츠 베켄바워
DF
바비 무어
DF
자우마 산투스
GK
디노 조프
1974 FIFA 월드컵 베스트 XI
FW
그제고시 라토
FW
요한 크루이프
MF
롭 렌센브링크
MF
요한 네스켄스
MF
카지미에시 데이나
MF
볼프강 오베라트
DF
파울 브라이트너
DF
프란츠 베켄바워
DF
뤼트 크롤
DF
베르티 포크츠
GK
제프 마이어

1971 Ballond'or
수상
요한 크라위프
2위
산드로 마촐라
3위
조지 베스트
1973 Ballond'or
수상
요한 크루이프
2위
디노 조프
3위
게르트 뮐러
1974 Ballond'or
수상
요한 크라위프
2위
프란츠 베켄바워
3위
카지미에시 데이나
1975 Ballond'or
수상
올레흐 블로힌
2위
프란츠 베켄바워
3위
요한 크루이프
1974 FIFA 월드컵
골든 볼
요한 크루이프
실버 볼
프란츠 베켄바워
브론즈 볼
카지미에시 데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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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클러프

파일:잉글랜드 국기.png
요한
크루이프

파일:네덜란드 국기.png
비센테
델보스케

파일:스페인 국기.png
알렉스
퍼거슨

파일:스코틀랜드 국기.png
엘레니오
에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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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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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
로바노브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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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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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무리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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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고
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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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C 아약스 영구결번
No.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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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축구인
파일:Johan Cruyff 2016.jpg
이름 요한 크루이프
Johan Cruyff
본명 헨드릭 요하너스 크라위프
Hendrik Johannes Cruijff
출생 1947년 4월 25일 /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 암스테르담시
사망 2016년 3월 24일 (향년 68세) /
스페인 카탈루냐지방 바르셀로나주 바르셀로나시
국적 네덜란드 파일:네덜란드 국기.png
신체 180cm | 체중 78kg
직업 축구선수(공격수[1]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AFC 아약스(1964~1973)
FC 바르셀로나(1973~1978)
로스앤젤레스 아즈텍스(1979~1980)
워싱턴 디플로메(1980~1981)
레반테 UD(1981)
AFC 아약스(1981~1983)
페예노르트 로테르담(1983~1984)
감독 AFC 아약스(1985~1988)
FC 바르셀로나(1988~1996)
카탈루냐 대표팀(2009~2013)
기타 AFC 아약스(2011~2016 / 기술고문)
국가대표 48경기 33골(네덜란드 / 1966~1977)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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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14번
9번(FC 바르셀로나)
가족 아들 요르디 크루이프
별명 플라잉 더치맨,축구화를 신은 피타고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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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시절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2.3. 플레이 스타일
3. 감독 시절
3.1. AFC 아약스 시절3.2. FC 바르셀로나 시절 - 드림팀의 수장
4. 말년5. 어록6. 평가
6.1. 게으름은 컨셉?
7. 여담
7.1. 기록
7.1.1. 선수 기록7.1.2. 감독 기록7.1.3. 수상 실적
8. 크루이프에 대한 말말말

1. 개요

바르셀로나를 재탄생시킨 남자 (the man who reinvented Barcelona)
UEFA에서 축구계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명감독 10인을 꼽으며 남긴 평

네덜란드의 前 축구선수이자 감독. 포지션과 관계없는 토탈 풋볼을 구현하고 라 마시아를 창시한 축구계의 혁명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이자 최고의 감독중 한명으로도 평가받는다.

선수로서 주로 단 등번호가 일반적인 팀의 에이스 번호와는 거리가 먼 14번이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으로 인해 크루이프를 존경하는 수많은 스타들이 이후 14번을 달 정도이다. 아약스에서 14번은 영구결번이기도 하다.[2]

1974년 월드컵에서 오렌지 군단의 야전사령관으로 리누스 미헬스의 토탈 풋볼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준우승을 일궈내면서 세계적인 축구스타로 각광받았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활약하며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서 바르셀로나의 첫 번째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역대 최강의 클럽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현 바르셀로나의 철학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레전드이다.

디 스테파노가 근대 축구의 시조로서 챔피언스 리그의 토대를 쌓았고, 펠레는 피치 위에서나 세계에서나 전세계를 장악하며 축구의 황제로 등극하고, 베켄바워리베로 포지션을 창시함으로써 수비수의 개념을 바꾸면서 유로월드컵을 차지했고, 마라도나혼자서 월드컵을 지배했다면 크루이프는 축구라는 스포츠 자체를 바꿔 버린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축구계의 혁명가.

'Flying Dutchman'이 그의 별명. 여담으로 'Non Flying Dutchman'은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데니스 베르흐캄프의 별명이다. 이 'Flying Dutchman'이 마르크 오버르마르스에게 붙은 별명이 아니냐는 의견이 넷상에서 일부 떠도나 이것은 한 사람만의 고유한 별명은 아니며[3], 네덜란드 출신의 스타 플레이어에게 찬사의 의미로 붙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마르코 판바스턴이나 아르연 로번, 로빈 반 페르시. 비단 축구종목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어서, 메이저리그 전설의 유격수이자 명예의 전당 'First Five'중 한 사람인 호너스 와그너의 별명이기도 했다.[4] 유사하게 NBA 인디애나 페이서스에서 뛰었던 네덜란드 출신 센터 릭 스미츠의 별명은 'Dunking Dutchman'이었다.

2. 선수 시절

2.1. 클럽 경력

파일:Ajax%2068%20Home%20Johan%20Cruyff.jpg
AFC 아약스 시절

요한 크루이프는 10세때부터 AFC 아약스 유소년팀에서 성장했고 1964년 에레디비시에 데뷔하여 데뷔전부터 득점을 올리는 등 화려한 등장을 알렸다. 하지만 아약스는 13위에 그치고 만다. 이후 자신의 영원한 은사인 리누스 미헬스를 만나 기량이 만개하기 시작해 25경기에서 23골을 넣고 네덜란드 컵 결승전에서는 혼자 4골을 넣어 7:0 대승을 이끄는 등 괴물같은 모습을 보였고 그 다음 시즌에는 33골을 넣으며 아약스의 리그,컵 대회를 우승하는 등 더블을 이끌었고 1969년에는 유로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피에리노 프라티에게 해트 트릭을 얻어맞으며 4:1로 패배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게 우승을 내주고만다. 이후 다시 유로피언컵에 도전한 크루이프의 아약스는 파나티나이코스 FC를 2:0으로 격파하여 마침내 유로피언컵 우승을 차지한다. 이후 미헬스 감독을 떠났으나 1971-1972 시즌 아약스는 에레디비시에서 단 1패만 기록했고, 크루이프는 컵 대회 결승전에서도 득점을 올리며 승리를 이끌었고 인터밀란과의 유로피언컵 결승전에서는 혼자서 2골을 넣으며 유로피언컵 2연패 달성은 물론이고 네덜란드 클럽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하였고, 1년후에도 결승전 유벤투스 FC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유로피언컵 3연패를 달성한다. 이때 크루이프는 1971년에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파일:D4CAEF63-CE3F-4C5B-90E5-9FF5573AB6F4.png
'''
FC 바르셀로나 시절
'''

1973년에 아약스를 떠나 은사인 리누스 미헬스의 부름을 받고 스페인으로 진출한 크루이프는 "독재자의 팀에서 뛰지 않겠다!"라며 레알 마드리드 CF디스하고 FC 바르셀로나를 택한다. 이는 스페인 축구협회가 외국인 선수 영입 금지를 해제하여 문호를 개방한 덕분이라고 한다. 그의 이적료는 600만 길더[5]로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 기록을 갈아치웠는데, 이적료가 너무 높아 스페인 당국에서 허가를 받지 못하자 농기계로 등록해서 데려왔다는 이적 비화가 있다. 이때의 이적료를 유로로 환산하면 36만 유로였는데 연봉이 15만 유로였다. 당시 바르샤의 스타였던 후안 마누엘 아센시의 연봉이 5,400 유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장 큰 차이이다. 이에 아센시는 크루이프가 경기 중에 조금 더 뛰어달라고 요청하자 "네가 더 많은 돈을 받으니 네가 더 많이 뛰어라"라고 말했다. 어쨌건 간에 1973년 9월에 이적 합의를 맺었지만 행정 절차가 늦어져 실제 데뷔한 것은 그해 10월 28일 그라나다 CF전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바르샤는 당대의 이름난 전술가를 차례로 데려왔지만, 기대에 걸맞는 성적을 내지 못했다. 이에 해답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미헬스와 크루이프였다. 이렇게 바르샤에 온 크루이프의 기량은 그라나다 CF와의 데뷔전 멀티골로 시작하여, 1974년 2월 17일 프랑코가 지켜보는 엘 클라시코 원정 경기에서 5:0 승리를 거두며 즉각적으로 드러났다. 크루이프가 없던 1973년 10월 7일 엘 클라시코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한 바르샤는 1945년 이후 근 30년만의 5-0 승리이자 마드리드 원정 사상 최초 5-0 승리, 가장 큰 점수차를 기록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960년 이후 14년 동안 라리가 타이틀을 들지 못한 바르셀로나는 오랜 숙원인 리그 우승을 달성하면서 이에 따라 크루이프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가 이 시즌에서 보인 성적은 16골을 기록해 득점 랭킹 4위였다. 이렇게 해서 크루이프는 1973년과 1974년에 발롱도르를 연속 수상하여 세계 최고 선수의 지위를 굳건히 지켰다. 1974년 6월 29일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4-0으로 털어 설욕했으나 이때까지 코파 델 레이에서는 외국인 선수가 출전할 수 없어서 크루이프와 당시 공격의 축이었던 1호 외국인 선수 우고 소틸이 뛰지 못한 경기였다.

특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환상적인 공중 발리 슈팅으로 '플라잉 더치맨'이라는 별명을 추가하며 매번 라리가 무대에서 화려한 축구 쇼를 보여주던 크루이프는 바르샤의 주장 완장까지 꿰찼다. 그러나 그에게도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4/75 시즌 엘 클라시코에서 레알 마드리드 원정 0-1 패배, 안방 0-0 무승부로 우승 타이틀을 라이벌에게 내주고 말았다.

1975년에 이르러 은사인 미헬스가 감독 자리에서 사임한 뒤 크루이프에게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11년 동안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지휘하면서 3번의 리그 우승과 1975년 UEFA컵 우승을 이끈 명장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이 취임했다. 바이스바일러 감독은 전술적으로 많은 변화를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크루이프를 측면에 기용하려 한 지시 때문에 마찰이 생겼다. 세비야 FC와의 경기 도중 교체된 크루이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이스바일러 감독과 충돌했다. 그러나 엘 클라시코에선 안방 2-1, 원정 2-0으로 이기면서 자존심을 세웠다. 이때 동료인 카를레스 렉샤흐도 탁월한 기량을 과시했으나 1975/76 시즌 라리가 우승은 레알 마드리드 CF에게 또 뺏기면서 준우승에 그쳤고, 바이스바일러 감독 역시 시즌이 끝나갈 즈음인 1976년 4월에 경질되었다.

이후 라우레아노 루이스 감독대행을 거쳐 친정인 아약스에서 감독을 하던 미헬스 감독이 돌아오면서 은사와의 눈물의 상봉을 거둔 크루이프는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비록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승점 1점이 뒤져 라리가 타이틀 탈환은 실패했지만 1976/77 시즌 동안 크루이프는 엘 클라시코에서 두번 다 득점하여 1승 1무로 우위 전적을 만들었다.

경기력은 바르샤가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그해에 크루이프는 라리가에서 14골을 기록하며 줄어든 득점력을 회복했다. 1977/78 시즌에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은 들었지만 엘 클라시코에서 2연패를 당해 라리가 우승을 날려먹으면서 용납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에 따라 미헬스 감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또 다시 사임 수순을 밟았고, 애제자인 크루이프 역시 계약이 만료되자 바르샤를 떠나 은사인 미헬스를 따라 미국의 로스엔젤레스 아즈텍스로 떠나면서 미국에서 뛰게 되었다.

이대로 가면 명예롭게 은퇴하는가 했으나, 사기당해 전 재산을 날려 먹으면서 돈을 벌려고 선수로 복귀, 미국에서 2년 동안 뛰었다가 네덜란드로 돌아와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이 시절 아약스 소속으로 PSV 에인트호번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던 허정무와 맞대결이 있었는데 허정무가 그의 마크맨이였다.[6] 1984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면서 축구화를 벗었다.

2.2. 국가대표 경력

파일:external/www.aguantenche.com.uy/Cruyff-Adidas-2-Rayas.jpg
1966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크루이프는 곧 맹활약하여 주전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유럽 예선에서 탈락하여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했다.[7] 하지만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미헬스를 감독으로 임명했고 이후 크루이프를 비롯한 요한 네스켄스, 롭 렌센브링크, 뤼트 크롤 등 쟁쟁한 선수들을 모으고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토탈 풋볼로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는데 3조 1경기에서 우루과이를 2:0으로 격파, 스웨덴이랑 0:0 무승부, 불가리아를 4:1로 격파하여 2라운드에 진출해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는 크루이프 본인이 멀티골을 넣는 등 4:0으로 압승을 거두었고 동독을 상대로 2:0,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을 상대로 네스켄스와 크루이프가 골을 넣으며 2:0으로 승리하며 결승까지 안착했다. 처음엔 원래 축구 변방이었던 듣보잡 네덜란드를 무시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본선에서 네덜란드가 토탈 풋볼로 눈부신 경기력을 선보이자 네덜란드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파일:external/www.thetimes.co.uk/72197547_p90_33518b.jpg 파일:external/2012europeanchampionships.files.wordpress.com/beckenbauer_cruyff.jpg
1974년 서독 월드컵 의 격돌!
결승전 상대는 개최국 서독이었다. 서독 역시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2라운드에서 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랐지만, 많은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승리를 점쳤다. 서독은 조별 예선 동독전에서 의외의 졸전을 펼치며 패배를 당해 우승후보라는 평가에 먹칠을 한 바 있었다. 사실 서독이 동독에게 패한 것은 2라운드에서 유리한 B조에 속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서독은 동독에 패하면서 조 2위로 내려앉아 2라운드에 폴란드, 스웨덴,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B조가 되었다. 반면 네덜란드는 2라운드에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동독과 같은 A조가 되었다. 같은 3승으로 결승에 올랐다 하더라도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3승을 거둔 네덜란드가 서독보다 훨씬 큰 임팩트를 보인 것은 당연했다. 많은 사람들이 결승에서 네덜란드의 우승을 점쳤다. 크루이프의 킥오프로 결승전 시작된 후 네덜란드는 그 유명한 16번의 볼터치를 하며 경기 시작 1분여만에 페널티 킥을 얻어 내며 득점하여 손쉽게 우승컵을 차지하나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974년 네덜란드가 토털 풋볼로 유명해지기 직전, 세계 축구계에 돌풍을 일으켰던 주인공은 바로 서독이었다. 서독은 UEFA 유로 1972에서 화려한 패싱 플레이를 펼치며, 잉글랜드(3:1), 소련(3:0) 등 다른 우승후보들을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발라버리면서 우승을 차지하여 '람바참바 풋볼'이라는 찬사를 받았었다. 그 결과 1972년 발롱도르에서 서독 선수들이 1~3위를 독식할 정도였다. 당시 서독의 화려한 플레이는 유럽팀도 브라질 같은 아트사커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전 유럽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었다. 그러나 UEFA 유로 1972 우승 이후 서독의 헬무트 쇤 감독은 브라질과 같은 남미 강호들이 가세하는 월드컵에서 확실하게 우승을 거머쥐기 위해 대표팀의 색깔을 대대적으로 바꾸었다.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같은 아트 사커로 맞불을 놓기보다 독일의 장기인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수비와 조직력 위주의 축구로 회귀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쇤 감독은 패스마스터 귄터 네처를 빼고 전사 볼프강 오베라트를 중원 플레이메이커로 기용하는 등 대표팀에 변화를 주었다. 1974년 월드컵에서 서독 대표팀은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실리적이고 재미없는 축구를 구사했고, 게다가 조별예선에서 동독에게 패하면서 우승후보로서의 자존심을 구겼다. 이후 사람들의 관심은 화려한 토탈 풋볼을 구사하며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강호들을 잇따라 무실점으로 격파하던 네덜란드에게 쏠렸다.

1974년 서독 월드컵을 앞두고 서독의 쇤 감독이 잘나가던 서독 대표팀에서 화려함을 지우면서 팀 컬러를 바꾼 것은 브라질 같이 개인기가 뛰어난 강호를 상대로 확실하게 승리를 가져가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서독의 이러한 전략은 결승전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입증되었다. 결승전에서 서독의 쇤 감독은 찰거머리같은 대인 방어 능력을 보유한 사냥개 베르티 포크츠를 크루이프의 전담 마크맨으로 붙였다. 포그츠는 악착같이 크루이프를 봉쇄했다. 그간 수없이 많은 전담 마크맨들을 농락하면서 활약해왔던 크루이프였지만, 포그츠는 여타의 마크맨들과는 달랐다. 결국 크루이프는 결승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1974 월드컵에서 결승전 이전까지 단 1점만 실점할 정도로[8] 탄탄한 수비를 보였지만, 결승전에서는 지칠줄 모르는 체력으로 몰아붙이는 서독의 파상 공세에 연이어 뚫리며 위기를 맞았다. 결국 네덜란드는 역전을 허용하고 2:1로 패하면서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스코어는 2:1에 그쳤지만 실제로는 거의 4:1로 질 뻔한 경기였다.[9]

다만 결승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대회 최우수 선수상과 1974년 발롱도르 수상자는 베켄바워가 아니라 크루이프였다. 그해 프란츠 베켄바워는 국가대표로 월드컵 우승, FC 바이에른 뮌헨의 주장으로 분데스리가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했지만 크루이프의 혁명적인 플레이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여담으로 베켄바워는 크루이프를 인정하기도 했지만 1974년 당시에는 리그, 챔스, 월드컵까지 모든 메이저 대회를 제패하고도 발롱도르를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그 당시 크루이프가 월드컵에서는 뛰어난 퍼포먼스를 남겼지만 바르셀로나에서의 활약상은 다소 아쉬웠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1974년 준우승 이후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은 이때부터 지금까지 월드컵 결승전에서 지독한 악연을 이어가고 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선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에 반대해 참가하지 않았다"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2008년 스페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괴한들에게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납치당해 생명을 위협당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충격이 컸던 가족들을 내버려두면서까지 월드컵에 참가할 수 없었다." 라고 30년 만에 고백했다. 어쨌건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결승까지 올랐지만 아르헨티나에게 패했다, 재미있게도 토탈 풋볼으로 세계 축구계에 돌풍을 일으켰지만, 두 대회 연속 개최국에게 결승전에서 무릎을 꿇은 것.

2.3. 플레이 스타일



크루이프는 피지컬, 테크닉, 브레인 삼박자가 모두 갖춰진 완벽한 선수였다. 떡대도 떡대인 데다 빠른 순발력과 주력, 당대 독보적인 탑티어 테크닉. 거기에 그 누구보다도 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선수다. 온더볼, 오프더볼 상황에서 어떻게 공간을 확보하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지에 대한 판단력이 당대 최고였던 선수.

요즘 뛰어난 드리블러라면 기본 소양으로 갖추고 있는 발 뒷꿈치를 이용한 기술, 슛이나 패스를 할 듯하다가 발 뒷꿈치로 공을 멈추고 수비수가 수비동작에 들어가 몸을 빨리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재빨리 치고 가는 기술은 크루이프 턴이라고 하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크루이프가 처음 실전에서 제대로 활용해낸 개인기다. 거기에 크루이프는 남들이 갖추지 못한 엄청난 축구 두뇌가 합쳐졌기 때문에 레전드가 될 수 있었다. 요즘도 간혹 보이는 페널티 킥 상황에서의 패스도 크루이프가 최초다.[10]

즉 탁월한 테크닉과 운동능력에다가 역대 최고 수준의 경기 운영 능력으로 필드 전체에서 극효율적인 플레이의 완성형을 만들어낸 끝판왕이 바로 크루이프이다. 기술 자체는 펠레나 마라도나에 비해 약간 떨어지나 판단력과 경기 전체를 운영하고 관장하며 미치는 영향력은 오히려 더 위라고 봐도 좋을 정도.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스웨덴을 상대로 보인 크루이프 턴

2.3.1. 토탈 풋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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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토탈 풋볼이라는 풍조를 요한 크루이프 혼자서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토탈 풋볼이 완전히 네덜란드 고유의 흐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미헬스 감독의 아약스 시절 이전에도 토탈 풋볼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헝가리는 경기 중에 유기적인 포지션 변경으로 황금색 바람을 일으켰고,[11]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마슬로프는 압박과 4-4-2를 이용해 토탈 풋볼로 이어지는 여러 개념들을 앞서 선보였으며, 독일의 공격적인 수비수 프란츠 베켄바워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도 카테나치오를 개량해서 스위퍼를 리베로 개념으로 운용하기 시작했고,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오늘날도 역대 최강 팀이라는 칭호를 듣는 유기적인 미드필더진을 구축했다.[12]

리누스 미헬스(Rinus Michels)가 AFC 아약스의 감독으로 취임해서 토탈 풋볼을 완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크루이프는 토탈 풋볼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천재였다. 리누스가 토탈 풋볼 전술가라면 크루이프는 야전사령관이었던 셈.

한편 이렇게 네덜란드에서 대를 이어 토탈 풋볼의 싹을 키워나가는 반면, 잉글랜드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뻥축구 킥 앤 러쉬 전술이 대세를 타게 된다.

3. 감독 시절

3.1. AFC 아약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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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C 아약스 감독 시절[13]

1985년 아약스 감독으로 부임하여 3시즌 동안 KNVB컵을 2회 획득했으나, 리그 우승은 실패했다. 당시 PSV를 이끌며 번번이 발목을 잡은 사람이 바로 거스 히딩크. 여담으로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축하와 격려를 하기도 했다. 그가 감독직에 있을 동안 리그 우승은 전무했음에도 당시 전술적으로 가장 공격적이고 화려한 팀 컬러를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3.2. FC 바르셀로나 시절 - 드림팀의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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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르디올라는 크루이프의 축구 철학을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훗날 드림팀의 감독으로 트레블을 달성한다.[14] 여담으로 과르디올라는 유스 시절, 미드필더로서 전임 감독들인 테리 베너블스, 루이스 아라고네스, 카를레스 렉사흐 등에게 피지컬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로 인해 17세까지 바르셀로나 3군에 박혀 있었다. 그러나 뛰어난 테크닉과 패싱 능력, 축구 두뇌를 가진 것을 보고 크루이프가 전격적으로 1군으로 승격시켰고 팀의 핵심이 되었다. 선수로서나 지도자로서나 펩에게 크루이프는 은사.

1988년에 선수단을 정리하며 선수들과 시시때때로 충돌하는 어려움을 겪은 주젭 유이스 누녜스 바르샤 회장은 팀 재건을 위해 크루이프를 감독에 앉혔다. 이렇게 새로 판을 짜게 된 크루이프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선수들을 모아 이미 아약스 시절에 구축한 티키타카토탈 풋볼을 바르샤에 이식한다. 부임 첫 시즌에만 13명의 선수가 대거 영입되었다. 그리고 그가 감독에 재임하는 동안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온 호세 마리 바케로와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치키 베히리스타인 등 바스크 출신 선수들과 훌리오 살리나스, PSV 아인트호벤에서 뛰던 로날드 쿠만, 유벤투스에서 온 미카엘 라우드루프, CSKA 소피아에서 빼어난 실력을 보인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등 빼어난 잠재력과 천재성을 갖춘 선수들이 이때 탄생하게 된 것이다. 유소년팀 역시 같은 방식으로 축구를 해야 한다는 지론을 설파하며 라 마시아 건립 및 유소년 교육에 신경을 쓴 크루이프는 캄 노우 경기장 옆에 위치한 미니에스타니를 찾아 B팀의 어린 선수들의 동태도 살폈다.

당시 바르샤의 B팀은 카를레스 렉사흐 감독이 지휘 중이었는데, 크루이프는 당시 우측 미드필더로 뛰던 펩 과르디올라를 중앙 미드필더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한 뒤 1990년에 그를 1군 선수로 발탁해 팀의 심장 역할을 맡겼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피보테(pivote)로 불리는 이 위치는 현대 축구에서 상대와 중원 대결에서 수비를 주로 펼쳐야 되는 포지션이기에 호리호리한 체형에 기술이 좋은 과르디올라를 선발한 것이 큰 논란이 되었다. 이에 크루이프는 이 위치에서 공을 가지고 공격을 펼쳐 라인 전체를 공격적으로 끌어올리는 이른바 현재의 바르샤 팀 스타일, 그러니까 소유와 지배 그리고 전진 압박을 통한 지속적인 공격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이 '크루이프의 축구'에서 피보테는 가장 영리하고 볼 관리 능력이 가장 뛰어나야 하며 경기 흐름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대신 수비 면에서의 피드백은 그 뒤에 배치된 쿠만과 풀백 수비진이 커버했다. 전방으로 쏠린 대형에서는 수비적인 위험 부담을 수반하나 공격을 최선의 수비로 택한 크루이프의 축구는 부임 첫 시즌 컵 위너스컵 우승을 시작으로 내용과 결과 면에서 일거양득을 이루어 세계 축구의 진보를 불러왔다. 1992년 당시 스페인 언론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한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붙은 동명의 별명을 따서 '드림팀'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이 크루이프의 바르샤를 '드림팀'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다시 크루이프의 바르샤 경력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크루이프호의 첫 엘 클라시코는 실망적이었다. 1988년 10월 22일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2-3으로 졌는데, 이는 당시 바케로, 고이코에체아, 베히리스타인 등 새로 가세한 선수들이 많아 조직력이 갖춰지지 않은 것이 패인이다. 이에 크루이프는 "충분히 비길 수 있는 경기였다. 1-2 상황에서 쫓아간 선수들에게 만족한다."라고 했다. 이어 1989년 4월 첫날의 안방경기에서 무득점으로 비기면서 숙적 레알 마드리드의 4연패가 달성된 것이다.

그러나 크루이프호는 절치부심하여 1989년 10월 7일에 처음으로 엘 클라시코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일등공신이 당해 영입한 쿠만과 라우드럽이었는데, 이때 쿠만은 페널티킥으로 2골을 기록해 3-1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 2월 15일 마드리드 원정에선 살라나스가 두 골을 넣었지만 2-3으로 패하면서 크루이프는 경질 위기를 맞았다. 레알 마드리드의 5연패를 저지하지 못한데다 엘 클라시코에서의 패배도 뼈아팠다.

그런 크루이프를 수렁에서 구해낸 것은 1990년 4월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이었다. 역시 엘 클라시코로 펼쳐진 결승전에서 기예르모 아르모와 살라나스의 골로 2-0 완승을 거두며 코파 델 레이 트로피를 차지했다. 이에 누녜스 회장이 크루이프를 지지하여 그를 유임시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은 감정이 격앙된 경기였다. 그 증거로 경기 당시 퇴장된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수인 페르난도 이에로는 "내게 이 결승전에서 가장 기분 나쁜 부분은 우승컵을 스페인 사람들이 따내지 못한 것"이라고 민족 정서를 자극해댔다.

1990/91 시즌의 엘 클라시코는 1승 1패로 호각이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홈팀인 레알 마드리드가 0-1로 진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의 연속 V5를 끝내버린 상황에서 치뤄졌다.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의 박수를 받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입성한 바르샤가 6년만에 우승컵을 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91/92 시즌의 엘 클라시코는 안방에서 둘 다 비겼다. 이때 쿠만은 원정에서 페널티킥, 안방에서는 환상적인 프리킥으로 득점하여 엘 클라시코의 사나이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 해에는 프랑스의 유명 위성방송채널 카날 플뤼스의 스페인 진출을 축하하기 위해 친선 엘 클라시코가 열리기도 했다. 이후로도 엘 클라시코는 계속해서 시소타기였다. 그러나 이 시즌, 바르셀로나는 삼프도리아를 꺾고 팀 역사상 첫 유로피언 컵 우승을 달성하며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화려한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엘 클라시코의 균형이 완전히 바르셀로나 쪽으로 넘어온 것은 1994년 1월 7일 캄 노우에서 호마리우가 해트트릭을 몰아치며 5-0 대승을 거둔 경기부터다. 이는 크루이프가 선수 시절에 5-0 대승을 이끈 지 정확히 20년만에 감독으로써 또 한번 5-0의 역사를 만들어 그해 코파델레이 준결승에서 당한 완패를 설욕해낸 것이다. 게다가 1995년 5월 마드리드 원정에서도 1-0으로 승리하며 바르샤는 4년 연속 V4를 자축했다. 그의 마지막 엘 클라시코는 1996년 2월 10일 캄 노우에서 열린 경기였다. 이때 바르샤는 코드로의 두 골과 루이스 피구의 골로 3-0 완승을 거두었다. 그 전인 1995년 9월 30일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는 라울 곤살레스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로헤르의 동점골로 비겼다.

그러나 크루이프 감독의 드림팀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 1994년의 챔피언스리그에서 당초 얕보던 AC 밀란에 0-4로 참패한 이후 수페르코파 우승을 빼면 실질적으로 2년에 이르는 시기를 무관으로 보냈다. 이에 따라 크루이프 감독과 누녜스 회장 간의 감정의 골은 점차 깊어졌고, 결국 크루이프는 1995/96 시즌 말미에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크루이프는 장장 8년이라는 바르샤 역사상 최장기 집권 동안에 무려 11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선수 시절보다 더 큰 결실을 맺었다. 그는 역대 최고의 선수에 이어 역대 최고 감독의 반열에도 든 것이다. 그는 선수단 내부에서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상대 팀과의 관계에서 늘 극단적인 지지층과 적대적인 대상을 만들어서 호불호가 갈리지만 그가 최고의 실력자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만만했고, 선수들보다 더 화려하게 언론을 장식했다. 몇몇 선수들과 좋지 않은 이별도 있었고, 위에서 언급한 1994년 챔스 결승전에서 밀란에게 참패하긴 했지만 그의 축구가 이상적이며 아름다웠다는 사실에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가 심어놓은 철학과 스타일이 현재까지도 계속 발전하고 계승되어 현재의 바르샤와 스페인 국대의 축구를 집대성했다.

1996년에 바르샤를 떠난 이후 다시는 지휘봉을 잡지 않았으나, 2009년 카탈루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하여 3년간 재직했다. 그러나 카탈루냐 국대는 라리가 휴식기 동안 단 한 차례의 비공식 경기를 치르는 팀이라 비중이 없었다.

4.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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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이프는 선수 시절부터 담배를 피워왔는데 이후 지도자 시절까지 담배를 태웠다. 워낙에 골초로 유명했던지라 걱정과 우려가 있었는데,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2015년 크루이프는 폐암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가 2016년 3월 24일 향년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기사.

사망 이후 많은 축구 프로그램에서 사망에 대해 다루었다. Sky Sports의 일요일 프로그램인 Goal On Sunday나 Sunday Supplement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크루이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프로그램 이외에도 25~27일날 열린 A매치 기간에는 경기 시작 전에 크루이프를 위한 묵념이 있었다.

4월 3일 펼쳐진 엘 클라시코에서는 경기장 중앙에 'Gràcies Johan'(해석하면 '고마웠어요 요한' )이라는 글귀가 놓여 있었고, 그의 등번호인 14번에 맞춰 전반 14분에는 모든 관중이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의 2:1승.

2018년 4월 5일, 아약스 구단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2018/19시즌부터 아약스의 홈구장의 이름이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로 명칭이 바뀔 예정이고, 크루이프 아레나의 새로운 로고가 발표될 것이다." 고 발표했다.

5. 어록

"공을 가지면 내가 주역이다. 결정하는 것도, 창조하는 것도 나다."
"나는 공을 처음 잡은 순간부터 내가 천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축구는 몸이 아닌 머리로 하는 것이다."
''내 팀에서는 골키퍼가 첫번째 공격수고, 포워드가 첫번째 수비수다.''
''축구는 단순하다. 하지만 단순하게 플레이하는 것은 어렵다.''
"결과 없는 내용은 무의미하다. 내용 없는 결과는 지루하다."[15]
''찬스라는 것은 논리적(logical)이다.''[16]
''포워드는 심각하게 멍청하거나 수면 부족이 아닌 이상 15m 이상 달릴 필요가 없다.''
''모든 불리함은, 각각의 유리함을 가지고 있다.''
''스로인은 언제나 내가 도맡아했다. 왜냐하면, 스로인한 공이 내게 되돌아오는 순간 나는 경기장에서 유일하게 노마크인 선수가 되는거였으니까.''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스페인에서는 경기에 나가기전 22명의 선수들이 한명도 빠짐없이 성호를 긋는다. 만약 효과가 있는거라면 모든 경기의 결과는 무승부가 될테지.''
''잉글랜드 축구는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가장 재미있는 축구다. 선수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압박이란건 뛰어난 테크닉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11명보다 오히려 10명일 때가 팀은 잘 돌아가기 마련이다. 농땡이 피우는 놈이 없어지니까.''
''도대체 누가 나한테 축구를 가르칠 수 있지?''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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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이프 감독의 특기할 점이라면 선수로나 감독으로나 최고의 평가를 받았고, 토탈 풋볼의 전도자라는 점과 그에 기인한 축구관이다. 필드 플레이어 전원이 공격 및 수비 가담을 하는 토탈 풋볼이라는 전술의 혁명, FC 바르셀로나 하면 떠오르는 '패스, 점유, 압박'이라는 팀 컬러. 이것이 바로 크루이프가 축구계에 남긴 것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IFFHS는 크루이프를 20세기 유럽 최고의 축구 선수로 선정하였다.

또한 유스 시스템으로 흥한 아약스 출신답게, 팀을 맡자마자 유스 시스템을 정비했다. 덕분에 오늘날 농담 삼아 믿고 쓰는 바르셀로나 유스라고 할 만한 기틀을 마련했다. 덕분에 네덜란드인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바르셀로나의 최고의 레전드로 남아 있다.

6.1. 게으름은 컨셉?

크루이프는 엄청난 게으름뱅이에다 골초였다고 한다. 훈련은 죽도록 싫어하고 연습도 거의 안 했다고 한다. 선수 시절 경기에 뛸 때도 하프타임만 되면 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어느 네덜란드 감독은, 인생의 불공평을 언급할 때 크루이프를 예로 들며 "훈련은 죽도록 싫어하지, 몸 관리도 대충 하지, 담배는 뻑뻑 피워 대는 놈인데도 타고난 재능 하나만으로 세계 최고다."라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요한 크루이프FC 바르셀로나 감독이 되고 난 후 제자였던 미카엘 라우드루프에게 "너는 항상 80~90%의 노력밖에 안한다. 네가 빈민가에 태어나서 오직 축구 하나만 보고 살 수 있었다면, 그래서 절실함에 재능을 100% 발휘한다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다."라고 갈궜다. 그리고 라우드루프는 FC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 199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안 하고 논다고' 욕을 먹던 라우드럽은 스완지 시티 AFC의 감독이 되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축구에 헌신하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하다(...)[17][18]

그리고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의 자신의 젊은 시절과 똑같은 게으른 천재같은 선수를 만나는데, 그 선수가 호마리우. 한 번은 휴가를 보내 달라고 조르자 빡쳐서 "다음 경기에서 3골 넣으면 보내줄게!"라고 말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호마리우는 휴가를 즐기러 간다. 그런데 그 해트트릭을 넣은 상대팀이 레알 마드리드 CF. 다시 말해 엘 클라시코였다.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더 무서운 건 호마리우는 3골 말고도 1어시스트까지 기록했다. 그날 경기는 바르셀로나의 5:0 승.

게으른 선수의 이미지와는 달리 밑의 야구에 대한 일화에서 보듯 불성실한 선수는 아니였다. 누구보다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에 열중하던 사람이다. 그의 축구에서 체력훈련이 중요하지 않았을 뿐.물론 체력훈련은 축구에서 무지막지하게 중요하다, 그같이 타고난 케이스를 제외하고 그가 구현하던 토탈 풋볼은 전례 없이 체력보다는 책임 아래의 자율성을 강조하던 축구를 하였기 때문에 게으른 선수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이다. 또한 크루이프는 이론보다 경험을 중요시하는 쪽이어서.. 요즘으로 치면 자율적인 몸관리를 하는 프로선수를 보고 게으르다고 한 꼴.

하지만 아무리 다양한 시각으로 봐도 결국 축구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도 다리에 쥐가나고 심장이 터질듯 뛰어다니면서. 아무리 그가 지략적인 관점에서 부지런하게 공부를 했다고 한들, 평균 이하의 체력훈련으로 그라운드를 20년이나 쌩쌩 달렸다는 것 만으로도 타선수들 입장에선 부러움의 대상이자 게으른 천재 그 자체.

7. 여담

  • 10세의 어린 나이에 아약스 아카데미에 입단했으나 처음에는 야구를 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야구를 하기도 했다[19]. 포지션은 포수. 그러나 5년 후 코치가 축구를 선택하라고 촉구했고 그는 축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인지 자신이 감독 시절 야구에서 배운 것을 축구에 접목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기도 했다.
    나는 야구에서 집중적으로 배운 세부적인 부분들을 나중에 축구에서도 유용하게 활용했다. 투수의 투구를 결정하는 사람은 포수다. 투수는 필드 전체를 볼 수 없지만 포수는 볼 수 있다. 또 포수는 투수의 공을 받아 어디로 던질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공간과 모든 선수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감독도 나에게 공을 받기 전에 그 공을 어디로 패스할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프로 축구선수로 뛰면서 어린 시절 야구에서 배운 것, 즉 언제나 경기장 전체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떠올렸고 그것이 나의 강점이 되었다. 야구는 훈련으로 재능을 키울 수 있는 대표적인 스포츠로, 축구와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순간 스피드, 슬라이딩, 공간 인지력이 요구되는 것도 그렇고, 한 수 앞서 생각하고 여러 다른 수를 생각해야 하는 것도 비슷하다. 이는 론돈 훈련[20]을 토대로 하는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 축구'와도 일맥상통한다.

    내가 야구를 축구에 잘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뒤로도 야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감독 시절 나는 야구의 교훈을 축구에 아주 성공적으로 접목했다. 축구에서 미리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야구도 그렇다. 몇 분의 일 초 사이에 공간과 가능성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야구를 잘하려면 주자와 홈 사이 거리를 판단하고 주자가 들어가기 전에 공을 홈으로 보내야 한다. 전술 면에서도 배운 바가 있다. 옳은 결정을 내렸으면 그것을 기술적으로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후략)



    《마이 턴》(my turn)
  • 1974 서독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의 스폰서이던 아디다스가 독일 기업인 것을 알고 세계 전쟁에서 네덜란드를 공격한 국가의 기업 스폰은 받을 수 없다면서 나홀로 삼선 유니폼이 아닌 이선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크루이프는 푸마의 스폰싱을 받는 선수였고 푸마와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아디다스 삼선의 한 줄을 떼고 경기한 것이다.[21] 이는 나중에 크루이프의 아이덴티티가 되기도 했다.입단식에서 스폰서의 옷을 입었던 모 선수가 생각난다
  • 1974년 서독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크루이프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크루이프 위주로 팀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 크루이프와 불편한 관계에 있던 선수들이 죄다 국가대표팀에서 퇴출되었다. 대표격으로 PSV 에인트호번 소속의 얀 반 베베른빌리 판데르카윌런이 있는데 이들은 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루이프와의 불화로 대표팀에서 퇴출되었다.
  • 바르셀로나 감독시절, 다혈질의 '미친 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와 역시 멘탈로는 어디서 절대로 지지 않았고 별명이 심지어 'animal'이었던 호마리우가 서로 팀의 넘버원이라고 투닥거렸다. 이를 보던 크루이프는 "놀고들 있네. 내가 감독이니까 내가 최고다. 그러니까 제발 말 좀 들어."(...)본인 현역 시절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라며 논쟁을 종식시키려 했으나 저 둘이 어디 말 들으란다고 들을 인물들인가. 결국 서로 공을 10번 차서 크로스바 맞추는 내기를 하기로 했다. 다른 선수들도 간만에 흥을 돋울 거리가 생기니 승부에 관계없이 모두 참가했다.

    결과는 스토이치코프 2번, 호마리우가 3번. 이에 호마리우가 자기가 최고라고 나대자 크루이프는 단숨에 6번을 성공시켰다. 호마리우가 주제도 모르고 겁도 없이 감히 크루이프에게 인정할 수 없다고 개기자 가만히 듣던 크루이프는 갑자기 왼발로 공을 냅다 갈기는데 그게 그대로 크로스바에 적중했고 호마리우는 바로 아닥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후, 크루이프는 이 일화를 밝히면서 마지막 슛은 뽀록이였다고 자백했다(...).
  •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토탈 풋볼을 시도할 당시 워낙 전례가 없던 전술인 만큼 감독이나 선수나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는데, 특히 선수들은 빡센 체력 훈련에 죽어나는 판국이었다. 정작 크루이프는 토탈 풋볼은 체력이 아니라 테크닉과 공간이며, 체력을 아끼는 전술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토탈 풋볼은 점유율을 높게 가져가면서 체력을 아끼고 압박 시간을 줄이는 형태의 축구다. 그리고 측면, 중앙 등에서 공을 돌리다 보면 자연적으로 상대의 압박이 거세어져서 볼을 빼앗기고 마는데 그것을 극복해내는 것이 바로 탈압박이다. 탈압박의 전제가 되는 것이 볼을 다루는 기술 즉, 테크닉인 것이다.
  • FC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 마른 체형 때문인지 '갈비'라는 별명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
  • 자신의 축구관을 결코 굽히지 않아서 설화도 자주 일으켰다. 물론 달리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독 개인의 신념에 관한 것이니, 몇 번은 망신을 톡톡히 당하기도 하고 몇번은 상대를 관광보내기도 했다.
파일:external/grafik.rp.pl/675443,698424,16.jpg* 크루이프가 완벽히 농락당한 유명한 사례는 1993-94 UCL 결승 대 AC 밀란전이다.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인 1993-1994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AC 밀란에게 4:0으로 완패당하며 드림팀이 붕괴됐다. 게다가 당시 AC 밀란은 프랑코 바레시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가 경고 누적으로 결장했고, 마르코 판바스턴은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이 생겼는지 경기 전 "밀란은 공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는 드사이 같이 형편 없는 놈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는 끔찍하게 멍청한 팀이다. 내일은 우리들이 축구 레슨을 시켜주겠다." 라는 크루이프의 어록이 떠도는데 출처가 불분명하다. 크루이프가 승리를 자신한 것은 사실이지만 크루이프의 이때의 오만한 언행은 누군가의 과장이 의심 가는 부분이다. 실제 발언을 요약하자면 "바르셀로나는 공격적이고, 밀란은 수비적이다."[22][23] 결과적으로 특별한 점이 없는 밀란의 공격수(...) 다니엘레 마싸로에게 전반에만 2골을 처먹고 후반에는 데얀 사비체비치에게 1골, 마지막으로 마르셀 드사이에게 1골 먹으며 패했다.
* 주제 무리뉴가 이끄는 인터밀란을 두고 안티 풋볼 드립을 쳤다. 과거 첼시 시절부터 무리뉴와 크루이프는 설전이 이어졌는데, 무리뉴한테 넌 그저 트로피나 수집하는 기계일 뿐이지!라고 디스를 걸었고, 주제 무리뉴는 2010-2011 국왕컵 결승 후 난 트로피만 수집하는 감독이 되는 게 참 좋다.라고 응수했다. 화가 난 크루이프가 넌 스페셜 원이 아니라 선수 시절 별볼 일 없는 듣보잡이었다고 응수하니 무리뉴는 "아직도 과거 속에 사는 크루이프에게서는 전혀 배울 게 없다. 다만 어떻게 하면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0-4로 질 수 있는지 가르쳐달라." 고 강하게 디스했다.
  • 반대로 관광보낸 사례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브라질. 예전의 브라질과 전혀 다르게 수비 축구, 점유율 축구를 들고 나온 둥가 감독에게 "수비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그들은 더 이상 돈 주고 볼만한 가치가 없는 팀"이라며 비판했다. 둥가 감독은 "싫으면 보지 마라"고 맞디스를 했으나...결국 네덜란드에게 2:1로 패했다.
  •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조국 네덜란드조차 비판을 피하지는 못했다. 스페인결승전에 앞서 "나는 당연히 내 조국이 우승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네덜란드 축구는 아름답지 않다. 내가 만들기 위해 노력한 토탈 풋볼을 그들은 버렸다. 반면 스페인의 축구는 내 축구다.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축구가 이제 결실을 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페인이 우승하기를 바란다."라고 발언했고, 그 말이 이루어졌다. 물론 네덜란드 축구의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토탈 풋볼이라는 이상만을 좇으며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 비난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긴 하다.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를 그렇게나 증오한다.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바티스투타는 특별히 크루이프에게 밉보일만한 일은 한 적이 없다. 그저 크루이프가 가장 증오하는 스타일의 선수였을 뿐(...)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아르헨티나가 기대 미만의 성적을 내자 바티스투타에게 대놓고 "너 때문이다. 바티 너 자체가 패배다." 라며 디스를 날렸다. 그리고 애초에 "바티스투타는 패스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라며 싫어했다.
  • 반대로 에르난 크레스포를 평가하길, "크레스포는 2인자로 썩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재원이다. 특히 1인자가 바티라면 더더욱 아까운 재원이다. 내가 1998년 아르헨티나 감독이었다면 크레스포를 주전으로 기용했을 것이고, 그랬으면 우승은 프랑스가 아니라 아르헨티나가 차지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2014년 들어서 바르셀로나의 축구 스타일 변화에 실망을 표했다. 크루이프는 라포르타 재임 시기인 2010년부터 명예회장으로 있었는데, 산드로 로셀이 취임하면서부터는 구단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로셀이 횡령사건으로 사임한 이후에도 구단에 복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구단이 재정적인 이유로 유니세프 로고를 포기했다거나, 티키타카로 대표되는 토탈 풋볼을 포기하려는 듯한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클럽의 진짜 문제는 팀 내부에 있어야 알 수 있다. 어떤 부분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고, 그 부분을 작동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난 바르사 내부의 사람들과 접촉을 이어가지 않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봐서는 구단 내부 복귀를 노리는 듯한데, 크루이프의 말대로 유니세프를 다시 달고, 티키타카로 다시 돌아가면 바르셀로나의 미래가 우울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에[24] 구단 내부 복귀는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했다.
  • 바르토메우 체제의 바르샤 역시 그의 지적을 피할 수 없었는데, 네이마르의 이적에 관한 비판도 있었지만, 바르토메우에 대놓고 적대적이었고, 2015년 회장선거 때도 공개적으로 라포르타를 지지했다. 이 움직임에 팬들 사이에서도 간섭이 심하다 vs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소리다. 로 말이 갈렸지만, 이후 바르토메우와 그의 측근들이 바르샤 역대 최악의 행보 를 보여주고, 네이마르는 구단과 이사회를 가지고 논 것도 모자라[25], 팬들에게도 빅엿을 먹이고 떠났기에, 결과적으론 크루이프의 말이 옳았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 소위 축구계 최고 레전드라는 펠레, 마라도나가 딱히 머리가 뛰어난 인상이 아니기 때문에 유독 특출나 보이는 면이 있다. 펠레 같은 경우는 저주나 망언으로 유명하며 마라도나 역시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여러모로 부족하다는 평판이 많은데 비해 크루이프는 감독으로서도 대성했고, 무엇보다 축구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던져놓았다 보니.[26]
  • 1991년에 금연홍보대사로 활동할 당시 찍은 금연 홍보 광고.
    담배는 축구가 나에게 준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그가 출연한 금연 홍보 광고 대사 중에서.

    선수 시절부터 매일 20개피를 피운 담배 때문에 건강을 해쳐 결국 1991년 2월 27일에 바르셀로나 감독 재임 시 심장우회수술을 받고 난 뒤 금연하여 금연홍보대사로 활동했지만 이 후에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라커룸에서 기자들과 인터뷰 중에도 담배를 피워대다 두 차례 심장 수술을 더 받은 후에 담배를 끊었다.
  • 츄파춥스 로도 유명하다.[27] 수술을 받고 담배를 끊기 위해서 크루이프는 츄파 춥스를 물었고, 이 모습은 TV를 통해 유명해졌다. 그리고 2016년 4월 3일, 바르샤는 이 날의 경기를 보러오는 사람들에게 크루이프의 추모를 위해 츄파춥스를 건내주기도 했다.
  • 페예노르트 시절 PSV 선수였던 허정무와 대결하기도 했다. 무릎팍도사에서 허정무가 과거를 회상할 때 크루이프의 거친 플레이로 심하게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팬들은 국민 스타였던 크루이프에게 야유를 퍼부어 감동을 먹었다는 말을 했다. 그 부상은 코뼈 골절.
  • 뜬금없는 일이긴 한데 그의 사위였던 헤수스 앙고이가 월드리그 미식축구 리그의 바르셀로나 드래곤스에서 키커로 활약한 적이 있었다.
  • 여담으로 박지성이 맨유로 이적할 때 도움을 준 적이 있다.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하기 전 워크 퍼밋 발급 때문에 이적 과정에서 문제가 한번 발생했는데 워크퍼밋이 나오려면 2년간 열린 국가대표 경기 중 75% 이상을 뛰어야하지만 대한축구협회에서는 박지성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으나, 선수 보호 차원에서 부르지 않았던 경기가 여럿 있었고, 그 결과 64% 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나머지 방법인 유명 축구인 3명에게 추천서를[31] 받아야 했는데, 원 소속팀 감독인 거스 히딩크와 이적팀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말고도 1명이 더 필요했는데 박지성과 조금도 접점이 없었던 크루이프가 써줬다. 그 이유는 2005년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박지성의 플레이를 보고 감명받아서였다고. 히딩크에게서 부탁을 받은 것도 있지만, 크루이프는 평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사는 성격이라, 꼭 히딩크의 부탁 때문에 추천서를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해당 경기를 보고 박지성에 대해 극찬을 하기도 했고. 어찌됐든 박지성은 워크 퍼밋 발급에 성공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입단하게 된다.
  • 젊은 시절 모습이 루카 모드리치와 닮았는데, 플레이 스타일마저 비슷하고, 자신의 조국을 준우승시킨 것까지도 똑같다. 모드리치도 크루이프를 우상으로 삼았을정도.[32] 비교하자면 크루이프는 좀 더 공격적이였고, 모드리치는 샤비 쪽에 가까울 정도로 조율하는 쪽에 특화되어 있다.

7.1. 기록

7.1.1. 선수 기록

  • 페예노르트 (1983/84)
    • 에레디비시 : 1983/84
    • KNVB컵 : 1983/84

7.1.2. 감독 기록

  • 아약스 (1985/86 - 1987/88)
    • KNVB컵 : 1985/86, 1986/87
    • UEFA 컵위너스컵 : 1986/87
  • FC 바르셀로나 (1988/89 - 1995/96)
    • 라 리가 : 1990/91, 1991/92, 1992/93, 1993/94
    • 코파 델 레이 : 1989/90
    • 유러피언컵 : 1991/92
    • UEFA 컵위너스컵 : 1988/89
    • UEFA 슈퍼컵 : 1992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 1991, 1992, 1994

7.1.3. 수상 실적

  •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 : 1967, 1969, 1971, 1972, 1984
  • 유러피언 골든 슈즈 : 1968
  • 발롱도르 : 1971, 1973, 1974
  • 네덜란드 올해의 스포츠 선수 : 1973, 1974
  • FIFA 월드컵 골든 볼 : 1974
  • FIFA 월드컵 베스트 일레븐 : 1974
  • 돈 발론 어워드 : 1977, 1978
  • 옹즈도르 : 1986, 1987
  • FIFA World Cup 역대 베스트 일레븐
  • 20세기 올스타
  • FIFA 100
  • World Soccer Greatest XI of All Time: 2013
  • 월드 사커 어워드 올해의 감독 : 1987
  • 돈 발론 올해의 감독 : 1991, 1992
  • 옹즈도르 올해의 감독 : 1991, 1992

8. 크루이프에 대한 말말말

파일:external/www.myfootballfacts.com/2525.jpg
그가 역대 최고의 유럽 선수였냐고? 미드필드에서 그는 최고였다. 수비로서도 최고였다. 공격수로서도 최고였다. 그는 최고였다.
테리 베너블스(前 FC 바르셀로나 감독)
크루이프는 작은 소년마저도 게임에 관심을 갖게 할 정도로 전술적으로 완벽했다. 그것이 그가 어렸을 때부터 전술에 매우 큰 흥미를 가졌던 이유이다. 그는 항상 경기의 상황들을 매우 명확히 봐서 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될지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마르코 판바스턴
선수로서 그는 축구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았다. 크루이프는 바르샤에 와서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오늘날의 바르샤는 그와 함께 시작했다. 그는 우리의 정체성의 표현이다. 그는 우리가 사랑하는 스타일의 축구를 탄생시켰다.
후안 라포르타 (前 FC 바르셀로나 회장)
1970년대네덜란드를 좋아한다. 그들은 날 흥분시켰고 크루이프는 최고였다. 그는 자신의 축구와 함께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 아약스는 축구를 바꿨고 그는 그 축구의 리더였다. 그가 원한다면 그는 피치 위의 어떤 포지션에서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에릭 칸토나
살면서 이 선수가 진짜 브라질 선수면 좋았을텐데.. 라고 생각했던 선수들이 누구누구 있었냐고요? 음... 그러면 일단 크루이프부터 뽑아야겠군요.
펠레
그가 선수로서 바르샤에 있었던 시간은 스페인 축구와 바르셀로나를 바꿔놓았다. 그는 단독으로 스페인에 새로운 스타일의 축구를 도입했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에우제비우
그가 없었다면 이 세계에 사비이니에스타같은 선수들은 존재할 수 없었다.
오리올 도메니크(저널리스트)
크루이프는 스페인에서 축구의 개념을 재창조했다. 오늘날의 바르셀로나스페인은 그가 바르샤를 지휘했었다는 궁극적인 증거이다.
미겔 앙헬 나달(前 FC 바르셀로나 수비수)
만났던 모든 감독들이 중요했지만 그 중에서도 크루이프가 가장 중요했다. 그의 훈련과 전술은 똑같지 않았고, 경기의 승패가 갈리는 200만가지 디테일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펩 과르디올라
요한 크루이프는 그림을 그렸다. 이후의 바르셀로나 감독들은 단지 그 그림을 회복시키거나 향상시켜왔을 뿐이다.
펩 과르디올라
진정한 축구 브레인이다. 그는 최고의 컨트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창조적이었고 공과 함께 본능적으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법을 부릴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골을 넣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 기술적인 선수였지만,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았다. 그는 그와 함께 하는 선수들의 강력함과 함께 플레이했다.
보비 찰튼
그는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바르셀로나의 토대를 쌓았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의 지배를 멈추게 한 바르셀로나의 중대한 전환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바르셀로나에 합류하기 전 그리고 전환이 진행되기 전 2년간, 크루이프는 거대한 정리를 진행했다. 그것은 혁명과도 같았다.
로날드 쿠만
요한 크루이프는 축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그가 캄 노우에 자신의 철학을 세우지 않았다면, 리오넬 메시는 바르샤에 오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한 13세의 소년인 채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이니에스타 역시 선택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레이엄 헌터(저널리스트)
크루이프는 그가 항상 옳다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는 정말로 항상 옳았다는 것이다.
조니 보스만(前 AFC 아약스 공격수)
나에게 그는 역대 최고이다.
미셸 플라티니
크루이프가 평안히 잠들었다. 그의 유산은 영원할 것이다.
리오넬 메시
크루이프는 월드컵에서 우승하지 못했어. 나는 했지.
호마리우
크루이프가 나보다 나은 선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월드컵을 제패했다.
프란츠 베켄바워

[1] 플레이메이커 성향이 강한 공격수였다. 팀에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수행했으며, 기본적으로 전방 중앙 공격수 포지션에 위치 했지만 프리롤 처럼 움직이면서 플레이메이킹을 주도하며 패스, 드리블, 득점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플레이메이커 유형의 공격수였다.[2] 14번을 달게 된 이유가 특이한데, 아약스 시절 동료 게리 뮤렌이 라커룸에서 경기 직전까지 자신의 7번 유니폼을 찾지 못하자 크루이프가 자신의 9번 유니폼을 주고 14번 유니폼을 입었다.[3] 유래 자체가 전설에서 유래했으며, 이 전설을 소재로 한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The Flying Dutchman)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방황하는"이라는 번역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많지만 그 자체로 국내 음악계에서 고착되어 고유명사화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는 추세다.[4] 단 Wagner라는 성씨는 작곡가 Richard Wagner(리하르트 바그너)를 봐도 알듯이 사실 독일 성씨이기 때문에 호너스 와그너는 사실 독일계이다.[5] 유로화 이전의 네덜란드 화폐. 환산하면 약 200만 달러, 92만 파운드.[6] 그 과정에서 한 번 허정무의 코뼈를 부러뜨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언론들이 이를 비판하자 요한 크루이프 옹 왈. 저 한국 선수가 너무 잘해서 제치려다가 그런 사고를 저질렀다고 한 건 유명한 일화.[7] 설성가상 라이벌인 베켄바워의 서독은 대회 3위를 차지했다.[8] 그나마 1실점도 불가리아에게 4:1 대승을 거두는 와중에 내준 실점이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었다.[9] 게르트 뮐러가 후반에 넣은 골이 오프사이드 선언으로 취소되었으나, 이는 오심으로 밝혀졌다. 또 종료되기 직전 베른트 횔첸바인이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넘어졌으나 심판의 휘슬이 울리지 않았다.[10] 간접 페널티킥은 몇몇 리그에서는 금지하는 경우도 있다. EPL이나 세리에 A등으로 기억하는데, 아시는 분 추가바람.[11] 이 시절 페렌츠 푸스카스를 주장으로 한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은 일명 '매직 마자르'로 불리면서 A매치 34연승이라는 황당무계한 기록을 선보였다. 이들의 연승 행진이 멈춘 것은 1954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으로, 서독에게 3:2로 패배하였다. 16강에서 월드컵에 처음 참가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9:0으로 발린 경기도 포함한다.[12] 그렇다고 해서 토탈 풋볼을 완성시킨 리누스 미헬스나 요한 크루이프의 위대함이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다. 저런 개념을 완성해 낸 리누스 미헬스나 전혀 새로운 개념에 완벽히 적응한 크루이프나 위대한 사제지간이다. 이 두 사람과 당시 AFC 아약스,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으로부터 현대축구가 태동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13] 앞줄 가운데 양복 입은 사람이 크루이프 감독이다.[14] 티키타카 전술의 골자인 "짧은 패스를 통한 공의 소유와 압박으로 공간을 선점" 은 크루이프의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토탈 풋볼 철학을 만든 리누스 미헬스가 있다.[15] Quality without results is pointless. Results without quality is boring.[16] Toeval is logisch.[17] 종목을 불문하고, 어떤 선수들은 은퇴하고 나서나 은퇴할 즈음해서 아쉬움을 표현하곤 한다. 젊었을 때 잔소리를 무시하고 놀던 내가, 그 때 더 열심히 했다면 훨씬 더 좋은 기록을 남기면서 오래 할 수 있었을 텐데 이 나이가 돼서야 소중함을 깨달아서 아쉽다고. 스포츠가 아니라 인간의 인생이란게 그렇다.[18] 야구계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멋도 모르고 운동만 했는데, 나이 먹고 야구가 뭔지 알게 되니까 이제 몸이 안 따라준다.'[19] 사실 네덜란드가 유럽 국가 중 진귀하게 야구가 그나마 인기 있는 나라 중 하나이다[20] 선수들이 가깝게 모여서 패스를 주고받는 훈련 방식.[21] 아이러니하게도 푸마 역시 독일 기업이며 창업주들은 형제지간이다.[22] 당시 감독인 파비오 카펠로는 오늘날 무리뉴를 연상케 하는 1골 넣고 잠그기 전술로 밀란을 이끌었다.[23] 실제 발언은 밀란이 특별한 점이 없고 수비를 중시한다 에 가까운 내용으로 당시 공격진, 미들진의 브리안 라우드루프, 마르코 판바스턴, 다니엘레 마싸로, 데얀 사비체비치, 장 피에르 파팽 등을 등을 생각하면 이것도 엄청난 디스이기는 하다. 그리고 "우리는 호마리우랑 계약했고, 밀란은 드사이랑 계약했다. 그거면 설명이 될 것이다."라며 드사이를 지목했는데, 이건 반박의 여지없이 무례한 행동이다.[24] 유니세프 문제는 재정적 여건이 허락을 하지 않고, 티키타카를 다시 강화하는 것은 2014년 시점에서는 무리가 되어버렸다.[25] 브라질 선수 영입건, 주급 관련[26] 그러나 마라도나는 몰라도 펠레는 체육부 장관직까지 역임한 노련한 정치인으로 축구계 위상으로 보나 뭘로 보나 크루이프보다 더 출세했으면 했지 못하지 않다. 작금의 그의 이미지는 그저 외국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코칭스태프에서 활동한 게 아니고 미디어가 만들어준 저주 이미지가 더해져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27] 참고로 츄파춥스는 카탈루냐 지역을 연고로 한 기업이며, 본사가 바르셀로나에 있다.[28] 히딩크 감독이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으며,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두리를 지도했다고 한다.[29] 2001년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리버풀 FC와의 결승전에서 89분 극적인 동점골로 연장 승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연장 후반 막판 골든 자책골이 작렬하며 5-4로 석패했다.[30]게오르기우스의 카탈루냐식 표기이다.[31] 즉 보증인 3명이 필요한 것[32] 그만큼 원래는 FC 바르셀로나의 팬이였으나 토트넘에서 나오려던 당시 바르셀로나는 세 얼간이가 건재했던 시절이라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했다.[33] 한준희 장지현의 원투펀치에서 요한 크루이프를 언급하며. 영상(3분 18초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