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8 00:59:59

에르난 크레스포

파르마 칼초 1913
Parma Calcio 1913 SrL
파일:Hernan+Crespo+MIPTV+2018.jpg
이름 에르난 크레스포
Hernán Crespo
본명 에르난 호르헤 크레스포
(Hernán Jorge Crespo)
출생 1975년 7월 5일 ([age(1975-07-05)]세) /
아르헨티나 플로리다
국적 파일:아르헨티나 국기.png 아르헨티나
신체 184cm | 체중 78kg
직업 축구선수(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감독
축구경영인
소속 선수 CA 리버 플레이트 (1993 - 1996)
파르마 칼초 1913 (1996 - 2000)
SS 라치오 (2000 - 2002)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02 - 2003)
첼시 FC (2003 - 2008)
AC 밀란 (2004 - 2005/임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06 - 2008/임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08 - 2009)
제노아 CFC (2009 - 2010)
파르마 칼초 1913 (2010 - 2012)
감독 파르마 칼초 1913 (2014 - 2015/유스팀 감독)
모데나 FC 감독 (2015 - 2016)
CA 반필드(2018 - )
스태프 파르마 칼초 1913 (2017 - 2018/부사장)
국가대표 64경기 35골(아르헨티나 / 1995~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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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발단티노(Valdanti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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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시절
2.1. 클럽2.2. 국가 대표
3. 플레이 스타일4. 스태프5. 여담6. 크레스포에 대한 말말말
6.1. 시종일관 콩라인
7. 기록
7.1. 대회 우승7.2. 리그 기록7.3. 개인 수상

1. 개요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로 현재 CA 반필드 감독이다.

2. 선수 시절

2.1. 클럽

93-94 시즌 리버 플레이트에서 데뷔해 25경기 13골을 넣으며 프로선수생활을 시작했고 파르마에서 뛴 마지막 시즌에 22골을 넣으며 2000년 당시 사상최고의 이적료인 4850만 파운드에 SS 라치오로 이적,[2] 라치오에서 26골로 안드리 솁첸코를 제치고 득점왕을 차지하며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02시즌 호나우두를 떠나보낸 인테르에 입단했으나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파일:에르난 크레스포(첼시 FC 시절).jpg
2003년에는 1680만 파운드에 첼시로 이적한다. 첼시에선 좋다고는 볼 수 없지만 나쁘지도 않은 활약을 했다.(49경기 20골) 특히 05-06 시즌에 크레스포의 활약은 결코 못 했다고만 볼 수는 없으며[3] 반면 드록바는 이적 초기부터 그 피지컬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 하고 다이빙 논란에 휩싸인 탓에 무리뉴를 제외하고 팬들마저 그를 신용하지 않았기에 크레스포가 더 낫다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무리뉴 감독으로부터 신임을 잃으면서 드록바에게 밀리게 되었다. 크레스포는 영국 문화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고, 언어 문제 및 아내의 유산 등 악재가 겹치며 우울증 증세까지 찾아왔다. 이 당시 진지하게 은퇴를 고려했었을 정도. 축구적인 측면보다도 개인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겪게 되면서 실패를 거뒀다.

결국 크레스포는 이탈리아의 AC 밀란과 인테르[4]로 임대를 가며 이탈리아쪽으로 임대생활을 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파일:이스탄불 기적의 희생양이 된 크레스포.jpg
빅 이어를 눈앞에서 놓친 크레스포
AC 밀란으로 임대갔을 때 리버풀 FC와의 2004-05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2골을 넣었지만 결국 후반전에 3:3 동점까지 따라잡히고 승부차기 끝에 패해 진 경기가 이스탄불의 기적의 희생양이 되었다.[5] 첼시와의 계약 기간이 끝난 뒤 인테르로 완전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은퇴 후의 인터뷰에선 무리뉴와의 관계가 환상적이었다고 밝혔다.

인테르 임대도 순탄치 않았다. 인테르에는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아드리아누라는 강력한 투톱이 있어서 쉽게 주전을 먹을 수 없었다. 2006년 기점으로 아드리아누가 멘탈이 터져버리면서 크레스포에게 밀리긴 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 시즌부터였다. 07/08 시즌 아드리아누는 사실상 전력 외로 취급되었지만 그 아드리아누를 밀어낸 훌리오 크루스[6]가 어느샌가 크레스포마저 밀어내고 이브라히모비치와 투 톱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도 이 때까지만 해도 크레스포가 완전히 밀렸던 것은 아니고 크루스의 슈퍼 서브 역할을 대신 이어받은 것이기에 출전 기록이 나쁘지는 않았고 크레스포 본인도 인터밀란에 만족해 첼시와의 계약이 끝난 뒤에도 인터밀란 이적을 택했다. 그런데 08/09 시즌에 평소 자신과 묘한 악연이 있던 무리뉴가 있었다. 이에 스태프들과 불화를 겪으며 13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하고, 본인도 2골밖에 넣지 못하는 등 영 좋지 못한 활약을 펼치다 제노아로 이적하게 된다. 그후 2009년 파르마로 이적한 후 2012년까지 현역으로 뛰다가 유로 2012 직후 현역에서 은퇴했다.

2.2. 국가 대표

파일:에르난 크레스포(국대 시절).jpg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골목대장
1993년 U-20에서는 아르헨티나가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1991년 대회에서 후안 에스나이더가 큰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징계를 받았고 그것 때문에 크레스포는 U-20에 출전하지 못했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해서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나이지리아에게 패해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 때 크레스포가 득점왕으로 뽑혔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는 6살 많은 가브리엘 바티스투타1996 애틀란타 올림픽 은메달 멤버들로 구성되어 출전했다. 아직 전성기였던 바티와 포지션이 겹치는 크레스포는 계속 벤치신세였다. 딱 한 번 그라운드에 나올 기회가 생겼는데 잉글랜드전에서 승부차기.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 딴 선수들은 다 성공한 페널티 킥을 크레스포 혼자 실축하고 만다. 다행히 잉글랜드에서 2명이 실축해서 8강 진출에 성공하나 크루이프 이후 가장 강력한 스쿼드라는 히딩크네덜란드를 만나 패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은 그야말로 아르헨티나 전체의 흑역사, 또한 그에게는 더더욱 흑역사. 조국이 디폴트 선언[7]한 터라 본선경기가 치뤄지는 대한민국&일본으로 올 때도 선수들의 자비를 털어 왔으며[8] 같은 조에 있던 잉글랜드데이비드 베컴, 마이클 오언 등의 스타들을 앞세워 팬들의 열성적 응원을 받은 데에 비해 아르헨티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저 그런 시선들 뿐이였다. 이 때 그는 바티스투타와 전후반을 도맡아 뛰었는데 그의 첫 골을 성공시킨 스웨덴전. 그는 경기장에 주저 앉아 울었다. 그와 동시에 경기 종료휘슬이 울리며 아르헨티나는 탈락했다. 팀이 탈락하는데 기뻐할 선수가 어디 있을까? 이 모습을 본 국내축구팬들도 매우 슬퍼하며 위로의 메세지를 보냈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는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왔다. 그는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죽음의 조인데도 불구, 드록국 코트디부아르를 격파하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6:0으로 격파하는 등 선전했으나 8강에서 독일에게 패해 그의 월드컵은 끝났다. 비록 팀은 8강에서 탈락했으나 활약을 인정받아 실버슈를 받았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절친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이 국가대표로 차출되었지만 자신의 자리에는 곤살로 이과인이 들어감으로 인하여 차출되지는 못했다. 그걸로 대표팀 여정은 끝났다.

3. 플레이 스타일



컴플리트 포워드. 양발잡이에 공중볼 장악, 테크닉, 드리블, 피지컬, 패스, 슛, 프리킥, 주력(走力), 활동량, 수비가담 모두 뛰어난 완성형 스트라이커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나 라인 브레이킹과 헤딩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공수 전반을 넘나들며 수비 가담에도 적극적이었다. 격투기 선수를 연상케 하는 큰 키와 단단한 몸에서 비롯되는 뛰어난 몸싸움 능력으로 상대 수비수를 몸빵으로 우겨넣는 플레이에 매우 능해 상대 수비수들에게 크레스포는 공포 그 자체였다. 게다가 덩치에 비해 개인기 능력도 꽤 갖추고 있었다.

투톱이 일반적이고 원톱 쓰는 팀이 희귀했던 90년대와 달리 2000년대 이후 축구 시류는 4열 전술에 원톱이 기본이고 갈수록 원톱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역할을 요구받게 되어 해리 케인,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같은 선수가 귀중한 자원으로 취급받는 추세를 볼 때 좀 늦게 태어났으면, 그러니까 리오넬 메시와 같은 세대였으면 더 각광받았을 유형이다.

4. 스태프

2014년 8월 9일 파르마 칼초 1913의 유소년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9] 2015년 6월 30일 세리에 B 모데나 FC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모데나는 리그 21위를 기록, 3부리그로 강등당하고 말았다. 크레스포는 성적부진으로 한시즌만에 모데나를 떠나게 되었다.

모데나를 떠난뒤 2017년 파르마 칼초 1913 부사장으로 부임하며 친정팀 프런트로 돌아온다. 2018년에는 CA 반필드 감독도 맡고있다.

5. 여담

첼시 FC에서의 실패[10]와 선수시절 경력 대부분이 세리에 A인점과, 대표팀 동료인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존재 때문이다. 국내에서 해외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청하기 시작한 2007년이 전성기 끝물이라서 파트너였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더욱더 주목받았다. 매니아층 사이에서는 '큰외숙모'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피파온라인3에서의 인지도는 엄청나다

2001년에는 이적료 서열 3위였다. 1위가 지네딘 지단, 2위가 루이스 피구였다. 당시 크레스포가 파르마에서 라치오로 이적할 때 세르지우 콘세이상 + 마티어스 알메이다 + 역대 3위에 해당하는 이적료로 이적했다.

남미 지역예선 역사상 최다득점자가 크레스포로서 9골을 달성했는데 이 기록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지역예선(남미) 11라운드 베네수엘라전에서 국가대표 후배인 곤살로 이과인이 연속 두골을 넣고 동률을 찍었다. 조만간 깨질 듯. 하지만 정작 이 기록을 깬건 국가대표 후배들인 메시나 이과인이 아니라 옆동네루이스 수아레스였다. 수아레스는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지역예선(남미)에서 혼자 11골을 넣음으로서 남미 지역예선 역사상 최다득점 기록을 갱신했다.

주제 무리뉴와 묘한 악연이 있다. 첼시 FC시절 적응에 힘들어 하던 시기엔 무리뉴가 전력외 선수 취급을 하며 출장기회를 많이 잡지 못했고, 인테르로 완전이적한 08-09시즌에는 또 무리뉴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결국 제노아로 이적하게 된다. 제노아에서도 인테르와 맞붙게 되었을때 골을 넣고싶어했다고. 근데 정작 은퇴하고 나선 무리뉴는 승리자라고 인터뷰하는 거 보면 사감없이 프로페셔널한 관계였던 모양. 이 글을 보면 무리뉴와 관계는 좋았던것 같다.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는 선수는 많으나 딱히 후계자라고 불릴만한 선수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11] 메시는 대표팀에서는 프리롤로 뛰는데다가 이미 누구의 후계자를 논할 클래스를 벗어났으며 무엇보다 스타일이 처음부터 달랐다. 이과인은 이타적 플레이라는 점에서 떨어지며 중요 경기에서의 활약이 너무 저조하다. 일부에서는 메시, 아궤로, 이과인, 라베시와 같은 유형의 선수는 넘쳐나는데 크레스포와 같은 정통 타켓 스트라이커가 나오지 않는것이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진짜 문제점으로 평가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막시 로페스로헬리오 푸네스 모리, 루카스 비아트리 등이 언급되고 있다. 현재로썬 전부 실패작이고 공격에 한해선 메시 원맨팀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세대인 1990년대 초반 선수들 중 파울로 디발라, 마우로 이카르디, 루시아노 비에토가 주목을 받았는데 비에토의 경우 침체기를 보내고 있고, 디발라는 2선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프리롤, 트레콰르티스타로서의 경기력을 뽐내고 있어 크레스포와는 유형이 다르다. 이카르디의 경우 초창기엔 전형적인 포쳐 스타일의 선수였으나 점차 최전방 스트라이커로서의 여러 재능을 만개하고 있어 전형적 센터포워드의 전형이 될 잠재성을 보이고 있다.

바티스투타에게 밀려 불행한 국대 커리어를 보냈지만 둘의 사이는좋은 편이다. 마라도나"그놈둘은 골방에서서로에게 주먹질을 하며 한명이 죽을때까지 가둬놔야 한다"라고한 발언 때문에 사이가 안좋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티스투타는 2014년에 한 인터뷰에서 2002년엔 우리가 투톱으로 뛰어야 했고 이 사실은 비엘사만 몰랐다 에르난은 경기에서 뛰고 싶어했다 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둘은 세리에 시절 해도 단 둘이 기념사진도 찍었었고 2018년에 기념 사진도 찍는 등은퇴 후에도 잘 지내고 있다.

이탈리아 국적을 취득하고 이탈리아 여자와도 결혼했다. 이때문에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서 잠정적으로 은퇴하게 된다.

앙헬 디마리아같은 경우는 팀내에 크로스를 올려도 받아먹을 선수가 없다면서, 크레스포 유형의 선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많은 축구팬들이 크레스포가 1990년 생이었으면 아르헨티나가 지금보다 우승을 2번은 더 했을 것이다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너무 일찍 태어난 게 문제였다.[12]

축구 이외에 좋아하는 스포츠가 있는데 유럽의 인기 종목 중 하나인 'F1' 레이싱이다. 이러한 취미때문인지 자동차에도 관심이 많으며 푸른색의 페라리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보물 1호'로 꼽기도 한다. 락밴드 롤링 스톤즈를 좋아하며 그들의 음반을 자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6. 크레스포에 대한 말말말

파일:hernan_crespo_.png
저 녀석은 어느 골목에 가도 대장을 할 것
디에고 마라도나
이런 훌륭한 선수를 놔두고 겨우 바티따위를 중용한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는 바보다. 8강 이상 못가도 싸다.
요한 크루이프
크레스포는 2인자로 썩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재원이다. 특히 1인자가 바티라면 더더욱 아까운 재원이다. 내가 1998년 아르헨티나 감독이었다면 크레스포를 주전으로 기용했을 것이고, 그랬으면 우승은 프랑스가 아니라 아르헨티나가 차지했을 것이다.
요한 크루이프

6.1. 시종일관 콩라인

에르난 크레스포는 아예 축구선수로서의 그 자체가 콩라인이다. 물론 1군으로 우승을 했던적또한 많았으나 2등과 2군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아르헨티나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것이 크레스포의 국가대표 데뷔전.
  •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크레스포는 바티스투타에 밀려 2군이였다.
    • 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16강에서 만난 잉글랜드와 승부차기까지 갔는데 크레스포는 여기에서 2번째 주자로 승부차기를 했으나 실축했다.
  • 2002년 대한민국&일본 월드컵에서도 역시 바티스투타에 밀려 2군이 되었다. 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넣은 골의 합은 2골.
  • 그가 2골을 넣은 2005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리버풀 FC에게 역전당하며 팀은 준우승
  •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매 경기마다 1골씩 넣어서 팀의 승승장구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미로슬라프 클로제에 밀려서 실버슈를 획득했다.
  • 그가 국가대표 마지막으로 뛴 대회인 200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는 결승까지 전승을 달렸으나 결승에서 브라질에 밀려 준우승을 차지했다.
  • 2012년에 이 양반이 갱신하기 전까지는 축구선수 개인 누적 이적료가 2013년 기준 1억 2100만유로로 역대 2위였다. 현재는 3위. 1위는 1억 6910만 유로의 이 양반, 2위는 1억 2966만 유로를 기록한 이 사람. 근데 한 명의 단 두 번의 이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기록들이 되어버렸다

7. 기록

7.1. 대회 우승

  • SS 라치오 (2000/01 - 2001/02)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 : 2000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02/03, 2006/07 - 2008/09)

7.2. 리그 기록

시즌클럽소속리그리그FA컵대륙대회
경기득점경기득점경기득점
1993/94 리버 플레이트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5 16 0 0 3 0
1994/95 리버 플레이트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18 4 0 0 4 2
1995/96 리버 플레이트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21 4 0 0 13 10
1996/97 AC 파르마 이탈리아 세리에 A 27 12 1 0 - -
1997/98 AC 파르마 이탈리아 세리에 A 25 12 2 0 8 2
1998/99 AC 파르마 이탈리아 세리에 A 30 16 7 6 8 6
1999/00 AC 파르마 이탈리아 세리에 A 34 22 2 0 5 3
2000/01 SS 라치오 이탈리아 세리에 A 32 26 1 0 6 2
2001/02 SS 라치오 이탈리아 세리에 A 22 13 4 4 7 3
2002/03 인터 밀란 이탈리아 세리에 A 18 7 0 0 12 9
2003/04 첼시 FC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19 10 0 0 10 2
2004/05 AC 밀란 이탈리아 세리에 A 28 11 1 1 10 6
2005/06 첼시 FC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30 10 5 1 5 2
2006/07 인터 밀란 이탈리아 세리에 A 29 14 4 4 6 1
2007/08 인터 밀란 이탈리아 세리에 A 19 4 5 2 5 1
2008/09 인터 밀란 이탈리아 세리에 A 14 2 3 0 0 0
2009/10 제노아 CFC 이탈리아 세리에 A 16 5 1 0 4 2
2009/10 AC 파르마 이탈리아 세리에 A 13 1 0 0 - -
2010/11 AC 파르마 이탈리아 세리에 A 29 9 2 2 - -
2011/12 AC 파르마 이탈리아 세리에 A 4 0 2 2 - -

7.3. 개인 수상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1993/94 득점왕
  • 1996 애틀란타 올림픽 득점왕
  • 1996 아르헨티나 클라우수라 득점왕
  • 1998/99 UEFA Cup 결승전 MVP
  • 1998/99, 2006/07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 2000/01 세리에 A 득점왕
  • ESM 2000/01 베스트 일레븐
  • 2004 FIFA 100
  • 2006 피파 월드컵 실버 부츠
  • 2006 피파 월드컵 올스타
  • FIFPro 국제 축구 선수 협회 올해의 팀 : 2005, 2006

[1] 축구선수로서 신체조건과 축구스타일 등이 호르헤 발다노와 98% 이상 일치하기 때문에 발단티노(Valdantino)라는 별명이 붙었다.[2] 당시 가격은 세리에가 얼마나 뛰어나면서도 거품이 많은 리그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3] 당시 첼시에서 5경기당 2골이라는 높은 득점력을 보여줬다. 지금이야 메시, 호날두 덕에 저 정도가 빈약해 보이겠지만 당시만 해도 저 정도면 충분히 뛰어난 득점력을 가진 공격수로 평가받을 만 했다.[4] AC 밀란은 04-05 시즌 윈터브레이크 때 임대, 인테르 밀란은 06-07 시즌부터 07-08 시즌까지 두 시즌간 임대[5] 밀란은 세브첸코와 크레스포라는 강력한 투톱을 가지고도 챔스 우승에 실패했다.[6] 빅클럽 선발로 뛰기에는 부족하지만 교체로 나와서는 뜬금골을 잘 넣어주는 맨유의 슈퍼서브라 불리던 솔샤르와 같이 준수한 백업 공격수 정도의 위치였던 선수였지만 이를 계기로 단숨에 주전선수로 급부상하면서 본인의 커리아하이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7] 국가가 망했어요. 재정적 파산을 선언하는 것이다.[8] 축구협회도 당연히 돈이 없었다. 애초에 국가에 외환이 없는데 축협에 돈이 있을리가....[9] 이시기에 파르마가 파산직전에 빠졌을때 유스팀의 처참했던 상황에 대해 증언한바가 있다. 당시 성인팀도 비참한 상황인데 유스팀은 스포츠 음료, 생수도 살 돈이 없었고 식사도 굶은채경기를 했으며 전기고 수도고 뭐고 다 끊겨서 샤워도 한겨울에 차가운 물로 했어야만 하니 이때문에 선수 대부분이 감기에 걸리는 최악의 상황에 빠진것.[10] 먹고튄건 아니다. 경기대비 공격포인트는 매우 준수한 편이였으나, 주제 무리뉴가 선택한 선수가 디디에 드록바였기에 밀려났다. 플레이스타일은 둘다 비슷하지만, 피지컬에서 드록바가 한수 위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밀란에서 같이 뛰었던 동료인 셰브첸코역시 첼시에 와서 먹튀화가 되고 말았다. 주제 무리뉴와 크레스포는 2009년 인터 밀란에서 다시 조회한다. 이게 운명의 장난인지...[11] 사라고사, 제노아, 인테르에서 맹활약을 펼친 디에고 밀리토가 그나마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세대차가 얼마 안나는데다, 국대만 오면 부진해서 이내 밀려났다.[12] 굳이 90년생일 필요도 없다. 86년생이었어도, 2015 코파 아메리카까지 뛸 수는 있다. 특히, 브라질 월드컵은 크레스포와 바티스투타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낀 대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