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9 10:00:46

필리포 인자기

필리포 인자기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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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 인자기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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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MPIONS
8 [ruby(에바니, ruby=알베리고)] 5 [ruby(코스타쿠르타, ruby=알렉산드로)] 13 [ruby(네스타, ruby=알렉산드로)] 21 [ruby(피를로, ruby=안드레아)]
5 [ruby(안퀼레티, ruby=안젤로)] 11 [ruby(모라, ruby=브루노)] 4 [ruby(안첼로티, ruby=카를로)] 11 [ruby(갈리, ruby=카를로)]
6 [ruby(말디니, ruby=체사레)] 32 [ruby(아비아티, ruby=크리스티안)] 10 [ruby(세도르프, ruby=클라렌스)] 9 [ruby(마사로, ruby=다니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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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uby(게치, ruby=조르조)] 1 [ruby(갈리, ruby=조반니)] 7 [ruby(로데티, ruby=조반니)] 4 [ruby(트라파토니, ruby=조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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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ruby(드사이, ruby=마르셀)] 2 [ruby(카푸, ruby=마르쿠스)] 23 [ruby(암브로시니, ruby=마시모)] 12 [ruby(지다, ruby=네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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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ruby(굴리트, ruby=루드)] 10 [ruby(보반, ruby=즈보니미르)]
GOLEADOR
9 [ruby(보피, ruby=알도)] 7 [ruby(파투, ruby=알레샨드리)] 7 [ruby(세브첸코, ruby=안드리)] 9 [ruby(인자기, ruby=필리포)]
10 [ruby(리베라, ruby=잔니)] 11 [ruby(산타고스티노, ruby=주세페)] 11 [ruby(그렌, ruby=군나르)] 9 [ruby(노르달, ruby=군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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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ruby(카카, ruby=히카르두)] 10 [ruby(바조, ruby=로베르토)] 80 [ruby(호나우지뉴, ruby=호나우두 지 아시스 모레이라)] 11 [ruby(이브라히모비치, ruby=즐라탄)]
BALLON D'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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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ruby(반 헤게, ruby=루이스)] 11 [ruby(키아루지, ruby=루차노)] 5 [ruby(페르베르시, ruby=루이지)] 5 [ruby(로사토, ruby=로베르토)]
2 [ruby(살라, ruby=마르코)] 23 [ruby(암브로시니, ruby=마시모)] 2 [ruby(타소티, ruby=마우로)] 10 [ruby(리드홀름, ruby=닐스)]
8 [ruby(토뇬, ruby=오메로)] 3 [ruby(말디니, ruby=파올로)] 9 [ruby(부리니, ruby=렌초)] 9 [ruby(안토넬리, ruby=로베르토)]
4 [ruby(베네티, ruby=로메오)] 6 [ruby(부리아니, ruby=루벤)] 9 [ruby(아르카리, ruby=피에트로)] 1 [ruby(로시, ruby=세바스티아노)]
27 [ruby(세르지뉴, ruby=세르지우 클라우지우 두스 산투스)] 5 [ruby(바티스티니, ruby=세르지오)] 33 [ruby(실바, ruby=티아고)] 11 [ruby(노벨리노, ruby=발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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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축구 감독
파일:필리포 인자기 살레르니타나 .jpg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필리포 인자기
Filippo Inzaghi
[1]
출생 1973년 8월 9일 ([age(1973-08-09)]세)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 피아첸차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81cm / 체중 82kg
직업 축구 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유스 SSD 산니콜로 (1982~1985)
피아첸차 칼초 (1985~1991)
선수 피아첸차 칼초 (1991~1995)
UC 알비노레페 (1992~1993 / 임대)
엘라스 베로나 FC (1993~1994 / 임대)
파르마 FC (1995~1996)
아탈란타 BC (1996~1997)
유벤투스 FC (1997~2001)
AC 밀란 (2001~2012)
감독 AC 밀란 (2012~2014 / 유스 감독)
AC 밀란 (2014~2015)
베네치아 FC (2016~2018)
볼로냐 FC 1909 (2018~2019)
베네벤토 칼초 (2019~2021)
브레시아 칼초 (2021~2022)
레지나 1914 (2022~2023)
US 살레르니타나 1919 (2023~2024)
국가대표 57경기 25골[2] (이탈리아 / 1997~2007)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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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가족 동생 시모네 인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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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5.1.2. 개인 수상5.1.3. 출전 기록
5.2. 감독
5.2.1. 대회 기록5.2.2. 개인 수상
5.3. 수훈
6. 여담
6.1. 외모6.2. WAGs
7. 인자기에 대한 말,말,말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축구 선수 출신 축구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2001년부터 AC 밀란으로 이적하여 은퇴할 때까지 활약했다. 별명은 수페르 피포(Super Pippo).[3]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피아첸차 칼초

파일:external/www.valderrama.it/inzaghino.jpg

인자기는 동료 축구 선수이자 친동생인 시모네 인자기와 함께 고향 클럽 피아첸차 칼초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10대였던 1991년, 세리에 C1에 속해있던 UC 알비노레페로 임대 이적하며, 21경기에서 13골을 넣었다. 1993년, 세리에 B의 엘라스 베로나에서 뛰며 36경기에서 13골을 넣었다. 피아첸차로 돌아온 후, 37경기에 출전하여 15골을 넣으며 팀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2.1.2. 파르마 FC

1995년 파르마로 이적하여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렀으나, 파르마에서 뛴 15경기 동안 단 2골만을 득점하였다. 이후 그는 아탈란타로 이적한다.

1995/96 시즌: 22경기(선발 9경기) 4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15 7 8 2 0
컵 위너스 컵 6 2 4 2 0
코파 이탈리아 1 0 1 0 0
합계 22 9 13 4 0

2.1.3. 아탈란타 BC

파일:inzaghi atalanta.jpg

비록 1년이라는 잠깐의 시절을 보냈지만 당시 아탈란타가 세리에 A 34경기 11승 11무 12패 44득점 46실점으로 리그 10위를 기록했는데 인자기 혼자서 33경기 24골. 코파 이탈리아까지 합산하여 계산하면 34경기 25골이라는 그야말로 군계일학을 보여준 덕분에 아탈란타는 꼴찌를 면했고 인자기는 생애 처음이자 유일하게 카포칸노니에레[4]를 차지했다.

참고로 아탈란타 BC가 세리에 A에 있었을때 단일 시즌 팀 최고 득점자가 인자기였다.[5] 한동안 이 기록을 경신한 사람이 나오지 않다가 2018-19 시즌 두반 사파타가 28골을 넣어 경신하고 2020-21 시즌 루이스 무리엘이 26골을 넣어 인자기의 기록은 3위로 내려갔다.

1996/97 시즌: 34경기(선발 33경기) 25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3 32 1 24 3
코파 이탈리아 1 1 0 1 0
합계 34 33 1 25 3

2.1.4. 유벤투스 FC

파일:FB_IMG_1589390744494.jpg

이 때의 활약으로 유벤투스로 이적하였다. 그는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지네딘 지단과 함께 환상적인 공격진을 구축하였다. 이들의 활약으로 유벤투스는 1997-98 시즌 스쿠데토를 차지하였으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1-0으로 패하였다.

1997/98 시즌: 46경기(선발 41경기) 27골 9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1 29 2 18 6
챔피언스 리그 10 10 0 6 1
코파 이탈리아 4 1 3 1 1
수페르코파 1 1 0 2 1
합계 46 41 5 27 9

1998-99 시즌에는 인자기 본인은 총 20골을 득점하며 여전히 세리에 최고의 공격수로서 존재감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으나, 정작 팀은 리그 개막을 앞두고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라치오에게 패하며 좋지 않은 시작을 보이더니, 최종적으로 리그 7위에 그쳐 디펜딩 챔피언답지 않은 행보로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1998/99 시즌: 42경기(선발 39경기) 20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8 25 3 13 1
챔피언스 리그 10 10 0 6 1
코파 이탈리아 1 1 0 0 0
수페르코파 1 1 0 0 0
플레이 아웃 세리에 A 2 2 0 1 0
합계 42 39 2 20 2

이후 2시즌 동안 준수한 활약으로 팀의 UEFA 인터토토컵 우승과 2년 연속 리그 2위 달성을 도왔다.

1999/00 시즌: 43경기(선발 40경기) 26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3 32 1 15 4
유로파 리그 4 2 2 3 1
코파 이탈리아 2 2 0 1 1
UEFA 인터토토컵 4 4 0 7 1
합계 43 40 3 26 7

2000/01 시즌: 34경기(선발 30경기) 16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8 24 4 11 4
챔피언스 리그에서 6 6 0 5 0
합계 34 30 4 16 4

유벤투스에서의 기록은 165경기 89골.

2.1.5. AC 밀란

파일:external/nst.sky.it/inzaghi_di_spalle.jpg

유벤투스에서 122경기 동안 58골을 넣었음에도 2001-02 시즌, 새로 영입된 다비드 트레제게에게 밀려 팀을 떠나게 된다. 2001-02 시즌 마르첼로 리피의 개혁의 일환으로 내쳐진 유벤투스의 필리포 인자기를 밀란 구단주인 베를루스코니가 사재 7000만 유로를 풀어 AC 밀란으로 영입하나, 인자기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시즌의 절반 동안 뛰지 못하였다. 하지만 부상에서 복귀한 뒤 부터는 4-1-2-1-2 포메이션에서 안드리 셰브첸코와 함께 투톱으로 뛰며 밀란의 공격진을 이끌었고, 2002-03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 2003 코파 이탈리아 우승, 2003-04 시즌 스쿠데토를 차지하였다.

2001/02 시즌: 28경기(선발 26경기) 16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0 19 1 10 4
유로파 리그 7 6 1 4 1
코파 이탈리아 1 1 0 2 0
합계 28 26 2 16 5

2002/03 시즌: 49경기(선발 43경기) 30골 10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0 27 3 17 6
챔피언스 리그 14 12 2 10 4
코파 이탈리아 3 2 1 1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2 0
합계 49 43 6 30 10

2003/04 시즌: 28경기(선발 21경기) 7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14 11 3 3 1
챔피언스 리그 8 6 2 2 0
코파 이탈리아 3 2 1 2 0
UEFA 슈퍼컵 1 1 0 0 0
인터컨티넨탈컵 1 0 1 0 0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 1 0 0 0
합계 28 21 7 7 1

2004/05 시즌: 15경기(선발 5경기) 1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11 4 7 0 1
챔피언스 리그 2 1 1 1 0
코파 이탈리아 2 0 2 0 0
합계 15 5 10 1 1
파일:FB_IMG_1608207350038.jpg
2년 전 패배를 설욕하다.
인자기는 2년 동안 그를 괴롭혔던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부터 회복하여 세리에 A 2005-06 시즌에 22경기에 출전하여 12골을 넣었고, 다섯 번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4골을 득점하였다. 2007년 5월 23일, 아테네에서 열린 2006-07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인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인자기는 2골을 득점하여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고, 2004-05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의 패배를 설욕하였다. 그는 또한 2007 UEFA 슈퍼컵 세비야와의 경기에서 동점골을 뽑아내며 팀의 3-1 승리에 기여하였다. 또한 FIFA 클럽 월드컵에도 참가하여 보카 주니어스와의 결승전에서 2골을 뽑아내며 팀의 4-2 승리를 이끌었다.

2005/06 시즌: 31경기(선발 21경기) 17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3 16 7 12 6
챔피언스 리그 6 4 2 4 0
코파 이탈리아 2 1 1 1 1
합계 31 21 10 17 7

2006/07 시즌: 37경기(선발 23경기) 11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0 11 9 2 0
챔피언스 리그 10 8 2 4 1
코파 이탈리아 5 2 3 3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2 0
합계 37 23 14 11 1

2008년 2월 24일 인자기는 팔레르모와의 경기에서 득점하였는데, 이는 리그에서 1년 만에 기록한 것이다.

2007/08 시즌: 29경기(선발 20경기) 18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1 14 7 11 3
챔피언스 리그 5 4 1 4 1
FIFA 클럽 월드컵 2 1 1 2 0
UEFA 슈퍼컵 1 1 0 1 0
합계 29 20 9 18 4

2008/09 시즌: 32경기(선발 21경기) 16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6 15 11 13 3
유로파 리그 6 6 0 3 0
합계 32 21 11 16 3

2009-10 시즌에는 노쇠화와 전술 변화로 인해[6] 거의 경기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이적 루머가 간간히 나오기도 하는데 루머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현실. 맨체스터 시티에서 링크가 있다는 루머였다. 이에 인자기 본인은 밀란에서 은퇴한다고 못박았다.

2009/10 시즌: 33경기(선발 9경기) 5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4 4 20 2 2
챔피언스 리그 7 3 4 2 0
코파 이탈리아 2 2 0 1 0
합계 33 9 24 5 2

2010-11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32강 4차전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2골을 몰아치며 역시 수페르 피포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첫번째 골은 역시 인자기스러운 골이 터졌다. 게다가 두 번째 골은 혼자만 잔디색이 다른 곳에 앞서 있었던 '대놓고 오프사이드' 였는데 오심으로 득점 인정되었으나 레알 선수들에게조차 별로 항의를 안 받았다.(1분 52초부터. 선수나 감독이나 항의를 안하는 분위기인 것을 볼 수 있다. 워낙 스타일이 오프사이드 라인과 함께 살아온 양반이라 현역 시절 오프사이드에 관해선 '인자기가 곧 오프사이드고 오프사이드가 곧 인자기다', '인자기가 오프사이드 아니라 하면 아닌거다'라는 시쳇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2010/11 시즌: 9경기(선발 1경기) 4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6 1 5 2 0
챔피언스 리그 3 0 3 2 0
합계 9 1 8 4 0

어쨌든 이후 주로 백업 멤버로 활약하였지만, 2010년 5월 21일 2011년 6월 30일까지의 1년 연장 계약을 하였지만 팔레르모전에서 십자인대 파열 부상으로 사실상 시즌아웃. 그리고 결국 5월 11일 편지를 남겨 AC 밀란과의 재계약을 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다음은 그 편지.

2011/12 시즌: 9경기(선발 1경기) 1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7 0 7 1 0
코파 이탈리아 2 1 1 0 0
합계 9 1 8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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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편지에서 여러분이 읽으시게 될 여러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여러분이 꼭 알아주셨으면 하는 내용은 단 하나입니다.
저는 "우리"를 위해 뛰었고, 또 뛰었다는 것. 감정을 공유하지 않은 채로 경기하고 승리를 거두는 데에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 이루었습니다. 함께 소망하고, 고통받고,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한 마음으로 각종 우승 트로피며 스쿠데토를 여러 번 들어올렸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해 달렸고, 이 사실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밀라니스타 여러분, 기억하시겠지요. 제가 밀라노에 처음 도착했을 때, 여러분은 제 이적을 몰랐습니다.
저는 호텔방에 몸을 숨긴 채 되도록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제 모습이 보이면 유벤투스와 밀란 간의 거래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적이 성사된 후 첫 몇 주, 첫 몇 달간 여러분은 저라는 사람에 대해 점차 알아나갔고, 우리는 함께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에 빠졌지요. 토리노전, 그 날 밤. 여러분들은 화가 나 있었습니다.
피치 위에서는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고, 여러분들은 침묵에 잠겨 있었습니다. 저는 조끼를 벗고 몸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절 향해 보내주신 함성이 그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고, 챔피언스리그를 향한 길을 틔워 주었으며
결국 이는 맨체스터에서의 승리[7]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2004~5년간 부상 문제로 앤트워프에서 재활할 때 저에게 격려를 보내 준 모든 분들,
그리고 제 생일날이기도 했던 2006년 8월 9일, 레드스타 베오그라드를 상대로 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권을 땄던 그 날 우리 모두가 함께 겪었던 가슴 떨림.
이 모든 기억들은 제 마음속 한 구석에 늘 간직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테네, 축구가 저에게 준 최고의 선물.
이는 저와 여러분이, 즉 우리가 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우리를 막을 수 없는 건 단 하나도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우리가 꾸었던 가장 아름다운 꿈보다도 더 멋진 현실이었습니다.
리버풀을 상대로 이스탄불에서의 패배 후 단 2년만에 2골을 넣으면서 일곱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룬다는 것.
운명은 우리 자신이 감히 꿈꾸지도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오늘 저는 진심을 다해 베를루스코니 회장님과 갈리아니 단장님에게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준 자극을 통해 저는 한계를 넘어서 더 강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유스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가 뛰었던 모든 팀의 모든 선수들에게도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저는 지금의 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밀란에게 감사합니다. 축구에게 감사합니다. 모두 내 사람들이고 내 것이라고 감히 불러봐도 될까요.
밀란이라는 팀. 보드진 직원들, 밀라넬로의 직원들, 의료팀, 스타디움, 라커룸,
이적이 발표되었던 일요일 유니폼을 흔드는 제 모습을 지켜보며 제가 넣을 골들을 생각하며 몸이 떨렸던 모든 서포터 여러분.

안첼로티 감독님, 안녕히. 그와 함께 저는 모든 대회를 우승했습니다.
저를 따라 전세계를 누볐던 저의 팬들께도, 안녕히. 과거와 현재에 저와 함께했던 제 멋진 동료들도 모두, 안녕히.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저의 가족에게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엄마, 아빠, 시모네와 조카 토마소. 가족이 없었더라면 여기까지 절대로 올 수 없었을 겁니다. 언제나 저의 힘인 사람들.
사랑하는 저의 팀 밀란을 떠납니다.
여러분도 아시듯, 인생이란 그런 것이니까. 이제 때가 왔으니까.
필리포 인자기.

그리고 5월 13일(한국시간) 노바라와의 고별경기에서 후반 22분 교체 투입되어 15분만인 후반 37분에 오프사이드 트랩을 절묘하게 돌파하며 자신의 마지막 경기를 지극히 인자기스러운(...) 골로 장식하였다. # 3분 15초 경부터 등장 전설의 전설다운 마무리.

위는 경기 관련 영상. 1분 3초부터 국내 팬들에게는 일명 밀란 할아버지로 유명한 해설자가 다른 선수들의 골에는 평범하게 반응하다가 인자기의 골이 터지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감격하다 못해 오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밀란 팬들에게 인자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2.1.6. 유럽 대항전

인자기는 챔피언스리그에서 해트트릭을 2번 기록[8]한 첫 선수이다. 첫 번째 해트트릭은 디나모 키예프와의 1997-98 챔피언스 리그 8강전에서였고, 두 번째 해트트릭은 2000년 9월 13일에 있었던 함부르크 SV와의 조별 리그 경기에서였다. 또한 밀란에 가서는 2003년 우승 당시 10골로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골닷컴 기사.

2007년 11월 6일에 벌어진 샤흐타르 도네츠크와의 경기에서 챔피언스리그 개인 통산 62호골, AC 밀란에서의 33호 골을 기록하였다. 2007년 12월 4일에 셀틱과의 경기에서 또 득점하여 63골을 기록하였다. 이 골로 바이에른 뮌헨의 전설적인 선수 게르트 뮐러를 제치고 유럽 대항전 통산 골 기록 선두에 올라섰다.

2010년 시점에서 유럽 클럽 대항전 통산 70골로 레알 마드리드출신의 레전드였던 라울 곤살레스와 유럽 클럽대항전(UEFA 챔피언스리그 + UEFA 유로파리그 + 기타 등) 최다 득점 기록을 두고 경쟁했었다.[9][10]

밀란 자체가 그런것도 있지만 인자기가 현역일 때 바이에른 뮌헨을 무척이나 잘 잡았다.(4경기 7득점)

2.2. 국가대표 경력

파일:external/www.gazzettaworld.com/Filippo-Inzaghi-Italy1.jpg

인자기는 1997년 6월 8일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그 후 그는 57경기 25골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중심 선수가 되었다. 1998년 FIFA 월드컵, 유로 2000, 2002년 FIFA 월드컵 등 큰 대회에 많이 소집되었다. 유로 2004에서도 이탈리아의 스트라이커로 주전이 확실하였지만, 부상으로 좌절되었다. 그의 지속적인 무릎 부상은 선수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 2006년 FIFA 월드컵 본선에서도 지속적으로 뛰기 힘들 것이라 전망하였으나,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독일 월드컵 E조 조별예선 3차전(2006년 6월 22일) 체코전에 출전하여 체코 골키퍼 체흐를 농락하며 득점하였다.[11] 그 이후 독일 월드컵 명단에 들어서는데 성공하고, 조국의 월드컵 우승에 기여하였다.

인자기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통산 득점 순위에서 25골로 아돌포 발론체리, 알레산드로 알토벨리와 함께 6위에 올랐다.

3. 플레이 스타일

인자기는 정말 단순한 선수다. 어떠한 스킬도 사용할 줄 모르며 골만 넣는다. 인자기는 축구를 전혀 할 줄 모른다. 항상 올바른 위치에 있을 뿐.
요한 크루이프[12]
인자기의 플레이 스타일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포처의 화신(化身)이라고 할 수 있다. 신들린 위치선정과 정신나간 듯한 골 결정력, 신묘한 축구지능, 순간 속도를 이용하여 득점할 수 있는 위치를 찾아들어가는, 일명 골냄새를 맡는 능력을 가장 귀신같이 보여주는, 포처 바로 그 자체가 인자기이다. 세계 축구사를 통틀어서 포쳐 스타일의 공격수들은 있었지만, 인자기와 같은 스타일은 굉장히 특이하며 앞으로 나오기 힘들고, 나와도 대성하기 힘든 스타일의 선수다.

인자기는 소위 '피지컬'의 범주에 속하는 신체능력이나 테크닉은 당대를 주름잡은 공격수 치고는 대부분 평범한 편이었다. 키가 작지는 않으나 몸싸움은 보기보다 약한 편이었다. 주력은 꽤 빠른 편.[13] 드리블 및 수비수를 제치는 개인기의 경우 당시 경기 영상이나 스페셜 영상을 보면 드리블 스킬이 그렇게 나쁜 선수는 아니었지만[14], 그렇다고 팀 동료인 카카마냥 현란한 개인기로 돌파를 할 만큼 테크니컬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자기는 본인의 강점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능력을 발휘했는데, 그 유명한 독보적인 위치 선정 능력을 통해 패스를 받을 수 있는 적절한 곳으로 오프사이드 트랩을 깨며 침투해 많은 찬스를 잡았다. 이는 평범한 주력에 비해 뛰어난 순간 속도도 한 몫을 했지만, 공이 어떤 식으로 날아올 지 예측해서 가장 빠른 경로로 공을 받기 위해 달려나가는 지능적인 움직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흔히들 좋은 위치 선정을 운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위치 선정이 좋으려면 좋은 위치가 어디인지 아는 능력, 그 위치에 실제로 정확한 타이밍에 도달하는 능력, 또한 그 좋은 위치를 수비수와의 수싸움 등을 통해 만들어내는 등 지능적인 플레이가 필수적이다. 그런 플레이를 커리어 내내 제대로 해냈다는 점에서 인자기의 위치 선정 능력은 특별하다.

찬스를 잡는 것 뿐만 아니라 마무리에도 능했다. 개인기는 평범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볼 트래핑과 같은 기본 기술은 탁월했고, 문전에서 침착하게 득점을 만들 수 있는 결정력도 우수했다. 실제로 페널티 박스 안에서는 테크니컬하게 골키퍼를 제치면서 득점하는 모습도 자주 보여줬다. 대표적인 예시가 2006 월드컵체코와의 경기에서 체코의 골키퍼 페트르 체흐를 말 그대로 조교하면서 골을 넣은 것.[15] 사실 90년대 후반부부터 해외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인자기의 골키퍼 제치기는 유명했다. 단, "수비는 못 제쳐도 골키퍼는 제친다"는 의미로 유명했다.

거기에 뛰어난 위치 선정에 기반한 낙하 지점 선점과 좋은 점프력 덕분에 평범한 키와 약한 몸싸움에 비해 제공권도 좋았으며, 실제 골 수를 봐도 헤더골의 비중이 굉장히 높은 편이다.

경기 내내 안 보이다가 순간 나타나 골만 쏙 넣는다는 인식과 달리 강인한 체력과 기동력에 기반한 활동량이 어마어마했다. 실제로 경기 중 인자기만 보고 있으면 이를 알 수 있는데, 인자기는 공격진영으로 공이 넘어옴과 동시에 산만하다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공간을 찾으며 볼에 대한 집념을 드러낸다. 골대 근처를 이리저리 비집고 다니고, 수비수의 실수를 노리며 전방압박도 해주고, 어느 순간 잠깐 잊어버리면 순간적인 침투로 뒷공간을 파고 들어가 골까지 넣는다. 수비수들에게는 정말 성가신 공격수인 셈.

게다가 밀란에서는 카카안드리 셰브첸코라는 좋은 선수들이 있었기에 이 효과가 더욱 극대화됐다. 인자기만 보고 막자니 이 둘이 탁월한 신체 능력을 앞세워 폭발적인 스피드와 드리블 돌파로 수비진을 괴롭히고, 그렇다고 이 둘에 신경쓰자니 어느샌가 인자기가 갑툭튀해 뒷공간을 타격한다. 이 정도면 성가시다 못해 짜증이 솟구치는 수준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2000년대 초중반 바이에른 뮌헨과의 압도적인 우세의 상대전적이다. 밀란이 한창 잘나가던 2002-03시즌부터 2006-07시즌까지 밀란을 상대로한 뮌헨의 상대전적은 2무 4패로 뮌헨은 밀란을 상대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당시 뮌헨의 주전 수비진은 매우 공격적인 스타일의 루시우와 197cm의 거구였으나 순간 가속도와 민첩성이 떨어지는 다니엘 반 바이텐, 그리고 부상 이후 주력이 떨어짐과 동시에 민첩하게 드리블하는 선수들에게 약점을 드러냈던 마르틴 데미첼리스였다. 인자기, 셰브첸코, 카카를 위시한 밀란 공격진의 특징과 뮌헨 수비진의 약점이 동시에 맞아떨어지자, 밀란의 공격진은 뮌헨의 뒷공간을 마음껏 타격했고, 뮌헨은 챔스에서 밀란만 만나면 만나는 족족 털렸다. 결정적으로, 인자기가 등장한 경기에서 뮌헨은 모조리 패배했고, 인자기는 뮌헨을 상대로 4경기 7골, 경기당 2골 가까이를 득점하며 자타공인 뮌헨의 저승사자로 톡톡히 활약했다. 오죽했으면 당시 뮌헨의 골키퍼였던 올리버 칸가장 껄끄럽고 싫은 선수로 인자기를 꼽았다.

이렇듯 인자기는 위치 선정, 지능, 결정력, 활동량까지 포처에게 필요한 덕목을 세계 정상급 수준으로 갖춘 공격수였지만, 아무래도 플레이 스타일상 존재감이 없다가 어디선가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골을 넣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많다. 이에 따라 싫어하는 사람들은 '주워먹기의 달인', '줍자기'등으로 깐다. 경기 내적으로 봐도 툭하면 클로킹되는 일이 많아서 '닌자기'라고 까이기도 했지만, 89분 안보이다 상대 패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 단 1분이라도 보이면 어떻게든 한골은 만들어내던 본능적인 킬러였다.

사실 이런 위치 선정과 라인 브레이킹이 인자기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월드클래스의 스트라이커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이상의 위치선정 능력은 필수이고, 오늘날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처럼 2선 공격수이면서 천부적인 위치선정 능력을 자랑하는 선수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선수들조차도 위치선정 능력 외에도 다른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인자기는 저런 능력들이 부족하면서도 오로지 위치선정 감각만으로 적지 않은 득점 기회를 잡고 그 기회를 골로 연결했다. 그만큼 인자기는 위치선정 능력에 많이 의존했고 그 능력도 탁월했기 때문에 나오기 어렵고 특이한 스타일의 선수다.

역사적으로도 이러한 위치선정 능력을 바탕으로 골 넣는 기계가 10여년에 한 명 즈음은 나온다. 1960년대의 피에트로 아나스타시. 1970년대의 게르트 뮐러[16], 1980년대의 게리 리네커파올로 로시, 1990~2000년대의 뤼트 판니스텔로이와 인자기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보를 잇는 선수가 누구인지 사람들은 꽤 흥미를 가지고 있지만 현대 축구에서는 나오기 힘든 스타일이다.[17] 그리고 묘하게도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주로 나온다. 인자기와 비슷한 세대였던 미로슬라프 클로제 역시 독일 출신의 득점 기계인 것을 생각하면...[18] 현재는 치차리토토마스 뮐러가 이러한 스타일의 계보를 잇는 중이다. 미키 바추아이도 하찮기 그지없는 퍼포먼스와 상반되게 귀신같이 득점을 쌓기 때문에 인자기와 비슷한 게 아니냐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렇듯 그는 '위치선정'의 대명사가 되었다. 중요한 경기에서는 주로 사용하는 오른발이 아닌 왼쪽발로 득점 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엉덩이로도 골을 넣은 적도 있고, 심지어는 안드레아 피를로의 프리킥 상황에서 골대 앞에서 쇄도하다 어깨 득점한 적도 있다.[19] 이런 말도 안되는 예능 골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넣었다.[20] 단순히 위치선정이 개쩐다 하는 수준을 넘어 그냥 공이 인자기를 따라다닌다고 보면 된다. 이렇듯 단순히 잔기술이나 잔머리가 아닌 천부적인 공간 지각 능력이 뭔지를 보여줬는데 경기의 흐름에 따라 골을 넣을 수 있는 예측 방향에 적절하게 위치함으로써 공이 마치 그를 쫓아다니는듯한 상황을 연출해낸 것이라 볼 수 있다. 피를로의 킥을 예측한 후 볼의 진로를 어깨로 튕겨냄으로써 골을 넣는 장면은 볼의 운동방향에 대해 본능과 감각으로 인지하고 있지 않으면 한두번이라도 맞추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덤으로 이런 위치선정이란 능력이 VAR이 기본인 현 시대에선 먹힐지 안 먹힐지 궁금해하는 팬들도 많다.

다만 이러한 플레이 스타일 때문인지 원톱 스트라이커 롤을 소화해내는 데는 무리가 있었으며, 실제로 스트라이커 두 명을 둔 투톱 체제에서 많이 뛰었다. 원톱의 경우 피지컬은 물론, 동료 선수들과의 연계 플레이 능력이 받춰줘야 하는데, 인자기에게 이런 면모는 없었다.[21]

요약하자면 평균 이하의 피지컬과 형편없는 테크닉[22]을 최고의 골 결정력과 오프 더 볼 능력으로 만회한 선수. 멋있게 넣든 쉽게 넣든 지저분하게 넣든 주워서 넣든 모두 골이므로 어찌보면 한 골이라도 더 많이 넣는 팀이 이긴다는 축구의 대원칙에 가장 충실했던 선수가 바로 인자기였다.

4. 지도자 경력

4.1. AC 밀란

AC 밀란과의 계약이 만료된 후 자유계약 상태였던 인자기는 2012년 7월 24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AC 밀란의 유소년 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2014년 6월 8일 클라렌스 세도르프의 후임으로 AC 밀란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유스팀 조금 맡아본 게 전부인 초짜 감독답게 AC 밀란이라는 빅클럽을 이끌기에는 부족한 리더십으로 선수단 장악면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선수들과의 트러블 역시 많았고 전술 이해도 측면에서도 부족한 점을 많이 보였다. 물론 밀란의 노답인 스쿼드를 잘 알다보니 대부분의 팬들은 보드진을 깠지만, 인자기가 클럽 레전드가 아니었으면 최전방으로 까였을 거라는 의견도 많다. 그만큼 인자기도 잘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여하튼 AC 밀란이 10위 권으로 추락하는 등 극심한 하락세를 보인 것에 책임을 물어 감독에서 해임되었으며, 과거 세리에 A 소속 칼초 카타니아, ACF 피오렌티나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고, 2013년부터 UC 삼프도리아를 맡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소싯적 프리킥 만렙, 인간말종 만렙 시니샤 미하일로비치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여담으로 이 시절에 선발로 나온 혼다를 노려보는듯한 움짤이 한국 커뮤니티에서 소소한 논란을 낳았었다...움짤

4.2. 베네치아 FC

이후 2016년 6월 이탈리아 3부리그인 레가 프로의 팀인 베네치아 FC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3]

그런데 그가 맡은 베네치아는 승격한 뒤 세리에B로 올라왔고, 17-18 시즌을 5위로 마감하며 이번에는 세리에A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다. 승격팀을 이끌고 5위로 시즌을 마감한 것도 대단하지만 베네치아의 팀 규모나 전력을 감안했을 때 이는 더더욱 놀라운 순위인데, 베네치아는 파산과 재창단을 겪은지 3년밖에 되지 않은 구단이고, 베네치아 지리의 영향 탓에 홈구장도 열악한 시설로 악명 높기 때문이다.[24]

승격 플레이오프에서는 AC 페루자 칼초를 꺾고 4강전에서 팔레르모를 만났는데, 1차전 1-1 무승부를 거두었으나 2차전에서는 1:0으로 패배하며 세리에B에 잔류하게 되었고, 베네치아는 인자기와의 작별을 발표했다. 그래도 팀이 힘들 때 잘 이끌어줬기 때문에 서로 아름다운 이별이 된 듯 하다. 인스타전문

4.3. 볼로냐 FC 1909

6월 13일 볼로냐 FC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현재 1월 9일 현재 2승 7무 10패 승점 13점으로 강등권에 위치해있다. 과연 평소에도 강등권에서 간신히 잔류하는 볼로냐를 이번에도 잔류로 이끌수 있을지 주목된다. 결국 최하위 프로시노네 칼초에게 4-0으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며 경질되었고, 후임은 시니샤 미하일로비치가 부임된다.

4.4. 베네벤토 칼초

2019-20 시즌을 앞두고 직전시즌 승격에 실패한 크리스티안 부키 감독의 후임으로 인자기가 베네벤토 칼초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38R까지 최종결과 26승 8무 4패, 리그 내 최다득점(67득점)과 최소실점(27실점)을 동시에 석권, 골득실차 +40을 기록하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며 세리에 B 우승을 차지하며 승격에 성공했다. 이로써 형제가 감독으로서 맞붙게 되었다.

20-21 시즌 현재, 세리에 A에서 10위를 유지하며 승격된 팀을 잘 이끌어주고 있다. AC 밀란을 상대로 토날리가 퇴장당하면서 1명 열세의 팀과 붙긴했지만 꽤 밀리지 않는 경기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여러모로 이번 시즌 팀을 잘 이끌어준다면 본인의 지도력을 새롭게 인정받을 듯하다.

2020년 12월 16일, 드디어 동생 시모네라치오와 경기를 가졌다. 임모빌레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이후 만회골 하나로 1-1 무승부를 갖게 되었다.

이후 16경기에서 4승 밖에 거두지 못하면서 큰 부진을 겪고 있다. 그렇지만 28R에서 도깨비마냥 3위 유벤투스 FC를 잡으면서 일곱번째 승리. 피를로 감독의 선두권 경쟁에 고춧가루를 뿌리며 순위가 리그 16위까지 올라왔다.[25]

29R에서 파르마 칼초를 상대로 완전히 밀리는 경기를 했지만 2:2로 비겼다.하위권 팀들의 부진으로 베네벤토의 순위는 15위가 되었다.

30R에서 사수올로에게 1:0 패했고 순위는 16위로 떨어졌다.

31R에서는 다시 동생의 팀 라치오를 만나 혈투를 벌였다. 결과는 5:3 패배. 피오렌티나에게 골득실차에서 밀려 순위는 17위이다.

32R 제노아전에서는 일찍 2득점을 몰아치며 장군을 외쳤으나 제노아의 고란 판데프가 멍군을 해버려서 무승부를 거두었다. 강등권인 18위와는 승점 3점차가 나고 있다.

33R 우디네세전에서도 4:2 패배를 기록했다. 18위인 칼리아리가 7위 로마를 잡아내며 순위는 강등권인 18위로 떨어졌다. 그렇지만 16위까지 승점이 같은 상황이라 아직까지는 잔류를 노려볼 수 있다.

34R 밀란전에서 골키퍼의 선방쇼가 나오며 2점밖에 내주지 않았다. 다음 리그 일정은 칼라아리, 아탈란타, 크로토네, 토리노이다. 아탈란타를 제외하면 승산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35R 칼리아리전에서 완패하면서 강등 플레이오프 진출이 확정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36R 아탈란타전에서 패하였다. 15위까지 승점이 36점인데 다른 하위권 팀들이 연패를 하고 베네벤토가 2승을 해야 잔류를 노려볼 수 있다.

37R에서 최하위팀 크로토네에게 통한의 무승부를 거두면서 마지막 38R 결과에 상관없이 강등을 확정 지었다.

강등과 함께 베네벤토를 떠났고, 세리에 B 브레시아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

4.5. 브레시아 칼초

베네벤토를 뒤로하고 브레시아 칼초에 부임한 인자기는 첫 공식전인 코파 이탈리아 대회 1라운드에서 FC 크로토네와 좋은 경기를 보여주고 승부차기에서 졌다.

리그에서는 나름 순항하여 개막전부터 두달동안 6라운드를 치르면서 무패를 했다.

11월 1일 리그 11R 베네벤토전에서 후반 44분 나온 골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11R 종료 기준 6승 3무 2패로 순위는 3위이다.

30R 종료 기준으로는 14승 11무 5패로 패한 경기수에 비해 아쉬운 승수로 리그 5위를 기록하고 있다.

2022년 3월 23일에 경질돼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4.6. 레지나 1914

현지 시각 2022년 7월 12일, 레지나 1914 감독으로 부임했다. 3년 계약.

리그 7위를 기록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FC 쥐트티롤에게 1-0으로 패배하면서 승격에 실패했다.

4.7. US 살레르니타나 1919

현지 시각 2023년 10월 10일, US 살레르니타나 1919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리그 꼴찌를 달리고 있다.

9R 홈 칼리아리 칼초전에서 살레르니타나의 감독으로 데뷔하였고,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와 2-2 무승부를 거두며 첫 경기를 마쳤다.

이후 23R까지 2승 4무 9패로 부진하였으며 같은 강등권에 위치한 24R 홈 엠폴리 FC전마저 1-3으로 패배하며 19위 칼리아리와의 승점차가 5점차로 벌어지자 2월 10일 스카이스포츠에서 경질되었으며, 공식 발표만 남겨두었다고 보도하였다.

마침내 2024년 2월 11일 오전 경질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다. #

절묘하게도 전반기 7R 인테르전 직후에 부임하고 후반기 25R 인테르전 직전에 경질당해 동생 시모네 인자기와의 대결은 성사되지 않았다. 두 번 다 4:0 당한 걸 생각하면 다행일지도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 세리에 A 득점왕: 1996-97
  • 세리에 A 올해의 영플레이어: 1996-97
  • 세리에 A 평생 공로상: 2012
  •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 2007
  • 프레미오 나치오날레 캐리에라 에셈플라레 "가에타노 시레아"[26]: 2007
  • 글로브 사커 어워즈 플레이어 커리어 어워드: 2014
  • AC 밀란 명예의 전당

5.1.3.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1/92 피아첸자 세리에 B 2 0 1 1 - -
1992/93 레페 세리에 C1 21 13 0 0 - -
1993/94 엘라스 베로나 세리에 B 36 13 1 1 - -
1994/95 피아첸자 세리에 B 37 15 4 2 - -
1995/96 파르마 세리에 A 15 2 1 0 6 2
1996/97 아탈란타 세리에 A 33 24 1 1 - -
1997/98 유벤투스 세리에 A 31 18 4 1 10 6
1998/99 유벤투스 세리에 A 30 14 1 0 10 6
1999/00 유벤투스 세리에 A 33 15 2 1 8 10
2000/01 유벤투스 세리에 A 28 11 0 0 6 5
2001/02 AC 밀란 세리에 A 20 10 1 2 7 4
2002/03 AC 밀란 세리에 A 30 17 3 1 16 12
2003/04 AC 밀란 세리에 A 14 3 3 2 9 2
2004/05 AC 밀란 세리에 A 11 0 2 0 2 1
2005/06 AC 밀란 세리에 A 23 12 2 1 6 4
2006/07 AC 밀란 세리에 A 20 2 5 3 12 6
2007/08 AC 밀란 세리에 A 21 11 0 0 6 5
2008/09 AC 밀란 세리에 A 26 13 0 0 6 3
2009/10 AC 밀란 세리에 A 24 2 2 1 7 2
2010/11 AC 밀란 세리에 A 6 2 0 0 3 2
2011/12 AC 밀란 세리에 A 7 1 2 0 0 0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2.2. 개인 수상

  • 판키나도로 실버벤치: 2019-20

5.3. 수훈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5등급: 2000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4등급: 2006

6. 여담

  • 위와 같은 전적 덕분에 지금도 네티즌들은 위치가 절묘하다고 할 때 '인자기급 위치선정'이라는 말을 쓴다. 심지어 "63빌딩에서 떨어져도 호나우지뉴 발끝이면 산다. 머리위로 핵폭탄이 떨어져도 인자기 옆이면 산다."라는 우스겟소리도 있을정도... 한편으로는 주워먹기 잘하는 사람을 XX계의 인자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좀 매니악해도 축구를 좀 알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별명.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윤자기.
  • 현재 인테르 감독인 동생 시모네 인자기도 축구선수였으며 SS 라치오에서 공격수로 활약하다 얼마 전 형보다 먼저 은퇴했다. 형제간의 우애는 굉장히 좋으며 필리포가 조카 토마소 인자기를 굉장히 귀여워 한다고. 토마소를 자기 은퇴경기까지 데리고 나올 정도. 형제가 같이 이탈리아 A대표팀에 차출 된적 있다. 2000년 3월 29일 스페인전에서 둘이 함께는 아니지만 둘다 그라운드를 밟았고, 2001년 11월 잉글랜드와 루마니아와의 친선전에선 둘이 조금이지만 같이 뛰었다. 한편 은퇴 이후 감독으로서 둘의 행보는 역전되며 갈모형제가 되었다.
  • 골 세리머니를 굉장히 열정적으로 하기로 유명하다. 포효하면서 세리머니를 하는데 본인에게는 그 골이 페널티킥이건 관광게임의 쐐기골이건 역전 결승골이건 매 골이 마법같은 순간이기 때문이라고. 덕분에 아탈란타 시절, 관광게임에서 추가골을 넣고서 역전 결승골마냥 환호하다가 상대 팀 선수들이 단체로 달려든 적도 있다. 국가대표 동료였던 크리스티안 비에리는 자신은 의도치 않게 들어간 골은 절대 세리머니 하지 않았는데 내 아는 사람 중에 뒤통수 맞고 들어가도 결승골 넣은 것 처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며 농담으로 디스한 적도 있다.
  • 경기 전에 음악을 즐겨 듣고 그날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면 경기가 끝난 후에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습관이 있다.
  • 유벤투스 시절 마르첼로 리피 감독의 딸 스테파니아 리피와의 염문설을 퍼트리기도 했다.
  • 취미는 송로버섯 채취. 송로가 채취하기가 쉽지 않은 버섯이라 팬들은 여기서도 그의 위치 선정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 아니냐고 농담삼아 말하곤 한다.
  • 정장이 상당히 잘 어울린다.
    파일:external/www.soccerwallpaper.mackafe.com/Filippo_inzaghi_image.jpg
  • 2004년 동남아 몰디브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난데없이 대지진이 발생하여 쓰나미가 몰려왔다. 이 쓰나미로 수많은 사상자와 실종자가 발생했지만 인자기는 쓰나미의 영향을 거의 안 받고 살아남아 가까스로 귀국행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27] 이 사건을 계기로 축구팬들은 과연 쓰나미도 피해가는 인자기의 위치선정이라 칭송하였다.
  • 자기관리가 매우 철저한 사람이다. 선수 시절 밤 10시면 무조건 잠들고 점심, 저녁 메뉴도 항상 똑같은 것을 먹었을 정도다.
  • 회계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다.
  • 어두운 색을 좋아한다고 한다.
  • 축구만화인 판타지스타에는 그를 모티브로 한 살바토레 "토토" 비앙키라는 선수가 출현한다. 골대 앞에만 머물면서 이기적으로 보인다 싶을 정도로 패스를 외치고 자기 존재감을 팀원과 수비에게 강요하는, 그러면서도 골을 확실히 넣어주는 모습은 인자기와 판박이다.
  • 토라도라!에 나오는 잉꼬가 정말 뜬금없이 이 선수를 언급한 적이 있다.
  • tvN 드라마 <빈센조>에서 이탈리아 마피아 역인 송종기의 애완비둘기의 이름이 인자기이다.
  • 인자기의 독특한 스타일은 이탈리아 특유의 축구문화가 피워냈다고도 볼 수 있는 분석이 있는데, 알베르토 몬디가 세리에 A를 소개할때 꼽는 것이 가장 볼을 잘 차는 아이는 수비를 보는 문화다. 유난히 이탈리아는 키가 작고 볼을 잘 다루며 킥을 잘 차는 수비수들이 많은데 어릴때부터 소위 축구를 잘하는 아이가 수비수 포지션에 서고 축구를 상대적으로 못하면 공격수 포지션에 선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인자기 역시도 당대 최고의 리그였던 세리에 A의 특급 공격수였던 만큼 볼을 아주 못 다루진 않지만 델 피에로같은 선수들이 보고 깜짝 놀랐다는 인터뷰를 남긴적도 있었기에 실점에 극도로 민감한 세리에 A 특유의 축구문화가 인자기 같은 특이한 선수가 리그를 주름잡는 공격수로 만개할 수 있었던 환경을 마련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다. 다만 인자기는 어린 시절에 볼 테크닉이나 패스, 헤더, 데드볼 처리 등 다른 스킬을 연습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축구지능을 십분 활용해 골을 넣는 포워드 포지션에 서는 것을 집요하게 고집했다고. 자신이 포워드라는 포지션, 특히 포처 스타일에 강점이 있는 것을 어릴때부터 알았는지 골 넣는 것에 집착에 가까운 집념을 보였다고 한다. 그가 분명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건 세리에 A라는 리그의 스타일 때문도 있지만 스스로의 집념에 가까운 의지와 재능이 뒤따른 것도 분명하다.
  • 동생의 팀으로부터 선수 임대를 많이 받는 듯하다.
  • 아버지 지안카를로가 언론에 가끔 나와 형제들에 관한 인터뷰를 한다. 다만 이 인터뷰를 보면 선수시절 초기에는 어머니가 주로 나와 인터뷰를 한 듯하다.
  • 20대 중반에도 장을 잘 보러 가지 않아 어머니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해외 팀들의 구애를 거절한 것도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식사를 포기할 수 없어서였다.

6.1.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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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조각같은 미모로도 유명했다. 선수 커리어 말년에는 입가에 주름이 패여 금보라를 묘하게 닮아가면서 세리에 팬들 사이에서 한때 금보라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우스갯소리일 뿐 이후로도 꾸준히 미중년의 포스를 뽐내고 있다.

6.2. WAGs

2020년 4월 여자친구를 공개했다. 1989년생이며 이탈리아의 모델, 의상 디자이너, 패션 사업가인 안젤라 로부스티. 2021년 10월에는 드디어 첫 아이가 태어났다.

7. 인자기에 대한 말,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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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처음 국가대표에 소집되어 훈련장에 나타났을 때, 우린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껏 봐왔던 선수들 중 가장 형편없는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득점을 했습니다.
파올로 말디니
그는 오프사이드 라인에서 태어난 선수다.[28]
알렉스 퍼거슨
내 선수 생활 역사상 가장 대단했던 건 호나우두지만, 가장 껄끄럽고 싫은 선수는 필리포 인자기였다.
올리버 칸[29][30]
나로서는 그들이 10명의 스트라이커를 출전시켜도 문제 될 것 없다. 단 인자기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가 출전하면 나로서는 머리 아픈 경기가 될 것이다.
주제 무리뉴
골센스라고 하면 누가 뭐래도 인자기. 볼이 다음에 어디로 갈지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예측하고 그곳에 반드시 있으니까. 그런 인상이 인자기만큼 강한 선수는 본 적이 없다. 누군가의 실수로 우연히 볼이 떨어진 곳에도 일단 틀림없이 있으니까. 아주 짧은 10분간이지만 인자기와 경합을 한번 해봐라. 단 10분 만에 기진맥진 지쳐버린다. 수비수의 저지를 끌어당기거나, 일부러 구르거나 심판에게 불만을 터뜨리니까. 그 정도로 질리게 만드는 공격수는 또 없을 듯하다.
크리스티안 키부
내 친구 필리포 인자기가 부상으로 뛰지 못하는 건 인테르에게 좋은 일이다. 인자기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다. 그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상대에게 타격을 준다.
사무엘 에투
인자기는 불멸의 사나이인 것 같다. 그는 늘 득점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선수다.
카를로 안첼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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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국적
1 군나르 노르달 Gunnar Nordahl 파일:스웨덴 국기.svg 221
2 안드리 셰브첸코 Andriy Shevchenko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175
3 잔니 리베라 Gianni Rivera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64
4 조제 알타피니 José Altafini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61
5 알도 보피 Aldo Boffi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36
6 필리포 인자기 Filippo Inzaghi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26
7 마르코 반 바스텐 Marco van Basten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125
8 주세페 산타고스티노 Giuseppe Santagostino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06
9 카카 Kaká 파일:브라질 국기.svg 104
10 피에리노 프라티 Pierino Prati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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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iˈlip.po in't͡sa.ɡi/[2] 대표팀 역대 득점 공동 6위.[3] 피포(Pippo)는 이름이 필리포(Filippo)나 주세페(Giuseppe)인 사람의 별명으로 흔히 쓰인다. 수페르 피포는 디즈니 캐릭터 구피가 슈퍼 히어로가 됐을 때의 이름인 "슈퍼 구프"의 이탈리아어 번안명에서 따온 것이다.[4] 세리에 A 득점왕[5] 세리에 B 시절을 계산하면 26골을 기록한 지오바니 가도니가 있다.[6]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공격적인 축구를 유도하기 위해 오프사이드 규칙을 완화했다. 그런데 수비하는 입장에선 라인을 올려 오프사이드 트랩을 쓰는 이점이 사라졌기 때문에 라인을 깊숙히 뒤로 물리고 안전하게 지키는 형태가 대세가 되었고, 이는 고전적인 '득점 기계'들이 몰락하고 대신 제로톱이 대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7] 02-03 챔스 우승[8] 모두 유벤투스 소속이었을 때 세운 것이다.[9] 다만 불행하게도 인자기는 시즌 중반을 넘기기 전에 부상으로 시즌 아웃, 라울 곤살레스는 챔스에서 날아다니다 보니 현재는 라울에게 많이 추월당한 상태다. 인자기 70골, 라울 76골. 지금은 둘 다 유럽 대항전 무대에서는 빠져 있기 때문에, 한동안 저 기록이 계속될 것이다. 2017년 현재 유럽 클럽대항전 최다 득점자는 호날두와 메시가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10] 하지만 챔피언스리그 득점만 치면 둘의 격차는 꽤 벌어지게 된다. 라울은 챔스로 한정해도 71골로 여전히 호날두, 메시, 레반도프스키, 벤제마에 이어 5위에 랭크되어 있지만 인자기는 챔스 기록만 치면 46골로 12위까지 밀려나버린다.[11] 이 경기에서 자신의 장기인 위치선정과 기가 막히는 라인브레이킹으로 득점을 올리며 세계랭킹 2위 였던체코를 완벽하게 제압했다.[12] 문서를 참고하면 알 수 있지만 원래 독설가로서도 유명한 양반이다. 언뜻 보면 독설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의 뛰어난 위치선정 능력을 돌려서 칭찬한 언사로, 크루이프가 추구했던 것이 극도의 효율 중시 축구였던 걸 보면 항상 올바른 공간에서 남보다 먼저 행동하는 인자기를 마냥 욕하기만 했다고 보긴 어렵다.[13] 순간적으로 라인을 깨면서 파고드는 스피드가 상당히 빨랐다.[14] 영국 축구잡지 포포투의 기사에서는 인자기를 테크니션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다만 발기술이 좋다는 뜻인지 공간선점 능력이 좋다는 뜻인지는 불분명.[15] 1:1 상황을 맞이하자 체흐는 인자기가 바로 슛을 때릴 줄 알고 슛을 막을 자세를 취하며 준비하고 있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드리블로 자신을 제치자 당황하다가 자세가 흐트러지고, 인자기가 골을 넣지 못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마치 인자기가 개를 끌고 산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막지 못하고 골을 허용, 체흐 축구인생의 흑역사로 남았다. 지못미.[16] 다만 문서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게르트 뮐러가 인자기 스타일이라는 것은 오해다. 신들린 위치선정으로 오프사이드 트랩을 깨는 것 잘했을 뿐.[17] 2020년대에 엘링 홀란드가 뛰어난 위치선정 능력으로 인자기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플레이 스타일이 다르고 홀란드가 인자기보다 가지고 있는 툴이 훨씬 많다.[18] 다만 클로제는 발도 빨라서 페널티 박스에서 조금 먼 거리에서 한달음에 달려와 파고들어 골을 넣는 것이 가능했다. 인자기와 비교하면 이쪽이 클로킹에 더 가까운 편.[19] 오해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축구는 발이나 머리외의 신체 일부를 써서 득점을 하면 무효가 아니냐는 건데, 축구에서 득점이 무효가 될 때는 손으로 넣었을 때다. 맨체스터 시티 시절 발로텔리가 노리치전에서 어깨로 득점한 적 있다. 이 문서 참고. 다리와 머리 이외의 부위를 사용하면 안되는 것은 족구의 규칙이다.[20] 예능이라고만 하긴 그런게 당시 해설의 말에 따르면 이걸 피를로랑 연습을 했었다고 한다. 물론 진지하게 했다기보단 한 두번 맞춰본 정도다.[21] 가장 비슷한 스타일의 공격수로 꼽히는 뤼트 판니스텔로이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일단 판니는 피지컬이 돋보이는 편인 데다가 발밑기술도 좋은 편이라 국제 대회에서는 원톱으로 플레이하기도 했다.[22] 당대 세리에의 정상급 공격수(호나우두, 셰브첸코, 크레스포, 토티, 비에리, 델 피에로 등)들에 비해 한참 모자라는 수준. 그래도 나름 유벤투스, AC 밀란이라는 빅클럽에서 십수년을 주전으로 뛰었던 만큼 최소한의 기본기는 갖추고 있었다. 또한 상술했듯이 주워먹기도 상대의 오프사이드 라인을 깨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는 체력, 빈 공간을 제때 찾아들어가기 위한 축구지능, 그리고 한 번에 찾아온 찬스를 골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결정력까지 갖춰야되는 만큼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리고 인자기는 이 분야에서 세계 정상급의 기량을 갖춘 선수였다.[23] 사실 라치오 입장도 상당히 골때리는게 마르셀로 비엘사가 도망쳐버려서 맡길 사람이 시모네 인자기밖에 없었기는 하지만 현재 상황은 일단 좀 더 지켜봐야되기는 하지만 시모네 인자기는 준비 기간이 없다시피 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감독직을 맡게 된 형과는 달리 은퇴이후에 유소년팀에서 일하면서 경력이 쌓여서 그런지 처음에 우려한 것과는 다르게 라치오를 비교적 잘 이끌었고 현재는 형의 최대 라이벌팀 감독을 맡고있다.[24] 17-18 세리에B의 순위는 상당한 혼돈으로 1위와 3위의 승점차가 3점차다.4위 바리와 공동 1위 팔레르모,프로시노네의 승점차가 5점차일 정도. 거기에 베네치아와 승점이 엇비슷한 카르피, 스페치아, 크레모네세, 파르마가 있다.[25] 경기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종료 직전까지 인자기는 선수들에게 소리를 치면서 끝까지 전술 지시와 독려를 한 반면, 피를로는 주머니에 손 넣고 구경만 했다. 속사정 까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모습을 보면 두 사람이 감독으로써 가진 태도를 비교 안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유벤투스의 홈이었고 유벤투스의 회장인 아녤리가 경기를 직접 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경기 승리 그 이상으로 볼 수 있다.[26] Premio Nazionale Carriera Esemplare "Gaetano Scirea"[27] 일설에 따르면 사건 당시 스쿠버 다이빙 중이어서 무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당시 기사를 볼 때 낭설에 가까운 듯 하다.[28] 원래 어감은 좀 더 부정적인 표현(That lad must have been born offside)이었다. 직역하면 "그 녀석은 아예 태어날 때부터 오프사이드였을거야." 위의 크루이프의 말도 그놈은 그거밖에 할 줄 몰라라는 식의 강한 어조였고, 퍼거슨 역시 '오프사이드나 계속 걸리는 놈'이란 식의 표현이다. 막상 인자기는 축구 잡지 포포투에서 위의 두 평가에 대해 나는 그걸로도 감사요ㅋ하는 반응을 보였다.[29] 실제로 인자기는 FC 바이에른 뮌헨만 만났다 하면 골 폭격을 퍼붓는 선수였다. 기록은 4경기 7골로 전력상 열세에 있다고 했던 2006-07 챔피언스 리그 8강전 2차전에서 골을 쑤셔넣어 팀을 4강으로 인도하기도 했다. 결국 그 대회 결승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2골을 넣으며 밀란의 우승에 일조했다.[30] 사실 이건 당시 뮌헨 수비진의 본질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