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5 23:33:53

마르첼로 리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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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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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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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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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012)
마르첼로 리피
(2012~2014)
파비오 칸나바로
(2014~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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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国家足球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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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르첼로 리피
Marcello Lippi
본명 마르첼로 로메오 리피
Marcello Romeo Lippi
출생 1948년 4월 12일 ([age(1948-04-12)]세) /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루카현 비아레조
국적 이탈리아 파일:이탈리아 국기.png
신체 183cm
직업 축구선수(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UC 삼프도리아(1969~1979)
사보나 1907(1969~1970 / 임대)
AC 피스토이에세(1979~1981)
AS 루케세(1981~1982)
감독 UC 삼프도리아(1982~1985 / 유스)
US 폰테데라(1985~1986)
AC 시에나(1986~1987)
AC 피스토이에세(1987~1988)
카라레세 칼초(1988~1989)
AC 체세나(1989~1991)
AS 루체세(1991~1992)
아탈란타 BC(1992~1993)
SSC 나폴리(1993~1994)
유벤투스 FC(1994~1999)
인테르나치오날레(1999~2000)
유벤투스 FC(2001~2004)
이탈리아 대표팀(2004~2006)
이탈리아 대표팀(2008~2010)
광저우 헝다(2012~2014)
중국 대표팀(2016~2019)
중국 대표팀(2019~ )[1]
기타 광저우 헝다(2014~2015 / 기술고문)
국가대표 없음
FIFA 월드컵 우승 감독
스콜라리(2002)(2006)델보스케(2010)

1. 개요2. 선수 시절
2.1. 경력
3. 감독 시절4. 기타5. 리피에 대한 말말말6. 기록
6.1. 우승6.2. 수상
7. 둘러보기

1. 개요

이탈리아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9년부터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을 이끌고 조국에 4번째 우승을 안긴 명장이며, UCL월드컵, 두 대륙의 챔피언스 리그(UEFA 챔피언스 리그,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한 최초의 감독이다.

2. 선수 시절

파일:Marcello_Lippi_giocatore-1.jpg

삼프도리아 출신이지만 프로 데뷔는 1969-70 시즌 사보나 1907에서 했으며 이 때의 임대 생활을 제외하곤 선수 시절 대부분을 UC 삼프도리아에서 보냈다. 1977-78 시즌 이후 AC 피스토이에세로 이적, 3시즌 동안 활약한 후 34살의 나이로 은퇴했다.

리피와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장인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파비오 카펠로, 카를로 안첼로티가 감독 커리어 뿐만 아니라 선수 시절에도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 리그 우승, 대표팀 승선 등 활약을 보여준 것과는 달리 리피는 평범한 선수 생활을 했으며 높은 레벨의 선수는 아니었지만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삼프도리아에서 얻은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2.1. 경력

1969Sampdoria0(0)
1969–1970Savona21(2)
1970–1978Sampdoria274(5)
1979–1982Pistoiese59(1)

3. 감독 시절

3.1. 감독 초창기

파일:Marcello_Lippi,_Atalanta_1992-93.jpg
92-93 시즌, 아탈란타 감독 부임 시절

은퇴 직후 1982년 친정팀인 삼프도리아에서 유스 팀 감독으로 지도자 데뷔를 한다. 3시즌 동안 유스 팀 감독을 한 리피는 1985년에 세리에 C2의 US 폰테데라의 감독으로 부임함으로써 첫 프로팀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다.

이후 AC 시에나, AC 피스토이에세, 카라레세 칼치오 등 하부 리그 클럽들을 떠돌며 경험을 쌓다가 1989년 드디어 AC 체세나에서 세리에 A 감독으로 데뷔한다. 그 후 AS 루체세를 거쳐 1992-93 시즌에는 아탈란타의 감독으로 임명되는데 리피는 아탈란타에서의 단 한시즌 동안 팀을 이끌면서 세리에 A 7위라는 최고의 성적을 안겨준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구단 역사상 최고의 순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승점 1점 차로 UEFA 컵 진출에는 실패한다.
파일:Marcello_Lippi_-_SSC_Napoli_1993-94.jpg
1993-94 시즌, 나폴리 감독 부임 시절

1993-94 시즌, 아탈란타 구단과의 의견 불일치로 인해 한시즌만에 구단을 떠나게 되고, 오타비오 비안키 단장에 의해 SSC 나폴리의 신임 감독으로 영입된다.

당시 나폴리는 디에고 마라도나와 함께 한 80년대 영광을 뒤로 하고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리피는 지난 시즌 11위에 그쳤던 팀을 리그 6위로 이끌고 다음 시즌 UEFA 컵에 진출시키는 등, 승승장구하여 이탈리아의 무명 지도자에서 새로운 명장으로 발돋움 해 간다.

리피는 나폴리에서도 1시즌만 머무르고 떠나게 되지만 그 짧은 기간에 그의 축구 인생에 있어서도 아주 의미있는 2명과의 만남을 갖는다. 그 중 한명은 당시 나폴리 수비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시즌이 끝난 후에는 리피를 따라 유벤투스로 이적해서 90년대 세계 최강 클럽의 핵심 수비수로 위상을 떨치게 되는 치로 페라라이고, 다른 한명은 176cm 단신의 별볼일없던 수비수였으나, 리피의 확고한 신임을 받으며 페라라의 중앙 수비 파트너로 기용되었고 먼훗날 다시 리피와 만나 세계 축구의 최정점에 서게 되는 파비오 칸나바로이다.

3.2. 유벤투스 1기

유벤투스, 리피와 함께 유럽 최강의 클럽으로 군림하다.
파일:215E9C3C534001891ECFC50.jpg 파일:Lippi.jpg
1992-93 시즌 아탈란타 BC, 1993-94 시즌 SSC 나폴리를 이끌면서 뛰어난 리더십을 검증받으며 반도에 서서히 유명세를 올려가던 리피에게 1994년 여름, 이탈리아 최고 명문 구단인 유벤투스가 러브콜을 보낸다.

당시 유벤투스는 이미 조반니 트라파토니라는 세계 최고의 명장이 팀을 이끌고 있었다. 트라파토니는 유벤투스의 찬란했던 70~80년대 황금기를 이끌다가 1985-86 시즌을 끝으로 떠났지만 6년 뒤에 팀이 부진에 빠지자 다시 감독직에 복귀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복귀했음에도 유벤투스는 AC 밀란에 밀려 70~80년대에 비해 다소 초라한 90년대를 보내고 있었다. 옆동내 AC 밀란의 파비오 카펠로처럼 젊고 열정적인 감독을 원했던 유베에게 리피는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2]

부임 첫시즌인 1994-95 시즌, 트라파토니 감독에게 물려 받은 기존 스쿼드에서 안드레아스 묄러, 디노 바지오 등이 팀을 떠난다. 그리고 리피의 지도 아래 나폴리에서 활약했던 수비수 치로 페라라, 뢰블레 군단의 캡틴이던 디디에 데샹, 포르투갈의 홀딩 미드필더 파울로 소사 등이 새로 영입된다. 또한 이 시기부터 세계적인 스타 선수인 로베르토 바지오가 부상으로 인해 기량이 저물기 시작하고 델 피에로가 1군으로 승격하여 리피 감독의 지도 하에 본격적으로 중용받기 시작한다.

전술 또한, 바죠와 라바넬리의 투톱 아래 묄러가 뒤를 받치는 기존의 4-3-1-2에서 탈피하여 델 피에로를 적극 활용한 델 피에로-비알리-라바넬리가 쓰리톱을 이룬 공격적인 4-3-3을 가동시킨다.

리피 부임 당시 세리에 A는 그야말로 AC 밀란의 천하.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이끌고 있었고 스쿠데토 4연패에 도전하는 최강의 팀이었다. 그러나 새 시즌이 시작되고 밀란은 마르코 반 바스텐의 부재 속에서 공격력 미흡과 수비진 노쇠화 등으로 인해 부진하면서 결국 리그 4위에 그치게 된다. 리피는 2위 라치오를 무려 승점 10점차로 따돌리고 9년만에 유벤투스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기나긴 밀란 제너레이션 시대의 종식을 선언하고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도 파르마를 상대로 승리하며 부임 첫시즌에 더블이라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세우게 된다.

이 시즌 UEFA컵에서도 선전하여 결승 무대까지 진출한다. 그러나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상대했던 파르마를 또 다시 만나는데 1, 2차전 합계 2:1로 패하면서 미니 트레블 달성에는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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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죠와 함께

2년차인 1995-96 시즌에는 이전 시즌만큼은 아니지만 큰 선수 변화가 있었다. 세계 최고의 스토퍼 위르겐 콜러도르트문트로 떠나고 대체자로 삼프도리아에서 12시즌을 뛴 레전드, 피에트로 비에르코우드를 영입한다. 비에르코우드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이미 45경기를 출장한 바 있는 베테랑이었다. 또한 부실했던 왼쪽 풀백 자원을 매우기 위해 잔루카 페소토, 트레콰르티스타와 메짤라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블라디미르 유고비치가 영입된다. 그리고 유벤투스에서 5년간 활약한 슈퍼 스타 로베르토 바지오가 라이벌 AC 밀란으로 떠난다.

리피 부임 2년차를 맞는 이 시즌에는 치열한 우승 다툼 끝에 스쿠데토를 다시 밀란에게 내주게 되지만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8강에서 레알 마드리드, 4강에서 FC 낭트를 차례로 꺾으며 결승에 진출한다.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열린 결승전에서는 루이 반 할이 이끄는 디펜딩 챔피언 아약스를 상대하는데 전반 13분만에 유벤투스의 측면 공격수 파브리치오 라바넬리가 선취 골을 기록하지만 41분경 야리 리트마넨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며 결국 더는 득점없이 연장전을 지나 승부차기에 돌입한다. 유벤투스의 골키퍼 안젤로 페루치가 에드가 다비즈, 소니 실루이의 슈팅 2개를 막아내는 맹활약 끝에 결국 승리하며 11년만에 유럽 정상의 자리에 오른다. 유벤투스 역사상 두번째 빅 이어이자 리피의 처음이자 마지막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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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96 챔피언스 리그 우승 당시

3년차 1996-97 시즌, 델 피에로와 함께 유벤투스의 이탈리안 쓰리톱을 구성했던 잔루카 비알리, 파브리치오 라바넬리가 팀을 떠난다. 공격진 대체가 불가피했는데 아탈란타의 신성 크리스티안 비에리, 라치오알렌 복시치를 영입하고 프랑스의 지롱댕 보르도로부터 지네딘 지단을 단돈 320만 유로에 영입한다. 거기다 한시즌만에 팀을 떠난 노장 수비수 피에트로 비에르코우드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거친 플레이로 유명했던 파올로 몬테로, 마크 율리아노를 영입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새 시즌을 앞두고 대대적인 팀 개편을 하게 되고 이후 유베는 본격적인 유럽 최정상급 클럽 궤도에 오르게 된다.

사실 그 이전 시즌까지는 리피가 영입한 선수들도 있지만 트라파토니 감독의 색채가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1996-97 시즌 이후로는 본격적인 리피의 색채를 갖춘 리피 유베 시대가 시작되었다. 측면 공격수를 담당했던 라바넬리의 이탈로 인해 더이상 쓰리톱 전술을 기용할 필요가 없어진 리피는 다시금 팀의 전술을 4-3-1-2로 회귀시켰고, 전술의 핵심인 1자리에는 지단을 기용하여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경기 지배력을 얻게 된다.

지난 시즌 빅이어를 들어올렸던 캡틴 잔루카 비알리의 이적으로 신임 주장은 안토니오 콘테가 임명된다.

시즌 개막과 함께 UEFA 슈퍼컵 우승으로 쾌조의 스타트를 보인 유벤투스는 세리에 A 전반기를 1위로 마치고 연말에는 일본에서 개최된 도요타 컵까지 우승하며 승승장구한다. 시즌 말미, 2년만에 다시 스쿠데토를 되찾아 오게 되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2년 연속 결승에 진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결승전에서는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이 이끄는 도르트문트에게 패배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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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 영입된 지네딘 지단과 함께

여담으로 지단과는 한 일화가 있다. 이탈리아 기자 루카 카오오리의 저서 <지단, 영광까지 10분>에 따르면, 리피 감독은 지단이 이적 초기에 저조한 활약을 보여 주변의 혹독한 비판에 시달리고 있을 때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옹호했다고 한다. 리피는 여러 포지션에 지단을 기용하며 최적의 위치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했다. 훗날 지단은 본인의 선수 인생 최고의 감독으로 리피를 꼽았다.

리피의 4년차인 1997-98 시즌, 비에리와 복시치가 한시즌만에 유베를 떠나자, 전 시즌 세리에 A 득점왕 필리포 인자기를 1,040만 유로에 영입하며 공격진 강화를 한다. 시즌 중반에는 AC 밀란으로부터 네덜란드 출신 싸움닭 에드가 다비즈를 850만 유로에 영입했다.

1997-98 시즌 리피의 유벤투스는 그 이전 시즌들의 페이스를 모두 웃돌며 질주했는데 그 위상은 가히 전 유럽에서도 적수가 없어 보였다. 이탈리아 내에서 그나마 대항마로 꼽을 수 있던 팀은 호나우두알바로 레코바를 영입한 인터 밀란 정도였다.

이 시즌에는 델 피에로의 활약 또한 눈부셨는데, 세리에 A에서만 21골을 득점하였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0골을 넣어 득점왕에 오르는 등 본인의 선수 인생 최고의 시즌을 보낸다. 호나우두와의 라이벌 구도 또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결국 유베는 인테르와의 치열한 우승 다툼 끝에 스쿠데토 2연패를 달성하는데 성공한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95-96, 96-97 시즌에 이어 무려 3년 연속으로 결승에 진출한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확실한 우세가 점쳐졌던 결승전에서 경기 도중 델 피에로가 상대 수비수 페르난도 이에로의 살인 태클로 인해 부상을 입게 되고[3] 공격력 부재 속에서 프레드락 미야토비치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허용하여 전시즌에 이어 또다시 결승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 다음 1998-99 시즌은 리피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측면 수비수 모레노 토리첼리의 대체자로 이고르 투도르가 영입된 것을 제외하면 전 시즌의 선수단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시즌에 돌입했다. 그러나 5년차에 접어든 리피의 팀은 1998 월드컵의 후유증으로 인해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지며 순위도 추락했다. 팀의 에이스 델 피에로의 부상 악재에 이어 겨울 이적시장에서 새로 영입한 유망주 티에리 앙리도 적응에 실패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결국 유벤투스는 우승권 밖으로 밀려난다. 1999년 2월경, 리피는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시즌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감독직에서 사임하였다. 후임 감독으로는 카를로 안첼로티가 임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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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98 시즌, 경기 도중 주장 콘테에게 지시를 내리는 리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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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21일에 있었던 유벤투스와 밀란의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을 함께 관전

과거 첼시의 지휘봉을 잡았던 안토니오 콘테 감독이 현역 시절 유벤투스에서 뛰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감독이 리피이다. 콘테는 리피를 비롯한 명장들의 지도는 훗날 자신이 감독이 될 수 있게 한 최고의 수업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콘테는 전술이나 시스템 등과 관련된 사항에 있어서 리피 감독에게 가장 많은 의견을 내며 소통을 하는 선수였고 리피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유벤투스에서 주장으로 뛰었다.
파일:1997 lippiferguson.jpg
1997-98 시즌 조별 예선 2차전,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유가 3:2로 승리한 경기가 끝난 후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함께

2000년대에 조세 무리뉴가 등장하기 이전에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가장 처음으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감독이 리피이다. 90년대 후반, 리피가 이끌던 유벤투스는 유럽 무대에서 맨유와 많이 부딪쳤다. 퍼거슨 감독은 당시 맨유 선수들에게 유럽 최강이던 유벤투스의 플레이 영상을 자주 보여주며 승리를 위한 갈망을 주입시켰다고 한다.

리피의 유벤투스와 퍼거슨의 맨유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96-97, 97-98, 98-99 시즌까지 3시즌 연속으로 만났고 총 전적 3승 1무 2패로 유벤투스가 우세했다.

3.3. 인터 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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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000 시즌, 인테르 부임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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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라티 회장 및 구단 수뇌부들과 함께

5시즌 동안 유벤투스에서 화려한 성과를 거두고 세계적인 명장 반열에 든 리피는 이후, 인터 밀란으로 감독직을 옮긴다.

당시 인테르의 마시모 모라티 회장은 공격수 수집에 둘째 가라면 서러운 양반이었다. 기존에 호나우두, 로베르토 바지오에 더해 크리스티안 비에리까지 영입하며, 무시무시한 공격진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인테르는 전술 밸런스와 선수단 기강 부분에서 유벤투스에 비해 형편없는 팀이었다. 리피는 화려했던 유베 시절과 달리 리그 4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겼고, 간신히 챔피언스 리그 예선 티켓을 따내는 수준에 그쳤다.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결승에 진출하게 되는데 라치오의 돌풍에 가로막혀 우승까지 차지하지는 못했다.

2000-01 시즌이 시작되고 전 시즌 리그 4위를 차지함에 따라 챔피언스 리그 본선 직행이 아닌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는데 스웨덴의 헬싱브르그에게 패배하며 탈락하고 만다. 안습

얼마 뒤 레지나를 상대로 한 세리에 A 개막전에서는 1:2로 패배해 버리며 "내가 구단주라면 코치진이든 선수진이든 모두 걷어차버리겠다"라는 격한 인터뷰를 하고 난 뒤 경질 당한다.

3.4. 유벤투스 2기

리피의 화려한 복귀, 다시 한번 유럽 왕좌에 도전하게 되지만...

인터 밀란에서 경질당한 후 1년 가까이 휴식기를 갖는다.

2001년 여름 리피에게 손을 내민 구단은 그가 황금기를 보냈던 클럽인 유벤투스였는데, 당시 유벤투스는 2년 연속 리그 준우승에 머문 카를로 안첼로티를 해임하고 새 감독을 궁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과거 리피와 함께 했던 90년대 영광을 되돌리고자 유벤투스의 대대적인 팀 개혁이 시작된다.

여름 이적시장이 열리기도 이전에 파르마릴리앙 튀랑이 영입된다. 이적료는 4,150만 유로로, 당시 수비수 월드 레코드를 갈아치웠는데 이는 유베의 그 역대급 이적시장의 시작일 뿐이었다. 90년대 영광을 함께 했던 리피가 재취임하고 세계 최고의 수비수 튀랑이 영입되었지만 사실 2001년 여름 이적시장의 가장 큰 관심사는 지네딘 지단의 이적 여부였다. 지난해 갈락티코 정책의 일환으로 루이스 피구를 영입한 레알 마드리드가 이번에는 지단을 노린다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한편, 유벤투스는 지난 시즌 다비드 트레제게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린 필리포 인자기AC 밀란에 3,700만 유로에 매각하고, 이와 동시에 파르마로부터 5,280만 유로에 잔루이지 부폰 영입을 발표한다. 그리고 얼마 뒤, 마침내 7,350만 유로라는 레알 마드리드의 메가 오퍼를 받아들여 지네딘 지단을 매각하기에 이른다.

세계 최고의 라이트백과 골키퍼인 튀랑부폰을 영입하긴 했지만 지단을 잃은 채로 만약 끝이 났다면 성공적인 이적시장이었다고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이적시장이 오늘날에도 높게 평가되는 이유는 그 이후 행보에 있다. 유벤투스는 이적료 수익을 아껴두지 않고 그대로 투자에 감행하는데 당시 재정난에 허덕이던 SS 라치오파벨 네드베드를 4,120만 유로에 영입한다.

이적 시장 말미에는 최고라 칭하기에는 모자랐던 반 데 사르도 방출한다. 그리고 트레제게의 백업 공격수로 마르셀로 살라스를 2,500만 유로에 영입하며 이적시장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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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여름, 새로 영입된 선수들과 함께

시즌이 시작되고 복귀한 리피 감독 지도 하에 새로 영입한 선수들이 빠르게 팀에 녹아들기 시작하고 영혼의 투톱 알레제게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며 인터 밀란과의 우승 다툼 끝에 다시 한번 스쿠데토를 가져온다. 리피 감독이 복귀 했음을 알리는 우승이자 클럽으로서도 4년 만에 들어올린 트로피였기에 더욱 값진 스쿠데토였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유벤투스는 다음 시즌 다시 한번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향해 초점을 맞춘다.

2002-03 시즌, 유벤투스는 더욱 탄탄한 스쿼드 구축을 위해 측면 미드필더 마우로 카모라네시, 그리고 이탈리아 출신 스트라이커 마르코 디 바이오 등을 영입했지만, 트레제게의 부상과 몬테로, 율리아노 등 핵심 수비수들의 컨디션 난조, 잔부상 등으로 인해 골머리를 썩게 된다. 결국 당시 36살의 노장 수비수 페라라를 중용하는 고육지책을 쓴다. 새로 영입된 카모라네시가 시즌 초반부터 좋은 활약을 보여주자 리피 감독은 기존의 측면 미드필더였던 잠브로타와의 공존을 고안해 낸다. 잠브로타의 포지션을 레프트백으로 변경시키며 기존의 잔루카 페소토가 담당했던 왼쪽 측면을 더욱 활로있는 공격 루트로 탈바꿈시킨다. 팀에 입성한지 2년차에 접어든 파벨 네드베드가 시즌 내내 최고의 활약을 선보이며 지단의 공백을 완벽히 메우고 있었고, 1997-98 시즌 이후 긴 시간 동안 부진했던 델 피에로 역시, 리피 감독 밑에서 다시금 부활하며 스쿠데토 2연패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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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데토 세레모니에서 잔루카 페소토와 함께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한 8강 2차전, 마르셀로 살라예타의 극적인 골든골로 4강 진출에 성공한다.[4]

4강에서 만난 상대는 또 다른 스페인의 거함 레알 마드리드였는데, 그 당시 레알은 익히 알려진대로 갈락티코 정책을 앞세워 화려한 멤버를 자랑하고 있던 팀이었다. 1차전 베르나베우 원정에서는 1:2로 패배하지만 델레 알피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레알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3골을 득점, 지단이 후반 추가 시간에 한골을 만회하기에 그친 레알을 3:1로 격파하며 결승에 진출한다. 그러나 팀의 핵심이던 네드베드가 81분경 스티브 맥마나만에게 불필요한 파울을 범해 결국 경고 누적으로 결승전에 출장할 수 없게 된다.

AC 밀란과의 결승전은 전형적인 이탈리아 클럽들간의 대결이었다. 90분도 모자라 연장 120분에 걸친 공격 작업에도 양팀은 1골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0:0으로 승부차기에 돌입한다. 유벤투스의 부폰이 상대 키커를 2번 막아내며 제몫을 다했지만 밀란의 디다는 무려 3개를 막아내며 결국 리피의 유벤투스는 96-97, 97-98 시즌에 이어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3번 연속 패배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이어나간다. 이분도 은근히 챔스 한정해서 콩 수집기운이 있다.

2003-04 시즌 페루자에 임대보냈던 파브리치오 미콜리를 복귀시키고, 전성기가 지난 다비즈를 대신할 선수로 가나 대표팀의 유망주 스테판 아피아를 영입, 거기에 노쇠화된 수비진을 보강하기 위해 키에보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던 니콜라 레그로타글리에를 AS 로마와의 영입 경쟁에서 이기고 영입하며 스쿠데토 3연패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노렸다.[5]

하지만 2003-04 시즌에는 선수들의 잔부상으로 베스트 11을 제대로 가동한 적이 없었고 야심차게 영입했던 선수들 마저 부진에 빠지는 등 악재가 겹쳐 결국 리그 리그 3위에 그친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16강에서 데포르티보의 돌풍에 덜미를 잡히고 탈락한다. 그나마 마지막 희망이던 9년만에 결승에 진출한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라치오에게 패하며 결국 무관으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그 전시즌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남긴 리피는 유벤투스 감독직을 사임하며 지난 8년간의 화려했던 유벤투스 커리어를 뒤로 하고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된다.

3.5. 이탈리아 대표팀

3.5.1. 2006 FIFA 월드컵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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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대표팀에서 커리어의 정점을 찍다.
2002 월드컵, 유로 2004의 연이은 실패로 트라파토니 감독이 사임하자, 그 후임으로 리피가 이탈리아 대표팀 지휘봉을 잡는다.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펼친 친선 경기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3:1, 독일을 상대로 4:1로 승리를 거두는 등 대회 직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많은 기대를 가져다 주었다.

월드컵 본선 가나, 체코, 미국 등과 함께 E조에 편성된 이탈리아는 자카르도의 자책골로 무승부에 그친 미국 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경기에서 2승을 거두며 비교적 쉽게 16강에 진출한다. 그러나 핵심 수비수 알레산드로 네스타가 16강전을 앞두고 부상을 당하며 대회 끝까지 출전할 수 없게 되자, 리피 감독은 파이팅 수비로 정평이 나 있던 마르코 마테라치칸나바로의 파트너로 기용한다. 16강 상대는 지난 대회에서 한국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몰시킨 바 있던 히딩크호주였다. 이탈리아의 공격은 히딩크의 수비 축구에 빈번히 막혔는데, 대회를 통틀어서 이탈리아가 가장 고전했던 경기였다. 90분 동안 승부의 흐름을 가져오지 못했던 이탈리아는 후반 추가 시간에 와서야 그로소가 얻은 다소 논란이 있던 페널티 킥으로 가까스로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8강에선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8강에 진출한 셰브첸코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잔루카 잠브로타의 환상적인 중거리 골과 함께 세리에 A 득점왕 루카 토니가 멀티 골을 뽑아내며, 다소 고전했던 16강전과 달리 3:0으로 가볍게 꺾고 12년만에 4강에 오른다. 4강 상대는 브라질이 8강에서 탈락한 시점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평가받던 개최국 독일이었다. 독일과의 4강전은 2006 이탈리아 대표팀을 한 경기로 압축한 상징적인 경기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칸나바로의 수비 퍼포먼스가 압권이었다. 분데스리가 득점왕이자 월드컵 득점 선두이던 클로제는 칸나바로의 철벽 수비에 막혀 경기 내내 이렇다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베를린 장벽이란 별명도 이 날 경기로 인해 붙여진다. 좀 처럼 풀리지 않고 득점없이 연장에 돌입한 양 팀의 경기 양상은 119분경, 안드레아 피를로의 패스를 건내받은 파비오 그로소가 극적인 결승골을 뽑아내며, 마침내 이탈리아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로소의 득점 세레모니는 마치 1982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을 터뜨린 전설적인 미드필더 마르코 타르델리의 세레모니를 연상케 했다. 교체 투입된 델 피에로의 쐐기골까지 터진 이탈리아는 연장 120분에 걸친 혈투 끝에 개최국 독일을 2:0으로 꺾는 저력을 보이며 12년만에 월드컵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에서는 노장 지네딘 지단의 MVP급 활약에 힘입어 8년만에 우승을 노리는 프랑스를 만나게 된다. 양팀의 경기는 6년전 유로 2000 결승전의 리벤지 매치로 관심을 모았다.[6] 결승전 경기는 전반 7분 이탈리아의 마테라치플로랑 말루다에게 파울을 범해 페널티 킥을 내주게 되고 지단이 이를 성공시키며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프랑스에게 끌려가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반 19분, 실점의 주인공 마테라치가 코너킥 상황에서 비에이라와의 헤딩 경합에서 압도하는 괴력을 선보이며 동점 골을 넣는다. 1:1로 팽팽히 균형을 이룬 양 팀의 경기는 결국 연장전에 이르렀는데 110분경, 지단이 마테라치와의 언쟁 도중 도발에 넘어가 결국 박치기를 해 퇴장 당하고 이는 분위기가 이탈리아 쪽으로 기울게 되는 계기가 된다.[7] 결국 이탈리아가 승부차기에서 승리하여 통산 4번째 우승을 하게 된다.

단순히 수비만 강했던 것이 아니라 대회 12득점으로 14득점을 한 독일에 이어 대회 두번째 최다 득점팀이었으며, 엔트리에 포함된 공격수 6인방이 모두 선발과 교체를 번갈아가며 골을 넣었다. 이렇듯 리피의 이탈리아는 공수 양면에 걸쳐 최고의 모습으로 대회를 휩쓸었으며, 리피 역시 사상 최초로 UEFA 챔피언스 리그FIFA 월드컵을 제패한 감독으로서 세계 최고의 명장 반열에 올랐다.[8]

3.5.2.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화려했던 월드컵을 뒤로 하고 사임, 그리고 복귀. 하지만 복귀가 독이 됐을 줄을 누가 알았으랴?
리피 커리어의 최대 흑역사[9]

2006 월드컵이 끝난 후 리피는 재계약을 하지 않고 명예롭게 대표팀을 떠난다. 후임 감독으로는 90년대 AC 밀란의 레전드, 로베르토 도나도니가 부임한다.

리피는 대표팀에서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스카이 이탈리아의 2007-08 챔피언스 리그의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도나도니 감독이 이로부터 2년 뒤에 열린 유로 2008에서 실망스러운 성적만 남기고 모가지가 달아나자 2008년 6월 26일, 2년만에 다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복귀한다.

이듬해 개최된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이탈리아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였지만, 이벤트성이 짙은 이 대회 특성상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지는 않았다.

연말에 열린 2010 월드컵 조 추첨식에서 이탈리아는 파라과이, 슬로바키아, 뉴질랜드 등과 함께 F조에 편성되며 대회 1시드국들 가운데 가장 수월한 조 편성을 맞이하였다. 특히, 뉴질랜드는 월드컵 참가 횟수가 고작 2회에 지나지 않았고, 슬로바키아는 월드컵에 처음 출전하는 축구 약소국이었다.[10]

2010 월드컵을 앞둔 시점, 리피는 마리오 발로텔리, 쥐세페 로시 등 젊은 공격수들을 기용하지 않고 2006년 우승 멤버들을 대거 중용한다. 또한 안토니오 카사노 같은 키 플레이어도 제외했다. 이러한 리피의 선택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4년전 월드컵 우승을 안겨주었고 이탈리아 내에선 둘째 가라면 서러울 명장이었기에 대다수의 팬들은 믿음을 가지고 지켜봤다.

본선 첫 경기 상대는 남미 예선을 3위로 뚫고 올라온 파라과이였다. 사실상 조 1, 2가 유력했던 두 팀의 경기는 수중전 속에서 서로 1골씩 주고 받으며 1:1로 끝이 난다. 하지만 이탈리아로써는 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한 것보다 주장 칸나바로와 함께 팀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부폰이 경기 도중 허리 부상으로 인해 앞으로의 대회 출장이 어려워진 것이 더 큰 뼈아팠다.

F조 두번째 경기. 이탈리아는 90분 내내 답답한 경기력으로 결국 본선 32팀 중 최약체 뉴질랜드와 1:1로 비긴다. 첫 경기도 아닌 두경기째 무승부로 인해 이 시점부터 이탈리아는 디펜딩 챔피언이었음도 16강 진출 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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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로 비기고 만 뉴질랜드 전
모든 사활을 걸어야 했던 슬로바키아 전. 당시 슬로바키아는 1무 1패로 조 꼴찌를 기록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탈리아의 우세가 점쳐진 상황. 경기가 시작되고 이탈리아는 전반 24분, 로베르토 비텍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간다. 그러나 실점 후에도 이렇다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후반 73분, 비텍에게 또다시 골을 헌납하며 결국 2:3으로 패하고 만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역대 최상의 대진이라는 호평 속에서 대회 2연패를 꿈꿨으나 결국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악의 성적으로 대회가 마무리되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4년 전 우승 멤버들 그 중에서도 골 결정력이 형편없는 공격수 빈첸초 이아퀸타를 끝까지 신뢰하고 3경기 내내 풀타임을 뛰게 한 게 그의 패착이었다. 그만큼 리피 감독은 이아퀸타를 믿었는데 정말 속담 그대로 믿는 도끼에 제대로 발등 찍혔다. 이아퀸타는 3경기 내내 개떡같은 활약을 보였고 2차전 뉴질랜드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 골 넣은 것 외에는 단 1골도 못 넣었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이탈리아로 귀국한 이후 리피는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난다. 이미 감독으로써 모든 걸 이뤄냈기에 유로 이후 대표팀 감독으로 재임한 것이 결과적으로 그의 오판이었던 셈이다. 재취임 이전에는 툭하면 여러 빅클럽들과 링크가 났으나, 이도 2010년을 기점으로 쑥 들어가게 된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은 현재까지도 리피의 감독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2014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대표팀 복귀 결정은 본인 스스로도 후회되는 일이라고 밝혔다.

3.6. 광저우 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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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머니가 2010년대에 들면서 본격적으로 중국 축구판에도 발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그 중심이었던 광저우 헝다의 돌풍은 2010년 3월, 헝다 그룹의 쉬자인 회장이 구단을 전격 인수하면서 시작된다. 막대한 투자로 다리오 콘카, 루카스 바리오스, 무리키, 클레오 등 유럽과 남미에서 활약하던 걸출한 선수들을 끌어모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감독 자리에도 유럽 출신의 명장을 원했던 그들의 욕망은 결국 2년간 팀을 이끌어 온 이장수 감독을 경질하고 2010 월드컵 이후로 야인 생활을 하던 리피마저 불러들이게 된다. 계약 기간은 2014년 11월 30일까지 2년 6개월이며, 연봉은 약 15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11] 리피로서는 선수, 지도자 경력 전부를 통틀어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벗어나 외국에서 지도를 하게 된 셈이다.

리피는 부임과 동시에 AFC 챔피언스 리그 16강전에서 FC 도쿄를 꺾고 팀을 8강에 진출시킨다. 8월에는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으로 활약한 중앙 수비수 김영권이 영입되어 한국 축구팬들의 관심을 모으게 된다. 김영권은 리피의 신임을 받으며 곧바로 주전 수비수로 활약한다. 9월 20일 펼쳐진 AFC 챔피언스 리그 8강전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이티하드 FC에게 1차전 원정 2:4 대패를 당한 탓에 2차전에서 2:1 승리를 하고도 결국 탈락하고 만다.

그래도 적수가 없던 중국 슈퍼 리그에서는 부임과 동시에 계속 1위를 질주한 끝에 10월 27일 랴오닝 훙윈과의 29 라운드 경기에서 승리하며 우승을 확정한다. 그리고 11월에 열린 중국 FA컵 결승에서도 구이저우 런허를 상대로 1, 2차전 합계 5:3 승리를 하였고 리피는 부임 첫시즌 더블을 일궈낸다.

12월, 브라질의 보타포구 FR로부터 570만 유로에 엘케손을 영입하며 다음시즌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리피 부임 2년차인 2013 시즌, AFC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에서 전북 현대 모터스와 같은 조에 편성되며 K리그 팬들에게도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12] 광저우는 F조 2차전 원정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는데 이날 경기 리피의 태도로 인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리피는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서 예정돼있던 공식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광저우 측이 기자회견 시간을 변경할 것을 요청해서 전북이 이를 응했음에도 또다시 시간 변경을 요청하자 전북이 거절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않으며 많은 비판을 들었다. 광저우와 전북은 5월에 텐허 스타디움에서 열린 F조 6차전에서도 0:0으로 비기며 나란히 16강에 진출하였다.

리피의 광저우는 16강에서 호주의 센트럴 코스트 매리너스를 상대로 1, 2차전 합계 5:1 승, 8강에서는 카타르의 레퀴아를 6:1로, 4강에서는 일본의 가시와 레이솔을 8:1로 차례로 꺾으며 결승 무대로 이끈다.

중국 슈퍼 리그에서는 일찌감치 우승을 확정지으며 리그 3연패에 성공하였고 챔피언스 리그 결승 무대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결승에서는 FC 서울을 만나게 되는데 지난번 전북과의 경기에서 리피의 태도로 인해 열불이 오른 한국 축구팬들은 광저우 만큼은 FC 서울이 잡길 바라는 상황. 광저우는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1차전에서 2:2로 비겼는데 2골의 원정골을 넣었기에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홈구장 텐허 스타디움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1차전의 이점을 잘 살린 끝에 1:1로 비겨 결국 창단 이래 첫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리피는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챔피언스 리그를 재패한 감독으로 이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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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

곧이어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에도 FA컵 결승에 진출하여 아시아 역사상 첫번째 트레블에 도전하였지만 지난 시즌 결승에서 꺾은 바 있던 구이저우 런허를 만나며 1차전 원정에서 0:2로 패했고 톈허 스타디움에서 열린 2차전에서 2:1로 승리하는 데에 그치며 트리플 크라운 달성에는 실패한다.

챔피언스 리그 우승 자격으로 참가한 FIFA 클럽 월드컵에선 이집트의 알 아흘리를 상대로 엘케손과 다리오 콘카가 나란히 골을 기록하며 2-0으로 승리하여 4강에 진출했다. 준결승 상대는 유럽 챔피언인 바이에른 뮌헨. 그리고 0:3으로 털리면서 역시 아무리 돈다발 무장해도 유럽 챔피언을 넘어서진 못했다. 아무리 돈다발 무장해도 중국리그의 한계도 있고 유럽시장은 본래 시장이 커서 저기는 중국급 돈지랄은 기본인 곳이라...패닉바이도 많고 3, 4위전에서는 브라질의 아틀레티코 미쿠를 상대로 2:3으로 역전패하여 4위로 대회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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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FIFA 클럽월드컵 준결승에서 만난 펩 과르디올라

새 시즌의 본격적인 개막을 앞둔 2014년 2월, 광저우는 볼로냐 FC이탈리아 대표팀 미드필더 알레산드로 디아만티를 690만 유로에 영입한다.

한편, 리피는 광저우와의 계약이 만료되는 2014년을 끝으로 클럽 감독을 은퇴하겠다고 밝혔었지만, 개막을 앞둔 2월말, 쉬자인 회장의 설득 끝에 광저우와의 계약을 2017년까지로 3년 연장하였다.

2014년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2012, 2013 시즌에 이어 또다시 전북 현대 모터스와 같은 조에 편성되며 주목을 끌었다. 텐허 스타디움에서 먼저 열린 3차전 경기에서 광저우는 전북을 3:1로 격파한다. 그러나 4월 2일에 있던 4차전 원정 경기에서는 0:1로 패한다. 여기서 리피는 전 시즌에 이어 또다시 전주 월드컵 경기장 공식 기자회견에 불참하여 다시금 논란이 있었다. 양팀은 지난 시즌에 이어 나란히 조 1, 2위로 16강에 진출한다. 리피 사단은 16강에서 세레소 오사카를 5:2로 격파하며 AFC 챔피언스 리그 2연패를 향한 큰 걸음을 이어간다. 그러나 8강에서 만난 호주의 웨스턴 시드니 원더러스와의 1차전 원정 경기에서 0:1로 패배한다. 게다가 경기가 끝날 즈음에 두 명이 퇴장당하자 리피는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경기장에 난입해 주심에게 항의했다가 1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고 2차전을 지휘할 수 없게 된다. 결국 2차전 홈에서 2:1로 이겼음에도 원정 다득점 원칙에 발목잡혀 2연속 우승의 꿈이 4강 문턱에서 좌절됐다.

시즌 도중이던 2014년 7월, 광저우는 또다시 돈을 풀어 이번에는 리피가 그토록 원했던 이탈리아 공격수 알베르토 질라르디노를 영입한다. 여기에는 리피 감독의 아들이자 축구 에이전트인 다비데 리피의 역할이 있었는데 엘케손과 헤네 주니오르, 알레산드로 디아만티 등도 그에 의해 영입된 선수들이었다.

한편, 중국 슈퍼 리그에서는 2014년 11월 2일 산둥 루넝과의 경기에서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고, 리피는 3년의 계약 기간을 남겨두고 감독직에서 사임을 표명했다. 이로써 폰테데라, 로부르 시에나, 피스토이에세, 카라레세, 체세나, 루체세, 아탈란타, 나폴리, 유벤투스, 인터 밀란 등 수많은 구단을 거치며 다사다난했던 리피의 29년간의 기나긴 클럽 커리어가 광저우에서 막을 내린다. 리피는 체력적인 문제로 인해 클럽 감독직 은퇴를 선언하지만 국가 대표팀 감독직은 아직 무리가 없다며,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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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 감독으로는 이탈리아2006 독일 월드컵 우승의 주역 파비오 칸나바로를 수뇌부에 추천하여 감독으로 임명시키고, 이후 본인은 광저우 헝다 최고 기술 고문직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리피는 석달 뒤인 2015년 2월 26일 기술 고문직에서 사임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간다. 스승의 비호를 받지 못한 칸나바로는 결국 해고당한다(...) 그러나 다시 돌아왔다.

3.7. 중국 대표팀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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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카마초중국 대표팀 감독이 경질된 이후 중국 축구 협회는 리피에게 수없이 러브콜을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2013년 당시는 리피가 광저우 헝다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시점이었다. 2013 시즌이 끝나고 난 뒤의 인터뷰에서 리피는 훗날 중국 대표팀 감독을 맡을 수도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1년뒤 2014년 말, 리피는 광저우 감독직을 내려 놓았고, 이후 2년에 걸쳐서 중국 축구협회와 중국 국가체육총국의 끈질긴 설득 끝에 2016년 10월 22일, 마침내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취임하게 되었다.

총 3년 계약이며 2,000만 유로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연봉은 리피 뿐만 아니라 함께 합류하게 되는 코칭 스태프들의 몫까지 포함한 것이다. 이 금액은 중국 축구협회와 광저우 헝다에서 공동으로 부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리피가 부임한 시점 중국 대표팀 상황은 그리 좋지 않은데 중국은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조 꼴찌였으며 이란, 카타르 원정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아랍권 원정에서 유달리 약한 중국이 남은 경기를 다 이기더라도 다른 팀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 될 정도였기 때문에 플레이오프를 여럿 치뤄야 하는 조 3위 조차도 어려웠던 상황. 그래서인지 중국 언론은 2018 월드컵은 포기하고 리피 체제에서 좀 더 전력을 가다듬어 2019년 아시안컵 결과를 더 기대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어쨌든 리피 감독 체제 하에서 치른 예선 첫 경기 카타르와의 경기에서 중국은 해발 1,900m 고지대에 위치한 운남성쿤밍에서 경기를 치르는 홈 텃세를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0 : 0으로 비겨 또 다시 첫 승 도전에 실패했다. 반환점을 돌 때까지 중국이 거둔 성적은 고작 2무 3패로 6차전 한국과의 홈 경기마저 패할 경우 남은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탈락이 확정된다. 그래도 리피 본인은 나름 만족스럽게 여기는 눈치고 중국 언론들도 아직까지는 급하게 다그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중국 축구의 문제가 하루이틀도 아닌지라 그걸 리피 감독이 하루아침에 해결하기에는 무리라는 사실을 아는 것.

이듬해 3월 23일 벌어진 한국과의 최종예선 경기에서 1-0으로 공한증의 한국에 승리한다. 공수 간격을 잘 유지하고 상대팀의 전술까지 파악하면서 사실상 한국팀을 가지고 놀았다. 이 경기로 리피감독은 왜 자신이 그라운드의 여우인지, 장인은 붓을 가리지 않는 다는 것을 중국와 한국의 축구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단 6개월만에 감독만 바뀌었는데 중국은 팀으로서 이전보다 더 조직적이고 유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기력이나 지략뿐만 아니라 한점으로 앞서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임에도 경기 끝날 때까지 침대축구를 자제하고 적극 공격에 나서는 등, 스포츠맨쉽이나 매너까지도 한국팀을 고개 숙이게 만든 것. 슈틸리케 감독과는 비교도 안되는 레벨의 감독임을 이번 경기로 증명하였다.[13][14][15]

이후 월드컵 예선전인 이란 원정은 0-1로 패해 중국은 탈락이 거의 확정되었다. 하지만 경기면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아 중국 축구연맹은 2019년 AFC 아시안컵에서 기대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탈락이 확정되었는데 연봉 250억(여기에 스텝까지 합하면 300억을 훨신 넘는다.)은 너무 비싸다며 리피를 교체하라는 여론도 있었지만, 중국 축협은 교체는 없다고 못박았다. 중국 축구팬들은 예선초반부터 가오훙보 대신 리피가 감독을 맡았으면 행운의 조편성 때문에[16] 자력 진출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나타내는 중.
2017년 8월 31일 치러진 9차전에서 우즈벡을 1:0으로 이기면서 다시 실날같은 희망을 안겨주었다.

2017년 9월 6일, 카타르를 상대로 치러진 10차전에서는 선제골을 허락하기도 했지만 10:11 상황에서 결국 2:1의 역전승을 거둔다. 하지만 동시에 진행된 다른 두 경기가 모두 무승부로 끝나는 바람에 중국은 결국 조 5위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이 5위지, 2위인 한국과 불과 3점차이고 3, 4위인 시리아, 우즈벡과도 불과 1점차이니, 탈락했지만 잘 싸운편이다. 비록 이번 월드컵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리피는 부임 이후 3승 2무 1패라는 괜찮은 성적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었고 중국 축구에도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자신감은 단순히 경기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감 부족을 중국팀의 문제라고 생각한 리피가 적극 부여한 것으로, 실제 리피는 전 감독들에 비해 과감하고 공격적인 진형을 사용했다는 평이다.

2017년 12월 9일 EAFF E-1 챔피언십/2017년의 한국전에서는 2 : 2로 비겼다. 리피는 그동안 중국팀 주축이었던 노장들을 모두 빼고 22세 이하 선수들을 대거 기용했다. 처음에 웨이스하오가 한 골을 넣고 1 : 0으로 앞서던 중국팀은 곧 김신욱이재성에게 연거푸 두 골을 먹고 뒤지게 되었다. 이어 한국팀에 일방적으로 몰리자, 리피는 수비를 강화하며 김신욱을 무력화시켰고, 곧 위다바오가 한골을 넣어 2 : 2로 비기게 되었다.

그러나 12일,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공격진의 골 결정력 부족과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러운 경기를 벌인 끝에 별 다른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0 : 0의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던 중 후반 39분, 일본의 코바야시 유에게 선제골을 얻어맞았고 후반 42분에는 쇼지 겐의 뜬금포 중거리슛까지 얻어맞으며 0 : 2로 끌려갔다. 종료 직전에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킥커 위다바오가 성공시켰지만 결국 1 : 2로 패배하며 3차전에서 북한을 이겨도 이미 2승을 차지한 일본의 승점을 넘을 수 없기에 결국 우승이 좌절되었다.

그리고 16일, 마지막 북한과의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하고 일본이 한국을 이겨 주어야 준우승이라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예상 외로 북한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경기가 잘 안 풀리자 전반 25분 만에 선수 교체를 단행해 흐름을 가져왔고 마침내 전반 27분, 북한이 공격에 실패한 틈을 타 역습으로 웨이 스 하오가 선제골을 넣으며 다시금 용병술을 입증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궁지에 몰린 북한이 총공격에 나서며 반코트 경기를 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그나마 골키퍼 왕다레이의 선방으로 위태위태하게 1점 차 리드를 지켜나갔지만 결국 후반 35분, 북한의 정일관에게 프리킥 동점골을 허용하며 1 : 1로 비겼다.

결국 중국은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최초로 북한을 상대로 무승부를 하는 굴욕을 당함과 동시에 최초로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며 2무 1패로 최종 3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사실상 대회 결승전이었던 한일전에서 한국이 일본을 4 : 1로 대파하고 대회 4번째 및 2회 연속 우승컵을 차지했다.

2018년 3월, 중국에서 열린 차이나컵 개막경기에서 웨일스에 6:0으로 두들겨 맞으며 참패했다. 기자회견에서 리피 감독은 고개를 숙이고 "내가 수준 이하 선수들을 등용해 벌어진 일이다!"라고 했다. 이후 체코와의 경기에서도 4:1로 참패했다.

5월 26일 미얀마를 상대로 1:0으로 승리하고, 6월 2일 태국 원정 경기에서도 2:0으로 승리하면서 일단 분위기는 반전(?)시켰다. 하지만 월드컵이 끝나고 9월에 카타르 원정에서 1:0으로 패하면서 다시 경기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 스코어 상으로 보면 아깝게 진 것 같지만, 카타르 선수들이 조금만 침착하게 경기했으면 두세골은 더 들어갔을 경기력이었다. 바로 작년 월드컵 예선 카타르 원정 때의 경기력은 다 어디 갔는지? 3월 차이나컵 대참사 후 일부러 젊은 선수를 줄이고, 베테랑[17]들을 출전시켰음에도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리피는 3달만에 다시 본 선수들의 상태가 놀랄만한(...) 수준이었다고 토로하며, 아시안컵이 다음 주가 아닌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이후 바레인과 경기에서도 골대 2번을 맞추며 0:0으로 비겼다.(...) 참고로 바레인 축구의 현재 수준은 동남아와 비슷한 수준으로, 직전 필리핀과의 경기에서도 1:1로 비겼다.

자연히 중국에서는 돈 받는 만큼 성적이 안 나온다는 비판론이 서서이 고개를 들고 있으며, 중국 U-21 국대에 히딩크를 불러온 것은, 리피가 삽질하면 바로 히딩크를 앉힌다는 중국 축협의 복안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아시안게임에 중국 U-23, U-21 대표팀 감독은 리피의 오른팔이자, 현 중국 대표팀 수석코치인 마시밀리아노 마달로니인데, 마달로니는 중국 대표팀에서 전술과 팀 운영 전반을 맡고 있다. 문제는 그가 A대표팀은 물론 U-23 대표팀에서도 신통찮다는 점. 툴롱컵에서 실망스런 결과(잉글랜드 1-2 패, 멕시코 1-3 패, 포르투갈 0-2 패, 카타르 1-1무[18])는 물론, 3월 치른 아시아 팀과 경기(타지키스탄 2-1 승, 태국 0-0 무, 시리아 0-1 패)에서도 부진하자 리피까지 덩달아 욕을 먹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U-23 대표팀은 아시안 게임 16강에서 탈락했다. 베트남처럼 목메달도 걸지 못한 상황이다. 그런데 이후에 9월 A매치 성적도 1무 1패였으니[19]...다만 U-23팀의 졸전에도 불구하고 리피가 직접 맡은 팀은 아니라서 리피에 대해서는 별말 없었으며 , 어차피 마달로니의 거취는 리피에 달려있었으므로 리피 사단의 일원인 마달로니는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마달로니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U-21에는 히딩크가 부임하게 되었다.

일단 중국 축구협회는 아시안컵을 마지노선으로 잡고, 리피와 재계약은 그 이후에 할 것으로 결정해 놓았다. 그런데 리피 쪽에서 먼저 2019년 1월 31일에 계약이 종료할 것이라며 재계약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리피를 신임하고 있는 현 중국축구협회 회장이 물러나는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그리고 리피의 연봉 반을 대던 광저우 헝다가 더이상의 연봉 지급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차기 감독에 대해서는 히딩크도 물망에 오르고 있지만 호르헤 삼파올리가 유력하다는 보도도 있었다.

2018년 10월 12일, 중국은 아시아 모든 나라를 이길 수 있다라는 인터뷰를 하고 다음 날, 중국 안방에서 인도와 평가전을 가져 무재배를 거둬 더 약체인 인도를 안방에서조차 못 이기면서 뭔 소리냐 비웃음을 들었다. 4일 뒤 시리아전에서는 가오린과 우레이의 연속골로 오랜만에 2-0 승리를 거두었다. 시리아가 내전중에도 남미 출신 자국 이민자들을 대거 등용했기 때문에 쉬운 경기는 아니었다.

11월 20일 팔레스타인과의 안방 경기에서는 펑샤오팅이 초반에 선제골을 넣었으나, 이후 여러 기회를 놓치며 더 달아나지 못했다 결국 후반 17분 동점골을 허용하며 1-1로 비겼다.

다만 리피는 이런 부진한 평가전 결과를 두고 "아시안 컵을 위한 실험을 하는 중이고 팀빌딩은 잘 되고 있다"면서 자신에게 비판적인 여론을 무마했다. 실제로 이렇게 중국이 벌인 졸전에서는 우레이, 가오린, 펑샤오팅 골키퍼 옌준링의 붙박이를 제외한 주전들은 계속 바뀌었으며, 리피는 총 2018년에만 총 80여명의 선수들을 평가전 엔트리에서 넣다 뺐다하면서 자신의 고별전이 될 아시안컵을 대비했다. 어차피 리피는 계약이 끝나면 감독직을 아예 은퇴하겠다고 공언했으며, 사실상 아시안컵이 리피의 마지막 감독직이라 더이상 재계약에 연연할 필요 없으므로, 이런 졸전을 좋게 해석하면 평가전에서는 승패를 불문하고 과감한 실험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리피는 대거 신예로 주전을 기록했다가 망한 EAFF E-1 챔피언십/2017년에서 교훈을 얻었는지, 2019 아시안컵에서는 대거 노장들을 기용하였다.(아시안컵 팀중 평균연령이 28세로 가장 높다.) 8명이 30대고, 주장인 정즈는 무려 38세다!! 정즈는 중국 리그에서도 2016 시즌 이후로는 노쇠화된 폼을 보여주고 있다는 게 문제. 리피가 정즈의 나이를 모르진 않을텐데, 굳이 불러와야 했다는 점에서 다른 선수들의 폼이 좋지 못하다는 추정도 있다.[20][21]

그런데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듯 의외로 조별예선에서는 약체 키르기즈스탄과 필리핀에게 2연승을 거두는 선전을 해서 16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다만 한국전에서는 2:0으로 져서 가시밭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16강전에는 태국을 2-1로 간신히 이겨서 2004년 이래 계속되었던 중국의 토너먼트 패전 징크스를 겨우 넘었다. 8강에서 강팀 이란을 만나기는 하지만, 일단 중국이 내부적으로 세워둔 목표인 8강은 도달했다.[22]

그러다가 결국 8강전에서 이란에게 3-0으로 참패하는 것으로 고별전을 마쳤다. 어차피 아시아 최강인 이란에 이기기는 힘들었지만, 투지가 있거나 끈끈한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세 골 모두 허무하게 내준지라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최종전이었다. 일부에서는 리피호 전에는 티격태격하던 동남아팀은 확실히 압살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을 올렸다고 하지만...필리핀의 경우는 한국전에 너무 오버 페이스를 했고, 태국과 16강 전에서는 선제골을 먹었다. 과연 이걸 압살했다고 할 수 있을지?

가성비를 떠나서 중국이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코칭스태프 뿐만 아니라 축구 전반적인 인프라 혁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실책을 한 선수를 소속팀에서 2군으로 경질시키고, 부진했던 대표선수들을 군대에 쳐넣는다고 한다는 한국의 80년대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시안컵이 끝난 후 언론에 공개된 바에 따르면, 이란과 8강 경기가 끝난 후, 리피는 대노해서 라커룸을 뒤집어 엎어버렸다고 한다. 남아공 월드컵 때 이탈리아가 탈락했을 때도 이렇게 분노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고. 경기 자체가 전술적인 미스라기 보다 수비수들의 어처구니 없는 실책으로 인한 완패다 보니 열불 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아시안컵이 끝나고 중국 축구 협회는 필리핀이 했던 것처럼 해외의 중국인 혼혈 선수들을 찾아 귀화시키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리피는 "내가 제안했던 일을 이제야 하고 있다"며 씁쓸한 반응을 보였다.

3.8. 중국 대표팀 2기

2019년 1월에 중국 대표팀 감독직을 파비오 칸나바로에게 넘겼던 리피는 2019년 5월 24일부로 중국 대표팀 감독으로 복귀했다. 기사(인터풋볼) 계약기간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일단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행을 목표로 취임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축구협회에서는 1기 시절 리피가 했던 요청에 딸 혼혈선수 및 중국에서 오래 뛰었던 선수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귀화를 추진한다고 한다. 이미 아스날에서 뛰었던 니코 예나리스(베이징 궈안)는 리커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대에 합류했고, 광저우 시절의 브라질리언 제자들인 엘케손, 굴라트도 귀화를 추진해서 중국 국대에 합류시킨다고.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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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입에 시가를 물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시가 애호가로, FIFA가 주관한 축구장 금연 정책의 최대 피해자로 불리기도 한다.

또 2012년에 광저우 헝다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선수로서든 감독으로서든 이탈리아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만약 남아공 월드컵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그 꿀조에서 2무 1패로 탈락하지만 않았어도 리피는 여전히 이탈리아에서 감독 생활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중국으로 오게 된 이유는 명예 회복이 더 크다. 광저우 헝다에서 4연패를 한데다가, 매년 100억이 넘는 연봉을 챙겼기 떄문에, 2010년의 흑역사는 어느정도 만회한듯. 중국 리그에 상당히 영향을 끼친 인물로, 감독까지 돈지랄 하는 광저우의 성공을 본 다른 팀들도 유럽 명장을 구해오게 되었고, 이전까지는 외국인 감독이라고는 기껏해야 동유럽이나 한국 감독을 쓰던 중국리그의 감독 수준도 올라가게 되었다.[23]

2015년 감독직을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하여 2016년 중국감독을 맡은 이유는 가오훙보 감독이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기대만큼 성적을 내지 못하자, 중국 축협 회장과 광저우 헝다 쉬자인 회장이 현지까지 찾아가 삼고초려했기 때문이다. 이후 2019 아시안컵 끝으로 중국을 떠나서 감독생활도 은퇴한다고 밝혔다.

5. 리피에 대한 말말말

"나는 정말로 리피 감독을 흠모했다. 그에게는 그만의 스타일이 있었고, 은회색 머리에 가죽 코트를 입고 작은 시가를 물고 있는 모습은 흡사 폴 뉴먼을 연상 시켰다. 상대팀 사령탑의 심리를 꿰뚫고 이를 역이용하는 리피 감독은 축구 전술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알렉스 퍼거슨
"리피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능력이 훌륭했어. 난 감독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확실한 비전을 갖고 있는 것과 그의 선수들에게 아이디어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거라고 생각해. 리피는 언제나 그걸 해냈고 우리가 3일마다 경기가 있을 때도 엄청난 능력으로 동기를 부여해줬지." - 안토니오 콘테
"내 선수 경력에 도움을 준 수많은 감독들이 있지만 딱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 마르첼로 리피 감독의 이름이 떠오른다. 그는 내가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보유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고, 늘 내게 팀에 우승 트로피를 안길 선수라고 말하곤 했다." - 지네딘 지단
"그가 감독으로써 가지고 있는 특별한 점은 바로 위닝 멘탈리티다. 감독에게 전술이나 시스템 구축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몇가지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리피는 항상 승리에 목말라 있으며, 이건 선수들에게 있어서도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 알레시오 타키나르디
"내 커리어에 있어서 최고의 감독을 뽑아야 한다면 나는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마르첼로 리피를 말할 것이다. 첫 훈련에서 리피를 보았을 때, 나는 리피가 만들어 낸 팬들과 팀 동료들의 열정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필리포 인자기가 팀을 떠난 후, 리피는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는 나의 잠재력을 이끌어 냈고, 나를 득점왕으로 만들기도 했다. 또한 리피는 내가 유벤투스에서 뛰는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해 주었다." - 다비드 트레제게

6. 기록

6.1. 우승

6.2. 수상

  • 판치나 도르 (3) : 1994–95, 1995–96, 2006(특별상)
  • IFFHS 선정 세계 최고 클럽팀 감독 : 1996, 1998
  • 옹즈도르(감독 부문) : 1997
  • UEFA 올해의 클럽 감독 : 1997–98
  • 세리에 A 올해의 감독 : 1997, 1998, 2003
  • IFFHS 선정 세계 최고 국가대표팀 감독 : 2006
  • 월드 사커 매거진 올해의 감독 : 2006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감독 부문) : 2011
  • 중국 축구 협회 선정 올해의 감독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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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임 후 파비오 칸나바로 뒤를 이어 중국 대표팀 감독직 복귀.[2] 구단 내에서 트라파토니를 경질하고 신임 감독으로 리피를 임명한 것 이외에도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움베르토 아넬리 회장에 의해 구단 보드진 주요 인사 부분에 전면 개각이 일어난 것. 구단 레전드 출신으로 부회장에 임명된 로베르토 베테가, 전무 이사로 구단의 경제 및 재무 관리를 맡게 되는 안토니오 지라우도, 그리고 단장으로서 선수 영입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90년대 유벤투스가 세계적인 거대 구단으로 발돋움하게 한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훗날 유벤투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축구계 전체를 몰락의 길로 빠트리게 하는 인물, 루치아노 모지가 새로 영입된다. 베테가-지라우도-모지 이 세명의 경영진은 이탈리아 내에서 소위 Triade(삼인조), 마피아 트리오 등으로 불리우며 2006년 칼치오폴리가 터지기 전까지 12년 동안 구단의 핵심 실세로 군림하게 된다.[3] 이에로의 이 태클로 인한 부상은 훗날 1998 월드컵 뿐만 아니라 델 피에로의 선수 생활 전체에 있어서 기나긴 슬럼프를 초래하는 큰 악재가 되고 만다.[4] 살라예타의 이 골든골 장면은 아직까지도 올드 유베 팬들의 뇌리속에 강하게 남아있다.[5] 영입 경쟁에서 패배한 로마는 차선책으로 크리스티안 키부를 영입한다.[6] 유로 2000 당시는 트레제게의 골든골로 프랑스가 우승했다.[7] 마테라치는 박치기 사건 이후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는다.[8]UEFA 유로 대회에서 팀을 이끈 바는 없는 관계로, UEFA 챔피언스 리그, FIFA 월드컵, UEFA 유로 3개 대회를 모두 우승한 최초의 감독 타이틀은 비센테 델보스케 감독이 가져갔다.[9] 이 월드컵에서 처참하게 실패한 후 리피는 사실상 유럽에서 추방되다시피 하며 명예 회복을 위해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떠나 중국으로 가게 된다.[10] 하지만 슬로바키아는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에는 알아주는 동구의 강호였다.[11] 이 금액은 당시 기준으로 당연히 아시아 내 클럽 감독 중에서 1위였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 축구 감독을 통틀어서도 펩 과르디올라, 주제 무리뉴 다음의 3위(!)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K리그 팬들은 이 정도의 연봉을 줄 수 있는 광저우의 재정 수준에 부러워 할 만도 했다. 150억이면 왠만한 구단의 1~2년 예산 수준이기 이기 때문...[12] 전북은 2012 시즌에도 조별 예선에서 광저우(리피가 부임하기 이전)를 만나서 패하고 16강 진출에 실패했다.[13] 프로는 연봉이 말하는데, 슈틸리케의 연봉은 약 30억원(4년 계약)인데 반해, 리피는 연 약 250억원(2천만유로)을 받는 것으로 이미 감독으로써의 위상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 연봉의 절반은 중국 축협이, 나머지 절반은 리피의 이전 소속 팀이었던 광저우 헝다에서 부담하는 것이라고 한다.[14] 물론 꼭 그런것만은 아니다. 파비오 카펠로2014 월드컵에서 연봉을 가장 많이 받는 감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를 16강에 올리지 못한 반면 홍명보보다도 연봉을 적게 받는 알레한드로 사베야아르헨티나를 결승전까지 데려갔다. 이런 예외가 있지만 대개 프로는 돈 받는 만큼 한다.[15] 특히 2년 뒤 아시안컵에서 파울루 벤투가 이끄는 대한민국과의 경기가 있었는데, 이 때 대한민국이 2:0으로 완승을 거뒀었다. 심지어 이 때는 벤투가 한국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던 것 뿐만 아니라 벤투호에서 가장 미스가 많이 났던 대회였다는 점을 보면 슈틸리케가 얼마나 삽질을 했는 지를 알 수 있다.[16] 강호인 일본, 사우디, 호주가 모두 B조로 갔고, A조에는 이란, 한국이 있었지만, 한국은 최종예선에서부터 슈틸리케의 심한 삽질 때문에 심하게 비실대고 있었기 때문에 B조보다는 월드컵 직행이 쉽다.[17] 38살이 된 정쯔까지 차출했다.[18] 참고로 한국 19세 이하팀이 이 카타르를 2-1로 이겼다. 이강인 없이.[19] 카타르는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중국을 상대로 1무 1패를 기록한 팀이며, 바레인은 아예 최종예선에 못 올라온 팀이다.[20] 하지만 정즈는 국대 내에서 훌륭한 인품, 리더쉽 및 큰무대 경험(찰턴 애슬레틱 및 셀틱에서 4년간 활약했다.), 그리고 광저우 시절부터 리피의 작전을 받아서 중국인 선수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실력 외적 요소로 뽑힌 것이다. 비슷하게 리피는 2006년 월드컵에 주장으로 대활약을 한 칸나바로를 3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2010년 월드컵에 데려간 바 있다. 결과는 나빴다[21] 그리고 리피는 주로 나이가 든 선수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월드컵 우승을 한 2006년 이탈리아 스쿼드를 보면, 주전들은 어려야 28~29세, 대부분 30대 초반이었다. 칸나바로, 델피에로, 토티, 네스타 등등...[22] 일부 기레기들은 중국의 "시나 스포츠"가 8강에 그친 리피를 "최악의 감독"이라고 욕했다고 보도하지만, 시나스포츠(新浪体育)는 스포츠기사 포털로서 말하자면 네이버의 스포츠처럼 여러 매체의 기사가 올라오는 포털이다. 여기는 중국의 오만가지 매체의 기사가 다 올라오므로, 이를 시나스포츠 전체의 논조라고 보도하는 것은 올바른 보도가 아니다. 이는 마치 네이버의 어떤 기사를 인용해 보도하면서 "한국 최고의 포털 네이버가 이렇게 보도한다"고 왜곡하는 것과 비슷. 대체로 중국언론이 리피호를 결산하는 기사들을 보면, 결과에는 실망스러워하지만, 리피 개인에 대한 비난은 거의 없다. 한 기사는 "돈이 만능은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절대 못했다.(钱不是万能的 没钱是万万不能的)"# 즉, 그만큼 돈을 쓰지 않았다면 그정도도 못했을 것이라는 씁쓸한 결론에 이르고 있다. 결국 일정 실력에 오를 떄까지는 계속 돈을 퍼붓겠다는 이야기[23] 이것을 모두 시진핑이 시켜서 중국 기업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억지로 돈을 쓴 축구굴기의 일환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축빠들이 있는데, 그보다는 광저우와 리피의 성공을 본 다른 기업들이 황사머니를 쓰게 된 것이다. 광저우가 돈지랄을 시작한 것은 시진핑의 집권 전(2013)인 2010년부터이며, 리피가 부임한 2012년만 해도 시진핑 집권전이었다. 게다가 대규모 축구 진흥 프로젝트인 소위 "축구굴기"가 시작된 것은 2015년 이후부터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유소년 선수 진흥책인 축구굴기와 각 개별기업이 돈을 뿌리는 황사머니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아니, 오히려 축구굴기는 황사머니를 억제하는 정책이다. 중국 축구인들도 황사머니의 거품이 오히려 축구 발전에 방해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축구굴기의 일환으로 황사머니가 뿌려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는 중국리그의 황사머니는 시진핑이 시킨 것이 아니라 광저우의 성공에 자극받은 다른 구단들이 따라했기 때문이다. 중국에 축구의 인기가 없다면 이런 축빠들의 주장이 말이 될지도 모르지만, 중국은 지역색이 엄청나게 강하기 때문에 자국리그의 인기가 상당하고, 오히려 인민들이 국제망신을 자주 당하는 국대보다는 자기 지역 구단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에, 지역기반으로 성장한 재벌들이 무리하게 보일 수도 있는 투자를 계속 하는 것이다.(이것은 한국 프로야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이렇게 한국의 일부 축구 커뮤니티에서는 자기가 믿고싶은 대로 쓴 뻘글이 계속 올라오면 그걸 읽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정설이 되는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