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7 13:29:04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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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 헝다 역대 감독
파비오 칸나바로
(2014~2015)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2015~2017)
파비오 칸나바로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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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축구감독
파일:external/i.imgbox.com/B2JXNbJn.jpg
이름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Luiz Felipe Scolari
출생 1948년 11월 9일 ([age(1948-11-09)]세) /
브라질 히우그란지두술주 파수순두시
국적 브라질 파일:브라질 국기.png이탈리아 파일:이탈리아 국기.png[1]
신체 178cm
직업 축구선수(수비수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SER 카시아스두술(1973~1979)
EC 주벤투지(1980)
노부 암부르구(1980~1981)
센트루 스포르치부 알라고아누(1981)
감독 센트루 스포르치부 알라고아누(1982)
EC 주벤투지(1982~1983)
GE 브라지우(1983)
알 샤바브 FC(1984~1985)
GE 브라지우(1986)
EC 주벤투지(1986~1987)
그레미우(1987)
고이아스 EC(1988)
알카디시야 쿠웨이트(1988~1990)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1990)
코리치바 FC(1990)
크리시우마 EC(1991)
알 아흘리 SFC(1991)
알카디시야 쿠웨이트(1992)
그레미우 풋볼 포르투알레그렌시(1993~1996)
주빌로 이와타(1996~1997)
SE 파우메이라스(1997~2000)
크루제이루 EC(2000~2001)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2001~2002)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2003~2008)
첼시 FC(2008~2009)
FC 부뇨드코르(2009~2010)
SE 파우메이라스(2010~2012)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2012~2014)
그레미우 풋볼 포르투알레그렌시(2014~2015)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2015~2017)
SE 파우메이라스(2018~2019)
국가대표 없음
애칭 펠리팡(Felipão)
FIFA 월드컵 우승 감독
자케(1998)(2002)리피(2006)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 감독
둥가(2009)(2013)뢰프(2017)
UEFA 유로 준우승 감독
조프(2000)(2004)뢰프(2008)

1. 개요2. 감독 활동
2.1. 1980년대2.2. 1990년대2.3. 크루제이루2.4. 브라질 대표팀 1기2.5. 포르투갈 대표팀2.6. 첼시 FC2.7. 부뇨드코르2.8. 브라질 복귀 및 대표팀 2기2.9. 그레미우2.10. 광저우 헝다
2.10.1. 2015년2.10.2. 2016년2.10.3. 2017년
2.11. 광저우 헝다 이후2.12. 파우메이라스
3. 지휘 스타일4. 수상
4.1. 우승4.2. 개인 수상
5. 이야깃거리


1. 개요

브라질축구선수 출신 감독.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을 7전 전승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으로 이끈 명장이다. 또한 브라질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트로피를 들어올린 감독이며,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유로컵 준우승과 월드컵 4강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러나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는 자국 대표팀을 4강에 올려놓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정작 준결승전에서는 독일대표팀에게 미네이랑의 비극이라는 브라질 축구 역사상 가장 가슴아픈 패배를 겪으며 경력에 큰 흠집을 남겼다.

자국에서는 애칭인 "펠리팡"으로 불리며, 이는 "펠리페 어르신(Big Phil)"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감독 활동

2.1. 1980년대

1981년 센트루 스포르치부 알라고아누(CSA)에서 은퇴 후 1년뒤인 1982년 CSA의 감독으로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한다. 감독직에 부임하자마자 CSA를 브라질 알라고아스 주 주별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 후 주벤투지, 브라질 지 펠로타스, 알 샤바브 FC (사우디아라비아), 그레미우, 고이아스,알카디시야 쿠웨이트(쿠웨이트) 등 브라질과 아랍 리그를 전전하는 저니맨 생활을 했고 그레미우 시절에는 히우그란지두술 주 주별리그 우승을 하기도 했다.

2.2. 1990년대

그러던 도중 1990년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어 걸프 컵을 우승하고 1991년에는 크라우시마 감독으로 브라질로 돌아와 브라질의 FA컵인 코파 두 브라질 우승을 차지하며 자리를 잡아가는가 싶더니 1년도 채 안되어 UAE의 알 아흘리, 1992년에는 다시 쿠웨이트의 알카디시야 쿠웨이트 감독으로 활동하며 아랍에서 감독직 생활을 이어갔다.

1993년 브라질의 그레미우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4년동안 그레미우에 머물면서 리그 우승 1회, FA컵 우승 1회, 주별리그 우승 2회를 차지 했고 1995년에는 남미의 챔피언스리그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차지 하며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시기 부터 언론으로부터 브라질 특유의 공격축구를 하지 않고 수비에 중점을 두는 실리축구를 한다면서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파일:gramper.jpg
1997년 일본 축구 잡지에 J리그 외국인 수장을 전국시대(일본) 무장의상으로 합성한 것. 뒷줄 왼쪽이 케이로스 당시 나고야 그램퍼스 감독. 오른쪽이 스콜라리. 아래는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당시 시미즈 에스펄스 감독)

1997년에는 일본의 주빌로 이와타 감독으로 부임했다. 리그 11경기만 지휘한채 4개월만에 감독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이 시즌에서 이와타는 J리그 우승을 했는데, 이것의 기초작업을 놓았다고 평가받고 있다. J 리그시절 등록명은 페리뻬 (フェリペ) 4개월만에 사임한 이유는 성적 부진이 아니라 브라질의 상파울루리우 데 자네이루를 연고로 둔 명문팀을 맡는게 오랜 꿈이었는데, 상파울루를 연고로 둔 파우메이라스에서 오퍼가 왔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후 이 팀에서 1997년부터 2000년까지 팀을 지휘하며 정규리그와 주별리그에선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1998년 FA컵 우승을 차지했고 1999년에는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차지 하며 1999년 남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3. 크루제이루

2000년부터 크루이제루의 감독으로 활동하며 2001년에는 미나스제라이스 주 주별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능력을 발휘했다.이 공적으로 브라질 국대 대표팀 감독에 오른다.

2.4. 브라질 대표팀 1기

파일:felipe2002.jpg
셀레상을 우승으로 이끌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예선에서 잇달은 졸전으로 사상 최초로 월드컵 예선 탈락에 빠질 뻔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 중도 부임하였다.[2]

당시 남미에는 10개 팀이 참가, 홈앤 어웨이로 풀 리그로 치르면서 4장의 티켓과 1장의 플레이오프 티켓이 걸려 있었는데, 브라질은 처음에 루솀부르구 지휘 하에서 예선을 치뤘으나 계속 무를 캐는 등 졸전을 벌이다가, 시드니 올림픽에서 카메룬에 2-1로 패한후, 루솀부르구가 잘리게 되었다. 루솀부르구 후임으로 잠시 에메르송 레앙이 국대 감독을 맡았으나 코파 아메리카 2001에서 4위로 마감하는 부진한 성적으로 해임되고 다시 스콜라리에게 기회가 온다.[3]

스콜라리는 대대적인 개혁을 이루는데, 팀 케미스트리에 해가 되는 호마리우를 과감히 제외시키는 등 명성보다 실력 위주로 대표팀을 선발한다. 이때 지우베르투 시우바카카가 발탁되어[4] 세계적인 선수로 거듭난다. 그리고 전통의 4-2-4 포메이션을 버리고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는 3-4-3 포메이션으로 전환하며 철저한 실리축구로 일관한다. 브라질 내부에서는 전통적인 팀 컬러를 잃었다며 비판을 받았고, 팬들은 호마리우를 발탁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당시 카르도수 대통령까지 나서 부탁했으나 스콜라리는 요지부동이었다.이때문에 협박이 잇따르자 경호원까지 붙었을 정도. 이 당시 1998년 브라질 국대를 이끌었던 자갈루마저도 스콜라리를 비난했다.
이렇게 극심한 반발도 있었지만, 스콜라리는 성적으로 대답하며 브라질을 본선에 진출시킨다. 턱걸이로 진출한 월드컵이기에 전문가들의 우승 전망은 낮았으나, 본선에서는 히바우두 - 호나우두 - 호나우지뉴로 이어지는 이른바 3R 스리톱의 대활약으로 환상적인 경기력 끝에 전승 우승을 차지하며 고국 브라질에 5번째 별을 선물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우승을 하긴 했지만 이 당시 스콜라리 감독은 백업 선수들로 호나우두와 히바우두와 클래스 차이가 나는 선수들인 루이장에디우손이라는 선수들을 뽑았다. 물론 지오반니 에우베르아모로수가 남미 지역예선에서 기회를 줘도 부진했고 루이장과 에디우손은 기회를 줬을 때 알짜배기 활약을 해서 그랬겠지만, 만약 호나우두와 히바우두가 도중에 부상이나 경고 누적, 퇴장 등의 변수가 생겼을 때 이들을 가지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지 미지수다. 그러나 다행히도 당시 브라질은 초공격팀이라고 불린 만큼 수비진과 골키퍼 라인도 3R 못지않게 막강했기 때문에 상당한 커버는 가능했을 것이다.

2.5. 포르투갈 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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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독일 월드컵 3-4위전에서 독일에게 패한 후 낙담하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위로하는 스콜라리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의 성공적인 활약 이후, 월드컵에서 졸전 끝에 조별 라운드에서 탈락한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을 리빌딩할 감독으로 선임된다. 1990년에 등장한 포르투갈 골든 제네레이션의 끝물에서 팀을 대대적으로 리빌딩한 스콜라리는 신예 데쿠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중용하며 유로 2004 결승전에 진출하나, 그리스의 수비 축구에 막혀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는 포르투갈을 40년 만에 4강에 올렸으며, 2014년 월드컵까지 깨지지 않은 월드컵 본선 12경기 연속 무패 기록을 세운다.

유로 2008에는 조별리그 1위로 올라갔으나, 8강에서 준우승팀 독일을 만나는 바람에 3-2로 패해 탈락했다.

2.6. 첼시 FC

파일:266295.jpg
빅클럽에서의 실패
월드컵 우승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국대 감독으로 유로 2004 준우승, 월드컵 4강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스콜라리는 여러 빅클럽의 구애를 받게 되었다. 2008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에 의해 아브람 그랜트 감독의 후임으로 첼시 FC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 기간은 3년이고, 스콜라리로서는 처음으로 유럽의 빅클럽을 맡게 되었다. 첼시뿐만 아니라 맨체스터 시티의 구애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선수단 장악에 실패하며 2009년 2월 한 시즌도 못채우고 하차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래서 보듯이 성적 자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애당초 첼시는 감독의 무덤이기도 했고, 구단주의 간섭과 선수단 입김이 너무 강해서, 아무리 월드컵 우승에 유로 준우승이라고 해도, 유럽 클럽 감독 경험이 일천한 스콜라리가 맡기는 힘든 팀이었다. 그리고 스콜라리가 원한 선수들[5]도 영입하지 못했다. 또한 폼이 떨어진 애제자 데쿠를 영입해서 거의 매 경기 주전으로 돌리는 바람에 라커룸 분위기도 어수선 해지고, 팀의 살림꾼이던 마이클 에시앙이 한동안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면서 초반의 상승세를 이끌어 가지 못하고 시즌 도중 경질당하고 말았다.

재밌으면서도 강력한 축구를 원하던 로만 구단주에 맞추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겠지만, 기존의 스쿼드에서 별로 변경된 것도 없으며 스콜라리 입맛에 맞는 스쿼드가 아님에도 갑작스런 스타일 변경을 시도한 것이 문제였던 듯. 주전급 선수로는 데쿠와 보싱와 정도가 영입되었으나, 이는 그 당시 스콜라리 감독이 추구하려던 포메이션에선 반드시 영입해야 할 선수는 아니었다. 스콜라리 감독은 데쿠를 플레이 메이커로 기용하고 호비뉴를 세컨드 스트라이커 혹은 윙포워드로 기용하는 시스템으로 기민하고 공격적인 포메이션을 구상했던 듯 하나 호비뉴의 영입 실패로 인해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스콜라리 감독 또한 팀내 분위기를 장악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고[6] 전술적으로도 특색이 없거나 다소 의아한 용병술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 마디로 이 시절 스콜라리는 자기가 생각한 팀을 만들기는 커녕, 선수단의 노골적인 항명에 시달려서 성적은 그럭저럭 냈지만, 구단 안팎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특히 영국의 극성스러운 언론들은 이런 불화를 뻥튀기를 해서 보도했고, 그러자 구단주 아브라모비치가 격노해 결단을 내린 것.

디디에 드로그바는 부임 초기부터 잔부상에 시달렸고또는 잔부상을 이유로 태업을 했고 부상에서 회복된 이후에도 대놓고 항명하면서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와 직접 접촉해 스콜라리와 함께 일 못하겠다며, 이적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EPL 최고의 골잡이었던 니콜라 아넬카도 윙어로 뛰라는 스콜라리의 지시에 항명했다. 이런 주전들의 항명에 시달린 스콜라리도 드로그바와 아넬카를 타 팀으로 보내고 인터밀란의 아드리아누를 데려오자고 제의했지만 결국 이 둘 대신에 스콜라리가 나가게 되었다. 스콜라리는 2017년 한 인터뷰에서 "아넬카 때문에 첼시에서 쫓겨났다"며 아넬카를 원망했다.

결국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반영한 듯 첼시의 자랑이던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86경기 무패라는 대기록이 2008-09 시즌 프리미어 리그 9라운드 경기에서 리버풀에게 패배하며 깨지고 리그 내 성적도 서서히 내려가게 되었다. 게다가 2009년 2월 1일 리버풀 FC 원정에서 2-0으로 패하고 7일 헐 시티와 홈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한 후 방점을 찍으며 전격 해임되었다. 사실 승률은 14승 7무 4패로 리그 4위를 달리고 있어서 그다지 나쁘지 않았지만 고참 선수들과의 불화 및 구단주의 성급함으로 해임된 것. 첼시에서의 스콜라리의 총 전적은 20승 11무 5패로 승률은 55.56%였다. 전임 무리뉴가 전해에 2위로 리그를 마쳤고, 승률이 66%, 후임 히딩크가 72%의 승률을 거둔 것을 보면 확실히 스콜라리는 첼시에서 죽을 쑨 것은 맞다. 하지만 스콜라리호 첼시가 챔스 진출권에 놓여 있었던 것을 보면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스콜라리가 첼시를 나락에 빠뜨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적어도 무리뉴호 첼시의 15/16시즌 정도로 팀을 박살낸 것은 아니다. [7]

후임이 바로 거스 히딩크. 히딩크는 스콜라리의 유산을 물려받아 리그 3위로 마치게 되었고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그런데 신태용호에 불신을 가진 일부 히딩크빠들이 각종 스포츠 커뮤니티에서 스콜라리가 첼시를 거의 망쳐놓은 것을 히딩크가 와서 살려놓았던 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히딩크빠가 많은 어떤 야빠싸이트, 실제 기록을 보면 이 당시 (2월 7일 현재) 첼시는 4위를 하고 있었다.[8] 고로 팀내 잡음에도 불구하고 첼시의 전력이나 스쿼드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그 다음 카리스마가 있는 히딩크가 오자 선수단의 잡음은 사그라들었고, 한 단계 나은 성적을 거두게 된다. 그러니까 히딩크가 첼시에 와서 스콜라리보다 잘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콜라리가 팀을 망친 것을 재건한 것은 아니며, 스콜라리도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할 수 있다 [9]

나중에 스콜라리는 2016년 안토니오 콘테가 첼시에 부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첼시는 세계적 감독이 와도 어려운 자리다" 라 평했지만 그딴 거 없이 우승을 차지했다가, 결국 두번째 시즌을 마치고 짐을 쌀 위기에 있었고, 결국 시즌이 끝난 후 해고되었다. 확실히 첼시는 장기집권이 힘든 팀은 맞는 듯.

2.7. 부뇨드코르

이후 우즈베키스탄부뇨드코르감독으로 부임했다. 뜬금없이 이 팀을 맡은 이유는 이 팀의 구단주가 대통령 일가라서 당시 아챔 우승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팀에 입단한 히바우두를 앞세워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노렸으나, 포항 스틸러스와의 8강전에서 2차전 연장 혈투까지 가는 끝에 결국 4-5로 패해 좌절되는 등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 첫해는 우즈벡 리그 우승을 했고, 2년차에는 못하고 우즈벡을 떠났다.

2.8. 브라질 복귀 및 대표팀 2기

그 뒤로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 파우메이라스 감독으로 선임되며, 다시 브라질리그에 복귀하며 2012년 FA컵인 코파 두 브라질 우승을 차지하며 어느 정도 명예회복을 한다.
파일:weeping_scolari.jpg
독일의 일곱번째 골이 들어가자 얼굴을 가리며 절망하는 스콜라리.

이후 자국에서 열리는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의 사령탑으로 다시 선임되며 기대를 모았다. 전임감독이 마누 메네지스였는데,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멕시코에게 금메달을 헌납했기 때문에, 재계약을 못하고 해임되었다. 브라질로서는 홈에서 반드시 우승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야 했기에, 우승해본 감독을 찾다보니 다시 스콜라리를 찾게 되었다.

스콜라리가 "실력이 떨어지는 프레드, , 헐크 등을 의리로 뽑았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당시 사정을 보면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프레드는 해당시즌 브라질 리그 득점왕에, 전년도에 있었던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던, 당시로서는 브라질에서 제일 나은 공격수였고[10], 헐크 역시 의리축구 운운하는 소리는 아니다. 그 외에 조, 펠리페가 기대 이하의 선수인 것은 맞지만 대부분의 감독들도 경기에 뛸 일 없는 후보의 후보 선수들은 자기 제자를 선발하곤 한다.

하지만 후안 카밀로 수니가에게 니킥을 당한 네이마르의 부상과 치아구 시우바의 경고누적 아웃이라는 최악의 악조건 가운데 벨루오리존치에서 세계 최강 독일을 만난 결과, 미네이랑의 비극을 겪었다. 특히 스콜라리호는 팀 빌드업을 이끌 미드필더의 부재를 빌드업 능력이 출중한 수비수들로 해결하려는, 한정된 자원에 비해서 매우 훌륭하다 할 만한 플랜 A에 비해 플랜 B를 전혀 준비하지 않았기에, 결국 4위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내며 감독직을 내려놓게 된다. 브라질에서는 4강이 기대 이하라니...[11]

이 당시 스콜라리는 분노한 브라질 국민들에게 개인적인 사과성명을 발표할 정도.

2.9. 그레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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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이랑의 비극 이후 계속되는 흑역사

워낙 엄청 비난을 받아 축구계에서 은퇴하는 거 아니냐 했지만, 18년 만에 다시 그레미우의 감독이 되었다. 그레미우 시절 리그 우승 및 코파 리베르도타레스 우승같은 화려한 성적을 거뒀기에 그레미우 팬들에게는 아직도 반응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2015년 5월 성적 부진으로 그레미우에서 경질당하고 말았다. 월드컵 우승도 경험했던 감독 치고는 행보가 너무나도 씁쓸하다.

2.10. 광저우 헝다

2.10.1. 2015년


2015년 5월 광저우 헝다 감독을 맡고 있던 파비오 칸나바로아챔 2015 성남전에서 무를 캔후 전격 경질되었다. 리그에서는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4월들어 계속 무승부를 기록하자 구단주가 감독 초짜인 칸나바로의 능력에 의구심을 가지고 6개월만에 경질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바로 데려온 감독이 바로 그레미우에서 나온 스콜라리였다.

스콜라리는 오자마자 호비뉴파울리뉴를 유럽에서 데려와서 팀의 외국인 라인을 손봤다. 호비뉴는 사실 실패한 영입이었지만, 파울리뉴는 스콜라리 아래서 갱생하여 2017년에 FC 바르셀로나로 갈 수 있었다.

이렇게 시즌 중도에 부임했으나, 2015시즌 중국 슈퍼리그 우승과 함께 중국축구협회에서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11월 21일 알 아흘리를 상대로 1:0 승리를 하며 아시아 챔피언스리그까지 우승하며 더블을 달성했다. 1995년과 1999년 남미의 챔스인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에 이어 양 대륙 대륙대회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2.10.2. 2016년

그러나 좋았던 기억도 잠시 2016년, 스콜라리 감독이 이끄는 광저우 헝다는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 조별리그에서 광탈하는 수모를 겪었다.

1차전 포항 스틸러스와의 홈 경기에서 광저우는 모래알 조직력을 드러내며 0 : 0으로 유기농 무를 캐고 말았고 2차전 시드니 FC와의 경기에서는 상대의 자책골이라는 행운을 얻고도 1 : 2로 패배했다. 3차전 우라와 레즈와의 경기에서도 2 : 2로 무재배에 그쳤고 4차전에는 그 우라와 레즈에게 0 : 1로 패배했다. 5차전에서 포항 스틸러스를 상대로 모처럼 2 : 0 승리를 거두었지만 시드니 FC와 우라와 레즈가 서로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결국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되었다. 전 대회 우승팀이 조별리그에서 광탈하는 수모를 남겼기에 현재 광저우 팬들 사이에서는 스콜라리를 경질해야 한다는 목소가 높았으나, 리그에서 선전하기 때문에 경질은 아니다.

리그 내에선 19승 7무 4패 승점 67점으로 리그 연속우승에 성공했고, FA컵도 최용수가 지휘하는 장쑤 쑤닝을 이기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적어도 아챔의 부진으로 몰락의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닌 듯.[12]

2.10.3. 2017년

2017년 현재도 중국 슈퍼 리그에서는 초반에 흔들리더니 5월이 지나자 연승으로 1위로 올라왔다.

다만 아챔에서는 예전에 보여주었던 광저우의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16강에서 가시마 앤틀러스와 1승1패로 동률을 이뤘으나 원정 다득점으로 겨우 8강에 올라왔다.

2017년 8월 22일, 라이벌 상하이 상강과의 아챔 8강전에서 파울리뉴의 이적으로 인한 조직력 공백을 극복하지 못하고, 4:0으로 참패했다. 9월 12일 벌어진 2차전에서는 5-1로 승리했으나 승부차기에서 패해 탈락. 마찬가지로 직후에 열린 FA컵에서도 똑같은 상하이 상강에게 패해 탈락하였다. 두 경기의 문제점은 바로 공격의 핵인 파울리뉴의 부재.

최근에는 아시아에서 월드컵에 나갈 수 있는 팀을 감독으로 맡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연봉 100억을 어떤 나라가 낼 수 있을까 중국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중국은 월드컵을 못 나간다

2017년 9월 말 카를로 안첼로티바이에른 뮌헨에서 해임되자, 광저우 헝다 측은 안첼로티 측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스콜라리는 11월에 끝나는 계약을 두고 그다지 재계약에 관심이 없는 듯, 안첼로티에게 "중국 리그는 한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맡아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시즌 종료를 거의 앞둔 10월 말, 재계약을 안한다고 못박았으며, 월드컵에 나갈 팀을 알아보고 있다던데, 진짜로 한국 국대에 관심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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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의 리그 7연패를 확정한 후 기뻐하는 스콜라리옹.

10월 22일, 구이저우 즈청을 5-1로 대파하고 슈퍼리그 2017 시즌 우승을 확정지으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스콜라리로서는 3연속 우승으로 2014년 월드컵의 흑역사를 그래도 4강조금이나마 만회한 셈.

11월 6일 고별 기자회견에서 일단 고향 브라질로 가겠지만, 중국에 되돌아 올수도 있다는 여지의 말을 남겨 현역 복귀의 길은 열어두었다.

2.11. 광저우 헝다 이후

러시아월드컵 종료 후 ''대한축구협회에서 스콜라리에게 조만간 정식으로 감독직 제안을 할 것"이라는 브라질발 기사가 떴다. 기사 다음날 스콜라리의 대리인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독일과의 경기를 인상깊게 본) 스콜라리 감독은 한국행을 원하며, 감독 선임을 요청했다"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된 더 자세한 내용은 벤투호/선임과정 문서 참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외에도 현재 이집트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접촉 또한 이뤄지고 있는 중이라고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국대 감독으로 명예회복을 하고 싶지만 협상력이 없으면 헐값에 팔릴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니 의도적으로 복수의 팀과 협상을 한다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다만 한국팀 감독이 되기는 어려워 보이는데 스콜라리 본인이 책정한 연봉 수준은 축협이 정한 기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39억 원에 달하기 때문이다.[13] 현재 상황을 생각하면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 본래 받던 연봉보다 더 받겠다는 의향으로 보인다.#

2.12. 파우메이라스

2018년 7월 27일 SE 파우메이라스 감독을 맡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

2019년 9월 2일 리베년]] 7월 27일 SE 파우메이라스 감독을 맡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

시즌 초반에는 5위권에서 있었으나, 10월에는 1위로 올라왔다. 결국 우승함으로서 명장 실력 어디 안 감을 보여줬다.

2019년 9월 2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탈락하면서 경질당했다.

3. 지휘 스타일

브라질 출신 감독답지 않게 수비형 축구를 한다. 일단 현대 축구의 경향인 선수들의 피지컬, 조직력 (특히 수비력)을 중시한다. 이는 개인기와 공격력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브라질 스타일과는 다른 것으로 현지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02년당시에도 3백 + 윙백의 조합으로 수비축구를 했으나, 당시 브라질의 공격라인이 사기적이었기 때문에 만나는 팀마다 두들기며 우승을 할 수 있었다[14]. 유로 2008에서도 포르투갈의 4백에 미드필더인 주앙 무티뉴와 프티가 가담하여 매우 수비적으로 운용했다. 광저우 헝다에서도 김영권을 중심으로하는 수비진에 황보원이나 정즈, 파울리뉴와 같은 미드필더들이 수비에 적극 가담하게 만들었다.

공격에 있어서는 헤딩을 중시하며, 사이드 어택과 빠른 역습을 중시한다. 다만 공격엔 특별히 지시를 내리지 않아서, 공격력이 좋은 포워드가 있으면 팀은 승승장구하지만, 이들이 막히면 답이 안나오는 실정. 이는 2002년과 2014년의 대조적인 결과로 설명이 된다. 거기다가 2002년에는 스콜라리의 스타일이 대부분의 유럽팀에 생소했지만, 포르투갈이나 첼시를 맡으면서 2014년에는 이미 유럽에 대부분 알려진지라, 독일이 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또한 선수 관리도 남미 감독답지 않게 카리스마형이며 이 때문에 선수단 입김이 센 첼시 FC시절에는 선수단과 마찰이 심했다. 브라질 국대 감독 시절에는 여친이나 배우자와의 동침도 금지할 정도로 정신 집중을 중시했으며 사생활에 문제가 있는 선수는 기용하지 않았다고.[15] 그리하여 첼시 시절엔 대부분의 기존 주전선수들과 사이가 나빴다. 다만 훈련 강도는 비슷한 카리스마형 감독인 마가트박종환과는 달리 그다지 세지 않은듯, 첼시 시절에는 당시 주장이던 존 테리도 , 훈련이 너무 적다며 스콜라리를 언론에다 디스했을 정도.

그래도 그를 전적으로 따르는 선수가 많은 것을 보면 리더쉽이 있는 모양. 예를 들어 데쿠는 스콜라리가 경질된 후, "스콜라리 때문에 첼시에 왔다"며 불만을 표시했고, 스콜라리가 2013년 컨페더레이션 컵에서 브라질 국대로 발탁한 파울리뉴는 스콜라리의 구애를 받고 토트넘 핫스퍼에서 두말않고 유럽에서는 거의 한물 간 선수들만 가는 막장 리그로 폄하되는 중국으로 갈 정도.

일부에서는 선수빨 감독이라고 폄하하는 경우도 있는데, 좋은 선수를 데리고도 성적을 못거두는 감독이 수두룩 하다는 것을 보면, 좋은 선수를 데리고 있을 때 확실한 성적을 내는 스콜라리는 능력이 폄하된 이유는 없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의 브라질(우승)과 유로 2004 (준우승)의 포르투갈은 선수 네임밸류만으로 좋은 성적을 장담할 수 있는 팀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팀들이 좋은 성적을 거둬 선수 네임밸류가 올라간 것으로 보는게 더 합당하다. 2002년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브라질 대표팀 역사상 최악의 성적이 예상되던 팀이었고, 2004년의 포르투갈은 골든 제네레이션이 대부분 노쇠화되었고, 2002년 월드컵에서 16강 탈락을 한데다가, 호날두는 당시 19세의 풋내기여서 좋은성적이 기대되는 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팀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16] 마찬가지로 광저우에서도 중국인 주전들이 모조리 노쇠화된데다가, 맨시티식의 운영을 하는 광저우의 성공을 본 다른 중국 구단들도 황사머니를 시전하여 남미-유럽에서 수준급 선수를 데려오면서 상위권팀들의 전력이 평준화되었으나, 광저우는 스콜라리 지휘 아래에서 3연패를 했으니, 스콜라리가 선수빨 감독 혹은 운장이라는 주장은 좀 무리한 주장이다. [17]

4. 수상

4.1. 우승

  • CSA (1982)
    • 브라질 알라고아스 주 주별리그 (1) : 1982
  • 알카디시야 쿠웨이트 (1988 - 1990)
    • 쿠웨이트 아미르 컵[18] (1) : 1989
  •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 (1990)
    • 걸프 컵 (1) : 1990
  • 크라우시마 (1991)
    • 코파 두 브라질 (1) : 1991
  • 그레미우 (1987, 1993 - 1996, 2014 - 2015)
    • 브라질 세리에 A (1) : 1996
    • 코파 두 브라질 (1) : 1994
    • 히우그란지두술 주 주별리그 (3) : 1987, 1995, 1996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 : 1995
    •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1) : 1996
  • 파우메이라스 (1997 - 2000, 2010 - 2012)
    • 코파 두 브라질 (2) : 1998, 2012
    • 코파 메르코수르 (1) : 1998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 : 1999
  • 크루이제루(2000 - 2001)
    • 미나스제라이스 주 주별리그 (1) : 2001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2001 - 2002, 2012 - 2014)
    • FIFA 2002 월드컵 우승
    • FIFA 2013 컨페더레이션스 컵 우승
  • 분요도코르 (2009 - 2010)
    • 우즈벡 리그 (1) : 2009
  • 광저우 에버그란데 (2015 - 2017)
    • 중국 슈퍼 리그 (2) : 2015, 2016 , 2017
    • AFC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1) : 2015
    • 중국 축구 협회 FA cup (1), 2016

4.2. 개인 수상

  • 남아메리카 올해의 감독 : 1999, 2002
  • IFFHS 선정 세계 최고의 감독 : 2002
  • 중국 축구협회 올해의 감독 : 2015

5.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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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비센테 델보스케와는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위의 사진은 2012년 피파 주최 올해의 감독상의 시상식에서 상을 주는 스콜라리(왼쪽)와 받는 델보스케. 게다가 둘의 행적도 비슷한데 둘다 월드컵 우승 감독이고 (스콜라리 2002, 보스케 2010), 우승 후 자국 팀을 이끌고 출전한 두번째 월드컵인 브라질 월드컵에서 흑역사(스콜라리는 2014년 준결승에서 독일에 1-7로 패배 및 3, 4위전 네덜란드에 0-3 패배, 보스케는 조별예선에서 네덜에 1-5로 참패에서 조별예선 탈락)를 기록한 것도 비슷하다. 또한 둘은 2013년 컨페더레이션스컵 결승전에서 맞붙기도 했다.
  • 이탈리아 국적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가족은 이탈리아에 이주해 산다고.[19]
  • J리그 시절 일본 축구가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일본인 선수들의 피지컬이 약하다. 피지컬을 강화해야한다"고 답했다고. 바히드 할릴호지치 일본 국대 감독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다.
  • 포르투갈 감독 시절 브라질 국대로 뽑히지 못하던 데쿠의 포르투갈 귀화를 요청해서 합류시켰다. 마찬가지로 그가 재직하고 있을 때, 브라질 출신 페페가 포르투갈로 귀화해서 맹활약했다.
  • <손자병법> 애호가로 손자병법에 적힌 내용을 자신의 전술에 응용하기도 했다.
  • (첼시 이전에) 영어권에서 살아보지 않았지만, 첼시 시절 인터뷰는 영어로 하는 것으로 봐서는 은근히 지장인듯. [20] 다만 첼시 시절에 기자들에게 리스닝은 문제없지만 스피킹은 좀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한 바 있다.
  • 김영권을 총애하는 듯, 2019년 초 광저우 헝다에서 스콜라리가 지휘하는 파우메이라스로 이적한 히카르두 굴라트가 한 토크쇼에 나와서 스콜라리가 김영권을 꼭 영입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2019년 현재 브라질 경제가 엉망이라, 김영권의 주급을 대기는 힘들 듯 하다. 사실 스콜라리 시절에 김영권은 골절상을 입어 거의 1년을 통채로 날렸고 2017년부터는 아시아쿼터가 폐지되어 그다지 활약한 편도 아니었다.

[1] 이탈리아에서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에콰도르, 페루, 브라질, 베네수엘라, 칠레, 멕시코, 캐나다, 미국 등 과거에 남/북아메리카 국가들로 이민을 갔던 이탈리아계 이민자 후손들에게도 이탈리아 국적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 사람도 그 때문에 이탈리아 국적을 취득했다고 한다.[2] 당시 남미 지역 예선이 역사상 지옥급 난이도이긴 했다.[3] 2002 월드컵 남미 예선은 올림픽과 코파 아메리카를 전후로 계속되고 있었다.[4] 시우바는 주전이었지만 카카는 백업. 그것도 코스타리카전 1경기만 나왔다.[5] 대표적으로 호비뉴. 호비뉴 본인이 첼시 이적을 원했고 실제로 첼시 이적이 기정사실화 되었지만 협상이 지지부진해서 이적이 무산됐다. 그 이후 호비뉴는 맨시티행.[6] 체흐, 발락, 드록바 등의 반발[7] 15/16 시즌에 무리뉴 하에서 15위까지 내려간 첼시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시 히딩크가 왔지만, 히딩크도 별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첼시는 이 시즌에 10위로 리그를 마친다. 무리뉴가 망쳐놓은 팀을 맡았다 독박쓰기는 했지만, 히딩크가 항상 기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며, 2010년대 들어와서는 흑역사(터키 대표팀의 유로 예선탈락, 네덜란드의 월드컵 탈락)가 더 많다. 이점은 2002년의 꿈에서 깨지못하고 최근의 해축사정은 전혀 모르는 히딩크빠들이 절대 언급안하는 내용이다.[8] 1위가 리버풀, 2위가 맨유, 3위가 아스톤 빌라[9] 이렇게 10년도 안된 일이지만 해축빠들이 드물 때라서 신태용호에 불신을 조장하기 위해 슬쩍 마사지해서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10] 월드컵을 앞두고 당한 부상에서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한 탓에 가진 실력보다 현저히 낮은 모습을 선보였다.[11] 당시 브라질의 목표는 무조건 우승이었다. 더구나 이 월드컵의 이름이 브라질 월드컵이라는 점도 기억하도록 하자.[12] 중국에서는 3대컵 슈퍼리그, FA컵, 아챔에서 하나만 우승해도 명장 소리를 듣는다.[13] 게다가 실제 인건비는 39억이 아니라 60억 정도 봐야 한다. 스콜라리 정도 되는 감독이면 자기 코치진 다 끌고 오기 때문에 그쪽 연봉도 줘야 하는데, 브라질 월드컵과 그레미우에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광저우 헝다까지 잔류한 스콜라리 사단의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14] 당시 브라질 국대의 공격을 담당한 선수가 세명 뿐이 지만 그 세명이 호나우두, 히바우두 그리고 호나우지뉴심지어 카카는 벤치에 있었다였고, 수비적이라 해도 윙백이 카를로스, 카푸였다 워낙 선수들 공격력이 사기적인 스쿼드인지라 수비중심의 전술이 밸런스를 맞춰 준 셈.[15] 그런데 성폭행을 비롯한 추문이 따르는 호비뉴을 총애한건 좀...[16] 유로 2004에서 스콜라리호 포르투갈은 조별리그에서 강팀 스페인을 이겼고, 8강에서는 잉글과 승부차기로 승리, 4강에서는 네덜란드를 이겼다. 다만 스콜라리는 그리스의 늪축구에는 의외로 약해서 조별예선과 결승에서 각각 두번 다 패했다.[17] 일부에서는 스콜라리가 중국리그라서 쉽게 3연패를 했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스콜라리와 경쟁하던 감독들이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마누엘 펠레그리니, 스벤예란 에릭손, 구스 포옛, 펠릭스 마가트, 로저 슈미트등의 한국의 해축빠들에게도 잘 알려진 쟁쟁한 감독들이었다. 경쟁 감독 이름들만 보면, 스콜라리가 중국리그에서 쉽게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상황은 절대 아니다.[18] 카타르 FA컵[19] 본인도 이탈리아계이다. 스콜라리라는 성이 이탈리아의 성이다.[20] 서유럽선수들은 국적에 관계없이 대부분 영어를 구사하지만, 브라질 축구선수 중에 영국에서 뛰지 않으면 영어를 전혀 못하는 선수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