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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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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환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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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환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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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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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박종환
朴鍾奐 | Park Jong-Hwan
출생 1936년[1] 2월 9일
황해도 옹진군
사망 2023년 10월 7일 (향년 87세)
경기도 남양주시
본관 밀양 박씨 (密陽 朴氏)[2]
학력 춘천초등학교 (졸업)
춘천중학교 (졸업)
춘천고등학교 (졸업 / 31회)
경희대학교 체육대학 (체육학 / 학사)
신체 171cm
가족 아내 안흥석(1939년~2016년)
딸 박성숙, 아들 박재호
직업 축구 선수 (라이트백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대한석탄공사 축구단 (1964~1966)
감독 단국공업고등학교 축구부 (1966~1969)
성남고등학교 축구부 (1970~1972)
유신고등학교 축구부 (1973~1974)
전남기계공업고등학교 축구부 (1975)
서울시청 축구단 (1975~1988)
대한민국 U-20 대표팀 (1980~1983)
대한민국 대표팀 (1983~1984)
대한민국 대표팀 (1986~1988)
일화 천마/천안 일화 천마 (1989~1995)
대한민국 대표팀 (1990, 1995, 1996)
우한 야치 (1998)
숭민 원더스 (1999~2002)
대구 FC (2003~2006)
성남 FC (2013~2014)
여주시민축구단 (2018~2020 / 총감독)

1. 개요2. 축구인 경력
2.1. 선수 경력2.2. 지도자 경력2.3. 말년
3. 사망
3.1. 반응
4. 지도 스타일5. 논란
5.1. 선수 폭행 논란
6. 기타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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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

공격적이고 다양한 전술로 재미있는 축구를 바탕으로 U-20 청소년 대표팀의 4강 진출로 대한민국 축구의 가능성을 전 세계에 보이며 후일 대한민국 축구에 ‘붉은 악마(Red Devils)’라는 별명이 붙게 된 계기를 제공한 대한민국 축구계를 대표하는 명장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강압적이고 가혹한 지도 방식을 가진 구시대식 마인드의 지도자라는 명과 암이 존재하는 축구 지도자였다.

2. 축구인 경력

2.1. 선수 경력

황해도 옹진군 출신으로 월남해서 춘천에 정착했다. 춘천고등학교를 3년간 다녔으나 대학 드래프트에 뽑히지 못해 1년 더 다녔는데[3] 이때 청소년 대표팀에 뽑히면서[4] 경희대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여담으로 이때 절친으로 전설적 코미디언 이주일도 같이 경희대에 입학하려 했으나 섯다판에서 등록금을 날리는 바람에 입학을 못했다.

경희대를 졸업하고 대한석탄공사 실업 축구단에서 잠시 선수 생활을 했다.

2.2. 지도자 경력

2.2.1. 초기

청소년 대표팀에는 뽑혔으나 스타 플레이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은퇴하고 당시 프로 구단 역할을 했던 실업 구단 지도자가 아닌 학교 체육부로 가서 단국공고에서 체육 교사 겸 감독을 맡았다. 이때도 틈틈히 심판 생활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프로 구단 감독 시절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그라운드에서 난동을 부리다 수차례 퇴장당하거나 출전 정지를 먹었다. 어쨌든 단국공고 이후 성남고 유신고 감독을 거쳐 전남기공으로 실업계에 진입하고 이후 서울시청을 맡는데 재임은 무려 14년(1975~1989)이나 된다.

2.2.2.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1기

서울시청 축구단의 감독을 맡던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5]에서 벌떼 축구로 U-19 대표팀을 4강에 올려놓으면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당시 산소가 희박한 멕시코 고지대에 적응해야 한다면서 마스크를 씌우고 풀타임 연습 경기를 시켰다는 전설 같은 일화가 전해지며 결국 희박한 산소를 체험하며 훈련한 것이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실업 강자 중소기업은행 축구단과의 연습 경기에서 9-2로 승리했는데[6] 프로 선수들한테 2골 실점에 대한 벌로 경기 후 운동장 20바퀴[7]를 돌게 했다고 한다.[8] 소위 만화 외인 구단을 방불케 하는 지옥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이때 해외 언론에서 대표팀을 표현할 때 쓴 'Red Furies'는 붉은 악마라는 명칭의 시발점이 됐다. 이때도 전반이 끝난 후 라커룸에서 플레이를 제대로 못한 선수들 따귀를 때렸다는 후일담이 보도된 적이 있다.

이렇게 엄청난 지도력을 인정받고 있었으나 뒤에서 후술할 축협의 왕따 논란이 좀 있다. 당시 프로축구가 막 출범했고 대중은 이런 엄청난 업적을 세운 박종환도 당연히 프로 구단 감독으로 영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박종환은 일화 천마를 창단 때인 1989년까지도 프로에 코치로도 진입하지 못했다. 그와 동시대에 감독직을 맡았던 김정남(1943년생)은 그보다 7살 아래이며 이회택(1946년생), 고재욱(1951년생)은 10~15년 정도 차이나서 거의 한세대 차이가 난다. 이 때문에 박종환 왕따설은 당시부터 널리 퍼져 있었다.[9] 사실상 U-20 청대의 업적이 아니었으면 박종환은 수많은 무명 아마추어 지도자의 한 명으로 끝났을 것이다.

2.2.3. 일화 천마/천안 일화 천마

그러나 1989년 일화 천마 창단 감독을 맡은 후에도 신인 위주의 신생 구단을 특유의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지도했다. 당시 그의 불같은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1989년 8월 럭키금성 황소과 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 관중 난동 사태를 자초해 8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고 9월 포항제철 아톰즈와의 경기에서 주장 김용세가 전반에 퇴장 당하자 화를 못 참고 경기장에 난입해 심판에게 쪼인트를 깠다. 당시 그와 함께 항의하던 사람이 원흥재 수석 코치[10]이장수 트레이너였다.

이 사건 후 인터뷰에서 반성 없이 협회와 심판을 욕하는 등, 이로 인해 1년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아 원흥재 코치가 일화의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다.[11] 그나마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12] 3전 전패(22등)[13] 이후 이회택 감독이 사임하자 징계가 9개월로 삭감되어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동메달을 획득한 후 팀에 복귀했다.

1991년에는 주장이었던 김용세와 훈련 도중 갈등을 보이며 김용세를 은퇴시켜 버리기도 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심판 판정에 물의를 일으키긴 했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줬다.

바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K리그 3연속 우승의 업적을 달성한 것이다. 소위 선진 축구를 배웠다는 차범근 당시 울산 현대 감독조차 박종환의 지도력에 대해 "대단하다"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14]

일화 천마에서 안익수, 고정운, 신태용, 이상윤, 김경범, 이영진, 박남열, 한정국, 이종화, 이기범, 박광현, 하성준, 이태홍 등 유망주나 빛을 못 본 중고 신인들을 일약 전국구 스타로 끌어 올렸고 이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재부임해 위의 선수를 주축 선수로 기용했다.

그러나 우승 포상금과 계약금 미지급, 감독의 동의 없이 선수 트레이드[15]를 놓고 박규남 단장과 면담한 뒤 의견 차를 좁히지 못하고 1996년 4월 시즌 첫 경기를 앞두고 감독직을 전격 사임한다.

2.2.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청소년 대표팀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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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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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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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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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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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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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이후
5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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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대

홍명보
(홍명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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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비전임제)
전 세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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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중국 갑A 리그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98년 중국 슈퍼 리그 전신 중국 갑A리그의 우한 야치 (武汉雅琪) [16] 감독을 맡은 바 있다. 하지만 취임 후 7게임 연속으로 승리를 거두지 못하자 구단에서는 바로 해임했다.

2.2.6. 여자 축구

강압적인 이미지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여자 축구계에 관심을 가졌던 축구인이었다. 한국 여자 축구가 열악한 기반에도 지소연, 여민지 같은 새싹을 발굴하며 이만큼 자리를 잡은 데에는 박종환의 역할이 크다. 실제로 2001년 한국여자축구연맹 초대 회장이었다. 사재 3억을 털어서 숭민원더스[17]를 창단했다. 그러나 다단계 업체와 손을 잡은 것 때문에 논란을 빚었고 그가 여자축구연맹 회장에서 물러난 뒤 숭민 원더스는 지원이 끊긴 끝에 결국 2002년에 해체되었다.

2.2.7. 대구 FC

2003년 신생 구단 대구 FC이 창단 감독으로 영입됐다. 창단 초기 약체로 평가받던 대구 FC를 8위까지 끌어올리며 다시 한번 지도력을 입증받았다.

다만 2004년 K리그 8위를 차지한 대구 FC를 과연 약진이라 보아야 할지는 미묘하다. 먼저 2002년 K리그는 10개 팀으로 시즌을 치렀다. 감이 빠른 사람은 이 연도를 보고 짐작했겠지만 기껏 지어놓은 월드컵 경기장을 놀릴 수 없으니 2003년에 부랴부랴 광주 상무 불사조대구 FC를 창단해 12개 구단으로 시즌을 치렀고 2004년 인천이 참가해 13개 구단이 됐다. 더구나 2004년 중하위권 순위표를 보면 8위가 의미 없는 숫자놀음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순위구단명승점득실
6 성남 13 12 11 51 1
7 대전 11 13 12 46 -5
8 대구 9 16 11 43 0
9 서울 9 16 11 43 -4
10 광주 10 13 13 43 -4
11 인천 9 14 13 41 -10
12 부산 8 16 12 40 -8
13 부천 6 19 11 37 -10

보다시피 7위부터 12위까지 6개 구단이 단 1경기-승점 3점차이로 순위가 결정된 혼전 양상인 데다 그나마 8위도 골 득실 차로 얻은 자리다.

이후 대구 FC는 줄곧 대대광강으로 K리그 승점 자판기 노릇을 했고 결국은 K리그2로 강등 당했음을 상기하자. 즉 단기간 스쿼드를 쥐어짜서 성적을 내는 능력은 있을지 몰라도 그의 호언장담처럼 명문 구단이 되지도 못했고 하물며 공격 축구를 표방했는데도 대구 FC의 관중 동원 능력은 언제나 리그 최하위권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구 FC의 스쿼드를 살펴보면 그런 구단을 1부에 잔류시키는 자체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멤버 수급은 최악이었으니 박종환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기본적으로 일화 감독 당시에는 지시를 수행할 만한 숨은 떡잎이 있었지만 대구 FC 시절은 그야말로 누가 봐도 노답 수준의 멤버였기에 전술만으로 이를 극복하라고 비난하기엔 무리가 있다.

2006 시즌 후 대구 FC와 계약이 만료됐고 대구 FC가 감독 교체로 가닥을 잡으며 변병주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강원 FC를 창단할 때 유력한 창단 감독 후보로 올랐으나 정작 선임한 사람은 최순호 당시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감독이었다. 박종환 감독과 최순호 감독의 악연을 볼 때 좀 아이러니하다.

2010년 11월, AFC 황금공로상을 수상했다.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 38인을 선정해 해당 상을 시상했고, 국내 지도자는 박종환을 비롯해 10명의 지도자가 수상했다.

2.2.8. 성남 FC

대구 FC에서 물러나 7년간 야인 생활을 하고 있던 중, 2013년 12월 9일에 성남 일화 천마시민 구단 성남 FC로 재창단하게 되면서 새 감독 후보 명단에 올랐고 12월 11일 갑자기 박종환 감독 내정설이 터져 나왔다. 성남시에서는 정해진 사항은 아무것도 없다고 부인했는데 2013년 12월 20일 성남 FC의 초대 사령탑으로 내정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가, 또 같은 날 곧장 사실이 아니라는 보도가 나오고 결국 2013년 12월 21일 계약서에 사인만 앞두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일련의 소동을 본 축구 팬들은 처음 내정설이 불거져나왔을 때부터 답정너였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박종환 감독 선임에 대한 여론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자 이재명 성남 시장이 언플을 하며 간을 봤다는 게 정설이다. 사실 정치적 인선이 아닐 수가 없는 게, 6월에 지방 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박종환 감독이나 신문선 대표이사나 모두 유명인사고 이들을 영입한 것은 6월에 지방 선거가 있는 이재명 시장의 정치적인 치적으로 선전되기 마련이다.

다만 이는 성남 FC 구단이나 이재명 시장만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시민 구단이 마찬가지 사정이고 외국도 딱히 다르지는 않다. 예산이 지자체에 의존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사실 박종환 감독은 연고이전하기 이전 천안에 있던 일화 구단과는 인연이 있어도 연고이전 후의 성남 축구와는 큰 연관이 없기는 하지만 전국구로, 고령 세대에게도 인지도가 높은 유명한 감독이기 때문에 기존 축구 팬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홍보할 수 있는 효과를 노린 측면도 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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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013년 12월 23일 3년 계약을 체결하여 정식 감독으로 부임했다. 부임과 동시에 패기 넘치는 인터뷰를 했는데 칠순이 넘은 나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의식했는지 K리그 감독 코치들이 너무 어리다라고 깠다. 그 어린 감독들이 거덜난 스쿼드를 가지고 아챔 우승을 하고 박종환 본인도 못 해 본 리그+FA컵 더블을 기록했다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1995년 일화의 3연패를 이끌고 12월에 있었던 AFC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 사우디의 알나스르를 꺾고 우승을 했으니 사실 더블을 한 것은 맞다.)

지난 시즌 성남 경기는 딱 한 경기 봤지만 지금 멤버들을 가지고 성적 못낼 이유는 없다고 큰소리쳤다. 게다가 성남 소속 선수들 이름도 잘 모른다고 한다.[19] 그러면서 선수들과 가교 노릇을 해줄 기존 코칭스태프를 모조리 갈아엎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그의 제자인 안익수 감독도 물러난 것은 덤.

이런 근자감 때문에 언론들도 조금씩 우려하는목소리를 내고 있다. 물론 성남 서포터들과 일반 축구 팬들의 반응도 그리 호의적이진 않은 듯하다. 거기에 감독 선임 직후부터 개성과 자기 주장이 강한 신문선 대표이사와의 충돌도 예상됐다. 박종환은 항상 구단 윗선과 문제를 일으켜온 전력이 있었고 신문선은 박종환식의 강압적인 훈련에 매우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박종환이 내정한 스카우터를 둘러싸고 신문선이 공채를 주장하여 한 번 마찰이 일어난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큰소리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성남 감독으로 오자마자 기존 선수들과 전임 코치진을 비난하는 등 특유의 독설을 내뱉고 있으며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대구 FC 창단 감독을 맡았을 때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데 한다는 소리가 프로 선수들이 테스트생보다 못한다라거나 자신의 전술을 소화하지 못한다거나 기량이 엉망이라거나 아예 공을 찰 줄 모른다는 둥 원색적인 비난 일색이다. 주목할 부분은 중앙 수비수 중에 쓸 만한 선수가 하나도 없다고 한 대목인데 이 당시 성남 소속 중앙 수비수였던 임채민윤영선의 경우는 이 시즌부터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아 국가대표팀에도 승선했을 정도로 K리그 내에서는 탑 수준의 수비수로 인정받은 선수들이다.[20] 또한, 팀의 최고 연봉자이자 키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는 세르베르 제파로프를 개인 플레이를 한다면서 "선수도 아니다" 라고 디스하고[21] "선수들이 정신 상태가 썩었으니 공수부대에 입소해 훈련시켜야겠다." 라는 황당한 이야기도 내뱉었다. 이에 함께 선수단 전체에 매일 4km씩 강행군 구보를 시켰다고 한다. #

모기업의 자금 사정 악화, 무개념 프런트, 타이밍 나쁜 감독 경질로 인해 성남 FC의 스쿼드가 몇년째 개발살난 건 성남 팬들은 물론 리그를 보는 축구 팬들은 모두 알고 있던 사실인데 축구인, 그것도 팀의 리즈 시절을 이끌었던 감독 주제에 이런 속사정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술할 논란으로 4개월 만에 감독직에서 불명예 퇴진했다.

2.2.9. 여주 FC

오랜 시간이 지나 2018년 舊 K3리그 구단으로 새롭게 창단한 여주세종축구단의 총감독으로 임명 받아 2019년까지 활동했다.

2.3.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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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모습
여주 FC를 떠난 뒤로는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사실상 축구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예측됐다. 후술한 것처럼 그는 매우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2016년에는 부인상까지 당했다.

2022년 2월 13일에 방송된 TV조선의 스타다큐 마이웨이를 통해 근황이 알려졌다. 주변 사람에게 빌려준 돈을 제대로 못 받는 등 전 재산을 사기 당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물론 떠돌이 생활을 하며 상당히 어렵게 생활하고 있으며 생활고에 자살까지 했을 정도로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노령연금 30만 원과 아들이 주는 용돈 30만 원을 가지고 겨우 생활했고 자존심이 강해서 신세지는 것도 싫어한 나머지 축구 후배들이 후원금을 모아 줬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지인의 도움을 받아 한 여성 분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기사 이후에는 요양병원으로 옮겨서 생활했다고 한다.

마이웨이에 출연해서 제자 중 1명으로 손웅정을 언급했고 손웅정의 차남인 손흥민 또한 언급했다.

3.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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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7일 늦은 밤에 코로나19 감염의 후유증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22]

한남동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에 빈소를 마련했고 2023년 10월 10일 오전 9시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축구회관에서 대한축구협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기사

영결식에는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부터 협회 고위 임원진, 신연호, 이상윤, 황선홍, 허정무 등 박종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까지 대략 70여명의 축구인들이 자리해 눈시울을 붉히며 고인을 애도했다. 비록 강압적인 스타일로 논란이 많았던 축구인이었지만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서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기에 대한축구협회가 나서서 장례를 주관했고 고인을 원로로 칭하며 애도했다.

3.1. 반응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 4강 신화를 함께했던 제자 신연호 고려대 감독이 추도사를 낭독하며 "카리스마 넘쳤던 감독님이 없었다면 축구인 신연호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며 "이렇게 떠나 보내서 너무나 황망하다. 감독님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항상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쳤던 모습이 많이 떠오른다. 하지만 정도 상당히 많으신 분이었다"고 돌아봤다.

정몽규 회장은 "박 전 감독님은 멕시코 4강으로 대한민국 축구가 가야할 기준을 제시했다. 당시 '벌떼 축구'로 불린 '토탈 축구'를 실현하신 분"이라며 "이것이 향후 2019년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준우승과 연령별 대표팀의 좋은 성과로 이어졌다"고 높이 평가했다.

일화 천마 시절 제자였던 이상윤 해설 위원은 "선수 시절에는 저만 미워한다고 생각했는데 저를 축구 선수로 성장하게 만든 분"이라며 "생전에 찾아뵙지 못해 정말 죄송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영결식장을 찾은 허정무 대전 하나 시티즌 이사장은 "박종환 감독님은 오랫동안 축구를 위해 힘써 주신 분"이라며 "모든 축구인이 존경하는 분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애도했다.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은 공문을 통해 “대한민국 대표팀과 20세 이하(U-20) 대표팀, K리그 구단 등을 이끌며 오랜 기간 뛰어난 지도자로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이바지했던 고인이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 전 세계 축구인들을 대표해 유가족과 그를 사랑했던 모든 분에게 위로를 전한다”라고 말하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한편 비록 축구인은 아니지만 더불어민주당 조승래 국회의원도 SNS를 통해 과거 고등학생 신분으로 U-20 월드컵을 보며 응원했던 시절을 추억하며 박 감독의 사망에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2023년 10월 1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한 튀니지와의 친선 A매치에 앞서 고인을 기리는 묵념을 진행했다.

2023년 10월 15일 스타다큐 마이웨이에서 추모 특집을 방송했다.

4. 지도 스타일

현역 감독 시절 경기 당일 쓸만한 수를 6가지 정도 강구해 놓고 시합에 임했을 정도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며 공격적이면서 재밌는 축구를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례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축구 결승전 상대였던 일본의 모리야스 감독이 발빠른 공격진 4~5명을 전방으로 보내 대한민국 수비진을 흔들었던 벌떼 공격 전술은 16개국이 본선에 진출한 대회인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이미 박종환 감독이 구사하며 준결승까지 진출한 성과를 거둔 검증된 작품이기도 했다.

조직적이면서 공격적인 축구인 특유의 '벌떼 축구'는 국내 팬들을 열광케 했고 이는 지금의 대한민국식 '토털 축구'의 시초가 되었다고 평가 받으며 이를 두고 외국 언론은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벌떼처럼 그라운드를 휘젓는 대한민국의 기동력에 감탄해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는 표현을 썼다.[23]

하지만 그의 가장 큰 단점은 좋게 말하면 카리스마 넘치고 강성한 지도자라면 나쁘게 말하면 "빠따"라는 부정적인 수식어를 달고 다닐 만큼의 강압적이고 가혹한 지도 방식과 심각한 매니지먼트 부족인데 이에 상당수의 선수들의 반발을 사고 일부 선수의 고의 태업설 루머까지 내도는 등 상당히 악명높다.

과거 해발 2000m 고지대의 멕시코에서 선수들에게 감기용 마스크를 착용하고 러닝을 시키는 등의 혹독하고 강압적인 방식의 훈련을 고수했다.

물론 이는 그의 나이와 시대상을 감안해야 하는데 과거 운동선수간의 위계질서가 엄격했고 폭력이 막연했던 것들을 보면 이러한 강압적인 지도 방식과 체벌 등이 잘못된 일이라는 인식을 전혀 하지 않고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고 과거에는 이런 방식이 큰 문제 없이 통했을 수도 있다.

5. 논란

5.1. 선수 폭행 논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박종환은 선수단을 너무 강압적으로 다룬다는 이유로 여러차례 구설수에 올랐다.

그러던 2014년 4월 17일, 성균관대와 가진 친선 경기에서 선수들을 폭행하여 물의를 빚었다. 폭행 피해자는 성남 소속의 김성준과 김남건으로 밝혀졌고 네티즌들은 "박빠따 어디 안갔다", "그럴 줄 알았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중. 본인은 꿀밤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결국 성남 FC의 공식 홈페이지가 박 감독의 진퇴 토론장으로 변했다. 공식 홈페이지에는 박종환의 무개념빠들의 폭력을 옹호하는, 답 없는 글[24]이 계속 올라왔으며 이에 서포터즈 및 일반 팬의 반박문 및 성명서도 게재되었다. 그리고 부천에서 일어난 '꿀밤' 사건의 유진회 골키퍼 코치가 사퇴하고 다른 코치를 징계한 것, 최진한 감독에게 경고 조치를 내린 것과 대비되었다. 직접 목격한 바에 의하면 꿀밤 정도가 아니라 확실한 폭력이었다고 한다. 애당초 군대에서도 폭력 금지를 명기하고 있으며 학교 체육에서조차 꿀밤이 허용되지 않는 시점에 꿀밤이든 아니든 폭력을 휘두른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가 불거지자 일단 성남 FC 측은 임시로 이상윤 수석 코치를 감독 대행으로 선임하고 박종환 감독은 징계 결정 전까지 무기한 대기조치했으나 4월 22일, 결국 자진 사퇴했다.

보도에 의하면 신문선 대표이사가 해임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이재명 성남시장이 자신이 직접 선임한 데다가, 성적도 중위권이기 때문에 아주 나쁘지 않다고 보고[25] 이를 쉽게 승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박종환 감독이 사퇴하기 전까지 성남 FC가 기록한 성적은 9경기[26] 2승 3무 4패 3득점 4실점에 9위였으므로, '중위권' 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며 더더욱 이재명 시장의 발언이 정신승리에 불과한 것이 9라운드 기준 1위 포항 스틸러스는 19득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리그 최하위 인천이 2득점. 공격축구 재미있는 축구를 표방한 구단으로서는 참담한 기록이다. 더구나 전임 안익수 감독이 질식 축구로 불릴 정도로 수비를 중시하는 성향이지만 작년 같은 라운드 대비 승점도 득점도 더 많았다. 이미 언론에서 예년에 비해 평균 득점이 떨어지는 초반 양상에 K리그의 수준을 거론하며 깠을 정도로 경기력이 형편없었다.

자신의 거취가 논란이 되자 박 감독은 자진 사퇴의 모양새로 구단 고위층의 부담을 줄여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해임이나 다름없다.[27] 정작 본인은 "너무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며 심지어 억울하면 고소하라는 패기를 뿜어냈다. 아무튼 선임된 지 불과 4개월 만에, 그것도 선수 폭행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하차했기 때문에 80을 앞둔 나이도 나이인 만큼 사실상 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어쨌든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꿀밤이든 귀싸대기든 미워서 그랬겠나"며 강변했지만 상대방이 공격 또는 위해를 가하는 것 대한 방어목적이 아닌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참고로 박종환 감독에게 선수도 아니라는 모욕을 듣고 주전에서 밀려났던 세르베르 제파로프는 사퇴 소식을 듣고 트위터쾌재를 불렀다..가 바로 지웠다. 나중에 남이 잘 안된걸 기뻐하는건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으나 아무래도 감정이 좋을 수는 없었을테니 이후 이상윤 대행은 인터뷰를 통해 팀이 기존에 해 온 축구와 하려는 축구의 간격이 크다고 언급하면서 박종환의 스타일이 팀의 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6. 기타

  • 이주일과 춘천고 출신 동창생으로 매우 친했다고 한다. 이주일이 무명 시절에 고생을 할 때, 박종환이 가끔씩 도와줬다고 한다. 이주일의 부인이 출산 후에 몸조리는커녕 먹을 게 없어서 고생할 때 박종환이 미역과 쌀을 사왔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이 때문에 이주일은 항상 박종환을 고맙게 생각했고 유명 코미디언이 된 이후에는 박종환 감독에게 승용차를 선물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토크쇼에서도 여러번 언급하였다. 본인도 고인이 된 이주일을 언급하면서 "그 친구만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며 각별한 우정을 과시했다. 평소에는 눈물 한 방울 없는 강한 이미지이지만 2002년 이주일의 장례식 때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외국인 감독에게 매우 비판적인 말을 하는 걸로 유명했다. 1992~1994년에 한국에 부임한 러시아 출신 아나톨리 비쇼베츠[28] 국대 감독도 "동유럽은 축구 강국이 아니다"고 디스한 적이 있고 '비쇼베츠와 호텔 생활도 같이 해봤지만 도무지 인정할 수 없다고 본다'라고 말한 사실도 있다. 비쇼베츠의 올림픽 대표팀(U-23)에 대해서는 선수 구성은 좋은데 이해할 수 없는 전략으로 경기를 망친다고 주장했다. 2002년에는 거스 히딩크도 디스했다. 그렇지만 비쇼베츠의 출신국인 소련은 붕괴 전만 해도 월드컵 8강권, 유럽 중상위권은 되는 나라였다. 소련의 해체로 산하 공화국이 독립하고 선수 수급 시스템이 엉망이 되면서 러시아는 근 20여 년간 월드컵에 본선 등장도 힘든 나라가 되었을 뿐.[29] 어찌 되었든지 간에 1992년 시점에서 소련(러시아) 출신 지도자는 대한민국이 무시할 만한 인사가 절대 아니었다.
  • 하지만 모든 외국인 감독에게 비판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축구 최초의 외국인 지도자로 거론되는 독일 출신의 데트마어 크라머 감독에 대해서는 '2~3년 더 유소년 지도자를 시켰으면 좋은 성과를 냈을 것이다'며 칭찬을 했고 구(舊) 유공의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에 대해서도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니폼니시 축구를 배워야 한다고 하며 같은 소련 사람이지만 니폼니시와 비쇼베츠는 천지차이라고 언급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온화하고 신사적인 성격이었다는 것. 반대로 비판했던 비쇼베츠와 히딩크는 고집 센 강성이었다. 비쇼베츠는 직력을 중시하는 한국 축구에 장신화와 선수비 후역습, 롱볼 위주의 플레이를 도입해서 한국 축구인들과 전술에 대한 정서를 달리했고 소신이 강해 한국 축구인들로부터 소통불가의 지도자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 선수 선발부터 온갖 일화가 넘쳐나는 히딩크는 말 할 필요도 없다. 박종환 前 감독이 외국인 감독을 평가할 때 대놓고 '인격', '호텔 생활을 해봤는데 인정할 수 없다고 본다'라는 표현을 쓴 것도 이런 심증을 더 해주는 요소. 한국 축구인으로서 외국인들이 고분고분 대접해 주길 바라는 텃세가 평가에 반영된 것이다.

    박종환과 달리 온화한 외국인 지도자들을 만만하고 보게 "카리스마가 없다",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까던 국내축구인들도 있었다. 크라머가 선수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고 "걔는 감독도 아니야" 라면서 대놓고 폄하하던 이회택이 대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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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서운 호랑이 감독이라고 유명했지만 다소 의외의 면모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요리 실력이 좋다는 것. 특히 김치찌개와 생선 매운탕이 정평이 나 있었다. 그가 직접 요리를 하게 되었던 것은 4강 신화 달성으로 유명한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에서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고 출전했을 때, 아직 어린 선수들이 현지 음식에 적응을 못해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직접 재료를 공수해서 요리를 해 먹인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대표팀에 소속된 선수들도, 머나먼 타국에서 음식 걱정 없이 잘 먹고 뛴 것도 4강 진출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30] 이 기사에 따르면 대표팀 숙소에 있던 멕시코 요리사들이 요리를 하고 있는 박종환 감독을 대표팀 주방장으로 착각했다가 경기 후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후일담도 있다.[31] 이후 국가대표팀, 프로 구단에서 감독 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특별 이벤트로 선수들에게 김치찌개매운탕을 끓여준 적이 있다고 하며 직접 맛본 당사자들의 언급에 따르면 모두 그 맛이 매우 일품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본인도 자신의 요리 실력에 어느 정도 자부심이 있는지, 다른 사람이 똑같은 재료로 끓여도 절대 같은 맛을 내지 못한다고 주장하기도. 상세한 레시피는 공개된 적이 없지만 본인의 언급에 따르면 끓일 때 계속 똑같은 온도로 끓이지 않고 불 조절을 해 가며 끓여주는 것이 핵심이라고 한다.[32]
  • 김호 감독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가장 카리스마 있는 감독으로 꼽혔다. 문제는 김호 감독과 달리 지도 방식이 좀 심하게 강압적이란 것이다. 김호 감독은 앙팡테리블 고종수를 품었던 사람이다. 반면 박종환 감독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첫째 둘째를 다투는 천재 최순호를 품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둘다 구시대 축구인의 한계를 드러내며 축구인으로서의 말년을 불명예스럽게 보내야 했다.
  • 1996년 대표팀 감독이 되었을 때 전술적 구도에 대한 질문에, 황선홍, 김도훈을 전방에 두고 최용수를 양쪽을 돌게 만들겠다고 언급했다. 자신의 전술을 포메이션으로 설명하면 1-3-5-1 전술이라고 요약했는데 후방에 별도로 한 명을 두는 이유로 유럽, 남미 선수들이 기술이 좋아 우리 선수 한 명은 쉽게 제끼기 때문에 바로 골키퍼와 1:1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최종 수비수 한 명을 스위퍼로 두는 것으로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오프사이드 트랩도 쓸 수 없고 세계적인 트렌드와는 전혀 동떨어진 안드로메다급 포메이션인 데다가 우리는 상대방보다 한수아래라고 접고 들어가는 전술이라는 비판도 있었는데, 실제로는 홍명보라는 걸출한 수비수가 있어 3백은 기본으로 박아 놓고 홍명보를 스위퍼로 활용하기 위해 구상한 전술이라는 의견도 있다.[33]
  • 중국에서 준수한 성적을 올렸던 이장수 감독이 성남에서 코치를 하면서 박종환 감독의 지도 스타일을 배웠기 때문에 이장수 감독도 빠따리라고 폄훼된다. 그래도 지도력이 준수한 편이기에 박종환 감독의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호가 계속 5:0으로 참패하자, 선수들을 돌려서 기용하면서 계속 테스트하던 히딩크와는 정반대로, 미리 베스트 11을 뽑아놓고 집중훈련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런 주장은 당시 모든 국내 축구 지도자들이 했다. 심지어 손석희가 진행하는 MBC 100분 토론에서 히딩크 감독을 주제로 다룬 적도 있다. 당시에 전화 연결한 허정무는 하루빨리 베스트 11을 정해서 스파르타식 훈련을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런 주장에 반기를 들면서 히딩크를 믿어야 한다고 엄호했던 게 이용수 기술위원장과 차범근. 박종환은 심지어 히딩크를 자르고 자신을 감독으로 쓰면 최소 8강은 보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보나마나 선수들을 윽박지르고 폭력을 행사했을 텐데 본인이 말한 대로 얼마나 지도력이 성공했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히딩크호가 2002년에 대박을 치면서 본전도 못 찾았다.
  • 거기에다 친구 이주일에게도 영향을 주는 바람에, 우물 안 개구리 인증을 더 확고히 시켰다. 박지성같은 인재를 알아보지 못한 해외에서 못 뛴 지도자들이 명백히 세상을 모른다는 것이 인증됐다.[34] 더욱이 히딩크가 국내 출간한 국대 감독 시절 회상을 다룬 책을 보면 축구 강국이라는 말에 완전히 심리적으로 패배된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는 대목을 보면 그 이전 국대 감독들은 이러한 점을 잘 알지도 못했으며 알았다고 해도 답이 없는 무방비 상태였을 것이다.
  • 성남 FC 감독으로 선임되는 과정에서 사재 1억 원을 털어서 구단 주식 1만 주를 청약했다. # 하지만 공시 내용을 털어보니 본 청약은 하지 않은 듯하다.
  • 박종환이 K리그에서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를 비주류에 대한 주류의 왕따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인맥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축협에서 비주류인 경희대 출신에 스타 플레이어가 아니던 비주류인 박종환을 은근히 따돌렸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조광래와 같이 본인이 스스로 자초한 면도 많다. 지난 스포츠 기사를 검색해보면 가장 쉽게 걸리는 뉴스가 박종환이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난동을 부리다 징계를 먹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왕따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던 듯, "축구인 99%는 나를 싫어하지만 팬의 99%는 나를 좋아한다." 라고 주장했다.
  • 전두환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76년경이라고 한다. 서울시청을 맡은 후 태국에서 열리던 킹스컵 대회에 국제 심판으로 출장을 갔고 자신이 부재한 동안 선수들을 극기훈련을 시키기 위해 군 부대[35]를 찾았는데 당시 김포 주둔의 1공수여단의 여단장이었던 전두환 준장과 친분을 쌓게 되었던 듯하다. # 5공 비리가 불거진 이후 전두환이 백담사로 사실상 유배되자 박종환은 매달 찾아갔다고 하며 2010년대에 있었던 인터뷰에서도 매달 한 번은 연희동에 찾아간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 축구 못지않게 골프 실력이 매우 출중한 것으로 유명했다. # 축구인 친목 골프 대회에서 자주 우승했다는 이야기가 보도된 바 있다.
  • 창단할 때부터 축구관이 물과 기름처럼 안 어울리던 성남 구단의 신문선 대표이사와 충돌이 우려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폭행 논란에서도 가장 강경하게 해임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신문선이라고 한다. 박종환도 신문선 이사가 자신을 해임하기 위해 폭행 논란을 침소봉대했다고 주장. # 그러나 신문선은 해임 발표를 하면서 박종환을 치켜주는 립서비스를 했다. #
  • 감스트 방송에 출연했던 이상윤김병지는 박종환의 빠따에 대해 질문한 감스트에게 그라운드에서만 기강을 잡고 그외에는 자유로웠으며[36] 잔정이 많았다고 좋게 말해줬다. 물론 한국 체육계 특성상 나쁘게 말할리가 없긴 하지만 이 둘 말고도 박종환을 호평하는 선수들도 많고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선수들에게 손수 밥을 해먹였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있다.[37] 이런저런 증언을 취합해보면 전형적인 옛날 감독이라 할 수 있다. 때리고 갈구고 개처럼 굴리다가 슬쩍 "다 너 잘되라고 하는거다"는 식으로 달래면서 관리하는 옛날 군대 고참이 떠올리게 하는 유형. 이런 스타일은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들만 모이는 국가대표팀에선 1990년대부터 어긋났고 프로 구단에서도 2000년대 이후로 약발이 다했다. 또한 현대 축구의 흐름이나 트레이닝 이론과도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부임 초기에는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보이기도 하지만 안에선 서서히 금이 가다가 어느 순간 와장창 무너지는 게 박종환호의 패턴이었다.[38]
  • 나중에 국대 감독이 되는 홍명보가 강압적인 지도 스타일인 박종환에게 언론에 보도될 만큼 노골적으로 반항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이야기다. 특히 1996년의 박종환 퇴출의 빌미가 된 아시안컵 이란전에서도 수비의 핵인 홍명보가 후반에 걸어다녀서 태업 이야기가 나왔다. 박종환도 1995년의 코리아컵(위에 나온 대통령배 축구대회가 이름을 바꾼 대회)의 준결승에서 패한 이후 홍명보가 주축이 된 "열하나회"의 음주 사실을 폭로했다고 한다. #
  • KIA 타이거즈이종범이 축구하는 것을 지켜본 후에 "한 1년 빡시게 굴리면 국가대표 승선도 가능하겠는데"라고 덕담을 남겼다. 여담으로 이종범은 야구 이전에 축구를 했고 축구를 그만둔 이후에도 전 야구인들 사이에서 축구 실력으로는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 비슷한 스타일로 야구에서는 김성근, 북한 축구에서는 윤정수가 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 스타일의 감독으로 과거에 성적을 낸 적이 있기에 여러 번 짤렸지만 또 소방수로 여러 번 부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경기력이 부진하거나 구설수에 오를 때마다 "박종환 감독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하여 빠따타카를 시켜야 한다"는 축구 팬들의 드립이 종종 있었다.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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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 참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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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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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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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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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회의 참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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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적상 1938년[2] 규정공파(糾正公派) 26세 종(鍾) 항렬.[3] 이는 운동부에서 흔한 일이다. 먼 훗날 박지성도 뽑아주는 학교가 없어 당할 뻔했다. 축구도 그렇지만 야구 쪽에서는 더 흔하다.[4] 뽑혔으나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청소년 대표 엔트리를 최종 결정하기 위한 자체 연습 경기에서 수비수였던 박종환 전 감독이 상대 공격수에 강한 태클을 들어갔다 결국 그 두 선수가 부상을 당해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박종환 전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돈이 없어 밥도 못 먹고 청계천에서 호떡 두 개 사먹고 경기에 뛰었다며 체구도 크고 잘 먹고 자란 선수들에게 오기로는 지지 않겠다는 마음에 거친 플레이를 펼치다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5]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로 당시에는 연령 제한이 19세였다. 20세로 상향된 건 1991년부터다.[6] 말하자면 지금 U-20 대표팀이 전북, 포항 같은 구단과 경기해 9-2로 이겼다는 것이다. 박종환식 마스크 축구의 위력을 볼 수 있는 대목.[7] 그 운동장이 육상 트랙을 의미한다면 8000m(=8km)에 달한다.[8] 당시 경기 후 실점 한 골당 운동장 열바퀴의 벌칙을 줬다고 한다. 방법이 좀 우악스러워 보이지만 일종의 1980년대식 체력 강화 파워 프로그램의 일종[9] 본인은 서울시청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프로 구단에 안 갔다고 말한 바 있다.[10] 오랜 기간 박종환 감독과 함께 해 온 대표적인 오른팔이었지만 숭실대 축구부 감독을 맡으면서 박종환과는 멀어지게 된다.[11] 그러나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이걸 까먹었는지.. 원흥재 감독 대행에 대한 기록을 일체 보관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신홍기가 2013년 전북에서 1경기 지휘한 것도 그의 감독 대행으로서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 연맹의 기록 보관이 얼마나 미흡했는 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12]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13] 24강 조별 리그[14] 다만 박종환 감독은 대구 FC 시절 당시 차범근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이 부상자가 많아 선수가 없다는 아쉬움을 인터뷰로 토로한 것에 대해, "수원 스쿼드를 나한테 주면 눈 감고도 우승한다"며 일침을 놓기도 하였다.[15] 당시 연봉 협상이 결렬된 안익수를 세대 교체를 명분으로 포항 스틸러스로 현금 트레이드했다.[16] 우한 광구로 이름을 바꿨다가 2008년 해체했다.[17] 특이하게 유니폼 속에 검은색 팬티스타킹을 착용하고 경기를 하기도 했다.[18] 후보로 거론된 신태용과 안익수 감독은 연고 이전 이후의 성남 일화 구단에서도 뛰며 레전드고 K리그 팬들에겐 인지도가 높긴 하지만 국가대표에서 주전으로 오래 뛰지 않아서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인지도가 낮은 문제가 있다.[19] 하지만 대구 FC 감독일때도 유일하게 아는 선수 이름이 오장은밖에 없었다고 한다.[20] 특히 윤영선은 훗날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승선해서 카잔의 기적의 주역이 될 정도로 잠재력이 있는 선수였다.[21] 세르베르 제파로프는 당시 10억이 넘는 고액 연봉을 받는 것에 비해서 그만한 활약을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2014 시즌 구단 내 및 득점 1위(7득점), 도움 2위(3도움), 통합 공격 포인트 1위(10개)를 기록했고 FA컵 결승전에도 풀타임 활약 후 승부차기까지 성공하여 구단의 3번째 우승에 기여를 한 바 있기 때문에 최소한 이런 비난을 들을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22] 안타깝게도 이 날은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남자 축구 U-23 대표팀이 오랜 숙적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승리하여 금메달을 딴 동시에, AG 축구 3연패를 기록한 날이다. 심지어 시간도 비슷하다.[23] 후일 대한민국 축구에서 유명한 별명인 ‘붉은 악마(Red Devils)’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24] 심지어 인격 모독성 글도 올라와 엉덩이가 무겁던 홈페이지 관리자까지 경고하고 나섰다.[25] 다만 이재명 시장은 바로 선거(6월)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구설에 오를 만한 일을 피하려고 했고 장년층이 많은 박종환 팬에게 괜히 관심을 끌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특히 재정난 때문에 빙상단을 해체했다가 안현수 사건으로 근거 없는 흑색 선전에 시달렸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결국 재선됐다.[26] 징계 때문에 마지막 경기는 참석하지 못해서 온전히 팀을 지휘한 것은 8경기인 셈이다.[27] 대한민국 스포츠계에서 논란이 일어난 후의 "자진 사퇴"는 그냥 짤렸다고 보는 게 맞다. 구단 윗선에서 "너 경질 당하고 개망신 당할래? 아니면 자진 사퇴하고 체면치레라도 할래?"라는 선택지를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28] 키예프 출신 우크라이나계로, 구(舊) 소련 대표선수(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출전 4위)와 감독(1988 서울 올림픽 우승)을 지냈다.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국적을 택해서 러시아인이다.[29] 1994년, 2002년, 그리고 2014년에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여 16강 진출도 못하다가 비로소 자국에서 개최한 2018년 월드컵에서 소련 해체 이후 처음으로 토너먼트에 진출했다.[30] 1980년대 초반이니 지금처럼 전담 영양사가 체계적인 식단을 관리하긴 어려웠을 시기다. 이로부터 한참 뒤인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가대표팀에서조차 장비 담당이 따로 없어 신인 선수들이 훈련 전에 일찍 나와 직접 축구공에 바람을 넣고 훈련 장비들을 셋팅하는 일을 했다.[31] 또한 기러기 아빠로서 거의 10년 넘게 홀아비 생활을 한 것도 자연스레 요리 솜씨가 좋아진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32] 물론 김치찌개가 만들기 그리 어려운 요리는 아니지만 운동선수 수십명이 든든히 먹을 수 있을 만큼 대량으로 끓이면서 맛을 내려면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간다. 그럼에도 모두가 맛있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던 것으로 보아, 분명 손맛이 좋았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33] 마지막 '1'을 리베로로 활용하기 위한 전술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실제로 리베로의 판단에 따라 본인이 수비 라인에 가담해 4백으로 운영할 수 있으며 상대방이 드리블 돌파를 할 경우에는 리베로가 뒤로 쳐져 앞선 수비수의 백업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또한 공격시에 리베로는 3백에 앞선 미드필드 자리에서 공격을 조율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역할을 경기 상황에 따라 지능적이고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선수는 베켄바워급 아니면 수비수로 전환한 요한 크루이프 같은 선수나 가능하며 현실적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당시 대표팀의 주축이 된 한국의 '리베로' 홍명보는 경기흐름을 읽는 눈과 조율 능력, 킥력을 갖춰 외신들도 주목한 실력자였지만 실제로는 '리베로'라기보단 뛰어난 오프더볼 무브먼트를 지닌 스위퍼/(백3에 최적화된)센터백이 더 정확한 선수였다. 실제 '리베로' 유형의 선수는 수비는 물론 공격 능력도 뛰어나서 경기 전체에 대한 영향력이 아주 컸는데 홍명보는 피지컬과 탈압박에 아쉬움이 있는 선수라 개인 공격력엔 한계가 있었고 심지어는 수비수로서의 대인 수비도 아쉬움이 있던 선수의 수준에도 대단히 쓰기 까다로운 선수였다.[34] 다만 박지성은 올림픽 대표팀 시절에 J리그의 교토 퍼플상가로부터 이적 제의를 먼저 받았기 때문에 K리그 드래프트 신청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더욱이 수원 입단을 노리려고 했더라도 벤치에 앉았을 확률이 높았다. 자세한 것은 박지성 항목을 참고하자.[35] 이런 류의 발상은 2000년대까지 있었다. 사실 명장이라고 칭송 받았던 김성근 前 감독도 이런 극기 훈련 애호가였다. 특히 태평양과 쌍방울을 맡았을 때 직접 선수들을 군 부대에서 굴리기도 했다.[36] 이는 마틴 오닐과 비슷하다. 오닐도 그라운드 내에서는 선수들을 아주 엄하게 굴리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라운드 밖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일절 터치하지 않는다.[37] 박종환의 지도를 받았던 윤영선도 인터뷰를 통해 그가 해 주는 김치찌개는 정말 최고였으며 끓여주시는 날만 기다렸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감독에게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38] 그래서 옛날 군대 고참 스타일로 가장 성공한게 바로 프로야구의 김성근 감독이다. 선수들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하고 스포츠 과학을 무시한 트레이닝과 기용으로 선수들을 망가뜨렸지만 지도자로서 카리스마가 대단했고 선수들이 실력 떨어진 노장이 되었을때 챙겨주는 등 잔정을 내비쳤고 선수보는 눈이 없지는 않았기에 혹사당한 선수들이 다 잘되라고 한거라며 오히려 쉴드를 친다. 김응용의 예를드는 사람도 있는데 김응용은 구타 문제같은 시대의 한계는 있었지만 미국 유학 경험으로 구시대 지도자 중에서는 보기 드문 자유 방임주의 감독이었다. 훈련도 적게 시켰고 야구장에서 잘하면 사적으론 뭘하든 크게 신경 안썼다. 군대로 치면 고참이라기보다는 행보관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정말 중요하고 총애하는 선수들 아니면 선수들 이름도 못 외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