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14 17:24:47

황선홍


파일:나무위키+하위문서.png   하위 문서: 황선홍/선수 경력, 황선홍/지도자 경력
황선홍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클럽
파일:부산 아이파크 앰블럼.png

16대
파일:포항 스틸러스 앰블럼.png

9대
파일:FC 서울 앰블럼.png

11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Yanbian_Changbaishan_logo.png

14대

}}} ||
황선홍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K리그 클래식 시그니처 문구 로고 없는거.png 올해의 감독상
2012년 2013년 2014년
최용수
(FC 서울)
황선홍
(포항 스틸러스)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2015년 2016년 2017년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황선홍
(FC 서울)
최강희
(전북 현대 모터스)

}}} ||
대한민국의 축구감독
이름 황선홍
黃善洪 | Hwang Sun-Hong
출생 1968년 7월 14일 ([age(1968-07-14)]세) /
대한민국 충청남도 예산군[1]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신체 183cm | 체중 80kg
직업 축구선수(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바이어 04 레버쿠젠(1991)
부퍼탈 SV 보루시아(1992)
포항 스틸러스(1993~1998)
세레소 오사카(1998~2000)
수원 삼성 블루윙즈(2000)
가시와 레이솔(2000 / 임대)
가시와 레이솔(2000~2002)
전남 드래곤즈(2002~2003)
감독 전남 드래곤즈(2003~2006 / 코치)
부산 아이파크(2008~2010)
포항 스틸러스(2011~2015)
FC 서울(2016~2018)
옌볜 푸더(2018~2019)[2]
기타 SBS(2006)[3]
국가대표 103경기 50골(대한민국 / 1988~2002)[4]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학력 숭곡초등학교(1975~1981 / 졸업)
용문중학교(1981~1984 / 졸업)
용문고등학교(1984~1987 / 졸업)
건국대학교(1987~1991 / 학사)
가족 배우자
장녀 황현진[5]
장남, 차남

}}} ||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여담5. 둘러보기

1. 개요

대한민국축구선수 출신 감독.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타겟형 스트라이커[6][7]이자 한국 축구선수 유일의 해외리그 득점왕[8]. 90년대 한국 축구를 이끈 H-H 라인[9] 중 한 명으로 국가대표팀 부동의 최전방 공격수. 21세부터 35세 때까지 14년간 부상이 아닌 한 항상 대표팀의 최전방 공격수로 뛰었는데 이 자체가 동시대 한국에서는 경쟁자가 없는 유일무이한 공격수였다는 것이 증명된다. 심지어 공격수로서 은퇴할 나이인 35살의 나이에도 2002 월드컵에서 주전 공격수로서 한국팀의 4강을 이끌었다.[10] 보통은 선수가 나이를 먹어가며 기량 저하로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뛰지 못하거나 미리 은퇴하는 경우가 많다.[11] 다만 90년대 축구를 직접 보지 않은 세대들은 그저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고, 그마저도 왜곡되어 폄하되는 경우도 있다.

별명황새[12]. A매치 103경기 50골로 A매치 득점 2위[13]이자 센추리 클럽 가입자이다.[14] 선수 시절 한일전의 일본 킬러로 유명했는데 그가 뛴 한일전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고 5골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15] 또 지독한 부상[16]과 불운에 시달리며 1994 미국 월드컵 볼리비아전 한 경기로 스포츠 역사상 한국에서 가장 많은 욕을 얻어먹은 비운의 스트라이커이기도 하다. 클럽팀은 K리그 포항 스틸러스(1993~1997), J리그 세레소 오사카(1998~1999) 등에서 활약했으며 선수생활 은퇴 후에는 해설자, 부산 아이파크 감독을 거쳐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친정 팀인 포항 스틸러스에서 감독직을 수행했었고, 잠시 휴식을 가진 뒤 2016년 6월부터 2018년 4월 30일까지 장쑤 쑤닝으로 떠난 최용수 감독의 뒤를 이어 FC 서울의 감독직을 수행했다.

감독으로서는 훌륭한 지도자로 거듭나서 K리그에 40대 감독 열풍을 불러온 1960년대 후반~70년대 중반 태생 감독들 중에선 최용수 감독과 함께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었다. 그러나 FC 서울 감독 부임 이후 첫 시즌 K리그 우승을 제외하면 2017 시즌에는 리그 5위에 그쳐 5년 만에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실패하더니, 2018 시즌에는 급기야 10위, 11위를 왔다갔다하며 강등권 문턱에서 전전하다가 4월 30일자로 결국 사임하면서 감독 명성에 금이 가고 말았다. 그러다 12월 14일 뜬금없이 중국 갑급 리그의 옌볜 푸더의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나 구단 해체로 한순간에 백수가 되었다.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여담

파일:external/www.steelers.co.kr/P1070464.jpg
  • 황선홍 감독이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원 안의 사진은 선수 시절의 모습. 잘 보면 황선홍 감독 주변으로 조광래, 박성화, 홍명보의 얼굴도 보인다.

파일:external/www.steelers.co.kr/%ED%99%A9%EC%84%A0%ED%99%8D01.jpg
  • 스포츠 만화 주인공 같은 수련을 한 적이 있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이런거 다 설정사진이다. 과거에는 해태 타이거즈 야구선수들이 동물원 가서 호랑이랑 눈싸움하거나, 씨름선수 강호동이 산소통 매고 해변을 뛰어 다니는 등, 만화 속에 나오는 수련을 연출하는게 종종 있었다. 보통 언론과 기자가 갑이던 시절이라 신문사가 요구하면 구단이나 선수가 할 수 없이 들어주는 것.
  • 선수 시절 두 번의 전방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입었다. 특히 축구 선수로서 한창 때인 25살(92년) 독일에서, 그리고 본인 스스로 기량이 절정이었다고 말한 98년에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을 입었다. 그만큼 선수 시절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92년 부상으로 군대 면제가 되었고[17] 93년에 결국 수술을 받으면서 이후 몸의 밸런스가 완전히 깨졌다고 한다.[18] 그리고 부상에서 회복되자마자 94 월드컵에 나가서 욕이란 욕은 다 먹었다. 특히 둘째이자 장남인 황재훈 군은 아버지를 따라 축구선수가 되어 선수 생활을 했었지만 안타깝게도 십자인대 파열부상을 입고 황선홍 본인이 축구를 그만두게 했다. 본인이 당해봤던 부상이라 재활과정 등을 잘 아는지라 그만두게 했다고 한다.
  • 아내인 정지원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이중 맏이이자 장녀인 황현진 양이 '이겨'라는 이름으로 걸그룹 예아(Ye-A)로 데뷔했다.[19] 처음에는 아내와 함께 거세게 반대를 했는데 본인이 대중들에게 안 좋게 노출되었던지라(위 문단 참조) 그런 상황에서 비난이나 악플을 견딜수 있을까 해서 걱정이 되어서였다고. 하지만 황현진 양이 "이 일을 해보지 않으면 죽을때까지 후회할 것 같다"고 말했고 결국 허락했다고 한다.[20] 한편 그녀는 미국 뉴욕대에 합격하여 1학기를 재학한 후 활동을 이어갈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소속사(신후이엔터) 홈페이지에서 삭제된 것으로 보아 활동을 완전히 접은 듯 하다.(그리고 예아는 해체했다.)
  •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편부 가정에서 성장했다(아버지 96년 작고). 형제로는 형과 여동생이 한 명씩 있는데 공교롭게도 형의 이름이 황선수 씨다.황 선수의 형 황선수 / 황선수의 아우 황 선수 사업을 하고 있고 민간봉사단체를 운영하기도 해서 다음 인물검색에도 등재되어 있는 분. 황선홍의 결혼 당시 웨딩 관련 사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결혼식을 거의 도맡아 준비해 줬다고. 여동생 황선경 씨는 가정주부라고 한다.
  • 2002년 월드컵 공식 게임인 2002년 피파 월드컵에서는 팀 내 유일하게 7성 능력치를 가지고 있던 선수. 7성 선수들은 뛸때 잔상이 생긴다거나 태클이 진공청소기라거나 하는 특수능력들이 있었는데 여기서 황선홍은 슈팅이 7성이었다. 슈팅이 7성이면 이 게임은 불꽃슛이 나간다(...) 덕택에 전원수비로 틀어막다가 황선홍으로 하프라인 조금 더 가서 슈팅 때리는 플레이 때문에 해당 게임에서 한국 대표팀은 다크호스로 꼽히기도.
  • 노정윤과 비슷한 시기에 TV 해설을 한 적이 있다. 이후 2006년 월드컵 때 SBS 해설위원을 했다.

5. 둘러보기

파일:Korea Republic KFA.png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FIFA 센츄리 클럽 가입 선수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순서 선수 이름 / 현재 소속팀 출전 횟수 데뷔 경기 은퇴 경기
1 홍명보 은퇴 136회 1990.02.04
(vs 노르웨이)
2002.11.20
(vs 브라질)
2 이운재 은퇴 131회 1994.06.11
(vs 온두라스)
2010.08.11
(vs 나이지리아)
3 이영표 은퇴 127회 1999.06.12
(vs 멕시코)
2011.01.28
(vs 우즈베키스탄)
4 유상철 은퇴 120회 1994.09.11
(vs 우크라이나)
2005.06.03
(vs 우즈베키스탄)
5 차범근 은퇴 119회 1972.05.07
(vs 이라크)
1986.06.10
(vs 이탈리아)
6 기성용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10회 2008.09.05
(vs 요르단)
2019.01.07
(vs 필리핀)
7 김태영 은퇴 104회 1992.10.21
(vs 아랍 에미리트)
2004.07.19
(vs 요르단)
7 이동국 전북 현대 모터스 FC 104회 1998.05.16
(vs 자메이카)
-
9 황선홍 은퇴 102회 1988.12.06
(vs 일본)
2002.11.20
(vs 브라질)
10 박지성 은퇴 100회 2000.04.05
(vs 라오스)
2011.01.25
(vs 일본)
}}} ||
[1] 태어난 곳은 예산군이지만 학창시절은 줄곧 서울 성북구에서 보냈다.[2] 시즌 개막도 하기 전에 구단 해체로 자연스럽게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연변 구단의 역사상 마지막 감독이 됐다.[3] 2006 독일 월드컵 축구 해설위원.[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A매치 득점 2위[5] 딸 황현진은 2014년 아이돌그룹 예아에 ‘이겨’라는 예명으로 데뷔했으나 별다른 활동 없이 연예계를 은퇴했고 그룹은 해체되었다.[6] 최전방에서 몸 싸움과 헤딩 경합을 해줄 수 있고 수비수를 끌고 다닐 수 있는 정통 스트라이커의 범위에서는 최고이다. 하지만 공격수라는 롤 자체에선 차범근에게 밀린다.[7] 차범근의 경우 완전한 타켓형 스타일은 아니였고, 손흥민도 몸 싸움에 강한 타켓형 스트라이커가 아닌 2선 침투력이 좋은 공격수이다. 황선홍 은퇴 이후 대표팀에서의 타켓형 스트라이커로는 이동국, 조재진, 박주영, 이정협, 김신욱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경기력을 보면 황선홍이 왜 최고인지 알 수 있다. 일단 황선홍은 14년 동안 부상이 없을 때는 항상 감독이 그 누구더라도 국가대표 최전방 공격수로 쓰였다. 참고로 동시대 정통 스트라이커인 최용수김도훈은 황선홍이 부상으로 못뛰거나 투톱으로 쓰일 때만 대표팀 주전으로 활약했고 황선홍이 회복되었을 때는 둘 모두 주전 경쟁에서 밀렸다. 즉, 황선홍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었던 유일한 경쟁자는 자신의 부상 뿐이었다.[8] 세레소 오사카 이적 이듬해인 1999년에 26골로 득점왕에 올랐다.[9] 최전방 공격수 황선홍(H)과 최후방 수비수 홍명보(H) 듀오를 뜻하는 말이다. 친구 사이이기도 한 둘은 무려 4번의 월드컵 본선에 함께 출전했다. 이후 2000년대 대표팀 듀오로는 이영표-박지성이 있다.[10] 간혹 2002년 월드컵을 직접 보지 않은 세대 중 안정환이 주전 공격수였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황선홍이 주전 공격수이고 안정환은 황선홍과 교체되는 후반 조커 공격수였다. 그러나 황선홍이 본선 첫 경기인 폴란드전부터 허벅지 부상을 입었고 이후 경기부터 진통제 주사를 맞아가며 뛰는 바람에 세 번째 경기인 포르투갈전부터는 안정환이 선발 출장했다. 조별 예선부터 4강까지의 6경기 중 황선홍이 3경기(폴란드, 미국, 독일), 안정환이 3경기(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선발 출장했다.[11] 동시대의 공격수인 최용수, 김도훈, 서정원이나 2002 한일 월드컵 공격수였던 이천수, 설기현 등 모두 30세가 넘어가면서부터는 기량 저하로 대표팀 주전에서 밀렸다. 안정환의 경우도 35세로 출전한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 경기도 못뛰고 벤치에 있었으며 박지성은 35세가 되기 전에 은퇴했다. 황선홍 이후 공격수인 이동국, 박주영 등 대표팀을 거쳐간 수많은 선수들도 기량 기복이나 감독의 전술에 의해 또는 나이가 들면서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즉, 14년간 대표팀 주전이라는 것 자체가 레전드를 뜻하며 30대 중반까지 주전으로 활약했던 선수는 차범근, 홍명보, 황선홍 딱 3명 뿐이다.[12] 성이 황씨라서 황새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뒷이야기를 살펴보면 가난하던 어린 시절 약점이었던 체격을 만회하기 위해 물배를 채워 뒤뚱거리는 모습을 보고 동료들이 황새라고 별명을 붙였다는 슬픈 사연이 있다.[13] 1위는 차범근[14] 참고로 14명의 센츄리 클럽 가입자 중 공격수는 차범근, 황선홍, 이동국 3명 뿐인데 공격수의 경우 오랜 기간 기량을 유지하는게 더 힘들다는 뜻이다.[15] 유튜브 세대 중에는 1998년 한일전의 역전골인 슬라이딩하는 골 셀러브레이션으로 기억하는 경우도 많다.[16] 전방 십자인대 두 번 파열. 그로 인해 군 면제이다.[17] 전방 십자인대 파열은 지금도 군 면제 사유가 되며 군대에서 부상을 입을 경우 곧바로 의병 제대하게 될 정도의 큰 부상이다.[18] 무릎에 철심이 3개가 박혀있다.[19] IZ*ONE권은비가 프로듀스 48에 참여하기 전에 소속되어 있던 걸그룹이었다.[20] 덧붙여 황선홍은 딸의 활동에 일체 비호 및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인이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며 만약 포항 프런트가 포항 홈경기에 자신의 딸이 소속된 걸그룹을 초청한다 해도 본인이 불허할 것이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