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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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인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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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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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감독 | ||
이름 | 박상인 Park Sang-In | |
출생 | 1952년 11월 15일 ([age(1952-11-15)]세) 경상남도 창녕군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75cm | |
직업 | 축구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 |
학력 | 창녕중 - 동래고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한국상업은행 축구단 (1972~1980) → 육군 축구단 (1973~1975 / 군 복무) MSV 뒤스부르크 (1981~1982) 할렐루야 독수리 (1982~1985) 현대 호랑이 (1986~1987) |
지도자 | 동래고등학교 (1988~2001) 대한민국 U-20 (1992~1993) 부산교통공사 축구단 (2006~2016) | |
국가대표 | 70경기 16골 (대한민국 / 1975~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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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상인은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이다.2. 축구인 경력
2.1. 선수 경력
동래고등학교 재학 시절 서울 대신고와 가진 결승전에서 2골을 넣는 맹활약을 펼치며 전국대회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한 박상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상업은행에 입단한 박상인은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금메달 획득에 기여하였다.이후 한 신문사 기자의 권유로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이적을 추진했었지만 계약 직전에서 네덜란드 선수협의회와 감독 간의 갈등으로 그의 이적이 무산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차례 유럽무대에 도전한 끝에 81년 뒤스부르크 입단에 성공했다. #
하지만 허벅지 부상과 현지 적응 실패로 분데스리가 2경기 출장에 그쳤다.
이 후, 리그 원년인 1983년 할렐루야의 우승을 이끌었고 1985년까지 할렐루야에서 주전 미드필더로 뛰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33세였는데 당시에는 30세만 넘어가도 은퇴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박상인 역시 은퇴가 예상되었는데 뜻밖에도 그의 행선지는 현대 호랑이었다. 국가대표팀에서 좋은 인연이었던 문정식 감독이 그를 불렀고, 두 시즌간 21경기에 나서서 무난한 활약을 했다. 한국 나이로 36세에 은퇴했다.
2.2. 지도자
선수생활을 마친 박상인은 서울에서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사업 대신 자신의 모교인 동래고등학교의 축구부 감독직을 맡으며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8년부터 2001년까지 14년 동안 동래고 감독생활을 해 오면서 전국대회 우승만 20번을 넘게 시켰고, 성적 뿐만 아니라 최용수, 김치곤, 박준홍, 노병준 등의 실력있는 인재들을 많이 키워내며 명문 동래고의 전통을 이어갔다.1992년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해 2년간 활동하면서 1993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으며, 2006년 부산교통공사 축구단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2015년 8월 7일 목포시청과의 경기에서 2:1승리를 거두며 팀 통산이자 내셔널리그에서 세번째로 개인 통산 100승을 기록하였다.
11년동안 부산교통공사 감독을 맡으면서 전국체전 금메달 5회(2006년, 2009년, 2013~2015년), 은메달 1회(2012년)와 내셔널리그 선수권대회 우승(2010)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2016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2009년 동아시아 경기 대회에서는 내셔널리그 선발팀(대한민국 B팀)의 감독을 맡아 팀의 동메달 획득을 이끌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