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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철

함흥철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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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35대, 39대, 43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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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파일:함흥철 감독.jpg
이름 함흥철
咸興哲 | Ham Heung-chul
출생 1930년 11월 17일
일제강점기 조선
사망 2000년 9월 11일 (향년 69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혈액형 O형[1]
직업 축구 선수 (골키퍼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한양공업고등학교 축구부 (1948~1950)
육군 헌병감실 축구단 (1950~1964)
대한중석 축구단 (1964~1967)
코치 대한중석 축구단 (1965~1967 / 플레잉 코치)
대한중석 축구단 (1967~1969 / 골키퍼 코치)
조흥은행 축구단 (1969~1981)[2])
대한민국 대표팀 (1986 / 골키퍼 코치)
감독 대한민국 대표팀 (1972)
대한민국 대표팀 (1974~1976)
대한민국 대표팀 (1978~1979)
풍생고등학교 축구부 (1981)
할렐루야 독수리 (1982~1985)
유공 코끼리 (1989~1991 / 2군 감독)
행정 유공 코끼리 (1992~1993 / 기술 고문)
대한축구협회 (1994 / 부회장)
대한민국 대표팀 (1994 / 단장)[3]
성남 일화 천마 (2000 / 고문)
국가대표 51경기 / 66실점 (대한민국 / 1956~1964)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지도자 경력5. 행정가 경력6. 사망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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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행정가. 현역 시절 골키퍼 출신으로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대회에 참가했던 원로 축구인 중 한 명이다.

K리그 원년 시즌 우승 감독이다.

2. 클럽 경력

선수 경력 대부분을 군 부대 축구팀인 육군 헌병감실 축구단에서 보냈다. 함흥철의 현역 시기가 1950년대였음을 감안하면 그리 이상하지 않은 커리어인데, 군 축구팀에서 10년 넘게 활동하다 1964년 전역 이후 대한중석 축구단에서 현역 경력을 마무리하며 플레잉 코치까지 지냈다.

3. 국가대표 경력

1954년 스위스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했지만 홍덕영이 주전이라 출전하지는 못했다. 홍덕영의 은퇴 이후 5, 60년대 대표팀의 골문을 책임졌는데 아시안컵 2회 연속 우승, 2개의 아시안 게임 은메달을 차지하며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다.[4]

이후 1964년 도쿄 올림픽 축구 16개국 본선에도 진출했으나 올림픽 3경기에서는 20실점을 하면서 많이 고전했다.[5]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팀에서 은퇴했고 이세연이 수문장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4. 지도자 경력

선수 생활을 은퇴한 대한중석에서 곧바로 골키퍼 코치부터 시작해 1969년에는 조흥은행 축구단의 코치로 자리를 옮긴다. 당시 실업 축구의 특성상 감독직은 축구인 여부와 관련없이 회사 내부 인물(...)을 앉혀놓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에 이 시기 사실상의 감독은 함흥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흥은행에서 1981년까지 감독직을 수행했고 중간 중간 당시 비전임제로 운영됐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세 차례 맡았다. 1972년 메르데카컵과 박스컵, 1976년 올림픽 아시아 예선전, 1978 아시안 게임에 나서는 대표팀을 지휘했다.

1982년, 함흥철은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 축구단인 할렐루야 축구단의 초대 감독으로 영입돼 프로 무대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듬해 출범한 슈퍼리그에서 함흥철의 할렐루야 축구단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써 함흥철은 K리그 초대 우승 감독으로써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됐다. 이후 할렐루야 축구단이 자진해서 실업무대로 내려가기 전까지 함흥철은 계속 할렐루야의 감독으로 활약했다.

할렐루야에서 떠난 후인 1986년, 함흥철은 나름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데 70년대 국가대표 감독직까지 맡았던 인물이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대회 본선에 진출한 대한민국 대표팀의 골키퍼 코치로 들어간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역사상 첫 전임 GK 코치 사례로 함흥철은 오연교조병득을 대회 본선까지 지도했다.

5. 행정가 경력

월드컵 이후에는 일선에서 다소 물러나 1989년 유공 코끼리의 2군 감독과 기술 고문,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직을 맡으면서 행정적인 역할로 자리를 옮겼고 2000년 성남 일화의 고문에 올라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6. 사망

성남의 고문직을 맡은 2000년 9월, 함흥철씨는 추석 연휴를 맞아 자신이 속한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설악산을 등반하던 도중, 난코스로 분류되던 용아장성[6]에서 오전 7시경 발을 헛디뎌 150m 아래로 추락해 어이없이 명을 달리했다. 향년 69세. 당시 뉴스보도 링크

이후 고인의 장례는 대한축구협회장으로 치러졌다.

7. 여담

  • 자기 관리가 철저한 축구인이었다고 한다. 40대에 감독 생활을 하면서도 소속 구단 선수들과 동일한 프로그램으로 훈련을 같이 했다. 이 때문에 항상 함흥철 감독의 몸은 현역시절의 풍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실업리그에서 간혹 조흥은행 골키퍼진의 출전 선수가 징계, 부상 등으로 부족해질 경우 함흥철 본인이 선수 등록을 하고 실제 경기도 나설 정도. 이런 기조는 대표팀 감독 시절에도 선수들 관리에 고스란히 적용되어 당시 국가대표 선수였던 박상인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연습 시간에 1분이라도 늦으면 그 선수를 바로 배제하고 가는 칼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 그와 동시에 성격이 매우 불같았던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1960년 로마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심판을 구타한 사건의 주동자였으며 1971년에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경기에서 주심이 조흥은행 감독에게 주의를 주자 옆에서 심판을 폭행한 전과가 있을 정도다. 그래서 그런지 징계를 자주 받은 축구인이었으며 1991년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경기 직후 주심을 심판실까지 찾아가 구타해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 성격의 어두운 면이었다.


[1] 홍덕영, 함흥철을 비롯해 조병득, 최인영 등 최고 골키퍼 계보를 있는 선수들 중에는 O형이 많다. [2] 사실상 감독직 수행[3] 1994 FIFA 월드컵 미국 대회 기간.[4] 후보 시절인 1954 마닐라 아시안 게임을 포함하면 3개의 아시안 게임 은메달을 보유했다.[5] 결국 한국은 최하위 14위로 마쳤다.(16개국 진출국 중 이탈리아와 북한이 기권 실격으로 14개국 본선 올림픽 축구로 진행되었다.)[6] 예전부터 설악산의 사고 다발 지역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현재는 비법정탐방로로 지정되어 허가받지 않은 인원은 출입을 금하고 있지만 여전히 몰래몰래 들어가는 사람이 많은 듯 해당 지역에서의 실족 사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