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3 18:55:28

디노 바조

디노 바조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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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파일:Dino Baggio.jpg
<colbgcolor=#eeeeee> 이름 디노 바조
Dino Baggio
출생 1971년 7월 24일 ([age(1971-07-24)]세)
이탈리아 캄포삼피에로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88cm | 체중 83kg
직업 축구선수 (미드필더[1] / 은퇴)
소속 선수 토리노 FC (1989~1992)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91~1992 / 임대)
유벤투스 FC (1992~1994)
파르마 AC (1994~2000)
SS 라치오 (2000~2005)
블랙번 로버스 FC (2003 / 임대)
AC 안코나 (2004 / 임대)
US 트리에스티나 칼초 1918 (2005)
AC 톰볼로 (2008~2009)
국가대표 파일: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60경기 7골 (이탈리아 / 1991~1999)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기록
3.1. 우승 이력3.2.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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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5세 때 AC 톰볼로의 유소년 팀에 입단하며 축구 경력을 시작했고 이후 13세 때 토리노 FC의 스카우터에게 스카웃되어 토리노의 유소년 팀에서 뛰게 된다.

1989-90 시즌, 18세의 나이에 1군에 데뷔하였고 그 시즌 팀이 세리에 B에서 우승하면서 다음 시즌인 1990-91 시즌, 19세의 나이에 1부 리그인 세리에 A에서 뛰게 되었다.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과 왕성한 활동량, 빼어난 체력, 기복없는 꾸준함 등을 갖춘 바조는 금방 팀의 주전으로 자리 잡았고 이탈리아에서 주목받는 유망주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활약으로 1991년 팀의 미트로파컵 우승을 도왔고, 세리에 A의 명문 FC 인터 밀란으로 임대 이적하게 된다.

인터 밀란에서 주전으로 34경기(리그 27경기)를 뛰었으나 성적 부진으로 코라도 오리코 감독이 시즌 도중 경질되었고, 소방수로 투입된 루이스 수아레스 감독 역시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났기 때문에 다시 친정팀인 토리노로 복귀했다. 그리고 곧이어 10억 리라에 이탈리아 최고의 명문 유벤투스 FC로 완전 이적하게 된다.

당시 유벤투스에는 이탈리아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인 로베르토 바조가 뛰었는데 로베르토 바조와 성이 같았기 때문에 디노 바조는 '다른 바조' 또는 '작은 바조'[2], '바조 2' 등으로 불렸다.

처음에 유벤투스 팬들은 지역 라이벌 팀인 토리노 출신 선수라는 점에서 디노 바조를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1992-93 시즌 UEFA컵 16강 1차전 결승골을 시작으로 8강 2차전 SL 벤피카전에서의 추가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결승 1, 2차전에서는 무려 3골을 기록하며 UEFA컵 우승의 주역이 되었고, 리그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치자 팬들의 사랑을 받는 선수가 되었다.
두 번째 시즌인 1993-94 시즌에도 좋은 활약으로 팀의 리그 2위와 UEFA컵 8강에 공헌했고 1994 미국 월드컵이 끝난 뒤 파르마 AC에서 오퍼가 왔으나 유벤투스에 남고싶다는 의사를 표명함에 따라서 유벤투스는 디노 바조 대신 당시 유망주였던 알레산드로 델피에로를 보내기로 했다. 파르마도 이를 받아들였지만 이적 마무리 단계에서 디노 바조는 마음을 바꿔 파르마로 이적하기로 결정하면서 이탈리아 축구사에 길이 남을 이적이 성사되었다.[3] 이적료는 디노 바조를 영입한 가격의 14배인 140억 리라. 거상 유벤투스[4]

이적 첫 시즌인 1994-95 시즌 네비오 스칼라 감독의 지휘 아래에서 리그, UEFA컵을 가리지 않고 맹활약하며 팀의 리그 3위, UEFA컵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특히 UEFA컵에서는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16강 2차전 멀티골을 시작으로 바이어 04 레버쿠젠과의 준결승 1차전 동점골, 대망의 결승전에서는 친정팀 유벤투스를 상대로 2골을 터뜨리며 제대로 비수를 꽂았다.[5] 이 대회에서 총 5골을 넣은 바조는 스트라이커가 아닌 선수로 유일하게 대회 득점 순위 Top 5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에도 릴리앙 튀랑, 파비오 칸나바로, 로베르토 센시니, 잔루이지 부폰, 에르난 크레스포, 엔리코 키에사 등과 함께 매시즌 팀을 리그 2~6위에 올려 놓았고, 코파 이탈리아 우승,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과 더불어 다시 한 번 UEFA컵 우승을 달성하는 등 7공주라 불리던 팀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2000년 10월, 이적료 100억 리라를 기록하며 이전 시즌 리그 우승 팀인 SS 라치오로 이적했다. 당시 라치오에는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디에고 시메오네, 시니샤 미하일로비치, 데얀 스탄코비치 등 호화로운 스타 플레이어들이 즐비했고, 바조의 기량 또한 전성기에 비해 하락세였기 때문에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결국 2003-04 시즌 EPL블랙번 로버스 FC로 임대를 떠났지만 그곳에서 감독이 수비형 미드필더인 바조를 스트라이커로 기용하는 등 정신나간 행태를 보였고 감독 또한 바조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관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복귀했고 잔여 시즌 동안 승격팀인 AC 안코나에서 임대 생활을 보내게 된다. 그곳에서 13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넣었으나 팀의 강등을 막지 못했다. 시즌 종료 후 라치오로 복귀했지만 자리는 없었고 1시즌 동안 허송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후 라치오와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라치오를 떠나 세리에 BUS 트리에스티나 칼초 1918로 FA 이적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34세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2008년 2월, 고향 팀이자 유소년 시절 처음 축구 경력을 시작했던 AC 톰볼로의 플레잉 코치로 복귀해 1시즌을 보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91년 아리고 사키 감독의 부름을 받아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었고, 1991년 12월 21일 키프로스와의 UEFA 유로 1992 예선 경기에서 라이트백으로 선발 출전하면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1992년에 열린 UEFA U-21 챔피언십에 참가하여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주전으로 뛰는 선수답게 한 단계 높은 클래스를 선보이며 조국에게 우승을 안겼다.

1993년부터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와 함께 더블 볼란치 듀오로 환상적인 호흡을 보이며 아주리 군단의 주전으로 자리 잡았고, 1994 FIFA 월드컵 미국 유럽 지역예선 6경기에서 3골을 넣는 등의 활약으로 이탈리아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일조했다.

이러한 활약은 월드컵 본선까지 이어졌는데 조별리그 두 번째 경기인 노르웨이전에서 주세페 시뇨리의 프리킥을 문전 앞에서 헤더로 마무리하며 결승골을 넣었고, 8강 스페인전에서는 약 30여m 거리에서 환상적인 미사일 중거리 슈팅으로 스페인의 골문을 가르며 선제골을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대망의 결승전에서는 브라질과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부가 0:0 무득점, 무승부로 끝나 승부차기까지 가는 월드컵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는데 대회 종료 후 FIFA 기술위원회에서는 결승전 120분 동안 골이 나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 브라질의 둥가와 이탈리아의 디노 바조가 홀딩 미드필더 역할을 너무 잘 수행한 탓에 그런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렇듯 공수양면에서 맹활약하며 이탈리아의 준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 대회에서 역대급 퍼포먼스를 선보인 로베르토 바조에게 묻혔지만 이탈리아 대표팀 내에서 그 로베르토 바조의 다음 가는 활약을 펼쳤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디노 바조의 활약도 매우 훌륭했다.

UEFA 유로 1996에도 참가했지만 로베르토 디 마테오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며 1경기 39분 만을 소화했고 이탈리아도 1승 1무 1패로 조별리그 탈락했다.

이후에는 다시 주전으로 복귀하여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유럽 지역예선 전경기를 뛰었고 본선에서도 주전으로 8강전까지 5경기 전경기를 주전으로 뛰었으나 결국 8강에서 만난 개최국이자 우승국 프랑스의 벽을 넘지 못하면서 8강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 1999년 11월 13일 벨기에와의 친선전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3. 기록

3.1. 우승 이력

3.2. 개인 수상



[1]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2] 여담으로 키는 디노가 로베르토보다 15cm 가량 더 크다.[3] 만약에 이때 디노 바조가 끝까지 유벤투스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면 우리가 아는 유벤투스의 그 알레산드로 델피에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디노 바조도 파르마의 레전드가 되었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윈윈인 셈.[4] 4년 전 클럽 레코드를 경신한 로베르토 바조의 150억 리라와 맞먹는 거액으로 UEFA컵과 월드컵에서의 활약 + 리그 정상급 활약 +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 등 한창 주가가 치솟을 만한 요건들이 맞물렸을 때였기에 가능한 금액이었다.[5] 합산 스코어 2:1로 파르마가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2골 모두 디노 바조가 기록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