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07 21:22:23

로날드 쿠만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FC 바르셀로나/쿠만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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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리그 및 대표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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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날드 쿠만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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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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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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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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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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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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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루드 굴리트
(1988~1994)
로날드 쿠만
(1994)
다니 블린트
(1994~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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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날드 쿠만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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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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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날드 쿠만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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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루드 굴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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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날드 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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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로베르토 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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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FHS 선정 남자축구 레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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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derlands nationaal voetbalelftal
파일:Ronald Koeman(Nederlands).jpg
<colbgcolor=#ff6600><colcolor=white> 이름 로날드 쿠만[1]
Ronald Koeman
출생 1963년 3월 21일 ([age(1963-03-21)]세)
네덜란드 잔담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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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1cm / 체중 93kg
직업 축구 선수 (센터백[2]/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ff6600><colcolor=white> 선수 FC 흐로닝언 (1980~1983)
AFC 아약스 (1983~1986)
PSV 에인트호번 (1986~1989)
FC 바르셀로나 (1989~1995)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95~1997)
감독 네덜란드 대표팀 (1997~1998 / 코치)
FC 바르셀로나 (1998~1999 / 수석 코치)
피테서 아른험 (2000~2001)
AFC 아약스 (2001~2005)
SL 벤피카 (2005~2006)
PSV 에인트호번 (2006~2007)
발렌시아 CF (2007~2008)
AZ 알크마르 (2009)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2011~2014)
사우스햄튼 FC (2014~2016)
에버튼 FC (2016~2017)
네덜란드 대표팀 (2018~2020)
FC 바르셀로나 (2020~2021)[3]
네덜란드 대표팀 (2023~ )
국가대표 78경기 14골 (네덜란드 / 1982~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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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6600><colcolor=white> 가족 에르빈 쿠만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전술 스타일6. 기록
6.1. 선수
6.1.1. 출전 기록6.1.2. 대회 기록6.1.3.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6.2.2. 개인 수상
7. 여담8. 같이 보기

1. 개요

네덜란드축구 선수 출신 감독. 2023년부터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PSV트레블,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바르셀로나 드림팀의 핵심 중 한명으로 바르사의 사상 첫 UCL 우승을 이끌었으며 국대에선 오렌지 군단유로 1988 우승 주역 중 한명이다. 또한 네덜란드 국가대표였던 마르틴 쿠만의 아들이자 에르빈 쿠만의 동생이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80년 흐로닝언에서 데뷔한 쿠만은 아약스를 거치며 에레디비시 최고의 수비수로 성장한다. 이후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한 쿠만은 1986-87 시즌 후반기에 부임한 히딩크 감독의 지도 아래 1987-88 시즌에 리그에서 21골을 득점하며 에레디비시 우승, KNVB 베이커 우승, 그리고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하며 트레블을 달성한다.[4]

쿠만은 PSV에서의 마지막 시즌에 리그 14골을 득점하며 에레디비시와 KNVB 베이커에서 더블을 선물하고, 바르셀로나로 이적한다.

쿠만은 바르셀로나에서의 첫 시즌 리그 14골, 코파 델 레이 4골을 득점하며,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다.

1990-91 시즌에는 라리가 우승을 차지했지만, UEFA 컵위너스컵 결승전 맨유와의 경기에서 마크 휴즈에게 2골을 허용하고 쿠만은 79분 만회골을 넣었으나 결국 2:1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1991-92 시즌 쿠만은 리그에서 16골을 득점하며 라리가 2연패를 이끌었으며, 유러피언컵 4강에서는 카이저슬라우테른과의 경기에서 5:5 원정 다득점으로 힘겹게 유러피언컵 결승전까지 진출한다.
파일:external/i.makeagif.com/iuGxzm.gif
결승골을 넣는 쿠만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바르샤는 UC 삼프도리아와 맞붙었는데, 112분 188km/h 프리킥 결승골로 바르샤에 첫 빅 이어를 안겨준다. 한 마디로 쿠만은 바르샤에 첫 빅이어를 안겨준 주역이므로, 바르샤 레전드라고 불러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담으로 바르샤와 삼프도리아와의 이 유러피언컵 결승전 경기는 마지막 유러피언컵 경기였다. 유러피언컵은 1992-93 시즌부터 UEFA 챔피언스 리그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개편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무려 8골을 넣었고, 윈턴 루퍼와 함께 공동 득점왕에 올랐다. 4강 FC 디나모 키예프전에서 2골을 넣고 합산 5:4 승리를 이끌며, 2시즌 만에 다시 결승전에 진출하지만, AC 밀란에게 0:4로 완패했다. 참고로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은 202425시즌 전까지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최다 점수 차 경기 중 하나로 남아있다.

1994-95 시즌이 끝나고 페예노르트 로테르담로 떠났고, 거기서 2시즌 뛰다가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쿠만은 유로 1988에 출전해 4강 서독 전에서 페널티킥으로 동점골을 넣었고, 이후 마르코 반 바스텐의 결승골로 결승전에 진출한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이고리 벨라노프리나트 다사예프가 버티는 소련을 상대로 루드 굴리트와 마르코 반 바스텐의 골로 2:0 승리를 거두고 네덜란드의 사상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16강에서 서독을 상대로 후반 막판에 페널티킥 득점을 올리나 결국 2:1로 패했다.

유로 1992에서는 조별 리그 1위로 4강에 진출했으나, 덴마크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고 분투했지만 8강에서 브라질에게 3:2로 패했고, 이후 쿠만은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시대마다 '돌연변이'라 부를 수 있는 선수가 여럿 있었지만, 쿠만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유별난 케이스다. 본 포지션이 센터백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르셀로나 생활 6년동안 102골[5], A매치 74경기 14골을[6] 넣을 정도로 엄청난 득점력의 소유자였다. 세계 축구 역사상 수비수로서 가장 많은 득점(253골)[7]을 기록하였다. 심지어 1993-94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총 8골로 득점왕[8]에 올랐으며, 수비수가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경우는 쿠만이 유일하다. 애초에 득점왕 타이틀을 제외하고 단순 골 기록만 봐도 수비수가 아닌 리그 탑클래스 스트라이커 혹은 리그 탑클래스 윙포워드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다. 게다가 그는 센터백이었다. 공격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이드백이 아닌이상 센터백의 득점은 데드볼 상황을 노리거나, 세트피스에서 헤딩이 대다수인 이상 기회가 적다. 그러한 와중에 이정도의 미친 득점력을 선보인 것.

또한 전 포지션을 통틀어 역대 최강 슈팅력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순위에 거론되는 인물이다. 프리킥이나 중거리는 당시 에이스인 미카엘 라우드루프도 한 수 접어주는 정도였다. 그는 1992년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당시 로베르토 만치니를 비롯한 전성기 멤버들을 앞세워 강호들을 연달아 격파하며 올라왔던 다크호스 UC 삼프도리아를 상대로 보여준 188km/h의 살인적인 프리킥 결승골을 비롯해 흐로닝언부터 아약스, PSV, 바르셀로나를 거치며 계속해서 엄청난 장면들을 보여주며 세트피스 전문가로 불릴 만큼 프리킥과 페널티킥 모두에서 놀라운 파워와 정확도를 보여주었다. 통산 프리킥 골은 무려 60골로 역시 프리킥 마스터로 꼽히는 데이비드 베컴(65골), 지쿠(62골)와 비교해도 비등한 수준이며, 리오넬 메시가 경신하기 전까지 바르셀로나 최다 프리킥 골 기록 보유자였다.

이 정도 공격력이면 공격을 위해 본 포지션인 수비수의 기본 소양인 수비력이 떨어졌을 법도 하지만, 수비력도 준수한 편이었다. 일단 어마어마한 강슛을 가능케 하는 다리 근육에서 알 수 있듯이 근육질의 다부진 몸이었으며, 피지컬로 상대 선수를 압도하는 수비를 펼쳤다.

또 그 괴물같은 킥력에 걸맞게 거리에 상관없이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뛰어난 롱패스 능력을 가지고 있어 펩 과르디올라가 중원 사령관이 되기 전까지 바르셀로나의 후방 공격 전개를 도맡아 했던 선수가 바로 쿠만이다.

단점이 있다면 쿠만은 의외로 발이 느린 편이었는지라 순속이 빠른 상대 공격수와의 1:1에서는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었다.

쿠만은 과르디올라의 멘토이기도 한데 과르디올라의 데뷔 시즌인 1990-91 시즌에 쿠만은 팀의 주전 수비수였다. 이때 감독이었던 요한 크루이프는 쿠만에게 과르디올라라는 똘똘한 선수를 1군에 투입할 텐데 얘한테 네덜란드식 축구를 가르쳐주라는 지시를 했고 쿠만은 이를 성실히 이행했다. 그 결과 바로 다음 시즌인 1991-92 시즌에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의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하면서 챔스 우승까지 경험하게 된다. 1994-95 시즌을 끝으로 쿠만이 팀을 떠나자 과르디올라는 쿠만의 등번호였던 4번을 물려받았다.[9]

이러한 쿠만을 보며 후방에서부터 시작되는 빌드업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은 과르디올라는 감독이 된 후에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제라르 피케, 제롬 보아텡, 존 스톤스, 에므리크 라포르트 등 빌드업이 능한 수비수를 적극적으로 중용하고 있다.

4. 지도자 경력

쿠만의 감독 생활은 발렌시아+에버튼 2년차[10] 시절과 그 외로 나뉘게 된다.

4.1. 발렌시아 이전

2000-01 시즌을 앞두고 에레디비시SBV 피테서 감독을 맡아 감독 경력을 시작한 쿠만은 한 시즌 뒤 자신의 친정팀이었던 AFC 아약스로 팀을 옮긴 뒤 그 해 리그와 컵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며 더블을 일구어 내 주목을 받았다. 이후 2002-03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2차 조별 라운드에서 발렌시아, 아스날, AS 로마와 같은 강팀들과 한 조가 된 상황에서 1승 5무로 발렌시아에 이어 조 2위로 팀을 8강으로 이끌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 뒤 2003-04 시즌 팀에 한 차례 리그 우승을 더 선사하고는 2005-06 시즌을 앞두고 SL 벤피카의 새로운 감독으로 취임했으며, 그 시즌 챔피언스 리그 조별 라운드에서 맨유를 밀어내고 비야레알 CF에 이어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한 뒤 16강에서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리버풀 FC를 상대로 홈과 원정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어 팀을 8강까지 진출시키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시즌 종료 이후 자신의 또다른 친정팀인 PSV 에인트호번의 감독직을 맡아 2006-07 시즌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아스날을 상대로 1승 1무를 기록해 팀을 8강에 진출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더불어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스승이었던 요한 크루이프의 뒤를 그대로 잇는 명장 반열에 들어가는 듯 했다.

4.2. 발렌시아 CF

2007년 10월 당시 발렌시아의 감독이었던 키케 산체스 플로레스가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자 그 자리를 메우러 스페인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팬들은 이 선택이 21세기 발렌시아의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로 기록됨과 동시에 쿠만 자신에게도 엄청난 오점을 남기게 만든 행보가 될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의 취임을 환영했고 쿠만도 역시 발렌시아와의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쿠만은 부임하자마자 팀의 핵심선수이자 팀의 주장이던 다비드 알벨다와 주전 수문장 산티아고 카니사레스, 중원의 핵 미겔 앙헬 앙굴로를 팀 개혁의 일환이라며 내쳤다. 쿠만 입장에서는 당시 어수선했던 팀 분위기를 바로잡고자 했던 일이었겠으나,[11] 이에 충격받은 카니사레스가 시즌 종료 후 은퇴하겠다고 선언했으며,[12] 알벨다 또한 은퇴까지 고려했다가 다른 팀을 알아보기도 했다. 또 앙굴로가 쿠만이 떠난 2009년 이적했다가 곧바로 은퇴한 것을 보면 발렌시아에서 만든 흑역사의 여파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일:external/estaticos01.elmundo.es/1208845468_0.jpg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대변해준 알벨다의 눈물 짤. 이 짤은 쿠만의 막장 행보를 여실히 드러내게 만든 짤이 되었다.

더욱이 팀내 차기 레전드로 칭송받던 알벨다의 방출소식에 발렌시아 서포터는 즉각 반발함은 물론이요 알벨다의 소송으로 알벨다의 옹호파와 쿠만의 옹호파로 나뉘어 팀내 파벌이 형성되는 등 일이 더욱 커져만 갔고, 게다가 이적 의사를 밝힌 알벨다의 바이아웃을 터무니없이 높게 부르는 등 더러운 방식으로 알벨다를 주저앉혔다. 2020년 행보는 떡잎이 있었던 것인가

그 후 팀의 양쪽 윙을 담당했던 비센테 로드리게스호아킨 산체스의 포지션을 맞바꾸어 출전시키기도 하였고,[13] 공격수인 하비에르 아리스멘디왼쪽 윙백으로 기용하는[14][15] 이해하기 힘든 선수 기용을 선보였다. 이후 호아킨이 부진에 빠지자 30유로짜리 선수라며 공식석상에서 혹평을 하는 등 기행을 일삼았고, 결국 팀은 최악의 부진을 계속하다 시즌 막바지에 경질되고 만다. 결국 프리메라리가 내에서 수위에 꼽히는 전력을 보유한 발렌시아는 초반 부진을 만회하기는 커녕 오히려 끝없는 부진에 빠져 2007-08 시즌을 10위로 마감하게 되었다. 그나마도 쿠만이 계속 있었으면 정말 강등까지 걱정해야할 판이었다. 쿠만 경질 후 임시 감독이 그나마 팀을 잘 추스려서 겨우겨우 10위나 올린 것. 발렌시아의 명성에 10위라는 성적이 눈에 찰 리가 없지만 그 당시에는 10위 한 것도 대단했다. 그 정도로 팀의 부진이 심했다는 것.[16] 다만 경질되기 직전 팀에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을 안겨주면서 팀이 최악의 부진 속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17] 그리고 이걸 수습한 사람은 우나이 에메리.

이 당시의 맹활약으로 쿠만은 발렌시아 팬덤에서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그 사람으로 등극하기에 이르렀으며, 심지어 바르사의 첩자라 불리는 등 온갖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려 이전까지의 모든 활약을 모두 허공으로 날린 셈이 되었다. 더욱이 쿠만이 카니사레스의 대체로 기용한 골키퍼 티모 힐데브란트는 발렌시아 이적 이후 말 그대로 폭망했다.[18] 다만 겨울 이적시장에서 팀의 미래를 책임질 선수를 찾던 중 신예 미드필더 에베르 바네가를 발견하고 팀에 영입한 뒤 경험치를 쌓아놓은 것은 그나마 업적으로 꼽힌다.[19]

다만 이 당시 발렌시아에서의 깽판은 로날드 쿠만보다도 당시 회장인 솔레르에게 화살을 돌리는 사람들도 있다. 연봉상한선을 만들어 베테랑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고 잘하고 있던 키케 플로레스 감독을 갑자기 짤라버린 사람도 솔레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6년 들어서는 쿠만보다 더한 감독이 나왔다.

4.3. 발렌시아 이후

이후 2009년 고국으로 돌아가 AZ 알크마르를 잠시 맡았고, 2011년부터는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전 시즌 리그 10위로 추락한 페예노르트를 2011/12 시즌 곧바로 리그 준우승으로 이끌며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확보하였다. 그 뒤 2012/13 시즌에는 리그 3위, 2013/14 시즌에는 2위를 기록하면서 주목을 받은 로날드 쿠만은 루이 판할의 뒤를 이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후보로 물망에 올랐고, 취임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왕립 축구 협회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거스 히딩크를 감독으로 선임한 뒤 유로 2016을 치르게 하고 그 뒤 2005/06 시즌 아약스 감독으로 감독 경험은 달랑 1년에 불과했고 프런트 생활을 한 다니 블린트에게 감독직을 넘긴다는 계획을 수립하면서 로날드 쿠만을 완전히 배제시켰다. 게다가 로날드 쿠만에게 거스 히딩크를 보좌하는 수석코치 자리를 제안했다. 물론 로날드 쿠만이 1997년과 1998년에 거스 히딩크 밑에서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지도자 수업을 받은 경험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로날드 쿠만이 선수에서 은퇴한 직후였고 그 역할을 2014년에 와서 다시 하라는건 로날드 쿠만 입장에서도 자존심 구겨지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로날드 쿠만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2014년 여름 사우스햄튼의 감독이 되었다.

그 이후 거스 히딩크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말아먹고 심지어는 아이슬란드에게도 패배하는 상황까지 오자 아약스 감독인 프랑크 더부르와 함께 히딩크를 조롱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4.4. 사우스햄튼 FC

사우스햄튼이 2013-14 시즌에 중상위권이었긴 하지만 주요 선수들이 많이 유출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힘들 거 같지 않느냐는 의견도 많았으나 첫 시즌 사우스햄튼은 7연승 행진 중이고 10라운드까지 겨우 5실점(21득점)을 당하며 프리미어리그 최소 실점, 유일무이한 1자리 실점을 기록하며 리그 2위까지 올라왔다! 리그 1위인 첼시 FC가 8승 2무 26골 10실점으로 +16인데 그 첼시에 이어 2위인데다가 똑같은 +16점이다! 그야말로 쿠만은 진짜 갓동님이 되는 중이다.

그렇지만 차츰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이 기세도 많이 줄었다. 맨시티에게 안방에서 0-3으로 처발리면서 올 시즌 최다 실점을 당하고 그 뒤 아스날, 맨유에게 연패하면서 15라운드까지 8승 2무 5패를 기록하여 한때 1위 첼시랑 비슷한 골 득실 차도 이젠 맨시티에게도 밀렸으며 순위도 2위에서 5위로 추락했다. 하지만 박싱데이가 끝난 20라운드 현재 11승 3무 6패에 승점 36점으로 4위에 올라와 있어 다시 챔스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대신 5위 토트넘 하고는 승점이 2점 차(승점 34점)이긴 하지만 팀 간 골 득실 차는 +17씩이나 나고(사우스햄튼 +19, 토트넘 +2) 3위 맨유하고는 승점 1점 차에 골 득실은 사우스햄튼이 앞서므로(맨유 +14) 계속해서 성적 반등의 기회를 노려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후반부에 와서 다소 밀리며 유로파 리그 진출권도 아쉽게 놓치며 시즌 7위를 기록했으나 아스날이 FA컵에서 우승함으로써 사우스햄튼도 유로파 리그 진출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렇듯 유로파 리그도 나가게 되었으니 알차게 지낸 시즌이 되었다.

2015-16 시즌에도 시즌 전 주요 선수들이 빠져나갔으나 역시나 그 공백을 적절한 영입으로 적절히 메웠다. 시즌 중반 13위까지 밀리자 경질 여론이 비등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즌 종반에는 경기력을 회복하며 리버풀에 멋진 역전을 하는 등 순위를 끌어올리게 되었다. 지난 시즌의 임팩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꾸준히 해주면서 7~8위 정도의 순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클럽 역대 최다 승점(63점)으로 리그 6위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감해 차기 시즌 유로파 리그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시즌이 끝난 뒤 로베르토 마르티네스를 시즌 막판 짜르고 감독 자리가 비게 된 에버튼이 쿠만을 데려오기 위해 사우스햄튼에 제안을 했다고 한다. 일단 쿠만 본인은 남겠다는 의사를 그동안 쭉 피력해 오긴 했다.

그러나 비피셜이 뜨면서 에버튼 부임은 사실상 확정된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사우스햄튼에서 보낸 시간은 2년에 불과하지만 소튼팬들 입장에서는 사우스햄튼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뽑히고 있다. 2014-15 시즌에는 포체티노 감독과 아담 랄라나, 슈나이덜린, 루크 쇼, 리키 램버트 등 감독과 주축 선수들이 죄다 이적하는 상황이던 사우스햄튼의 분위기를 정비하고 프레이저, 포스터, 반다이크, 알더웨이럴트, 두산 타티치 등 알짜배기 영입을 주도하며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초반부터 빅4팀들을 위협하며 이전 포체티노가 세운 팀 순위인 8위를 뛰어넘어 사우스햄튼을 프리미어 리그 7위에 올려놓았다. 2015-16 시즌에는 초반에 13위로 몰리며 경질설이 나돌았지만 후반기부터 무시무시한 포스를 뿜어내며 기존 빅4팀들과 유럽 챔피언스 리그 티켓 경쟁을 할정도로 사우스햄튼을 성장시켰고, 비록 챔피언스 리그 티켓은 따지 못했지만 승점 63점으로 사우스햄튼을 프리미어 리그 6위에 올려놓으며 구단 역사상 최고순위와 최고승점을 경신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우스햄튼 팬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쿠만을 그리워하는 소튼팬들이 많다.

4.5. 에버튼 FC

6월 14일, 소튼 감독직에서 사임한 후 에버튼에 부임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잔류 의사를 밝혀놓고 에버튼으로 향한 점 때문에 사우스햄튼 팬들에게 배신감을 안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2016-17 시즌 초반, 4승 1무로 전승의 맨시티의 뒤를 잇는 2위를 달성 중이다. 물론 박싱데이 전후로 DTD를 감안해야한다. 그러나 그 뒤로 1승 3무 2패를 기록, 11월 1일 현재 리그 6위로 내려앉았지만 지난 시즌 에버튼의 리그 최종 승리가 겨우 11승임을 감안하면 현재 매우 잘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역시나 중상위권으로 내려앉았다. 그래도 현재는 다시 7위 자리에 있으며, 아스날을 2-1로 잡아내기도 했다.

EPL 21라운드에서 펩 과르디올라의 맨시티를 4-0으로 잡아내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경기 내용은 점유율 2:8로 맨시티의 흐름이었으나 단 4개의 유효 슈팅을 모조리 골로 연결시키는 집중력을 보여주며 펩 과르디올라에게 리그에서 처음으로 4점차 이상의 대패를 맛보게 해준 감독이 되었다.[20]

결국 최종 순위는 7위로 마무리했다.

2017-18 시즌 들어서는 상당히 그릇된 이적 시장을 보내면서 현재 팀이 안 좋은 성적을 보내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바클리와 같은 중앙에서 과감히 드리블로 볼을 운반할 수 있는 존재 & 미랄라스를 제외시 그를 대체할 크랙 성향이 짙은 윙어, 전형적인 No. 9이 필요하였는데 그러한 선수를 한 명도 영입하지 못하였다. 특히, 클라센 & 루니, 시굴손 모두 중앙 지향적인 자원인 선수들을 중복적으로 영입하게 되면서 이들이 모두 베스트11에 들어가게 될 시 사이드 플레이에 있어서 윙백이나 풀백에 지나치게 의존해야만 하는 단조로움을 낳게 되었다.

10월 중순 시점에서는 하위권에 쳐박힌 상태. 매 경기 경질설에 시달리고 있다. 하위권팀 상대로도 간신히 비기는 정도이다. 10월 22일 아스날과의 홈경기에서 5-2 대패를 당함으로써 18위, 즉 강등권에 위치하게 되었다. 특히 후반전에 게예가 경고누적으로 퇴장당한 뒤 에버튼이 수적으로 불리해진 틈을 타 아스날 선수들이 연달아 골을 넣었을 당시 경기를 관전하던 빌 켄라이트 회장이 한숨을 내쉬는 장면이 잡혔고 팬들도 경기 도중에 집단으로 구장을 나가서 경기장에 빈 자리가 많았던 것은 에버튼의 보드진과 팬들에게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는 점이기도 하다.

이로서 에버튼 감독직에서 경질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고 결국 다음날에 전격 경질되었다.

이번 시즌은 약간 발렌시아 때의 실패와 동일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이해가 안 가는 선발 라인, 유로파 때 굉장히 잘 했던 미랄라스를 선발로 쓰지 않았던 점, 그리고 본인이 대놓고 무시한 니아세가 출전할 때마다 거의 득점을 했음에도 쿠만은 지독히 미랄라스와 니아세를 쓰지 않았다. 가령 해임되기 마지막 유로파 경기인 리옹전 때 전반전은 팬들이 원하는 경기였다. 시원시원하고 스피디한 경기였지만, 후반전에는 미랄라스를 빼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산드로를 넣는 이상한 교체를 하더니 결국 경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팬들은 전반전처럼 하면 다시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쿠만은 오히려 전반전은 못했고 후반전 경기력이 좋다는 이상한 망언을 하였다.

4.6.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기

2018년 2월 7일, 딕 아드보카트 감독의 후임으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 기간은 UEFA 유로 2020까지이며 유로 2020의 성과에 따라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까지로 계약이 연장될 수 있다고 한다.

2018년 3월 A매치 데이에 한물 간 네덜란드 스쿼드로 잉글랜드한테 1-0으로 깨졌지만 27년만에 포르투갈을 3-0으로 깨며 축구팬들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6월에는 1일에 슬로바키아전을 상대로 1:1로 비겼다. 5일에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1:1로 비겼다. 9월 7일에는 페루전은 멤피스 데파이의 멀티골로 2:1로 승리했다. 10일 프랑스와의 UEFA 네이션스 리그 경기는 1:2로 졌다. 10월 14일 UEFA 네이션스리그 독일전에서는 독일을 3:0으로 격파하면서 부활의 물꼬를 텄다. 10월 17일 벨기에전은 1:1로 비겼다. 그리고 뒤이어 2018년 월드컵 우승팀인 프랑스와의 재대결에서 2:0으로 승리, 오렌지 군단의 부활을 이끌고 있다.

이후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 당당하게 조 1위를 차지하면서 네덜란드를 네이션스 리그 4강에 진출시켰고, 4강에서 잉글랜드를 꺾고 결승에 진출해서 포르투갈과 싸우게 되었다. 비록 결승에서 포르투갈에게 패하면서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이런 멋진 모습을 보인 것만 해도 어디인가?[21]

UEFA 유로 2020 예선 C조에서도 조 1위를 두고 경쟁할 것으로 평가된 독일과 1승 1패를 주고 받으며[22] 조 2위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2020년 8월 17일, 챔스 8강에서 바이언에게 충격적인 대패를 당한 바르셀로나가 키케 세티엔 감독을 경질하고 로날드 쿠만을 임명할 것이란 기사가 떴다. 기사에 따르면 현재 바르셀로나에 머물면서 협상중이라고 한다. 아직 공식적인 오피셜은 나오지 않았지만 유력한 감독직 후보이다.

파브리지오 로마노에게서 쿠만이 바르셀로나의 새 감독으로 계약할 것이라는 기사가 났다. 이번 주 내로 네덜란드 감독직을 내려놓고 바르셀로나와 사인할 것이라고 한다.

4.7. FC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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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8.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2기

루이 판할 감독이 암 투병으로 인해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가 끝난 이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지휘봉을 잡기로 합의하였다.

2023년 1월 24일,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지휘봉을 잡으면서 3년만에 대표팀으로 복귀하였다.

2023년 3월 25일, UEFA 유로 2024 예선전 프랑스와 경기에서 복귀전을 치렀다. 그러나 처참한 경기력으로 0:4 참패하면서 매우 불안하게 2번째 대표팀 감독직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지브롤터와의 UEFA 유로 2024 예선전에서 부임 후 첫 승을 거두었지만 이어진 네이션스 리그 4강 크로아티아전 2:4 패배, 3위 결정전 이탈리아전 2:3 패배를 하며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23년 9월 8일, UEFA 유로 2024 예선전 그리스와 경기에서 3:0 대승을 거두면서 분위기 반등에 성공하였다.

이후 프랑스전에서 1:2로 패배했지만 그리스, 아일랜드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면서 프랑스에 이어 UEFA 유로 2024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이후 친선경기에서는 엄청난 경기력으로 평가를 반전시켰다. 프랑스가 무승부를 기록한 캐나다 대표팀을 4:0으로 박살냈고, 잉글랜드가 1:0으로 패배한 아이슬란드도 4:0으로 박살내며 자신들도 유로 우승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네덜란드 사람들과 응원하는 이들에게 심어주었다.

4.8.1. UEFA 유로 2024

이후 본선에서 기대치대로 반다이크를 중심으로 한 수비진이 튼튼하게 버텨주는 상황에서 라인을 올려 상대에게 오픈 플레이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지만, 공격진의 퀄리티 부족으로 대회 내내 어려움을 겪었다. 거기다 전술 구조 상 오히려 전방 압박과 오픈 플레이를 즐기는 랄프 랑닉이 이끄는 오스트리아에게는 2:3으로 패하면서 조별예선에서 3위로 추락하기도 했다.

그래도 와일드카드로 토너먼트에 진출해 16강에서 루마니아을 완파하고, 8강에서 튀르키예의 돌풍을 잠재우며 네덜란드 대표팀을 유로 2004 이후 20년만의 4강 진출을 이끌었다.

5. 전술 스타일

센터백임에도 250골을 기록할 만큼 공격적이고 과감했던 본인의 선수 시절과는 다르게 기본적으로 수비라인의 안정성을 매우 중요시한다. 네덜란드 국가대표팀도 쿠만이 이끌었던 페예노르트 선수들과 전술을 그대로 넣었었고, 소튼 시절 역시 수비 하나는 끝내주는 팀이었다. 이런 안정적인 수비진 앞에도 신체조건이 준수하고 수비에 치중하는 미드필더들을 주로 배치하다보니, 수비적인 안정감만큼은 대단한 수준이다.

이렇게 수비진이 볼을 따내거나 상대방 플레이를 끊어내면, 킥이 좋은 선수 내지는 빌드업이 가능한 선수에게 연결해 전방으로 공을 보내고, 최전방 공격수가 포스트 플레이를 진행하면 2선이나 측면에서 공간으로 쇄도해 들어와 득점을 올리는 것이 쿠만 공격의 주요 패턴이었다. 이 패턴이 잘 먹혔던 소튼 시절에는 두샨 타디치라는 준수한 키커와 그라치아노 펠레라는 신체조건 좋은 최전방 공격수, 그리고 발 빠른 사디오 마네셰인 롱의 2선 침투가 있었기에 쿠만의 공격 패턴이 성공적으로 먹힐 수 있었다. 다만 이렇게 단순한 방식이다 보니 빅클럽말고 다른 약팀을 상대로 승점을 따내는 데는 많이 아쉬웠고, 덤으로 소튼이 타 팀보다 유달리 재미가 없는 축구를 구사하는 이유가 되었다.

또 하나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드리블러를 잘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23] 이는 특히 에버튼에서의 2번째 시즌에 두드러지게 되었고 결국 경질로 이어지게 되었다.

6. 기록

6.1. 선수

6.1.1.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80/81 FC 흐로닝언 에레디비시 24 4 3 2 - -
1981/82 FC 흐로닝언 에레디비시 33 14 1 0 - -
1982/83 FC 흐로닝언 에레디비시 33 14 4 0 - -
1983/84 AFC 아약스 에레디비시 32 7 4 2 2 0
1984/85 AFC 아약스 에레디비시 30 9 2 1 4 3
1985/86 AFC 아약스 에레디비시 32 7 6 1 2 0
1986/87 PSV 에인트호번 에레디비시 34 16 3 3 2 0
1987/88 PSV 에인트호번 에레디비시 32 21 6 4 8 1
1988/89 PSV 에인트호번 에레디비시 32 14 6 1 4 2
1989/90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36 14 7 4 4 1
1990/91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1 6 4 2 7 4
1991/92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35 16 2 0 11 1
1992/93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33 11 3 0 3 0
1993/94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35 11 2 0 12 8
1994/95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32 9 1 0 8 1
1995/96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에레디비시 31 10 3 1 7 3
1996/97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에레디비시 30 9 2 0 5 0

6.1.2. 대회 기록

6.1.3.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

6.2.2. 개인 수상

7. 여담

  • PSV 에인트호번에서는 구단의 트레블 및 유일한 챔스 우승의 주역 중 하나였고, 바르셀로나에서도 첫 챔스 우승의 주역인만큼 바르셀로나에서 레전드로 불릴 정도고, 국가대표인 네덜란드에서의 활약도 조국의 유일한 메이저 대회 우승인 유로 1988에서도 주전 선수로서 오렌지 삼총사 못지 않는 활약을 보여주며 우승을 이끈 모습을 현재는 온라인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므로 감독보다는 선수 시절이 더 화려했던 감독으로 기억되고 있다.
  • 발렌시아에서의 깽판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그런지 로날드 쿠만은 가는 클럽마다 깽판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국내 축구팬들이 꽤 있다. 심지어는 최근 사우스햄튼의 상승세를 보고 "쿠만 사람됐네요"라는 반응까지 보이는데 몇몇 선수들(미도, 즐라탄[24] 등)과의 불화는 있었지만 애초에 발렌시아를 제외하곤 깽판을 친 적이 없다. 선수들과의 불화는 다른 감독들도 다 가지고 있는 것이고 또 가는 클럽마다 그런 짓을 하고 다녔으면 애초에 발렌시아 감독까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시 에인트호번과 계약이 남아 있던 쿠만을 데려오기 위해 발렌시아는 위약금까지 지불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이전까지 발렌시아와 어떠한 관계도 아니었던 쿠만을 데려온 것은 그만한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렌시아 감독 이후에도 다른 클럽의 감독직을 맡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국내에선 로날드 쿠만이 주로 활동했던 에레디비시 리그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는 지도자 경력 중에서 실패한 것은 반년 남짓 되는 스페인 라리가의 발렌시아 시절 단 한 번인데 그게 워낙 크게 각인된 것이다. 그 전부터 쿠만을 봐온 축구팬들은 그가 기본은 하는 지도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발렌시아 감독에 부임했을 때 그럭저럭 잘 하겠지라고 기대하기도 했으며 이후 이런저런 일들로 팀이 난장판이 되자 "저럴 사람이 아닌데 왜 저러나요?" 또는 "이 사람 그런 사람일 줄 몰랐네요"라며 놀라는 반응이었다.
  • 쿠만의 능력을 보여준 한 가지 예로는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의 전술이 네덜란드 내에서도 쿠만의 아이디어를 어느 정도 차용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주축 멤버도 쿠만의 아이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때 네덜란드 내에서는 루이 판할의 후임 감독으로 왜 쿠만을 선택하지 않고 거스 히딩크를 임명했느냐는 비판까지 있을 정도. 실제로 2018년에 국대 감독이 되자 쿠만은 위기의 연속이던 대표팀을 매우 빠르게 회복시켰다.
  • 축구 가족 출신이다. 아버지인 마르틴 쿠만(1938~2013)은 수비수로서 흐로닝언에서 500경기를 넘게 뛴 프랜차이즈 선수였으며 국가대표로도 한 경기를 뛰었다. 아버지의 입지에 힘입어 두 아들들이 모두 흐로닝언에서 프로로 데뷔할 수 있었다. 두 살 터울 형인 에르빈 쿠만 역시 축구 선수와 지도자로 꾸준히 활약해온 인물이다. 선수 시절에는 동생보다는 못했지만 네덜란드 내에서 PSV와 흐로닝언, KV 메헬런 등에서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A매치도 31경기에 출전하였고 유로 1988 우승도 차지했다. 은퇴 직후에도 PSV의 유소년 팀 감독을 거쳐 2002년에는 거스 히딩크를 보좌하며 PSV 수석코치로 활동하기도 했고 그 이후 RKC 발베이크, 페예노르트, 위트레흐트, 에인트호번,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이후 동생 로날드 쿠만에 의해 사우스햄튼 수석코치로 임명되며 형제가 처음 한 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현재는 로날드 쿠만에 의해 에버튼 수석코치로 또다시 임명되어 동생을 계속 보좌하고 있다.
  • 루이 판할과의 악연으로 유명하다. 판할이 바르셀로나 감독 시절에 쿠만이 수석코치로 영입되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되는데, 두 양반 다 성격이 워낙 강골이라 이런저런 트러블이 많았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축구계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자잘한 트러블로 생각될 수 있겠으나 훗날 아약스 감독으로 쿠만이 임명되고 아약스의 단장으로 판할이 임명되면서 다시 악연이 시작됐다. 쿠만이 훈련장에서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있으면 판할이 구석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선수들을 평가하고, 여러 가지 간섭을 하며 쿠만의 감독 권한을 침해하는 바람에 쿠만이 아주 자존심이 상했었다고 한다. 마침 당시 아약스에 있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이적을 요청했는데 쿠만은 절대 그를 팔 수 없다며 NFS[26]를 때렸다. 그러나 마침 즐라탄과 이런저런 불화가 있던 판할은 쿠만의 요청을 씹고 즐라탄을 팔아 버렸다. 머리 끝까지 열이 뻗친 쿠만은 구단 측에 나를 짜를 것인지 판할을 짜를 것인지 선택하라고 요청했고, 결국 판할이 아약스에서 나가게 되었다. 이후 판할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쿠만을 극딜하였고, 두 사람은 결국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후에 판할은 자신의 후임으로 AZ 알크마르의 감독이 되었던 쿠만을 조롱하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그래서 지금도 판할과 사이가 많이 안 좋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2015-16 시즌 판할이 이끄는 맨유와 쿠만의 사우스햄튼이 붙었을 때 원정경기에서 찰리 오스틴의 골로 소튼이 승리하자 쿠만은 사자후를 내질렀다(...).
  • 2014년 EPL에 들어온 이후로 아스날을 상당히 잘 잡고 있다. 사우스햄튼 시절 3승 1무 1패를 기록했으며, 그 3승 중에는 4-0 대승도 있다. 에버튼에서도 이미 1승을 챙겼다. 그러나 2017-18 시즌에는 아스날에게 2-5로 대패당하면서 결국 이 경기 이후 에버턴 감독에서 경질되고 만다.
  • FIFA 20에 아이콘으로 출시된다. 공개된 능력치는 골 넣는 수비수라는 현역 시절 명성에 맞게 매우 높은 슈팅 능력치를 달고 나왔다. 피파 온라인의 경우 앞서 피파 온라인 2, 피파 온라인 3 초창기에 R. 쿠에만이라는 이름으로 전설의 선수로 출시되었다가 삭제되었는데 FIFA 20에 등장하면서 피파 온라인 4에서도 재등장하였다. 그러나 느리며 둔하고 탈압박 능력도 부족하여 본가에서나 온라인에서나 센터백으로도,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찬밥 신세이다. 그러나 FC온라인 감독모드에서는 특유의 공격가담 AI, 수미에서는 최상급 슈팅력으로 네덜란드 등 감모 최적화팀에서 센터백 대신 수미 포지션으로 잘 투입된다.
  • 쿠만은 성적이 부진한 팀에 가면 팀을 잘 살려놓다가도 정상적인 팀으로 가면 그 팀을 막장으로 몰아가는 희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들들어 마우리시오 포체티노를 포함해 선수들이 죄다 이적해 막장 5분전이던 사우스햄튼에 부임해서는 이적시장을 알차게 보내며 팀순위를 7위 6위로 끌어올렸지만, 에버튼으로 가서는 대실패했다. 네덜란드 리그에서 상종가를 치며 발렌시아로 갔지만 발렌시아를 막장으로 만든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물론 발렌시아 때와 달리 에버튼에서의 실패는 팬들이 흑역사 취급할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냥 못한 수준이다.
  • 쿠만이 네덜란드 대표팀을 맡았던 해인 2018년 기준으로 네덜란드 대표팀 경기 들중 징크스 적 우연이 발생한 경기가 세차례나 있다. 바로 5년 사이에 굵직한 대회에서 우승한 팀을 하나씩 클린시트로 격파했다는 것이다. 연도순으로 나열하자면 2014 브라질 월드컵 우승팀 독일UEFA 네이션스 리그/2018-19 시즌에서 3-0으로 격파[27], UEFA 유로 2016 우승팀 포르투갈을 2018년 3월 27일 A매치 친선경기에서 3-0으로 격파, 그리고 2018 러시아 월드컵 우승팀 프랑스를 2-0으로 깔끔하게 승리한 것이다.[28]
  • 2020년 8월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팀과 2년 계약을 했지만 바르토메우 회장이 낙점한 인사라서 차기 회장으로 가능성이 높은 마리아 폰트는 1년 후 쿠만을 경질하고 사비 에르난데스요르디 크루이프를 데려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2021년 3월, 이전에 회장직을 역임했던 주안 라포르타가 두번째 임기를 맞게 되었고 라포르타는 쿠만 체제를 유지하고 카를레스 푸욜, 마테우 알레마니를 보드진에 넣은 뒤 라 마시아에 더 집중하겠다는 입장이다.
  • 전 에버튼 선수였던 우마르 니아세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의 눈 밖에 난 선수는 잔인하게 대했다고 증언했다. 자신의 등번호를 다른 선수에게 줘버리고 1군 선수단의 식당 출입도 제한했다고 한다. # 이는 바르셀로나 시절에도 이어져서 리키 푸치미랄렘 피아니치가 이런 취급을 받았다. 이후 피아니치는 한동안 쿠만 저격수가 되는데..
  • 아이러니하게도 바르셀로나 선수, 코치, 감독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다.
파일:GOAL_Defender.jpg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수비수들 중 2위에 이름을 올렸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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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19881992199620002004
2008201220162020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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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르브뤼헌 · 2 헤이르트라위다 · 3 더리흐트 · 4 버질 · 5 아케 · 6 더프레이 · 7 사비 · 8 바이날둠 · 9 베호르스트
10 멤피스 · 11 각포 · 12 프림퐁 · 13 베일로 · 14 라인더르스 · 15 판더펜 · 16 페이르만 · 17 블린트 · 18 말런
19 브로비 · 20 마트센 · 21 지르크지 · 22 뒴프리스 · 23 플레컨 · 24 스하우턴 · 25 베르흐베인 · 26 흐라벤베르흐
파일:UEFA EURO NED.png 로날드 쿠만
파일:UEFA EURO NED.png 에르빈 쿠만 · 파일:UEFA EURO NED.png 드와이트 로더웨저스 · 파일:UEFA EURO NED.png 패트릭 로드베이크

[1] 네덜란드어 표기법으로는 '로날트 쿠만(/roːnɑlt ˈkumɑn/)'.[2] 주로 3백에서의 리베로 역할이며 전술에 따라 가끔 수비형 미드필더나 중앙 미드필더로 뛴 경우도 있었다.[3] 2021-22 시즌 도중 경질[4] 쿠만은 SL 벤피카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첫번째 키커로 나와 성공시켰다.[5] 즉, 수비수 포지션으로 1년에 무려 평균 17골을 넣은 셈이다.[6] 심지어 14골 중에서 유로 1988 4강 서독전에서 1골, 1990 이탈리아 월드컵 16강 서독전에서 1골이 포함되어 있어 수비수가 메이저 대회 본선 무대에서 두 골을 기록하였다. 후의 같은 골 넣는 수비수로 잘 알려진 로랑 블랑의 A매치 97경기 16골 중에서 메이저 대회 본선 골이 유로 1996 1골, 1998 프랑스 월드컵 1골, 유로 2000 1골로 통산 3골이라는 것과 보통 득점력이 좋은 수비수들도 메이저 대회 본선 무대에서 1골 넣기도 힘들다는 것을 감안하면 쿠만의 A매치 득점력과 순도도 굉장히 높은 편이다.[7] 클럽 239골 / 국가대표 14골[8] 윈턴 루퍼와 공동 득점왕[9] 이 번호는 과르디올라 이후 파트리크 안데르손, 라파엘 마르케스, 세스크 파브레가스, 이반 라키티치, 로날드 아라우호로 이어진다.[10] 전년도에 잘 이끈 것도 있고 시즌 중간에 그만뒀기에 후임도 확실하게 구하는 등(발렌시아에서는 보로 곤잘레스 단장이 임시 감독을 섰다) 발렌시아 시절만큼의 임팩트는 적지만, 그가 벌인 실책은 발렌시아 시절과 매우 흡사하다.[11] 참고로 당시 발렌시아는 알벨다와 카니사레스 등의 노장 선수들이 주축이 된 선수파와 당시 팀의 단장이었던 아메데오 카르보니, 당시 팀의 회장이었던 후안 솔레르 등의 권력 다툼이 치열했고, 그 결과 평소 카르보니, 솔레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키케 산체스 플로레스가 사임하기에 이른다.[12] 비록 당시 카니사레스는 38세의 노장이었으나 여전히 리그 톱클래스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팀의 상징적인 선수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쿠만에 대한 비난이 더욱 거셌다. 이 후에 에드윈 반 데 사르가 40살이 넘어서도 그 기량을 그대로 유지한 것, 그리고 최근에는 잔루이지 부폰이 40살이 넘어서도 기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봐선 골키퍼에게 38이란 나이는 절대로 무작정 퇴물 취급할 나이는 아니다.[13] 특히 호아킨의 경우에는 원톱 기용까지 시키는 기형적인 전술을 펼쳤다.[14] 당연히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15] 여담으로 한국에서도 과거 조광래가 스트라이커인 정조국을 풀백으로 기용했다 실패했던 적이 있다.[16] 여담으로 당시 발렌시아는 신예 다비드 실바, 후안 마타 등을 발굴해내어 장미빛 미래가 예견되었던 만큼 이러한 부진이 더욱 뼈아팠다.[17] 참고로 당시 발렌시아와 마찬가지로 최악의 부진에 시달렸던 바르셀로나는 결국 무관에 그쳤기 때문에 일부 팬들은 바르셀로나보다 더 좋은 시즌을 보냈다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18] 다만 힐데브란트를 발렌시아로 데려온 장본인은 당시 단장이었던 카르보니였다.[19] 비록 바네가가 당시 주목받는 유망주이긴 했으나, 다비드 알벨다와 루벤 바라하, 미겔 앙헬 앙굴로로 이어지는 중원 라인에서 꾸준한 출전을 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알벨다와 미겔 앙굴로가 벤치로 밀려 주전으로 나올 수 있었다.[20] 펩은 라리가, 분데스리가에서 팀을 이끌면서 한번도 리그에서 4점차 이상의 대패를 당해본 적이 없다. 챔스로 범위를 넓히면 레알과의 4강전 홈 경기에서 0-4로 발린 적이 있긴 하다.[21]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 상성이 좋지 않다.[22] 홈에서 니코 슐츠의 결승골로 2-3으로 패하더니 원정에서는 조르지니오 바이날둠의 활약으로 4-2로 이겼다.[23] 물론 사우스햄튼 시절에는 사디오 마네를 잘 활용했었다.[24] 이 쪽도 쿠만보다 판할과 갈등이 더 심했다.[25] 사실 다른 빅클럽에서도 전술 문제 및 감독의 판단으로 본 포지션이 아닌 다소 생소한 포지션에 기용되어 본의 아니게 그 포지션에 정착하는 선수들도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본래 라이트 윙이였으나 마우로 카모라네시에게 밀려 왼쪽 풀백, 이후 조나단 제비나의 부상으로 인해 그 자리를 메꾸려고 오른쪽 풀백으로 포지션 변경에 성공해 레프트백, 라이트백 올타임 레전드로 꼽히는 잔루카 잠브로타나 전술상의 문제로 왼쪽 윙에서 뛴 파벨 네드베드가 있다. 뭐 쿠만의 포지션 변경이 성공했다면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었겠으나... 결과가 참담하니 까임+개그소재로 쓰이는게 현실. 쿠만을 까는 대표적인 레퍼토리가 바로 아리즈멘디 왼쪽 풀백 + 호아킨 왼쪽 윙 + 원톱이다.[26] Not For Sale. "선수를 절대 팔지 않는다"라고 입장을 언론에 확실히 공표하는 행동[27] UEFA 네이션스 리그/2018-19 시즌/리그 A[28] UEFA 네이션스 리그/2018-19 시즌/리그 A[29] 90년대보단 80년대 선수로 보는게 더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