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0 15:57:01

레프 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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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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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3년 수상 당시 국명[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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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前 축구 선수
파일:레프 야신.jpg
<colbgcolor=#eee><colcolor=#000,#e5e5e5> 이름 레프 야신
Лев Яшин|Lev Yashin
본명 레프 이바노비치 야신
Лев Иванович Яшин
Lev Ivanovich Yashin
출생 1929년 10월 22일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사망 1990년 3월 20일 (향년 60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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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9㎝|체중 82㎏[1]
직업 축구 선수 (골키퍼 / 은퇴)
소속 <colbgcolor=#eee> 선수 디나모 모스크바 (1949~1971)
국가대표 74경기[2] (소련 / 1954~1970)
통산 클린시트 204회[3]

1. 개요2. 유년기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3.2. 국가대표 경력
4. 은퇴 이후5. 플레이 스타일6. 평가7. 기록
7.1. 대회 기록7.2. 개인 수상7.3. 수훈7.4. 개인 기록
8. 야신에 대한 언사9. 어록10. 여담11. 관련 문서

1. 개요


소련의 전 축구 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별명은 '검은 거미(Чёрный Паук)'.

디나모 모스크바원클럽맨으로, 소련 대표팀에서 유로 초대 우승1956 멜버른 올림픽 금메달을 이끌었다. 또한, 현재까지 골키퍼 포지션에서 유일한 발롱도르 수상자이며, 발롱도르 유효 표 획득만 10차례[4]나 된다.

2. 유년기

1929년 소련 모스크바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독소전쟁이 한창이던 12세 무렵 군수공장에 다니면서 축구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골키퍼를 맡게 된 이유는 키가 컸기 때문이다.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1949년 20세의 나이로 입단했는데 당시 디나모 모스크바에는 '호랑이(Тигр)'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뛰어난 골키퍼 알렉세이 호미치(Алексей Хомич)가 있었기 때문에 처음 3년 동안은 후보 선수에 머물렀다. 그는 부업으로 같은 디나모 모스크바의 아이스하키 팀 골키퍼를 맡기도 했는데, 이때 그의 팀은 소련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53년 호미치가 부상을 당하면서 야신에게 기회가 생겼다. 야신은 데뷔전에서 매우 실망스러운 경기력 때문에 고위급 관계자에게 썩 꺼지라는 독설을 듣기도 했지만 금방 폼을 끌어올리며 주전 골키퍼 자리를 굳혔다. 이후 디나모 모스크바에서 326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소비에트 톱 리그 우승 5회, 소비에트컵 우승 3회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특히 심각한 부진에서 재기하여 발롱도르를 수상하던 1963년에는 소비에트 톱 리그에서 27경기 동안 불과 6실점 밖에 하지 않는 우주방어를 펼쳤다.

41세가 되던 1971년, 디나모 모스크바 vs 유럽 올스타 팀의 친선 경기를 끝으로 은퇴했다. 당시 이 경기에는 소련이 폐쇄적인 공산권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10만 명이 운집했으며 바비 찰튼, 에우제비우, 게르트 뮐러 등 현재까지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축구계의 전설적인 인물들도 참여해 야신의 은퇴를 축하해주었다.

3.2. 국가대표 경력

야신은 1954년에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당시 소련은 이고르 네토 (1930~1999), 발렌틴 이바노프 (1934~2011), 발레리 보로닌 (1939~1984), 알베르트 셰스테르네프 (1941~1994) 등 월드 클래스 선수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는데 1956 멜버른 올림픽에서 야신은 소련이 금메달을 따는 데 큰 공헌을 한다. 현재 올림픽 축구가 U-23 팀이 출전하며 그 위상이 FIFA 월드컵에 한참 못 미치는 것과는 달리 당시에는 국가대표팀이 출전해 현재보다 위상이 매우 높았다.

이후 1958 스웨덴 월드컵에도 출전했는데 잉글랜드와는 2:2로 비기고,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었으며 펠레브라질을 만났는데 바바에게 2골을 허용해 패했다. 이후 4조 순위 결정전에서 잉글랜드를 1:0으로 꺾고 8강에 진출했으나 닐스 리드홀름, 군나르 그렌이 이끄는 스웨덴에게 2:0으로 패해 탈락하고 만다.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0에서 야신은 대활약을 하는데 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를 연파하며 소련의 우승을 이끌어 소련을 유로 초대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이 대회에서 야신은 당연히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5]

1962 칠레 월드컵에서는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 18분 만에 3골[6]을 실점했는데 골키퍼라면 당연히 막아야 할 평범한 슛을 막지 못해 실점을 하는 등[7] 최악의 모습을 보이며 당시 손꼽히는 강호였던 소련이 8강에서 탈락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야신은 이때의 심각한 슬럼프로 축구 선수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지만 심기일전하여 다시 뛰어난 활약을 펼쳐서 1963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그 이후로 은퇴할 때까지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서 군림했다. 사실 칠레 월드컵 때는 대회 기간 동안 두 차례나 뇌진탕을 겪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야 알려졌다.

1963년에 부활한 야신은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에서 다시 한번 소련을 유로 결승으로 이끄나 개최국 스페인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치게 되었지만 이 대회에서도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이후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이때 8강 돌풍을 일으키는 북한을 상대로 3:0 승리, 이탈리아에게 1:0으로 승리, 칠레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고 헝가리를 2:1로 격파하며 4강까지 이끄나 결국 우베 젤러가 이끄는 서독과의 경기에서 헬무트 할러와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골을 내줘 1:2로 패배해 월드컵 결승 진출은 좌절되었다. 이어진 3·4위전에서는 흑표범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포르투갈과 대결하는데 전반 12분에 에우제비우에게 페널티킥 선제골을 내주고 이후 에두아르두 말로페예프가 동점골을 넣었으나 후반 89분에 통한의 결승골을 내줘 최종 4위로 마치게 되었다.

1970 멕시코 월드컵에도 국가대표로 뽑히긴 했으나 후보에 그치면서 출전은 하지 못했고 이후 국가대표를 은퇴했다.

4. 은퇴 이후

이후 자신이 활동하던 디나모 모스크바에서 코치로 활동했다가 1984년까지 심장마비뇌졸중을 겪고 선수 시절 입었던 무릎 부상이 악화되어 1986년도에 한쪽 다리를 절단했다.[8] 말년에는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199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조국이었던 소련이 바로 다음 해인 1991년 해체되면서 야신은 소련 시절 러시아 축구의 영광 그 자체로 남게 되었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42-17253725.jpg
사망한 해(1990년)에 남긴 사진
이후 1994 미국 월드컵부터 그를 기려 대회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골키퍼에게 야신상[9]을 수여하게 되었다.

이후 2019년부터 프랑스 풋볼에서 한 해 최고의 골키퍼에게 트로페 야신을 수여하며 다시 한번 골키퍼라는 포지션에서 그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5. 플레이 스타일


189cm의 신장[10]과 힘, 그리고 엄청난 반사신경과 동체시력을 바탕으로 페널티킥, 다이빙, 땅볼, 볼 경합 등의 상황에서 높은 성공 확률을 보였다. 흔히 실력 있는 골키퍼에게 '거미손' 내지는 '문어발' 등의 별명이 붙곤 하는데, 이러한 별명들의 시초가 바로 레프 야신이다.

현역 시절에 차림새도 검은 천 모자, 검은 옷, 검은 장갑 등 검정 의상을 착용하고 나와서 공격수들에게 위압감을 주고, 들어갈 법한 슈팅도 막아내는 신들린 모습을 보여주며 명성을 떨쳤다. 웬만한 공은 그 자리에 서서 팔만 뻗어 잡아내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11] 이렇게 얻은 별명이 흑거미 혹은 검은 문어. 이 때문에 이후 이름을 좀 날린 골키퍼들은 검은 옷을 입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축구 골대의 좌우 상단 구석 위치는 일명 '야신 존(Yashin Zone)'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다른 골키퍼들은 골대의 사각지대를 못 막았지만, 오직 레프 야신만 잘 막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야신이 아닌 이상 못 막는 곳'이라는 의미다.

야신은 A매치 통산 74경기 70실점(경기당 평균 0.95실점)을 기록했다. 21세기의 최고의 골키퍼들인 잔루이지 부폰은 176경기 146실점(경기당 평균 0.83실점)을, 이케르 카시야스는 167경기 93실점(경기당 평균 0.56실점), 마누엘 노이어는 124경기 118실점(경기당 평균 0.95실점)을 기록 중이지만 이는 같이 뛰었던 수비수들의 기량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12]
파일:fifa-gols.png

당시의 축구는 지금보다 경기당 평균 실점률이 2배 가량 높았다. 그 이유는 당시 포메이션에는 현대의 전술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WM 포메이션으로 일컬어지는 3-2-5 형태의 포메이션이 가장 널리 사용됐으며, 이는 근대 축구 태동기에 쓰이던 2-3-5 같은 공격 일변도의 포메이션보다는 낫지만, 현대 축구만큼 정교한 수비를 구사할 수 있는 전술은 아니었다. 쉽게 말하자면 당시 축구는 우리 팀이나 상대 팀이나 공격 위주의 축구를 구사했으며, 많이 넣고 많이 실점하는 메타 속에서 상대보다 더 많이 득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게 일반적인 방향성이었다. 야신의 실점률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평가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심각한 부진에서 재기하여 발롱도르를 수상하던 1963년에는 소련 리그에서 27경기 동안 불과 6실점(!)밖에 하지 않는 우주방어를 펼쳤다. 야신이 출전하지 않은 나머지 11경기에서의 실점 수가 8실점으로 오히려 더 많다!

발롱도르 투표에서 유효 표를 받은 횟수도 골키퍼로서는 역대 최다인 10회나 된다.[13]
파일:852be122dac0e68722f2f64666067496.jpg

소비에트 톱 리그: 326경기 253실점 실점률 0.77[14]
소비에트컵: 32경기 24실점 실점률 0.75
국제 경기: 103경기 85실점 실점률 0.82
A매치: 79경기 73실점 실점률 0.92
(1956 올림픽: 6경기 3실점 / 유로 1960: 5경기 2실점)
파일:852be122dac0e68722f2f64666067496.jpg

소비에트 톱 리그: 326경기 클린시트 160회
소비에트컵: 32경기 클린시트 18회
A매치: 79경기 클린시트 28회
UEFA컵: 출전 X
스파르타키아다[15]: 2경기 클린시트 0회
총 439경기 클린시트 206회

다만 해당 기록은 타 사이트와 차이가 날 수 있다.

FIFA 월드컵에 총 4번 출전[16]하여 13경기 중 4경기를 무실점[17]으로 막아냈으며, 트랜스퍼마켓 기준 전체 출장 경기 432경기 348실점 204클린시트[18]를 기록했다.[19]
파일:야신 던지기.gif

레프 야신은 손이 큰 것과 동시에 힘도 매우 좋았는데, 몸도 근육질의 탄탄한 체형에다 어깨힘과 팔힘도 매우 강하여 허리를 제대로 쓰지 않아도 충분히 공을 센터 서클까지 던질 수가 있었다. 거기에 야신은 현대의 스위퍼 키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 시대에 드물게 수비진을 모두 통솔하고 자신이 직접 에어리어 밖으로 나가서 공을 쳐내거나 좋은 킥력으로 팀의 공격 방향을 정해주는 '스위퍼 키퍼'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오늘날 바이에른 뮌헨의 레전드 골키퍼로 유명한 마누엘 노이어가 자주 선보였던 기술을 레프 야신이 먼저 보여준 셈이다.[20][21] 또 커맨드 능력도 뛰어난데, 그의 활약상을 담은 영상을 보면 필드 수비수들에게 쉴새 없이 소리를 지르며 지시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역시 당대 골키퍼들은 하지 않았던 선구적인 플레이였다.[22]

이런 모든 기록들을 제치고 그가 과연 인간인지에 대해 의심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통계는 바로 페널티킥 선방률이다. 정확한 수치는 불명이지만 현역 시절 총 150회 이상의 페널티킥을 선방했다고 전해진다.[23] 마찬가지로 선방 횟수와 선방률 역시 불명이지만 30~60% 사이의 선방률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정확한 수치는 불명이지만 야신이 축구 역사상 페널티킥에 가장 강했던 골키퍼였던 것은 사실이다.[24]

현재보다 수비도 과격하고 쉴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 위주의 축구가 유행하던 시대였던지라 골키퍼가 활약하기에는 너무 까다로운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인간이 맞는지 의심하게 하는 선방을 수없이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야신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야신은 사기적인 동체 시력과 선방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뛰어난 근력으로 손발 가릴 것 없이 높은 패스 성공률로 팀의 공격에 가담할 정도로 영향력이 지대하기까지 했던, 현존했던 모든 골키퍼들 중 가장 정점에 도달한 인물로 설명할 수 있다.

6. 평가

디나모 모스크바 원클럽맨으로 현재까지도 유일한 골키퍼 포지션의 발롱도르 수상자[25][26]이며, 이견이 없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키퍼이다.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UEFA 유로 우승을 이끌며 토너먼트의 팀에 뽑혔고 이는 러시아로 변경된 현재까지도 유일한 유로 우승이다. 또한 바로 다음 대회인 유로 1964에서는 준우승을 하였으나 두 대회 연속 토너먼트의 팀에 뽑혔고 1966 월드컵 4강, 5회의 소비에트 톱 리그 우승과 3회의 소비에트컵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이러한 커리어와 더불어 페널티킥 선방 150회 이상[27]으로 대표되는 압도적 선방 능력은 물론 골키퍼의 후방 빌드업이라는 플레이 스타일로 좋은 기량을 선보이는 골키퍼에게 야신 모드라고 하는 하나의 유행어를 낳았으며 FIFA 월드컵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펼친 골키퍼에게 수여하는 상을 야신상, 발롱도르 주관사인 프랑스 풋볼에서 한 해 동안 최고의 활약을 펼친 골키퍼에게 수여하는 상인 트로페 야신을 만들었다.

야신이 축구사에서 부정할 수 없는 역대 최고의 골키퍼인 이유는 스위퍼 키퍼의 역사를 논할 때 그 시작점에 있었던 선수로 평가받는 점과 축구 역사상 유일하게 '골키퍼를 중심'으로 팀을 개편한 사례를 가지고 있는 선수라는 점이며 물론 야신이 뛸때는 이고르 네토나 알베르트 셰스테르뇨프같이 훌륭한 선수들이 있긴 했지만 팀내에서 '1옵션'이 될 수 있는 선수는 단연 야신이었고 팀 전술의 핵도 야신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야신은 타 국가에 비해 비교적 약한 전력으로도 압도적인 선방 능력에 기반하여 팀을 우승시켰고 다양한 전술적 판단력과 역대 최고 수준의 조율 능력으로 팀 전체를 장악하였다. 특히, 발롱도르를 수상한 시절엔 27경기 6실점이라는 비상식적인 기록으로 캐리하며 소비에트 톱 리그를 지배하였다.

시간의 흐름이 꽤 지난 현재까지도 '골키퍼' 하면 압도적으로 언급되는 이름은 역시 야신이다. 그는 부동의 1위이며 그를 뛰어넘을 선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대에 고든 뱅크스, 후대에 디노 조프, 잔루이지 부폰, 이케르 카시야스, 마누엘 노이어 등 축구 역사에 남을 위대한 골키퍼들이 나타났지만 이들 모두 야신처럼 골키퍼 개인을 중심으로 팀을 개편했다던가, 단순히 골키퍼의 기량 하나만으로 팀의 우승을 이끈 선수라고 하기에는 비교적 그 캐리력이 떨어지는 편이기 때문이다.[28] 야신은 골키퍼 개인이 팀의 1옵션이 된 상태로 리그, 유로, 올림픽에서 캐리해 우승을 이끈 선수로 월드컵에서도 뛰어난 선방 능력으로 4강 진출에 기여했다. 또한 골키퍼 라는 제한적인 포지션을 넘어 본인이 1옵션으로서 팀을 지휘했기 때문에 발롱도르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며 팀내에서 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야신과 경쟁할 수 있는 선수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야신은 골키퍼라는 제한적인 포지션으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여 클럽과 국가대표팀를 우승시킨 역사상 유일한 사례의 선수로, 야신 이후로는 그 누구도 야신처럼 골키퍼를 중심으로한 전술 속에서 우승을 이끌지도 못했고 클럽, 국대내에서도 완벽한 1옵션이 되지는 못하였다. 야신은 골키퍼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시킨 선수로 야신같이 선방 면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는 골키퍼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올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29] 어떤 선수가 나오던 야신만큼 선방 능력도 뛰어나지 않은데 다재다능하지도 못하거나 비슷하게 플레이는 하지만 전반적인 능력이 더 뛰어나지는 못해서 야신의 '하위호환'이라는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이는 야신이 수비력과 공격력 둘다 완벽하게 가진 스위퍼 키퍼일 뿐 아니라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방 능력에 전술적인 역량까지도 갖췄던 선수였기 때문으로 기록에 있어서는 마치 '벽'처럼 느껴지는 선수이기도 하다.

7. 기록

7.1. 대회 기록

7.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63[30]
  • 발롱도르 드림팀[31]: 2020
  • FIFA 월드컵 올타임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토너먼트의 팀: 1960, 1964
  • 소련 올해의 골키퍼: 1960, 1963, 1966
  • 유럽 축구 오스카상: 1964
  • 월드 사커 월드 XI: 1963, 1964, 1966, 1967
  • 월드 사커 역대 XI: 2013
  • FUWO 유럽 올해의 팀: 1965, 1966
  • FIFA XI: 1963, 1968
  • FIFA 공로훈장: 1988
  • FIFA 세기의 골키퍼: 1998
  • UEFA 주빌리 어워드: 2003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유럽팀: 1998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세기의 골키퍼 - 세계
  • IFFHS 세기의 골키퍼 - 유럽
  • IFFHS 세기의 월드팀 (1901~2000)
  • IFFHS 세기의 유럽팀 (1901~2000)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유럽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러시아 드림팀: 2022
  • 월드 스포츠 1950년~1970년 월드 베스트 XI: 1970

7.3. 수훈

7.4. 개인 기록[32]

  • 골키퍼 최초이자 유일한 발롱도르 수상.
  • 골키퍼 최다 발롱도르 10위권 진입(5회).
  • 골키퍼 최다 발롱도르 유효표 획득(10회).
  • 프로 통산 432경기 348실점 204클린시트(경기당 평균 0.81실점 0.47클린시트)
  • 국가대표 74경기 70실점 26클린시트(경기당 평균 0.95실점 0.35클린시트)

8. 야신에 대한 언사

직접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진 못했으나, 이 선수는 꼭 언급해야겠다. 야신은 역대 최고의 골키퍼 명단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손님이다. 나는 영상을 통해 그가 곡예사처럼 폴짝 뛰어 한 손으로 환상적인 세이브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야신은 아이스하키 골키퍼도 했다고 들었다. 그는 유일한 골키퍼 발롱도르 수상자이다. 검은 거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그는 존재 그 자체로 상대 팀에게 위협이었다. 킥오프 전부터 상대 선수들에게 심리적 우위를 점하는 것은 정말 큰 이점이다.
이케르 카시야스
야신은 나보다 축구를 잘한다.
산드로 마촐라
내가 유일하게 무서워했던 골키퍼.
펠레

9. 어록

세상에 그 어느 골키퍼가 실점하는 것이 괴롭지 않을까? 골키퍼라면 실점하는 것이 괴로워야 한다! 만약 실점하는 것이 괴롭지 않은 골키퍼가 있다면, 그가 과거에 어떤 존재였든간에 그에게는 아무런 미래가 없다.
사각지대는 어떤 골키퍼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막을 수 있다.
우주를 나는 한 비행사를 보는 즐거움만이 페널티 킥을 막을 때의 기쁨에 비할 수 있는 기분이다.
난 세계 최고의 골키퍼가 아니다. 그건 블라디미르 베아라가 들어야 할 말이다.
세계에 월드클래스 골키퍼는 단 두 명이 있다. 하나는 나고, 하나는 맨체스터에 있는 독일인 청년이다.

10. 여담

  • 축구 황제 펠레와 1:1 페널티킥 승부를 벌인 적이 있었다. 1967년 브라질 축구 연맹이 주최한 산투스디나모 모스크바의 친선 경기 후 승부차기 이벤트가 열렸는데, 양 팀을 합쳐 키커 5명과 골키퍼 5명을 뽑아서 키커 한 명이 한 골키퍼를 상대로 10개씩, 모두 50개의 슛을 해 가장 많은 골을 넣은 키커와 가장 많은 슛을 막아낸 골키퍼를 뽑는 방식이었다. 첫 골은 야신이 펠레의 슛을 막아냈지만, 나머지 9골은 펠레가 성공시켰다. 펠레는 50개 중 48개의 슛을 성공시켜 1위를 차지했다. 야신도 50개 중 25개의 슛을 막아내어 골키퍼 부문 1위에 올랐다.[33]
  • 그의 이름을 딴 상이 월드컵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골키퍼에게 주어지고, 야신이 세상을 떠난 지 28년이 지나서 러시아월드컵을 개최하게 되었는데 월드컵 공식 포스터에 있는 검은 옷을 입은 골키퍼는 레프 야신이다. FIFA 공식 사이트에 레프 야신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것이라고 나와 있다. 지구 위 모든 축구 대회 중 가장 권위있고 선수들이 나가고 싶어하는 월드컵 대회의 공식 포스터에 등장한다는 것은 야신이 러시아 축구계에, 또 세계 축구계에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보여준다.
    파일: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포스터.jpg
  • 경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보드카를 마셨다고 한다. 지금이야 프로 선수로서 몸 관리를 위해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선수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이때는 선수들 개개인이 건강에 별로 신경쓰지도 않았고 프로 의식에 몸 관리라는 범주가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 골키퍼로서의 중압감이 상당하긴 했겠지만 제 명을 못 채우고 위암으로 사망하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안타까운 점.
  • 간과되기 쉽지만 현역 시절에는 상당한 미남이었다. 게다가 러시아인은 무뚝뚝하다는 편견과는 달리 표정이 있는 편이라, 단체 사진을 보면 필드 플레이어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어도 쉽게 눈에 띄는 경우가 많다.
  •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서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 낚시가 취미였다. 심지어는 1966년 월드컵 출전차 영국에 왔을 때도 낚싯대를 들고 왔다!#
  • 골키퍼 장갑의 사용에 있어서도 선구적이었다. 제대로 된 장갑을 착용하는 골키퍼가 드물던 그 시절에 현재의 골키퍼 장갑과 유사한 온전한 형태의 가죽제 장갑을 상시 착용하고 경기에 임했다.
  • 항상 검은 옷을 입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그가 주로 입은 상의 색은 처럼 새까만 색이 아니라 약간 남색을 띤 검은색이었다고 한다.
  • 플랫 캡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경기 때는 모자를 항상 2개 휴대하고 나가서 하나만 쓰고 하나는 재수 좋으라고 골문 안에 놓아두었다. 하지만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0 우승 행사 이후 잃어버렸으며 다른 모자들은 적응하지 못해 더이상 모자를 쓰지 않았다
  • 소련의 대표적인 선수였지만 대한민국에도 기사가 많았다. 반공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당시 대한민국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인 일.
  • 생전에 소련 공산당의 당원이었다.# # 소련 같은 공산권 국가의 유명인들은 국위선양을 한 유공자라면 누구나 공산당원 자격을 받았기 때문에,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다.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인 영웅에서 진시황 역할을 맡은 중국 배우인 진도명도 전국정치협상회의의 의원직을 겸하고 있으며, 공산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소련 시절의 흔적이 강하게 남은 현대 러시아 연방에서도 러시아의 국민 밴드인 류베의 보컬인 니콜라이 라스토르구예프나, 전설적인 피겨 스케이팅 선수인 예브게니 플루셴코도 러시아 연방의 공훈 배우로 선정되어 잠시 하원 의원을 지낸 바 있다. 야신만 특별한 케이스는 아니다.
  • 페널티킥 기록을 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선방률을 가지고 있는데 강점일것 같지만 사실 야신은 페널티킥이 강점은 아니었다고 한다. 매우 잘 찬 페널티킥은 본인도 못 막는다고 했고, 오히려 심리전을 이용했다고 한다.
  • 러시아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도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에서는 2020년 9월에 개봉했다.
  • 코로나로 취소된 2020 발롱도르 대신 프랑스 풋볼에서 선정한 올타임 발롱도르 드림팀에 예상대로(?) 주전 골키퍼로 선정되었다. 선정 전에 발표한 후보군의 포지션 배분을 보면 레프 야신, 프란츠 베켄바워,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선정은 사실상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파일:70ecd18d4f5b914cf2bff03fe78179cbb436fc57889396ed37751d54f40a6877544608d4164e50ad53d3aface2d8ede8895aa18.jpg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골키퍼 5인을 선정했는데, 1960년대 최고의 골키퍼 1위에 이름을 올렸다.
    파일:골닷컴 시대별 최고의 골키퍼.png

11. 관련 문서


[1] 레프 야신 아카데미 공식 사이트 프로필[2] 출처[3] 전체 출장 경기 432경기 348실점, 클린시트 204회#[4] 1956, 1957, 1958, 1959, 1960, 1961, 1963, 1964, 1965, 1966[5] 이 대회에서 보여준 야신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고든 뱅크스, 유로 1976이보 빅토르, 유로 1992페테르 슈마이켈, 2002 한일 월드컵올리버 칸, 2006 독일 월드컵잔루이지 부폰, 2014 브라질 월드컵마누엘 노이어, 유로 2020잔루이지 돈나룸마와 함께 단일 메이저 대회 역대 최고의 골키퍼 퍼포먼스로 평가받는다.[6] 심지어 이 3골 중 1골은 지금까지도 월드컵 역사상 유일한 코너킥 골이다.#[7] 다만 이건 수비수의 실책이 컸다.[8] 야신의 선수 시절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오른쪽 다리에 항상 붕대를 감고 있다. 다만 다리 절단의 직접적인 원인은 혈관 문제였다.[9] 이후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상의 이름이 월드컵 공식 스폰서 아디다스의 명칭을 빌려 아디다스 골든글러브로 공식 변경되었다. 이때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축구 선수의 이름을 딴 상을 돈으로 갈아버렸다는 비판이 많았다.[10] 현대에도 189cm는 매우 큰 키인데, 그 시절에는 거의 2m급 거인이나 다름없었다. 야신과 같이 1920년대에 태어난 소련 남성들의 평균키는 167cm였다. 현대 러시아 남성 평균키가 176cm니 야신이 만약 현대 사람이라면 키 198cm의 골키퍼인 것이나 다름없다.[11] 어느 정도 과장은 있겠으나 꽤나 사실적인 일화로 볼 수 있는게, 야신은 당대 기준으로 압도적인 체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긴 윙스팬으로 말미암아 잡을 수 있는 리치가 길었다. 여기에 골키퍼로서의 위치선정 능력도 훌륭했으니 공을 잡아내기 좋은 위치에 자리했을 것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12] 이탈리아 대표팀 소속의 부폰에게는 파비오 칸나바로, 알레산드로 네스타, 파올로 말디니, 잔루카 잠브로타 등이 있었고 스페인 대표팀 소속의 카시야스에게는 페르난도 이에로, 카를레스 푸욜, 세르히오 라모스, 제라르 피케, 독일 대표팀 소속의 노이어에게는 필립 람, 마츠 후멜스, 제롬 보아텡, 요주아 키미히(후에 수미로 전향) 등의 월드클래스 수비수들이 있었다. 야신과 함께 뛰던 수비수들은 부폰, 카시야스, 노이어와 함께 뛰던 수비수들에 비해선 한 수 아래였다.[13] 2위는 총 9회 유효 표를 받은 잔루이지 부폰이며, 3위는 7회 유효 표를 받은 소련의 리나트 다사예프다.[14] 1963년 발롱도르 수상 당시 리그 출장 27경기 6실점 실점률 0.22 / 소비에트컵, 국제 경기, A매치 포함하면 1963년 한정 48경기 32클린시트 21실점 실점률 0.43.[15] 소련 내부에서 열렸던 스포츠 대회.[16] 1958, 1962, 1966, 1970(1970년 대회에서는 후보 골키퍼로 대회에 참가)[17] 다만 13경기 18실점으로 심점률이 높은 것이 흠이다.[18] 클럽: 358경기 278실점 178클린시트, 국대: 74경기 70실점 26클린시트.[19] 넷상에서는 야신이 프로 통산 812경기 470클린시트를 기록했다는 근거없는 루머가 떠돌지만 야신의 프로 통산 출장 경기 수부터 500경기가 채 안된다.[20] 출처: 베스트 일레븐[21] 그렇다고 해서 최초의 스위퍼 키퍼는 아니다. 야신 이전에 스위퍼 키퍼의 모습을 보여준 매직 마자르줄러 그로시치가 있었다.[22] 다만, 이런 관여가 당시 선수들이나 관중들에게 좋게 여겨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는 야신의 성량이 너무 엄청나 귀가 아플 정도였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그에게 수다쟁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경기를 보러 온 야신의 아내조차도 경기 후에 "그만 좀 소리쳐요!"라고 바가지를 긁었다고 한다.[23] 그러나 이 기록 역시 신빙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야신이 정확히 몇 개의 페널티킥을 막았는지부터 사이트마다 표기하는 수치가 다르며, 야신의 모든 페널티킥 선방 장면을 모아놓은 영상이나 공식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프로 통산 432경기에서 150회가 넘는 페널티킥을 선방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게 사실이다. 설령 선방률을 50%로 잡는다고 해도 432경기에서 수비진이 무려 300회의 페널티킥을 허용했다는 애기가 되는데 이는 굉장히 비현실적인 수치다. 더구나 야신이 현역으로 뛰었던 시절에는 옐로카드, 레드카드, 선수 교체 제도가 아예 마련되어 있지 않은, 반칙에 대해 엄청 관대한 시대였기 때문에 더욱더 신빙성이 떨어진다.[24] 여담으로 21세기 페널티킥 최다 선방을 기록한 골키퍼는 의외로 사미르 한다노비치이다.#[25] 이것이 가지는 상징성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1956 올림픽과 유로 1960에서 우승했을 때는 고작 5위에 그쳐 발롱도르와 거리가 멀었지만 순수하게 리그 활약상만으로 팀을 우승시키고 발롱도르까지 수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 대회와 유럽 클럽 대항전 활약 없이 순수 리그 퍼포먼스만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했기에 이미 여기서부터 타 골키퍼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셈이다.[26] 물론 1963년 런던에서 열린 잉글랜드 올스타와 세계 올스타간의 친선 경기에서 전반 45분만 뛰고 무려 10회의 세이브를 기록하며 유럽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부분도 발롱도르 수상에 크게 작용하긴 했다. 비슷한 예로는 마이클 오언이 독일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올리버 칸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한 것이 발롱도르 수상의 결정타가 된 사례가 있다.[27] 상단 문단에 설명되어 있듯이 이 수치는 정확한 기록이 아니다.[28] 물론 어디까지나 야신과 비교했기 때문이지 자체적인 능력만으로 따진다면 전체 축구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선방 능력을 지닌 골키퍼들이다.[29] 그나마 여기에 근접한 선수는 골키퍼로 전무후무한 월드컵 골든볼을 수상한 2002 월드컵의 올리버 칸 정도나 이름을 내밀 수 있지만 이마저 결승전에서 치명적인 실수로 호나우두에게 2실점을 하며 우승에 실패했다. 더구나 야신은 국제 대회가 아니라 장기 레이스인 리그에서 본인의 하드캐리로 우승을 차지하고 발롱도르까지 수상한 선수다.[30] 수상자 가운데 최초의 골키퍼이며, 그 다음은 아직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디노 조프 · 잔루이지 부폰이 2위, 이보 빅토르 · 올리버 칸 · 마누엘 노이어가 3위까지 기록).[31] GK 1위[32]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만 적는다.[33] 북한에서 발간된 '세계 축구계의 별들'(2001)에서 발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