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6-16 17:32:23

루드 굴리트

오렌지 삼총사
마르코 판바스턴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
루드 굴리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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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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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 굴리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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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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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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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Ballond'or
수상
마르코 판바스턴
2위
루드 굴리트
3위
프랑크 레이카르트
1988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마르코 판바스턴 루드 굴리트 디에고 마라도나
1989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마르코 판바스턴 루드 굴리트 장 피에르 파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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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er of the Year 1988
수상
마르코 판바스턴
2위
루드 굴리트
3위
프랑크 레이카르트
Player of the Year 1993
수상
로베르토 바조
2위
데니스 베르캄프
3위
루드 굴리트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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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축구감독
파일:굴리트_2020.png
이름 뤼트 휠릿
Ruud Gullit[1]
본명 뤼디 딜 휠릿
Rudi Dil Gullit
출생 1962년 9월 1일 ([age(1962-09-01)]세)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암스테르담
국적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 파일:수리남 국기.svg 수리남
신체 191cm | 체중 99kg
직업 축구선수 (올라운더[2]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ASV 메이르보이스 (1967~1975 / 유스)
AFC DWS (1975~1978 / 유스)
HFC 하를럼 II (1978~1979)
HFC 하를럼 (1979~1982)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82~1985)
PSV 에인트호번 (1985~1987)
AC 밀란 (1987~1994)
UC 삼프도리아 (1993~1994 / 임대)
UC 삼프도리아 (1994~1995)
첼시 FC (1995~1998)
감독 첼시 FC (1996~1998)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8~1999)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2004~2005)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2007~2008)
FC 테렉 그로즈니 (2011)
네덜란드 대표팀 (2017~2018 / 수석코치)
국가대표 66경기 17골 (네덜란드 / 1981~1994)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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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발 오른발(양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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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기록
5.1. 대회 기록
5.1.1. 선수5.1.2. 감독
5.2. 개인 수상
6. 여담7. 축구 게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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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네덜란드축구선수 출신 감독이다. 현역 시절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3]. 2017년부터 2018년까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를 맡았다. 네덜란드의 첫 메이저 대회 우승밀란 제너레이션을 이끈 1980년대~199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로 꼽히며, 특히 마르코 판바스턴,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오렌지 삼총사의 일원으로 명성을 떨쳤다. 수리남 출신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소속된 클럽마다 우승을 한다는 이유로 '우승 청부사'[4]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굴리트는 하를럼 소속으로 16세의 나이로 데뷔하여 에레디비시 최연소 데뷔 기록을 다시 썼으며 팀은 강등당했으나 굴리트의 활약으로 다시 승격한다. 1981-82 시즌에는 하를럼을 리그 4위로 올리며 UEFA컵 티켓을 따낸다. 이는 하를럼 역사상 유일한 유럽 대항전 출전이다. 이때의 활약으로 굴리트는 '네덜란드던컨 에드워즈'라는 별명을 얻는다.

세 시즌 동안 91경기 31골을 넣은 굴리트는 페예노르트 로테르담로 이적하여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뛰면서 1982-83 시즌에 리그 우승과 KNVB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인종차별 발언을 듣기도 해서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해 리그 2연패를 이끌고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상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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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전성기인 AC 밀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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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굴리트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마라도나

이후 AC 밀란으로 이적하여 1987-88 시즌 디에고 마라도나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1987년 발롱도르를 수상한다. 특히 판바스턴과 투톱을 이뤄 맹활약하며 세리에 A 우승을 이끌었다.

1988-89 시즌에는 오렌지 삼총사를 결성하여 아리고 사키압박 축구를 토대로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판바스턴과 굴리트가 2골씩 득점하며,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상대로 4:0 대승을 거두었다.

1989-90 시즌에도 SL 벤피카를 격파하고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했지만, 굴리트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기량이 하락했다.

​다음시즌인 1990-91 시즌부터 적용된 새로운 오프사이드 규정으로 인해 사키이즘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수비전술에 변수가 발생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또 유러피언컵 4강에서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를 만나 밀란이 패배한다. 여기서 밀란은 조명이 망가져 재경기를 해야한다고 억지를 부리며 그냥 경기장을 떠나버렸고 이에 UEFA는 1년간 유러피언컵 출전 금지를 내린다. 사키는 이를 마지막으로 밀란을 떠난다. 하지만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부임해 그의 밀란을 잘 계승해내며 다시 전성기를 이끌어낸다. 카펠로 감독 체제에서 1991-92 시즌에 리그 무패 우승과 그 다음 시즌도 우승을 경험하며 리그 2연패. 또 1992-93 시즌에는 유러피언컵에서 준우승하는 등 발군의 활약을 펼친 후 1993년에 밀란을 떠나 UC 삼프도리아에서 뛰었는데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의 밑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잠시 밀란에 복귀했으나 큰 활약은 하지 못했고 첼시에서 선수 겸 감독을 하며 FA컵 우승을 차지한 후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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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리트의 국대 경력을 설명하자면 먼저 네덜란드의 축구가 어떤 위기를 겪고 있었는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분명히 네덜란드는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지도 아래 천재 요한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들이 들고 나온 토탈 풋볼은 축구의 혁명이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나름 영광을 이어 갔지만, 리누스 미헬스가 떠나는 등 영광의 멤버들이 노쇠하고 흩어지면서 침체가 시작된다. 이후 네덜란드는 오렌지 삼총사 등장 이전까지 1970년대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한다.

결국 리누스 미헬스가 다시 대표팀 감독으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세대로 팀을 짜게된다. 당시 밀란 제너레이션으로 유럽을 제패하고 있던 AC 밀란오렌지 삼총사 마르코 판바스턴, 프랑크 레이카르트, 루드 굴리트, 그리고 삼총사 더해서 달타냥이라는 로날드 쿠만까지. 그리고 이 선수들을 조화롭게 묶어줄 수 있는 선수가 최상의 피지컬과 최고의 전술 이해도를 겸비한 굴리트였다.[5] 굴리트는 가장 전술 이해도가 좋은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역사상 이보다 범용성이 좋은 축구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골키퍼와 센터백을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A급 이상으로 뛰는 선수였다. 말 그대로 네덜란드 대표팀의 핵심은 굴리트로 시작해서 굴리트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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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네덜란드의 유로 우승은 바로 1974년 크루이프의 역할을 그대로 이식받은 굴리트의 역할이 가장 컸다. 정확히 네덜란드가 예전의 포스를 되찾은 시작점이 유로 1988이었고, 그 뒤를 이은 대회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이었다. 물론 굴리트의 플레이는 나무랄데가 없었지만, 이때 네덜란드가 16강에서 마주친 상대는 그 대회 우승팀,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가 이끄는 독일이었다.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16강전에서 레이카르트와 루디 푈러가 충돌했고 이 와중에 레이카르트가 루디 푈러에 침을 뱉는 사건이 발생한다.[6] 결국 푈러와 레이카르트 모두 퇴장당했으나, 푈러가 없는 독일과 레이카르트가 없는 네덜란드의 무게감 자체가 달랐다. 적어도 푈러보다 레이카르트가 훨씬 뛰어난 선수였으니…… 그리고 네덜란드는 석연치 않게 16강에서 월드컵을 접어야 했었다.

스웨덴에서 열린 유로 1992에서 네덜란드는 조별예선에서[7] 독일을 3:1로 뭉개버리면서 그대로 복수한다. 바로 레이카르트 본인이 득점을 하면서,[8] 또한 굴리트는 이 대회에서 종횡무진 중원을 탈탈 털어버리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4강전 상대는 브리안 라우드루프페테르 슈마이켈이 버티던 덴마크..... 아쉽게 네덜란드는 승부차기 끝에 패하고 보따리를 싸야 했었다.[9]

하지만 1994년 미국 월드컵에는 불참했다. 이 대회는 네덜란드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 시절이 네덜란드의 드림팀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1994년의 네덜란드는 더더욱 역대급의 전력으로 구축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미헬스 이후 취임한 딕 아드보카트 감독 체제에서 굴리트와 아드보카트의 불화, 판바스턴의 부상이 겹쳐 온전한 전력으로 월드컵에 출전할 수 없었다. 결국 8강에서 맞이한 브라질에 고배를 마시면서, 탈락했고 굴리트는 1994년에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10][11][12]

3. 플레이 스타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올라운더 중 한 명으로 최고의 피지컬과 기술적 완성도를 겸비했는데,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190cm에 88kg의 스펙의 커다란 몸집을 이용한 강력한 몸싸움과 상대 센터백들의 머리가 골반 위치에 올 정도로 폭발적인 점프력과 머리로 때렸음에도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미친 목 근육을 사용한 헤더 능력에, 100m를 10초대에 주파하는 스피드와 화려한 기술을 가졌고 거기에 월드클래스 공격형 미드필더 다운 패싱력에 강력한 발목 힘을 활용하는 슈팅 능력, 축구 지능과 전술 이해도가 매우 뛰어나 모든 포지션을 일류 레벨로 소화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 뛰었다고 평가 받은건 공격형 미드필더. 축복받은 피지컬과 높은 전술 이해도와 화려한 발재간까지 갖추어 당시 디에고 마라도나의 라이벌로 꼽힌 선수 중 한 명이다.

특히 이 전술 이해도는 굴리트의 현역 시절에 가장 두드러졌던 점인데, 그야말로 축복을 받았다고 밖에 표현이 불가한 전술 이해도[13]와 이를 뒷받침해주는 피지컬로 굴리트는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수준급 기량으로 소화할 수 있었다.[14]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냐고 하면, 대표팀 경기를 해야 할 때 마르코 판바스턴이 부상 등으로 결장하게 되면 굴리트가 그 자리를 대신할 정도였다. 판바스턴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당대에 따라올 자가 없는 최고의 공격수였다. 그런 공격수의 빈자리를 트레콰르티스타가 채웠다는 말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윙어에도 재능을 보였으며, 한 칸 아래의 중앙 미드필더로서 출전했을 때 그가 보여주는 경기력과 중원 장악력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이 시대 미드필더로 비교하자면 야야 투레를 예로 드는 게 정확할 것이다. 거의 모든 능력치에서 투레보다 굴리트가 앞선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15]

이렇게 굴리트는 천재적인 전술 이해도와 축구 지능을 가지고 있었고, 이 덕분에 모든 이들은 그가 감독이 된다면 큰 성공을 거두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공식은 굴리트조차 벗어날 수 없는 것이어서, 이후 서술될 감독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단 한 번의 성공 이후 쓰디쓴 실패만을 경험해야 했다.

4.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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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에서 몸담고 있던 1995-96 시즌, 글렌 호들 감독이 잉글랜드 국대 감독으로 발령나는 바람에 갑자기 경질되면서 당시 첼시의 선수였던 굴리트는 선수생활을 유지함과 동시에 첼시의 지휘봉을 잡았다. 1996-97 시즌 그의 지휘력과 경기력은 첼시의 27년 만의 FA컵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1997-98 시즌 도중 1998년 2월 12일 리그 2위와 위너스컵-리그컵 8강에 올라와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단주 켄 베이츠와의 불화 끝에 경질당했다. 너무 많은 자금을 사용해 팀을 재정난에 빠뜨렸다는 이유.[16] 여담으로 제이미 캐러거가 1997년 10월 5일에 자신의 커리어 첫 첼시전을 가졌는데[17] 이때 첼시 선수 한 명이 퇴장당하자 감독 겸 선수였던 굴리트가 워밍업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자켓만 벗고 경기에 들어와서 뛰었다. 캐러거는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를 보고 있었는데 (굴리트가) 정말 굉장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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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8-99 시즌을 앞두고 때마침 케니 달글리시 감독을 경질하고 새 사령탑을 물색중이던 뉴캐슬에서 모셔갔지만, 부진한 성적에 선수단 장악에도 실패하며 급격히 입지를 잃어버렸다. 특히 오랫동안 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한 팀의 주장 롭 리의 등번호 7번을 빼앗고 유스 팀으로 강등시켜 팬들의 많은 원성을 샀다. 첫 시즌 리그 13위를 기록한 굴리트는 급기야 1999-2000 시즌 5라운드 승격팀이었던 선덜랜드와의 위어타인 더비에서 팀의 주포 앨런 시어러를 벤치에 앉히고 기용하지 않는 무리수를 두었고, 팀은 2-1로 패배했다. 사흘 후 굴리트는 경질되고 만다. 이후 바비 롭슨 감독이 위기에 빠진 뉴캐슬의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첫 경기에서 셰필드 웬즈데이를 8-0으로 짓밟고 시어러는 5골을 폭발시켜 굴리트를 머쓱하게 했다. 시어러가 그의 다큐멘터리에 말하길 그때 굴리트가 팀 기강을 잡기 위해 시어러를 이용했고 그때 시어러가 못했다면 시어러가 이적했을것이라고 회상했다.실적을 못낸 둘 중 하나는 나가리[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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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의 감독이 되지만 리그 4위에 그쳐 경질되고 만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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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데이비드 베컴과 (국내에선) 홍명보의 소속팀으로 유명했던 LA 갤럭시의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역시 성적부진을 이유로 2008년 알렉스 랄라스 단장과 함께 경질되었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라이벌 디에고 마라도나와 매우 유사하다. 같은 오렌지 삼총사였던 마르코 판바스턴,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무난하게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는데도 말이다.[20][21]

5. 기록

5.1. 대회 기록

5.1.1. 선수

5.1.2. 감독

5.2. 개인 수상

6. 여담

  • 현역 시절 흑인 민권운동가로 활약한 바 있다. 1987년 유럽 올해의 선수상을 받으며 "이 상을 만델라에게 바치고 싶다"며 수상소감을 밝혔고, 부업으로 레게 밴드를 만들어 남아공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비난하는 노래를 부른 바 있다.(참고)
  • 굴리트는 복잡한 여자 관계를 가지고 3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였다. 셋째 부인이던 에스텔 크루이프는 요한 크루이프의 조카이다. 에스텔 크루이프는 굴리트보다 16살 연하로, 굴리트가 첼시 선수일 때 만났다. 그녀는 격투기 선수 바다 하리와 불륜 관계였고, 2012년 결국 이혼한다. 에스텔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굴리트의 잦은 외도에 대한 불만으로 맞바람을 피웠으며, 굴리트가 자신을 떠나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 굴리트는 세 명의 부인으로부터 2명씩, 2남 4녀를 두었는데, 그 중 에스텔 크루이프 소생인 막심 휠릿은 아버지처럼 축구선수로 AZ 알크마르 유스에서 센터백으로 활약 중이다.
  • 2013년 FIFA 발롱도르의 수상 사회자를 진행했는데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동시대 라이벌들과 동료들에 비해 매우 떨어지는 편이라 결정적으로 걸레머리가 없어져서브라질의 레전드 카푸가 연관검색어에 오르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루드 굴리트 문서 자체는 2013년 말 생성되었는데 어째서인지 항목 업데이트는 축구 비디오 게임 내 성능에(특히 피파온라인 출시 이후) 대해 중점적으로 서술되어 업데이트 되고 있다.
  • 안정환의 롤 모델이었다고 한다. 안정환 본인이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밝힌 바로는 밤새 굴리트의 비디오를 보면서 플레이를 계속 따라해보곤 했다고. 러시아 월드컵을 중계할때도 우연찮게 김정근 캐스터가 안정환 보고 좋아하는 선수는 누구냐고 묻자 바로 굴리트라고 대답하기도. 보통 옛날 선수라면 안정환이 언급한번 하고 넘어가는 정도겠지만, 하술할 게임상의 사기성 때문에 젊은층의 인지도도 높은지라 해설도중 언급이 나온 이후 뜬금없이 실검에 굴리트가 올라가기도 했다.
  • 첼지현이 첼시팬이 된 원인. 원래 굴리트의 팬이었고 굴리트가 첼시로 이적하자 이래저래 자료를 찾다가 첼시팬이 되었다고. 첼지현피셜 굴리트는 피파에서 오히려 너프 먹은 수준이라고 한다 물론 첼시시절 굴리트는 커리어 말엽이었고 해당 클럽에 있던 기간이 비교적 짧았다는 점은 장지현의 발언에서도 감안해야 할 부분.
  • 2020년 FIFA The Best 어워드 시상식 사회자로 깜짝 등장하였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시상식은 비대면으로 진행되었고, 재치있는 진행 능력을 보여주었다.

7. 축구 게임에서

비록 전설임은 틀림없으나, 게임 내에서의 위상이 현실의 활약상에 비해 지나치게 고평가 되는 선수다. 당장 펠레, 마라도나, 메시, 호날두를 밟고 다니는데 고평가 되고 있다는 말은 어찌보면 당연. 게임은 사실상 굴리트라는 선수가 현재에도 많이 알려진 유일한 이유로, 전성기가 짧고 한국인이 직접 보기 힘들었던 80년대 선수임에도 어지간한 현역 축구선수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고 현 세대까지 이름을 떨치게 한 요소이다. 이 모든 것이 피파온라인의 만행 때문이다

2000년대에는 오렌지 삼총사 모두가 유일하게 위닝 일레븐에서 레전드 팀의 일원으로 등장해서 플레이할 수 있었다. 이때는 위닝의 클래식 팀이 으레 그렇듯 라이선스 문제로 게임상에는 굴라스(Gullas)라고 나와 있었다. 일단 포지션은 골키퍼을 제외한 전체 라인이 활동 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22]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가 보라돌이일 때 골치가 아파지지만, 네덜란드는 그 범용성에서 아르헨티나를 초월한다.

예를 들자면
1.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가 상태가 안 좋다 = 굴리트를 윙어로 넣는다.
2. 마르코 판바스턴이 상태가 안 좋다 = 굴리트를 센터 포워드로 넣는다.
3. 에드가 다비즈의 상태가 안 좋다 = 굴리트를 중앙 미드필더로 넣는다.
4. 로날드 쿠만의 상태가 안 좋다 = 굴리트를 스위퍼에 넣는다.

전 영역에서 98이라는 아름다운 능력치를 자랑하는 굴리트를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 피파 14와 넥슨의 피파 온라인 3에서 희대의사기 캐릭터로 출시되며 본격적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피파 온라인에서는 발매 후 1강이 35억 EP를 기록하는 등 정신나간 밸런스 브레이커로 명성을 떨치는 중. 이후 조각 이벤트 등이 겹쳐 10억 EP대까지 떨어졌다가 입소문을 타며 계속해서 시세가 올라 +1카 160억(!!!)새로운 화폐단위가 되었다까지 상승하였다. 한동안 피파 온라인 3 가격 최강자 5위 안에 꾸준히 들었다.[23] 역시 알베스, 즐라탄, 야야 투레를 합친듯한 미친 성능은 덤. 피파 온라인 3에서는 레벨 20을 찍으면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스텟이 100을 넘어가는 정신나간 스텟을 자랑했다. 반 농담 반 진담으로 11명을 동일한 선수를 넣는다면 어떤 선수를 쓸 것인가 하는 떡밥에서 백이면 백 추천하는 선수. 그만큼 모든 부분에서 뛰어나다. 심지어 0카를 갖다 써도 어지간한 선수 1카 이상의 효과를 보이는 미친 존재감을 보인다. 전술적인 요인이 그렇게 크지 않은 아마추어~프로페셔널 단계의 순위경기에서는 피시방 선수로 굴리트가 나오면 이거 하나로 이기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얼티밋 레전드 카드가 출시된 이후에는 호나우두에 밀려 가격 2순위가 되었다.

2021년 현재는 피파 시리즈[24], 피파 온라인 4과 위닝일레븐에서 등장한다. 위닝일레븐의 경우 PES 2018에서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피파 온라인 4에서는 NHD, TT, TC, HOT, LH, MC 의 6개의 시즌으로 존재한다. 전작에서는 보급형 굴리트가 거의 끝물에서야 나왔고 그마저도 상당히 비싸 굴리트 자체가 그렇게 많이 보이진 않았다. 사기긴 해도 사용유저 자체가 매우 적었던 상황. 그러나 피파 온라인 4에서는 시작부터 시즌이 있고 꾸준히 타 시즌이 추가되며 말 그대로 거의 모든 유저가 사용하는 절대적인 적폐 선수로 꼽히고 있으며, 이는 상기 언급되는 전작과는 달리 피파 온라인 4 시작부터 지금까지 심각한 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순위 경기를 비롯해 모든 경기에서 아주 높은 확률로 상대팀 스쿼드에 포함되어있고 고랭크로 갈수록 스쿼드는 적폐화돼서 더욱 심해진다. 양발인데다 압도적인 피지컬과 모든 포지션에 가용되는 스텟을 바탕으로 엄청난 성능을 보여준다. 그 어떤 선수도 굴리트보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25] 이때문에 굴리트 온라인 4라고 불린다. 피파온라인 4의 적폐 3대장 호굴비[26] 중의 한 명이자 피온 4에서 가장 모두에게 사랑받는 동시에 모두가 가장 증오하는 아이러니한 선수. 특유의 대걸레같은 머리스타일만 봐도 욕이 나온다는 유저도 많다.

굴리트는 굉장한 레전드로 논해지는 선수임은 틀림없으나, 이토록 대단하게 등장하여 동시대 라이벌인 마테우스, 그 시대 최고의 선수였던 마라도나는 물론 그 어떤 전설조차 가볍게 무시하는 성능으로 피파 온라인 4의 영원한 고질병으로 자리잡았다. 사실 순수 능력치 상으로는 펠레, 마라도나보다는 아래인 1.5등급 선수로서 어느정도 현실반영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예: 펠레 또는 마라도나가 100의 능력치를 받았다면, 굴리트는 동률 내지 1~2정도 낮은 능력치를 부여받는다.) 부여받은 능력치와는 다르게 키 185cm 이하의 선수는 취급도 하지 않는 게임 엔진 특성상 본의 아니게 사기적인 선수로 올라간 영향이 크다. 즉 능력치 및 현실 활약상이 높아도 키가 165cm인 불세출의 영웅 마라도나는 찬밥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로 논해질 레벨에는 미치지 못하였음에도 양발에 키가 190이 넘어가며 능력치까지 고른 굴리트는 모든 팀 빌딩에서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선수'로 논해진다. 제일 큰 문제는 피파 온라인을 통해 축구에 입문하게 되는 유저들 제일 하면 안되는 것 이 피파에서의 활약상만을 보고 '굴리트가 역대 최고의 선수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어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를 논하는 자리에서 메시, 호날두, 펠레, 마라도나 등이 줄줄이 논거되는데 불쑥 굴리트를 들이미는 현상 (...)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 FIFA 올타임에 왜 굴리트는 없어여? 이 모든 것이 넥슨이 자초한 일이다

피파에서 사기캐릭으로 자리잡은 굴리트지만 위닝에서는 더 이상 사기캐릭터가 아니며 그냥 괜찮은, A-급 정도의 레전드중 한 명이 되었다.[27]

모바일 PES 커뮤니티에서는 평가가 좀 미묘한데, 다름아닌 클래식 No.10이라는 플레이스타일 때문. 활동량은 꽤 많으나 산소탱크(박투박)마냥 필드 전체를 뛰어다니며 피지컬로 상대를 짓누르는 것도 아니고 침투도 제때 하지 못하면서 2선에서 패스나 콕콕 찔러줘야 하는 감질나는 플레이스타일인데, 이로 인해 역습 상황에서 뒤로 빠지며 템포를 잡아먹는 등 여러가지 역효과를 내기 일쑤다. 참고로 모바일 PES의 공격형 미드필더나 섀도우 스트라이커 포지션의 레전드들은 이 특성을 가지고 나오는 경우가 많고, 하나같이 평가가 다 안좋다. 심지어 메날두조차 씹어먹을 수준의 사기 스탯을 보유한 마라도나와 호나우지뉴조차 이 플레이스타일 하나 때문에 컨트롤을 즐기고 엄청나게 잘하는 유저가 아니면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 그래도 저 둘과 달리 굴리트는 피지컬과 범용성만큼은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아이코닉 버전은 쓸만하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며 톱으로 활용할경우 클래식 No.10 특성이 발동되지않아 연계형 공격수로서 상당한 성능을 보여준다. 다만 결정력이 애매해서 철저하게 연계 위주로 사용되며 피온 굴리트급의 사기성은 비에이라와 루메니게가 나눠서 가져갔다. 사실 톱 굴리트도 결정력이 낮지만 원터치 패스와 스루 패스 스킬을 장착했고, 워낙 몸빵이 좋아서 헤더와 볼 공급으로 루메니게를 보좌하기에 최적화된 톱이란 이유로 쓰이는거라 위닝에서 굴리트의 위상은 상당히 낮다고 봐야한다. 그마저도 유저 취향에 따라서 토레스나 오언, 음바페, 호날두, 메시에게 자리를 뺏기기도 한다.

온라인의 원작인 FIFA 콘솔에서도 프라임(전성기) Icon 굴리트는 토티/토츠 메날두를 넘는 가격을 자랑한다! 전체적으로 피파 시리즈에서는 사기캐로 군림하지만, 위닝에서는 그정도는 아닌 수준. 그러나 한국에서는 피파 온라인이 강세기 때문에 굴리트=사기캐라는 공식이 성립하고 있다.

배성재의 언급에 따르면 본인도 자신이 축구 게임 내에서 사기적인 스탯을 갖고 있는걸 알고 있다고 한다. 무척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 이미 본가 EA판 피파를 즐기는 스트리머 및 게이머들이 각종 세미나 등에서 굴리트를 보기만 하면 수시로 본인의 사기성에 대해 언급하여 굴리트 본인도 진작부터 알고있었다고 (...)


[1] 네덜란드어 발음이 [ryt ˈxɵlɪt\]이므로 올바른 표기는 ‘뤼트 휠릿’이고, 실제로 해외 해설도 ‘휠릿’에 가깝게 발음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영어식으로 읽은 ‘루드 굴리트’로 더 유명하다.[2]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지만 양발 모두를 잘 사용했으며, 실제로 굴리트는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올라운더였다. 키가 커서 골키퍼도 잘할 거 같다.[3] 어디까지나 '주'포지션. 굴리트는 사실상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도 가능하다 할 정도로 가장 유명한 멀티 플레이어의 대명사다.[4]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도 이와 비슷한 별명을 가지고 있다.챔스, 월드컵, 유로 우승 빼고[5] 축구는 몸이 아닌 머리로 하는 것이라는 요한 크루이프의 말처럼, 토탈 풋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전술 이해도였다. 크루이프의 체력, 피지컬, 테크닉이 모자란건 결코 아니었지만,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토탈 풋볼에 대한 기여도가 전술 이해도에 비하면 낮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를 증명하는 사례가 존재하는데, 1974년 네덜란드는 아르헨티나를 4:0으로 박살내고 브라질을 2:0으로 격파하며 그 기세가 대단했다. 결승전 상대인 프란츠 베켄바워의 서독도 지금의 네덜란드에는 별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강했지만, 결과는 사뭇 달랐다. 독일은 베르티 포크츠에게 크루이프를 전담마크 시켰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전담마크 보다는 크루이프와 함께 자폭해서 필드에서 사라지는 전술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크루이프는 최고의 선수도 우승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변명했으나 포크츠는 "나는 볼터치를 3번밖에 하지 못했는데 챔피언이 되었다" 라며 비웃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포크츠의 신체능력이 크루이프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말년의 크루이프는 네덜란드에 진출한 허정무에게도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굴리트는 신체능력도 뛰어난 선수였다.[6] 루디 푈러2002년 한일 월드컵차범근에게 아스피린 운운하던 바로 그 감독 맞다. 헌데 이날은 푈러에게도 악몽의 날이었는데, 레이카르트는 굴리트와 더불어 가장 고귀한 성품의 선수로 유명한 선수였다. 이러다보니 대회 이후에 침을 뱉은 레이카르트가 욕을 먹는게 아니라 오히려 푈러가 얼마나 까불었으면 그 착한 레이카르트가 그랬을까?'' 라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마치 2006년 독일 월드컵 우승은 이탈리아가 했는데, 정작 전세계 언론은 지단은 왜 박치기를 했는가?'''로 도배된 것과 비슷한 상황.[7] 이 당시 유로는 조별예선에 8개의 팀이 참가했었다.[8] 레이카르트는 중앙 미드필더로써 가장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었지만, 센터백으로도 자주 출장했었다. 정확히 독일전에서 2분만에 골을 꽂아버리면서 2년전의 한을 그대로 풀어버린다.[9] 이 대회에서 네덜란드는 데니스 베르캄프를 발굴했다.[10] 네덜란드가 전력을 온존히 보존했을때를 가정한 멤버는 루드 굴리트, 데니스 베르캄프,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클라렌스 세도르프, 프랑크 레이카르트, 아론 빈터르, 프랑크 더부르와 같은 정신나간 스쿼드이다. 1998 월드컵 스쿼드에 비해서 하등 꿀릴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월등하다. 굴리트의 존재감이 그러했다.[11]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네덜란드와 브라질의 물고 물리는 관계이다. 브라질이 펠레 은퇴후 1974년 월드컵에서 네덜란드한테 무너졌고, 네덜란드는 1994년 화려한 멤버로 브라질에게 1점차 패배를 당했고, 거스 히딩크의 1998년에는 창과 창의 대결이며, 사실상의 결승전이라 칭해진 4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한다. 그리고 2010년은 측면을 탈탈 털어버린 아르연 로번웨슬리 스네이더의 활약에 브라질은 무너진다. A매치에서 실질적으로 서로 잡고 잡히며 발목을 잡은 두 팀이다.[12] 굴리트의 대회참가 여부와 전성기 문제가 있긴 한데, 그 해에 굴리트는 AC 밀란UC 삼프도리아에서 경기당 0.5골의 결정력을 자랑했던 시기이다. 당시 나이는 32세, 34세의 마라도나가 해당 대회에 참가해서 2경기만에 1골 2어시스트를 기록했던것을 감안하면, 결코 굴리트의 폼이 나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다시금 강조하지만 굴리트의 주 포지션은 최전방 공격수가 아니다. 물론 잘보긴 했지만, 이때는 주로 중미 아니면 공미 심지어 센터백으로도 나오기까지 했는데 경기당 0.5골이라는 것이다. 반면 아드보카트의 팀 장악력은 좋았지만, 그의 최대의 단점은 '작은 장군' 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독불장군식 운영이었다.[13] 이덕에 첼시에서도 선수 겸 감독을 할수 있었다.[14] 이 정도의 멀티 포지셔닝 능력을 갖춘 선수로는 필립 코쿠, 클라렌스 세도르프 정도를 들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유상철.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해외 축구가 보급되기 전에는 박지성의 뛰어난 축구 지능과 전술 이해 능력으로 굴리트와 비교하고는 했는데 박지성은 굴리트와 그 궤를 약간 달리 하는, 다른 유형의 선수이기 때문에 둘을 비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오히려 상술한 유상철이 훨씬 굴리트와 유사한 유형의 선수이기 때문.[15] 사실 밀란 시절 이후부터는 보통 4222의 투톱이나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주로 출전했고, 다양한 포지션을 옮겨다니는 일은 잘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발롱도르를 수상하고, 당대 최고 선수이던 마라도나의 라이벌로 불릴 정도의 에이스가 이런저런 포지션 땜빵을 할 만한 짬은 아니다.[16] 그 자리를 당시 첼시의 스트라이커인 잔루카 비알리가 감독 자리를 메꾸어 1997-98 시즌을 UEFA 컵 위너스컵 우승과 풋볼 리그 컵 우승으로 마무리한다.[17] 경기는 리버풀이 4대2로 승리.[18] 여담으로 훗날 시어러와 굴리트는 BBC 매치 오브 더 데이 패널로 함께 나오기도 했다.[19] 여담으로 이 당시 송종국예스맨이라고 디스하면서 잘 기용하지 않았던 일화로 인해 한국 내에서의 평가가 좋지 못하다.[20] 판바스턴은 네덜란드 국대를 맡으며 승승장구 했고, 레이카르트는 바르셀로나 드림팀 2기의 감독을 맡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문제는 그들의 후임들이 넘사벽급의 업적을 세웠다.(바르셀로나는 설명이 필요없고 네덜란드는 월드컵 준우승)[21] 심지어 오렌지 삼총사의 두명은 네덜란드 대표팀의 감독을 맡았지만, 굴리트만 유일하게 맡은 적이 없다.[22] 삼프도리아 시절 굴리트는 센터백 역할을 수행한 적이 있다.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지.[23] 나머지는 파트리크 비에라, 펠레, 뤼트 판니스텔로이 등이 있었다.[24] 피파14~17에서는 XBOX독점이었다.[25] 초창기엔 그나마 대적가능한 라인으로 엠마뉘엘 프티, 파트리크 비에이라 정도가 등장했는데,프티는 고질적인 약발이 문제고 비에이라는 전체적인 공격력이 굴리트보다 떨어지는 편이다. 무엇보다 저 둘은 공격수를 맡길 수 없지만 굴리트는 시즌을 불문하고 공격수에 박아두었을 때도 우수한 성능을 보여주며, HOT시즌 이상의 굴리트는 어지간한 공격수 이상의 성능을 보여 스트라이커로도 사용된다. 2021년 현재는 프티의 기용이 줄어들고 새롭게 발락 시리즈, 비달, 제라드 등이 굴리트의 아성에 도전하였으나 여전히 굴리트는 1대장이다.[26] 호나우두, 루드 굴리트, 비에이라[27] 현 위닝2020에서 사기 레전드로 꼽히는 선수는 크루이프와 비에이라 둘 뿐이다. 아이코닉 업데이트 이후에는 저 둘에 더해 아이코닉 루메니게, 베컴, 레이카르트, 토레스 정도가 사기캐릭으로 꼽힌다. 그 말디니조차 성능이 뛰어나긴 하지만 사기캐까진 아니라는 것이 중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