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14 17:46:15

바뤼흐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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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바뤼흐 스피노자 (Baruch Spinoza, Benedictus de Spinoza[1])
출생1632년 11월 2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사망1677년 2월 21일 (44세), 네덜란드 헤이그
직업철학자
서명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Spinoza's_signature_(1671).svg.png
1. 개요2. 인생3. 철학
3.1. 개관3.2. 기하학적 방법3.3. 신, 무한, 완전성3.4. 실체와 양태,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그리고 역량3.5. 일원론과 평행론3.6. 코나투스, 욕망, 정동3.7. 자유, 상상과 인식, 예속과 해방
4. 반응5. 관련 서적6. 기타
6.1. 스피노자의 운명론에 대한 소론6.2. 스피노자에 대한 말말말

1. 개요

지적인 면에서 그보다 뛰어난 철학자들은 있지만, 윤리적인 면에서 그를 따라갈 철학자는 없다.[원문][3]
버트런드 러셀
철학자들의 왕, 신학으로부터 철학을 구출해 낸 철학의 그리스도.
질 들뢰즈

네덜란드유대인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라이프니츠와 같이 대륙 합리론을 대표하는 트로이카 중 한 명이다.

포르투갈어가 모국어고, 히브리어의 교본을 쓰고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를 조금 할 줄 알았으며 라틴어로 저술을 했을 정도로 어학적 재능도 많았다.

2. 인생

네덜란드 유대인 사회 내에서 꽤 자리를 잡은 집안 출신으로 젊을 때는 일찍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업을 영위하였고 학문적으로도 뛰어나 랍비가 될 재목으로도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신을 부정하고 유대교 교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26세에 파문을 당해 유대교 사회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에는 하숙집에서 살면서 렌즈갈이를 직업 삼아 소박한 생활을 보냈다.

당시 렌즈는 막 꽃피던 근대과학 초창기의 인기 품목이었던 현미경이나 망원경에 쓰이는 핵심 부품이었다. 때문에 스피노자에게 렌즈 가공은 생계 유지 수단인 동시에, 광학(光學)에 대한 그의 과학적 관심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였다. 이를 반영한 듯 스피노자는 하위헌스 원리로 유명한 천문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등과도 교류를 나누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도 과학에 대한 믿음이 반영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당시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던 신에 의한 기적을 부정하고, 신은 결코 자연의 법칙을 임의대로 어기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다만 스피노자의 생계가 렌즈 가공만으로 유지된 건 아니고 친구와 지지자들이 연금 형식으로 보낸 돈도 많은 보탬이 되었으며, 풍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난에 시달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렌즈 가공을 하지 않는 시간엔 책을 읽거나 철학을 연구하고 친구들이나 다른 질문자들과 서신을 주고 받거나 하숙집 주인 가족과 대화를 나누는 등으로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 사회와는 단절이 되었고 가족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삶은 아니라서, 여러 친한 친구들이 있었고 스피노자 연구 모임이 있을 정도로 사상적인 팬들이 있었다. 하숙집 주인 가족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고 온화한 철학자로서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다만 그의 철학은 상대적으로 관용적이었던 네덜란드에서조차 위험했기 때문에 그의 책이 떳떳하게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신학정치론은 익명으로 출간되었으나 큰 논란을 일으켰고 그의 대표 저서인 에티카는 출간을 시도하다 포기하여 사후에 출판되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로 초빙을 받기도 하였으나, 한달 정도 고민한 스피노자는 그 직위를 거절한다. 이 때 쓴 사양하는 편지도 유명하다. 그가 44세의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한 것을 두고 렌즈를 가공하면서 생기는 유리가루를 많이 마셨던 것이 원인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형도 폐질환으로 사망한 것을 토대로 가족력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말년에 그는 자주 아팠지만 그렇게 일찍 죽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죽는 날에도 닭고기 수프를 맛있게 먹고 친구인 의사와 하숙집 주인과 잡담을 나누기도 하다가 저녁 때 보니 죽어 있었다고 한다.

3. 철학

3.1. 개관

정신은 사물의 현실적 존재를 파악함으로써가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영원의 상 아래에서 파악함으로써 모든 것을 인식한다. - 《에티카》 제 5부

그의 세계관을 간략히 말하자면 모든 것이 이라는 범신론(汎神論)을 바탕으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만물에 영혼이 있다는 식의 애니미즘 같은 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실체이고, 바로 이러한 실체가 곧 신이라는 것이 스피노자의 입장이다. 사실 이 신은 야훼나 제우스처럼 인간적인 사고나 감정을 갖고 있는 신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곧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꼭 신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의문도 생긴다. 이런 애매함 때문에 스피노자를 신에 취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무신론으로 보기도 한다. [4] 어쨌든 유대교에서 파문을 받은 건 당연하다.

스피노자는 유일한 실체는 신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이 실체의 변용이라고 본다. 변용이라 함은, 자체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표현되는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 역시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의해, 그리고 세계의 끊임없는 변화 과정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존재일 뿐이다. 즉 자연의 필연적 법칙들은 변화하지 않고 영원하지만 세계 안에 있는 온갖 사물들은 유한하고 끊임없이 변해가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5]

르네 데카르트가 물질과 정신을 전혀 다른 별개의 독립된 실체라고 간주한 것과 달리 그는 물질(좀더 정확하게는 연장(extension))과 정신이 단지 동일한 실체(신)의 다른 속성일 뿐이라고 했다. 데카르트는 신체와 무관한 정신의 자유의지를 주장한 반면에 스피노자는 신체가 갖는 관념이 곧 정신이라고 보았다. 이런 관점은 요즘 뇌과학의 발전과 맞물려 현대에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데, 뇌세포들 간의 전기 흐름과 우리의 사고나 감정은 동일한 실체의 두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서로 다른 실체인 신체와 정신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을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난점이었으나[6], 스피노자의 관점에선 애초부터 동일한 하나의 실체가 물질과 정신의 측면으로 표현이 되는 것이니 이 문제가 해소된다.[7] 스피노자의 이러한 실체 이해를 일반적으로 '평행론'이라고 일컫는다.

이상과 같은 스피노자의 사상을 간단히 요약한 문장이 바로 '신 즉 자연'

그런데 스피노자의 위와 같은 형이상학윤리학으로 이어진다.

스피노자는 세상에 절대적으로 한 것도 한것도 없으며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자기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하는 본성에 유익하다고 여기면 선, 해롭다고 여기면 악으로 판단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하늘은 자기 나름의 원리에 따라 비를 뿌리고 해를 비추지만 사람은 이를 은총으로 여겨 감사하기도 하고 천재지변이라고 원망하기도 한다. 즉 자연에는 원래 선악이 없는데 사람이 이를 선악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8]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이나 생각 역시 자연의 법칙에 의해 흘러가는 현상일 뿐이므로(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인간 역시 신=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다) 절대적인 선악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가 윤리적 상대주의를 주장한 건 아니다. 선악을 미리 상정해두고서 선을 따르고 악과 싸우라는 것이 전통적인 윤리적 접근이라면, 스피노자는 각 존재가 나름대로의 본성을 갖고 있으므로 그에 적합한 판단과 행동을 하라고 조언한다. 즉 선악의 판단은 적합함과 부적합함의 판단으로 바뀌는데, 적합한 판단이란 외부의 영향이나 우연, 잘못된 고정관념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펼친다면 필연적으로 선택하게 될 판단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선한 것, 즉 적합한 것은 이성에 따르는 것이다. 이성을 따르지 않을 때 인간은 자신의 본성이 아니라 외부의 사물에 영향 받은 정서(분노와 집착, 탐욕 같은)에 사로잡혀 수동적으로 살게 된다. 이성에 의해 실체(세계)의 질서를 이해하고 그 이해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판단에 따라 사는 것, 그것이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윤리적인 삶이고 또한 행복한 삶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스피노자는 비윤리적인 삶이나 불행한 삶은 의지나 양심의 부족에서 온다기보다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9]

3.2. 기하학적 방법

스피노자의 주저인 『윤리학』은 '기하학적 질서로 증명된, 그리고 5부로 구성된'이라는 부제가 드러내듯, 정의와 공리들로부터 철학적 정리를 연역해낸다는 기하학적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론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탁월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반면에, 혹자는 철학적 방법론으로 유의미하며 가장 훌륭한 것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평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가 이러한 방법론을 취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일 터이다.

『윤리학』을 독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품는 의문은 스피노자의 정의와 공리들이 자명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깊게 따져보지 않더라도 스피노자의 공리들 중에는 그것을 '공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명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의 정의들 또한 의심스럽다고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스피노자가 기하학적 방법을 택하는 까닭은 사유가 반드시 완전하고 무결한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는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스피노자 본인 또한 『윤리학』의 정의와 공리가 자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것들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기하학적 방법은 완전한 정의들과 공리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한 것들로부터 출발하여 완전한 것에 이르려는 노력이야말로 『윤리학』의 기하학적 방법이라고 해야만 한다. 만약 망치를 만들기 위해 어떤 도구가 필요하고, 그 도구를 만들기 위해 또 다른 도구가 필요하다면, 인간은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을 것이다.

3.3. 신, 무한, 완전성

노발리스는 스피노자를 '신에 취한 사나이'라 평했으며, 많은 사람들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신이라는 '영원의 상 아래에서' 관조하는 체계로 파악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스피노자의 한 일면을 지나치게 부풀려 보는 것이며, 또한 그의 철학을 오독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철학적 기획은 내재적이고, 반-초월적이며, 어떤 의미로는 인간적인 것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스피노자의 신이란 곧 범신론적인 신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반드시 신이라는 이름이 붙을 까닭은 없다. 다만 헤브라이즘적인 전통 하에서, 무한하며 완전한 존재란 곧 신으로 생각되었기에 스피노자는 그러한 용어를 그대로 차용했을 따름이다. 중요한 것은 신을 나타내는 이름이 아니라 신을 정의하는 방식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이며,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그러한 실체이다. 이때 절대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무한, 즉 끝을 헤아릴 수 없다는 수학적 무한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데카르트의 무한 이해와 스피노자의 무한 이해가 결정적으로 차이나는 지점이 이것으로, 데카르트가 무한을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스피노자는 무한을 '모든 것을 포함하는 완전함'으로 파악한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한 것과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을 구분했다. 사유나 연장[10]과 같은 실체들은 자신의 유 안에서만 무한하나,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 사유와 연장은 무한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부정을 함축한다. 사유에는 연장속성이, 연장에는 사유속성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11] 그러나 신은 그러한 모든 속성들을 총체적으로 포함하며, 따라서 그 어떤 부정도 함축하지 않는다.

여기서 신의 완전성이란 '신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음'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곧 신과 자연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라는 개념은 부정된다. 신은 이미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무한하며 완전하기 때문에, 어떤 것도 새로이 생성될 수 없으며 또한 어떤 것도 파괴되어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것이라 인식하는 대상은 신이라는 실체가 변용되어 나타난 것일 뿐이다.

3.4. 실체와 양태,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그리고 역량

실체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자기 자신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실체는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를 위해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12]. 양태는 실체의 변용이며,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13]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개체가 실존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양태의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세상의 내재적 원인으로서, 끊임없이 양태들을 낳는 신을 스피노자는 '능산적 자연'으로 이해한다. 그러한 실체가 변용되고 있는 유한한 양태들의 총체가 '소산적 자연'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본다면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이라는 구분은 임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 자연 모두가 신이며 또한 양태를 산출하는 '역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역량이라는 개념은 곧 신의 본질 그 자체이다. 신은 그 자신의 필연성으로부터 자연을 산출하며, 소산적 자연 역시 끊임없이 양태들을 산출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즉 역량이라는 것은 필연적인 법칙들을 따라 변화를 낳는 내재적인 힘으로 이해할 수 있다.

3.5. 일원론과 평행론

스피노자의 철학은 일원론적이다. 모든 양태들은 신이라는 하나의 실체의 변용이며, 또한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실체는 신이라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 아래에서 총체적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평행론이란 일원론 아래에서의 평행론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14]

데카르트의 철학적 체계에서, 정신의 올바름을 최종적으로 판정하는 것은 그것이 물리적 세계와 일치하는가의 여부였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있어, 관념들의 질서는 사물들의 질서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태양은 실제로는 지구로부터 1억 5천만 킬로미터 거리에 존재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마치 그것이 우리로부터 200보 떨어진 거리에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한다. 그렇다면 태양이 우리에게서 200보 떨어진 거리에 존재한다는 인식은 잘못되기만 한 것인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태양이 우리에게서 200보 떨어진 거리에 존재한다는 것은 관념의 질서에 따라 도출된 결과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태양이 우리에게서 200보 떨어져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라고 하는 명제 자체는 참이라는 것이다.

단지 관념의 질서에 따라 도출된 것이 사물의 질서에 따라 도출된 것과도 일치할 때의 명제, 즉 '우리는 태양과 지구가 1억 5천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명제가 보다 더 적합한 관념이 될 뿐이다. 이러한 평행론의 관점 하에서는, 사물의 질서와 관념의 질서 중 어느 것이 심급이 되는가 하는 문제는 무의미하다. 둘 중 어느 것도 다른 어떤 것의 심급이 아니며, 각각의 실체는 고유한 질서를 지니고 있다. 다만 사물의 질서와도 일치하는 관념이 보다 적합한 관념일 따름이다.

3.6. 코나투스, 욕망, 정동

코나투스는 '자기보존의 본능' 혹은 '자기파괴를 부정하는 본능'이라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다. 스피노자의 시대는 과학혁명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고, 근대적 역학은 관성의 법칙이라는 개념을 낳았다. 스피노자는 역학적 법칙인 관성의 법칙처럼 존재는 자기파괴를 부정한다는 존재의 법칙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신은 완전하며 어떤 것도 새로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없기 때문에, 스피노자는 모든 유한한 양태들이 코나투스를 '현행적 질서'로 갖는다고 표현했다.

이 코나투스가 인간에게 드러날 때 스피노자는 그것을 '욕망'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욕망이란 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파괴를 부정하고자하는 본성 그 자체이다. 이 본성에 반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의 역량을 깎아내리고 파괴하려 하는 것에 대해 인간은 슬픔을 느낀다. 반대로 이 본성과 합치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기쁨을 느낀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정동 이론의 개관이다.[15]

3.7. 자유, 상상과 인식, 예속과 해방

먼저 주지해두어야 할 것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의 개념이 전통적인 기독교 사상에서의 '자유의지'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비판하는 기독교적 자유의지의 개념은 인간이 어떤 외부적 원인으로부터도 제약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자유, 즉 '무제약적 자유'에 해당한다. 인과적 필연성을 전제하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그러한 자유는 용납될 수 없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역사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인 바, 결코 '국가 속의 국가(Imperium in Imperio)'[16]일 수는 없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자유란 그것의 활동이 실체의 필연성, 현행적으로는 코나투스에 일치한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이러한 자유를 방해하고 인간을 예속의 상태로 만드는 것으로 꼽는 것이 바로 '상상'이라고 하는 문제이다.

앞서 평행론의 문제에서도 언급한 '태양의 비유' 같은 경우, '태양은 우리에게서 200보 떨어진 거리에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상상이다. 즉 양태를 실체의 필연적 질서에 따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관념의 질서에 따라서만 이해할 때, 그것을 상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상상에 예속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설령 우리가 그 상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해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학 교육에 따라 태양이 실제로는 1억 5천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양이 우리에게서 200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알고 태양을 본다 해도 태양은 여전히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관념의 필연적인 질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연의 양태들을 그저 필연적 질서에 따라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고 파악하는 것 역시 하나의 상상이다. 태풍과 지진은 어떤 목적성을 갖고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는 한다. 우리는 양태들이 '그저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해 고통받는다.

비록 우리가 상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해방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인식은 상상과는 다르게 양태를 영원의 상 아래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선'과 '악'이라고 하는 목적론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예속의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신의 완전성에 이르도록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스피노자 윤리학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반응

여튼 사상이 기독교적 세계관에선 이단에 가까운 것이라 동시대인들에게 많이 까였고 그의 사후 출판된 저서들을 분서하고자 하는 자들도 많았다. 이렇듯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간 까닭에 까가 굉장히 많았는데, 고대 철학자들 중에서 당대에 까가 가장 많았던 사람이 소크라테스라면, 스피노자는 근대철학자들 중에서 까가 가장 많은 철학자이다. 물론 까 못지않게 빠도 많았지만.
한동안 잊혀진 철학자였으나 헤겔이나 셸링 같은 독일 철학자들이 자기 나름의 시각으로 재해석을 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론적 해석은 스피노자의 철학의 기본정신과는 거리가 있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 근대 초기에 근대적 시각을 뛰어넘었던 선구적인 철학자로서 이전보다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5. 관련 서적

주저로는 에티카(Ethica)가 있는데 국내에도 번역본이 여럿 있으니 시간나는 분은 한 번 읽어봐도 좋겠다. 스피노자가 기하학적 구조로 작성한 공리와 정의에 관한 기초 이해와 실체와 변양에 대한 개념, 그리고 스콜라 철학에서 자주 보이던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의 개념에 대한 기초적인 철학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어려울 것은 없다. 쉽게 읽는 방법으로는 스피노자가 서술한 모든 정의와 공리들을 암기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각각의 증명들을 보면서 선행적으로 서술된 공리 및 정의들을 참조 및 이해하면서 읽으면 좋을 것이다. 주석서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냥 읽어보는 것도 충분히 무언가를 느끼거나 사색하거나 생각해볼만한 것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스티븐 내들러라는 스피노자 전문가가 스피노자의 일생에 대한 평전과 에티카 해설서로 쓴 책이 있다.

발타자르 토마스의 "비참할 땐 스피노자"는 분량이 작지만 스피노자의 사상 핵심을 읽기 쉽게 요약하여 주고 있고 형이상학적 부분보다 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부분으로 쓰여져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문구들이다.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세계를 바꿔라. 선택은 자발적 의지의 결정이 아니라, 축적된 정보의 결과를 표현하는 것이다. 자유는 의지가 아니라 인식에 기반을 두는 것. 자발적 욕망 대신 주어진 모델을 따르는 것은 우리를 약화시킨다. 우리는 욕망을 억제할 수 없다, 더 큰 욕망에 의해서만 억제가 가능하다. 우리에게 의지의 자유가 있다는 환상이 삶을 약화시킨다.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쓴 "스피노자의 뇌"는 뇌과학자 관점에서 현대 뇌과학이 밝혀내는 사실들이 스피노자의 통찰과 매우 일치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뇌과학과의 연관성 뿐 아니라 스피노자의 통찰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도움이 된다. 과학자가 쓴 책답게 형이상학을 벗어나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하지만 깊이를 훼손하지 않으며 스피노자를 설명한다.

일부를 발췌하자면, "스피노자와 제임스는 자연스러운 영적 삶이라는 형태의 풍요로운 적응의 길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들의 신은 고통과 번민으로 인해 상실된 항동성 균형을 되찾아 준다는 점에서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신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둘 다 균형의 회복은 정교한 사고와 추론이 적절한 정서와 느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달성되는 개인적이며 내면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인간 존재는 이 신비스러운 우주에서 나타난 주체적 특성의 단순한 사례임을 시인함으로써 그 과정을 합리화했다. 두 사람 모두 우주의 가장 심오한 운율과 존재 이유는 해독할 수 없었다." "나는 영적 경험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될 수 있는 한 가장 완벽하게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강렬한 조화의 경험과 같은 것으로 보고자 한다. 이 경험과 더불어 다른 이들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이 펼쳐지게 된다. 따라서 영적 경험을 한다는 것은 잔잔하고 고요한 형태로 나타나는, 일종의 기쁨이 지배하는 특정 종류의 지속적인 느낌을 갖는 것이다. 내가 영적인 느낌이라고 부르는 느낌의 복합체의 중심은 경험들이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다. 그 경험 가운데 하나는 순수한 아름다움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평화로운 기질과 애정과 사랑의 우위에서 우러나는 행동에 대한 예상이다. 이러한 경험은 점점 확장되고 스스로를 지탱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 지속된다..." "둘째, 영적 경험은 우리에게 자양분을 준다. 나는 기쁨이나 그와 유사한 느낌이 더욱 큰 기능적 완전성에 도달하게 한다는 스피노자의 견해는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즐거움에 대한 오늘날의 과학지식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그와 같은 감정은 우리 생명의 번영에 일조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슬픔이나 그와 관련된 감정을 피해야 한다..."

스피노자에 대해 좀 쉽게 접해보고자 한다면 다른 저서인 '신학정치론'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 에티카에 비하면 아주아주 무난한 편이다.

여담인데 17세기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책자《세명의 사기꾼》[17]의 지은이로 자주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자는 이슬람교인 및 기독교인, 유태인 등 여러 사람이 쓰고 수정하고 덧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자는 한국에도 번역되어 나왔는데 이런 책자를 17세기에 썼다는 게 대단하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 받은게 17세기다. 한국판 책자에선 지은이를 스피노자의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표기했다.

6. 기타

신에 대해서는 꽤나 진보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던 철학자였다. 유일신에 대한 신학 이론은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지금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신에 대한 이론도 내일이면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는 걸 인정했다. 물론 이런 진보적인 신학 이론은 유대교에서 파면을 당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고 만다. [18]

같은 네덜란드인인 렘브란트와 같은 동네에 비슷한 시기에 살았는데 한번도 서로 만난 기록이 없다고 한다.

젊었을 적 칼침을 맞은 적이 있다. 스피노자는 파면당한 이후에도 신학과 관련해서 발칙한(?) 이론들을 익명으로 발표하면서 교인들에게 어그로[19]를 끌었는데, 참지 못한 어떤 광신자가 스피노자를 찾아가서 칼을 휘둘렀다. 익명으로 발표하긴 했는데 당시 워낙 스피노자의 이론이 눈에 띄는지라 공공연하게 스피노자가 썼다는 걸 대부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스피노자는 방어를 잘 해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칼을 맞으면서 옷이 심하게 찢어졌는데 스피노자는 "모든 인간이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그 찢어진 옷을 보관했다고 한다.

그의 이론에 흥미를 느낀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라이프니츠가 몰래 그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평생 은거하다시피 살면서 철학을 탐구했지만 여기저기서 오는 편지는 잘 받고 답장을 해주었던 모양. 그의 철학 세계를 알 수 있는 문헌 중에 논쟁을 주고받았던 편지도 상당수 있다.

노발리스는 그를 '신에 취한 사나이'라고 불렀다. '자연이 곧 신이다.'라는 범신론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니체는 그와 다른 시각에서 그를 '선구자'라고 불렀다. 니체는 스피노자의 무신론적 견해와 윤리의 기준을 외부에 두지 않고 자신의 본성 안에서 찾는 점에서 두 사람의 철학이 비슷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니체는 안티 크리스트에서,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니체는 신학정치론을 보고 '나의 진정한 선배 철학자를 찾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엥겔스는 그를 '변증법의 뛰어난 대변자'라고 여겼다.

6.1. 스피노자의 운명론에 대한 소론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Und wenn ich wüsste, dass morgen die Welt unterginge, so würde ich heute mein Apfelbäumchen pflanzen.)라는 말을 남겼다고 유독 우리나라에는 알려져 있지만, 근거는 없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가 사실 델피 신전에 쓰여져 있던 말이고, 갈릴레이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가 그의 전기작가가 한 말이지만, 어쨌든 해당 인물을 대표하는 너무도 유명한 명언으로 각인된 덕분에, 사실이야 어쨌든 그냥 그 사람이 한 말로 치고 넘어가듯이, 스피노자의 저 명언도 그냥 스피노자가 한 말로 치고 넘어가는 분위기. 단, 이는 한국 한정이다. 유럽에서는 대부분 마르틴 루터가 한 말로 알고 있다. 물론 마르틴 루터가 처음 한 말도 아니라는 것이 함정. 누가 말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덧붙여 저 말은 대개 '그래도 난 굴하지 않아!'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저 말의 철학적인 진짜 의미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내일 지구는 반드시 멸망하니 의미가 없다. 그러니 필연을 받아들이고 오늘은 오늘 할 일을 하면 된다." 나의 정해진 운명을 미리 알게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 비록 스피노자가 발언했다는 근거는 없지만, 모든 것은 필연이라는 그의 철학관을 잘 나타내 주는 명언이다. 그러니까 고증 타령은 의미 없다는 말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말은 스피노자의 사상과 모순되는 부분도 있다. 스피노자가 자연법칙으로 대표되는 신을 중요시 하는 이유는 그것이 영원불멸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말 자체가 스피노자의 내재적인 세계관과 모순되는 것이다. 즉 스피노자의 예정설의 뒷받침이 되는 것이 자연법칙의 필연성인데, 그것의 중단을 말하는 종말론은 애초에 스피노자의 철학관에서는 배제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이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며 오히려 무신론을 부추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논증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자연법칙의 필연성은 신의 본성으로부터 오는데 이는 즉 신의 지성이 자연법칙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말로 하면 신은 자신이 이해하는 대로 자연을 산출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신의 본성을 이루는 자연법칙에 예외가 등장한다면 이는 신의 본성이 신의 지성과 다른 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이는 신의 본성이 신의 지성으로부터 소외되는 일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각각이 다른 질서를 지닌다면 하나는 신이고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 소외될 수 없으며 모든것의 원인인 신으로부터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기적이 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신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같은 맥락에서 종말 또한 스피노자의 세계관에 편입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아무튼, 스피노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스피노자처럼 똑똑한 사람이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든 운명은 바꿀 수 없다는 식의 운명론을 주장한 건 아니다. 사람의 선택과 실천에 따라 결과는 당연히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선택의 주체인 것처럼 느껴지는 자기자신 역시 신=세계의 한 부분이고 그것이 전개되어 가는 과정에 속해 있을 뿐이다.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지만 선택에는 동기가 있다. 심지어 무작위로 선택을 한다고 하더라도 무작위 방식을 취하기로 한 어떤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유롭다는 환상 속에 내린 선택은 거대한 필연의 인과고리의 한 부분을 이룰 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점을 인식하면서 될 수 있는 한 넓은 전망으로 그러한 인과고리를 관조하고 그렇게 얻어진 정보와 통찰 하에 선택을 하는 사람과 순간순간의 충동이나 두려움이나 욕망이나 사회적 압력 등의 영향 속에서 좁은 시야에 갇힌 채 선택하는 사람의 삶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충동에 의해 잘못된 사랑에 빠지는 사람과, 그런 사랑에 빠졌을 때의 여러 가지 결과들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그것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든 거부하는 것이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사람 간의 차이라고 하겠다.

물론 인간의 인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세계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스피노자의 철학으로 모든 선택의 어려움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 주는 철학은 없다. 다만 어떤 부류의 태도나 습관을 지향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는 파문과 사회적 고립 속에서 온화하지만 굳건하게 자신에게 중요한 신념을 찾고 증명하고 실천하며 담백하게 살아간 스피노자의 생활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6.2. 스피노자에 대한 말말말

신에 취한 사나이 - 노발리스
모든 철학자에게 두 명의 철학자가 있다. 자기 자신과 스피노자다. - 베르그송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20]

[1] 라틴어[원문] Intellectually, some have surpassed him, but ethically he (Spinoza) is supreme[3] 러셀의 스피노자에 대한 평은 라이프니츠에 대한 평과 대비된다.[4]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믿는 신은 '스피노자의 신'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5] 도는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이 만물의 어머니라고 말하는 노자의 도덕경 1장이나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말하는 불교적 사고를 연상시키기도 한다.[6]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송과선이라는 뇌의 작은 부위가 신체와 정신 간의 연결점 역할을 할 거라고 이야기했으나 이 이론은 많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7] 나아가 신의 속성은 물질과 정신에만 국한되지 않고 무한히 있다고 하였으나, 우리의 지능이 제한되어 있어 이 두 속성밖에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는 주장도 한다. 그러나 어차피 인지하지 못하는 속성에 대해 길게 이야기할 건 없다.[8] 이 역시 노자의 천지불인을 연상시키는 관점이다.[9] 이는 무의식을 더듬어 자기 자신의 이해를 통해 심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현대 정신분석학과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10] 데카르트는 정신의 실체를 사유로, 물질의 실체를 연장으로 제시했는데, 데카르트 전문가였던 스피노자 또한 그러한 관점에 영향을 받았다.[11]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가 생각한 결여의 개념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는 역량의 철학자이며 결코 결여의 철학자는 아니지만, 그에게 있어서 어떤 대상을 한정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속성을 부정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서 a라는 사람에게 T라는 속성이 없다면, 그것은 T의 부정을 함축한다.[12] 스피노자는 이것을 '자기원인'이라고 표현한다.[13] 그러나 양태들 역시 '영원의 상 아래에서' 볼 때에는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게 된다. 왜냐하면 양태들 또한 신의 필연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14] 이것은 오늘날 '중성적 일원론'으로 정의되는 실체 이해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물리주의가 모든 것이 물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원론이 물질과 정신의 분리를 주장한다면, 스피노자의 실체 이해는 제 3의 길로서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라는 이원론 그 자체를 부정한다.[15] 그러나 기쁨을 느끼는 것이 무조건 인간에게 좋은 것이고, 슬픔을 느끼는 것이 무조건 인간에게 나쁜 것이라는 식의 해석은 지나치게 스피노자의 정동이론을 단순화한 것이다. 그는 슬픔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16] 인과적인 자연법칙이 만약 인간에게만 예외적이며,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지닌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국가 속의 국가와도 같은 존재라는 뜻의 비판이다. 즉 한 국가 안에서 법이 일률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처럼, 자연의 법칙 역시 인간과 인간 외의 것들에 대해 일률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인용하고 있는 표현이다.[17] 예수, 모세, 무함마드를 사기꾼이자 위조한 가짜로 비난하는 작가 미상의 책이다.[18] 이런 측면은 특히 "신학정치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19] 사실 어그로가 아니라 스피노자는 자신의 생각을 소신 있게 말한 것.[20] 흔히 스피노자의 말로 알려져있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한국인들은 이를 스피노자의 발언으로 알고 있지만, 서양인들은 마르틴 루터의 발언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