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2:54:19

막스 베버



서양 철학사
근대 철학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iki style="margin:-16px -11px;"<tablewidth=100%> 고대 철학 중세 철학 근대 철학 현대 철학 }}}
<colbgcolor=#545454><colcolor=#ffffff> 16-18세기
에라스뮈스 · 모어 · 마키아벨리 · 몽테뉴 · 브루노
합리주의 · 스피노자 · 말브랑슈 · 라이프니츠
경험주의 베이컨 · 홉스 · 로크 · 버클리 ·
계몽주의 몽테스키외 · 볼테르 · 루소 · 디드로 · 엘베시우스
칸트 / 신칸트주의
19세기
피히테 · 셸링 / 낭만주의: 헤르더 · 슐라이어마허 / 초월주의(미국): 에머슨 · 소로
헤겔 / 청년 헤겔학파: 포이어바흐 · 슈티르너
공리주의 벤담 ·
실증주의 콩트 · 마흐 / 사회학: 뒤르켐 · 베버
사회주의 아나키즘: 프루동 · 바쿠닌 · 크로포트킨
마르크스주의: · 엥겔스
키르케고르 · 쇼펜하우어 · 딜타이 · 베르그송
니체
}}}}}}}}} ||
<colbgcolor=#000><colcolor=#fff> 막스 베버
Max Weber
파일:Max_Weber,_1918.jpg
본명 막시밀리안 카를 에밀 베버
Maximilian Carl Emil Weber
출생 1864년 4월 21일
프로이센 왕국 작센주 에어푸르트
사망 1920년 6월 14일 (향년 56세)
독일국 바이에른 뮌헨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모교 왕립 아우구스타 황후 김나지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법학/박사)
베를린 대학교 (법학/하빌리타치온)
경력 베를린 대학 사강사
프라이부르크 대학 경제학 교수
하이델베르크 대학 국민경제학 교수
뮌헨 대학 사회과학 교수
직업 사회학자, 철학자, 정치학자, 법학자
종교 무종교
정당

서명
파일:막스 베버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사상
3.1. 방법론
3.1.1. 주관성과 객관성3.1.2. 이념형3.1.3. 인과관계3.1.4. 학문과 정치
3.2. 근대 자본주의 체계
3.2.1. 합리성
3.2.1.1. 탈주술화
3.2.2. 관료제
4. 베버 사상에 대한 비판
4.1. 호르크하이머의 비판4.2.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비판
5. 오해
5.1. 베버가 자본주의를 긍정적으로 보았는가?5.2. 베버는 반(反)마르크스주의자인가?5.3. 베버의 이론은 개신교 친화적인가?
6. 주요 저서7. 여담

[clearfix]

1. 개요

독일의 사회학자, 법학자, 철학자.

사회학에서 주관적 개념 도구인 '이념형'이라는 틀을 사용하면서도 그 이념형들의 인과관계를 설명할 때에는 주관적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아야 된다는 가치중립적 사회과학 방법론을 제시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기독교가 금욕과 노동을 사명으로 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의해 탈주술화되면서 근대 자본주의가 형성되었고 현대인들은 이 자본주의라는 쇠우리[1]에 갇히게 되었다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사회학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밖의 저서에, 동기를 중요시하는 신념정치인들은 항상 그 신념이 가져올 결과에도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 《직업으로서의 정치》,[2] 근대 자본주의와 여러 사회적 질서들을 고찰한 《경제와 사회》,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진 않았지만 세계의 대표적인 종교들을 사회학으로 분석해놓은 《종교사회학 논총》 등이 있다.

2. 생애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영역이었던 현대 독일 튀링겐에어푸르트시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계 쪽은 루터파 집안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해온 일가였으며 모계 쪽은 프랑스 출신 위그노계로, 집안을 통해 베버에게 영향을 미친 프로테스탄티즘이 그의 저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의 주요 동기로 작용하였던 듯하다.

법률가인 아버지 막스 베버 1세가 베를린에서 정치가로 활동하게 되면서 1869년 베를린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당대의 주요 정치가 및 학자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1882년 고등학교(김나지움)을 졸업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해 아버지를 따라 법학을 전공하였으나 그 외에도 경제학, 역사학, 철학, 신학 등등도 다 같이 공부한다. 당시 독일 대학생들은 맥주를 마시고 결투를 의례적으로 하곤 했는데 베버 역시 이에 어울려 병약 청년에서 꽤나 건장한 젊은이의 모습이 되었다. 1883년엔 군복무도 했으니 더욱 그러했을 터이다.

1889년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박사 학위논문 『중세 상사회사 서설』을 심사한 사람이 바로 로마사로 유명한 테오도르 몸젠이었다. 당시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려면 학위 신청자가 자신의 논문에 관해 제시한 논점 3 개를 두고 여타 학자와 신청자가 토론해야 했다. 로마사 분야 최고 권위자인 몸젠은 베버가 '식민도시(colonia)'와 '도시(municipium)'에 대해 주장한 부분에서 자신과 이견이 있다고 하여 베버의 의견에 질문했다. 그러나 몸젠은 얼마간 토론한 후 '베버의 논제가 옳다는 것에 승복하진 않지만 이 수험자의 앞날을 방해할 마음은 없다'고 말하면서 토론을 끝마쳤고, 베버의 박사 학위논문 심사는 그렇게 통과되었다. 그 후 베버는 몸젠과 편지를 자주 교환하면서 로마사를 대상으로 한 의견을 호환했다.

정치인이자 법률가였던 베버의 부친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모친과 성향이 상반되었다. 부모 사이에서 베버는 혼란을 느꼈는데 특히 아버지와 갈등이 많았다. 베버의 부친은 아내에게 군림하는 성격이었다. 베버의 모친이 자녀들을 방문하여 몇 주씩 함께하곤 하던 여행을 통제하려 하자 1897년 베버는 이 일로 부친과 크게 싸우고 화해하지 않은 채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부친이 사망하였다. 부친과 벌였던 싸움과 그 직후의 죽음, 그리고 여러 스트레스 때문에 베버는 심한 신경쇠약을 겪고 거의 6년 가까이를 휴식, 요양하며 보내었다.

1903년 이후 베버의 저작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신경쇠약 이전의 베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역사경제학의 교수로, 역사경제학의 관점으로 저작들을 저술하였으나 이 시기 이후부터는 사회학으로 이행하였다.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의 객관성』이라는 중요한 방법론 논문을 집필한 후 역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을 저술했다. 이 책의 1부는 1904년에 발표했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청교도와 자본주의의 관계 양상을 관찰한 뒤 2부를 1905년에 발표했다.

이후부터는 학자로서 게오르크 지멜, 칼 야스퍼스, 게오르크 루카치[3] 등 학자들과 교류하며 지냈고 1910년 독일 사회학회의 창립을 도우며 사회과학의 가치중립성과 객관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이전에 사변적 철학 경향을 띠었던 사회학 및 제반 학문들이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연구 방법이 도입된 사회과학으로 거듭났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군에 자원하여 하이델베르그의 육군 병원 조직을 담당하는 예비군 장교로 임명되었다. 전후 빈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강의를 다시 잡기 시작하였고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두 유명 강연을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경제와 사회》의 1부를 저술하고 1920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였다.

3. 사상

3.1. 방법론

3.1.1. 주관성과 객관성

학문에서 객관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학문은 단순한 주관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객관적인 신뢰성과 타당성을 담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한 인식의 결과는 자의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베버가 살던 시대는 모든 자연ㆍ사회현상은 법칙적으로 결정되어 있고 사회학자는 그 법칙을 찾아내는 것일 뿐이라는 사회결정론자들이 활약하던 시대였다. 실증주의나 유물론도 그 중 하나였다.[4]

하지만 베버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 문화 등을 다루는 사회학은 그 특성상, 자연현상에서 어떤 보편타당한 절대적인 법칙들을 찾아내는 과학처럼 될 수 없다.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각 시대와 장소, 그리고 연구자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학에 있어서 '객관성'은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버는 '주관성'과 '객관성', 두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한다.
모든 경험 지식의 객관적 타당성은 주어진 현실이 특정한 의미에서 주관적인 범주들에 의해서 질서화된다는 사실에만 근거한다. 그런데 이 범주들은 우리 인식의 전제를 이루며, 또한 경험 지식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진리가 가치 있다는 전제에 결부되어 있다.
Max Weber, ''Gesammelte Aufsätze zur Wissenschaftslehre, p.212~213
연구자의 관심이나 그의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 이념들이 '주관적'이라는 것을 베버는 인정한다. 그리고 그 가치 이념들은 일종의 '주관적 범주'에 속하고 그 주관적 범주는 다시 '주관적 인식 체계'를 구성한다. 다만 여기서 베버는, 주관적으로 형성된 이 이념들을 인정하는 한에서, 우리는 그 이념들이 연관되어 있는 '인과관계'를 '객관적'으로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이념'은 주관성이지만, 그 '이념들의 인과관계'는 객관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버의 사회학에서 말하는 객관성은, 과학에서 말하는 절대적 객관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논리적 과정이 다른 사람이 볼 때에도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일 수 있는가를 말하는 '상호 주관적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 된다.
현실을 논리적 의미에서의 이념형과 논리적으로 비교하면서 연관짓는 작업과, 현실을 이상에 입각해 가치 평가하면서 판단하는 작업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학문적 자기통제의 기본적인 의무다. (...) 다시 한 번 반복해 강조하면, 우리가 의미하는 '이념형'은 가치 평가적인 판단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관심하다. 즉 이념형은 순수한 논리적 '완벽성' 외에는 그 어떤 것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
Max Weber, ''Gesammelte Aufsätze zur Wissenschaftslehre, p.200
그러므로 학문은 가치를 '연관'시키는 데 있어서 이러한 이념들의 논리적 인과관계를 '중립'적으로 찾아야 되는 것이지, 어떤 이상에 입각해 그 가치를 자의적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베버는 주장한다. 즉, 우리가 학문의 주제를 정하거나 어떤 이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는 주관적인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나, 그것들의 인과관계를 연구하는 데에 이르서는 주관적인 가치평가나 가치판단이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학문은 이런 가치중립적 태도가 지켜야 그 객관성을 얻을 수 있으며, 베버는 이를 "가치 자유 (Wertfreiheit)" [5]라고 부른다.

3.1.2. 이념형

이념형의 원어는 독일어 Idealtypus이다. Ideal은 이상, 모범, 전형을 뜻하고, typus은 타입, 유형을 뜻한다. 따라서 이를 합친 Idealtypus은 '전형적인 유형, 이상적인 타입'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행위의 실제적인 과정은 그것이 본래 추구하는 이념이나 가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일관성을 결여할 수 있으며, 또한 때로는 모순적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막스 베버는 이념형을 가지고 이 현실적인 인간 행위를 경험주의적이고 사실주의적으로 모사하거나 재생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가 추구하는 바는 그보다 이를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종합함으로써 행위 주체의 의미 지향성에 대한 논리적으로 통일되고 순수한 사유상을 획득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념형은 유의미한 인간 행위에 대한 실재의 상이 아니라 일종의 가능성의 상이다.

베버에 따르면 이념형은,
하나의 관점 또는 몇 가지 관점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이렇듯 일방적으로 강조된 관점들에 부합하는 일련의 개별 현상들, 다시 말하자면 곳에 따라서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존재하거나 어떤 곳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개별 현상들을 하나의 통일적인 사유상으로 종합함으로써 얻어진다.
Max Weber, Gesammelte Aufsätze zur Wissenschaftslehre, p.191
즉, 이념형은 하나의 사유상인데, 이 사유상은 역사적 현실이 아니고, '진정한' 현실은 더구나 아니며, 현실이 거기에 하나의 예시로서 편입되어야 할 그러한 도식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보다 이 사유상은 하나의 순수히 이상적인 한계 개념으로서 의의를 가진다. 그 개념적 순수성이 현실 세계의 그 어느 곳에서도 경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의 유토피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역사적 연구의 과제는 현실에서의 수만가지로 다양한 개별적 경우가 이러한 이상적인 이념형에 얼마나 가까운지 또는 먼지를 확인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념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이 '이념형'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현실을 '비교'하고 '측정'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현실의 경험적 내용 가운데 특정한 중요 구성 요소들을 명확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념형은 경험적으로 그 진위를 밝혀내야 하는 가설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검증되거나 반증될 수 없다. 그보다 이념형은 다만 가설을 구성할 때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이를 '가설의 가설'이라고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6]

요컨대 이념형은 관점을 엄밀하게 해주고, 개념을 빠르게 기술할 수 있게 하거나 빠르게 찾을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되며, 어떤 사회 현상의 발생적 설명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가설을 어떤 식으로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도 제시한다.

3.1.3. 인과관계

베버는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인식의 객관성」이라는 논문에서, 구체적인 결과를 구체적인 원인에 귀속시키는 것이 '인과관계'라고 설명하였다. 즉 인과관계란, 우리사회에 일어나는 사회현상의 결과가 어떤 특정한 원인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그 결과와 원인을 논리적으로 결합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은 앞서 말했듯이 '이념형을 통해 가설을 세우는 것'을 말하며, 실제적인 사건의 무수한 구성 부분을 배제하고 자신의 주관적 가치 이념과 관점에 입각해 알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현상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 현실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학술적으로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일련의 '추상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주관적 관심에 따라 추상화된 이념들은, 서로 연관되는 논리 구조 속에서 얼마나 그 논리성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느냐에 따라 '객관성'을 획득한다. 이것을 베버는 "객관적 가능성"이라고 한다. 이는 "현실의 일정한 조건들을 배제하거나 변경하는 경우 무엇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인가를 밝혀보는 것"으로써 확인된다. 즉, 다양한 역사적 요소들 가운데 어느 특정한 요소를 배제하거나 변경할 경우, "사건의 과정이 우리의 관심을 위해 '결정적인 점'에서 어떻게 달리 진행되었을 수도 있었겠는가"를 묻는 것이다. 만일 '객관적 가능성'의 어떤 경우에라도 어떤 가설이 그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면 그 역사적 요소는 인과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인과적 귀속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변수를 만족시키는 논리는 없는 것이며 그것은 원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회학에서 인과관계는 과학에서처럼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필연적인 관계도 아니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처럼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우연적인 관계도 아니며, 단지 그 중간에 있으면서 인과관계의 논리적 가능성이 얼마나 '적합한가'를 말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객관적 가능성의 판단은 본질적으로 논리적 적합도에 따라 단계적인 등급을 나눌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등급판단을 통해 이 인과관계의 논리가 얼마나 사회를 논리적으로 정당하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검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사회적 행위에 대해 나름대로 그 논리적 인과관계가 유의미하게 이해되도록 그 과정과 동기를 적합하게 설명하고, 여기에서 조건에 따라 어떤 종류의 객관적 가능성이 나타날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베버의 사회학이 된다. 그리고 이에 기초한 이해야말로 사회학을 과학과 마찬가지로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접근하게 해주는 학문적 근거가 된다. 그래서 베버의 사회학을 '이해사회학'이라 부른다.

3.1.4. 학문과 정치

학문에서 어떤 주제를 선택하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주관에 달려 있지만, 그 이념형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구성하는 논리 자체는 '가치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베버의 주장이다. 즉 학문의 '논리'는 전적으로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 반면, '학문 이외의 사적 영역'에서는 가치중립을 지킬 필요가 없으며, 사실 그 개인은 '가치판단'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로 '가치판단'의 문제다. 정치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관적 가치 표상과 의미부여에 따라 행위하는 개별적인 인간들의 문제이며 과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학자는 학문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며 정치적 가치판단를 내려서는 안 된다. 정치적 목표 설정과 수단 동원 등은 정치인과 정치적 행위자들의 가치판단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놔둬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학문이 가치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면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을 뿐더러, 더 나아가 학문과 정치, 둘 중 하나는 불가피하게 다른 하나에 예속될 것이고, 이는 종국적으로 학문과 정치 모두의 존재와 그 의미 및 품위를 손상시킬 것이다. 만약 학문하는 자가 정치적 행위에 개입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다면, 그는 강의실 밖으로 나가선 그렇게 해도 좋다. 그러나 참석자들이, 또 어쩌면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곳에서 교수가 신념고백자로서의 용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은 너무 편리한 짓이다.[7]

그렇다면 학문 그 자체는 실천적이며 인격적인 '삶'과 '정치'에 대하여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베버에 따르면 학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결과에 대한 예비적인 지식과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정치에 있어서도 학문은 '각각의 정책들이 고려해야 할 사실과 그 정책의 결과와 수단은 이러저러하다'를 말해줄 수 있다. 즉, 학문은 나의 정치적 가치판단에 대해, 그 판단이 가져올 결과의 '명확함'(Klarheit)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가치판단 그 자체는 기본적으로 그 궁극적인 입장에 이르러서는 서로 다른 가치들 사이에서 중재가 불가능함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입장들 사이에서 '결단'해야 된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거기에서 무엇이 맞는지를 결단하는 것은 개인과 정치의 문제이지, 학문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학문은 개인을 이에 대한 '긍정적 답변' 또는 '부정적 답변'의 경계선 앞까지 이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경계선의 차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경험적 학문 또는 논리의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순전히 학문적인 물음인 셈이다. 그러나 '긍정적 답변' 또는 '부정적 답변' 자체는 더 이상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 또는 주관적 취향의 문제다.
Verein für Sozialpolitik, Verhandlungen des Verein für Sozialpolitik, p.582~583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선택에 따라 마음대로 해라는 말은 아니다. 베버는 정치적 가치판단에 있어서도 지켜야 기준이 있다고 강조한다. 베버에 따르면 가치판단을 통해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게 되는 정치인들은, 무엇보다도 '동기'를 중요시하는 '신념윤리'와 '결과'를 중요시하는 '책임윤리'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정치인이 '이상적'인 미래만을 지향하는 신념윤리만 강조하게 된다면, "세계가 어리석고 야비한 것이지,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며", 그 과정 중에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신념윤리를 지닌 정치인은 항상 '그 신념으로 선택된 결과에 책임을 진다'는 책임윤리를 생각해야만 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선택들을 할 수 있으며, 그 '선택에 대한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런지는 '학문'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이 결과들을 충분히 고려해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정책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신념에 따른 정열(Leidenschaft), 그에 따른 책임감(Verantwortungsgefühl), 그리고 사태를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목측능력(Augenmaß)[8]이라고 베버는 주장한다.

3.2. 근대 자본주의 체계

3.2.1. 합리성

막스 베버는 사회 속 인간의 유의미한 행위를 어떻게 학문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느냐, 즉 인간의 행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느냐를 밝히고자 했다. 그는 사회(집단)의 현상이 아닌 구성원(개인)의 행위(Social action)를 중시했다. 그렇다고 거시적인 면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그전까지 사회학이 거시적인 측면(집단)에서만 사회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베버는 거시적인 측면과 미시적인 측면의 양쪽을 포괄하여 균형을 맞추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행위'는 '행동'과 구분되는 용어로 쓰인다. 즉, 개인의 '행동'이 '자기의 견해나 관점에 기초하고 특정한 의도와 의미'를 가지게 될 때 그것은 행동(Behavior)이 아닌 행위(Action)라는 뜻이다. 결국 베버는 사회학적 분석이라는 것이, 바로 그 개인의 견해나 관점에 기초한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개인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는 지를 설명함으로써 성립된다고 믿었다. 베버에 따르면 이러한 사회적 행위는 어떤 방식으로 합리화되는 지에 따라 4가지 '이념형'으로 정립된다. (단, 4가지 행위는 서로 겹칠 수 있다.)
  1. 전통적 행위: 전통적으로 사람들이 따랐던 규범이나 종교적 믿음, 또는 그냥 전통 그 자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행위.
  2. 정서적 행위: 기분이나 감정, 아니면 정서적인 이유로 무엇인가를 정당화할 때, 그 행위를 정서적 행위라고 말한다.
  3. 가치합리적 행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세속적인 계산 행위보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이념을 '믿음'으로써 나오는 신념적 행위를 말한다. 종교적 행위, 이념적 행위 등을 들 수 있다. 쉽게 말해 행위가 유발하는 결과와 상관없이, 특정한 가치가 옳다 혹은 중요하다는 확신에만 입각하여 행위하는 유형이며, 그 행위의 '동기'를 중시한다.
  4. 목적합리적 행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위를 말한다. 돈, 명예, 권력 등의 세속적인 목적을 위한 그 수단으로서의 계산적인 행위이다. 특정한 목적을 이루려고 할 때 어떤 수단을 택해야 결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지, 또 이러한 목적이 어떤 부차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인지 예측하고 계산하는 유형의 행위이며, 그 행위의 '결과'를 중시한다. 베버는 이를 '도구적 합리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종교라는 '가치합리적 행위'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근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서의 '목적합리적 행위'가 지배적인 행위가 되었다는 것이 베버의 분석이다.
3.2.1.1. 탈주술화
탈주술화는 주술이나 마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주술'이란, 신이나 혼령 등을 위해 종교적 의식을 행함으로써 그 신이나 혼령으로부터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을 얻어내는 신앙 형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신을 믿고 교회나 절을 열심히 다니면 부자가 되거나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식의 기복신앙을 말한다. 이 세계관에서 인간은 신과 신비적으로 매개되어 있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종교적 의식을 통해 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고 신은 그러한 인간에게 복이나 벌을 내릴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주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탈주술화다.

탈주술화의 시작은 기존 종교질서를 타파하는 '예언'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물론 모든 예언이 주술의 힘을 파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언'이 있음으로해서, 기적이나 다른 수단들에 의해서 정당성을 얻은 예언자가, '예언'을 통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신성한 질서를 타파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예언자는 "신의 이름으로 세계에 '요구'를 제시했는데, 이 요구는 자명하게도 윤리적이고 금욕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9]

여기서 '예언을 들어주는 신'은 "초월하고, 인격적이고, 진노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요구하며, 처벌하는 창조신"이며, 이런 초월적 신을 믿는 개인들은 그들 스스로를 한갓 '신의 피조물'로 생각하게 되었다. 즉, 신과 인간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설정되었고, 이제 인간은 신이 원하는 또는 명하는 바에 따라 윤리적으로 행위해야 하는 '신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베버는 이 지점을 주목한다. 인간이 신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되는 바로 이 시점에서, 신과 인간이 신비적으로 매개되어 있다는 '주술'이 사라지게 되는 '종교적 탈주술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직선적인 진화론적 과정[10]이 아니라 세계의 탈주술화와 재주술화가 부단히 상호 교차하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변증법적 과정이다. 이렇게 진행된 종교의 탈주술화 과정은 칼뱅주의의 예정론에 이르러 완결되었다. 칼뱅의 예정설은 역설적으로 그 누구도 신에게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없다는 불안감[11]을 조성하였고, 그들은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벌면서도 그 돈을 쓰진 않는 '금욕적 노동의 삶' 그 자체에 가치를 두게 되었으며, 이는 자본의 축적을 유도하고 의도치 않게 근대 자본주의 체계를 발전시켰다는 것이 베버의 주장이다.
고대 유대교의 예언과 더불어 시작되고 헬레니즘의 과학적 사고와 결합되어 모든 주술적 구원 추구 수단을 미신과 독신이라고 비난했던 저 위대한 종교사적 과정, 즉 세계의 탈주술화 과정이 여기에서 완결되었다. 진정한 청교도들은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일체의 종교적 의식의 흔적을 배척했고 노래도 예식도 없이 가까운 사람의 장례를 치렀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그 어떠한 종류의 '미신', 즉 주술적, 성례전적 방식의 구원 효과에 대한 그 어떠한 신뢰심도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도서출판 길. p.182~183
베버는 종교와 더불어 과학을 세계의 탈주술화 과정을 추진한 중요한 문화적 힘으로 간주한다. 일반적으로 과학이라 함은 합리적인 사유와 인식의 체계나 방법 및 논증을 가르킨다. 과학은 세계를 초월적 존재나 초자연적 존재가 작동하는 장으로 혹은 특정한 가치나 목적이 구현되는 장으로 파악하지 않고 단지 '인과적 메커니즘'으로 파악한다. 과학의 탈주술화 과정은 크게 보아 헬레니즘에서 시작되어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과학에서 완성되었다. 먼저 그리스 철학은 기독교와 결합하면서 '구원을 얻기 위한 이성적 합리화'를 추구하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 후 르네상스 시대에는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경험을 검증하는 '합리적 실험'이 등장하였다. 이런 합리적 실험들이 뉴턴 등의 근대 과학자들에 의해, 엄밀한 수학적 언어에 의한 논증 방식과 결합되므로써 기계론적이고 인과론적인 근대과학 세계상이 정립되었다.

그런데 세계의 탈주술화 과정을 구성하고 추진하는 두 중요한 문화적 힘인 '종교'와 '과학'은, 그 과정이 진행될수록 점차 상호 간에 긴장이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그 이유는 종교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상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다. 종교적 세계관은 세계에서 신의 의지를 찾고 의미를 묻는 반면, 과학은 세계를 순전히 인과적 메커니즘으로 본다. 그리고 경험과학이 세계의 탈주술화를 철저하게 추진해 세계를 완전히 인과적 메커니즘으로 파악하면서, 과학은 원칙적으로 종교를 거부하게 된다. 그 결과 종교는 과학에 의해 비합리적인 것의 영역으로 밀려나고 과학이 합리적인 것의 영역을 독점하게 된다. 즉, 과학에 의해 종교가 탈주술화 되는 것이다.[12]

3.2.2. 관료제

베버는 지배와 권위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근거에 따라, 전통적 지배, 합법적 지배, 카리스마적 지배의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전통적 지배'는 예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왕위 계승은 장자가 해야 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옛날부터 해왔던 '전통'이기 때문이다. '합법적 지배'는 법과 규칙에 따른 지배를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각자의 부문에서 전문가로 구성된 관료제는 이 합법적 지배의 가장 순수한 형태이다. 우리가 관료들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형식상 올바른 절차를 통해 제정된 규칙이고 그들이 제한적인 강제력으로 그 규칙을 전문적으로 실행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카리스마적 지배'는 추종자들의 믿음을 근거로 작동되는 권위이다. 우리가 어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게 복종하게 되는 까닭은 그 지도자가 다른 사람들과 차별되는 능력[13]을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자격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회는 점차 전통적 지배와 카리스마적 지배로부터 벗어나 합법적 지배를 강조하는 '관료제'가 대부분의 행정을 구성하게 된다. 관료제는 합리적인 원칙에 따라 체계화된 조직이다. 관료는 위계질서 속에서 비인격적인 규칙에 따라 행동하며, 그의 업무와 권한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관료제는 국가의 행정 기구 뿐만이 아니라 기업체, 종교 단체, 군대, 정당 등 모든 대규모 조직에도 적용된다. 관료제는 현대 사회에서 법, 정치, 산업 등의 합리화의 원인이자 결과로서 점점 더 확산되는데, 그 이유는 관료제 조직이 그 어떤 다른 조직 형태보다 기술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이다. 관료제 조직은 전문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업무를 매우 효율적으로 수행한다. 베버는 현대 사회가 지속적으로 합리화되는 경향으로 나아가면서 점점 더 관료제에 의한 지배가 강화될 것이라 예측했다.[14] 또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관료제가 존재하며, 오히려 이 사회주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엄격한 관료제적 규제를 확립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많은 경우, 투표를 통해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선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선출직 카리스마형 지도자'는 관료에게 전문적인 조언을 얻고 그 이해득실을 따져 정책적 가치판단을 내리며, 그 판단이 추종자들의 이익을 가져온다고 믿어질 때 그의 카리스마는 계속해서 유지된다. 따라서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카리스마적 지배를 파악하는 것은 아직도 유효하며, 오히려 필수적이다. 카리스마라는 말은 본래 종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은총의 선물', 즉 신성한 권능을 부여받았다는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베버는 이 개념을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로만 쓰지 않았고, 사회나 일반 개인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어 이들을 기존의 흐름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자'들을 가르키는 데에 사용한다. 그는 정치인, 군인, 예술가 중에서도 대단히 뛰어난 성과를 이룬 비범한 사람들을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라고 예로 들면서, 카리스마적 지배의 정당성은 지도자 개인의 사적 능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추종자들이 그를 지도자로 '인정'하는 것에도 있다고 주장한다. 추종자들이 지도자의 능력을 확인하고 그의 인격을 신뢰하는 것에서 생겨난 자유로운 인정이, 카리스마의 유효성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4. 베버 사상에 대한 비판

4.1. 호르크하이머의 비판

베버 사상에 대한 비판은 그동안 많이 있어왔지만 그중에서도 학계에 가장 널리 공유되고 있는 비판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다. 호르크하이머는 막스 베버를 비롯해 당시 실증주의 철학자들까지 모두 '전통이론가'로 분류하는데, 전통이론은 명제들 간의 '모순 없는 유기적 결합'을 추구하기 때문에 연역적 체계와 개념의 조작과 가설에 의존하고, 인문사회과학의 문제 영역에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여과없이 적용시켜 인식 주체를 가치중립화하고 사회로부터 학문의 독립성과 자립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전통이론에 대한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은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전통이론가들은 자신의 주관적 관심, 사회적 관심, 정치적 관심을 통해 연구 주제와 대상 선정에 깊이 관여하면서도, 사실 그러한 개별 관심이 연구자와 전체 사회 간의 상호작용임을 알지 못하거나 외면한다.

둘째, 전통이론은 이론의 형성이 비역사적으로 구성되며 사회와 독립적으로 작동한다고 가정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론은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되며 그 타당성 역시 역사 사회적 상황에서 승인되기 때문이다.

셋째, 인문ㆍ사회학의 '과학화'는 사회적 사실들을 논리적 관계로 환원하여 규칙화, 법칙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 이해를 근본적으로 진전시키지 못한다.

넷째, 전통이론은 체제 옹호적이며 기존 사회의 재생산 기능을 수행한다. 전통이론은 이론의 역사적, 사회적 성격을 도외시하고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의미를 스스로 탐구하지 않기 때문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존 체제에 활용되며 정숙주의와 타협주의에 빠지게 된다.[15]

호르크하이머는 이의 대안으로 '비판이론'을 제시한다.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베버처럼 학문의 독립성과 자립성을 강조해서는 안되며, 학자는 역사적 맥락에서 사회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속한 사회를 자신의 학문을 통해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평가해야 한다. 이 비판은 어떤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생산적'이지 않고, '부정적'이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르크하이머는 진정한 이론은 '부정적(negative)'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옳은 사회에 대해 미리 규정할 수 없으며 단지 현재 사회의 나쁜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고 나쁜 것이 사라지도록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판이론은 "나쁜 것을 예상하고 폭로하는 것을 통해 더 나은 것을 실현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시도"한다.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은 당시 언론, 사회, 문화, 정치 영역에 있어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를 통해 현대의 각종 비평가들을 탄생시켰다.

4.2.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비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서
번 문단을
비판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 오해

5.1. 베버가 자본주의를 긍정적으로 보았는가?

"청교도들은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 되기를 소원했다. (오늘) 우리에게 그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금욕주의가 수도원의 골방을 뛰쳐나와 소명감에 찬 노동의 삶으로 흘러들었고, 마침내 현세의 도덕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근대 경제제도 – 기계화된, 기계에 기초한 생산의 기술적 경제적 조건에 구속된 경제체제 -라는 막강한 우주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 오늘날 이 우주는 경제적 생산 활동에 직접 종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끝없이 돌아가는 이 기계 속에 태어난 모든 개인들의 생활양식을 결정한다. 압도적인 힘으로. 아마도 화석연료의 마지막 한 방울이 타 재로 될 때까지 계속 그럴 것이다. 설교자 백스터에 의하면, 재물에 대한 관심은 성자의 어깨에 걸친, '아무 때고 벗어버릴 수 있는 가벼운 망토'같은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 망토는 쇠우리(iron cage)가 되었다. 금욕주의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영향을 끼치려 한 만큼 세상의 재화가 사람들을 지배하는 힘은 증가했고 결국 역사상 유례없이 피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 금욕주의의 정신은 쇠우리를 탈출했다. 그러나 그게 이야기의 끝일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튼, 승리에 찬 자본주의는, 기계 생산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금욕주의라는 받침대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금욕주의의 즐거운 상속자인 계몽운동의 낙관성마저도 결국 희미해지고 있다. '소명을 찾고 그런 다음 소명을 받아들일 의무'라는 생각은 이제, 더 이상 실다운 신앙에 뿌리내리지 못한 유령 같은 신조로 우리의 삶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소명의 완수"라는 개념이 최고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와 어울리지 않거나, 반대로 경제적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경우가 아니면, 가차 없이 버린다. 미국처럼 이익 추구가 어떤 구속도 없이 자유롭게 되고 종교적 윤리적 의미를 벗어버린 곳에서, 이익 추구는 순수한 경쟁열 그 자체로 된다. 흔히 이런 경쟁열은 운동 시합의 승부 같은 성격을 띤다.

이 쇠우리 속에서 누가 살게 될지, 아니면 이런 희한한 역사 전개 과정의 끄트머리에 아주 참신한 예언자들이 등장할지, 고대의 이념과 이상이 새롭게 만발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로 아니라면, 기계화의 진행으로 마른 뼈처럼 되었으면서 언제나 강박적으로 '내가 최고'라는 착각하는 인간들이 등장할까. 이런 식의 형해화[16]가 진행되면 이 긴 문명사의 끝에 '말종 인간'(the last humans)[17]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실현될 터이다. 얼이 없는, 좁아터진 전문가, 심장 없이 쾌락만 쫓는 부류들, 그러나 이 문명은 자만심에 부풀어 인류 발전의 정상에 올랐다고 상상할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마지막 구절 중..
베버는 현대사회에서 목적합리적 행위가 갈수록 더 중요시되어, 끝내 가치합리적 행위없이 목적합리적 행위만으로 합리성이 '굴러가는' 것을 경계했다. 쉽게 이야기해서 프로테스탄트의 경우, 이들이 이윤추구(목적합리적 행위)를 하는 목적은 신의 구원(가치합리적 행위)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었는데, 현대사회에서는 이윤추구만 내세울 뿐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등의 가치지향적 질문들은 정작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가치합리적 행위 없이 목적합리적 행위만으로 그 체계가 돌아가는 현대 자본주의를 베버는 stahlhartes Gehäuse, '쇠우리' (Iron Cage)라고 말한다. 그리고 베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는 '쇠우리'에 갇혀버린 우리를 암울하게 전망하고 있다.

베버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암울하게 보지 않았고, 여기에서 낙관주의적 늬앙스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의미에서 '강철외피', '강철 껍데기'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18]이 있으나, 이는 독일어를 영어로 번역하고 그 영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의 문제이지, 이로부터 '자본주의가 우리 인간에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줄 수 있다'는 식의 낙관주의적 늬앙스를 읽어내려는 해석에는 매우 많은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도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이에 대해 명백히 말한 적이 있다.
학문에 기초를 둔 생활지배의 기술을 행복으로의 길로 찬미한 것에 대해서는, '행복을 찾아낸 저 말종 인간들'에 대한 니체의 통렬한 비판에 따라서 완전히 무시해도 괜찮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강단이나 편집실에 있는 몇몇 잘난 척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누가 그걸 믿겠습니까?
《직업으로서의 학문》 이상률 옮김 p.43 [19] [20]
근대세계에 대한 베버의 시각이 잘 드러난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말미, 그리고 특히 《세계종교와 경제윤리-중간고찰(Zwischenbetrachtung)》을 비롯한 종교사회학 논문을 읽어보면, 현대사회의 합리화 경향에 대한 베버의 전반적인 시각이 자본주의 속 인간에 대해 암울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현대사회에 대한 베버의 절망 혹은 우려는 더 이상 궁극적 가치, 신념, 이상에 입각한 '합리성'이나 '자본주의'가 현대사회에서 사라져가기 때문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현대사회가 고도로 전문화, 합리화된 자본주의 사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합리성과 자본주의 자체는 우리 인간에게 어떠한 삶의 지침이 되어주거나 개인 자유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진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이 베버가 절망하는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5.2. 베버는 반(反)마르크스주의자인가?

베버가 마르크스의 이론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베버는 뮌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뮌헨 시청의 회의실에서 벌어진 세미나에서 『서구의 몰락』을 지은 저명한 역사철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21] 슈펭글러는 논쟁 도중 마르크스를 조롱했고 이에 베버는 이런 말로 마르크스를 옹호했다.
그대의 예측은 내가 그것을 보는 대신 차라리 창밖을 바라보고... 이제 태양이 빛난다고 말하고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되돌아서 나의 경건한 신자들을 향해 언젠가 비가 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그런 종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대가 그토록 심하게 비난한 마르크스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만약 그가 오늘 무덤에서 부활해 주위를 둘러본다면, 그의 예언이 범한 몇몇 중요한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만한 근거를 충분히 가질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다." [22]
Eduard Baumgarten, 《Max Weber: Werk und Person (1964)》 p.554
이는 베버가 마르크스를 전적으로 비판만 했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와 근대 세계 및 근대성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으며 그가 탁월한 분석과 해석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다. 어떤 이는 베버가 마르크스를 잘 몰랐고 피상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베버는 동시대의 그 어떤 지식인 보다도 아주 일찍부터 마르크스을 깊이 연구했던 사람이다. 베버는 그 때까지 출간했던 마르크스의 책을 모두 읽었었고, 다른 사회주의 철학자들의 책들도 그의 중요 관심사였다. 이러한 사실은 2020년에 완간된 『막스 베버 전집』에서 실증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또한 베버의 제자이자 역사학자인 파울 호니스하임에 따르면, 독일의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인 한스 델브뤼크가 베버의 책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반(反)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으로 해석한 것에 대해, 베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나는 델브뤼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물론적이다.
Paul Honigsheim, 《Erinnerung an Max Weber (1985)》 p.202

5.3. 베버의 이론은 개신교 친화적인가?

개신교에서는 베버를 개신교의 자본주의적 면모를 정당화해주는 인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베버의 이론을 공부하다보면 그에 반대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베버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탈주술화 (Entzauberung)"에서는 노골적으로 개신교에서의 '신에 대한 믿음'를 일종의 '마법'으로 취급하고 있다.
Entzauberung
1. 마법에서 구해 냄
2. 마력을 없앰
3. 미몽에서 깨어나게 함
베버의 논리를 축약하자면, '가톨릭'이 '개신교 칼뱅 윤리'를 통해 "탈주술화 (Entzauberung)"되고 남은 '노동분업-자본축적 체계'가 바로 '자본주의'다. 여기서 탈주술화에 쓰인 독일어 단어 Entzauberung는 '신성'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다. '신성'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는 따로 있다. 정확하게 말해서 Entzauberung는 (신을 믿는) '마법'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베버는 신에 대한 믿음을 일종의 마법으로 취급한 것이며, 이는 개신교(엄밀히 말하면 '종교')를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절대 아닌 것이다. 만약 그가 개신교를 그나마 우호적으로 생각했다면 적어도 "마법에서 깨어나다"라는 뜻의 Entzauberung는 절대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베버가 개신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진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이론은 '현재 개신교의 친자본주의적 성격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버는 탈주술화되는 방향이 '합리화'와 '지성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고 보았다. 베버가 절망적인 견해를 보인 것도 바로 여기에 있을 정도다. 즉, 베버는 개신교 윤리에서부터 현대의 자본주의가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자본주의는 이제 개신교 금욕주의 윤리 없이도 그 체제를 돌아갈 수 있게 만들었고, 자본주의와 개신교가 분리가 되는 이러한 '합리화'의 시대적 조류를 되돌릴 수는 없다. 따라서 베버의 논리에 충실하면, 자본주의 시대에서 개신교를 믿는 것은 그것을 정당화시켜주는 논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져서 아직 "마법에서 깨어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23] 그가 이런 과정을 설명함에 있어서 Entzauberung(탈주술화, 탈마법화)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신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가능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냉소적인 비판이 된다.
모든 분야에서 경험과학의 합리주의가 증가하며 그에 따라 종교는 점차 합리적인 것의 영역에서 비합리적인 것으로 추방되어 고작해야 전적으로 비합리적이거나 반합리적인 초인간적 힘이 된다.
Max Weber, Gesammelte Aufsätze zur Religionssoziologie (종교사회학 논총, 1988), p.564
이는 막스 베버가 니체를 탐독했다는 사실과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말미에서 니체의 '말종 인간'(the last humans)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베버는 늦어도 1894년에는 니체의 철학을 접하게 되었으며, 이보다 약간 뒤인 1895년의 프라이부르크 대학 경제학 및 재정학 교수 취임 강연 『국민국가와 경제정책』에서 니체의 철학적 개념들을 원용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는 더 명백하게 니체의 영향이 보인다. 니체의 도덕철학에 입각해서 이를 보자면, 프로테스탄티즘의 합리주의와 금욕주의는 단지 허무에의 의지가 종교적으로 표출된 것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서 전파된 합리주의적, 금욕주의적 가치와 이상은 오로지 인간의 자기 왜소화와 자기 부정 그리고 이를 통해서 종국에는 비인격체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24]

또한 자본주의는 좋은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개신교를 연관시키는 그의 논리가 개신교를 옹호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사실 드러내지 않는 개신교인이 아니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베버는 바로 위에서 말했듯이 개신교와 자본주의를 옹호하지 않았을 뿐더러,(단지 그것을 하나의 이념형으로 분석했을 뿐이다.) 자신이 무교라는 사실도 공개적으로 밝히고 다녔었다.
Though the influence of his mother's Calvinist religiosity is evident throughout Weber's life and work as he maintained a deep, lifelong interest in the study of religions, Weber was open about the fact that he was personally irreligious.

어머니의 독실한 칼뱅주의에 영향을 받아, 베버의 삶과 작업 내내 종교 학문에 관심을 오랫동안 깊게 가졌던 것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베버는 그가 개인적으로 무교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공개적이었다.
Gerth, Hans H. [es], and C. Wright Mills. 1948. From Max Weber: Essays in Sociology

6. 주요 저서

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1f2023> 중세 상사의 역사[25]
Zur Geschichte der Handelsgesellschaften im Mittelalter
<colbgcolor=#fff,#1f2023> 1889년
국가법 및 사법의 의미에서 본 로마 농업사[26]
Die römische Agrargeschichte in ihrer Bedeutung für das Staats- und Privatrecht
1891년
동엘베강 유역의 농업노동자 실태
Die Verhältnisse der Landarbeiter im ostelbischen Deutschland
18911892년
거래소
Die Börse
18941896년
국민국가와 경제정책[27]
Der Nationalstaat und die Volkswirtschaftspolitik
1895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1904-1905년
직업으로서의 학문
Wissenschaft als Beruf
1919년[28]
직업으로서의 정치
Politik als Beruf
1919년[29]
종교사회학 논총 1~3
Gesammelte Aufsatze zur Religionssoziologie I–III
1920-1921년
음악의 합리적이고 사회학적인 기초[30]
Die rationalen und soziologischen Grundlagen der Musik
1921년
경제와 사회[31]
Wirtschaft und Gesellschaft
1921-1922년
일반경제사[32]
Wirtschaftsgeschichte
1923년
사회 논총[33]
Gesammelte Aufsätze zur Sozial
1924년

7. 여담

  • 대한민국 교육과정에는 사회 문화, 생활과 윤리, 비문학 영역 등에서 잘 다루고 있다. 사회문화에서는 계급론으로 소개되고 있고 생활과 윤리에서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이론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다소 비중이 적은 단원이라 그런지 막스 베버를 그저 금욕주의 정신이나 해석한 한낱 경제학자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실 중고등학교에서는 현대에 미친 그의 지대한 영향과 이론 체계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막스 배버를 대학교에서 접하게 되었을 때 그의 높은 위상에 새삼 놀라게 된다. 사실 문과는 대학 과정에서 베버를 피하기 쉽지 않다.
  • 주의해야 할 것은, 베버는 당초 기능론자가 아니다. 당장 '사회란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행동과 동기가 중요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사회 각 부분은 전체적인 기능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사상의 대변자일 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베버를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비교하여 설명하다 보니 '마르크스=갈등론, 베버=기능론' 식으로 어설프게 엮어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베버의 '계층론'이 마르크스의 '계급론'과 대조점이 있기는 해도, 그렇다고 해서 계층론과 기능론이 같은 맥락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사회문화 시간에도 베버를 기능론자로는 분류하지 않는다. 거시적 사회이론에 속하는 기능론/갈등론과는 달리, 베버의 행위이론은 미시적 사회이론에 속하기 때문. 결국 '베버=기능론' 인식은 잘못된 지식이 기형적으로 퍼져 있다는 반증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현상 역시 베버의 사상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집단의 인식이란 집단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과정이 아니라 영향력을 지닌 소수의 의도에 의해 주도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 '좌파의 마르크스, 우파의 막스 베버'라고 대립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도식은 후대에 왜곡되어 만들어진 해석일 뿐이다. 사실 베버는 현대 우파의 기준에서 보면 상당히 좌파적 시각을 가졌고, 우파가 제일 자주 인용하는 사회학자는 에밀 뒤르켐이다. 사실 에밀 뒤르켐도 우파라고 보긴 어려운 사람이라, 차라리 우파 쪽에선 사회학자가 아니라 경제학자인 슘페터를 끌고 오는게 나을 지경이다.[34] 또한 카를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사망(1883년)할 당시 막스 베버는 대학생이었으므로 직접 학자로서 두 사람이 마주칠 일이 없었다. 베버는 이후에도 마르크스의 연구를 어디까지나 학문상 연구하고 비판하는, 사회학자나 철학자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막스베버는 "마르크스와 니체를 부정하는 학자는 정직하지 못한 학자"라고 이야기를 한 바 있으며, 베버 본인도 당대부터 이미 좌파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르크스를 무조건적으로 인정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닌 비판적 계승에 가깝다.
  • 막스 베버는 1918년 말부터 비스바덴,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하이델베르크, 퓌르트, 카를스루에에서 여러 차례 대중연설을 하고 다녔다. 카를스루에에서는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활동을 막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우유부단함을 비판하면서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정신병원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동물원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연설하기도 했다.
  • 카를 마르크스를 흔히 '막스(맑스)'라고 줄여부르는 것 때문에, 마르크스와는 상반된 성향과 이론을 지녔음에도 한국에서 막스 베버의 책을 읽다가 빨갱이로 오해받았다(...)는 식의 경험담이 심심찮게 들린다. 유명한 야사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같은 막스 베버의 저서를 읽다가 '너 맑스 책 가지고 있으니 빨갱이지?'라며 잡아갔다는 것. 군사정권 시절의 흔한 도시전설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1988년 ~ 2004년에 존속했던 공안문제연구소에서 2001년에 기무사의 의뢰를 받아 찬양·동조 서적으로 지정했던 어이없는 일이 21세기에 일어나기도 했다.# #
  • 막스 베버의 형제들은 독일 현대 학계ㆍ정계의 먼치킨이라 할 수 있다. 막스 베버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동생이 그 유명한 《공업입지론》의 저자 '알프레트 베버(1868~1958)'이다. 막내 동생 '칼 베버'는 독일 근현대를 관통하는 유명한 사법행정관료였다. 막스 베버는 어머니의 경건한 삶을 그대로 따랐지만, 동생들은 달랐다. 알프레트 베버는 형과는 정반대로 세속적인 학풍을 따랐고, 카를 베버 역시 현실 법률과 관련된 일을 맡아 했다.
  • 막스 베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의 박물관이 일요일에 휴관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후 미국을 프로테스탄스 정신의 모범으로 숭상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동시대 미국의 풍자작가 앰브로스 비어스는 "월요일이란,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 다음날"이라고 비꼰 것을 보면, 당대 미국 사회가, 자본주의라면 몰라도, 프로테스탄트들이 모범적이라고 주장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베버는 미국에 가기 전에 이미 1부를 출판사에 보냈었고, 2부는 미국에 갔다 온 이후에 출간하기는 했으나 이 2부에는 미국 체험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베버가 이 책을 미국 자본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 썼다고는 보기 힘들다.[35]
  • 1905년에 러시아에서 최초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러시아어를 배웠다.#
  • 사회학자로 유명하지만, 원래는 상법학자 출신이다.[36] 이를 두고 법사회학 수업시간에 교수가 '법학을 배워도 오히려 위대한 사회학자가 될 수 있다.'라고 농반진반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1] 쇠로 만든 우리, 쇠로 만든 철창을 말한다.[2] 영어번역가가 중역하면서 《소명으로서의 정치》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막스 베버가 당시 학생들에게 직업관련 강의를 했던 강의록을 옮긴 것이라 엄밀히 말해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맞다. 참고로 한국번역명 《소명으로서의 정치》의 번역은 영어 중역이라 독일어 원문과 비교하면 차이점이 많고, 임의로 해석해 놓은 부분들이 많다.[3] 루카치는 이 당시 신칸트주의 우파에 속하던 인물이었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하며 베버와 멀어지게 된다.[4] 그렇다고 베버가 이들을 전적으로 부정한 것도 아니다. '주관'과 '객관'의 조화를 말했던 것이기에 '객관'만 강조하는 사회학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지, 실증주의나 유물론을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단지 실증주의나 유물론은 전체의 절반(객관)에 불과하기 때문에, 베버는 나머지 절반인 '주관'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5] 학문은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야 된다는 것. 즉 중립적이어야 된다는 것.[6] Max Weber, Gesammelte Aufsätze zur Wissenschaftslehre, p.190[7] 《직업으로서의 학문》 이상률 옮김. p.61[8] Augenmaß에서 Augen는 '눈'을 뜻하고 maß은 '비례ㆍ측정하다'는 뜻이다. 즉 "눈으로 측정하는 능력", "눈으로 근사하여 양이나 길이를 판단하는 능력"을 뜻하는 단어로, 베버는 이 단어를 "흥분하지 않고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는 능력"이라는 의미로 썼다. 사실 베버는 이를 통해 독일 헌법의 원칙 중 하나인 '비례성의 원칙'(Verhältnismäßigkeitsprinzip)#1#2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즉 정치인은 자신의 정책이 상황에 비례하는 적합한 조치였는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Augenmaß는 정치적 줄타기를 잘해라는 뜻이 아니다![9] Max Weber, Gesammelte Aufsätze zur Religionssoziologie, p.257[10] 허버트 스펜서의 진화론적 사회학을 말하는 것이다.[11] 누가 선택되었는지는, 선택하는 신만이 알 수 있을 뿐, 피조물인 인간은 알 수 없다는 것이 칼뱅의 논리이기 때문.[12] "모든 분야에서 경험과학의 합리주의가 증가하며 그에 따라 종교는 점차 합리적인 것의 영역에서 비합리적인 것으로 추방되어 고작해야 전적으로 비합리적이거나 반합리적인 초인간적 힘이 된다." Max Weber, Gesammelte Aufsätze zur Religionssoziologie, p.564[13] 돈, 권력, 힘 등 추종자들보다 뛰어난 자신의 능력을 추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가부장적 가정에서 아버지가 돈을 벌어다 주는 것, 광전사가 그 광기어린 전투적 능력을 보여주는 것, 종교지도자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 등등이 있다.[14] "그 살아 있는 기계가 죽은 기계와 협동하여 미래의 저 예속의 틀을 만들어 내고 있다. (...) 우리 인간은 아마도 언젠가는 그 예속의 틀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관료제는 그 어떤 다른 지배 구조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것을 훨씬 더 잘 수행하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 『정치 논집』 p.151[15] 『막스 호르크하이머, 도구적 이성비판』 이하준 저, p.5~6[16] 내용은 없이 뼈대만 있게 된다는 뜻으로, 형식만 있고 가치나 의미가 없게 됨을 이르는 말.[17] 니체는 '노예 도덕'을 가진 인간을 두고 '말종인간'이라고 말했다.[18] 우리나라 일부 학자들이 영어판본을 다시 한국어 판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였다. 애초에 독일어 판본이 있는데 굳이 영어판본을 선택하고 오해를 하는 이유는 뭐냐는 비판을 받는다.[19] "행복"을 강조문법으로 쓴 것은 해당 책의 본문에서의 강조.[20] 이상률은 '말종 인간'을 '최저인(最低人)'으로 번역했다. 이는 (der letzte Mensch; the last humans)을 다르게 번역한 것으로, 여기서는 위에서의 번역과 동일하게 '말종 인간'으로 번역해놓음.[21] 슈펭글러는 보수혁명 운동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사회주의를 주장했으나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한 프로이센 사회주의를 적극 내세웠다.[22] 구약성서 창세기 제2장 22-23절에 나오는 말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즉, 현 시대의 모습이, 마르크스 자신의 주장에서 나온 예언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확신하는 말이다.[23] 신과 인간의 분리가 일어나 신이 더이상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간섭하지 않는 그런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합리화' 과정이 일어난 것이다. 즉 인간이 신의 영역을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믿었던 것이 개신교의 탈주술화 과정의 첫단계였고 여기서 역설적으로 그 종교에서 벗어나게 되는 실마리가 얻어졌다는 베버의 주장이다. 이후 이런 지적에, 여러 신학자들이 '영적'인 신앙을 강조하게 된 것도 여기에 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이를 '세속화' 과정이라고 부른다. 자세한 내용은 찰스 테일러 문서 참조.[24] 《막스베버: 통합과학적 인식의 패러다임을 찾아서》 p.639[25] 베를린 대학 법학박사 학위 논문.[26] 교수 자격 논문.[27]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 취임 강연.[28] 내용이 된 강의는 1917년에 했고 이 내용을 1919년에 책으로 발간함.[29] 내용이 된 강의는 1919년에 했고 그해에 바로 책으로 발간함.[30] 사후에 출간.[31] 베버의 마지막 미완성 유고작을 사후에 출간.[32] 베버가 1919-20년 겨울 학기 동안에 「보편적인 사회적, 경제적 역사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묶은 것. 사후에 제자들이 편집하여 출간.[33] 사후에 부인 마리안느 베버가 편집하여 출간.[34] 재미있게도 슘페터는 보수 경제학자로 통함에도 사회 분석에서 베버의 이론과 매우 유사한 논리를 전개했다. 이것도 베버가 우파로 잘못 알려지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자는 추구하는 방향이 완전히 달랐다. 오늘날 베버 사상이 완전히 잘못 해석되어 퍼진 낭설들의 경우 오히려 슘페터의 사상과 맞아떨어진다.[35] 미국 여행 이후에 출간된 제2부에서도 그곳에서의 체험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단지 두 군데, 그것도 각주에서 미국 체험이 언급될 뿐이다. 만약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제2부가 미국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면, 거기에는 3개월간의 미국 체험이 훨씬 더 많이 언급되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집필의 직접적인 동기가 베버 자신이 미국 자본주의의 눈부신 발전에서 받은 깊은 인상과 감명에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길, 2010, p.584)[36] 이와 묘하게 대비되는 예로, 니클라스 루만은 법학을 배운 공무원 출신 사회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