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22 18:25:10

막스 베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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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사상4. 여담

1. 개요

막시밀리안 카를 에밀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 1864년 4월 21일 ~ 1920년 6월 14일)는 독일사회학자, 철학자, 정치학, 법학자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냉전 이후 상당히 축소된 현대 정치학계나 사회학계에서 뛰어난 영향력을 끼친 학자로 평가받는다.

다만 '좌파의 마르크스, 우파의 막스 베버'라고 대립시키는 도식은 후대에 만들어진 해석일 뿐임을 명시한다. 카를 마르크스가 사망(1883년)할 당시 막스 베버는 일개 대학생이었으므로 직접 학자로서 두 사람이 충돌할 일이 없었다. 베버는 이후에도 마르크스의 연구를 어디까지나 학문상 연구하고 비판하는, 사회학자나 철학자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다.[1]

2. 생애

당시 프로이센의 영역이었던 독일 튀링겐에어푸르트시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친가와 외가 모두 신교 집안이었다. 부계 쪽은 루터파 집안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해온 일가였으며 모계 쪽은 프랑스 출신 위그노계로, 집안을 통해 베버에게 영향을 미친 프로테스탄티즘이 그의 저작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주요 동기로 작용하였다고 여겨진다.

법률가인 아버지 막스 베버 1세가 베를린에서 정치가로 활동하게 되면서 1869년 베를린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 곳에서 당대의 주요 정치가 및 학자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1882년 고등학교(김나지움)을 졸업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해 아버지를 따라 법학을 전공하였으나 그 외에도 경제학, 역사학, 철학, 신학 등등도 다 같이 공부한다. 당시 독일 대학생들은 백 년 뒤 한국 대학생처럼 맥주를 마시고 결투를 의례적으로 하곤 했는데 베버 역시 이에 어울려 병약 청년에서 꽤나 건장한 젊은이의 모습이 된다. 1883년엔 백 년 뒤 한국 대학생처럼 군복무도 했으니 더욱 그럴 것으로 보인다.

1889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박사학위 논문 "중세 상사회사 서설"을 심사한 사람이 바로 로마사로 유명한 테오도르 몸젠이었다. 당시 도이칠란트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학위 신청자가 자신의 논문에 관해 제시한 논점 삼 개를 두고 여타 학자와 신청자가 토론해야 했다. 로마사 분야 최고 권위자인 몸젠은 베버가 '식민도시colonia'와 '도시municipium'에서 자신과 이견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베버의 의견에 질문했으나 얼마간 토론한 후 '베버의 논제가 옳다는 것에 승복하진 않지만 이 수험자의 앞날을 방해할 마음은 없다'고 말하면서 토론을 끝마쳤고 베버의 박사학위논문 심사는 그렇게 통과되었다. 그 후 베버는 몸젠과 편지를 자주 교환하면서 로마사를 대상으로 한 의견을 호환했다.

정치인이자 법률가였던 베버의 부친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모친과 상반된 경향을 보였고 그 사이에서 베버는 혼란을 느꼈으며 특히 아버지와 갈등이 많았다. 베버의 부친은 아내에 대해 군림하는 성격이었는데 베버의 모친이 자녀들을 방문하여 몇 주씩 함께하곤 하던 여행을 통제하려 하자 1897년 베버는 이 일로 부친과 크게 싸우고 화해하지 않은 채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부친이 사망한다. 부친과의 싸움과 그 직후의 죽음 및 여러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장애를 겪은 베버는 심한 신경쇠약을 겪고 거의 6년 가까이를 휴식, 요양하며 보내게 된다.

1903년 이후 베버의 저작들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신경쇠약 이전의 베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역사경제학의 교수로, 역사경제학의 관점으로 저작들이 저술되었으나 이 시기 이후부터는 사회학으로 이행하게 된다.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의 객관성"이라는 중요한 방법론 논문을 집필한 후 역작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저술한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1부는 1904년 발표했으며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청교도와 자본주의의 관계 양상을 관찰한 뒤 1905년 2부를 발표한다.

이후부터는 학자로서 게오르그 짐멜, 칼 야스퍼스 등 학자들과 교류하며 지냈고 1910년 독일 사회학회의 창립을 도우며 사회과학의 가치중립성과 객관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이전에 사변적 철학 경향을 띄었던 사회학 및 제반 학문들이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연구 방법이 도입된 사회과학으로 거듭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빈 대학뮌헨 대학에서 강의를 다시 잡기 시작하며 "소명으로서의 학문"과 "소명으로서의 정치"라는 두 유명 강연을 한다. 마지막으로 "경제와 사회"의 1부를 저출하고 1920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다.

3. 사상

막스 베버는 사회를 체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는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구비하지 않은 헛된 개념으로 보았다. 사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는 사회(집단)의 현상이 아닌 구성원(개인)의 행위(Social action)를 중시했다.[2]
  1. 행위(Action)행동(Behavior)과 구분되는 용어로 쓰인다. 즉, 개인의 행동자기의 견해나 관점에 기초하고 특정한 의도와 의미를 가지게 될 때 그것은 행동이 아닌 행위라는 뜻이다.
  2. 결국 사회학적 분석이라는 것은, 바로 그 자기의 견해나 관점에 기초한 의미를 지닌 행위를 설명함으로써 성립된다고 믿었다.
  3. 당사자(사회 구성원)의 행위가 합리적(당시의 기준을 근거로)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고, 그것을 다시 '이념형(ideal type)'이라는 것으로 구분해 총 4가지의 행위 유형을 만들었다.
  4. 목적합리적 행위 : 개인은 행위 자체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평가한다. 내가 시험을 잘 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공부를 평소 열심히 하는 것도 있고, 벼락치기를 하는 것도 있고, 커닝을 하는 것도 있다. 개인은 이러한 여러 수단으로서의 행위 중에서 어떤 게 더 나은지 저울질을 하게 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쉽게 말해 특정한 목적을 이루려고 할 때 어떤 수단을 택해야 결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지, 또 이러한 목적이 어떤 부차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인지 예측하고 계산하는 유형의 행위를 의미한다.
  5. 가치합리적 행위 : 물리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수단 계산보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이념을 중시하므로써 나오는 행위. 가장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종교적 지침이다. "기독교인은 (신이 명하는 바를) 올바르게 행하고, 결과는 하나님 뜻에 맡긴다"라는 말은 목적합리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에게는 비합리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가치관을 바탕으로 일관적인 행동을 취해 목적합리적 행위까지 결합해내는 유형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해 행위가 유발하는 결과와 상관없이, 특정한 가치가 옳다 혹은 중요하다는 확신에만 입각하여 행위하는 유형이다.
  6. 정서적 행위 : 행위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행위 자체를 위한 행위로서 동작한다. 이것은 가치합리적 행위와 유사하나, 이 경우 그 행동을 지배하는 명확한 근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런 생산성 없는 놀이나 오락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7. 전통적 행위 : 아무 생각 없이 평소 하는 짓 그대로 하는 걸 말한다.

위의 이념형을 기반으로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저술하였다. [3] 그에 의하면 당시 자본가들의 자본주의 행위는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목적합리적 행위이나, 그 근간에는 가치합리적 행위를 두고 있다[4] . 즉 그들의 자본주의 행위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있는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청교도)적 윤리관[5]하에서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낭비하거나 향락용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이를 근대 자본주의 정신ethos이라 함).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세속적인 가치관에 종교적인 윤리관이 매우 깊게 박혀 있는 현상으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특이하다.
(여성을 광산에 밀어넣고, 미성년자를 공장에 밀어넣는 것이 청교도 윤리인지는 의문이다. "돈이 없으면 아사하는 것이 자연법칙(=정의, 진리)" 라 대놓고 말하던 1847아일랜드 대기근 시기에서 수십 년이 지났지만 자본가들이 노동자 인권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스패너 대신 총포를 들 수 있음이 증명된 1922년 소련 성립까지 기다려야 했다. )

베버는 이렇게 사람들의 행위 기저에 깔려있는 동기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때문에 마르크스의 이론 역시 그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가정은 사람은 이윤동기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인데, 베버는 사람은 이윤동기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동기가 사람의 행위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베버는 사회현상들 간의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개념을 중시했는데, 이는 요즘말로 하면 (인과관계가 아닌)상관관계 정도에 가까운 개념이다. 즉 사회현상에서는 어떠한 보편적 법칙을 찾기가 무척 힘들기 때문에 개별현상들이 왜 일어나는지 유심히 살펴보고, 그 결과를 통해 현상들 간의 상관관계를 찾는 것이 (비현실적인 가정을 많이 필요로 하는)일반적, 보편적인 사회법칙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거다. 역사는 5단계로 진화하는 '필연'을 가진다고 주장한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완전 대비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와 베버를 각각 좌익과 우익의 대비로 보면 절대 안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사회문화 과목에서 베버를 기능론자, 마르크스를 갈등론자로 써놔서 베버 vs. 마르크스 구도가 좀 더 쉽게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듯 하다. 틀린 분류는 아니긴 한데, 사회학 이론이 기능론과 갈등론으로만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뭣보다 베버의 이론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비판하긴 했지만,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탐구하는 영역도 많이 다르다.

베버는 현대사회에서 목적합리적 행위가 갈수록 더 중요시되어, 끝내 가치합리적 행위없이 목적합리적 행위만으로 합리성이 '굴러가는' 것을 경계했다. 쉽게 이야기해서 프로테스탄트의 경우, 이들이 이윤추구(목적합리적 행위)를 하는 목적은 신의 구원(가치합리적 행위)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인데, 현대사회에서는 이윤추구만 내세울 뿐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등의 질문들이 정작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가치합리적 행위 없이 목적합리적 행위만으로 합리성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통 stahlhartes Gehäuse, '쇠우리'라고 번역한다(Iron Cage, 탈콧 파슨스의 번역). 이 번역을 통한 해석으로 베버가 현대사회를 암울하게 봤다는 것이 존재하나, 다른 한편으로 베버가 현대사회를 암울하게 보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강철외피', '강철 껍데기'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합리성이 '굴러가는' 데에 있어서 강철구의 겉은 목적합리적 행위지만, 가치합리적 행위인 그 강철구의 내용물이 비어있다는 것이다. 즉 파슨스의 번역에서 현대인은 '쇠우리'에 갇혀 절망에 빠진다는 뉘앙스를 갖지만, '강철외피', '강철 껍데기'라는 번역에서는 그 시대의 현대인들이 그 강철구의 가치합리적 행위의 내용물을 새롭게 채워나갈 수 있다는 뉘앙스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베버가 현대사회를 그렇게 암울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베버는 미국 방문 당시, 발전하던 미국을 합리성의 첨단이라고 여기고 들떴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세계에 대한 베버의 시각이 잘 드러난 "소명으로서의 학문"이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말미, 그리고 특히 "세계종교와 경제윤리-중간고찰(Zwischenbetrachtung)"을 비롯한 종교사회학 논문을 읽어보면, 현대사회의 합리화 경향에 대한 베버의 전반적인 시각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현대사회에 대한 베버의 절망 혹은 우려는 위에서 쓴 것처럼, 더 이상 궁극적 가치, 신념, 이상에 입각한 행위가 현대사회에 사라져가기 때문에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베버가 바라본 현대사회는 고도로 전문화, 합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가치, 신념, 이상의 객관성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이다. 고로 현대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합리화되고 기술적으로 발전된 것은 명백하지만, 이 합리성이나 기술성 자체가 의미있는지의 문제조차도 객관적으로 증명해낼 수 없다는 점이 베버가 절망하는 주된 이유라 할 수 있다. 쇠우리의 번역에 대한 논쟁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로부터 '현대에 새로운 가치를 채워나갈 수 있다'는 낙관주의적 늬앙스를 읽어내는 해석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다만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를 야기했다는 베버의 관점은 21세기 기준으로는 굉장히 고전적인 관점이며 반박도 많이 쌓여있다. 역사학자 Peter Marshall은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루터는 만약 근대가 그를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한다면 격렬히 부인할 것이다. 베버의 사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잘못 전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는 하지만, 19세기 후반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주의자와 청교도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고무했다는 영향력 있는 이론을 내놓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불안한 칼뱅파는 물질적 성공을 예정된 구원을 받을 가능성의 표지로 해석했다. 17세기와 18세기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의 명백한 경제적 발전은 베버의 테제를 얼마간 뒷받침하지만, 근래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 테제에 설득력이 없다고 보면서 거리를 둔다. 경건한 스코틀랜드의 경제가 낙후되었던 사실로 알 수 있듯이, 칼뱅주의 문화와 자본주의적 번영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성은 없었다. 자본주의적 번영은 오스만 제국이 팽창한 15세기 이래 경제적·정치적 우위가 지중해에서 (가톨릭권 프랑스를 포함하는) 대서양 세력들로 넘어간 더 장기적인 추세의 일부였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인다."
「The Reformation」 中

실제로 베버는 루터를 존중했지만, 루터주의는 프로테스탄트적 금욕 정신이 결여되어 있어서 가톨릭과 다를 바 없다며 평가를 매우 짜게 내리기도 했다. 그는 오로지 칼뱅파와 침례교도들만이 진정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실천한다고 보았다.

또한 베버의 이론은 가톨릭 문화 기반인 벨기에, 룩셈부르크, 북이탈리아, 독일의 라인란트 지방들이 모두 산업화에 성공했다는 사실과도 충돌한다.

물론 이는 베버의 이론이 워낙 오래되어서 그만큼이나 반박이 많이 쌓였기에 비로소 비판을 듣는 것이지, 21세기 기준으로도 자본주의를 설명할 때 베버의 이론은 여전히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4. 여담

  • 카를 마르크스를 흔히 줄여 부르는 이름인 '막스(맑스)' 때문에, 마르크스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성향과 이론을 지녔음에도 이름에 '막스'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빨갱이 취급을 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유명한 야사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같은 막스 베버의 저서을 읽다가 '너 맑스 책 가지고 있으니 빨갱이지?'라며 잡아가는 것. 도시전설로 치부하는 의견도 있긴 한데 도시전설이라 하기엔 실제 경험담이 너무 많다. 그리고 80년대 반공 군사독재정권은 물론이고 심지어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이다. #
  • 막스 베버의 형제들이 독일 현대 학계ㆍ정계의 먼치킨이라 할 수 있다. 막스 베버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동생이 그 유명한 공업입지론의 저자 알프레드 베버이다. 막내 동생 칼 베버는 독일 근현대를 관통하는 유명한 사법행정관료였다. 막스 베버는 어머니의 경건한 삶을 그대로 따랐지만, 동생들은 달랐다. 알프레드 베버는 형과는 정반대로 세속적인 학풍을 따랐고, 카를 베버 역시 현실 법률과 관련된 일을 맡아 했다.
  • 막스 베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의 박물관이 일요일에 휴관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후 미국을 프로테스탄스 정신의 모범으로 숭상했다는 일화가 있다. 정작 동시대 미국 작가 중 한명은 당시 미국사회를 "월요일이란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 다음날"이라 풍자한 바 있다.

[1] 막스베버는 마르크스와 니체를 부정하는 학자일수록 덜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으며, 베버 본인도 당대에는 좌파로 분류되었다. 물론 당대 분류일 뿐이며, 마르크스를 무조건적으로 인정했느냐 하면 또 아닌 비판적 계승에 가깝다.[2] 사물이나 현상을 전체에 관계된 면에서가 아니라 여럿 중에서 하나씩 따로 나뉘어 포착하여 분석하는 관점이라고 통칭된다. 자세한 건 수능 사회탐구영역의 사회문화 참고[3] 사실 상기한 행위유형에 기반해서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저술했다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베버의 4가지 행위유형은 1922년 저술된 "경제와 사회(Wirtschaft und Gesellschaft)"의 1장에 등장하며, 초기 버전이라 볼 여지가 있는 "이해사회학의 몇 가지 범주에 관하여(Über einige Kategorien der verstehenden Soziologie)"라는 논문이 저술된 것은 1913년이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1904-5년에 집필되었다. 베버의 연구는 대체적으로 개별사회현상들간의 상관관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므로 그렇게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4] '근간'이라기 보다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이윤 추구행위가 서로 '선택적 친화력'에 의해 결합되어,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서구의 자본의 축적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그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이렇게 언뜻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 간의 결합을 '설명'하려는 것을 베버는 '성좌적 배치'라고 불렀다. 물론 이게 '설명'인지 아니면 그저 '나열', '묘사'에 불과한 것인지의 문제가 존재한다.[5] 종교 개혁으로 발생한 청교도주의는 모든 일은 숭고한 것이니 자신이 맡은 소명에 지극히 충실하라. 그러면 돈은 알아서 굴러오는 법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 경제적인 목적보다는 정치적인 목적, 특히 가톨릭 교회에 대한 공격을 목적으로 한 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