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9:00:54

청년 헤겔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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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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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Young Hegelians | 청년 헤겔학파[1]

청년기 헤겔의 견해를 급진적으로 재해석하여 기존의 프로이센 체제를 비판하려 한 운동. 헤겔 사후 발흥하여 1840년대 중반에 분해되는 것으로 끝난다.

청년 헤겔학파는 공통된 견해를 가진 학자들의 집단이 아니라, 헤겔주의 내의 특정한 경향에 가깝다.[2] 그렇기에 청년 헤겔학파의 범위는 상당히 애매하고, 통일적인 입장 또한 없다시피하다. 그저 헤겔주의 내부의 여러 인물들 중 급진적인 성격을 띄던 이들을 대충 묶어서 청년 헤겔학파라 부르는 것이다.

청년 헤겔학파는 청년기 헤겔 변증법의 혁명적인 성격에 집중함으로서 헤겔 철학의 보수성을, 그리고 나아가 기독교와 프로이센 체제를 비판하려고 하였다. 이들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헤겔 철학에서의 절대정신을 기각하고 그 자리에 대신 인간을 놓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름은 헤겔학파인데도 정작 속한 인물은 반헤겔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청년 헤겔학파는 프로이센 체제에서 이성이 완전히 실현되었다는 노년기의 헤겔과 노년 헤겔학파의 견해를 부정하고, 대체로 급진적인 성격을 띄는 정치사상을 전개했는데,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사회주의아나키즘 같은 당대의 급진적 사상들과 깊은 연관을 맺기도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는 카를 마르크스막스 슈티르너, 미하일 바쿠닌 등등이 있다.

이렇듯이 청년 헤겔학파는 그저 급진적 사상을 가진 이들의 모임이나 경향에 불과했는데, 이는 이후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막스 슈티르너 사이의 논쟁으로 인한 청년 헤겔학파 분해의 씨앗이 된다.

2. 역사

청년 헤겔학파는 헤겔 사후 일어난 헤겔학파의 분열의 산물이다. 헤겔 철학은 청년기에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체제비판적인 색채를 띄었던 반면, 장년기에는 프로이센의 관변철학적인 색채를 띄었다. 헤겔이 죽자 헤겔 철학에 내재된 이 상반되는 두 경향에 대한 논쟁이 불이 붙었고, 헤겔학파는 청년 헤겔학파와 노년 헤겔학파로 분열된다.

이러한 분열은 헤겔 변증법의 양면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한편으로는 정립된 것, 주어진 것을 부정함으로서 일어나는 발전과 변화를 강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된 것의 복귀로 일어나는 발전을 강조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부정의 부정을 또 다른 부정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긍정으로 볼 것이냐의 차이이다. 전자의 입장에서 기독교와 프로이센 체제에 대한 부정을 택한 쪽이 청년 헤겔학파였고, 후자의 입장에서 프로이센 체제에 대한 긍정을 택한 쪽이 노년 헤겔학파였다.

이러한 분열의 직접적인 시작점으로는 흔히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제자인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1835년에 『예수의 생애 Das Leben Jesu』를 발표한 것이 꼽힌다. 슈트라우스는 이 책에서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역사적 예수론을 전개했다. 슈트라우스에 따르먼 복음서에 나온 기적들은 그저 공동체에서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집단적 신화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초기에는 노년 헤겔학파의 비판이 거세었지만, 이후로 갈 수록 청년 헤겔학파의 비판이 더 많아졌다.

슈트라우스는 예수의 실존 자체는 인정했던 반면, 브루노 바우어는 복음서들은 작가들에 의해 조작된 기록이며 예수 자체가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슈트라우스를 비판했는데, 이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슈트라우스 비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바우어의 비판에 대해 슈트라우스가 발표한 소책자에서 헤겔 좌파와 헤겔 우파의 구분이 처음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후 바우어는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미하일 바쿠닌, 막스 슈티르너 등등의 청년 헤겔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베를린의 청년 헤겔학파 모임인 자유인(Die Freien)의 구심점이 된다.

슈트라우스와 바우어의 이러한 대립은 성모 마리아수태고지를 비롯한 복음서의 기적들이 무의식적으로 발생된 집단적 신화인가 아니면 복음서 저자의 자기의식이 행한 창조인가의 문제에서, 그러한 역사적인 신화를 만들어내는 세계사의 동력이 무엇이냐는 논쟁으로, 즉 헤겔의 절대정신의 자리에 무엇을 올려놓느냐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한편으로 1841년에 접어들자 청년들에게 퍼져나가는 헤겔주의가 거슬렸던 정부는 프리드리히 셸링을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임명하여 헤겔주의를 견제하게 했는데, 그 당시에는 헤겔주의에 대해 별 힘을 쓰지 못했지만, 이후 키에르케고르식의 결단주의나 비합리주의 등으로 일부나마 계승되어 "전체주의자 헤겔"이라는 신화를 만드는 것에 일조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가 『기독교의 본질』등등을 통해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유물론을 내세움으로서 종교철학적인 색채만을 띄던 청년 헤겔학파에 유물론적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포이어바흐는 헤겔을 비판하는 동시에, 슈트라우스가 실체를 본질로 내세우고 바우어가 자기의식을 본질로 내세웠듯이 본질로 인간 혹은 "유적 존재"(Gattungswesen)라는 개념을[3] 내세웠다. 이후 모제스 헤스는 포이어바흐의 유적 존재 개념을 사회주의와 결합하고자 시도했다.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영향을 끼쳤지만, 나중에 이들은 "진정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헤스를 비판한다.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깊게 받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5년 2월에 『신성 가족』을 발표하여 브루노 바우어와 에드거 바우어 형제를 비롯한 바우어 일파를 비판하여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4] 1845년 4월에 막스 슈티르너가 『유일자와 그 소유』를 발표하면서[5] 청년 헤겔학파는 본격적으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슈티르너는 이 저서에서 표면적으로는 포이어바흐를 주된 타겟으로 잡아 유적 존재라는 개념이 추상적이라고 공격한다. 그러나 슈티르너의 비판은 실질적으로는 포이어바흐만이 아니라, 청년 헤겔학파가 자꾸 절대정신을 대체할 다른 무언가를 본질로 내세우면서 헤겔의 종교적 한계를 반복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6] 즉 슈티르너는 포이어바흐만이 아니라 바우어, 아르놀트 루게, 헤스 등의 청년 헤겔학파 전체를 대상으로 일종의 광역딜을 날린 셈이었고, 직접적으로 까인 포이어바흐 본인과 바우어, 헤스, 루게, 첼리가(Szeliga) 등등의 청년 헤겔주의자와 거기에 더해 노년 헤겔학파나 신칸트주의자들에게도[7] 비판받게 된다. 이 중 헤스는 슈티르너를 비판한 『최후의 철학자들』에서 슈티르너 뿐만이 아니라 포이어바흐와 바우어를 비롯한 헤겔 좌파 전체를 비판한다.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공격받은 바우어는 10월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특성』으로 포이어바흐와 그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나아가 헤겔 좌파 전체를 공격했다. 슈티르너 역시 『슈티르너에 대한 비평가들』을 통해 포이어바흐, 헤스, 첼리가 이 셋을 다시 공격했다.[8] 이외에도 여러 다양한 인물들이 논쟁에 참여했다.

이렇게 바우어-슈티르너 대 포이어바흐-헤스-마르크스-엥겔스 구도가 만들어지게 되는 듯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논쟁에 화답할『독일 이데올로기』를 헤스 등의 진정사회주의자들과 작성하는 과정에서 한번 더 본격적으로 분열이 벌어지게 된다. 슈티르너의 영향을 받은 바우어의 비판은 청년 헤겔학파 전체를 정리하여 비판하는 것이었기에, 그리고 포이어바흐의 추상성에 대한 슈티르너의 지적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들의 공격에 화답하기 위해서 포이어바흐 및 청년 헤겔학파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어야 했고, 다른 청년 헤겔학파가 그러했듯이 청년 헤겔학파 자체를 공격해야 했다. 원래 비판적이었던 헤스와의 갈등[9]을 비롯한 여러가지 이유들로『독일 이데올로기』의 출판은 흐지부지된 채 방치[10]되었으며, 헤스는 독자적으로 루게 등에 대한 비판을 개시했고, 시작점이었던 슈티르너와 포이어바흐의 논쟁은 슈티르너의 첫번째 반론을 끝으로 정지된 상태였다.[11] 그 전부터 정치적 탄압이 가해지고 있었던 것은 덤이다. 이렇게 청년 헤겔학파는 슈티르너를 끝으로 분해되었고, 1848년 독일혁명의 실패로 완전히 흩어지게 된다.

3. 관련 인물


[1] 청년 헤겔주의, 청년 헤겔파, 헤겔 좌파, 좌파 헤겔주의, 소장 헤겔학파 등등으로도 불린다.[2] 자유인(Die Freien)이라는 모임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이것도 단체라기보다는 그냥 말 그대로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했다.[3] 뭉뚱그려 말하자면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4] 이전에도 아르놀트 루게와 협업 과정에서 많은 갈등을 빚은 건 덤이다.[5] 발표 이전에 엥겔스 등이 교정쇄를 미리 읽은 적이 있기는 하다. 1844년의 엥겔스는 이 저서를 읽고 의외로 호의적인 평가를 마르크스에게 전했다.[6] 자세한 것은 막스 슈티르너 항목과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항목을 참고.[7] 이 둘은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매우 애매한 측면이 많다.[8] 바우어에 대해서는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 부터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 둘 다 자기의식을 강조했다는 공통점이나 개인적인 친분이 이유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9] 바우어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보다 헤스를 고평가했던 것도 한 몫한다.[10] 마르크스 본인왈 "쥐들이 쓸어먹는 비판"[11] 이러한 포이어바흐의 모습이 마르크스로 하여금 포이어바흐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을 어느정도 수용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는 견해도, 더 정확히는 포이어바흐가 슈티르너를 제대로 공박할 수 없었던 것이 슈티르너를 공박하기 위해서는 포이어바흐를 극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나타나게 된 원인 중 하나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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