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9:11:47

빌럼 1세 판 오라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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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스타트허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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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네덜란드의 가톨릭 라디오 방송(KRO)이 네덜란드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100명'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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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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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9900><colcolor=#192B6C> 네덜란드 공화국의 스터트허우더
빌럼 1세
Willem van Oranje
파일:1280px-William_I,_Prince_of_Orange_by_Adriaen_Thomasz._Key_Rijksmuseum_Amsterdam_SK-A-3148.jpg
이름 빌럼 판오라녀
(Willem van Orange)
출생 1533년 4월 24일
신성 로마 제국 나사우 딜렌부르크
사망 1584년 7월 10일 (향년 51세)
네덜란드 공화국 홀란트 백국 델프트
재위 오라녀
1544년 7월 15일 ~ 1584년 7월 10일
네덜란드 공화국의 스타트허우더
1581년 7월 26일 ~ 1584년 7월 10일
배우자 에흐몬트의 안나 (1551년 결혼 / 1558년 사망)
작센의 안나 (1561년 결혼 / 1571년 이혼)
부르봉의 샤를로트 (1575년 결혼 / 1582년 사망)
루이즈 드콜리니 (1583년 결혼)
자녀 필립스 빌럼, 마리아, 안나, 마우리츠, 에밀리아, 루이세 율리아나[1], 엘리사벗, 카타리나 벨히카, 샤를로테 플란드리나, 샤를로테 브라반티나, 에밀리아 안트워피아나, 프레데릭 헨드릭
아버지 나사우지겐 백작 빌헬름 1세
어머니 슈톨베르크의 율리아나
종교 개신교 (칼빈주의)
서명 파일:빌럼 1세(오라녀) 서명.svg
1. 개요2. 일생3. 가족4. 여담

[clearfix]

1. 개요

네덜란드 공화국 초대 총독(스타트하우더 Stadhouder)으로, 본명은 빌헬름 폰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

네덜란드 국부로, 빌럼 1세로도 불린다. 후대 네덜란드 국왕이자 방계 후손 빌럼 1세[2]와 혼동될 여지가 있어 보통은 '침묵공(De Zwijger)'이란 별명으로 불린다. 종교에 대해 의견을 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지만, 사실 그는 생애 대부분의 기간동안 결코 종교문제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아직 카톨릭이던 시절, 외교 사절(사실은 인질)로써 알바 공과 여행을 간 일이 있었는데, 신교도들에 대해 잔혹하기로 유명한 알바 공이 빌럼에게 신교도들을 어떻게 처분할 지에 대해 신나게 떠들자, 아무리 상대가 (카톨릭 기준으로) 이단자라고는 해도 그건 너무 잔혹하다고 생각한 빌럼이 입을 다물고 아예 상대를 안해줬는데, 알바 공이 이를 오해하고 빌럼에게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별명을 붙여버린 것. 이 둘은 결국 네델란드를 놓고 오랜기간 싸우는 숙적이 된다. 오랑주 공작의 칭호는 프랑스식 기욤 1세이며, 그에 따라 오랑주 공작의 풀 네임 또한 기욤 도랑주(Guillaume d'Orange)이다.

2. 일생

1533년 지금의 독일 영토 신성 로마 제국나사우 백국 딜렌부르크성에서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3] 빌헬름 1세 장자로 태어났다. 원래 그의 가족은 신교도였지만, 1544년 그의 사촌인 오랑주(=오라녀) 공, 브레다의 르네가 프랑스와 전쟁 중 전사할 때 카톨릭으로의 개종을 조건으로 빌럼에게 자신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자, 빌럼의 부모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아직 어린 그를 개종시켜 르네의 영지인 오랑주와 브레다를 물려받게 했다. 이후 그는 본가의 이름 나사우와 상속받은 영지 오랑주 이름을 합쳐 오라녀나사우 가문을 창시한 뒤 거점을 네덜란드 브레다로 옮겼다. 그 후 브뤼셀에서 카를 5세 여동생이자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총독인 마리아[4]의 후견을 받아 성장했으며, 카를 5세의 총애로 1555년프랑스 전쟁 총사령관이 됐다.

카를 5세가 물러나고 펠리페 2세 밑에서 금양모 기사, 국무 회의 의원 등을 지내고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의 협상자로 활동해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반도 지배권을 둔 분쟁을 종식시켰으며, 홀란트, 제일란트, 위트레흐트 총독에 임명됐다.

1561년 프랑슈콩테 총독에도 임명됐다가 1566년 성상 파괴 운동을 강경하게 진압했는데, 빌럼은 안트베르펜에서 이를 진압했지만 성문을 폐쇄하고 스페인 군사들이 진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충성 서약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영지는 모두 몰수당하고 추방당해 1567년 딜렌부르크로 망명했으며, 1568년 군사를 일으켜 4월 23일 헤일리헤를레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톨레도에게 엠스 강둑에서 패하자(예밍헌 전투) 퇴각해 프랑스로 도망쳤으며, 1571년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톨레도가 세금을 마구 거두어들인 것으로 반발을 사면서 1572년 4월 1일 '고이센'(바다의 거지들)이라 불리는 집단이 함대를 이끌고 브릴레 항구를 점령하면서 홀란트, 제일란트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자 이들과 합류한다.

협상을 통해 홀란트, 제일란트의 총독이 되고 1573년 칼뱅파로 개종했으며, 1576년 겐트 화약이 성립돼 네덜란드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1579년 스페인 귀순한 남부의 네덜란드 귀족들이 아라스(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맞서기 위해 북부 7주에서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면서 빌럼은 이 동맹을 이끌고 한때 충성했던 스페인과 싸웠다.

1584년 7월 10일 델프트에서 여동생이랑 부하 선장 로저 윌리엄스와 저녁을 먹고 자택에서 내려오다 가톨릭 교도인 발타자르 제라르[5]의 저격에 맞아 사망했다. 쓰러질 때 여동생의 품에서 사망했는데 유언은 '신이여 내 영혼을 가엾게 여기소서. 신이여 이 불쌍한 이들을 가엾게 여기소서'였다. 제라르는 범행을 저지르고 도주하다 체포되었고,[6] 독립 운동가의 지도자이자 국부인 빌럼을 살해한 것에 분노한 네덜란드 국민들에게 심한 고문을 받은 뒤 7월 13일 처형됐다.[7] 묘지는 자택이 있던 델프트개신교회에 마련됐다. 이후 독립 투쟁은 아들 마우리츠 판나사우가 이어간다.

3. 가족

그는 4번의 결혼을 통해 4명의 아들을 비롯해 많은 자녀를 낳았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의 부인과 자식들 상당수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파일:Anna van Egmond.jpg
첫부인 안나 반 에흐몬트는 네델란드의 뷰렌 백작령을 비롯한 많은 영토의 상속자로 빌럼과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군사작전으로 바쁜 남편과 거의 같이 지내지 못했고 병으로 사망했다. 빌럼의 장남 필립스 빌럼이 안나 반 에흐몬트의 소생이었지만 스페인에 인질로 붙잡혀가서 카톨릭으로 교육받는 바람에 빌럼의 후계자가 되지 못했고 이후 스페인의 앞잡이가 되어 이복동생들과 네델란드를 놓고 싸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파일:Anna of Saxony.jpg
두번째 부인 작센의 안나는 작센 공작령의 상속녀로 빌럼과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 특히 스페인군의 네델란드 점령으로 빌럼과 그의 가족들이 독일로 쫒겨나고 그녀의 첫아들(빌럼에게는 둘째 아들)이 유아기에 사망하자 사이가 더 나빠져 아예 별거를 하게 되었다. 이와중에 자신의 법률자문가와 불륜을 하다 들켜서 이혼당하고 유폐되어 살다가 죽었다. 안나의 막내딸은 빌럼의 친자가 아닌 사생아로 취급되고 다른 자식들은 모두 남편에게 빼앗긴 것은 덤. 그래도 안나 소생의 셋째아들 마우리츠는 빌럼의 후계자가 된다. 여담으로 안나의 불륜상대 얀 루벤스는 만일 안나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간통이 아니라 강간을 당한 것이라고 변명했다면 사형당할 운명이었는데, 안나가 그를 정말 사랑했는지 간통 사실을 인정하는 바람에 살아남았으며 몇년 후 자신의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화가로 유명한 페테르 파울 루벤스.

파일:Charlotte of Bourbon.jpg
세번째 부인 샤를로트 드 부르봉은 몽팡시에 공작 루이 드 부르봉의 딸로 어린 시절 자신의 이모가 수녀원장으로 있는 수녀원으로 보내져 카톨릭으로 교육받고 후임 수녀원장이 될 운명이었으나 개신교로 개종하고 탈출한 비범한 인물이다. 빌럼의 부인들 중 사이가 가장 좋은 부인이었으나 딸만 다섯을 낳고 병사했다. 그중 샤를로트의 딸 루이세 율리아나는 팔츠 선제후국으로 시집을 가는데 그녀의 아들이 30년 전쟁의 시작을 알린 프리드리히 5세이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5세의 외손녀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와 혼인하며 낳은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손녀 빌헬미네의 아들이 네덜란드의 초대 국왕이 되는데 그가 바로 빌럼 1세다.

파일:Louise de Coligny.jpg
마지막 부인 루이즈 드 콜리니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의 주요 희생자였던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의 딸로 빌럼과의 사이에서 막내 아들인 프레데릭 헨드릭을 낳았다. 하지만 아버지에 이어 남편마저 카톨릭 교도에게 살해당하자 자신의 친아들과 샤를로트 드 부르봉 소생의 의붓딸들을 양육했는데, 결국 그녀의 아들 프레데릭 헨드릭이 아들이 없던 이복형 마우리츠로부터 빌럼의 작위를 계승받게 된다. 루이즈는 이를 보기 전에 사망했으나 이후 그의 자손들이 네덜란드는 물론 영국의 왕위에까지 오르게 된다.[8]

4. 여담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서 네덜란드 문명이 새로 추가된 문명 3에서 문명 5에 이르기까지 지도자로 등장한다. 다만 문명 6에서는 그의 아버지를 조상으로 공유하는 빌헬미나 여왕이 지도자로 등장한다.

참고로 그의 작위명 '오라녀(오렌지)'에서 유래된[9] 오렌지색네덜란드 상징색이 됐다. 네덜란드 축구 대표팀의 유니폼이 오렌지색이며 오렌지 군단으로 불리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1]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어머니.[2] 그의 아우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요한 6세 후손이다. 요한 6세는 형이 네덜란드에서 오라녀나사우 가문을 창시해 활약한 것과 달리 아버지의 작위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을 이어갔는데, 빌럼 판오라녀의 직계가 잉글랜드 국왕을 겸했던 빌럼 3세 사후 단절되면서 그와 가장 가까운 항렬인 요한 6세 나사우딜렌부르크 계열이 네덜란드 국가 원수직을 맡게 됐다. 게다가 빌럼 1세는 모계로 침묵공의 직계 후손(딸 루이세 율리아나의 후손)이기도 하다.[3] 나사우 가문의 차자 계열. 장자 계열이 나사우바일부르크를 통치했고 현 룩셈부르크 대공 가문이다.[4]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러요시 2세의 왕비.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고모 마르가레테 폰 외스터라이히의 뒤를 이어 바쁜 오빠를 대신해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총독을 맡고 있었다.[5] 그는 프랑스인으로 당시 프랑스는 신교도와 카톨릭으로 나뉘어 내전 중이었는데, 펠리페 1세는 프랑스 카톨릭 세력을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펠리페 1세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펠리페가 빌럼을 반역자라고 선언하자 마땅히 빌럼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펠리페는 빌럼의 목에 상당한 현상금을 걸었고, 그가 이 현상금이 탐나서 암살에 나선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제라르의 행적으로 볼 때 순전히 돈 때문에 암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제라르는 스페인 귀족들이 암살을 위한 자금을 지급할 것을 거절하자, 자비로 암살장비를 구입했고, 암살을 위해 신교도로 위장하는 것에 대해 미리 고해하고 용서를 청하기도 했다. 특히 제라르는 빌럼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빌럼의 동맹인 룩셈부르크 공작의 군대에 2년간 복무해 프랑스 군인으로 위장해 네덜란드로 입국했다. 하지만 빌럼을 만날 기회가 생기지 않자 일부러 훔친 룩셈부르크 공작의 인장을 이용해 프랑스 귀족으로 위장해 빌럼한테 접근했으나 빌럼은 프랑스의 동맹들한테 문서를 전달하려고 프랑스로 돌아가 인장을 백작한테 돌려주라며 내보내 버렸다. 그래서 제라르는 네덜란드 군인한테서 몰래 산 권총으로 죽이기로 결정해 사전에 빌럼의 집 구조를 탐문하여 알아낸 다음 빌럼이 집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고 이게 맞아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권총은 한 번에 한 발만 쏠 수 있기에 제라르는 총을 2개나 사서 한 번에 권총 2개를 쏘아 죽였다. 이 총탄 자국은 보존되어 있는 빌럼의 저택에도 헌재까지 그대로 남아있다.[6] 도주 때 제라르는 물에 빠져 튜브 용도로 쓸 돼지 방광과 말까지 준비할 정도로 치밀했지만 쓰레기 더미에 걸려 넘어지면서 쫓아오던 병사들한테 잡혔다.[7] 제라르가 받은 고문은 굉장히 잔혹했는데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을 한 것 외에 오른손을 와플 굽는 틀에 넣어 구웠고 양쪽 엄지발가락에 150kg의 추를 매달아 놓았으며 발보다 작은 개가죽 신발을 신겨 불을 쬐어 발을 조이고 채찍질을 한 상처에 꿀을 발라 염소가 핥게 했다. 그래서 처형 때는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심지어 죽을 때도 제라르는 곱게 죽지 못했는데 머리와 사지가 잘리고 내장과 심장을 꺼내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고 사후 목과 사지가 공개적으로 효수됐다. 당연하겠지만 그만큼 빌럼의 암살은 네덜란드인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제라르가 증오를 많이 받은 것이다. 반면 펠리페 2세는 제라르가 빌럼을 암살한 것에 매우 기뻐하였고 제라르의 가족을 불러 위로하며 그들을 귀족으로 승격시키고 시골 마을 3개를 영지로 줬다.[8] 루이즈 드 콜리니의 증손자가 바로 영국 국왕 윌리엄 3세다.[9] 철자가 같긴 하지만 어원의 유래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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