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6-16 22:28:04

카를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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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color=#000,#e5e5e5> 카롤루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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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1세)
루도비쿠스 1세
(루트비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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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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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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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도 람베르토
(람베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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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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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왕조 비텔스바흐 왕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카를 6세 카를 7세 프란츠 1세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프란츠 2세
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
{{{#000,#e5e5e5 프랑크 · 동프랑크 · 라인 동맹 · 독일 연방 · 북독일 연방 · 독일 제국 · 바이마르 · 나치 독일 · 동독 ·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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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도뉴 2세
레온 왕국 갈리시아
프루엘라 2세 알폰수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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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수 4세 라미루 2세 오르도뉴 3세 산추 1세 오르도뉴 4세 산추 1세 라미루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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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고냐 왕조 알폰수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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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황제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초대 국왕
카를 5세 / 카를로스 1세
Karl V / Carlos 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Karl_V.-Carlos_I._1548_%28Tiziano_Vecellio%3F%29_066.jpg
<colbgcolor=gold><colcolor=black> 제호 카를 5세 (Karl V)[1]
출생 1500년 2월 24일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헨트
사망 1558년 9월 21일 (58세)
스페인 유스테
재위 신성 로마 황제, 독일왕, 이탈리아 국왕
1519년 6월 28일 ~ 1556년 8월 27일
카스티야 국왕, 아라곤 국왕
1516년 1월 23일 ~ 1556년 1월 16일
오스트리아 대공
1519년 1월 12일 ~ 1521년 4월 28일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군주, (명목상의) 부르고뉴 공작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배우자 포르투갈이사벨라
(1526년 결혼 / 1539년 사망)
자녀 펠리페 2세
마리아
후아나
마르가레테
돈 후안(사생아)
아버지 펠리페
어머니 후아나
형제자매 레오노르
이사벨
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카탈리나
서명 파일:1280px-Firma_Emperador_Carlos_V.svg.png

1. 개요2. 그의 타이틀3. 생애4. 평가
4.1. 종교적 측면4.2. 군사적 측면4.3. 경제적 측면4.4. 종합적 평가
5. 언어6. 부인과 가족관계7. 그 외

[clearfix]

1. 개요

PLUS ULTRA(보다 먼 곳으로)
신성 로마 제국황제이자, 스페인의 국왕[2], 이탈리아의 군주 등 국경을 초월한 여러 직함을 갖고 있는, 중근세 유럽에서 가장 많은 국가의 왕관을 쓴 인물이다.(자세한 것은 아래 본문 참조)

군주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부모와 조상의 덕을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이 받은 '대단한 상속자'로 기록되는 인물. 친가와 외가로부터 막대한 영토를 상속받아 카롤루스 대제나폴레옹 사이 약 1,000년 동안의 기간 중에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다.

어머니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후아나 공주, 아버지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후계자[3]이자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이던 필리프 공(펠리페 1세)[4]이다. 이처럼 화려한 친외조부모님 덕분에 카를 5세는 유럽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상속받는 행운아가 되었다. 훗날 대영제국이 표방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원조인 셈[5].

약 40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재위에 있었던 카를 5세는 다사다난한 일을 겪었다. 그의 치세는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역사적 변곡점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유럽 곳곳에 산재한 워낙 방대한 면적의 영토를 다스렸기 때문에 16세기 전반기의 유럽사를 얘기할 때 그를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종교개혁,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 신대륙 정복,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등 굵직한 역사적 흐름의 한 복판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영지에 따라서 칭호는 카럴 1세(플란더런, 네덜란드), 카를로스 1세(카스티야-레온), 카를레스 1세(아라곤-시칠리아)[6], 카를로 4세(나폴리), 카를 1세(오스트리아), 샤를 2세(부르고뉴) 등등 저마다 제각각이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그의 대표작위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로 불린다. 과거 다른 명칭으로 불렸던 현지에서도 최근에는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카를의 현지 표현 + 5세'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스페인에서 '카를로스 5세(Carlos V)'[7][8]라 표기하는 식이다. 스페인의 관광지에서 외국인들을 위해 카를로스 5세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본 항목에서도 카를 5세로 통일하여 서술한다.

2. 그의 타이틀

카를이 보유했던 공식 타이틀은 아래와 같다.
Charles, by the grace of God elected Holy Roman Emperor, forever August, King in Germany, King of Italy, Castile, Aragon, Leon, both Sicilies, Jerusalem, Navarra, Grenada, Toledo, Valencia, Galicia, Majorca, Sevilla, Sardinia, Cordova, Corsica, Murcia, Jaen, the Algarves, Algeciras, Gibraltar, the Canary Islands, the Western and Eastern Indies, the Islands and Mainland of the Ocean Sea, etc. etc. Archduke of Austria, Duke of Burgundy, Brabant, Lorraine, Styria, Carinthia, Carniola, Limburg, Luxembourg, Gelderland, Athens, Neopatria, Württemberg, Landgrave of Alsace, Prince of Swabia, Asturia and Catalonia, Count of Flanders, Habsburg, Tyrol, Gorizia, Barcelona, Artois, Burgundy Palatine, Hainaut, Holland, Seeland, Ferrette, Kyburg, Namur, Roussillon, Cerdagne, Zutphen, Margrave of the Holy Roman Empire, Burgau, Oristano and Gociano, Lord of Frisia, the Wendish March, Pordenone, Biscay, Molin, Salins, Tripoli and Mechelen, etc. etc.

카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임명된 신성 로마 제국황제이자 독일, 이탈리아의 왕,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시칠리아 열도, 예루살렘, 나바라, 그라나다, 톨레도, 발렌시아, 갈리시아, 마요르카, 세비야, 사르데냐, 코르도바, 코르시카, 무르시아, 하엔, 알가르베, 알헤시라스, 지브롤터, 카나리아, 서인도동인도, 섬들과 대양의 메인랜드의 왕, 기타 등등등. 오스트리아대공, 부르고뉴, 브라방, 로트링겐[9], 슈타이어마르크, 캐른텐, 크라인, 림부르크, 룩셈부르크, 겔데른, 아테네, 네오파트리아, 뷔르템베르크공작, 슈바벤, 아스투리아카탈루니아의 공[10], 알자스의 영주[11] 플란데, 합스부르크, 티롤, 고리치아, 바르셀로나, 아르투와, 부르고뉴[12], 에노, 홀란드, 제일란트, 페레테, 키부르크, 나무르, 로씨용, 세르다뉴, 저트펀의 백작, 부르가우, 오르시타노와 고르치아노의 신성 로마 제국의 후작, 프리지아, 벤디세 마르크, 포르데노네, 바스크, 몰린, 살랭, 트리폴리, 메헬렌의 군주, 기타 등[13]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다음과 같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Greater_Coat_of_Arms_of_Charles_I_of_Spain%2C_Charles_V_as_Holy_Roman_Emperor_%281530-1556%29.svg.png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문장과 타이틀 목록
문장 타이틀 즉위 퇴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Blason_Charolais.svg.png 세르다뉴 백작
샤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8년 10월 25일
파일:브라반트 공국 문장.svg 브라반트 공작
카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Limburg_New_Arms.svg.png 림부르크 공작
카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Austria_coat_of_arms_simple.svg.png 로트링엔 공작
카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Namur_Arms.svg.png 나무르 후작
샤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Artois_Arms.svg.png 아르투아 백작
샤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Hainaut_Modern_Arms.svg.png 에노 백작
샤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atofarmszeeland.png 제일란트 백작
카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Blason_comte_fr_Nevers.svg.png 부르고뉴 궁중백
샤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6년 2월 5일
파일:부르고뉴 문장.svg 부르고뉴 공작
샤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6년 1월 16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Counts_of_Holland_Arms.svg.png 홀란드 백작
샤를 2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Armoiries_Comtes_de_Luxembourg.svg.png 룩셈부르크 공작
카를 3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Arms_of_Flanders.svg.png 플란데런 백작
샤를 3세
1506년 9월 25일 1555년 10월 25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Guelders-J%C3%BClich_Arms.svg.png 겔데른 공작
카를 3세
1543년 9월 12일 1555년 10월 25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scudo_de_Zutphen_1581.png 저트펀 백작
카를 2세
1543년 9월 12일 1555년 10월 25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Escudo_Corona_de_Castilla.png 카스티야,레온의 왕
카를로스 1세
1516년 3월 24일 1556년 1월 16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Escudo_Corona_de_Aragon_y_Sicilia.png 아라곤,시칠리아의 왕
카를레스 1세[14]
1516년 3월 24일 1556년 1월 16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Coat_of_Arms_of_Catalonia.svg.png 바르셀로나 백작
카를레스 1세
1516년 3월 24일 1556년 1월 16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Armas_del_reino_de_N%C3%A1poles_-_Casa_de_Austria.svg.png 나폴리 왕
카를로 4세
1516년 3월 24일 1554년 7월 25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Austria_coat_of_arms_simple.svg.png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1세
1519년 1월 12일 1521년 1월 12일[1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Holy_Roman_Empire_Arms-single_head.svg.png 로마 왕
카를 5세
1519년 6월 28일 1530년 2월 24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px-Holy_Roman_Empire_Arms-double_head.svg.png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1519년 6월 28일 1558년 2월 24일

사실 어마어마해보이는 문장이지만 뜯어보면 생각보단 간단하다. 일단 공작급 이상의 작위(공작~왕)만 문장에 포함되어있다. 또한 대각선 대칭으로 같은 문장들이 배치되어있어 시각적으로는 뻥튀기 기법이다(...). 좌우 기둥 문양은 지브롤터 해협, PLVS VLTRA는 "더 멀리 나아간다" 즉 당시 유럽의 서쪽 끝을 상징하는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더 나아간다 라는 의미. 카를 5세 때 도안하고 현재 스페인 국장에도 계속 쓰이고 있는 문장이다.

그의 이름은 다양하게 발음되었다. 이 중 가장 대중적인 명칭이 카를 5세와 카를로스 1세인데, 스페인 이외의 지역에서는 주로 황제로서의 직함인 카를 5세(Karl V)라 부른다. 심지어 스페인에서도 외국인 관광객 등을 위해 카를로스 5세라는 명칭을 쓰기도 한다.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카를 5세/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평가

역사상 카를 5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서 이를 단순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군주로서 장단점이 명확하게 갈리는 존재이며, 암군이라고도 명군이라고도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는 존재였다.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 건 아들인 펠리페 2세도 마찬가지지만 이유는 정 반대다. 펠리페 2세는 카스티야 중심의, 전투적 카톨릭 이데올로기를 필두로하며 고도의 체계화된 관료 집단을 인적 기간 삼아 무슬림 이교도와 개신교 이단을 상대로 싸움을 주도하는 스페인 제국이란 구체적이고 명확한 신념이 있었고, 이에 따라 대규모 정치 구조와 행정체계 개편 같은 관료적인 면모부터 성공했던 실패했던 대규모 대외 원정을 직접 전두지휘 했고, 이런 수많은 직접 개입과정에서 성공과 실패 둘 다 맛보며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되었다.

반면 카를 5세는 한 명의 군주이자 정치인으로 보면 본인이 명확한 신념이나 사상에 따라 구체적인 통치 과정에서 뭔가 직접 주도해서 일으킨 것으로 유명한 군주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카를 5세가 군주로서 자기 책무를 방관한 막장군주인 것도 아닌 게, 일단 동시대 관점에서 다른 만사를 제치고 군주의 최상위 우선순위 책무였던 1. 군대를 이끌고 외적과 반란군들과 싸우는 일 2. 세련된 궁중 문화를 후원하며 왕실의 권위를 대내외로 자랑하는 일 자체는 확실히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본인이 직접 주도한 지휘관이자 장군으로서 면모 빼고 통치자로서 독자적인 업적은 잘 없을 뿐 아니라, 엄밀하게 따지면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없었거나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 일단 군주로서 처음 다스리게된 카스티야와 아라곤 이베리아 두 왕국은 섭정들의 실책으로 인해 코뮤네로와 길드 반란이란 거대한 반란이 터졌고, 사태 해결 또한 딱히 카를과 섭정 정부가 유능하게 대처해서가 아니라, 처음에는 도시민 중심 반란군과 외국인 출신 새 왕가 사이 저울질하던 대귀족들이 반란군의 약탈, 농민 선동으로 인해 후자에 붙음으로서 얼떨결에 진압되었다. 굳이 따지고 보면 제위 초기 계승하자마자 잃을 뻔한 이베리아 반란을 진압하면서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내리고, 스페인 현지 사정에 더 능통한 현지 대리인들을 임명했다는 점에서 실패에서 배우는 게 빠르고 관대한 군주로 좋게 평가할수 있으나[16] 이 이후로 또다시 얼마 안 가 이탈리아 전쟁에 종군하러 가면서 더이상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으로선 딱히 주목할 만할 행적을 남기지 않았다.

이 이후로 카를 5세는 스페인을 다스리는 데는 아드리아노 추기경, 프란시스코 데 로스 코보스, 오스트리아 쪽을 다스리는 데는 동생 페르디난트 등을 대리인으로 내세우고, 합스부르크 제국 전반의 사상적, 대국적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은 재상 메르쿠리아노 가티나라에게 맡기며 본인은 전장에서 군대를 이끌고, 예술가와 문인들을 후원하며, 코르테스 같은 야심만만한 낮은 신분의 콩키스타도르부터 사보이, 밀라노 같은 유럽의 유서 깊은 국가들의 대공가까지 여러 신분의 신하들이 들고온 각종 청원서 등에 사인이나 해주는 국왕으로서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지, 그 이상의 통치자나 정치가로서 모습을 보여준 면이 거의 없다. 긍정적으로 보면 르네상스의 전성기였던 동시대 유럽의 기사도적 군주의 모습을 현세에 구현한 듯한 인물 그 자체였지만, 부정적으로 보자면 딱 틀에 박힌 거 이상의 독창성도 없고, 본인이 살았던 시대의 드라마틱한 면에 비교하면 맥이 빠질 만큼 상당히 평면적인 인물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미 전술되어 있듯이 카를 5세는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럽 전역에 산재해 있는 영토를 다스렸기 때문에 다사다난한 일을 겪었다. 게다가 그의 치세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행기로, 종교전쟁,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 신대륙 정복 등 굵직한 역사적 흐름들이 있었고 이러한 흐름의 한 복판에 카를 5세가 있었다.

그 때문에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면으로만 판단하자면 카를 5세 치세의 제국이 가진 화려함은 유럽 역사상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렇기에 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적지 않다.

쉽게 말해 그는 다스린 영토에 비해 어디까지나 '전형적인' 군주였으며, 세계사적으로 별도 주목받을 만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적은 없다. 중세의 기사도적 관점에서 보면 전쟁도 잘했고, 각종 문화적, 군사적 업적으로 가신단의 기도 팍 세워주고, 마키아벨리적 의미에서 어마어마한 영광을 이룬 명군이긴 한데, 이 시대 자체가 후대의 결과론적 관점에서 보면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보니 오히려 후대인의 관점에선 본인이 살아온 시대의 특출남에 비해서 오히려 평면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최고의 영토와 권력을 누렸다 할지언정 이전 시대와 유별날 정도로 다른 행보를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부분적으로 보자면 단순한 싸움질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화의 후원자로서 이탈리아의 예술적, 학문적 사조가 스페인과 북유럽에도 정착하는 데 큰 기여를하는 등 긍정적으로 평가할 면도 있지만 어쨌든 정치인, 군주로서 행적은 본인이 다스렸던 시대에 비하면 아이러니하게도 무미건조한 편이었던 인물이다.

4.1. 종교적 측면

그의 치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사건은 개신교의 출현과 종교 개혁이다. 카를은 일평생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지키며 거의 재위 기간 내내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분투 노력했다. 만약 그가 개신교로 개종하거나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유럽과 스페인 식민지에서는 훨씬 빠른 속도로 개신교가 확산되었을 것이다. 종교전쟁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일단락되었지만 개인에게 종교의 자유는 여전히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십 년 후에 다시 폭발하여 30년 전쟁이 끝나고서 완전히 종식되었다.

물론 그 특성상 종교적 입장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황제의 행동을 판가름하는 것만큼 의미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가톨릭에선 가톨릭의 수호자로, 개신교에선 무자비한 탄압자로 여겨질 테니. 그러니 필연적으로 카를 5세의 종교 개혁 관련 치적은 정치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평가에서도 카를 5세는 좋은 평을 듣기 힘들다. 그는 종교개혁에 대해 제국의 황제나 유럽의 패권자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대응했으며, 그조차도 어정쩡했다. 정치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오판을 연발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무엇보다도 단순히 종교 개혁을 저지하려는 것을 넘어, 그 자신 스스로가 촉발한 종교 전쟁은 향후 수십 년에 걸쳐 독일 전역을 피폐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으며, 현실적으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개신교도들을 1550년 내린 '피의 칙령(Bloedplakkaat)' 등을 위시로 한 탄압 정책으로만 일관했다. 허나 그는 단순한 신앙인이 아닌 황제였으며, 당시 개신교도들은 이미 국가의 한 틀을 이룰 정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그가 대륙의 지배자로서 자신의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선 속내야 어쨌든 그런 일파들을 진지하게 대화 상대로 여길 필요는 있었으나, 그는 치세 전반에 걸쳐 개신교도들에 대해 탄압과 숙청으로만 대응했지만 결국 개신교 근절에 실패했다.

종교 개혁과 관련한 그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그의 공이 아닌 전적으로 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 및 그가 이끄는 독일 제후들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와 같이 카를 5세 치세하의 종교 개혁과 관련된 것들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대표적으로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가 있다. 그는 배신자나 유다 따위로 왜곡되어 서술될 때가 많은데, 사실 그의 배신은 처음부터 카를 5세가 모리츠에게 약속했던 영지나 약속 등을 떼어먹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리츠 입장에서는 정당한 배신이었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이처럼 종교개혁 관련으로는 카를 5세 치세의 화려함에 파묻혀 부당한 평가를 받는 이들이 여럿 있다.

살아 생전 개신교를 타파해야만 할 적으로만 바라보았던 카를 5세는 이 종교적 평화안을 평생에 걸쳐 반대했으며, 이를 사탄과 손잡는 악덕으로 여겼다.

4.2. 군사적 측면

또한 그는 제위 기간동안 종교 전쟁을 비롯해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수많은 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위 기간 중 유럽 본토에서 딱히 영토를 늘리지 못했다. 콩키스타도르들의 신대륙 정벌이 그의 치세 중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제국의 영토는 역사상 유래없을 정도로 확장을 거쳤지만, 정작 유럽 본토에서 그가 치른 전쟁의 성격은 그런 화려한 영토 확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전쟁은 두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물려받은 영토를 지키기 위한 수비전이었고, 두 번째는 개신교와의 종교 전쟁이었다. 이 중에서 그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주변국들의 견제나 오스만의 침략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촉발한 종교 전쟁 및 그로 인해 통치 지역에 부과된 가혹한 세금은 실익이 없었기 때문에 변명할 도리조차 없다.

4.3. 경제적 측면

그의 화려한 군공은 그러나 동시에 유럽 역사상 전무후무한 넓이를 자랑했던 그의 영토, 다시 말해 세금에서 온 것이었다. 다시 말해 카를 5세는 쉴레이만 1세를 제외한 다른 정적들 전원보다 유리한 경제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막대한 유산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정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손실을 낸 부실 군주였다. 생전 그가 일으킨 수많은 전쟁은 그의 넓은 영토에서 나오는 세금으로도 손에 부쳤으며, 신대륙에서 창출되는 금은은 제대로 된 제련법 따위나 당시의 사회 인프라로 인해 곧장 융통하기 어려웠다[17].

카를 5세가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세금 착취와 식민지 착취 뿐만 아니었다. 그는 당시 독일에서 금융업에 힘쓰던 푸거 가문이나 벨져 가문 등에서 엄청난 양의 돈을 빌렸다.

물론 이러한 자금 융자는 그 자체로는 나쁜 일은 아니다. 향후 갚을 능력만 있었다면 오히려 그 능력과 신용, 나아가서는 그만큼 어마어마한 돈을 자신의 이름으로 빌릴 수 있다는 실적까지 내세울 수 있게 된다. 융자해주는 측 또한 황제에게 돈을 대어줬다는 뒷배경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자금 융자를 잘 이용해서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곤 했으며, 그의 고모 마르카레테는 어린 카를에게 가문의 전통적인 자금 융자 비결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카를 5세가 그의 상환 능력을 초과할 정도로 너무나도 많은 자금을 빌렸다는 것이었다. 그의 치세 하의 스페인 왕국은 엄청난 빚을 졌는데 그 규모가 무려 3,900만 두카트 가량이나 되었다. 나중에 이 빚은 스페인 재정에 엄청난 부담으로 되돌아왔으며, 이로부터 말미암아 그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결국 몇 번이나 파산하고야 만다. 펠리페 2세의 첫 파산은 왕위를 물려받은지 불과 1년 후인 1557년이었으므로 사실상 카를 5세의 실정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후 이베리아 연합의 큰 짐이 되는 막대한 빚은 사실상 카를 5세로부터 비롯되었고 그것을 무능한 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키운 셈.

더 최악인 것은 카를 5세는 빚을 갚기 위해 또 빚을 지는 카드 돌려막기 기술을 시전했다는 점이다. 카를 5세는 푸거가에서 빌린 빚을 갚기 위해 스페인에서 '후로'라는 공채를 발행했는데, 그 이자가 무려 10%였다. 당연히 이 공채는 남녀노소 상관없이 스페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매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몰았고, 나중에 후로의 이자율을 7%로 낮췄는데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후로에서 나오는 연금에 의존한 채 스페인 내의 권리를 외국인에게 야금야금 빼앗기고 만다.

4.4. 종합적 평가

물론 오늘날 그가 지배했던 지역, 특히 그가 태어난 벨기에나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인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전반적으로 좋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고향에서 인기가 좋은 것과 인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별개의 문제다. 인간 백정 스탈린도 고향 조지아에서는 인기와 평판이 좋다. 게다가 카를 5세는 종교개혁의 열풍 속에서 개신교들을 피의 숙청으로 쳐낸 덕택에 가톨릭 세력의 미화 또한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카를 5세의 치세가 스페인 역사상 가장 화려한 황금시대를 자랑했음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없다. 농담으로도 화려하다고는 할 수 없는 스페인 역사 속에서 간신히 레콘키스타를 마치고, 한때 이베리아 전 인구의 9할 이상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었다는 흑역사 끝에 나타난 게 유럽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이베리아 패권시대를 연 황제였다는 걸 고려해 보면 스페인에서 평가가 나쁘기도 어려울 지경. 김성근을 향한 SK 팬들의 착잡한 호평

그와는 별도로 그의 치세 자체는 워낙에 드라마틱했던 탓에 스페인, 독일 등지에서는 역사물의 소재로 즐겨 다뤄지고 있다. 영국에서는 다소 두루뭉술한 카리스마악역 대마왕 기믹으로 설정하는 편. 대신 그 아들내미만큼은 확실하게 찌질이로 만들어 일점사로 깐다. 프랑스에선 흑태자 에드워드오토 폰 비스마르크 대마왕 계보 사이에 위치한 트라우마로 취급 중.[18] 터키에서는 자신들과 맞선 적의 수괴마왕 취급.

래리 고닉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서는 카를 5세의 일대기 묘사에 거의 한 챕터(제22챕터 "선행?")를 할애[19]해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루면서 재위 39년간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하고 포토시[20]를 발견하였으며 루터파, 칼뱅파, 예수회가 발호하고 지동설이 대두한 데다 오스만 제국이 빈을 2번이나 포위하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라 평하였다. 근데 중요한 것은 이 설명조차도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5. 언어

지금의 벨기에에 있는 헨트에서 출생하여 자랐기 때문에 카를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였다.[21] 그 밖에도 플랑드르어(네덜란드어의 전신)와 독일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에 이르기까지 5개 국어를 익혀 구사했다.

그는 "나는 하느님께는 에스파냐어로, 여자에겐 이탈리아어로, 남자에겐 프랑스어로, 그리고 내 애마에게는 독일어로 말한다[22]"엄친아스런 명대사를 남기기도 했다.

다만 프랑스어와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는 유사성이 많고, 또 독일어와 플랑드르어(네덜란드어) 역시 유사성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는 물론이고 현대에도 이들 5국어를 구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한다.

명목상 5개 국어를 구사했다고는 하지만 능숙하게 구사한 것도 아니었다. 특히 그의 영토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인 독일어 실력과 스페인어 실력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독일어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름스의 제국의회에서 황제는 독일어로 오가는 대화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23]

그리고 프랑스빠였기 때문에 파리에도 자주 다녀갔는데, 깊은 감명을 느꼈는지 "파리는 도시가 아니라 우주다(Lutetia non urbs, sed orbis)"라는 파리지앵스러운 말을 남기기도 했다[24]. 그의 또 다른 명언으로는 "저 넘어 더 멀리"(PLVS VLTRA)가 있는데, 이는 국경과 민족을 허물고자 했던 글로벌리즘적 성향이 잘 드러난다.

6. 부인과 가족관계

원래는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와 안 드 브르타뉴가 낳은 2명의 딸들과 약혼 관계에 있었는데 둘 다 결혼 전에 사망을 하게 된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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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포르투갈의 이사벨라. 콜럼버스를 지원했던 이사벨 1세의 외손녀로 카를 5세와는 사촌 관계였다. 부모는 포르투갈의 왕인 마누엘 1세와 아라곤의 마리아다. 어머니 아라곤의 마리아는 이사벨라가 14살이 되던 해 사망했고, 이후 시누이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 여대공이 새어머니가 된다.[26] 이 결혼을 계기로 스페인포르투갈합병하게 된다.

이사벨라와 카를 5세는 사촌관계인데, 당시 이사벨라의 오빠인 주앙 3세는 카를 5세의 여동생 카타리나와 결혼하여 겹사돈이 된다. 이사벨라는 아름다운 외모에 지적이고 영리해서 남편이 대제국을 다스리느라 부재중일 때는 정치를 잘 꾸려나갔다. 부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고 총 6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이사벨라는 6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그녀의 나이 36세, 카를의 나이 39세)한다. 이사벨라를 많이 사랑했던 카를 5세는 이후 늘 검정색 상복을 입고 후처 없이 독신으로 지냈다. 유명한 티치아노의 초상화에서도 칙칙한 검은 옷만 입고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사생아가 있기는 했지만, 결혼 전에 3명, 이사벨라와 사별한 후에 1명의 사생아를 낳았으므로 불륜관계에서 낳은 것은 아니었다.

이사벨라와 얻은 6명의 아이
  • 펠리페 2세: 1527년 5월 21일 ~ 1598년 9월 13일
  • 마리아: 1528년 6월 21일 ~ 1603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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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인 펠리페 2세와 여러 모로 성향과 정치적인 관점이 비슷하고 사이도 가까웠던 마리아는, 사촌이 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결혼을 했다. 남편과 28년간의 결혼생활을 하며 16명의 자녀를 낳았다.[27] 마리아의 딸 안나는 오빠인 펠리페 2세의 4번째 부인이기도 하고, 안나의 아들이 펠리페 3세로 이후 후계자이기도 하다. 딸 안나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어린 아이를 놓고 사망했기 때문에 마리아는 남편이 사망한 이후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스페인 궁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마리아는 펠리페 2세가 자리를 비웠을 때 2번이나 스페인의 섭정을 맡기도 했다.
  • 페르난도: 1529년 11월 22일 ~ 1530년 7월 13일
  • 후아나: 1535년 6월 26일 ~ 1573년 9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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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으로 사촌이 되는 포르투갈의 후계자 주앙 마누엘과 결혼을 한다.[28] 남편은 16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몇 주 뒤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 세바스티앙이 이후 포르투갈의 왕위를 물려받는다. 요한나가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오빠 펠리페 2세는 영국의 메리 1세와 결혼하기 위해서 영국으로 떠났는데 이때 요한나를 불러들여서 섭정을 맡기기도 했는데 요한나는 이후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가지 않았고 아들 세바스티앙도 이때 본 것이 마지막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연락과 초상화를 주고 받아 아들이 자라는 것과 소식을 들을 수는 있었다. 아들 세바스티앙은 3살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 주앙 3세에 이어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고, 마리아의 시어머니이자 고모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29]가 섭정직을 맡는다. 요한나의 아들인 세바스티앙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 이후 포르투갈의 왕위는 세바스티앙 할아버지의 남동생인 66세의 헨리케에게 넘어간다. 헨리케는 추기경 출신으로 자녀가 없이 고령으로 사망했고, 다시 포르투갈의 왕위는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간다.
  • 후안: 1537년 10월 19일 ~ 1538년 3월 20일
  • 사산아: 1539년 4월 21일
사생아
* 마르가레테: 1522년 12월 28일 ~ 1586년 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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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5세가 22살 때 얻은 사생아 딸. 카를 5세에게 인정을 받은 딸로, 파르마 공작부인이자 네덜란드의 섭정직을 맡는다. 고모 할머니인 네덜란드의 섭정 마르가레테[30]와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31]가 마르가레테의 육아를 맡았고, 마르가레테는 네덜란드에서 교육을 잘 받으며 자랐다. 마르가레테는 2번의 결혼을 했는데 첫 번째 남편은 역시나 사생아 출신인 피렌체의 공작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32]이고 두 번째 남편은 파르마의 공작인 오타비오 파르네세로 남편과의 사이에 2명의 자녀를 낳았다.
*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1547년 2월 24일 ~ 1578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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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 외

그의 재위 초기인 1523년, 덴마크로부터 스웨덴이 독립했다.

그의 스페인 군대가 프랑스군매치락으로 박살낸 파비아 전투는 유럽사에서 최초로 화기인 이 전면에서 활약해 대승한 전투로 평가된다. 그 놀라운 위력을 실감한 유럽 각국은 재빨리 총의 제식화를 추진하게 되었으며, 그의 재위 말년에 이르면 총기가 이미 유럽은 물론 일본까지도 전파된다. 따라서 그의 재위기는 같은 냉병기가 몰락하고 본격적으로 총의 시대가 열린 급변기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아이러니컬하게도, 파비아 전투에서 활약한 스페인 테르시오는 마지막까지 백병전을 염두에 둔 테르시오 전술을 유지했다. 이들이 로크루아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유럽 전술의 대세는 총기의 화력을 극대화하는 선형진으로 넘어가게 된다. 역으로 생각하면 파비아 전투와 무려 120년의 격차가 있는 로크루아 전투까지 테르시오가 줄창 써먹힐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한 전술이었다는 얘기도 되겠다.

이렇듯 총이 뜨면서 자연히 기사 계급은 몰락을 걷고 경보병이 승패를 가르는 시대가 열린다. 이에 따라 기사가 중핵을 이루는 봉건제도 또한 구조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개혁으로 인한 가톨릭의 퇴조 크리와 맞물려 드디어 중세가 완결된다.

별로 긴밀한 관계는 없지만 러시아의 악명 높은 차르 이반 뇌제의 치세와도 겹친다. 조선으로 치면 11대 중종, 12대 인종, 13대 명종 연간에 걸친 시기이다.

예수회가 가톨릭을 명나라에 처음 포교하고, 일본이 처음으로 스페인 출신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의해 가톨릭과 접한 시기도 바로 그의 재위 기간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스며든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후 꾸준히 민중에게 파고들어 훗날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 일본의 시마바라의 난으로 이어진다.

그의 재위 중에 그 유명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지동설을 발표했다. 훗날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까지 경탄할 이 사건은 당시 유럽 사회 전체를 일대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것이야말로 중세적 사고가 근세로 넘어가는 분기점이라 칭해도 좋을 것이다.
  • 대항해시대 시리즈 중에서 1, 2, 3이 바로 그의 치세가 배경이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1세로만 나오는지라 이토록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가뜩이나 생김새도 여러 왕들 중 평범하게 생긴 편이라.
    • 대항해시대 3에선 1517년경에 에스파니아의 국왕으로 즉위한다. 부왕 펠리페는 미구현이라 그 전까지는 이사벨 여왕이 세빌리아 왕궁을 지킨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에스파니아 국가 이벤트 스토리에서 등장하는 주걱턱 국왕이 그로 추정되다가[33], 세컨드 에이지 업데이트 후 신성로마 컨텐츠가 추가되면서 서버 시대가 맞다면 프랑크 프루트 교회에서 만날 수 있다. 아틀란티스 선행퀘에서는 모후 후아나가 아틀란티스 얘기를 들으면 그 때만은 맨정신으로 돌아오는 걸 알고 아틀란티스의 단서를 여러 경로를 통해 추적하던 중, 에스파니아를 견제하려고 프랑스의 사주를 받은 자들에게 납치되어 루안다까지 끌려가나 플레이어에게 구출된다.
  • 베르디오페라 <돈 카를로스>에서는 카를 5세의 혼령이 자신의 손자인 돈 카를로스(주인공)의 조력자 역할로 등장한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혼령인 그는 손자를 위해 자신의 유해가 이장된 엘 에스코리알 궁전 성당으로 인도한다. 베르디의 또 다른 오페라이자 빅토르 위고의 운문 사극을 바탕으로 작곡된 에르나니에서는 늙은이와 결혼이 예정되어 있는(그것도 정략결혼) 한 여자를 꼬시려다 에르나니와 실바한테 발각되어 사각관계(…)까지 일으켜 버린다. 막판에서는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확실하게 단념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연적 에르나니와 엘비라의 사랑을 축복하는 것으로 마무리. 물론, 비극 오페라답게 에르나니와 엘비라가 죽는 것이 진짜 엔딩이지만(…).

파일:칼 5세 튜더스.jpg
  • 헨리 8세를 다룬 캐나다 드라마 튜더스에서도 당연히(?) 잠깐이나마 등장했다. 주걱턱을 보면 캐스팅 배역의 싱크로가 쩐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영국에서도 합스부르크 하면 주걱턱은 상식 수준인지라 오히려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했을 것이다. 이건 한국인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 하면 바로 원숭이가 떠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1] 스페인에선 ‘카를’이라는 이름을 가진 첫 번째 왕이었으므로 카를로스 1세 (Carlos I).[2] 공식적인 1대 국왕이다. 카를 5세(카를로스 1세) 이전 왕들은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 그리고 기타 등의 왕계로 분류된다. 카를의 모친 후아나 여왕이 유폐 상태에서도 형식상 공동 통치자였지만 그녀는 왕조 개창자로 볼 수 없는 데다 실권은 전적으로 카를이 갖고 있었기에 대체로 카를 본인만을 스페인의 1대 국왕으로 취급한다.[3]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명목상 선출직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황태자라는 신분은 없다. 그러나 이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프 공이 황제직을 계승할 것이 사실상 확정적이었으며, 그의 급사 후 그의 아들이자 황제의 손자인 카를 5세가 이 직위를 물려받는다.[4] 부르고뉴는 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인 마리(카를의 조모)가 계승권을 갖고 있었고, 마리가 사망한 후 장남이자 제국의 (사실상) 황태자였던 필리프(훗날 카스티야 왕국의 공동왕, 펠리페 1세) 공이 공작위를 계승했다. 덧붙여서 이 때의 부르고뉴는 그 전대의 혼인합병으로 지금의 네덜란드-벨기에 일원인 플란데런을 꿀꺽한 상태였다. 참고로 필리프는 아라곤의 공주 후아나와 결혼하여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1세로 즉위하였고 나중에 카를에게 오스트리아지역을 포함한 스페인의 영지를 물려준다.[5] 원조 정도가 아니라, "짐의 제국에는 해가 지지 않는도다"라는 말을 실제로 남겼다.[6] 통일 스페인 왕국이라고는 하지만 카스티야-레온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여전히 다른 정부를 가지고 있었고, 카를 5세를 한 사람의 군주로 섬기는 동군 연합의 형태였다.[7] 훗날 보르본 왕조의 이사벨 2세가 즉위할 때, 이에 반발해 카를로스 전쟁을 일으킨 카를로스 공도 자신을 카를로스 5세라 자칭하기도 했다.[8] 다만 스페인은 카를 5세 이후로도 카를로스의 이름을 가진 군주들이 많이 즉위했기 때문에 오류가 있는 표기법이다.[9] 실제로 로트링겐(=로렌)을 통치한 적은 없다. 이는 카를의 증조부인 용담공 샤를 치세에 부르고뉴 공국이 로트링겐 공국을 점령하였을 때 참칭한 일종의 명목상의 작위로 할머니인 마리 드 부르고뉴와 자신의 아버지, 미남왕 필리프를 거쳐 자신에게 이어진 것이다. 용담공 샤를이 로트링겐을 점령했을 당시에도 로트링겐 가문과 로트링겐 공작은 멀쩡히 존재했고 이후 낭시 전투에서 샤를이 스위스 용병단과 로트링겐 공작에게 패배하면서 없던 일이 된다.[10] Prince는 보통 왕자로 번역되지만 대공 등 다른 의미도 있다. 자세한 것은 프린스 항목 참조.[11] 란트그라프는 보통 방백으로 번역된다. 궁중백이나 변경백보단 낮지만 일반적인 백작령으로 구분되며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 후 발전한 제국 백작과도 구분된다(제국 백작은 제국의회에 투표권이 있는 직위.)[12] 참고로, 프랑슈 콩테 지역은 백작령으로 분리되어 있었다.[13] 그의 지위 중 쿠바·멕시코 등을 포함하는 광대한 아메리카, 포르투갈로부터 영유권을 넘겨받은 필리핀, 알제리·튀니지 등을 포함하는 아프리카 식민지는 제외한 것이다.[14] 단, 시칠리아에서는 카를로 2세였다.[15] 황제가 된 직후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독일의 대리 통치를 맡기면서 이 작위를 물려주었다. 물론 오스트리아의 Archduke 칭호는 작위를 물려받지 못한 차남 등도 사용할 수 있어 왕의 아들에게 내려지는 대공의 의미를 가진 Prince가 아닌 왕자라는 의미를 지닌 Prince가 내려지는 것처럼 사용될수도 있어 그 전부터 Archduke라고 불렸지만 1521년 1월 12일을 기점으로 페르디난트는 전과 다르게 왕자의 느낌으로 사용되는 대공이 아닌,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인 대공이 된 것이다.[16] 이 시절 나이가 여전히 10대였다. 막상 코뮤네로 반란군도 불만은 많지만 뭐 애초에 왕으로서 한 게 없는 어린 왕을 상대로 욕하긴 뭐하니 '외국인 섭정'들을 욕하는 데 주로 집중했다[17] 실제로 이 당시 스페인에서는 쏟아지는 신대륙의 금은보화들을 제대로 가공하거나 화폐화할 능력이 없어, 누군가 값을 부르면 현물로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현찰 박치기. 실제로 이때 당시 기록에는 어떠한 상단이 물품값으로 막대한 황금을 받은 탓에 스페인 사람들이 "타국 놈들이 우리를 서인도 놈처럼 여겨!"라고 말할 정도. 당연하지만 이런 형태로 풀려나오는 엄청난 금은보화들을 국가가 마땅히 환원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 마련이며, 실제로 그리 되었다. 이러한 금은을 관리할 수 있을 만한 제도 및 제련법이 발달하게 되는 것은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의 치세 당시의 일.[18] 아직까지도 적잖은 프랑스인들은 프랑수아 1세의 왕자들이 카를 5세에게 살해되어 발루아 왕가에 망조가 들었다는 카더라를 신뢰하고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다만 이건 '카더라'라고 할 수만은 없는데, 우선 아버지의 뒤를 이을 왕세자감으로 주목받고 있던 장남인 프랑수아가 스페인에서 인질 생활을 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기 때문. 게다가 '카를 5세에게 살해'라고 할 수 있을 지는 모호하지만, 프랑수아 다음으로 부모나 귀족들로부터 사랑받았던 막내 샤를도 합스부르크 황가의 동맹이었던 잉글랜드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19] 이것을 특별히 언급한 이유는 저 책에선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스케일이 방대한 이 작품에서 각각의 챕터는 보통 수세대 동안의 사건을 다루며 각각의 인물에는 매우 짤막짤막하게 초점을 맞췄다. 심지어 에이브러햄 링컨조차 등장이 채 한 페이지를 못 넘겼다. 그런 책에서 카를 5세의 기록이 자세한 건 종교개혁 등 당대의 이슈가 워낙 풍부했기 때문이다.[20] 현재의 볼리비아에 있는 은광(銀鑛)으로, 19세기까지 매년 엄청난 양의 은이 산출되어서 가격 혁명을 일으키는 등 유럽의 경제를 뒤흔든 거대 광산이다. 현재는 은보다는 텅스텐 등 다른 금속을 주로 채굴하고 있다.[21] 프랑스의 방계 왕족이자 부르고뉴의 마지막 상속녀였던 할머니 마리 드 부르고뉴의 영지였는데, 그때만 해도 유럽에서는 프랑스어가 지금의 영어 이상의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웬만한 학계는 물론 대다수 나라의 상류층에서는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게 당연시 여겨졌었다. 이는 이전인 중세 시절에도 그랬고 19세기까지도 마찬가지였는데 귀족이나 왕족들이 서로 프랑스어로 대화하고 아랫것들에게는 해당 국가의 언어로 말한다거나 자기 영지의 언어를 전혀 모르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22] 유럽의 문명은 로마와 그리스를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했기에 라틴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가 자부심이 있는 언어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독일어는 게르만어군으로 라틴어의 영향을 그렇게 많이 받지 않아 당시의 독일사람들도 자신에 대한 언어의 자부심이 없었다.[23] 참고로, 이 대사는 카를의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24] 실제로 이건 상당히 언어적 기교가 넘치는 표현으로, Urbs(도시)와 Orbis(우주)의 철자상 유사성을 적절히 활용한 명언이다. 적국의 수도인 파리에 대한 애착이 잘 드러나는 동시에, 그의 재치를 엿볼 수 있는 부분.[25] 둘이 한 번에 결혼 아니고 차례대로 하나씩[26] 주걱턱이 나왔던 엘레오노르는 그다지 미인이 아니었고, 마누엘이 사망한 이후 2번째 남편이 바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다. 프랑수아는 이 부인을 너무 싫어해서 대놓고 무시했다.[27] 낳기는 많이 낳았는데 마리아가 사망하는 시점에 살아있던 아이는 5명...마리아가 저 시대에 74세까지 산 건 안 비밀.[28] 주앙 마누엘의 누나인 마리아 마누엘라는 펠리페 2세의 첫 번째 부인.[29] 카스티야의 공동왕인 필립과 후아나의 막내딸로 후아나가 정신이 이상하여 갇혀 있을 때 함께 갇혀서 자란 딸이다.[30] 미남왕 필립의 여동생으로 마리 드 부르고뉴가 낳은 딸.[31] 필립과 후아나의 딸로 고모에 이어서 네덜란드의 섭정을 맡았지만 영 신통치 않았다. 헝가리의 라요쉬 2세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20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 자녀없이 홀로 지냈다.[32] 일명 일 모로. 얼굴이 까매서 흑인 하인이 낳았다고 의심되었다고 전한다.[33] 생긴 건 펠리페 2세와도 닯아서 카를이라고 확정하긴 애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