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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原の乱 Shimabara Rebellion 시마바라의 난 | ||
반군의 근거지였던 하라 성을 공격하는 막부군 | ||
<colbgcolor=#C0C0C0><colcolor=#000> 시기 | 1637년 12월 11일 ~ 1638년 4월 12일 | |
장소 | 일본 | |
원인 |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 | |
교전 | 공격 세력 | 진압 세력 |
시마바라 일대의 키리시탄 | 에도 막부 | |
지휘관 | 아마쿠사 시로 토키사다 |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
병력 | 2~3만 7천여 명 | 12만 6000여 명 |
피해 | 전멸[1] | 1~2만 명 |
결과 | 반란군의 패배 | |
영향 | 이후 일본에서 기독교를 더욱 전면적으로 탄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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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37년 일본 규슈 북부의 시마바라[2]에서 기독교인들이 일으킨 대규모 민란. 시기 상 도쿠가와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치세에 일어났다. 시마바라 · 아마쿠사 잇키(島原・天草一揆), 시마바라 · 아마쿠사의 난(島原・天草の乱)이라고도 부른다. 사실 기독교 박해만이 문제는 아니었고 당시 막부의 세금 정책에 반발했다는 이유도 있다. 종교적 성격에 민중 저항적 요소까지 갖추고 있어 역사적으로 꽤 중요한 사건이다.2. 진행
2.1. 배경
원래 시마바라는 키리시탄(キリシタン)[3]이었던 아리마 가문이 다스렸는데 당시 영주인 아리마 나오즈미(有馬直純)가 노베오카(延岡)로 전봉된 후[4] 마츠쿠라(松倉) 가문이 들어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重政)는 키리시탄을 무지막지하게 탄압했고 농민에게 엄청난 세금을 물린 데다 키리시탄의 본거지인 필리핀의 루손 섬을 공격하겠다면서 전쟁세까지 부과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으며 기존의 중심지였던 미나미시마바라시 지역의 히노에 성과 하라 성을 폐성시키고 시마바라시 지역에 영지의 규모에 맞지 않는 거성을 지음으로써 영민들의 불만과 부담을 증가시켰고 운젠 지옥(雲仙地獄) 고문[5]이라고 부르는 그 악명 높은 악행을 저질렀다. 아들인 마츠쿠라 카츠이에(松倉勝家)는 더한 막장으로, 아버지보다 더욱 심한 폭정을 일삼아[6] 농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시마바라의 난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아마쿠사라는 곳도 반란의 근원지였는데 이 곳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옛 영지로, 유키나가 자신이 가톨릭 신자[7]였기 때문에 그곳도 가톨릭이 융성했지만 유키나가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처형되고 나서 테라자와 히로타카가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 쪽도 만만치 않은 종교 박해를 자행했다.
2.2. 키리시탄 봉기와 진압
이에 참다못한 시마바라의 키리시탄 농민 2만여 명이 들고 일어나 무장 봉기를 일으킨다. 이때 반군은 대관소로 쳐들어가 대관소의 관리들과 대관소의 수장인 하야시 효자에몬을 살해하였고 아마쿠사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시마바라와 합세했다. 당시 반란의 지도자는 하느님의 대리인이라고 불리던 아마쿠사 시로 토키사다[8]라는 16세 소년이었으며 막부의 영지 재배치로 인해 주군을 잃고 낭인이 되어 떠돌던 기독교 신자 사무라이들도 대량으로 참가[9]했다고 한다. 반군의 병력은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대략 2만 ~ 3만 7천의 키리시탄들이었다고 한다.시마바라 번에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3천 명의 군대를 보냈지만 참패를 당했다. 이후 시마바라의 혼도 성을 포위했는데 마침 거기서도 무거운 세금으로 농민들이 불만이 많았고 이들이 배신을 때려서 반란군에 합류했으며 결국 혼도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당황한 시마바라의 영주는 막부에 지원을 요청했고 막부는 이에 진압군을 파견하기 시작했지만 도쿄에서 시마바라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반란군은 이 시간을 이용해서 나가사키까지 장악해서 막부군과 장기간 농성전을 하려고 계획했다. 그래서 이들은 나가사키로 가기 위해 시마바라의 인근지역인 도미오카 성을 공략했다. 제1방어선은 뚫는 데 성공했지만 우주방어에 견디지 못한 반란군은 공략을 포기했다.
교두보 마련에 실패한 반란군은 당시 폐성이였던 하라성을 보수해서 농성전을 시작하였다. 이후 3번의 공세 끝에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重昌,1588 ~ 1638)가 이끄는 진압군을 궤멸시키고 시게마사 본인도 전사했다.
이후 막부는 진압 병력을 12만 5,800명으로 증강시켰고 로주인 마츠다이라 노부츠나를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이 병력은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성 전투 이후 일본에서 동원한 최대의 병력이었다. 사실 당시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일부러 과다한 병력을 동원해 부근의 다이묘들의 경제력을 파탄내서[10] 그들을 더욱 더 막부에 의존하게 하려고 한 이유도 있었다.
마츠다이라는 육지와 바다 양쪽으로 포위하여 하라 성 자체를 봉쇄했으며 닌자들을 하라 성내로 잠입하고 정찰시켜 반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작전을 사용했다. 그 결과 하라 성은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나중에는 식량이 바닥나 해초로만 연명하게 될 지경이 되었다. 닌자들의 보고와 성밖에서 전사한 반군 시신의 부검 결과로[11] 반군의 상황을 알게 된 노부츠나는 반군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그들이 거부하자 총공격을 감행한다. 반군의 저항은 결사적이었으나 결국 4개월 만인 1638년 4월에 하라 성이 함락되었고 막부군에게 몰살당하게 되었다. 이때 반군은 단 1명도 항복하지 않고 저항해 전부 전사했으며 반란 지도자인 아마쿠사는 '100년 후에 부활하겠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고 반란에 참가한 키리시탄들도 모두 죽었다. 야마다 에모사쿠라는 단 한 사람만이 생존했다고 하는데 내통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만 막부군도 진압 과정에서 피해가 상당했는데 무려 10,800명이 전사하고 11,000명이 부상당했다. 1:10에 가까운 상황이었음에도 막부군이 이 정도의 피해를 보았으니 키리시탄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저항했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2.3. 막부의 전후 처리
난이 진압된 후 막부의 기독교 박해는 더욱 심해졌고 아래와 같은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후미에
- 데라우케(寺請制度)[12]: 모든 백성들이 의무적으로 불교 사찰에 불자로 등록하도록 한 제도. 사찰에선 주민등록증, 주민등록등본과 비슷한 불자 증명서[13]인 종문개장(宗門改帳), 종문인별장(宗門人別帳)을 신도들에게 발급했고 불자 인증을 하고 절에 단카로 등록된 백성들은 이사갈 때나 장례식을 치를 때[14]와 같은 경조사를 절에서 의무적으로 해결해야 했으며 당연히 카쿠레키리시탄도 예외가 아니었다.[15] 주민 통제에 유리하기는 했으나 역으로 불교가 주민 통제를 종교 본연의 활동보다 더 우선시하게 만드는 폐단을 초래했고 이는 메이지 시대에 일어난 폐불훼석(廃仏毀釈)의 원인 중 하나[16]로 작용하기도 했다.[17]
- 5인조 감시: 조선의 오가작통법처럼 다섯 집씩 1조로 묶었다. 키리시탄을 조에서 적발해 신고하면 처벌하지 않았으나 자체 적발 전에 발견되면 연좌제로 처벌했다.
- 불교로 개종한 키리시탄 및 후손인 루이조쿠(類族)도 막부의 감시 대상이었는데 남자는 7대, 여자는 5대까지 감시했다.[18]
박해를 피해 살아남은 키리시탄들은 카쿠레키리시탄이 되어 메이지시대까지 외딴 섬이나 산악 지대로 숨어서 기독교를 몰래 믿거나 살아남기 위해 불교로 억지로 개종하거나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로 망명을 택해 포르투갈인들을 따라 나갔다. 현재 마카오의 중국계 원주민인 마카이엔사 중에는 이렇게 도망친 일본인 신자의 후손들도 있다.[19] 에도 막부는 일본인이 남만 등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엄금하고 이를 어긴 사람을 처형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처음에는 일본을 떠난 지 10년 이상 지난 사람의 재입국을 금지했다가 이후에는 일본으로 재입국 자체를 금지했다. 따라서 마카오라든지 필리핀으로 떠난 일본인과 그들의 후손은 다시는 일본으로 귀국할 수 없었다.
사실 마카오뿐만 아니라 이 난을 중심으로 전국시대 말기~에도 막부 초기 사이 종교적 탄압으로 인해 동아시아 전역에 상당한 키리시탄 망명자 커뮤니티가 생겼다. 베트남만 보아도 당시 대월은 남북국시대로 갈려져 내전 중이었는데 라이벌 정검이 차지하여 역사, 인구, 경제적으로 중심지였던 하노이 일대 홍강 유역에서 쫒겨나 베트남이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개발도 안 됐던 광남 지방을 기반으로 열세에 있었던 완황의 완씨 정권은 인구와 군사력 증강과 더불어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완황 본인부터 키리시탄 난민을 사위로 둘 만큼 적극적으로 키리시탄 망명을 수용해 오늘날 유명한 관광지인 호이안과 랜드마크인 일본인 다리가 생겼다.
정치적으론 가톨릭을 믿는 스페인, 포르투갈[20]과 대립하고 있었던 네덜란드는 내부적으로도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인 종교적 관용을 정책으로 삼았던 만큼 에도 막부의 키리시탄 탄압을 도우면서도 키리시탄들이 자카르타, 말라카[21]를 비롯한 동남아 식민 무역 도시들에 정착하는 건 굳이 막지 않았다.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부의 기록에 따르면 루손과 마닐라에 수백명의 키리시탄들이 망명을 왔다고 전하고 있으며 인근의 태국과 버마도 전부터 쓰던 일본인 용병들처럼 키리시탄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최초의 국제적 일본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였던 셈이고 이 와중에 군사 기술의 전파나 무역망 활성에도 큰 영향력이 있었던 만큼 전국 시대 말~에도 막부 초의 키리시탄 탄압은 나름 세계사적으로 중요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반영해서인지 고증과 역사성으로 평이 높은 네이버 웹툰 칼부림에서도 키리시탄 출신 항왜들이 나오는데 실제로 당시 조선 항왜 공동체 중 키리시탄들도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22]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게 만든 주범인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난이 진압된 후 영지에서의 영민 수탈이 막부에 의해 적발되어 개역(改易, 영지 몰수)당한 후 에도(도쿄)로 끌려가 참수되었다. 에도 시대에 다이묘가 할복이 아닌 참수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데 조선에서 양반 등 높으신 분들을 죽일 땐 명예를 고려해 대개 사약을 내려 죽이지 참수는 자제한 것과 유사하다.[23] 결국 카츠이에는 에도 시대 유일의 참수 개역 당사자이자 임진왜란 직후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3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존재하는 단 4명의 참수 개역 당사자[24]가 되었고 두 명의 동생 중 한 명은 자살하고 나머지 한 명은 낭인이 되었다.
반면 똑같이 난의 주 원인이자 반군 수장이 나온 지역의 번주였던 테라자와 카타타카(寺沢堅高, 1609 ~ 1647)는 마츠쿠라 가문처럼 농민들을 수탈하지는 않아서 카츠이에에 비해 관대한 처분이 내려져 아마쿠사(4만 석)만 몰수하고 카라츠 번의 8만 3,000석짜리 기존 영지는 보존할 수 있었지만 막상 본인은 이에 충격받고 1647년에 자살했다.
이후 아마쿠사는 막부에서 직접 관리했고 시마바라는 새로 부임한 고리키 다다후사(高力忠房, 1584 ~ 1656)가 인구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문제[25]를 해결하기 위해 몇 년간 연공을 면제해 주겠다는 당근을 내세워 타지의 농민들을 대거 이주시켰는데 오늘날 시마바라 인구의 절반 가량은 이때 각지에서 이주해 왔던 농민들의 후손이다.[26][27] 그러나 그 뒤를 이은 고리키 다카나가(高力隆長, 1605 ~ 1677)는 실정을 저지르다가 1668년에 가이에키당했다.[28]
마츠다이라 가문이 1669년부터 1749년까지 5대 동안 통치했고 도다 가문이 1749년~1774년까지 잠깐 맡았다가 다시 마츠다이라 가문이 돌아와 1774년부터 1871년까지 8대 동안 통치했다. 도쿠가와의 방계 가문이 이런 변방 소영지를 맡게 된 이유는 워낙 큰 걸 저지른 지역이고 카쿠레키리시탄의 완전 소탕에 실패했다 보니 불안한 막부에서 마츠다이라 가문에게 맡기고 싶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반란 이후 기존에 일국일령성으로 인해 폐성된 곳의 성곽을 모조리 허물어 버렸다고 하는데 이는 폐성을 보수하여 반란군의 거점이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방책이다.
훗날 시마바라를 발굴할 때 나온 반란군들의 시신에서 십자가를 새긴 탄환이 입 부분에서 발굴되었는데 죽기 직전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 노자성체를 대신하여 입에 물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랜 포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거의 없는 이유, 그리고 근세 일본이 쇄국을 고수했던 이유 중에는 시마바라의 난과 얽힌 역사적인 영향이 있었다. 이 난이 하필이면 기리시탄(그리스도교 신자)이 일으킨 난이었기 때문이었다. 막부는 간담이 서늘했고, 만약 기리시탄을 함부로 허락했다간 저 놈들이 유럽의 힘을 빌려서[29] 막부를 전복시킬 가능성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30]
2.4. 음모론
일각에서는 시마바라의 난이 실은 도요토미 가의 마지막 발악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 주장을 펴는 이들에 의하면 아마쿠사 시로는 오사카 전투에서 여기서 죽지 않고 사츠마로 도주한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사생아란 썰이 있으며 16살의 아마쿠사 시로가 반란군을 이끌 수는 없었을 것이고 배후에는 도요토미 가의 잔당들이 있었다고 본다. 실제로 도요토미 가를 지지하던 이들이 수없이 죽거나 추방당해 로닌(낭인)으로 전락했으며 오사카 성의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한 자들도 있으나 요도도노가 싫다고 참여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이 반란에 참여한 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사들은 그 신분을 아예 박탈당하지 않는 이상 낭인이 되더라도 무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는 있었으므로 그 자손들이 무사의 신분으로 집안을 회복하겠다고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다.난이 진압된 후 아마쿠사 시로의 목을 베었다고 하지만 정작 막부군은 아마쿠사 시로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막부군이 아마쿠사 시로를 붙잡아서 처형한 게 아니라 하라성의 반란군을 모조리 베어 버린 뒤에 시체들을 뒤지다 보니 훌륭한 옷을 입은 어린 소년의 시체를 찾아내서 그것이 아마쿠사 시로인 걸로 생각하고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아마쿠사 시로는 죽지 않고 탈출해서 루손(필리핀)이나 마카오로 도망쳤다는 일설도 있는데 근거는 막부군의 보고서에 아마쿠사 시로의 어머니가 "시로는 남만이나 루손으로 도망쳤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당시 남만은 마카오를 가리켰으며 루손(필리핀)에는 일본인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을 만든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한테 추방당한 키리시탄 다이묘 다카야마 우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다.
물론 이는 지나친 억측이란 반론도 있다. 히데요리의 생존부터가 증명되지 않은 데다 아마쿠사 시로가 히데요리의 아들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남만으로 도망쳤다고 증언한 아마쿠사 시로의 어머니에게 하라 성의 시체에서 베어낸 어린 소년의 목을 보여주자 그 자리에서 통곡했다[31]는 기록이 호소카와 번의 기록에 전하기 때문에 무리한 추측이다.
3. 여담
- 일본에서 기독교인이 적은 이유를 이 사건을 위시한 에도 막부의 탄압에서 찾는 가설이 있다. 안 그래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기리시탄들이 죄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서군에 붙는 바람에 에도 막부에게 찍혔는데 아예 기리시탄들이 대놓고 반란을 일으킨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내부의 기리시탄들은 씨가 마르는 수준으로 탄압당하게 되었고 그 기억이 문화적으로도 남아서 기독교의 영향력을 억제한다는 가설이다. 운 좋게 살아남은 잔존 기리시탄들은 더욱 구석진 도서지역으로 숨어들거나 아예 해외로 도망쳤다. 2010년 문부과학성 조사 결과 현대 일본의 기독교인 비율은 종파를 가리지 않고[32] 1% 내외에 그친다. #[33][34]
- 시마바라의 반란으로부터 수 년 후 에도에 자리잡은 대형 유곽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프로젝트를 에도 막부 주도로 시행했는데 뭇 남자들이 여기에 의심을 품고 '막부가 이전을 핑계로 은근슬쩍 유곽을 없애려는 것 아니냐.'면서 상당히 거세게 시위를 벌였다. 그 시위의 규모가 시마바라의 난과 비견될 만(...)하여서 이후 유곽을 시마바라라는 은어로 부르는 것이 당대 일본 사회에서 유행이었다 카더라(...).
- 매우 극단적인 소수 학설이긴 하나 센고쿠 시대의 진정한 끝을 시마바라의 난으로 보는 주장도 존재한다.
- 막부에서 폐허가 된 시마바라에 히로시마 사람들을 이주시켰는데 이들이 만든 테노베(수연) 소면이 현재 지역의 유명한 특산물이 되었다. 한국에 수출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오프라인에서는 현대백화점에서 판매하고 있다.
- 한편 시마바라시의 또다른 명물로 '구조니'라는 떡국이 있는데 여기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떡국과는 달리 어묵, 쑥갓, 닭고기, 장어(!), 연근 등 매우 다양한 식재료가 들어간다. 이
잡탕요리도 기원이 시마바라의 난 당시 하라 성에서 농성하던 반군 측이 식량난에 남는 식재료를 섞어먹은 것이라고 한다.
- 이 사건 이후의 시대적 배경이 사무라이 참프루다. 일행이 해바라기 향이 나는 사무라이를 찾아가는데 그 사무라이가 바로 히로인 후우의 아버지인 카스미 세죠.
-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만든 게임이 유명한 격투 게임인 사무라이 스피리츠 시리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35] 이 게임 덕분에 시마바라의 난을 알게 된 사람들도 있다.
- 소년탐정 김전일 중 아마쿠사 보물 전설 살인사건은 이 난과 관련된 가상의 전설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 난이 진압되고 꼭 보름 뒤에 동래 부사를 거쳐 조선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동래 부사 정양필(鄭良弼, 1593 ~ 1661)이 치계하였다."가강(家康)이 일본의 관백이었을 때, 길리시단(吉利施端)이라고 하는 남만인(南蠻人)들이 일본에 와 살면서 단지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만 일삼고 인사(人事)는 폐하였으며, 사는 것을 싫어하고 죽는 것을 기뻐하며 혹세 무민하였는데, 가강이 잡아다 남김 없이 죽여버렸습니다. 이 때에 이르러 도원(島原) 지방의 조그만 동네에 두서너 사람이 다시 그 술수를 전파하느라 마을을 출입하면서 촌사람들을 속이고 유혹하더니, 드디어 난을 일으켜 비후수(肥後守)[36]를 죽였습니다. 이에 강호(江戶)의 집정(執政)등이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東萊府使鄭良弼馳啓曰: "日本關白家康時, 有南蠻人稱以吉利施端, 來在日本, 只事祝天, 廢絶人事, 惡生喜死, 惑世誣民, 家康捕斬無遺。 至是島原地小村, 有數三人, 復傳其術, 出入閭巷, 誆誘村民, 遂作亂殺肥後守。 江戶執政等勦滅之云인조실록 인조 16년 3월 13일 기사
이 사건이 나중에 헨드릭 하멜의 신변에도 영향을 줬다. 당시 일본에서 자신들의 속국(...)인 네덜란드인을 왜 자신들에게 보내주지 않았냐고 조선에게 고압적으로 대하자 조선 측에서 꺼낸 이유 중 하나가 시마바라의 난이었고 일본의 가혹한 기독교 탄압으로 하멜이 위험할까봐 자신들이 관리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하멜의 출신국 네덜란드는 당시 일본이 탄압한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를 믿는 나라여서 크게 관련은 없었겠지만[37] 조선 조정에선 거기까진 몰랐다.[38] 한참 뒤에 상대적으로 더 깨인 실학자 중에서도 이익, 안정복은 천주교를 불교의 한 분류로 간주하고 혹세무민하는 사상으로 비판했다.
- 다각도로 보는 시마바라의 난 / 시마바라의 난의 경과를 다룬 글(#1, #2, #3)
- 바티칸 기적 조사관 10권 '원죄 없는 사도들'의 중심 소재로 다뤄졌다.
- Fate/Apocrypha에 등장하는 룰러(3차)와 Fate/Samurai Remnant에 등장하는 치에몬의 배경 설정으로 다뤄졌다. 마츠다이라 노부츠나는 시마바라의 난 진압 담당자였는데 진압 이후 지옥을 보고 온 사람의 표정을 보였다고 한다. 상술한 당사자들도 당시의 상황을 일관적으로 지옥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전술된 전개를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게 된다.
- 박경리가 생전 집필한 일본산고에서 박경리는 시마바라의 난이 "신토에서 '내세에 대한 약속'을 주지 않아 내세관이 희박하고 유한(有限)을 잘 소화시키느라 짙은 허무주의와 감상주의가 팽배하며, 유교도 불교도 모두 힘으로 형식으로 변질되어 버린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갈아엎을 수 있었던 단 한 번의 기회"였다고 평가한다. 물론 박경리가 기본적으로 반일에다가 가톨릭 신자였으니 가톨릭에 우호적인 입장에서 서술된 면도 없지는 않다.
-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2부와 3부 사이에 언급된다. 다만 시마바라의 난이라기 보다는 '천주교도의 난'에 더 가까운게, 1637년이 아닌 1644년 대한령인 구주총관부를 제외한 규슈 지역을 되찾은 에도 막부는 천주교 탄압을 벌여 규슈 내의 많은 천주교도들을 학살하고 다이묘가 천주교도면 영지를 몰수한다. 이에 반발한 천주교도들이 10만 단위의 반란군을 일으키자 막부는 두 배인 20만 대군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한다. 이 때 일본에 귀순한 아이신기오로 아민. 일본명 마츠다이라 이에토시의 기병대가 여자는 겁탈하고 남자가 수레바퀴보다 크면 전부 죽이는 기마민족 풍습이자 학살을 저질러 전국시대를 겪은 일본인들도 경악할 정도. 이후 반란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시마즈 가의 영지 3국 중 사츠마를 제외한 2국을 몰수한다. 10만이나 들고 일어나서 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반군들은 천주교가 허용되는 대한령 구주총관부로 대거 도망쳤으며 막부는 대한과의 충돌을 우려해 추적을 포기했다.
[1] 말 그대로 몰살당했지만 야마다 에모사쿠라는 단 한 사람만이 생존했다고 하는데 내통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2] 지금의 나가사키현 운젠시, 시마바라시, 미나미시마바라시 일대[3] 크리스천을 일본어 발음으로 옮긴 것이다. 전국 시대나 에도 시대 초기의 일본인 기독교도들을 대개 이렇게 부른다.[4] 아리마 나오즈미는 전봉된 후엔 가톨릭과 인연을 끊었고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자 예전 영지의 농민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나오즈미가 가톨릭을 버리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면 나오즈미의 아버지인 아리마 하루노부가 포르투갈과 갈등을 겪는 와중에 사건을 무마해보려고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大八)에게 뇌물을 줬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사형에 처해지고 가이에키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나오즈미가 그나마 이에야스와의 친분으로 연좌를 면해서 겨우 영지를 상속받았으나, 가톨릭과 가톨릭 신자들이 많은 자신의 영지에 대해 환멸을 느끼면서 스스로 전봉을 요청했다.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예수회 사료에 1613년 나오즈미가 세례명을 받은 자신의 두 이복동생들을 8세와 6세일 때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그는 불교로 개종해서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자 복수귀마냥 예전 영지의 농민과 예전 가신들까지 때려잡게 되었다.[5] 운젠산(雲仙岳)에 있는 유황 온천에서 유래한 고문. 운젠산은 과거부터 분화해 왔고 1991년 운젠 분화 당시 화쇄류로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전적이 있는 활화산이다. 이 유황 온천은 화산 남부에 위치해 있다. 당시 마츠쿠라 가문 측은 그 펄펄 끓는 유황 온천에 키리시탄을 넣어 강제로 개종시켰고 이러한 잔인함에 가톨릭과 척을 지었던 개신교 네덜란드인조차 고개를 저었다.[6] 세금을 내지 못한 농민에게 도롱이를 풀지 못하게 입혀 놓고 불을 지르는 고문인 미노오도리(蓑踊り)가 이때 나왔다. 도롱이에 묶인 농민들이 불에 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이 마치 춤추는 것 같다고 '도롱이 춤'이라고 불린 것이다.[7]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신부가 되었다.[8] 세례명은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예로니모 혹은 프란치스코라 표기하고 있다.[9] 종교에 관계 없이 반 도쿠가와파 낭인들이 대거 합세했다는 설도 있다.[10] 이 지역들은 도쿠가와 막부를 싫어하는 도자마 다이묘의 영역이다. 충분히 그럴 만한 동기가 있는 셈이다.[11] 시신의 위장에서 음식물이 해초밖에 없었다.[12] 사청제도(데라우케) 자체는 일본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아스카 시대부터 있었지만 에도 시대에 기능이 확대됐고 단가제도와 연계해 운용했다. 기독교 박해가 중지된 1871년에 폐지됐다.[13] 신도증+민증을 합친 개념이었다.[14] 장례를 절에서 해결하도록 한 근거가 관습법인 단카 제도(檀家制度)였다. 단카는 막부가 제정한 성문법은 아니었으나 사청제도로 인해 키리시탄 단속을 포함한 주민 통제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은 불교계가 자체 시행했다. 에도 시대가 끝나고 사청제도가 사라진 뒤에도 단카의 영향으로 일본에선 장례는 절에서 주관한다는 인식이 자리잡혔다.[15] 불자로 등록하지 않으면 진짜든 아니든 키리시탄으로 간주되니 명목상으로라도 등록하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웃긴 건 에도 시대에 성리학을 수용한 일부 일본의 유학자들이 불교식 장례를 거부하고 성리학의 주자가례에 따라 장례(삼년상 포함)를 치르려다가 키리시탄으로 오해를 샀던 일이 종종 있었다는 점이다.[16] 다른 원인은 국가신토 구축에 앞서 불교와 습합된 신토를 불교에서 분리하는 게 목적이었다. 일단 국가신토가 자리잡은 뒤에는 불교의 대접이 다시 좋아졌다.[17] 참고 링크: 일본불교와 단가제도(불교신문)[18] 참고 링크: 가톨릭신문[19] 마카오의 교회들 중 망명 일본인 신자들이 만든 것도 많다. 설정상 대항해시대 4의 등장 인물인 린 시에의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여기서 따온 설정인 듯하다.[20] 포르투갈은 17세기에 스페인과 이베리아 연합으로 동군연합이었다가 독립했다.[21] 1510년대에 말라카 왕국을 멸망시킨 포르투갈이 차지했으나 17세기 중반에 네덜란드가 포르투갈 세력을 내쫓고 차지했다.[22] 일단 가능성은 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 및 그의 수하에 있던 일부 병사는 키리시탄이었다. 키리시탄 다이묘와 병사들이 있었는데 항왜가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23] 칸다 치사토 《시마바라의 난》中[24] 나머지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서군쪽 수뇌부인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 고니시 유키나가였는데 고니시 유키나가의 경우는 개역당하면서 그 영지가 불구대천인 가토 기요마사한테 넘어가버렸을 정도로 일본 역사상 손에 꼽는 치욕적인 처벌을 받았다.[25] 작은 영지에서 주민 다수가 반란군, 일부는 진압군으로서 참가해 반란군 쪽에서만 3만 여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나왔고 이후 키리시탄의 색출과 처분까지 이루어졌다. 물론 이는 아마쿠사에서 봉기한 이들을 합친 숫자임을 감안해야 하지만 변두리 도서 지역에게 있어서는 궤멸적인 피해다. 특히 미나미시마바라 쪽은 거의 다 반란에 가담했고 최후의 농성지였으니 남아 있는 인구가 없었을 것이다.[26] 그것 때문에 시마바라는 지금도 반도의 각 지역마다 방언과 풍습이 따로 노는 경우가 많다.[27] 실제로 시마바라의 명물인 시마바라 소면은 당시 히로시마에서 온 이주민들이 만들었다고 한다.[28] 전 영주의 실정 때문에 농민들이 들고 일어선 곳에서 새 영주가 또 실정을 하니 도저히 봐줄 수 없었을 것이다.[29] 당장 병인양요부터도 병인박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프랑스에서 쳐들어온 사건이었다. 아예 그리도교 신자가 없어야 유럽이 일본에 들어올 명분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30] 일본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과 교류를 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그들의 전력(戰力)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또한 실제로도 스페인은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기 약 100년 정도 전쯤 에르난 코르테스가 몇백 명 되지도 않는 병력으로 그 거대한 아즈텍 제국을 완전히 밀어버린 과거가 있었다.[31] 다만 이것도 아마쿠사 시로가 생존했다는 입장에서 설명을 붙이려면 얼마든지 붙일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하다.[32]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모두 포함.[33] 다만 2010년 기준으로 동북아 국가의 기독교도 비율은 중국 5.1%, 타이완 5.5%, 일본 1.6%, 한국 29.4%, 몽골 1.3%로 한국이 이례적으로 높고 전반적으로 낮은 양상을 보인다.[34] 심지어 일본이 서구 국가들한테 문호를 개방한 메이지 유신 이후로 수많은 서구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몰려와서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1세기 이상이나 벌였음에도 기독교도 수가 고작 일본 전체 인구의 1% 내외일 만큼 일본의 기독교 교세는 매우 미약하다. 게다가 일본은 조선보다 최소 300년 이상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였음에도 일본 기독교는 궤멸적인 수준으로 그 교세가 미미하다. 조선에는 1700년대가 되어서야 기독교가 전래된 반면 일본은 이미 센고쿠 시대에 기독교도 다이묘가 있었다.[35] 다만, 시마바라의 난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핵심이 되고, 난의 주인공인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를 최종 보스로 설정한 정도.[36] 이타쿠라 시게마사를 말한다.[37]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달리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일본에서 선교하지 않는 대신 교류가 허용되었고 막부도 개신교에 대해서는 가톨릭에 대해서 처럼 적대적인 입장은 아니었다.[38] 한편 네덜란드에게 일본은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소개하고 하멜 표류기로 조선에 관심을 가진 네덜란드에게 조선과 교류하면 자신들과 교류를 단절하겠다고 협박해 네덜란드에서 추진한 조선과의 교류 계획을 멈추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