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4 17:54:28

가이에키


1. 개요2. 가이에키를 당한 다이묘3. 가이에키에 대한 에피소드

1. 개요

[ruby(改易,ruby=かいえき)](개역)

사무라이막부에게 영지 및 재산을 몰수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로마치 막부 때는 슈고 다이묘를 해임하는 의미로 쓰였고, 에도 막부에서는 다이묘에 대한 영지 몰수의 의미로 쓰였다.

주로 아래와 같은 이유로 영지가 몰수되었다.
  • 자손(양자 포함)이 없어 가문이 단절되는 경우: 양자가 아닌 친자가 있어도 막부에 후계자를 등록하지 않으면 후계자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영지를 몰수했다.
  • 막부 반대 세력 제거: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 이후 대량으로 발생했다.
  • 무가제법도 위반: 무사들이 지켜야 할 법으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반포한 규정
  • 살인, 적전도주 등의 중죄
  • 영지 내의 반란: 시마바라의 난[1]

주로 17세기 초중반에 에도 막부가 대대적으로 반대파 숙청을 위해 가이에키를 실시했으나, 세력이 사라지면 당연히 실업자로닌이 급증해서 통제가 힘들어 골치 아팠기 때문에 18세기 이후에는 되도록 가이에키를 자제하게 된다.[2]

2. 가이에키를 당한 다이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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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이에키에 대한 에피소드


[1] 사실 이 곳의 관리인 마츠쿠라 카츠이에 같은 경우도 개역당하고 에도로 끌려가 참수당했는데 같은 편인 막부가 자기를 팀킬한 것은 이해가 잘 안갈수도 있겠지만 이는 막부가 탐관오리 응징차원에서 처벌한 것에 가깝다. 다른 영지들보다 무시무시한 세율로 영민들을 수탈했으니 막부 입장에서도 정권을 유지하려고 다른 하층민들을 달래기 위해선 확실한 상급자에 대한 처벌이 필요했던 것이다. 참수는 에도시대에 무사에게 내려지는 최악의 형벌로써 명예살인인 할복보다 심한 치욕적 죽음으로 간주되었는데 개역당하고 참수당한 다이묘는 카츠이에가 유일하다! 그만큼 세율이 살인적인 에도시대 일본에서도 카츠이에는 조선후기의 최악의 탐관오리 조병갑 포지션이었고 다이묘들도 혀를 차던 당대 최악의 영지 관리인이었다.[2] 예를 들어 후계자가 없는 경우는 봐주기도 했다. 물론 영지 당사자는 마치 후계자가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해야 했는데 예시로 구마모토 번주인 호소카와 무네타카가 1747년 갑자기 피살되었는데 당시 31세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아들이 없어서 후계자가 없었고 심지어 무가제법도 위반까지 걸렸기 때문에 영락없이 가이에키 행이었지만 센다이 번주 다테 무네무라가 아직 숨이 붙어있으니 얼른 저택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하라고 조언을 해주었는데 이에 구마모토 번 가신들은 무네타카의 시체를 저택으로 가져간 후 얼마 뒤 무네타카가 죽기 전 동생 나가오타 노리오를 후계자로 삼고 다음날 숨을 거뒀다고 거짓말을 했다.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가이에키를 했다가는 또 로닌이 발생할 판이었기에 그냥 막부에서는 구마모토측이 하는 얘기대로 넘어가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