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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갑

<colbgcolor=#000><colcolor=#fff> 조병갑
趙秉甲
출생 1844년 5월 15일
조선국 (출생지 미상)
사망 1912년 5월 23일 (향년 68세)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국(1844~1897)

[[대한제국|]][[틀:국기|]][[틀:국기|]](1897~1910)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제강점기 조선(1910~1912)
신분 양반(관리)
가족 아버지 조규순(趙奎淳)[1]
형 조병섭(趙秉燮)[2]
부인 이병양(李秉兩)(첫째 부인)[3][4], 청송 심씨[5](둘째 부인)
아들 조강희(趙岡熙)(1889년 출생)[6]조찬희(趙瓚熙)(1880년 출생 ~ 사망 미상)[7]
친인
조부 조진익(趙鎭翼)
반남박씨[8]
며느리 연안 이씨[9]
손자 조중완(趙重完)
증손녀 조기숙[10]
큰아버지 조두순(趙斗淳)(1796년 출생 ~ 1870년 사망)[11]
사촌형: 조병식(趙秉式)(1832년 출생 ~ 1907년 사망)
종교 유교(성리학)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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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관료. 본관은 양주이며 자는 요성(耀成)이다. 고종 당시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의 서조카이기도 하다. 백낙신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탐관오리로, 그의 학정은 동학 농민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2. 생애

철종 14년(1863년)에 관직에 올랐고 고종 30년(1893년)에 전라도 고부군수로 부임했다.

부임하자마자 늘 하던 대로 조선 후기 탐관오리 특유의 각종 권력남용과 수탈을 일삼았다. 그의 대표적인 악행으로는 만석보라는 큰 저수지를 만든 것으로 이미 상류에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보[12]가 있음에도 더 큰 보를 만들겠답시고 백성들에게 땡전 한 푼 주지 않고 부역에 동원하는가 하면 보가 완성되자 만석보의 물을 쓰는데 과도한 세금을 매겨 거액의 수세를 뜯어낸 것이다.[13]

인근의 태인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공적 비각을 세운다고 다시 세금을 뜯고 강제 노역을 시켰으며 이외에도 백성의 재산을 탐내 무고한 죄를 뒤집어씌워 재산을 뺏는 등의 각종 악행으로 백성들에게 원성을 샀으며 만석보도 잘못 만들었는지 홍수철마다 침수 피해가 발생해서 악명이 자자했다.

어느 날 그가 모친상을 당하자 부조금으로 2천냥을 걷어오라고 지시했다. 이에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이 대표로 나서서 항의하다가 곤장에 죽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것으로 인해 그동안 쌓였던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전봉준을 중심으로 들고 일어나 동학농민운동(1894년)의 시작인 고부 민란이 일어났다. 그는 미리 봉기한다는 사실을 알고 도망쳐서 린치는 피했지만 이후 죄가 드러나며 조정에 의해 파직당하고 고금도유배당했다.

청일전쟁 직전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이 설립한 친일 내각은 그를 석방했는데 불행하게도 친일 내각 붕괴 이후에도 그는 고종으로부터 중용받아 1898년에는 고등재판소 판사가 되어 동학 지도자 최시형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도 했다. 고종과 친일파 양쪽에게 총애받은 그는 호의호식하다가 자연사로 생을 마감했다.

3. 기타

  • 그는 선정비는 현재 2기가 남아 있는데 함양읍 역사인물공원에 있는 것과 2009년 천안 광덕면에서 새로 발견된 것이다. 함양 선정비 표지석에는 "조병갑이 유민을 편케 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임했기에 그 사실없는 선정을 기리기 위해 고종 24년(1887년) 세웠다."는 내용이 있고 천안 광덕면에서 발견한 선정비는 마모가 심해 글자 판독이 어렵다. 선정비 2기는 조병갑이 고부군수(1893년)를 지내기 전 함양군수(1880년)와 천안군수(1882년)를 역임한 시절에 자기 공덕을 기리고자 셀프로 세운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함양군의회 군의원들은 "선조들의 충효와 선비 정신, 위민과 애민 사상이 깃들어 있는 역사인물공원 안에 있는 동학 혁명의 도화선으로 지탄받고 응징해야 할 조병갑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건 지역 주민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며 역사적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며 조속히 철거하자고 주장했다. 2007년 1월 30대 남성 백 모씨[14]가 함양에 있는 그의 선덕비를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 둘째 아들 조강희는 일제강점기에 <경성일보>[15]와 <매일신보>에서 일했으며 친일 신문 <동광신문>에서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이 그의 증손녀다.[18] <월간조선>이 이 사실을 폭로하면서 조병갑이 나중에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판사로 복직했다는 기사를 내보내 논란이 일었는데 조기숙은 "조병갑이 동학농민운동의 정당성을 위한 희생양이고 조병갑이 동학농민운동을 유발했다는 것은 역사적 오류"라며 항변했으나 여론이 악화되자 동학농민혁명군 유족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정남기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은 "후손이 책임질 일이 아닌데 사과의 뜻을 밝힌 것을 고맙게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내놓았으나 일부 유족들은 "언론에 보도되니 그제서야 면피용 사과를 한다."며 탐탁찮은 반응을 보였다. 물론 아무리 탐관오리라고 해도 지금은 연좌제가 있는 조선시대가 아니므로 악행과는 무관한 후손이 조상의 죄업 때문에 욕 먹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냥 반응하지 않거나 간단히 사죄하고 끝내면 될 일을 정부 인사가 거짓말까지 하며 자기 조상을 옹호하다가 뒤늦게 면피용 사과를 했다는 점은 비판받아야 하겠다.
  •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에 그의 무덤이 남아 있지만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그과 그 가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참고
파일:조병갑 사진.jpg
* 인터넷에 조병갑의 실제 사진이라고 잘못 알려진 사진이다. 사실 이 사진은 조병갑의 사촌형 조병식의 사진이다.어차피 둘 다 욕먹어도 상관없는 족속이다

4. 대중매체

대중매채에서는 주로 실제 본인의 행적과 비슷한 악질 탐관오리로 등장한다.
파일:조병갑.jpg
  • 조선 최고의 화가로 유명한 장승업의 일대기를 다룬 한국 영화 <취화선>에서 배우 김응수가 조병갑을 연기했다. 작중 시대배경이 바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난 시기였고, 실제로 동학 농민 운동의 과정도 묘사된다.

[1] 태인 군수를 지냄[2] 교관, 조두순(趙斗淳)에게 입양[3] 전주 이씨[4] 판서 이병문(李秉文)의 딸.[5] 부사 심영규(沈永奎)의 딸.[6] 일제강점기의 언론인.[7] 진사 역임.[8] 박종악의 딸[9] 국장 이도익의 딸.[10] 이화여자대학교 국제학부 국제학 전공 부교수[11] 영의정을 지냄.[12] 광산보, 혹은 민보라 불린다.[13] 현재 만석보가 있던 자리는 지방 사적으로 지정되었는데 거기 세워진 표지판에 '만석보지'라고 쓰여 있다. 유홍준 교수가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서 민간 차원으로 세웠던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와 비교하며 자세히 논평하였다.[14] 이 사람은 2007년 2월 삼전도비철거370이라고 낙서하여 훼손하거나 2012년, 2016년에는 각각 노태우, 박정희 대통령 생가에 방화하는 등의 일을 저질렀으며 구속된 후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기사.[15]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부 통감으로 부임한 후 침략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06년 창간한 통감부 기관지다.[16] 방곡령을 내린 이유도 흔히 생각하듯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상인들이 미곡을 다 가져가면 자신이 수탈할 미곡이 모자라서였다. 이후 조병식은 충청감사가 되어 동학도들의 애절한 호소를 다 씹는 기염을 토한다. 이후 이리저리 좌천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신 못 차리고 계속 탐관오리로 살았다고 한다. 마침내 오직 고종의 전제 왕권 유지와 독립협회를 때려부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은 정치깡패 집단 황국협회의 간부가 되어 직접 독립협회를 때려부수고 민권 운동을 탄압했다.[17] 한양 조씨다.[18] 친일 언론인 조강희의 손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