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3 19:51:14

고종(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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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왕공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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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덕수궁 이태왕 이희(고종)
창덕궁 이왕 이척(순종)이은(영친왕)
공족운현궁 종주 이희(흥친왕)이준(영선군)이우이청
사동궁 종주 이강(의친왕)*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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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시는 생전에 도중 종주 양위를 표기함.
※ 후작 이하의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조선귀족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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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6대 국왕
高宗
고종
대한제국 초대 황제
高宗 太皇帝
고종 태황제
파일:고종 황제 01.jpg
묘호 고종(高宗)[1]
시호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출생 1852년(함풍 2년) 9월 8일
조선 한성부 정선방 흥선군 사저
사망 1919년(대정 8년) 1월 21일
(66년 4개월 13일, 24,241일)
일본령 조선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 함녕전
장례 1919년 3월 3일
능묘 홍릉(洪陵)
절일 만수성절(萬壽聖節)[2]
재위 조선국 국왕, 대조선국 대군주[3]
1864년 1월 21일 ~ 1897년 10월 12일
(33년 8개월 21일, 12,319일)
대한제국 황제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19일
(9년 9개월 8일, 3,568일)
대한제국 태황제
1907년 7월 19일 ~ 1910년 8월 29일
(3년 1개월 9일, 1,137일)
일본령 조선 덕수궁 이태왕
1910년 8월 29일 ~ 1919년 1월 21일
(8년 4개월 23일, 3,068일)
연호 개국(開國)[4], 건양(建陽)[5], 광무(光武)[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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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명복(命福)[8] / 재황(載晃)[9]
형(㷩)[10][11] / 희(熙)[12]
명부(明夫) / 성림(聖臨)
주연(珠淵)
군호 익성군(翼成君)
양부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양모 신정익황후(神貞翼王后)
생부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
생모 순목대원왕비(純穆大院王妃)
황후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

1. 개요2. 상세3. 생애4. 평가
4.1. 고종의 재위 기간 당시의 정세4.2. 권력 집착4.3. 재정 운영4.4. 외교와 내정
4.4.1. 배경
4.5. 일본에 대한 태도
5. 개인사
5.1. 고종과 군밤 떡밥
6. 가족 관계7. 사진과 어진, 기타 그림
7.1. 사진7.2. 어진7.3. 기타 그림
8. 현대 매체에서
8.1. 각 매체에서
9.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휘는 재황(載晃), 형(㷩). 연호광무.

2. 상세

안으로는 부국강병, 바깥으로는 국체 보존이라는 2가지 시대적 대과제를 맡았으나 어느 것 하나 달성하지 못한 황제. 두 목표를 전부 달성하면 사실상 고려의 현종 또는 신라의 통일 대업을 완성한 무열왕 급이지만 고종이 보여준 행각은 이도 저도 아닌 우유부단한 모습이었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 지배층 답게 청 파병 요청을 하는 등, 조선 멸망을 스스로 가속화하였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병합 의도를 간파하여 대한제국을 세우고 광무개혁을 단행하여 마지막 근대화 불꽃을 태웠다.

급변하는 세계 정세를 읽지 못할 정도로 어두운 바보는 아니었지만 밝다고 볼 수는 없었고, 큰 힘에 맞설 시도조차 하지 않고 굴복할 만큼 나약하진 않았으나,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결단력은 무척이나 부족했다. 한마디로 불가능에 가까운 시대 과제를 해결할 비범한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에,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떠안은 보통 사람.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정치술은 대단했지만 정작 외세에는 한없이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만 보여줘 가뜩이나 어려운 시절에 악영향을 많이 끼쳤다. 그나마 일본에 사실상 병합된 후 죽기 전 비자금으로 독립 운동을 도우려 했지만, 그마저도 완전히 성공하진 못했고 실패했다(헐버트 문서 참조).

재위 기간이 조선 왕조 전체를 통틀어 영조(52년), 숙종(46년)에 이어 세 번째로 긴 군주다. 게다가 태황제 3년을 더하면 숙종을 뛰어넘고, 이후 이태왕으로서의 기간을 더하면 56년(+ 15일)로 영조를 거뜬히 뛰어넘어 발해 문왕의 기록에 근접한다. 망국이 없었다면 살아있는 기록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

그의 치세에 조선이 개항부터 시작해 실질적으로 망했으므로 '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종을 후하게 평가하는 측은 '잘 해보려 했는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다', '운도 안 따라줬고 결과도 안 좋았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식으로 졌지만 잘 싸웠다식의 동정론적 평가, 혹은 제국 멸망 후 불우한 황족들의 삶[13] 등으로 인한 동정표들이 주를 이룬다.

고종을 박하게 평하는 측은 혼란한 시대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고종이 군주로서 이렇다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과, 그나마 치적이라 할 수 있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조차 황후 민씨 일가의 부패, 두루뭉술한 행정, 서양 문화와 기술에 대한 이해부족 등의 여러 실정으로 점철되어있는 점을 들어 평온한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별 볼 일 없는 군주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심지어 고종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고종을 범군을 넘어 암군으로 보는데, 대표적인 실정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 때의 처신으로, 임오군란 때 제대로 나서지도, 뒤에서 수습하지 못해서 일을 너무 크게 벌여버렸고,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려고 외국의 개입을 허용하는 오판을 했다는 점에서 군주의 정치에 가장 필요한 사태를 분명히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이 방증된다는 시각이다.

고종에 대한 평가는 망국의 마지막 군주들에게서 나타는 지나친 폄하나 이후 식민지 시기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정치적 논란이 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망국의 마지막 군주들은 새로운 권력에 비해 폄하되기 쉽고,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면서 '(이씨)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는 인식을 심는 데 노력했다. 그래서 고종에 대한 폄하를 식민사관의 일종으로 보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존재하며, 민족주의가 최고조에 이른 90년대에는 반짝 평가가 상승하기도 했다.

3. 생애

4. 평가

그는 유능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무능하지도 않았지만, 왕권 또한 약하지도 않았고 강하지도 않았으며, 정치 감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뛰어나지는 못하였으며, 일의 핵심에 있으면서도 핵심이 어디인지 혼동하였으며, 둔하지도 않았지만 민첩하지도 않았고, 인사를 알고 있음에도 인사를 몰랐으며, 자신의 시대가 근대라는 것을 알았지만 전근대적으로 행동했다.

결과적으로 수십 년 고종 재위기에 조선 왕조가 사실상 망했으므로 평균 이상의 명군이라고 보는 시각은 거의 없으며, 이태진 교수 류의 근대화에 힘을 썼다는 것과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을 호평하여 나름대로 할 만큼은 했다는 우호적인 평가와 암울한 한국근현대사를 개막한 총 책임자에 해당하는 구제불능암군 또는 처음에는 신하들에게 벼슬을 팔다가 나중에는 일본에 나라까지 팔았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주로 대립한다.

비판 측의 요지는 고종 재위기에 외척인 민씨 일파의 부패를 사실상 방조 및 조장한 점,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는 유약함과 우유부단함, 내부의 민란인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인 청나라 군대를 불러 결정적으로 나라의 주권을 외국에 넘겨줄 계기를 제공한 점[14]과 지나칠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여 독립 협회를 무너뜨리고 만민 공동회를 탄압해버린 일 등을 꼽는다. 그리고 정작 제대로된 재정 충원조차 이뤄지지 않은채로 양무호 등 외국산 무기를 산다거나[15] 등의 이유로 무분별하게 돈을 썼고, 그러면서 재정 운영 관리는 엉망으로 해 일본이 억지로 차관을 도입시켜 거액의 빚을 지게했을 때도 제대로 갚지 못하여 국채보상운동까지 일어났다. 게다가 근대적 개혁이라고 실시한 광무개혁조차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점들은 고종과 그의 측근 즉 대한 제국 지도부가 근대적인 제도와 문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16] 수백 년간 문제는 굳이 근대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그 이전에 운요호 사건이나 임오군란 등을 보면 소수의 구식 군대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 했다. 이후 고종이 나름대로 박문국, 전환국, 기기창을 설치했고 경복궁에 전구를 부설했으나 근대 무기 제작에 실패하면서, 더 나아가 제대로된 근대 국가 설립에 실패하면서 일본 식민지의 그림자로 다가서게 된다. 이런 와중에 커피자동차 등의 자기 취미에 심취해 있어서, 송 휘종이나 명 4대 암군들처럼 자기 취미에 너무 깊이 빠져 나라를 말아먹은 것 아니냐는 의혹도[17] 존재한다. 이 군주 때문에 관군과 의병이 상당히 고생했다. 신미양요, 병인양요, 동학 농민 운동 등을 막느라 고생했고 의병들은 꼴에 왕이라고 고종을 지키기위해 나서 수많은 일본군과 교전했다.

다만 고종이 추진한 일련의 개혁들이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위에서부터의 개혁'의 태생적 한계에 있다. 고종이 잘못 추진해서 일어난 '정책적 실패'이며 제대로 추진했으면 성공할 공산이 높았으리라 생각하는 건 몰이해다. 여타 국가들에서도 국왕, 즉 구체제가 주도해서 서구 열강을 어설프게 따라하려는 개혁 시도란 것들이 성공한 일은 거의 없다. 수백년 동안 서유럽을 따라가려고 노력한 러시아조차도 결국 제대로된 서구식 체제 개혁에 성공하지 못하고 후진적인 농노제와 전제정에 의존하다 몰락했는데, 아예 단절되어있던 문화권에서는 개혁 방안을 이해하는 것조차 힘든게 당연하다. 중간 계급(부르주아)의 충분한 성장 없이는 근대 국가 시스템[18]을 제대로 이끌어갈 수가 없고, 근대를 거치며 산업 혁명으로 중산층이 든든하게 생겨난 서구 열강이 아닌 타 문명권에겐 실상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청이나 조선처럼 근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가되는 국가들의 공통점은 강력한 중앙 집권제와 전제 군주제가 유지되어온 국가이다. 이들 국가에게 황제나 왕 이외의 누군가가 실권을 가지고, 자신들은 상징적인 존재로 끝난다는 개념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때마침 운 좋게 중간 계급이 주도해서 막부 구체제를 전복할 명분과 환경이 갖춰진 때였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동아시아의 시각에서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실권이 덴노가 아닌 막부가 쥐고 있던 일본 특유의 막부 제도 때문이었다. 즉, 청과 조선은 최고 권력층을 갈아치우면 왕조를 갈아치우는 역적질이 되지만, 일본은 막부를 향해 칼을 빼들어도 '막부의 권력을 최고 권력자인 덴노에게 돌려준다.' 라는 명분이 가능했기에 막부를 타도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였던 조선이나 청에 비해 각 번의 자율성이 컸던 막번 제도의 지방 분권적인 특성 덕분에 막부를 상대로 딴 마음을 먹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당시 막부를 몰아낸 존왕양이파 입장에서도 덴노가 실권을 가지고 전제 군주가 되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고, 왕이 상징적인 존재로 끝나고 실권은 다른 사람이 가진다는 점은 막부 제도나 입헌 군주제나 유사성이 있었기에 청이나 조선에 비해 입헌 군주제를 도입하는 데 큰 저항이 없었다. 즉, 근대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입헌 군주제를 비롯한 제도적인 개혁을 하는 데 있어서 일본은 오랜 막부 제도와 실권 없는 덴노로 인해 전제 군주제였던 청이나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항이 덜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특수성 때문에 입헌 군주제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처럼 중앙 집권이 확실한 체제에서 국왕이 주도해서 개혁한다는 것은 설령 천재 명군이라도 근본적으로 이루기 힘든 과제[19]란 것과, 게다가 당시의 조선은 동북아시아 왕조 국가의 평균 수명을 넘어서서 곪고 썩어있는 국가였다는 환경을 인지하고 고종을 평가할 때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고종 개인의 능력을 변호해주지는 않지만 말이다.

4.1. 고종의 재위 기간 당시의 정세

게임 난이도 형식으로 설명하면 대충 이 정도가 된다.
  • 목표
    • 조선 - 대한 제국이라는 나라가 다른 나라에 의해서 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보편적 지도자로서의 목표)
    • 조선/대한제국이라는 황통이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황실의 후계자로서의 목표)
  • 문제점과 상황
    • 전근대적 조선의 왕권은 기본적으로 제약이 많다.
    • 고종은 근대적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국가도 근대적 문물을 받아들일 기반(교육 체계 등)이 없었다.[20]
      • 그러니까 플레이어가 이 게임을 처음 하는 셈이다. 즉 '이 정도 조건이라면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겠다' 라는 감각 자체가 없는 것.
      • 고종의 직전 지배자는 실질적으로 흥선대원군인데, 대원군은 자의적으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된 고종에게 파워게임 과정에서 밀려난 것이기 때문에 고종에게 지배자로서의 교육도 거의 하지 않았다. 고종이 배운 것은 전근대적인 성리학 교육(+국왕에 대한 약간의 정치학 교육)인 경연,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했던 꼼수 정치다.[21]
    • 군사력은 양과 질 모두 기대할 것이 못 된다.
    • 흥선대원군은 종친들을 장악하고 있으며 권력욕이 강했다. 섭정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고, 물러나면 반란을 도모할 것이고, 아버지 이므로 죽일 수도 없다.
    • 조선의 재정은 파탄 상황이다.
      • 원래 전근대적 조선의 수익은 적었고, 조선의 재정은 꼼수로 돌아갔다.
      • 해당 상황에서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했다. 기존 조선 세입의 12배 - 60배. 전체 화폐 총액의 70%가 경복궁 중건에 들어갔다.
      • 대원군의 당백전 병크에 이은, 청전 유통 때문에 고종 친정 시작시기 조선조정의 금고에는 실질가치 1/2인 청전만 가득한 상황이었다. 이걸 폐지하지 않으면 인플레이션 유지, 폐지하면 중앙정부 파산이다.[22]
      • 경제 체계가 사실상 붕괴했으며, 근대적 화폐 체제(금/은 본위제)로 들어가기에는 조선에는 그럴 정도로 모아둔 귀금속이 없다.
      • 화폐 발행권은 기득권자들에게 나뉘어 있으며, 기득권자들과 외국(일제)이 사적으로 악화를 주조해 화폐경제를 망치고 있었다.
      • 천연 자원, 예를 들어서 금광 하나를 개발하는 데는 조선중앙정부 1년 세입[23]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그래서 외국인들에게 광산이나 철도 개발권을 넘기고 중간에서 일부 수익을 얻은 것).
      • 조선의 세입 구조는 지방관과 향리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이들은 자신의 이득에 집착해서 중앙 정부의 명령도 무시한다.
    • 대부분의 신하는 믿을 수 없다.
      • 전근대 인물들은 전근대적 시스템 유지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개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종친들의 대부분은 흥선 대원군을 따른다.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에 종친 우대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 급진적 개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목표는 적어도 입헌 군주정이다. 이들은 조선 내에서는 세력이 가장 적다.
      • 개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외국과 연결고리가 있다. 청을 통해서 개화를 접한 사람은 친청파가 되고, 일본을 통해서 개화를 접한 사람은 친일파가 되고, 미국을 통해서 개화를 접한 사람은 친미파가 된다.
      • 이들은 수시로 반란을 일으키고, 고종과 그 일가의 목숨을 위협했다.
    • 외국은 믿을 수 없다.
      • 일본은 한국 자체를 먹으려 했고, 청나라 또한 한국을 먹거나 속국 관계를 유지시킨 채 이권을 장악하려 했다.
      • 일본은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에 이미 메이지 유신을 경험했고, 인구와 재정, 군사력에서 비교가 안되는 위치가 되었다. 러일 전쟁 시점 기준 일본의 1년 세입은 대한 제국의 세입에 비해서 적어도 10배가 넘었다. 일본은 자신들이 다른 나라(청, 러시아 등)에 패배하거나, 한국이 강해지기 전에 한국을 완전히 잡아먹으려고 했다.
      • 외국 고문들은 돈을 주는 동안에는 도움이 된다. 설령 다른 나라가 파견했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돈을 줄 수 없게 되면 바로 배신한다.
      • 1차 세계 대전 직전 상황이기 때문에 국제 정세가 복잡하다. 일본 - 영국 - 미국은 우호 관계가 성립되어 있고, 독일 - 러시아도 비슷하다. 이들은 상대의 확장을 바라지 않는다. 즉위 초기에는 청이라는 기존 외세도 존재한다.
      • 청나라는 조선을 먹는 것 보다는 속국 관계를 유지시키는 가운데 조선 내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확대시키겠다는 입장이 주류다.[24] 조선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청나라 또한 심각한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으며 청이 어떤 형태로든 조선에서 손을 떼는 순간 일본에게 그대로 노출된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이기지 않는 한은.

이는 실제로 고종의 생애 동안에 있었던 일과 외부적으로 주어진 상황들을 대략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고종은 결국 이 극한의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다. 해결하면 먼치킨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인 동시에, 결국 해결은 못하면서 대처 과정에서 다른 문제점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비판점.

사실 이런 조건이라면 세종, 정조와 같은 조선의 먼치킨이 집권해도 해결이 어렵다. 판 자체가 불리하게 짜인 데다가 플레이어(고종)마저 상태가 안 좋다. 이게 진짜 그냥 게임이면 실패하여도 별 문제라도 없지, 이건 실패하면 모든 게 끝장나는 국가 경영이기 때문에...게임이었다면 세로질에 랜덤 이벤트 운이라도 바랬을거다 물론 상황이 나쁜것과 그 상황에서 정신못차리고 상황을 더 악화시킨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다못해 과거 망국의 군주였던 공양왕 수준으로라도 했었어도 이정도로 평가가 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4.2. 권력 집착

고종은 유독 권력에 집착하였는데,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추측이 많다. 대원군은 고종이 성년이 되었음에도 섭정을 계속하였는데, 고종이 민씨 일가와 힘을 합쳐 고생끝에 친정을 할 수 있었다. 이후 친정 이후에도 대원군이 별도의 쿠데타, 임오군란, 동학 농민 운동, 갑오 개혁 등으로 정치 노선을 전혀 가리지 않고 다른 세력과 결탁하여 왕권을 위협하였고, 고종이 이를 방어하다보니 정권에 관한 집착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 제국 선포 후에도 독립 협회와 개화파 등과 친교를 유지하다가, 입헌 군주제를 요구하며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자 개화파와 갈등을 빚다가 독립 협회를 탄압하고 만민 공동회를 해산시켰다. 물론 선진국인 유럽에도 전제 군주국이 많았고, 애초에 고종은 전제 군주국의 군주로 즉위했던 인물이므로 그가 단순히 전제 군주였다는 점이 비난 받을 거리는 아니다. 더불어 개화파와 갈등을 빚었던 것도, 애초에 현실성이 떨어지는 집단이었던건 둘째치고 급진 개화파의 경우에는 갑신정변이나 기타 무리한 행동으로 지지기반인 백성들로부터 지지도 상실했고 독립 협회도 고종이 탄압하기 전부터 내부 모순으로 몰락했었다는 점 등 단순히 그들과 갈등을 빚었다고 일방적으로 고종만 비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개화파가 현실에 어둡다고는 해도, 고종이 온건 개화파 이후로 국내의 지식인들로부터 어떠한 지지도 얻지 못하였고 광무 개혁을 통해 자기가 육성한 인재들 조차 친일이나 친미로 돌아서는[25] 등 자신의 지지 기반을 제대로 육성하는 것조차 버거워했으며 이들을 제어하지도 못했다. 인재를 등용하는 시각도 어딘가 나사가 풀려서 이용태를 광무개혁 당시 대한제국의 평리원 재판관으로 다시 기용하기도 했다. 그나마 만든 충직한 측근조차 이용익이나 홍종우같이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뿐이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단순히 특정 지식인 계층과의 갈등을 떠나서 거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한마음으로 외면 받았고, 그렇게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로 권력에만 집착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세종, 정조 정도의 학식, 언변 등 능력을 보유하였다면 모를까 고종은 실적이나 실력은 형편없는 주제에 욕심만 많았던 것이기에 이러한 점에서 고종의 정권 집착이나 독재가 비판받는 편이다.

4.3. 재정 운영

우선 고종은 명성황후처럼 직접 매관매직을 주도했는데 대한 제국 선포 이후 그 정도는 더 심해졌다.[26] 고종은 이렇게 매관 매직을 하거나, 원납전을 거두거나 등의 방법으로 개인 비자금인 내탕금을 형성하였다. 문제는 이렇게 마련된 황제의 개인 비자금이 본래 자금을 관리하는 탁지부의 예산보다 훨씬 비대해졌지만, 정작 정상적인 방법으로 재정을 마련하는 징세 제도는 광무개혁을 실시하였음에도 전혀 정비되지 않아 세수는 늘 부족하였다. 게다가 매관 매직으로 관직을 산 지방 관리나 수령, 이서배 등이 백성 등을 착취하여 개인재산을 축적하였지만 정부에 납부해야될 세수를 중간에서 횡령하면서 재정 부족에도 일조하였다.[27]

그나마 여기에는 어느 정도 실드의 여지라도 있다. 몇몇 학자들은 개화의 과정에서 많은 징세권이 일본 및 기타 열강에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일본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황제가 직접 관리할 수 있는 내탕금에 주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28] 또한 당시 조세 징수 체계에도 문제가 많았는데 이는 광무개혁 참고.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모은 자금조차 제대로 된 곳에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작 가장 많은 예산을 퍼부은 군사 비용은 대한제국군 항목의 해군 파트에서 볼 수 있듯이 중고 석탄 화물선을 군함이랍시고 원가보다 더 비싼값에 사는 등 잘못 사용하거나 사실상 사기를 당하며(...) 허망하게 낭비하는 것이 많았다.

그나마 최근에는 이태진에 의해 고종의 비자금이 당시 독립운동 및 반외세 운동을 하던 이들에게 흘러들어갔음이 밝혀졌다. 특히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에서 활약한 최익현, 이인영, 민종식, 정환직, 허위, 신돌석 등이 고종의 밀지나 자금 지원 등을 받았고, 고종 사망 이후까지 이어져서 국내외 대일본 투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29], 고종이 이렇게 항일 의병들에게 밀지를 보내며 비자금을 내주게 된 계기가, 결국은 독자적이 군사력을 양성할 기회와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의 예산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다 말아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마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 여전히 비판의 여지가 많다.

그 밖에 조약으로 광산 개발권이나 삼림 채굴권 등을 외국에 내주던 상황 역시 당시 구한 말 조선과 대한 제국의 궁핍한 상황과 고종과 왕실의 부실한 협상 능력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부분이다. 특히 그중 두드러지는 것이 운산 금광인데, 당시 미국의 일개 개발사에서 금광 채굴을 위해 지불한 돈이 미화로 500만 달러였는데, 이 금액은 대한 제국의 1년 평균 세입보다 큰 금액이었다. 채굴권 이양 계약은 25년 만기에 수익의 1/4, 25%를 왕실인 궁내부가 갖는 조건이었지만링크, 사측의 초기 투자비가 너무 많아 초기 7년간은 수익 배당이 전혀 이뤄지지 않을 정도였다. 더욱이 수익 배당이 이뤄진 1904년의 이듬해인 1905년에는 러일 전쟁이 발발하는데, 궁내부에서는 러시아와 일본간의 갈등이 고조되자 전쟁을 염려하여 수익 배당조차 못받고 1899년에 소유한 운산 금광의 채권을 10만 달러에 매각했다.[30]

광무개혁 문서에도 있고 조선/평가 문서에도 있지만, 조선은 중앙 정부에 여유자금이라는 것이 없는 재정시스템의 나라였다. 이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경복궁 중건이다. 대원군이 당백전과 청전으로 이어지는 중앙재정의 바닥은 물론이고 미래까지 쥐어짜는 행동을 해서 이룩한 것이 결국, 경복궁 하나이다. 이건 대원군의 행동이 얼마나 답이 없었는지도 보여주지만, 동시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온갖 꼼수에 재정적 한계까지 쥐어짜도 저정도 이상 못하는 수준이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경복궁 중건에 들어간 재원중 당백전 등의 돈놀이 수입을 제외하면, 원납전이라는 이름의 명목상 기부 형태의 강제징수이지 수조권 개혁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건 대원군이건, 갑오개혁이건 뭐건 손을 댄 적이 없고, 소위 말하는 개화파라는 사람들도 이에 대한 개혁방안을 내놓은 사람이 없다. 대원군의 세금 시스템 개혁이라는 호포법은 양반이라고 해도 한집에 2냥씩 내는 군대 빠지는 세금을 내게하는 정도였고, 개화파나 독립협회 등의 개혁은 걷은 돈을 왕이 아니라 중앙정부가 쓰게 하자는 걷은 돈 쓰는 법이었지 더 걷게 하거나 돈을 중앙정부로 집중시키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즉, 조선은 기본적으로 국가 전체적으로 가난했고, 엄격한 중앙집권적 재정정책은 초기부터 근본적으로 막혀 있었다. 이걸 손대려고 했으면 진짜로 반란이 속출했을 수도 있다. 지방 수령들도 불만이 많았겠지만, 세율 인상도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체역사소설들에서 급전을 땡기기 위해서 반란을 조장하고, 그 반란세력의 자본을 흡수하는 것으로 재원을 충당하려고 하는데, 이것도 쉽지 않다. 당시 조선과 대한제국은 반란이 수시로 자잘하게 터지고 있었는데, 이 반란 진압도 허덕였다. 군사력 증강에 반대했던 독립협회 조차도 최소한 반란과 동학당 때려잡을 수준의 군사력은 필요하다는데 동의했을 정도였다. 이 재원 마련을 위해서 대대적으로 손을 봤으면 반란을 중앙정부가 감당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고, 상평통보와 당백전 문제에서 알 수 있지만 당시 조선과 대한제국은 화폐와 상업발전에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저 반란을 일으킨 양반층이라는 이들이 전 국가의 자본의 1/10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본으로 대규모 공사나 기술도입을 할 정도가 될지 의문이다. 꽤 많은 경우 그 재산이 토지일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문제가 된다. 더구나 이것은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에 반란을 진압하게 되면, 반란 진압 공신들에게 그 재산 상당수를 분배해줬던 것을 배제한다는 가정하에서 하는 이야기다.

4.4. 외교와 내정

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고종이 친권을 잡은 이후 나라에 큰 반란이 2번 일어나는데 하나가 임오군란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동학 농민 운동이다.

임오군란은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세력을 결탁한 명성 황후의 친척인 민씨 척족, 즉 민씨 외척이 장악한 선혜청이 구식 군인들의 급여를 횡령하여 군인들의 급여가 13개월이나 밀린 것과 신식 군인과 비교하여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 대우에 불만이 쌓여 폭발한 것이었다. 애초에 친정을 위해 민씨 척족을 키워주다보니 이들이 비리와 부정부패를 저질러 고종에게도 책임이 있거니와, 임오군란 이전에 구식 군인들이 창고지기를 폭행한 이후에도 그저 잘 타이르라고만 했을 뿐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않다가 이게 반란으로 번지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정확하게 임오군란으로부터 1년 전인 1881년 신사년에 고종이 무얼 했냐면, 민태호의 딸이자 황태자비인 순명효황후 민씨과 순종의 가례를 위한 혼수품으로 대량의 비단을 일본 회사로부터 구입하였다.링크 [31]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의 급여는 그전부터 체불되었는데 아들 혼수품 장만에는 거액의 돈을 들인 것이다. 구식 군인들의 상황을 알든 몰랐든, 이는 대단히 무능한 실책이었다.

어찌됐던 임오군란은 나중에 친정으로 몰아냈던 대원군을 복권시키고서야 겨우 진정했지만, 반란의 결과로 많은 일본인들이 죽어 일본 측에서도 책임을 요구하며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였고, 나라를 지켜야할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덕택에 외국 군인 청나라를 통해 진압을 하려한 결과 청의 영향력을 증대시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으로부터 이중으로 외압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이를 계기로 갑신정변이나 동학 농민 운동, 청일 전쟁이 일어나 국내는 쑥대밭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후에 일어나는 동학 농민 운동은, 그 발생 원인이 고종 친정 이후부터 매관매직 등이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민씨 척족도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고종도 이것을 통해 개인 비자금인 내탕금을 마련하기도 했는데, 문제는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산 관리들이 중간 횡령을 일삼아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게다가 고종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인 청군을 들여와서 진압하려 들었는데, 앞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군의 개입은 자연히 일본군의 개입도 불러오게 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 진압 과정에서 일본군의 학살을 조선 관군이 아예 직접적으로 지원해주었는데, 결론적으로 왕이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을 동원해 학살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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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고종은 이미 보은 집회가 열렸던 당시부터 "서울 병력을 빼는 건 힘드니까 외국 군대 동원해서 막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과거에 청나라가 영국군을 빌려서 난을 진압한 적이 있었다 하던데 우리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누구보다도 먼저 말을 꺼낸 것. 그때는 대신들의 반대와 어윤중의 회유가 먹혀서 없던 일이 되었지만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은 이미 예견되어 온 일이였던 것이다. 자세한건 동학 농민 혁명 참조.

후속 조치는 더욱 형편없는데, 동학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인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은 사태가 종식된 후 1년간 유배형을 가나 곧 고종이 직접 사면하여 법무 민사 국장에 이어 고등 재판소 판사까지 승승장구하였다. 고등 재판소 판사가 된 조병갑은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이자 2대 교주였던 최시형에 직접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기까지 한다. 아무리 동학군이 당시로서는 반군이라지만 탐관오리에게까지 이런 처우를 한 것은 유교적 왕도 정치 관점에서나 현대적인 관점에서나 옹호받을 여지가 거의 없다. 고종의 이런 용인술은 역시 같은 탐관오리인 조병식을 후에 황국 협회에 가담하게 하여 신나게 민권 운동을 탄압하는데 이용했다는 예에서, 그리고 역사적 평가가 갈리는 홍종우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고종은 전제 군주적인 권력을 위해서라면 민생을 도탄에 빠트린 탐관오리건 누구건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밖에 고종은 천연 자원 채굴권 등의 이권을 통해서 외교관들을 매수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성공적 매수가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였고, 실패한 것이 미국 공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다. 이는 사실 시기적으로도 연결고리가 있는데, 베베르는 러일 전쟁 전까지 주 활약 시기였던 러시아 공사였고 정치적으로 영향력도 상당했기 때문에 효과가 아주 컸다. 반면에 알렌은 러일 전쟁 패전 이후까지 남아 있었고, 실력에 비해서 욕심만 컸기 때문에 고종이 더 이상 이권을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바로 등을 돌리고 배신해버렸다.

만일 러일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거나,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고, 이를 미국이 승인하는 형태로 결론이 나왔다면, 고종의 매수 외교가 어느 정도 효과를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뤼순을 점령하는 등의 러시아의 강경화와 무엇보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 승리로 이런 외교적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게다가 러시아는 남하 정책을 피며 영향력 확대를 꾀했는데, 반대로 조선이 러시아의 괴뢰국이나 식민지 혹은 병합이 되는 상황도 초래할 수 있었고, 일본, 미국, 영국 그외 각국이 힘을 합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상황에서 홀로 러시아와 친교를 도모했다는 점에서 단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자칫 늑대를 몰아내려고 호랑이를 불러오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청과 러시아가 모두 사라지고 남은 외세가 일본 뿐인 상황에서 대한 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실시하여 개혁 정책을 실시하지만 계획부터 실천까지 전부 형편없는 실패작으로 끝이 나게 되었고 오히려 악평만 더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한 천연 자원 채굴권과 철도 부설권 등을 독일,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외세에 팔아 어떻게든 힘의 균형을 유지하여 중립국이 되려 했으나 당시 한국은 그들을 축출해낼 힘이 없었다. 나당 전쟁을 통해 외세를 능동적으로 사용하고 축출시킨 신라와 대비되는 점이다. [32]

거기다 본래 외교는 의리나 도덕심이 아닌 철저한 실리와 국력에 따라 성사 여부가 갈렸고 이미 열강들 입장에선 가난하고 근대화도 어설프게 된 대한 제국보단 근대화를 성공시키고 열강 반열에 들어간 일본을 돕는 게 자국의 이익에 여러모로 유리했다. 당연히 이들은 자력으로 나라를 보호하지 못해 열강에 도움을 호소하는 대한 제국을 비웃으며 거절했고 일본을 적극 지지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고종과 대한 제국 외교를 비웃으며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스스로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 위해서도 스스로 못하는 주제에 자기 나라 이익에 도움도 안되면서 도와주는 나라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스스로 힘으로 아무것도 못하는 나라를 도와주는 나라가 있다고 믿는 고종과 대한 제국의 순진함에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4.4.1. 배경

실질적으로 독립을 유지했던 비서구권 국가들의 공통적 특징은 뛰어난 상황 대처 능력과 외교적 상황, 천운이 따른 경우가 대다수이다. 전반적 실력이 열강과 대등해서가 아니다. 애초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회피를 넘어 서구 열강과 맞먹는 세력으로 성장한 유일한 예외가 일본이다[33]. 메이지 유신(1868년) 이전, 19세기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상황은 동시기 조선보다 훨씬 좋았다.[34] 더구나 일본을 압박해오던 미국이 남북전쟁에 빠지는등 천운이 따라주면서 일본은 살아남아 열강이 될 수 있었다. 즉, 현실적으로 실력이 없는데 외교가 무슨 소용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조선은 운이 없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점 때문에, 이 외교독립론은 상해임시정부까지 이어진다. 고종을 극도로 비판했던 이승만이 가장 대표적인 외교독립론자였고, 임시정부가 해외 이주민이 많고 일본군과 전투가 가능했던 만주나 간도가 아니라 중국에서도 외국공사관들이 밀집해있었던 조계지 상해에 위치했다는 것부터가 외교 독립론의 발상이다. 하지만 엄연한 영토와 권력을 가진 국왕/황제이었던 고종도 실패했는데, 민간인들의 편지 보내기가 효과 있을 리가 없어서 자기네 식민지 확장하기에 바빴던 외국들이 단 한 발자국도 안 움직였기 때문에 외교독립론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게 된다.

요약하면, 고종이 잘했다, 잘못했다를 떠나서 당시 기준으로는 다른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가 진실이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욕심이 있고, 지식의 한계가 있었을지언정, 바보라서 저런 결정을 한 것이 아니다.

광무개혁 문서에도 있지만, 조선은 굉장히 가난했고, 너무 늦었다, 바로 옆 나라 일본에서 조선보다 풍부한 자원[35]을 바탕으로 백성들 쥐어짜서[36] 에도시대에 근대적 자본주의의 기틀[37]을 만들고 있을 때, 조선은 건국시기부터 빈부격차 늘리느니 그냥 상공업 일으키지 말고 그냥 모두가 가난하게 살자[38]고 했던 나라였다.

많은 대체역사소설들이 고종 시대를 다루지만, 일본 가공전기들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해결책[39]을 내세우게 되는 것이 이 부분 때문이다. 조건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고, 알면 진짜로 1904 대한민국이나 천군처럼 사람 몇명으로는 해결이 안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40]

4.5. 일본에 대한 태도

일본에 저항한 적이 있다는 점을 들어 고종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확실히 당대 개화파들이 일본을 지나치게 순진하게 바라본 데 비하면 고종은 일본의 조선 지배 의도를 알고 그에 대해 몇 번 카운터를 날린 경험이 있기는 하다. 별 효력은 없었다고 해도 헤이그 특사 파견은 고종을 그저 무력한 황제로 보던 이토 히로부미를 당황시키기도 했으며, 일본이 고종의 강제 퇴위를 결심하게 만든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고종은 망명을 해 국외에서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더. 첫 망명시도는 1990년대 탈냉전 이후 러시아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1904년 러일전쟁의 위험이 커지자 고종은 러시아 측에 망명 가능성을 은밀히 타진했다. 이때는 국내의 러시아 공사관뿐만 아니라 국외 망명까지 고려한 것이었다.(박종효 편역,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 소장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101쪽) 하지만 이미 전쟁은 막을 수 없는 대세여서 러일전쟁으로 이어졌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사실상 떨어졌다. 두번째 망명시도는 1907년 강제퇴위당한 바로 그 다음해였다. 당시 일본의 감시를 피해 국외 망명을 시도했고(박종효 편역, 『한국관련 문서요약집』 73쪽) 3번째 망명 시도는 1908년 11월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러시아 측 대일협상파에 의해 저지당했다.(『한국관련 문서요약집』 74쪽) 4번째 망명시도는 고종은 1910년 6월경 다시 연해주 망명정부 수립을 기도 했었다.(외교통상부, 『이범진의 생애와 항일독립운동』, 2003년, 223~224쪽) 즉 고종은 병탄전에만 4번의 망명시도를 했다가 모두 좌절됐고 한일합방 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1915년 7월 26일 성낙형 등은 내관 염덕인(廉德仁·또는 염덕신)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중·독·영·러가연합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 대세라는 등의 보고서를 올리게 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만족한 고종은 성낙형에게 ‘한중의방조약안’을 가지고 직접 알현하라면서 승낙의 징표로 과거 정조가 사용했던 ‘온여기옥(溫如其玉)’이란 인영(印影·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러나 고종 면담 직전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金思濬)·김사홍(金思洪)·김승현(金勝鉉) 등 다수의 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이 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이때 고종의 아들이였던 의친왕도 협력 했었다.

고종의 해외 망명이 다시 추진된 해는 1918년이었다. 그리고 이 망명은 고종의 마지막 망명시도가 되었다. 이번에는 우당 이회영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회영의 장남 규학의 아내 조계진(趙季珍)이 고종의 생질로서 고종과 사돈인 데다 이상설과 헤이그 밀사사건을 기획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 고종 망명 계획에 나서게 했다. 내적인 조건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때는 마침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왕실 이방자 여사의 혼담 결정으로 황제의 고민이 지극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종이 (이회영) 선생의 생각을 상주하자 뜻밖에 쾌히 승낙하셨다”고 전하는 대로 국혼(國婚) 문제였다. 순종이 후사가 없는 판국에 왕세자 영친왕이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면 조선 왕실의 맥은 끊기는 것이었다.

이회영과 민영달은 육로 대신 수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상해와 북경을 저울질하다가 우선 북경에 행궁(行宮)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민영달이 행궁 구입 자금으로 5만원(圓)을 내놓자 이회영은 1918년 말께 이득년(李得年)·홍증식(洪增植)에게 건네 북경의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이제 고종이 경운궁을 나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신하들과 합류하면 됐지만 이때 고종은 갑자기 급서하면서 실패한다. 그리고 고종의 죽음이 독살이었음은 친일 성향의 윤치호 일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윤치호는 또 다른 친일파 한진창이 전하는 말이라면서 고종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완벽한 건강을 누리던 황제가 식혜를 섭취한 뒤 반시간 만에 격렬하게 몸을 뒤틀면서 죽었다. 황제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였다. 혀가 닳아 없어지고 치아는 모두 빠져나왔다. 1피트(30.38㎝)쯤 되는 검은 줄무늬가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윤치호 일기』 1920.10.13.)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이태왕(李太王·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날 병이 깊어 동경(東京)에 있는 황태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그날 밤 고종의 병세가 깊다면서 숙직시킨 인물들이 자작(子爵) 이완용과 이기용(李琦鎔)이란 점이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고종이) 밤중에 식혜를 드신 후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시다가 반 시간 만에 붕어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이 암살되었다면 그 범인은 이완용일 가능성이 높다.

일제는 오전 6시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고 발표했지만, 고종의 사망 사실을 하루 동안 숨겼다가 ‘신문 호외’라는 비공식적 방법으로 발표했다. 이후 ‘고종 독시’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3·1운동은 4개월이나 지속 되었고 이 거국적 만세 운동의 열기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다. 고종황제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고종황제의 최후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일으킨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상해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국호 ‘대한’을 계승했고, 그 헌법에 ‘구황실우대’ 조항을 설치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일제의 대한 저항은 '독립운동가'가 아닌 '황제'로서의 저항으로는 어울리지 않았고 유효하지도 않았다. 그는 황제라는 직책을 이용해 직접 일본에 맞서려는 짓은 하지 않았고 언제나 꼼수, 통수만으로 일본에 맞서려 했으며, 그러한 저항은 지위 없는 독립운동가라면 몰라도 황제로서 당당히 저항하는 것보다 유효하지 않았다. 청나라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여 일본을 막으려 했던 술책은 일본의 대외 협력을 불러와(영일동맹 등) 모조리 실패로 끝났고 오히려 국제사회에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각인시키는 역효과만 발휘했다.

5. 개인사

파일:고종황제.jpg
고종 생애 첫 사진. 1886년 창덕궁 농수정에서 미국인 퍼시브 로웰이 촬영.
보통의 조선 사람들이 기피하였던 사진 찍기를 거리낌 없이 즐겼다. 초기의 사진기의 특성인 무지막지한 대기 시간도 조금의 불평 없이 잘 넘어갔다고 한다.[41]

또 낮에는 일을 하지 않고, 저녁 때부터 일을 해서 밤을 새, 아침이 되서야 잠이 드는 올빼미족이었다고 한다.

머리는 명석했던지, 당시 선교사나 외교 사절들은 그의 교양이나 지식에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다.(키는 작지만 너그러운 얼굴에 상냥하고 이야기가 잘 통했다 한다. 반면에 뒤에 자주 서 있던 순종은 키는 크지만 어리버리하게 생겼다고 좀 까고 있다.) 직접 상대국인 일본의 평에서는 면전에서는 유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반항을 계속한 인물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 이토 히로부미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고종을 찾아가 "한 건 하셨더군요, 폐하. 그런데 앞으로 대일본 제국에게 맞서려면 좀 더 공공연하게 하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조롱하였다. 실제로 고종의 대일본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은 개인적일 뿐, 이미 망해가는 나라를 붙잡기에는 그의 역량도, 뒤를 받쳐줄 만한 힘도 너무 부족했다.[42] 그리고 그 결과는 조선의 멸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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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여자가 고종이 총애한 귀비 엄씨. 귀비 엄씨와 그녀의 친정은 교육 사업에도 관심이 많아 양정학교,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를 창립했다.[43] 왼쪽의 제복을 입고 있는 소년은 귀비 엄씨 소생 왕자인 영친왕.

야사인 매천야록에는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5일 만에 엄귀비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물론 야사이니 신빙성은 떨어진다.[44][45]

그 외에도 명성황후 민씨의 사치가 심한 것을 알았을 텐데도 정작 이를 통제하려 한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커피니 양식이니 자동차니 하는 것에 취미를 붙여 돈을 썼다고도 한다.

게다가 선교사들이나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점이 있으니,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는 인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을사 조약을 체결할 때라든가 일본군경복궁에 난입할 때라든가 강하게 나서야 할 시점에 초반부에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면서 저항하다가도 사태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하면 두손 두발 다 들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종이 유일하게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한 건 퇴위당할 때뿐이었다.[46]

자동차에도 취미가 있었는데, 고종은 캐딜락을 타고 다녔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일제강점기손병희가 캐딜락을 구입했는데,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군주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 수는 없다면서 고종과 캐딜락을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은 나중에 순종황제가 탔으며 순종 황제가 타던 캐딜락은 순정효황후가 탔다. 이들 어차는 각각 등록 문화재 318호, 319호로 등록돼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95년 문화재 관리국은 80여 년간 방치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던 어차를 꺼내 ‘복원’하려 했다. 당시 영국 재규어 다임러에서 고종 어차를 복원하기 위해 전문가가 파견됐다. 고종 어차를 본 전문가는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일부 녹만 슬었을 뿐 차의 상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기 때문이다. 부품 손상도 없었다. 당시 자문 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전영선 소장은 “복원이라고 하기보다 보수라는 개념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 말했다.

재규어 다임러에서 파견된 전문가는 “같은 종류의 차가 영국의 한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면서 “전 세계에 딱 1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 또 있다니 놀랐다”며 값은 얼마든지 줄 테니 본인들이 보수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에서뜬금 보수해 창덕궁을 거쳐 현재의 국립 고궁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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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글씨나 문장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4세 때 의정부 청사가 중건되면 편액을 자신이 직접 쓰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고 고종 7년에 오례편고가 완성되자 자신이 직접 서문을 쓰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고종의 어필은 많이 남아 있다. 아버지가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와 그림을 배운 예술가이기도 했었으니 그런 아버지에게 글씨를 배운 자신감도 있었던 모양.

커피와 함께 냉면, 군밤 등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군밤은 후술할 떡밥과도 관련 될 정도로 매우 즐겼다고 한다.

한국에서 에스페란토를 공부한 최초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궁중 의사의 권유로 간단한 에스페란토를 배웠다고 한다.

경복궁 깊숙한 곳에 있었던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集玉齋)가 2016년 민간에게 개방되었는데 도서관과 찻집 형태로 개조되어 변했다. 보유 서적은 4만권.

최근 창덕궁에서 와플 틀이 발굴되어 와플 매니아임을 인증했다(....)이와 동시에 카스테라 틀도 발견되어, 와플과 카스테라를 곁들여 우아한 커피 타임을 즐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거 참 고상하시네. 사실 구한말 상궁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종은 매운 음식과 짠 음식을 잘 못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술도 거의 하지 못해서 술 대신에 식혜나 사이다, 커피를 주로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여름에는 주로 칼국수, 잔치국수, 삼계탕, 추어탕 등을, 겨울에는 냉면아이스크림을 주로 먹었다고 한다. 외국 문물이 마구들어오던 시대에 왕으로서 모든 것을 첫번째로 접했기 때문에 다양한 식성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5.1. 고종과 군밤 떡밥

특이하게도 고종은 군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버전에서는 군밤이 호떡으로 변한 버전도 있다.
  •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왕위에 오르자마자 군밤 장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죄목은 '공짜로 군밤을 주지 않은 것' 물론 이 군밤 장수는 신하들의 반대로 사형은 면했다. 매천야록에 실린 야담(野談)[출처필요]이므로 승정원일기의 기록과는 많이 다르다. 바로 아내와 문단 참조.#[48] 사실 고종의 서장자인 완친왕(완화군)이 군밤을 좋아했다는 일화가 있기 때문에 아들의 이야기가 잘못 와전되어서 나온 카더라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부전자전이든지. 현재로서는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호해서 사건의 진실 여부를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고종에게 군밤 관련 이미지는 계속 따라다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빵 사건??
  • 고종의 군밤 이야기는 1900년 즈음에 궁에 출입하던 무당인 정환덕이라는 사람이 쓴 남가몽에서 언급하여 알려졌다. 궁에 출입하던 사람이 남긴 이야기고 다른 곳에서 찾기 어려운 내용이라 궁내에 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매천야록에 실려 있다는 이야기는 확인을 바란다. 각종 위키에만 나오는 주장.
  • 위에서 나온 군밤 이야기에서 일부 진실 부분이 있다면 실제로 고종이 즉위 초기부터 최소 즉위 중반기까지는 을 좋아했던 건 사실로 여겨진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다른 왕 시절 기록보다 유독 고종 시절의 기록에 밤에 대한 진상기록이 많았기 때문이다.[49] 다만 나중엔 커피로 갈아탔다. 이 진상 기록에서 밤의 진상이 늦는 경우 유독 관찰사[50]들이 대죄를 자주 청했는데 매번 봐준 걸 보면 꽤 인자한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자는 무슨 간식 안보낸다고 벌할 정도의 식탐이면 군주 이전에 인간 실격이지. 머리가 완전히 빈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생각해 보면 저런 군밤 장수 사형 요구 루머가 공공연히 돌아다닐 정도인데, 고작 밤 따위로 죄를 족족 물었다면 민심이 엄청나게 흉흉해졌을 것이고 고종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군밤 장수를 처형했으면 흥선대원군도 실각했을 것(초기 10년은 흥선대원군의 1차 섭정기였다)
  • 경술국치 이후에는 순종창덕궁 후원에서 주운 밤[51]을 손수 구워다가 고종에게 자주 바쳤으며, 고종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순종이 구워 온 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고종이 군밤을 좋아했던 건 어느 정도 사실인 듯 싶다.


6. 가족 관계

대한제국/황실 문서 참조.

7. 사진과 어진, 기타 그림

근대의 황제답게 사진어진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다른 조선의 군주와는 다르게 신문 삽화나 포스터 같은 그림이 많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7.1. 사진

파일:attachment/고종(조선)/marianz.jpg 파일:external/www.silvernet.ne.kr/(%EC%9C%84%ED%82%A4%EB%AF%B8%EB%94%94%EC%96%B4)(1)1.jpg
촬영 시기 미상, 황제 일가 사진 1918년 영친왕 귀국을 기념해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사진
왼쪽의 황제 일가 사진은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황제, 덕혜옹주, 영친왕,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의 정실 덕인당 김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단, 이 사진은 후대에 조작 및 합성되었다는 의견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촬영 시기가 불확실한데다가 인물의 비율과 광원의 위치가 어색해 사실상 조작 및 합성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기사 참고[52]) 오른쪽의 황제 일가 사진은 1918년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해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것으로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덕혜옹주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황실 가족이 단독 사진이 아니라 여러 황족과 함께 사진을 찍을 때는 오른쪽 사진과 같이 서열이 제일 높은 사람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유사한 서열을 갖는 사람을 배치하며 각각의 인물들 또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른쪽 사진과 같은 서열 배치 및 거리 차이를 감안한다면 왼쪽 사진은 원래 의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비 김씨만 찍힌 사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파일:gojongemperor.png
미국인 퍼시벌 로웰이 찍은 1884년의 고종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dd02b685.png 파일:external/cs621420.vk.me/tM62QsRpwCU.jpg 파일:attachment/고종(조선)/Gojong.png
군복 차림의 고종 군복 차림의 고종 정장 차림의 고종
 
파일:external/image.idaesoon.or.kr/Daesoon_174_%EC%A0%84%EA%B2%BD%EC%86%8D%EC%97%AD%EC%82%AC%EC%9D%B8%EB%AC%BC3.jpg 파일:attachment/고종(조선)/984269928.jpg
곤룡포를 입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왼쪽 흑백 사진을 컬러화한 것이 오른쪽 사진이다[53].

파일:attachment/고종(조선)/2_demonic88.jpg
1919년 승하한 해의 고종. 장소는 덕수궁. 이 때 당시는 이태왕.
 
파일:hBKZdp9.jpg
한국인이 찍은 가장 오래된 고종황제 초상 사진이 발견되었다.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 소장된 사진으로 근대 서화가이자 사진작가인 해강 김규진이 촬영했으며, 촬영한 해는 1905년이고 촬영장소는 덕수궁 중명전이다. 고종이 외교사절로 방문한 미국인 사업가 에드워드 해리먼에게 선물로 준 것으로 보인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보도자료

7.2. 어진

파일:attachment/gojongurjin22.jpg 파일:attachment/gojongurjin33.jpg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 (1) #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 (2)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rtrait_of_Gojong_01.jpg 파일:external/file2.instiz.net/c0b85c9c05a140efd75df1def489950d.png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 (3) # 작자 미상의 원유관 강사포본 고종 어진[54]
파일:고종.jpg
동강 권오창의 고종 전신 어진 #

7.3. 기타 그림

한국의 군주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어진을 제외하고도 신문삽화포스터같은 그림이 남아 있는 황제다. 그전에는 감히 함부로 그릴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신문의 만평이라는 것이 풍자적이고 시대가 시대인 만큼 안타까운 그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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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가 발행한 Korean Newspaper에 실린 삽화로 을사조약을 그린 그림이다. '일본이 한황을 위협ᄒᆞ야 됴약을 륵뎡(억지로 정함)'이라고 쓰여 있다. 가운데 황뎨라고 쓰인 옥좌에 앉아 식은 땀을 흘리며 분노하고 있는 고종 황제와 왼편의 을사오적 뒤편에서 일본도를 들고 협박하는 왜병(일본군)과 오른편에서 비웃고 있는 왜적(일본인)들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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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그린 고종 강제 퇴위 풍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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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르 프티 파리지앵'에 실린 삽화로 조정의 모습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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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1월 23일에 실린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에
실린 가십성 기사 에밀리 브라운관련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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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일본 도쿄에서 인쇄된 '세계 20대국 군주 어존영'이란 포스터메이지 천황 뒤편에 배치시켜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있다. 그 와중에 같이 중간에 낀 빌헬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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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5월의 그림으로 위의 그림과 거의 유사한 프로파간다 포스터
가운데 서있는 16번이 메이지 천황이고 13번이 고종 황제다. 메이지천황 옆에는 한자로 '日本國皇帝'(일본국황제)라고 적혀있는 반면 고종 옆에는 '高麗國王'(고려국왕)이라고 적혀있다. 당시 정식 칭호인 황제라고 불러주기는커녕 국호조차 제대로 쓰지 않았으니 일부러 깎아내린 것.
파일:일본과 러시아에 압사당하는 한국.jpg
러일전쟁 당시의 상황을 풍자한 프랑스 정치만평 그림엽서로
메이지 덴노니콜라이 2세 사이에 끼인 고종황제의 난처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55][56]

8. 현대 매체에서

조선이 근대화되는 시점의 군주였고 재위기간도 길었기 때문에 사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군주 중 한 명. 그런데 정작 고종 시대를 다룬 사극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나 부인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사극들이 많아서 고종 본인은 주역에서 한 발짝 벗어난 모습으로 등장하곤 한다. 자신의 치세가 사극에서 자주 다뤄지나 정작 본인이 사극의 주역이 된 적은 없다는 점에서는 사극 속 취급은 어쩐지 조선 중종과 비슷하다.

고종은 즉위 전에 익성군(翼成君)에 봉해지긴 했으나 아주 잠깐 동안 봉해졌다가 바로 즉위하였고, 따라서 특별한 벼슬이나 군호를 받지 못 했기 때문에 즉위 전 어린 시절의 고종이 등장하는 매체에서는 대부분 아명인 이명복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사극에서는 주로 아버지와 부인 등쌀에 기를 못 펴는 우유부단한 군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마냥 무능하다기보다는 동정적인 시선으로 묘사되곤 한다. 실제 고종에 대한 평가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사극 속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 했는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다(운이 없었다)'는 식의 평가에 맞춰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 명성황후가 대표적인 예.

대체역사소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군주인데 이런 소설들에서도 아들 순종처럼 30%는 훌륭한 황제로 나머지 70%는 개 찌질이 왕고집 무능한 황제로 묘사되고 있다.

영화 한반도에서는 김상중이 분했다. 일본의 직접적인 침략을 대비해서 가짜 국새를 만들어놓고, 진짜 국새는 내관에게 맡겨서 봉인시켰다. 특히, 신하들이 일본 해군 간부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일본을 건드리면 큰일나니 청나라 야만족을 몰아내려면 일본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고종을 설득하는 장면에 명대사가 등장한다.[57]하지만 영화가 똥망이다
내 나라에 들어온 외세를 물리치는 것도 일본이 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것도 일본이 한다면 이 땅이 누구 것이며 누가 주인이란 말인가.
일본의 힘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수 없다는 그대들은!! 대체 어느 나라의 신하이며 지금 누구를 섬기고 있다는 말이냐!!

드라마 닥터 진에서는 아버지인 이하응과 함께 아명인 이명복으로 등장한다. 물론 본격적인 군왕의 모습은 아니고, 어린 시절의 모습만이 그려진다. 어린 시절의 모습이라 그런지 비교적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영특하게 덕치론을 설파하는 장면과 좌의정 김병희의 천주교 박해 주장을 "내 어머니도 천주교도라 박해를 하면 불효다"라고 일갈하며 반박하는 장면이 눈에 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왕도의 개에서는 위안스카이의 위협에 벌벌 떨면서 아무 것도 못 하는 무능하고 한심한 인물로 나온다.[58]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나름대로 머리도 좋았고 재위기간이 길어지면서 노회한 면모도 보였으며, 개화에 대한 생각은 있었던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깔 부분은 제대로 깐다. 가령 전제적인 전제권(황제권) 강화에만 집착하는 면모도 묘사하고 있고 민씨 일족의 전횡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을 비판했으며, 무엇보다 우유부단하고 황제에서 퇴위되기 직전 말고는 전혀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군주로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권 말미에는 망국 이후의 고종의 후일담을 짤막하게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고종에 대한 총평을 볼 수 있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백윤식이 연기했고, 늦둥이 고명딸인 덕혜옹주를 아끼는 딸바보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친일파 이완용, 한택수에게 일갈하는 모습이 나온다. 상하이로 망명하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일제의 음모에 걸려 독이 든 수정과를 먹고 죽는다.[59]

2018년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이승준이 분하였다. 나름 한국의 주권을 위해 애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자포자기하는 모습도 보이고 때로는 신변의 위협으로 인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기도 한 모습으로 나왔다.

2019년 SBS 드라마 황후의 품격에서는 간접적으로 한 번 언급된다. 태후 강씨오써니폭사시키려 바자회 경매로 나온 탁상시계에 폭탄을 설치하는데, 그 시계가 고종이[60] 대한제국 건국 기념연에서 러시아 제국 외무부 차관에게 받은 것으로 나온다. 이 암살시도는 눈치를 챈 천우빈이 시계를 던져서 실패한다.

2019년 개봉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에도 등장하는데 원로배우 송재호가 분하였다. 여기서는 일제강점기 이태왕 시절의 모습으로 나온다.

8.1. 각 매체에서

  • 만화
    • 왕도의 개
    • 하늘의 혈맥
  • 게임
    • HOI4 : 게임 시점이 고종 사후인 2차 대전 배경이니 당연히 고종이 나오는 건 아니고, 단순 이스터 에그쯤으로 보면 된다. 중국계 국가로 플레이 시 새로운 장군을 고용하면 나오는 랜덤한 포트레잇 중 하나로 위의 군복 차림의 고종과 똑같이 생긴 포트레잇이 나온다. 고종이 어째서 중국 장군으로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군복 입은 동양인 사진을 구글링 해서 나온 고종의 사진이 그럴싸해서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트레이싱해서 중국 랜덤 장군으로 넣었다는 설명이 그럴싸하다. 물론 대한제국이나 조선을 플레이 가능하게 만든 모드에서는, 다른 당대 인물들과 함께 정식으로 구현되어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유저패치인 모드 기준.
  • 소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 동명이인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막나가는 행보를 자랑한다. 후대 사람이 죽어서 빙의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

9. 관련 문서



[1] 고종 승하 후 이왕직에서 올린 묘호 망단자 고종(高宗), 신종(神宗), 경종(敬宗) 중에서 순종이 수망(首望)인 고종을 사왕(嗣王)의 자격으로 승인했다.[2] 이 외에도 흥경절, 계천기원절 등 절일이 있다.[3] 1894년 12월 17일부터는 대조선국 대군주로 격상됨[4] 조선 왕조가 개창된 1392년을 원년으로 하는 개국 연호는 엄밀히 말해 고종의 연호라기보다는 기년법의 일종이다. 흔히 1894년(개국 503년) 갑오 개혁 때부터 처음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갑오 개혁 때의 조치는 '국내외 모든 공문서·사문서에 개국 기년을 사용토록' 한 것이며, 실제로는 1876년(개국 485년) 강화도 조약 이후로 청나라를 제외한 외국과의 조약에는 개국 기년을 사용해 왔다. 1896년 건양 연호 사용 이후에도 칙령 등에서 개국 기년이 혼용된 예가 있다.[5] 1896년(건양 원년) 1월 1일부터 1897년(건양 2년) 8월 16일까지 사용.[6] 1897년(광무 원년) 8월 17일부터 1907년(광무 11년) 8월 11일까지 사용.[7] 이 때문에 고종을 '(연호)+제(帝)'의 호칭으로 부를 경우 '광무제'가 되나 공식 호칭도 아니며 학계에서 쓰이지 않는다.[8] 아명. 어릴 때 이름. 자식의 아명을 천하게 지어 불러 액운을 막고 장수하길 바라는 전통으로 비롯한다.[9] 왕이 되면서 임시로 개명한 초휘(初諱, 첫번째 휘)이다. '일단' 고종의 본가인 인평대군 8대손 '재(載)' 자 항렬에 맞춰 지었으며 오래 사용하진 않았다.[10] '희', '형' 두 개의 독음이 알려져 있으나 '형'이 맞다.[11] 문조에게 입양 됨에따라 자연스레 헌종과 형제가 되고 헌종의 이름 '환(烉)'의 '火' 를 따라 '형(㷩)'으로 지었다. 그리고 나중에 고종의 친 형 이재면 역시 여기에 맞춰 '희(喜 + 火)'로 개명했다.[12] 경술국치 이후 이태왕 시절의 이름.[13] 일제강점기까지는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을 후대했기 때문에 황족들이 고위 귀족 대우를 받으며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러나 그런 세태를 직무유기이라고 생각하던 양녕대군 직계후손인 이승만이 집권한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부터 황실의 후손들은 박대받아 피폐해졌다.[14]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 청일전쟁으로 발전해 위태위태한 동북아의 균형이 무너졌다.[15] 보급을 원활하게 하려면 무기의 규격과 탄약의 종류가 통일되어야 하는데 독일제 쪼금, 프랑스제 쪼금, 러시아제 쪼금, 일본제 쪼금 이런 식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대한 제국군이 해산될 때까지 병사들이 서로 사용하는 총이 달라 탄약 보급과 무기 수선에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광무개혁 항목에도 나오지만 양무호는 일본이 영국으로부터 산 중고 석탄 화물선인데 이것을 더욱 비싼 값에 일본으로부터 사들여와 사실상 사기까지 당한 일도 있었다.[16] 나름 조사 시찰단을 보내서 근대 관제를 조사시켰고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에는 각종 근대 지식의 관련된 책자가 보관되어있었다. 화학 개론서인 화학감원, 전기에 관한 내용인 전학도설, 석탄, 철강에 관련된 개매요법, <역람기략> 경제학 서적인 부국책까지 있었다. 출처 <규강각 세계 지식을 품다. 조선에 들어온 서양 근대 지식>[17] 나라가 망해가는 시기에 덕수궁에 지어놓은 당시 최신식 건축물과 그의 사치품들을 보면 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18] 헌법, 삼권 분립, 왕실 재정 분리 등[19] 기존에 왕에게 주어졌던 특권의 매우 많은 부분을 내려놔야만 하며 그걸 받아서 견인할 중간 계급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20] 이게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차이다. 일본은 에도 막부 때부터 네덜란드와 제한적으로 교류하면서 국제 정세에 아주 어두운 지경은 면했고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기반도 쌓아가고 있었지만, 조선은 대외 교류에 소극적이었다.[21] 흥선대원군은 엄밀하게 말하면 조정에서 나가서 직접 정치를 하는 위치도 아니었고, 법적으로 권한이 주어진 것도 아닌 이상한 위치였다. 고종의 법적 부친은 효명세자였고, 모친은 조대비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서 직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고종이 성인으로 인정받는 15세가 되고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끝낸 시점부터는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어야 했다. 20세까지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한다는 것은 왕의 생부라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법적 제도적 근거가 없는 행동이었다. 때문에 책임소재도 약했고, 중앙에 아들인 왕을 두고 비판도 피해갈 수 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겉으로 드러난 비선실세에 의한 정치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흥선대원군은 사실상 상왕,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인세이의 위치를 노렸다고 봐야 할 지경이다.[22] 당백전 때와 마찬가지로 유통을 늘린다는 이유로, 지방관아가 세금은 상평통보로 거두고 중앙 정부에는 청전만 공납으로 올려보냈다. 고종은 청전을 폐지한 뒤에 이 사실을 알았다. 이런 이유로 청전 폐지를 조선시대 최악의 정책실패로 본 논문도 있다(James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202.). 다만 이 덕분(?)에 조선 정부에 있던 청전의 폐해는 조선정부가 다 떠안았는데, 이를 천천히 했다면 이 폐해를 민간에 떠넘기는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고종 친정 2년은 정부 유지도 어려운 파산상태를 보냈다.[23] 순수익이 아니다. 중앙정부의 1년 총 세입보다 운산금광 개발 비용이 더 들었다.[24] 대표적으로 이홍장과 위안 스카이가 이렇게 생각했다.[25] 흔히 아는 민족반역자들이 갑자기 1905년에 툭 튀어나온 사람들이 아니다. 고종이 마지막으로 힘을 갖고 있던 광무개혁 시기에 '대한제국의 고위 관리'였던 사람들이다.[26] 매천야록에 따르면 관찰사의 경우 10만 ~ 20만 냥, 일등 수령이면 최소 5만 냥 선으로 벼슬의 구체적인 값까지 제시되어 있었다.[27] 조선도 공식적인 매관매직 제도가 있었다. 공명첩 참조 다만 나라가 그나마 정상일때는 형식적인 명예직만 주는 정도였지만 고종은 실직을 매관매직 했다는게 문제였다.[28] 실제로 일제가 러일 전쟁 이후 취한 조치 중 하나가 고종의 돈줄을 끊기 위해 수세권을 황제로부터 대한 제국 정부로 환원하는 것이었다.[29] 의병들에게는 전근대적일지언정 '국왕'이라는 매력적인 명분이 주어지고, 무엇보다 실제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비자금만 한 자금줄이 없었기 때문이다.[30] 운산 금광의 총 수입은 5600만 달러로 정확하게 캐낸 금의 교환가가 그렇다는 것이고,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벌어들인 순이익은 1500만 달러, 연 평균 50만 달러 정도였다. 물론 시기별로 채굴량이나 수익률은 편차가 있었다. 이 운산 금광은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에 일본에 매각되었다.[31] 「고궁문화」, 국립 고궁 박물관, p. 27. "황태자비 민씨는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충문공(忠文公) 민태호(閔台鎬)의 딸이며 임오년(1882년) 왕세자 순종과 가례를 올렸다. 모후인 민비가 생존 시에 거행된 대혼(大婚)으로서 고종은 신사년(1881년)에 가례에 필요한 혼수 직물을 동경 직물 회사에 주문하였던 기록이 확인된다74). 상기한 바와 같이 당시의 가례는 임오년 『嘉禮都監儀軌』와 상당한 수량의 의대 기록이 있는 <궁중발기>로 남아있다."[32] 출처 ebs 다큐프라임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제5부 - 고종, 열강의 덫에 빠지다[33] 물론 일본도 1854년의 미일화친조약, 1858년의 미일수호통상조약으로 이권 침탈을 겪었지만, 열강에 의해 위협 받던 비서구권 국가로서 열강의 지위에 든 나라는 일본이 전무휴무하다.[34] 여러 요인이 있지만, 에도막부의 세입은 조선보다 훨씬 막대했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당시 일본은 농민 잇키(농민 반란)가 빈번하였고 민생은 가난했지만, 국가 재정 상황은 오랜 세도 정치와 삼정의 문란, 당백전의 유통등으로 민생부터 나라의 재정까지 나빴던 조선보다 크게 나았다. 뿐만아니라, 에도막부의 각 번들은 산킨코타이(참근교대)제도를 강요받고도 세력이 상당했고(대표적으로 사쓰마 번 하나로도 류큐(오키나와)왕국을 정복), 이런 각 지방의 경제력,군사력은 개항 이후 토막파(에도 막부 반대파)가 세력을 급격히 키워 사회 개혁을 실현하는 밑거름이 된다.[35] 전근대 일본은 화폐를 만드는데 필요한 금은과 구리를 자체충당 하다 못해서 수출할 정도로 엄청나게 뽑아내던 나라였다. 은먹는 하마 중국에서 유통되던 은 중에서도 일본산 은의 비율은 상당했고, 구리 생산량은 전세계적 수준 아니었나 싶을 정도. 다만 조선의 광물 자원의 양도 형평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난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조선의 광물 자원의 양도 형평없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35년 운산광산 단 한 곳에서 채굴된 광석의 판매금액은 432만원(2017년 금값으로 비교 환산하면 약 500~600억원)이었고 지금도 북한 지역은 광물의 보고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개발권조차도 제대로 협상에 이용해먹지 못하고 강대국들의 입 속에 그대로 먹여줬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시간이다. 일본은 저 광물개발과 자본화가 에도시대초기부터 이뤄졌던 국가이다. 조선은 저 운산금광 채굴이 수익이 나온 것도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국가이다. 당장 러일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를 상황인데, 운산금광은 국가예산의 몇배나 되는 돈을 수년에 걸쳐서 밀어넣어야 수익이 나오는 것이다. 운산금광 협상이 어려웠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면 운산금광 하나만 해도 이게 당장 고종 시기에 도움이 되려면, 기술력 등을 고려할 때 철종 대 정도에는 개발을 시작했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정부로서는 당장 기술이 없으니 광산에 금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고, 밑천이 없으니 개발할 돈도 없고, 개발해서 수익나오기를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북한의 광물 자원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것도 이 때문인데, '잠재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이 광물의 보고라면 왜 북한은 저꼴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대답이 이것이다.[36] 일본은 당시 동아시아권 기준으로도 세금을 가혹하게 거뒀고, 이를 통해서 자본의 집중을 이뤄낼 수 있었다. 이걸 다시 산킨코타이 제도를 통해서 에도로 집중시키면서 초기 자본주의를 성립시킨다.[37] 앞의 풍부한 자원+자본 집중에 더해지는게, 전국시대와 막번체제를 통해서 형성된 실질적인 내부무역, 그리고 해운업을 통해서 발달한 해외무역, 마지막으로 저 천연자원 노리고 찾아오는 서양무역이다. 실제로 조선후기에 표류한 서양인들의 태반은 일본으로 무역하러 가다가 태풍 만난 사람들이었다.[38] 조선시대 조세제도, 관리의 임금, 농업위주의 정책, 이앙법 억제를 포함한 농업을 바라보는 태도 등을 모두 종합해보면 이 결론 밖에 안나온다. 물론 말만 이러고 실제로는 자기 욕심 차리는 현실적 변형이 이뤄지지만, 겉으로 내밀었던 '성리학적 애민정신과 선비정신'의 명분은 거의 막바지까지 유지되었다.[39] 말빨로 처리하거나, 재원은 양반들 모반 일으키게 해서 자산을 모두 압수해서 해결했다는 식. 전자의 비현실성은 차처하고 후자도 대규모 내전이 국력을 갉아먹는 것도 문제지만 그 수확물로는 언발의 오줌누기도 안 된다는게 진짜 문제다.[40] 조선의 망국을 막으려면 정조 때나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사실 이 때문인데, 역사나 사회에는 경향성과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특별한 인물, 특별한 사건이 없다면 기존의 방향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2020년에 핵무기를 포함한 3차세계대전이 터져서 핵쉘터가 없는 나라는 다 망한다고 가정하면, 왜 당시 사람들은 2018년이면 핵 쉘터 만들 자본과 기술을 어떻게든 긁어모을 수 있었을텐데 왜 안했는지 생각하면 무능하다 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것 역사의 '틀린 결론'을 알고, 왜 틀린 결론이 나왔는지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훑기 때문인데, 결론의 수정에는 그에 합당한 계기가 필요하기 마련이다.[41] 많은 조선 사람들은 인물 사진의 주인공은 1년 내에 죽고 풍경 사진의 나무는 얼마 안 가 시들고 찍힌 성벽은 얼마 안 가 허물어진다는 미신을 믿었기 때문에 사진기만 들이댔다 하면 두려워하며 도망가곤 했다. 물론 1800년대 후반 이야기이긴 한데 조선 말고도 당시 대다수 아시아나 아프리카 멀리 중남미, 심지어 유럽 일부에서도 흔했던 일이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흡수한다는 미신은 워낙에 흔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개방되었다던 일본에서도 사진 찍다가 불길하다며 돌팔매질당한 이들의 기록이 20세기 초반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인식을 가진 이들이 세계 곳곳에 있으니 무턱대고 사진 찍지 말라는 여행가들 충고가 많다.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다고….[42] 만약 망하지 않았다 해도 태국처럼 막후에서 지배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 당대 서구 열강 지도자들의 성향상 되든 안 되든 무장 투쟁을 벌이는 게 외교전에서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43] 현재도 엄씨 집안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고.[44] 그리고 그 당시 왕비와 함께 고위급 상궁들이 죽어 내명부를 조율할 여인이 없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세자빈 민씨(순명효황후)가 있긴 했으나 을미사변의 충격과 시어머니 명성황후 민씨의 갈굼으로 인해 세력이 없다시피 했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명성 황후의 투기로 다른 후궁도 없던 상황이었다. 또한 그때까지만 해도 명성 황후의 죽음이 공인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45] 한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저자 박시백 등은 자신의 저서에서 "임오군란 때처럼 고종이 명성황후가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46] 위에 나온 권력에 대한 집착 항목의 내용을 고려해서 읽으면 왜 저리 퇴위에 격하게 저항했는지 좀 이해가 갈 듯.[출처필요] [48] 맹꽁이 서당에서 나온 고종과 군밤 장수 이야기의 출처가 여기다. 고종이 상당히 찌질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만 당시 고종 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일부러 기록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세도 정치기를 지나면서 이쪽도 기록의 왜곡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가던 시기였다. 게다가 애시당초 승정원일기는 시행된 왕명을 기록한 사료이기 때문에 시행되지 않은 왕명인 군밤 장수 어명 기록이 당연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될 리가 없다. 단, 고종 실록에 대해서는 좀 의문인 게, 고종 실록은 고종이 죽고 난 다음에 일본 총독부가 실질적으로 작성했다. 이전에 고종 실록을 조선 왕조 실록으로 이어놨었는데, 고종 실록과 순종 실록은 조선 왕조 실록에 포함되지 않는다.[49] 정확히는 황율(黃栗).[50] 대부분 경상도 관찰사[51] 창덕궁 후원의 언덕을 동산(東山)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가을에는 산책 중에 길에 떨어진 밤을 주울 수 있다고 한다.[52] 딱 봐도 의친왕영친왕의 모습은 빛과 그림자가 주변과 괴리가 큰 모습이다. 더불어 덕혜옹주의 출생 시기 및 영친왕의 일시 귀국 시점 등 시기적으로도 저 사진의 모습이 나타날 수 없다.[53] 이전 왕들의 어진들에 비해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의 복장 간소화 조치로 인해 곤룡포의 용보와 머리에 쓰는 익선관의 크기까지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이다.[54] 전통적인 어진과 달리 인물의 배경에 휘장을 드리운 것 때문에 일본의 화풍이 가미된 어진으로 추정된다.[55] 중간에 끼어 있는 고종황제의 모자 형태가 익선관이 아닌 사모이긴 하나 중간에 엉뚱한 도승지이조판서, 영의정 등을 그려 넣었을 리는 없고 일본 제국러시아 제국사무라이불곰같은 상징이 아닌 각각의 군주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구한국 역시도 동물이나 대표적 일반사람의 모습이 아닌 관모를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고종 황제로 보인다.맞는 것도 서러운데 복제까지 격하당함 서양인의 무지이기도 할 테고 정밀묘사화가 아닌 풍자만평이기 때문에 중요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용적으로는 오히려 당대의 정치적 상황을 잘 묘사한 풍자이다. 물론 세 명을 개인으로서 짚어서 그린 그림은 아니고 각국 정부, 더 나아가 국가를 세 인물로 묘사한 것이다. 현대의 정치인 만평에 그려질 만한 수위의 그림. 과거 군주들 같으면 상상도 못할 그림으로 의금부에서 관계자를 색출할 만한 그림이다. 그래도 아예 물건에 비유당한 둘보다는 사람으로 묘사된 고종이 제일 정상적으로 그려졌다.[56] 또한 이 그림은 다른 방면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고종황제가 한국 역사상 최고지도자이자 정치인이자 공인이자 특정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적 시사만평에 풍자된 사례 중 하나라는 것이다.[57] 이 장면은 고종이 일본 간부들과 함께한 자리와 현재 시대의 대한민국 대통령과 일본 외상과 함께한 자리가 교차되어서 나온다.[58] 이 만화 자체는 제국주의 비판 만화다. 오해하지 말자. 오히려 명성황후가 여기선 고종 대신 조선을 움직이는 날카로운 인물로 나온다.[59] 상해임시정부3.1 운동의 결과로 세워지기 때문에 고종 생전에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존재할 리가 없다. 고종이 망명시도를 한 흔적이 보이고, 망명을 준비해서 상해에 있는 독일 은행에 비자금을 마련했던 것은 호머 헐버트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상해임시정부가 되면 안 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서술한대로 대사로 직접 고종이 상하이로 망명할 생각이라고 김장한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영화에서 고종이 상해임시정부를 직접적으로 언급한건 아니지만 굳이 상해로 망명하려 했다고 설정한 건 대중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은 상해 임시정부와 고종을 연관시키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고종이 망명을 시도했던 지역은 연해주, 북경 등이다.[60] 극 중에서 묘호는 안나오고 초대 황제로만 언급된다.[61] 굉장히 인자하고 자애로운 모습이 강조되어 나오고, 보기 드물게 좋은 면이 집중적으로 부각되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