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09:51:09

연산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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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2. 즉위 초반3. 조의제문무오사화4. 폐비 윤씨갑자사화
4.1. 어머니의 죽음을 안 시점4.2. 패륜(悖倫)4.3. 효자 연산?4.4. 새로운 가설4.5. 연산군의 광증(狂症)4.6. 종합해석
5. 폭군 연산
5.1. 흥청망청(興淸亡淸)5.2. 성균관을 사냥터로 만들다5.3. 극심한 사치5.4. 직언을 차단5.5. 언문 사용 금지5.6. 방탕한 여색살이
6. 중종반정과 폭군의 몰락
6.1. 독살 의혹6.2. 큰어머니 승평부대부인(월산대군의 정실)과의 관계6.3. 자신의 최후를 미리 예측했던 폭군

1. 출생

연산군 이융은 1476년 11월 23일 (음력 11월 7일) 새벽 1시 경(3경 5점) 경복궁 교태전에서 국왕 성종중전 윤씨 사이에서 적장자로 태어났다.[1]

단종 이후 오랜만에 나온 적장자 출신 왕이다.[2] 역대 조선의 왕들 중 정통성이 확고한 임금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연산군은 정통성이 확고한 국왕 중 한 명이라 부를 만하다. 조선에서 두 번째로 날 때부터 왕위 계승권자로 태어난 왕으로,[3] 승지였던 현석규와 임사홍개국 이래 궁궐에서 원자가 태어난 것은 처음[4]이라며 성종에게 축하를 보낸 기록이 있다.

세자 시절은 그야말로 평범 그 자체였는데, 아버지 성종처럼 열성적인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재위 후반기의 모습과 같은 막되먹은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2. 즉위 초반

흔히 폭군이라는 연산군의 인식과는 달리 연산군은 재위 초반, 넓게보면 초중반에는 멀쩡한 왕이었다.[5] 빈민(貧民)을 구제하고 성종 말기의 느슨함을 휘어잡을 만큼 정치에 의욕도 있었다. 3명의 대비[6]들을 극진히 모셨으며, 신하들 의견도 그런대로 받아주었고 자기 자신이 나태해지는 걸 경계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서 왕으로서 충분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 또한 북방 여진족에 대한 나름대로의 전략-전술이 있었으며 전라도 섬에 나타난 해적들을 퇴치한 업적 등 본인의 말로와 비교하면 초창기는 정말로 정상적이었다.

근데 의아하게도 이 시절부터 이미 연산군에겐 폭군의 자질이 싹트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긴 하다. 조선조 내내 군왕의 공식 업무들 중 굉장히 중요한 업무에 속했던 경연을 점차 제대로 실시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 주요 근거이다. 당시 경연은 사전적 의미대로면 능력과 덕망이 있는 관리나 선비를 모시고 스승으로 삼아, 왕과 신료들이 경전을 공부하는 일종의 과외 수업이었는데, 실제로는 일종의 국무회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이미 즉위 초부터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 나가지 않기 시작했으니, 이미 '연산군의 폭군 시작'이라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경연에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연산군이 폭군의 기미를 보였다고 주장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명군이나 성군이든, 아니면 폭군이든 암군이든 관계없이, 역대 조선 국왕들 대다수는 경연을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세종이나 성종, 영조, 정조 같은 공부벌레형 군주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경연을 싫어했다. 경연 자체가 기본적으로 공부 차원이기도 하거니와, 그냥 공부인 걸 넘어서 신하들과 다투고 갈등하는 일이 많았기에 상당히 심적으로도 힘든 공부였기 때문이다. 당장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부터가 경연을 싫어했다. 즉위 1년차부터 "내가 나이도 많으니 경연을 들을 필요는 없겠구나!"하다가 신하들에게 까이고 어쩔 수 없이 억지로 경연에 나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7] 태종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빠지는 경우가 많았고,[8] 세조는 아예 폐지시켜 버린 전적이 있으며,[9][10] 광해군 또한 정말로 경연을 싫어했다.[11]

즉, 왕이 경연을 자주 하지 않은 게 칭찬 받을 일은 아니긴 해도 그렇게까지 잘못한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 경연이 오로지 실무를 논하는 자리라면 문제가 됐겠지만, 경연은 유교적 가르침이나 역사 등을 논하며 배우는 자리로 실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고, 신하들이 임금을 가르치는 자리였기 때문에 고사(故事)나 경전의 훈시 등을 들며 임금의 행동을 은근히 비판하거나 압박하는 것도 가능한 자리였다.[12][13] 온갖 회의와 알현, 상소에 시달리면서 따로 잔소리까지 들어야 했던 셈이니 조선 왕들의 고질병이 스트레스성 질환인 종기와 등창이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고, 왕이 경연을 싫어했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덤으로 사실 신하들이라고 모두 경연을 좋아한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경연을 싫어한 신하들이 상당히 많았다. 신하들 입장에서도 정치와 맡은 업무 하기도 바쁜 마당에 시간 쪼개서 공부를 해야 되고, 왕 앞에서 하는 거라 대충 할 수도 없으니 은근히 피곤한 자리였다. 물론 대간은 그런 거 없고 그냥 열심히 하라며 왕보고 경연에 나오라 했지만...

그리고 횟수로만 따지면, 연산군은 경연을 갑자사화 바로 전 해인 1503년(연산군 9)에 자그마치 122회나 열었다. 물론 이게 많이 줄인 것이긴 하고, 갑자사화 후로는 아예 폐지해 버렸지만 말이다. 이것저것 핑계 삼아서 경연을 빼먹는 일이 잦았으나 일단 나오면 열심이었다고 한다. 또 실제로 한시를 제법 잘 지었으며 신하들과 논쟁할 때는 경전과 경서를 적절히 인용하여 자기주장을 펼쳤다고 한다.[14]

물론 꾀병을 부리고 놀자판을 벌인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사간원에서 눈병 때문에 경연을 빼 먹었으면서 연회는 왜 나갔냐고 아뢰자, 연회 나가면 눈으로 먹냐고 맞받아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뭐 맞긴 맞지...-[15][16]

어쨌든 경연 관련한 일화 외에도 도첩제 존폐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것과 같은 평상시의 언행을 보면[17] 기존 연산군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꽤 괜찮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금과 노역을 피해 도첩[18]도 없이 무단으로 승려가 되려 하는 자들을 공역에 배치해 정리하였다.

비범해보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왕은 뛰어난 두뇌를 이용한 추리와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건의 본질과 타인의 범죄를 꿰뚫는 혜안이 있었다. 연산군 2년, 한 초계군수의 첩이 남자 종과 간통을 하다가 전처 소생의 딸에게 발각되어 여자 종과 함께 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왕은 직접 딸의 죽음을 자살이라면서 첩을 무죄로 주장하는 초계군수인 자에 대한 취조를 지시하고 심문 내용을 하달하는 등 조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심문 내용을 보고받고 단박에 허점을 찾아내는 등의 예리함을 보이며, 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명백한 타살이라는 점과 결국 전 초계군수인 자가 사주한 사실을 밝혀내는 등 수사에 있어 탁월한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다.[19]

왕은 즉위 후 최소 4년까지는 큰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사가독서(賜暇讀書)[20]를 실시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악한 관리들을 색출해 벌주는 등 왕으로서의 본분은 지켰다. 다만 어전 회의에서 위를 능멸하는 풍습은 고쳐야 한다는 명에 유달리 집착하는 등 이때부터 슬슬 폭군의 싹수가 보이긴 했지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연산군의 이 발언이 언급되는데, 이것이 훗날 그의 치하 아래 불어닥칠 피바람의 복선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재위 초중반까지의 왕은 대간과는 대립각을 세웠으나 주요 국정은 경험 풍부한 노신들의 자문을 존중하면서 이끌어나갔고, 민생에도 나름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종 때부터 만개한 조선 초기의 전성기는 연산군 재위 중반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공적인 국정 운영이 정상적이었다는 거지, 사적으로 가면 멋대로 사냥 가고 갖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다 구해다 먹거나 비싼 거 구해들이면서 마음대로 놀아 댔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한 나라의 군주다 보니, 이때만해도 왕으로서 할 일 제대로 하고 선은 넘지는 않아 노는 것 자체는 문제삼지 않았다. 애시당초에 자기 할 일 하면서 노는게 문제도 아니고. 또한 이 시기는 조선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왕의 사치는 재위 중반기까지는 국정에 딱히 영향을 끼치는 수준도 아니었고, 대신들이 슬슬 아껴 쓰라는 상소를 올리는 시기도 무오사화 뒤였다. 여기까진 좋았다.

아무래도 연산군의 이미지에 비해 별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서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인지 대부분의 한국 사극에서는 이 때를 생략하지만, 연산군을 다룬 작품 중 하나인 《왕과 나》에서는 드물게 이 시기를 조명해 주었다. 덕분에 연산군을 즉위하자마자 12년 내내 막장 짓거리만 하고 다닌 망나니 왕으로 알고 있었는데 재위 초중반까지는 의외로 정상적인 군주였다는 것을 알고는 놀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몇몇 역덕후들과 전공자들이 그의 이러한 행적 때문에 연산군을 많이 아쉬워하는 편. 초기의 그 치세만 계속 유지했더라면 비록 탕아적 기질이 있긴 했지만 공사는 철저히 가려 비교적 정국을 균형 있게 운영한, 유능하면서도 인간미도 있는 군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고, 이후의 조선이 가는 역사 역시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선친 성종이 너무 대간에 꽉 잡혀서 반박도 못하고 왕으로서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한 것에 비하면, 이때의 연산군이 젊어서 좀 거친 면이 있긴 했으나 부왕과 다르게 본인의 결정을 밀고 가는 뚝심도 있었다. 군주로서 주변의 반대를 무릎쓰고 강행하는 뚝심과 고집은 어느 정도는 필요하기 마련이므로, 부왕과 차별화된 또 다른 임금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

이를 바탕으로 일각에서는 왕이 저렇게 변한 이유는 아버지 성종 때부터 계속되던 신하들의 '선을 넘는' 간언이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사림이 등용될 때는 주로 청요직, 삼사에 배치되었는데, 간언은 시대를 막론하고 신하들의 필수적 덕목이었지만 기록들을 보면 성종~연산군 초반 대에는 지나치게 수위가 높았던 것이 문제였다. 조선 초기 때의 대간들 경우는 태종이 사냥을 워낙 좋아해서 사냥을 자주 가고 싶었지만 대간들이 사냥을 나가면 수천명이 몰이꾼으로 징발당하고 그 땅은 일찍 벼를 베야 해서 백성들이 힘들어진다고 합리적인 반대를 하여 왕도 어느 정도 수긍은 하면서 철회했다. 세종 때에도 허조 같은 고지식한 간관이 주장한 수령고소금지 철폐는 '노비가 감히?'라는 개인적 신념 때문에 비판도 있었지만, 초기에는 아직 지방관의 권력이 불안정해서 지방의 향리나 토착민이 툭하면 수령을 고소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이를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성종 때의 대간은 그냥 시를 쓰거나 활을 쏘는 개인적인 취미를 정사에는 신경 전혀 안 쓰고 취미 생활만 즐기니 망조가 들었다고 태클을 걸고,[21] 창경궁 통명전을 지을 때 구리로 만든 관을 가지고 사치한다고 태클을 걸어 괜히 비용을 더 발생시킨 것도 모자라,[22][23][24] 다리 3개가 달린 이 탄생하자 멀쩡하게 선정을 하던 왕을 보고 흉조가 탄생했는데 이건 왕이 불사를 중시하고 중과 여자가 난잡하게 어울리는 걸 방치해서 생긴 일이니 반성 좀 하라고 무조건 임금 탓이라는 비논리적인 간언이 많았다.[25][26]

문제는 그나마 성종은 인내심이 강한 성격이어서 그냥 넘어갔지, 아들인 연산군은 그렇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아버지 성종의 묘호를 정하는 일. 성종의 묘호로 '인종(仁宗)'이냐 '성종(成宗)'이냐에 의견이 갈렸지만, 연산군은 제도를 정비하고 기틀을 다진 왕이라는 의미의 성종을 밀어붙여 관철시켰다. 하지만 얼마 뒤 인종이 옳으니 성종을 묘호로 밀어붙인 자들은 처벌하라는 무서운 상소가 올라왔고 왕이 상소자를 처형하자 대간은 부왕 때처럼 연산군을 기선제압하기 위해 강경하게 나갔다. 왕이 이런 상황을 4년 넘게 참다가 무오사화 때 그 동안 꼴보기 싫었던 신하들을 다 죽이면서 절대군주의 힘을 맛보고, 갑자사화를 통해 완전히 타락하고 맛이 가 버렸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왕이 가장 문제삼던 것은 약해진 왕권이었는데, 문제는 이 왕권을 강화하려면 대부분의 임금들은 유교적인 견제장치를 무시하거나 파괴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비교적 순조롭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사림조의제문을 통해 불충이라는 강력한 유교적 명분을, 훈구는 폐비 윤씨의 사건으로부터 이어지는 라는 천하무적의 유교적 명분으로 휘어잡을 수 있었다.[27] 그 옥사의 크기만 조절되었다면 왕은 원 역사보다 왕권을 순조롭게 강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산군은 휘어잡는 정도를 넘어서 때려잡아서 문제가 되었다.[28] 조선이 한 방에 중기의 난맥상으로 접어들게 된 것은 사실상 연산군이란 개인의 인격 없이는 설명할 수도 없다. 왕의 폭정은 그런 맥락에서 더욱 비판적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3. 조의제문무오사화

부왕은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고작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따라서 성종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성종이 아닌 한명회로 대표되는 노회한 훈구 대신들이 국정을 총괄해 왔다. 그러다가 성종도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나이가 되었고 자기가 국정을 이끌려고 해보니 이미 훈구 대신들의 영향력이 너무 커버린 탓에 자기 으로 정국을 타개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성종이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선택한게 바로 삼사(또는 대간)의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 성종의 전폭적인 신임 아래 삼사는 정권을 잡고 있었던 훈구 대신들의 치부를 하나하나 들춰내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비판을 이어갔다. 성종의 계산대로 삼사의 줄기찬 비판 덕분에 훈구 대신들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으며 한명회 같은 최고위 훈구 대신들도 세월을 거스르지 못하고 하나 둘 세상을 뜨면서 훈구 대신들 쪽에 쏠려 있던 권력의 중심추가 다시 평형을 되찾는 듯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착시였는데 실제로는 삼사의 힘이 왕의 통제권 바깥으로 나갈 만큼 커버린 것이다. 그래서 왕은 치세 기간 내내 훈구 대신 쪽이 더 강해진다 싶으면 삼사 쪽에 힘을 싣고, 삼사 쪽이 더 강해진다 싶으면 훈구 대신들에게 힘을 싣는 방식으로 견제하면서 나라를 이끌었다. 이렇게 성종 시대 조선의 국정 운영은 국왕과 훈구 대신, 삼사[29]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이뤄졌다.

반대로 연산군은 왕세자 시절부터 삼사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말하자면 왕의 뜻에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것들로 여겼던 모양이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왕과 삼사는 지리한 대립을 이어갔으며 나중에는 훈구 대신들도 왕의 편에 서서 삼사와 대치하는 정국이 펼쳐졌다. 그러한 와중에 터진게 바로 조선 역사상 1번째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연산군은 대신들인 이극돈유자광 등의 말을 듣고[30] 사관 김일손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소문을 가지고 왕의 증조부인 세조명예를 더럽힐 만한 내용을 사초(史草)에 실었다는 보고를 받게 됐다. 무오사화의 '사'자를 '선비 사(士)'자 대신 '역사 사(史)'자를 쓰기도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의 기초가 되는 사초 때문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김일손을 국문하던 도중 김일손의 스승이기도 한 김종직[31]조의제문 등이 적발됐는데 유자광은 이 조의제문이 세조의 노산군(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인 것으로 해석하여 왕에게 보고를 했고 이는 왕실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되기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왕은 무오사화가 터지기 전까지는 삼사와 아주 감정적인 대립을 이어왔지만 그래도 강한 처벌이나 숙청은 하지 않았었다. 아버지인 성종의 정치적 유산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고 어차피 왕에게 반대 의견을 내라고 만든 조직이 삼사인데 자기 본분에 너무 충실하다고 직접적인 강한 처벌 또는 숙청을 하기까지는 명분도 약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일손을 비롯한 김종직을 엄벌에 처하려고 했던 왕과 훈구 대신들의 방침에 몇몇 대간들은 이보다 온건한 쪽의 처벌을 주장하며 반대 의견을 내놓자 흡족한 왕은 이를 손 봐줄 더 없이 좋은 명분으로 삼아 '몇몇 신료들이 김종직을 감싸고 도는 것은 이 죄인의 역심을 옹호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로 대간들에게 직접적인 숙청을 감행하였다.[32] 왕의 의도대로 왕권은 그만큼 강화되었으며 성종이 균형을 애써 유교적인 방식으로 맞추려했다면 연산군은 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왕은 갑자사화 때와 달리 대숙청을 벌이지 않고 무오사화 처벌과정에서 윤필상을 비롯한 다른 대신들에게 형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고 자신은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나름대로 절차를 걸쳐서 숙청을 감행하였다. 이는 성공을 거둬 훈구와 결탁하여 성종 말기 사적인 주관을 개입시켜 대간들을 탄핵한 후 왕의 인사권마저 간섭하기에 이른 삼사를 찍어누르는데 성공했다. 그 덕에 대신과 왕의 권세는 강해졌으나 성종 시대의 유교적 유산은 사라졌다.[33]

그 희생자 중에 유독 표연말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표연말이 무슨 송시열 급으로 드센 인물인 것도 아니고 타고난 공부 벌레일 뿐이라 성정도 순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왕이 표연말을 패 죽여버린 셈이라는 말도 나오고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설중매>에서는 연산군의 악랄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왕이 표연말을 관복도 안 벗기고 그냥 기둥에 묶어놓은 뒤 연산군 본인이 직접 작대기로 때려서 죽여버리는 것으로 나온다는 소리도 있으나 이것은 무오사화 당시 김일손의 사초와 연관되어 벌어진 일로 갑자사화의 잔혹함과는 별 관련이 없다. 실제 표연말은 대표적인 김종직의 문인으로 조정 내 김종직 일파를 대표하는 중견 관료였다. 표연말이 정말 공부밖에 모르고 성정도 순한 사람이었냐 하면 전혀 아니었는데 오히려 성종~연산군 초반까지 사림의 우두머리로 왕과 대립각을 세워왔던 인물로 연산군 초기 불사 문제 등으로 왕과 대간들이 대립할 때도 대간의 선두에 있었고 노사신에게 나라를 망칠 간신이라는 극언까지 퍼부으며 탄핵한게 바로 표연말이다. 특히 왕이 노사신은 간신이 아니라며 옹호하자 표연말은 연산군에게 실망을 금치 못하겠다는 발언까지 했다(연산군일기 7권, 연산 1년 7월 20일). 이쯤되면 표연말에 대한 왕의 원한이 크기에 그가 무오사화 때 곤장 100대에 유배로 끝난게 더 신기한 노릇이다. 후배 대간들이 조의제문과 세조에 대한 스캔들성 기사를 <조선왕조실록>에 실은 로 죽었다면 표연말과 다른 중견파들은 이를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죄로 파직되었다.

무오사화로 삼사를 제압한지 얼마 후에는 삼사를 이루는 사림파에게도 온건하게 대하고 훈구 대신들의 의견도 크게 수용하는 등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작새 깃털, 산호후추와 같은 진귀한 물품을 들일 것을 명하는 등 이 때부터 왕의 낭비벽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연산군 9년, 대신들이 씀씀이를 줄일 것을 권고했고 이에 대해 왕은 대응하지 않거나 부정하고 넘어갔다. 무오사화는 하도 세가 드세져 다소 오만해지기까지 한 삼사 숙청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에 훈구 대신이나 조정 분위기도 다소 '그동안 대간이 너무 나대기는 했다.' 정도의 여론이었으나 이보다 더 잔혹한 사화가 뒤이어 터지게 되는데 이게 바로 갑자사화다. 연산군은 절대 권력을 추구하던 국왕이었고 자신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능상(윗 사람을 능멸하다)'으로 규정하며 용납하지 않았다. 무오사화로 대간들을 먹인 후 견제 세력이 사라진 대신들의 권세가 강해지니 이제는 이들도 토사구팽하면서 밟아놓을 필요가 생긴 것이다.[34] 또는 그동안 줄기차게 삼사가 반대를 하는 바람에 자기 하고 싶은대로 왕권을 누리지 못했던 왕이 삼사가 약해지자 지나친 사치, 방탕, 정무 태만 등을 일삼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삼사 손봐주기에 동참했던 훈구 대신들도 삼사와 손을 잡고 왕의 행보를 막아서기 시작하자 왕이 삼사와 훈구 대신 모두를 쓸어버리기 위해 일으킨게 갑자사화라는 해석도 있다. 정리하면 왕은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빌미로 훈구파와 사림파를 막론하고 모두 억눌렀으며 수많은 신하들을 숙청해 신권을 완전히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연산군은 폐비의 아들이므로 왕으로서 어머니를 신원(伸冤)시킬 권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35] 다만, 처벌이 유례가 없을 만큼 잔인하고 과도했던 것이 문제였다.

4. 폐비 윤씨갑자사화

어제 사묘에 나아가 어머니를 뵙고(昨趨思廟拜慈親 작추사묘배자친)
술잔 올리며 눈물로 흠뻑 적셨네(奠爵難收淚滿茵 전작난수루만인)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으니(懇迫情懷難紀極 간박정회난기극)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라(英靈應有顧誠眞 영령응유고성진).
ㅡ 연산군이 쓴 "所懷(소회)"라는 시 #연산군의 다른 시

연산군에 대한 가장 큰 논란은 바로 폐비 윤씨와 관련된 부분이다.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고, 뒤에 나오는 피 묻은 적삼[36] 이야기도 얽혀 아주 요지경이다.

왕은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처형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한명회 등은 부관참시했다. 갑자사화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실록에 따르면, 왕은 한밤 중 자기 손으로 아버지 성종후궁귀인 정씨귀인 엄씨 아들 안양군봉안군에게 몽둥이로 자신의 어머니를 때리라고 명령하였다. 몽둥이로 때려 죽인 후 그 성종의 후궁 시체들은 산야에 버렸고, 안양군과 봉안군도 나중에 사사되었다. 또한 윤씨가 폐비되는 데에 일조한 조모 인수대왕대비(소혜왕후) 한씨의 궁에 칼을 들고 뛰어 들어가 미친 행동을 하며 무례를 범해 결국 인수대비는 충격받아 쇼크사하였다. 결국 대왕대비는 죽고 왕은 장례를 강쇄해서 행하였다.

흔히 박치기로 들이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야사이다. 실록에는 왕이 칼을 휘둘러 대비가 충격받아 병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갑자사화 때 왕은 안양군과 봉안군을 시켜다 성종후궁귀인 정씨귀인 엄씨를 참혹하게 때려 죽이고 난 후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그대로 대비의 침전으로 들어가 대비에게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라면서 보시다시피 예의 없게 대비에게 감히 반말을 하면서 안양군과 봉안군을 독촉하여 대비에게 잔을 드리게 하니 놀란 대비는 부득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에 왕이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라고 말하니 대비는 미처 어찌할 수 없이 얼른 베 2필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대비더러 "왜 제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고 묻고 서는 뒤에 내수사를 시켜 귀인 정씨귀인 엄씨의 시신을 갈기 찢어 젓갈로 담가 산과 들에 버리라고 명하였다고 전해진다. 대비는 이 날 잊지 못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37] 사실 이 사건이 있기 직전에 연산군은 칼을 들고 계모인 자순왕대비(정현왕후) 윤씨에게 찾아가려고 했으나, 이때는 중전 신씨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4.1. 어머니의 죽음을 안 시점

사실, 연산군은 즉위하기 전에 친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종이 백 년 동안 이 일을 입에도 꺼내지 말라고 신하들에게 신신당부했지만, 연산군이 세자로서 국사를 논의하는 장소에 참여할 때, 간간이 폐비의 이야기가 간접적으로나마 거론된 적이 있었으며, 폐비가 사사당했을 시 7세였으니, 어쩌면 어렸을 때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나이가 나이이고 아무도 알리지 말라고 한 만큼 자세한 내막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실록에 의하면, 즉위 후 성종의 묘지문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왕은 이를 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왕의 장인 중 한 명으로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이란 사람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자순대비의 아버지인) 영돈녕(領敦寧) 윤호를 잘못 적은 것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신하 중 한 명이 윤기견은 폐비의 아버지라 답하자 폐비에 대해 어찌되었냐 되물었다. 이때 사사되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친어머니가 따로 있다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더 자세한 걸 들으려고 질문했거나 혹은 사사당했다는 것까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설령 폐비와의 추억이 없다고 해도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인지라, 아버지와 신하에게서 어머니가 사사당했단 말을 들은 왕의 기분이 좋았을 리는 없다. 기록에 보면 왕이 그 날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인이 아닌 왕이 굶은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요즘처럼 현대 의학이 발달하고, 모든 음식에 영양소가 풍부하던 때를 생각하면 안 된다. 옛날에는 조금 굶어도 픽픽 쓰러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물론 왕족이므로 평상시에 일반 백성들보다는 건강히 먹었겠지만, 사회 풍조가 '굶는다'에 대해 그런 인식이 있는데 왕이 그러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왕들이 굶는 것을 내세워 시위하곤 했는데, 이는 조정을 크게 뒤흔드는 무기였다.[38]
며칠 뒤 왕은 폐비의 초라한 무덤을 손질하고 비석이나 세워주라 말한다. 그러고 외할머니 신씨와 외삼촌 윤구를 유배지에서 풀어준다. 나중에 추숭(追崇)을 하려 하자 대간들이 많이 반대했는데, 결국 성공했다. 하지만 관련자에 대한 처벌은 없었으며, 사약을 들고 갔던 이세좌가 오히려 무덤 복원의 임무를 맡았다. 이때까진 폐비가 부왕에게 죄를 지어 사사당했다는 식으로만 이야기가 나왔으므로, 그 이상 더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연산군과는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정비 소생이 아닌 왕자가 왕이 된 후에 자신의 생모를 추숭(追崇)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4.2. 패륜(悖倫)

기일(忌日)에 성관계를 한다든가 말들이 성관계를 하는 걸 보고 즐겼다는 류의 이야기를 제외하고, 연산군을 최악의 인물로 각인시킨 행위는 바로 적삼사건 이후에 벌인 행각들이다.

사실 효자 연산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왕이 벌인 패악질에 대해서는 그냥 복수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많은데, 조선 시대의 윤리로는 아버지와 결혼한 서모(庶母), 즉 계모[39]에 대해서도 친모와 동일한 기준으로 대한 것을 보면, 연산군의 경우는 존속살해에 해당하는 패륜을 벌였다. 물론 계모가 연산군을 사람 취급 안 했다거나 왕의 권좌를 위협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무슨 팥쥐 엄마 같은 나쁜 인간이었다면 모르지만, 그랬으면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남았을 텐데, 그렇지도 않다.

국본이었던 왕세자저주했다는 혐의를 받은 경빈 박씨의 경우에서 소급해보더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는 아마 폐서인+유배가 고작일 것이다. 물론 경빈 박씨는 나중에 사사당하고 이 외에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가 효종에게 사사되고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가 정조에게 사사된 일이 있긴 한데 일단 그래도 사사라는 선을 지켜 죽인데다 셋 다 그래도 일단 죽일만한 죄가 걸려 죽은 것이긴 하다. 만약에 두 후궁을 죽이는데 명분이 있다면 경빈 박씨처럼 자기 소생 자식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는 혐의가 씌워지거나 귀인 조씨처럼 저주 혐의가 있거나 숙의 문씨처럼 국본을 흔들려고 했다는 중대한 혐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혐의가 있더라도 조용히 사약내려 죽이는게 한계다. 물론 연산군이 이 두 후궁을 자기 어머니가 죽게 만들었다고 했으니 그것도 중대한 혐의이긴 하니 연산군이 억지를 써서라도 밀어붙이면 죽일 수는 있다. 그거치곤 막나갔다는게 문제지만. 당초에 제대로 법집행도 안 거치고 두들겨 패죽였다는 점부터 명분은 상실했다. 더군다나 친조모인 인수대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일단 야밤에 폐비 윤씨를 모함했던 귀인 정씨귀인 엄씨를 잡아서 고문한 후, 그들의 소생, 즉 연산군 자신의 이복 동생들인 안양군봉안군을 끌고 와서, 결박되어 있는 사람들이 이들의 어머니인 귀인 정씨(귀인 엄씨는 아들이 없었다)라는 것을 숨긴 채 '죄인을 매질하라'고 명했다.[40] 그리고 다시 두 귀인을 매질로 살해하였다.

이후 연산군은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채를 잡고 대비의 침전으로가 안양군에게 독촉을 해서 대비에게 권하니 대비가 부득이 허락을 해주었고, 이때 연산군이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은 없습니까". 라고 말하니 대비가 놀라서 얼른 2필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냐는 참으로 불손한 말을 한다. 그 뒤,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귀인 엄씨귀인 정씨의 시체를 갈가리 찢어서 젓갈로 만들고 산과 들에 버렸다고 한다. 어미를 친 왕자는 을 선물로 주었고, 둘 다 귀양을 보내어 사사했다. 하나는 패륜아니까 사형당하는 게 당연하고, 하나는 왕의 명을 거역했으니 역시 입장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패륜의 극단이자 동생들에 대한 친모 폭행 강요라는 측면에서 아예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린이용 역사책이나 고우영의 만화, 영화 《왕의 남자》나 이대근 주연 영화 《연산군》, 드라마 《임꺽정》에서는 분노한 왕이 손수 철퇴를 휘둘러 두 후궁을 박살내었다고 처리하는데, 위의 폭행 강요 이야기 자체가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성인 대상 극화라도, 수위가 너무 높아서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이다.

잔혹함 때문에 창작물에서 그대로 내보내기도 어려웠던지 유인촌이 나온 《연산일기》에서는 곤장 강요로 대신하고 있고,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입을 틀어막고 불을 끄고 마구 치게 하는 것으로만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나름대로 충실했지만, 그래도 장면이 장면인지라 나중에 다른 군졸의 고문으로 사망한 걸로 그렸다.

신봉승의 《조선왕조 5백년》 원작에서는 두 아들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마구 때리고, 그나마 한 아들은 직접 살해한다. 그리고 바로 왕이 손수 병사들에게 현장에서 귀인 정씨귀인 엄씨를 나체로 만들게 하고는, 시체를 갈기갈기 형체도 없게 찢어 발겨버린다. 드라마판에서는 차마 표현하기가 난감했는지, 그냥 잡혀가는 장면과 사망했다는 대사로만 처리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강요로 한 대 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사실 연산군은 패륜을 저지른 적은 없었으며, 귀인 엄씨귀인 정씨는 자결했고 인수대비는 평안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견강부회에 가깝다. 심지어 이런 논리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왕의 사치는 권력자로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정당화 주장을 하는 경우도 많다. 애당초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이 굶주리면 식사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등 나름대로의 견제 장치가 많았다. 그렇기에 인간 말종이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500년간이나 왕조가 유지되었던 것이다.[41]

4.3. 효자 연산?

일단 갑자사화는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연루된 자들을 숙청하기 위해, 한마디로 어머니의 원통함을 풀어드리기 위해 일으켰으니 친모에겐 효자라는 생각이 들 수 있으나, 애당초 왕이 친어머니와 헤어졌을 때는 7살이었다. 헤어진 어머니에 대한 희미한 기억까지는 남을 수 있겠지만 절절한 그리움이 남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더군다나 왕실 법도상 왕자는 왕비가 직접 안고 업고 기르지도 않고,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고 하는 유모에 의해 길러진다. 그것도 모자라 잔병이 잦았던 연산군은 궁 밖 강희맹의 집에서 피접(避接) 생활을 했다. 즉 여러모로 친어머니와 정을 붙이기는 커녕 제대로 기억하기조차 힘든 조건에서 자라왔다.

이후 진실을 알게 된 후에 밥을 굶는다든가, 묘를 복원한다든가, 어머니의 지위를 다시 복권시키는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실록에 따르면, 자기 어머니 기일에도 성관계를 하는 패륜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왕에게 효심이 진짜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상당히 애매모호하게 되었다. 말년에 들어서는 일관성 없이 즉흥적으로 이랬다 저랬다 했던 것을 보면, 진심으로 우러나온 효심이라기보다는 반대 신료들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과 어머니에 대한 일시적인 그리움이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 나타났다는 해석이 있다.[42]

4.4. 새로운 가설

근래는 왕이 대간과 대신 모두를 숙청하여 절대 권력을 이루기 위해 어머니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 설도 나온다. 아버지 성종이 신하들의 간언을 즐겨들었던 왕으로 호평받았지만 그 이면엔 신하들의 말에 꼼짝 못하는 듯한 모습도 있었기 때문에, 이를 후계자 입장에서 지켜보면서 자신은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리라는 것. 정사에서 실제로 폐비에 대해 거론한 적은 많지 않으므로, 어디까지나 숙청의 빌미나 구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늘 자신과 성종을 쪼아댔던 삼사(三司)가 유독 그때만큼은 성종에게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화가 났던 것일 수도 있다. 연산군은 즉위하기 전, 너무 세력이 커져 왕마저 괴롭히는 삼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즉위 직후부터 삼사의 권한을 억누르려 했다. 실제 왕은 미친 듯이 아무나 숙청한 게 아니라, 우선 사약을 직접 나른 이세좌를 숙청한 뒤, 그 후로 이세좌의 가문인 광주 이씨와 그와 연관 있는 대신 가문을 숙청하고, 그 다음에 대간들을 찍어 누르면서, 조정의 세력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절대 권력을 장악했다.

4.5. 연산군의 광증(狂症)

연산군은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했던 나머지 폭정을 휘둘렀다는 말이 여러 번 제기되고 있다.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설이기도 하다.

왕자 시절 계모정현왕후 윤씨가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아들 진성대군(중종)이 태어난 후엔 친아들에게 마음이 더 기울어 상대적으로 홀대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성종의 첫 아들이라고는 하나, 미워했던 며느리의 아들이니 인수대비의 냉대도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추측이다. 무엇보다도 부왕은 세자의 재능을 총애하고 신경을 많이 써서 특별한 나쁜 기사는 딱히 없다. 오히려 자신에 의해 엄마 없이 자라는 아들을 애틋하게 여겼는지 세자가 수업을 종종 빼먹었음에도 이 더운날에 공부하다 내 아들 쓰러진다며 세자의 스승들을 나무랐을 정도로 애지중지 했다. 실록에 나오는 아버지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기사는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43] 또 인수대비가 냉대했을 가능성도 확인할 길이 없으니 불확실하고 또 냉대했다 하더라도 무려 다음 왕이 될 세자를 과연 대놓고 박대할 수 있었을까?

아이가 없었기에 조카인 연산군을 자기 아이처럼 돌봐줬을 가능성이 높은 월산대군 부인 박씨[44] 대한 야사 등을 비롯하여 유부녀들을 적지 않게 탐했다는 이야기와 장녹수가 왕을 어린애 다루듯이 꾸짖고 나무라면 오히려 기뻐하고 좋아했다는 이야기에서 그로 인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있다. 갑자사화 이후로는 강박관념 등에 시달린 게 아닌가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연산군은 적어도 갑자사화 전까지는 이렇다 할 광증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정사도 잘하고, 백성들도 성종 대와 다르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다. 왕의 행동을 어릴 적의 울분의 분출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다만 갑자사화 이후에는 그것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연산군 자체가 상당히 감성적이고 예술적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광증은 앞서말한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때문에 일어난 산물로 보는 견해도 많다. 피묻은 적삼이 등장하는 <금삼의 피>나 <장녹수>에서 볼 수 있듯이 극적 재미를 위한 요소 중 하나로 왕의 광증을 짐짓 지어냈다는 것. 사실 관객들에게 흥미를 돋우는 것 중 하나가 스토리의 급작스러운 전환이니만큼 역사 소설가나 대하 드라마 작가 같은 입장에서는 이를 부각시키는 것이 자연스럽다. 연출의 측면에 있어서도 엄한 아버지의 훈육 속에서 자라던 유년기에 대한 보상 심리로 서서히 타락해가는 왕보다는 친모의 죽음으로 미쳐버리는 인물이 더욱 매력 있어 보이는 것도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4.6. 종합해석

폐비 윤씨의 일은 숙청을 단행하기 위한 빌미로 철저한 계획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이전의 행동들은 모두 왕권이 약했던 시기였다.[45] 이렇게 보면 임사홍 발언에 의해 어머니의 죽음을 처음 안 척 행동 → 어머니를 추숭 → 사초 문제를 이용해 날뛰는 대간 잡기(무오사화)[46] → 수년간 눈치를 살피면서 때를 기다림 → 갑자사화 이 단계 모두가 권력과 정통성을 강화하는 책략이었다는 것이다. 왕은 자기가 나름대로 계획세워 계산적인 행동을 한 것이었다.

5. 폭군 연산

두 번의 사화를 거친 이후, 삼사와 훈구 대신들 모두 유명무실한 존재들로 전락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자신을 가로막을 수 없게 되자 왕의 문제있는 행동은 더 심각해졌다. 연산군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를 기점으로 개인적인 관심사이자 취미였던 예술과 사냥을 비롯하여, 호색한 기질이 다분했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인지 엽색 행각이 최정점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시기의 연산군은 영락없는 수나라 때 죽었다가 조선시대에 부활한 양제다.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로 사림 대간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폐비 사건으로[47] 갑자사화를 일으켜서 훈구 대신들을 모두 날려버린 이후부터 절대권력을 손아귀에 쥔 연산군은 더더욱 막강해진 절대권력으로 하라는 나랏일은 할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놀아제끼기 시작했다. 실제로 향락, 방탕, 패륜 등으로 엄청난 짓을 저지른 연산군 재위 후반기 기점으로 조선은 나라의 기틀과 건실함을 점점 잃어갔다.

이후 신하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이복동생 중종은 능력 부재로 신하들을 맘대로 교체하고 그 수단으로 옥사를 활용하는 모습들이 속속 목격된다. 이러한 악영향으로 후대의 이황, 기대승, 조식과 같은 대학자들도 관리직을 사직하고 지방으로 내려가거나 아니면 과거에 합격해도 관리에 임용되지 않고 은거하고 산림을 형성하여 막후에서 조정이라는 제도권과 알력을 겨루거나 배후 조종하는 현상이 속출하게 되었다.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의 실정이 가져온 결과는 당연히 관리 제도와 조세 제도의 문란, 그리고 성종 시기까지 이어온 실용적 관학의 쇠퇴를 불러왔다.

이런 군주이다 보니 왕은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에게조차 철저하게 증오받았다. 이렇다 보니 기묘사화 때 중종이 남곤 등에게 밀지를 내려 "그들(조광조 등)이 연산을 폐한 죄를 논한다면 그대들이(정국공신, 남곤 등) 먼저 어육 신세가 될 것이고 다음엔 과인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라고 반 협박을 하였지만, 중종 39년 내내 연산군 폐위를 두고 시빗거리로 삼은 이들은 없었다. 연산군은 남은 조선왕조 존속 기간 내내 폭군의 대명사로 꼽혔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연산군을 명나라의 창건자 홍무제 주원장과 비교하면서 대차게 깠다. 연산군과 홍무제 모두 신하들한테는 가혹하리만치 숙청과 피바람을 일으키면서 매섭게 대했지만 두 군주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홍무제는 그 강해진 권력을 건설적인 분야에 활용했던 반면, 연산군은 그저 자기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썼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48]

왕의 폭정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폭정의 대부분이 갑자사화부터 폐위까지의 1년간에 집중된 경우가 많은 점일 것이다. 그 이전에도 무오사화 이후 몇 년간의 기간에서 왕의 잔치와 사치가 늘어나서 대신과 대간들이 만류하는 일이 있기는 했으나, 후대에도 예산을 낭비하며 잔치를 벌인 임금들에게 하는 수준을 벗어났다 보기엔 어려웠다. 다만 이 사이에 궐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것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5.1. 흥청망청(興淸亡淸)

전국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하여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해오게 하였다. 이 중에서 가장 예쁘고 노래를 잘부르고 춤을 잘 추는 자들을 뽑아 "흥청"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것이 '연산군이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 라면서 "흥청망청()"의 어원이 된다.

반드시 이들을 간택할 때 분칠하지 않는 자들을 뽑으라 하였다.[49] 뽑혀온 자들은 의외로 다양하였는데 양반가 아내, 여종, 기녀 등이 있었으며 용모가 못생긴 자들도 있었고 처녀, 유부녀,[50] 그리고 나이가 많은 중년이나 노년의 여인들도 종종 있었다. 이 외에도 전 왕조 때 내한매 등 악생으로 활동했던 기녀들도 꽤 있었다. 연산군의 경우 뽑혀온 자들 중 친자매[51]가 있으면 한명 빼고 다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한 적이 있다.

흥청악보다 서열이 낮은 운평악은 외모와 기예가 뛰어나면 간택하여 흥청으로 격상되었다. 초기에는 운평악 재능을 정5품부터 종9품까지 10등급으로 나뉘었었는데 나중에는 광희악과 마찬가지로 재능에 따라 1~3등급으로 나뉘었으며 흥청악은 재능을 9품부터 5품까지 등급화하였다. 마지막으로 광희악은 운평악 흥청악과 마찬가지로 음악 연주와 노래 춤을 학습했지만 음악 연주를 업으로 삼는 자들이었다. 광희악은 재능에 따라 1~3등급으로 나뉘었고 각각의 등급에 맞는 1등악 2등악 3등악을 연주하거나 합주하였다.

단순히 보면 왕이 유흥 향락을 누리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왕이 이들을 궁으로 데려온 실질적 목적은 대궐에서 대비를 위해서 치르는 연회나 궁궐의 큰 행사를 치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종친과 신하들이 이들을 간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연회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연산군이 이 때문에 이들이 음악을 익힐 틈이 없다면서 연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죄로 다스리겠다면서 경고를 내세웠다. 연산군은 이들에게 음률을 배우게 하고 여러 악기와 다양한 춤, 노래를 완벽하게 익히게 하여 체계적인 훈련을 단련하고 능력과 재능으로 등급을 나누며 상과 벌이 오고갔다. 흥청의 경우 화장품과 의식주를 제공하였고 이들의 용모를 중요시 여겨 옷이 더럽거나 화장이 깨끗하지 못하여 곱게 단장이 안되어있다면 죄를 주었다.

성종 5년에 만들어진 '경국대전'에는 ‘여성 기생 150명, 춤추는 기생인 '연화대' 10명 등을 매 3년마다 각 고을의 관비 중에서 어리고 총민한 자들로 뽑아 올리도록 한다’는 조항이 있으며[52], * 연산군 사후인 영조 때 고쳐진 '속대전'에도 “왕실 연회 때에는 각 지방 고을에서 여성 기생 52명을 뽑아 올린다”는 조항이 있다. * 즉, 조선의 국왕이 조선의 여성 기생들을 한양으로 데려오는 건 연산군 시대에만 있었던 특별한 사례는 아니었다. 다만 그 막장성이 특별했을 뿐.

게다가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다가 선왕인 세조의 호불 정책으로 중건한 절을 아예 기생방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절이 바로 증조부 세조 시절 증건되었고, 현 국보 2호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던 원각사였다. 요새로 치면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이 애착을 보인 이나 성당을 연회에 동원되는 무용수나 연예인들의 합숙시설로 만든 기행. 현재의 탑골공원이 원각사가 있던 자리다.[53]

또 최측근이자 궁궐 내관이었던 김처선이 술을 먹고는 선왕 중에서 연산군만큼 풍기문란을 일으키고 폭정을 일삼는 임금은 없었다는 간언을 올리자, 격분하여 김처선을 죽였다.[54] 그 후 '처(處)'라는 글자의 사용까지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되어 '처서(處暑)'를 '조서'로, 처용무[55]는 '풍두무(豊豆舞)'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

5.2. 성균관을 사냥터로 만들다

과거 세종이 즐겨 했던, 시국을 논하고 정쟁에 대한 토론도 하는 경연을 없애서 학문을 멀리하고, 성균관을 폐쇄한 뒤 학생들을 모두 몰아낸 다음 그곳을 놀당, 즉 놀이터로 삼았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대학교대한민국 대통령 전용 골프장으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사간원도 폐지해서 언로를 막는 등, 왕의 패악질은 극에 달했다.

경기도 일대에 금산(禁山), 지금으로 치면 "그린벨트"와 비슷한 것을 정한 후, 그 안에 사냥터를 만들었다.[56] 왕은 그것도 모자라서 고위관료들의 사유지와 백성들의 민가를 철거했다고 하는데 이 일은 왕에게 억울한 것이 애초부터 법으로 대궐 근처에 집을 짓는 것을 불법으로 금하고 있었으며 단지 불법 주택들을 철거했었던 것 뿐이었다. 그래도 왕은 백성들 민가를 철거하는 동안 백성들에게 거주지를 마련해주었고 봄까지 기다리며 주택의 등급을 나눠 쌀과 무명을 넉넉하게 주는 등 나름대로 보상도 해주었다. 이 외에도 궐을 짓기 위해 열한 고을의 백성들을 내쫒았다는데 백성들은 내쫓은 것은 사실이나 그 수는 500여호에 불과했고 열한고을은 사관이 의도적으로 과장해서 쓴 것이다. 게다가 궐은 큰집 50칸으로 몇몇 사대부들의 99칸 집집들보다 작은 크기였다.

물론, 조선 시대 초기부터 금산은 자주 있었다. 개국 초기나 연산군 시절처럼, 왜구가 출몰하는 시기에는 배를 만드는 데 쓰는 소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금산을 시행하여 무분별한 벌목을 막았다. 하지만 왕이 금산을 지정한 게 문제되는 것이 이런 금산 조치가 적어도 국방 등 국가 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을 위해서 시행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연산군 개인의 유흥을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시도때도 없이 왕은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국왕이 한 번 사냥을 나가기만 해도, 몰이꾼들의 식량부터 해서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므로 국가 재정은 충분히 거덜났다. 연산군이 한 사냥을 대륙 스케일로 한 케이스가 바로 양제였다. 연산군은 그야말로 수양제의 한반도 판이었던 셈.

사실 조선의 왕들은 전 시대들의 왕들과 다르게 사냥을 나가고 싶어도, 이러한 경제적 비효율 문제와 이럴 시간에 백성의 상소를 더 읽으라는 민본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제대로 사냥을 하지 못했다. 태종 이방원도 사냥을 좋아했지만, 신하들에게 간언을 많이 들어서 눈치를 항상 살펴야만 했다. 여담으로, 태종은 상왕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사냥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때의 태종은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노년이기에, 세종과 신하들이 눈감아준 것도 있었다.

5.3. 극심한 사치

여기에다 창덕궁 서총대(瑞葱臺)를 비롯한 토목 공사를 벌였고, 생일에는 ' 요리' 같은[57] 진미를 동원했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는데, 서총대를 비롯한 왕의 토목 공사는 사실 그리 큰 토목 공사도 아니었고, 백성들에 대한 세수 증가는 이미 세조 이후 성종 치세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며, 재정 악화 역시 딱히 왕이 막장으로 놀지 않았더라도, 훈구파들의 세력 확대로 인해 성종 때부터 진행되어왔다는 견해다.

또한 왕은 금표(禁標)를 지정해 농토를 마구 뺏었는데, 이는 대부분 백성들이 아닌 대신 대간들의 사유지를 자신의 사유지로 만들었고 막장이 된 뒤 2년 동안 왕이 마음대로 놀아 제끼면서 재정을 악화시킨 점은 있었으나, 성종이나 중종과 비교해볼 때 딱히 심각한 지출이나 징세는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금표 설정이 동서남북으로 100여 리에 이르렀기에 경기도가 하도 좁아져 평택 등이 경기도로 딸려오고, 이로 인해 인구가 한양 주변에서 대거 유출되면서 인구가 숙종 대에야 복구된 점을 보건대 왕의 금표 설정은 분명 역사에 길이 남을 어리석은 행동이 맞다.

그러나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왕실의 방만한 재정 운용은 무오사화 이후 심화되어, 연산군 10년 내수사(內需司) 직계제를 통해 이에 필요한 비용을 수탈하는 제도가 확립된다. 재정의 남용에 따른 부족분을 다음해, 그 다음해에 필요로 하는 공물을 앞당겨 조달하는 인납(引納), 무납(貿納) 등 공납 제도가 크게 어지러워진 것은 갑자사화 이후부터의 일이다.

이미 16세기 들어 조세 제도에서 공납의 비중이 커져만 가던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가 백성들에게 심각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란 건 당연지사다. 예를 들어, 경기도에서 1년에 진상해야 할 물고기 7,518마리 중 4,800마리가 이러한 별진상으로 늘어난 품목들이었다. 선조 시대의 율곡 이이가 만언봉사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한 공물 추가 분정은 바로 왕의 이러한 깽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11월 15일 기록에 의하면 왕이 적자 장부는 없애버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엔론보다 무려 500년 앞서서 분식회계의 역사를 창조해낸 셈이다.

5.4. 직언을 차단

신하들 단속에 매우 난리를 쳤는데, "입은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내용의 신언패(愼言牌)[58]를 차게 하고, 총애하는 흥청의 나들이나 왕의 가마를 메는데 신하들을 동원시켰다.[59] 폐위 몇 달 전부터는 아예 사모 앞뒤로 '충(忠)', '성(成)'을 수놓게 하였다.

5.5. 언문 사용 금지

한번은 왕의 악행을 비방하는 투서가 나돌았는데 왕은 분노하여 거액의 현상금을 걸며 범인을 잡으라고 명령했지만 범인을 잡는데 실패했다. 이에 왕은 화풀이로 그것이 언문, 즉 한글로 쓰여있었다는 이유로 훈민정음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 구결을 모조리 수거하여 불태웠다. 문제는 이게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심각한 자승자박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훈민정음을 창조한 세종은 연산군의 고조부이다. 게다가 자신이 존경하던 증조부이자 세종의 아들인 세조 또한 훈민정음을 더 정교하고 간단하게 만드는 표기법을 즉위 1년만에 만들었고 석보상절과 같은 글을 직접 짓는 등 널리 보급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런 직계 조상이 만든 언문 구결을 모조리 불태웠다는 것은 선대왕의 업적을 부정하는, 패륜 차원을 넘어서 조선 왕조가 무의미한 짓을 했다고 후손이 스스로 인정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위험한 행위였다.[60][61]

하지만 정작 뒤에 나오는 흥청들의 음악 교본은 모두 언문, 즉 한글로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왕이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미 백성들에게도 한글 사용이 제대로 정착된 지 오래인데다 너무 밀어붙이면 왕실의 권위가 흔들린다는 문제 때문에 흐지부지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므로 "한글의 암흑기"까지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언문이 지식인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는 걸 엄두에 두고 만들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왕에 대한 반감이 백성들에게까지 퍼졌거나, 백성들까지 끌어들여서 반(反) 연산군 활동을 하려는 세력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한 국가의 임금이라는 사람이 개인의 감정으로 선대 임금의 업적을 제대로 능욕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까여도 할 말이 없다.

5.6. 방탕한 여색살이

왕의 음탕이 날로 심하여, 매양 족친 및 선왕후궁을 모아 왕이 친히 잔을 들어서 마시게 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장녹수가 아끼는 궁인에게 '''누구의 아내인지 비밀히 알아보게 하여 외워두었다가 이어 궁중에 묵게 하여 밤에 강제로 간음하며 낮에도 그랬다.'
왕이 박씨[62][63]로 하여금 그 집에서 세자를 봉양하게 하다가 세자가 장성하여 경복궁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면서는, 왕이 박씨에게 특별히 명하여 세자를 입시(入侍)하게 하고,[64] 드디어 간통을 한 다음 은으로 승평부 대부인이란 도장을 만들어 주었다.[65] 어느 날 밤 왕이 박씨와 함께 자다가 꿈에 월산대군을 보고는 밉게 여겨 내관으로 하여금 한 길이나 되는 쇠막대기를 만들어 월산대군의 묘 가운데 꽂게 하였는데 우레(천둥)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ㅡ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2년(1506년) 6월 6일.[66]

왕은 신하들의 아내까지 간통했다고 한다. 은밀히 불러다가 간음했다. 실록에서도 왕에게 아내를 바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67]

왕의 방탕한 색정증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태생적인 기질에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음으로써 생긴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심리적 의존증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그 증거로 장녹수를 비롯해 왕이 홀딱 빠져있던 여성상을 보면 죄다 여왕님 기질이 있는 연상의 여성이었으며, 장녹수 역시 왕을 아이 다루듯 꾸짖거나 혼을 내는 등 전형적인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저 당시엔 세상에 정신의학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였고, 죽은 폐비 윤씨를 도로 되살릴 수도 없는 일이니, 왕의 색정증도 폐비 윤씨가 사사된 순간부터 이미 고칠 가능성이 없는 병이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왕이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해도 왕비 혹은 후궁들, 궁녀들, 하다못해 자기가 뽑아들인 기생들과 해결하는 등의 합법적인 방법도 존재하는데 뒷처리도 안 하면서 궁 밖에 멀쩡히 사는 신하의 부인들을 불러들여 겁탈한다는 것은 명백히 선을 넘어버린 행동이었다. 공식적으로 조선시대 국왕의 성관계는 본인의 성욕 해결이 아닌 왕손을 남기기 위한 공무집행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왕이 갑자기 성욕이 돈다고 해서 아무때나 여자를 찾으면 안 되는 게 맞긴 한데, 왕은 어차피 아무때나 여자를 찾은 인간이었으니 기왕 그럴 거라면 최소한 뒤탈이라도 없는 여자들을 취하는 방법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엽색 행각을 기록한 실록의 기록이나 전해 내려오는 야사를 보면 구체적인 증언이나 정황을 적은 것도 있지만 일부이고 '이런 소문이 있었다' 또는 그러한 상황을 연상케 하는 문구를 적어두고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듯한 서술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직접 보고 들은 것만 기록해야 하는 사관이 알 수 없는 내용도 보이기 때문에 읽을 때 주의를 요하는 기록도 있다.[68] 중종도 나중에 아무리 자기 형이 폭군이었으나 연산군의 성추문에 대해서는 사관이 적었다한들 실제로 목격한 것이 아닌 뜬소문일 뿐이라고 치부하며 끝까지 부인하였으며 몇몇 신하들도 중종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왕이 1만 명의 미인들과 합방을 원하여 백성의 처녀, 의녀, 무당, 비구니, 종, 과부 등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취했다는 얘기도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실제로는 과하게 과장되거나 왜곡될 가능성도 높다고 제기하였다. 임용한 교수를 포함한 일각에서는 실제론 그 기생들 수가 1000명 이상은 되지 않았을 거라고 제기한 바가 있다

또한 미디어에서는 과도한 성관계로 정력이 약해져서[69] 약을 많이 복용했다거나 양기 보충을 위해 정액이 흐르는 것을 멈추게 한다던 잡다한 곤충들을 섭취하기 위해 진상하라고 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정력에 관한 약을 복용하지도 않았고 과도한 성관계로 정력이 약해졌다는 기록과 양기 보충을 위해 정액이 흐르는 증상이 있었다는 기록은 애초에 실록이나 야사 기록에 존재하지 않아 사실이 불분명하다.[70] 왕은 그저 잡다한 곤충들을 진상하라고 명만 내렸을 뿐 섭취하기 위해서인지 아님 다른 용도에 사용하려는지에 대한 진상하라는 여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아 정확한 사실은 불분명하다.[71] [72] 더군다나 왕이 진상하라고 명한 곤충들은 여러 한약재에 쓰이기도 하고[73] 담을 제거하는 데도 유용하게 쓰이는 등 다른 목적으로도 여러 쓰였다. 그리고 뜻밖에도 왕은 진상한 곤충들을 신하들에게 선물을 하사하기도 했으며 이 외에도 중종은 연산군이 사용한 곳을 상세히 알 수 없고, 의원들도 진상할 바도 상세히 알지 못한다고 언급하였다.

앞서 '패륜' 문단에서 설명했지만,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의 누나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왕이 겁탈해 임신시키는 바람에 박씨가 음독 자살했다는 야사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연산군과 중종처럼 당시 왕자들이 10대의 나이에 혼인했고 배우자의 나이도 대개 또래였다는 점, 월산대군 또한 박씨와 결혼할 때의 나이가 13세였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박씨의 나이도 동갑내기이거나 한 살 연상 정도였을 것이다. 즉 연산군일기에서 명시하고 있는 시간을 감안해보면 당시 박씨의 나이는 약 50대 정도로 추정되는데 과연 왕이 50대의 여성에게 혹했을까 하는 의문도 있을 뿐더러 이 나이대의 여성은 대개 아이를 갖기 어려운 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신빙성은 많이 떨어진다.

무엇보다도 정사(正史)에서는 박씨가 그냥 죽었다고 기록되었을 뿐 자살을 했다는 언급은 없다.[74]그저 사람들이 왕과 그렇고 그런 관계로 지내다 애를 갖자 자살했다고 수군거렸다는 후문이 달렸을 뿐이다.[75] 그리고 왕과 박씨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기록은 위의 연산군일기 12년 6월 6일 기사와 중종실록의 박원종 졸기로 이렇게 단 둘뿐이다. 그런데 월산대군 무덤에 긴 쇠막대기를 꽂았을 뿐인데 천둥 치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는 비현실적인 구절에서부터 이 기사의 서술을 신뢰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왕이 박씨와 동침했는데 꿈에 월산대군을 봤다는 부분 역시 사관이 왕의 꿈 속에 들어갔다 나왔거나 왕이 자기 입으로 사관에게 말해줬다는 수준의 명확한 출처가 나오지 않는 이상 실제 사실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박원종졸기에서는 "박원종의 맏누나인 (박씨)는 월산대군 이정의 아내로, 폐주(연산군)가 간통하여 늘 궁중에 있었는데, 폐주가 특별히 원종에게 '숭정(崇政)'이라는 품계로 올려 주니(이를 '가자'라고 한다) 박원종이 분히 여겨 그 누나에게 말하기를 ‘왜 참고 사는가? 약을 마시고 죽으라.[76] 하였다."라고 직접 명시했다. 음독 자살설은 아마도 이 구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박원종에 대한 변호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구절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 외에도 왕의 이복여동생인 휘숙옹주와 간통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이에 대해 대다수의 학자들은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고 논리를 펼쳤다.

결론을 두고 보자면, 왕이 색을 밝힌 것은 사실이나 진위여부에 관해서는 조심스럽다는 이야기다. 당시 연산군일기를 작성한 것은 연산군의 사초를 작성하던 사관, 이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신료들이 왕의 폭정을 부각시키기 위해 과장하고 여러 추문들을 꾸며낼 가능성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산군이 폭군임은 변치 않는다. 해당 항목의 내용들을 전부 차치해도 집권기에 저지른 폭정과 실정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

6. 중종반정과 폭군의 몰락

왕은 갑자사화 이후 끝없이 폭주해서 결국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신하들까지도 숙청하기 시작했고 이유없이 짜증을 내고 협박을 가하였다. 왕의 향락을 어느정도 말리던 박원종서자 출신이기에 왕을 배신할 이유가 없었던 유자광은 언젠가 자기들이 토사구팽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두 사람은 주위 인물들과 반정을 모의하기에 이르렀다. 신하들은 본인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반정에 가담해야 했다.

게다가 경제 상황이 심각해지며 민심이 매우 좋지 못했던 것도 문제였다. 당시 백성들은 신하들처럼 무고하게 끌려나가 잔인하게 죽거나 무덤이 파헤쳐져 뼈가 부숴지는 일은 당하지 않았으나, 공물과 각종 진상품 등을 대느라 허덕이고 있었고 금표 제도 등으로 민심이 크게 흉흉한 상황이었다. 즉 누가 일어서든 백성들은 손쉽게 거기에 동조할듯한 분위기였는데 이에 반정의 주역들이 선수를 치기로 한 것이다.

성희안[77]박원종을 끌여들여 반정을 모의하였고 이후 유자광, 유순정, 신윤무 등도 합세하였다.

여진족 토벌과 이시애의 난 진압 등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유자광과 고위급 무관인 박원종의 반정 합류는 반정 성공에 큰 힘이 되었다.[78] 이들은 조선 왕조 최초로 신하들이 왕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왕위에 올렸다.

일반적으로 조야(朝野)는 중종반정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으나, 그래도 반발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당장 성종 대부터 조정의 고관을 역임하고 중종반정의 공신 중의 하나였고, 당시 '조선 제일의 학식을 갖춘 이'라 칭해지면서 사림 / 훈구 가리지 않고 존경받던 채수는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저술했는데, 여기서는 중종반정을 가열차게 비판하고 있다. 때문에 채수는 탄핵당해 말년에 목이 날아갈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런 정황을 보면,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중종반정에 대해 반발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연산군을 옹호하는 여론이 많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연산군은 이미 그 당시에도 조야를 막론하고 폭군이라는 평이 대세였다. 중종반정에 대해 반발하는 여론은, 연산군 본인에 대한 동정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힘으로 군왕을 폐하는 반정 자체에 대한 반발이었다. 《설공찬전》을 통해 조선 사회에 핵폭탄을 날린 채수만 해도, 왕을 동정했다기보다는 성종의 유신(遺臣)으로서 왕이 폐위당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강했다고 보고 있다. 당장 최측근이자 처남이었던 신수근조차도 왕은 막장이지만 세자 이황이 총명하니 기다리자고 말했을 정도이다.

(王)에서 (君)으로 강등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79]] 유배를 가서 몇 달 만에 그 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야말로 절대 왕권으로 흥청망청 놀고 먹으면서 제멋대로 즐기던 양반이 한순간에 몰락하고 초라한 유배 생활을 해야 하는 본인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의 병, 즉 화병을 얻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중종반정 후 연산군의 어린 자식들도 대부분 사사되거나 비참한 미래를 맞이했다. 이 사실이 연산군에게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었다면 그에 대한 정신적 충격 또한 사망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반정 세력은 명나라에 보내는 조서에 사실대로 적지 않고 연산군이 병으로 동생 중종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희대의 사기를 펼쳤다.
정원이 아뢰기를,
"승습사(承襲使)·사위사(辭位使)가 가지고 갈 사목(事目)을 삼공(三公)·육조(六曹)재상들이 함께 의논하여 마련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유순·김수동·신준·정미수·이손·김감·유자광·권균·성희안·이계남·이집(李諿)·유순정·송일 등을 불러 그들로 하여금 함께 의논하게 하였다.
유순 등이 의계(議啓)하기를,
1. 폐왕은 ‘전왕(前王)’이라 칭한다.
2. 만약 전하가 전왕의 모제(母弟)인가 여부를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한다.
3. 만약 전왕의 소재처를 물으면, 별궁에 있다고 대답한다.
4. 만약 전왕의 병 증세를 물으면, 어릴 때부터 풍현증(風眩症)이 있었는데, 세자가 죽은 뒤 애통과 상심이 정도를 지나쳐서 전의 증세가 다시 도져 심신이 안정되지 못하며, 공연히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흔미하고 현기증이 나며 방안에 깊이 거처하면서 창문도 열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5. 만약 세자의 병 증세를 물으면, 창진(瘡疹)으로 요사(夭死)하였다고 대답한다.
6. 만약 전하가 왕비를 책봉했는가 여부를 물으면 전하가 잠저 때 부인이 병으로 죽었는데 아직 왕비를 들이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7. 만약 전하의 춘추를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한다.
8. 만약 강정왕(康靖王)의 아들이 몇이냐고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한다.
9. 만약 전왕의 아들이 몇 사람이냐고 물으면, 다만 딸 하나가 있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대답한다.
이로써 의논하여 아룁니다."
하니, 윤하(允下)하였다.
중종 1년 9월 21일

그 직후 연산군이 급사했기에 독살설이 나돈 것이다. 가끔씩 명나라 사신들이 왕에게 문안을 드리고 싶다고 요청하여 조선 조정이 발칵 뒤집히는 일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왕이 사람 기척만 들려도 발작을 해서 도무지 뵐 수 없다고 사기를 쳤다. 다만, 하다못해 조선에 오가는 상인 몇 명한테 알아보라고 시켜도 왕이 반정으로 쫓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조선 팔도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가 알고도 모른 척 해준 거라는 주장도 있다.[80]

중종은 끝까지 연산군이 살아있다고 하기로 했는지, 연산군이 세상을 떠난 지 장장 30년이나 지난 중종 30년에도, 사신이 오면 폐왕이 지금은 창덕궁에 있다고 말해야 하냐는 기록이 나온다. 연산군이 쫓겨난 것은 그렇다치고 죽고난 다음에는 죽었다고 통보를 하는 것이 옳은데 하필 연산군이 교동으로 간지 얼마 안되어 금방 죽어버리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 실록에도 이를 지적하는 내용이 있다.

일단 중국의 실록인 명사(明史)엔 이렇게 적혀 있다.
정덕(正德) 2년 융(㦕)이 세자 황(𩔇)이 어린 나이로 죽은 것을[81] 몹시 슬퍼하다가 병을 얻었으므로 국사를 아우인 이역(李懌, 중종의 휘)에게 넘겨주겠다고 주청해 왔고, 그 나라 사람들 역시 이역을 왕으로 봉하여 주기를 주청해 왔다.

예부에서 이를 의논하여 역에게 국사만을 맡게 하고, 융이 졸하기를 기다렸다가 국왕으로 봉해주기로 하였다. 앞서 배신(陪臣)[82] 노공필(盧公弼) 등이 조공하기 위해 수도(경사 / 京師)에 와서 역을 봉해주기를 거듭 주청하였었는데 조정의 의논으로 윤허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12월에 융의 대비(母妃)가 "역은 나이도 들었고 현명하니 중임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주하였다.

이에 예부에서, “융은 고질병(痼疾)으로 왕위를 사퇴하였고, 역은 친동생으로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 이미 명백한 사실이니, 우애를 지키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그 나라의 모든 신민들도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들의 청원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황제는 이에 융의 선위를 윤허하고, 내관을 파견하여 국왕 책봉의 칙명과 아울러 그 비 윤씨(장경왕후)의 고명을 내렸다.
명사》 권320, 열전제208 外國一 朝鮮

파일:연산군묘.jpg
연산군의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폐위된 군주라서, 능의 형식이 아니라 그냥 조촐한 묘로 되어있다. 살아서는 최강의 권력을 누렸지만, 죽어서는 가장 초라한 묘에 안장된 셈이다. 자세한 사항은 연산군묘 문서를 참조.

조선 왕조 최초로 폭군으로 전락하여 폐위된 임금이었기 때문에 재위를 했던 임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묘 신위 명단에서도 제외되어 모셔지지 않았다. 결국 광해군과 함께 종묘 신위 명단에서 제외되어 종묘에도 모셔지지 못한 두 명 뿐인 임금으로 남았다.

폐위되면서 왕자 시절 봉호로 격하된 광해군과 달리 연산군은 원자왕세자의 정통을 밟아 왕위에 오른 경우이므로, 폐위 이전까지는 연산군이라는 호칭 자체가 없었고 폐위된 이후에야 연산군으로 봉해진다. 간혹 사극에서 폐위되기도 전에 연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고증 오류이다.

6.1. 독살 의혹

실록에 연산군이 유배지에서 11월에 역질에 걸려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고 나오지만, 당시 역질이 전염병으로 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배되어 있었던 연산군을 보필하고 함께 연산군의 의중을 들었던 나인들과 유배지를 지키고 있었던 군졸들 중 의아하게도 한 명이라도 전염됐었다던가 하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독살 의혹도 제기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연산군이 아프다는 이야기가 거의 다 죽어가기 직전 무렵에 올라온 것을 두고 독살설 의혹을 제기한 바 있으며 몇몇 역사학자들도 독살설을 제기한 바 있다.

다만 재위 후반부터 왕은 거대한 궁궐에서 유희를 일삼으며 황음에 빠지다가 반정으로 하루아침에 유배를 간 정신적 충격과 좁은 곳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하는 등의 급격히 생활 환경이 바뀌어서, 이전 같지 못한 영양공급과 합병증으로 급사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다. 병세에 대해 뒤늦게 언급된 것도 그저 연산군이 폭군으로 찍혀서 주변의 무시를 당하다 보니 그런 것이었을 수도 있고 말이다.

결국 연산군이 독살인지 아닌지는 역사의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겠다.

6.2. 큰어머니 승평부대부인(월산대군의 정실)과의 관계

(폐비 신씨와 자식들을 제외한) 가족과 종친, 신하들을 통틀어서 왕이 패륜을 저지르지 않고 잘 대해준 몇 안 되는 사람은 큰아버지 월산대군, 큰어머니 승평부대부인 박씨, 또 당숙 (아버지 성종의 사촌) 제안대군 뿐이었다. 왕은 친할머니인 인수대비, 양어머니인 자순대비, 이복동생 진성대군에게조차 형식적으로만 대해줬을 뿐 정을 주거나 친하지 않았지만 위의 세 사람에게만은 패륜은 커녕 오히려 각종 특혜를 주며 예우해 줬다. 그외에도 박원종은 직접적인 인척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승평부대부인의 남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젊은 나이에 높은 벼슬로 여러번 승진하며 승승장구했다.

중종반정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는, 왕이 월산대군의 부인 승평부대부인 박씨(큰어머니)를 범해 아이를 잉태하게 하여 그녀가 자살했다는 사건은 진짜 일어난 사건일 가능성이 낮다고 한다. 왕의 온갖 패드립을 다 적어놓은 연산군일기에서도 박씨가 그냥 죽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다만 사람들이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라고 덧붙여 놨다. 당시에도 일종의 카더라 취급을 받은 이야기였던 듯하다. 아무튼 박씨가 왕과 그렇고 그래서 임신한 것을 치욕스럽게 여겨 자살했다는 야사는 관련 문헌들에서만 전해 내려올 뿐 실제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월산대군의 정실 승평부대부인 박씨는 박원종의 첫째 누님이며, 사망 때도 51세로 당시 시대상 할머니뻘 고령이었다. 애초에 그 나이에 임신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남편인 월산대군과 금슬이 좋았음에도 평생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었다. 월산대군의 외아들인 덕풍군은 박씨의 소생이 아니라 대군의 측실인 원주 김씨 소생의 서자이다. 지위뿐만 아니라 나이로도 박씨가 왕의 어머니뻘이라는 걸 생각해보자면, 아무리 왕이 막장이었다고 해도 왕실의 어른인 대비가 3명이나 있는 상황에서 큰어머니를 범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게다가 박씨가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외지에 나가 있던 박원종을 급히 불러다가 간호하게 했는데 왕이 정말 박씨를 능욕했다면 일부러 박원종을 부를 이유가 없다.

따라서 왕이 큰어머니 박씨를 예우하며 이것저것 신경을 써준 것 뿐인데, 이걸 황색 선전한 것이 큰어머니 능욕으로 발전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연산군은 어릴 때 친어머니 폐비 윤씨와 헤어진데다 잔병치레가 많아 주로 월산대군의 사가에 맡겨져 자랐고, 성품이 자상하고 온화했던 월산대군 부부는 연산군을 친자식처럼 따뜻하게 돌봐줬다고 한다. 특히 박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기에 시조카인 연산군을 더욱 각별히 돌봐주었다. 덕분에 왕도 아버지 성종과 계모 정현왕후보다 월산대군 부부를 더 따라서 즉위 후에는 아예 박씨에게 대비에 준하는 대우를 할 정도였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왕이 승평부대부인에게 매년 곡식과 면포 등의 수많은 물품들을 하사해서 대간들이 부부인에겐 지나친 대우라며 왕에게 여러번 간언해도 왕은 한때의 은혜에서 그런 것이라고 대꾸했다.

또한 왕은 승평부대부인뿐만 아니라 월산대군의 외아들인 사촌 덕풍군에게도 많은 물품들을 하사하였다. 덕풍군은 월산대군의 측실(원주 김씨)가 낳은 서자였지만 정실부인 박씨가 아이를 낳지 못해서 왕은 덕풍군을 월산대군의 적자로 인정해주고 덕풍군으로 봉하며 종친부의 정2품 승헌대부로 직급을 올려주기까지 했다. 아버지인 성종도 평생 친형인 월산대군과 형수인 승평부대부인을 각별히 대하며 은혜를 자주 베풀었는데, 연산군도 이런 성종의 행동을 보고 답습했을 가능성도 있다. 왕이 아예 자신의 적장남인 폐세자 이황을 승평부대부인의 집에서 양육하게 한 것은 그만큼 박씨를 매우 신뢰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그녀가 초파일 때 다른 사대부 여인들과 함께 집에서 관등 행사를 하는 등 불교를 가까이 하자 신하들이 숭유억불에 따라 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왕이 월산대군의 부인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며 거절한 적도 있었다. 또한 박씨의 원래 작위는 승평부부인이었는데 중간에 대자를 더 붙여, 승평부대부인이라 높여주고 도장까지 만들어 주었다.

박원종이 사실 왕이 예우했던 누나 덕으로 출세한 면도 없지 않은 것을 보면 박씨 부인의 명예를 위해 반정까지 일으켰을 가능성은 그렇게 높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박원종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 왕과 누님의 친밀한 관계를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래놓고는 반정을 일으켰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실상은 정세는 몹시 악화되어 민심도 좋지 않은 상황인데 왕의 폭정은 날로 심해져 신료들에게마저 이유없는 협박과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박원종은 왕의 포악한 행동에 점점 토사구팽의 위협을 느꼈고, 결국 반정에 도모할 생각까지 이어져 당하기 전에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다만 왕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성관계를 강요하는 정신 나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고작 '사이가 좋은 정도'로 저런 소문이 나돌 리가 없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왕은 그냥 눈에 띄는 여자는 기분 내키는 대로 범하는 행태를 보였는데 이걸 미디어에서 제대로 묘사하면 사극이 아니라 아예 AV가 될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까이 지내는 여성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이 누가 되었건 왕과 성추문이 나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신봉승이 저술한 소설판 《조선왕조 500년》에선 이런 야사를 사실로 받아들여서 박씨와 연산군 간의 성행위 묘사를 상세히 해놓았다. 원래 야사이기도 하고 이 소설에서는 연산군 연간에 박씨의 나이가 30대 후반이라고 하는 오류도 있는 등 그냥 소설적 각색으로 보는 게 좋다.

어쨌든 왕과 승평부대부인 박씨의 관계는 남녀 관계라기 보다는 큰어머니와 조카의 지극한 가족애라고 보인다. 그냥 왕의 여색을 탐하던 막장 행실 탓에 이상한 추문이 나돌았던 것 뿐.

6.3. 자신의 최후를 미리 예측했던 폭군

반정이 일어나기 10일 전 후원에서 잔치를 벌이던 중에 연산군이 초금을 불며 “인생은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人生如草露會合不多時).”이라며 읊기를 마치고 눈물을 흘렸는데 장녹수와 전비도 왕을 따라 눈물을 흘렸다. 이에 왕은 장녹수와 전비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의 변이 있겠느냐만은, 만일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는 필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위로하며 물건을 하사하였다.

즉, 왕은 자신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반란이 일어나서 자신이 쫓겨나 폐위 당할 것을 가능성을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그런 상황이 된다면 장녹수와 전비가 몰살당할 미래 또한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크게 놀라 당황했지만, 후일의 광해군과 달리 도주하려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오히려 반정 세력이 옥새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내 죄가 중하여 이리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여라.”라며 순순히 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저항하거나 자기 죄를 변명하려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유배로 교동에 안치될 때도 띠를 두르지 않은 점잖은 차림새로 나와 "내가 죄가 큰데 상(중종)의 덕을 입어 무사히 간다."라며 가마에 올랐다고 명시되어 있기도 하다. 흔히 사극에서는 왕이 마지막까지 현실 부정하며 발광을 했던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이를 보면 연산군은 폭군이긴 했지만 여러 사극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의외로 단순히 권력욕에 미쳐 날뛴 미치광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스스로 잘못된 길로 빠지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끝끝내 폭주해 버린 인물일 가능성 또한 꽤 충분히 존재한다.[83][84] 폭군은 폭군인데, 스스로가 폭군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있던 특이한 케이스. 재위 전반 10년에 달하는 기간동안은 정상적인 임금 노릇을 했던 군주인 만큼[85], 과거와 비교했을 때 밑바닥까지 추락한 행실의 낙차를 인지하기에 어렵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 연산군 일기 총서에 '以成化丙申十一月初七日丁未生.' 병신년 11월 7일 정미생이라고 나와있는데, 이 음력 날짜를 실제 만세력으로 계산해보면 이때의 11월 7일은 정미일이 맞으나,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양력 12월 2일임에도, 위키백과를 살펴보면 무슨 이유인지 11월 23일이라 되어 있다. 하지만 과거 인물의 음력 생몰년에 대한 양력 변환은 다른 나라 역사와의 대조를 위한 것이므로, 당시 사용하던 역법에 따르는 것이 옳다. 1476년은 그레고리력이 생겨나기도 전이고 서양에서는 대부분 율리우스력을 쓰고 있었으므로, 당시의 율리우스력에 따른 11월 23일로 기재하였다는 것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2] 조선의 역대 왕들 중 적장자 출신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으로 총 7명이다.[3] 이전까지 양녕대군, 문종, 덕종 같은 국왕의 적장자들은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가에서 나고 자랐다.[4] 원손으로 태어난 단종은 당시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된 상태였고 연산군의 당숙인 인성대군제안대군 역시 원손으로 태어났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5] 왕세자 시절 때까지만 해도 매우 정상적이었다.[6] 할머니이자 덕종의 정비인 인수대왕대비(소혜왕후) 한씨, 작은할머니이자 예종의 계비 인혜대왕대비(안순왕후) 한씨, 계모이자 성종의 계비 자순왕대비(정현왕후) 윤씨.[7] 사실 이 나이 타령도 단순 핑계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50대 후반으로 환갑이 얼마 안 남은 상태였다. 그리고 일생 대부분을 무인으로 보냈던 만큼 성향이 안 맞기도 했을 테고.[8] 태종은 조선의 역대 왕 중 유일하게 (고려의) 과거 제도 급제 경력이 있는 왕이었기에 학식이 뛰어났다. 당대 과거시험의 난이도가 현대로 치면 어지간한 고등고시 수준도 아득히 뛰어넘을 만큼 엄청난 난이도의 시험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로 대단한 엘리트였다고 할 수 있다.[9] 이때 경연을 폐지시켜 버린 사유가 "내가 나이 30살 넘어서 배울 만큼 배웠는데 뭔 놈의 공부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세종은 40대 초반까지 20년간 성실하게 참여했고 그만둔 사유도 건강 문제였다. 다만 이건 세종이 대단한 경우로 봐야 한다.[10]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세조가 아버지과 비교되면서 폄하당하는 경향이 있고, 실제로 아버지에 비하면 (정통성 문제와 별개로 능력만으로 따져봐도) 많이 손색이 있는 군주였던 것이 사실이나, 그렇다고 결코 무능한 자는 아니었다. 당장 그가 세종 시절 참여했던 일들의 수준(훈민정음)만 봐도 결코 학식이 낮거나 능력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조가 경연을 폐지했다고 배움을 천시한 것은 아니라서 자신은 경연을 폐지했지만 신하들에게는 꾸준히 배울 것을 권하며 문신은 물론 무신들에게도 배울 것을 권했는데 본인은 문무겸비를 최상으로 보았는지 문신이라고 글공부만 하면 약해 빠져서 얻다 쓰고 무신이라고 글공부 안 하면 금수와 뭐가 다르냐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경연은 폐지했어도 세자교육인 서연은 그대로 유지했다.[11] 광해군은 전설급으로 안 해서 연산군도 한 횟수는 5백 건이 넘는데 이쪽은 10여 건 정도.(!)[12] 다시 말해 경연은 오늘날로 말하면 왕의 개인교습 시간이자 국정 평가 기능까지 존재했으니, 왕의 입장에선 귀찮게 나가고 싶지 않은 곳이긴 하다.[13] 당장에 경연이 국무회의의 역할만을 했다면 세조는 국무회의 자리를 폐쇄했다는건데 세조가 아무리 평가가 나빠도 나랏일을 내다버리고 논 군주는 아니었다.[14] 세자 시절 연산군은 경서 등 학문을 배우는 것을 싫어하였고 자주 빼먹기 일쑤여서 부왕에게 잦은 꾸중을 들었고 문리를 통하지 못하여 학문의 진도를 한 단계 진도를 늦추면서 배워 성종이 매우 걱정하였는데 의아하게도 즉위 이후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신하들과 논쟁할 때 여러 경서와 경전을 적절히 잘 활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신하들에게 지지않는 납득되는 논리와 말빨력을 뽐내는 모습을 많이 엿볼 수 있다. 이를 볼 때 아마 연산군은 머리가 늦게 트이는 케이스였던 것 같다.[15] 연산군일기 연산 3년 3월 9일 신해 3번째기사.[16] 간관이라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이때 간한 박한주는 1년 뒤인 무오사화 때 실각하여 갑자사화 때 처형당한다.[17]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국가가 백성에게 중이 되는 것을 금하여, 그 도첩(度牒)이 없는 자는 모든 고을로 하여금 조사해 내서 공역(公役)에 배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중이 되는 것은 어찌 산간의 거친 밥과 나물국을 즐겨서이랴. 오로지 국가가 인정(人丁)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색하여 비록 한 집안에 서너명의 인정(人丁)이 있더라도 다 군적(軍籍)에 기록하므로 집안에는 남은 장정이 없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생계의 이익이 적으므로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여름철에 더웁거나 비가 많이 와도 소민(小民)은 원망하고, 겨울철에 추워도 소민은 역시 원망하는 법이니, 백성을 다루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 어려운 점을 미루어 평이한 길을 찾아내야 백성이 편안하다.’하였으니, 지금 백성으로 하여금 남은 장정을 가지고서 농사에 전력하게 하여 생계를 넉넉하게 만들어 주자면 어떤 길이 있겠는가?" 하매, (연산 2년 1월 3일)[18] 조정에서 승려들에게 발부한 면허증. 현대로 치면 자격증으로, 도첩이 없는 승려는 야매라는 뜻이므로 국가가 불교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도첩제는 고려 말기의 부패한 들을 목격한 태조 때 도입하였으나, 성리학의 화신 성종 때에는 아예 도첩제를 폐지해버렸다. 즉, 승려를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이후 절들은 산속으로 들어간다.[19] 다만 여기서 초계군수인 자와 그 첩이 입을 맞추기 위해 언문으로 작성된 편지를 나누었는데, 이를 구실로 후일 왕이 능상(陵上, 왕을 능멸하는 행위)이라 하여 언문 사용을 금지하는 사유 중 하나로 작용한다.[20] 세종 때 유명해졌는데, 장래가 유망하지만 나이가 어리거나 젊은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 등에서 학문을 닦게 해 주는 제도.[21] 북송휘종 같은 사례도 있으니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그의 사례는 그가 역사에 길이 남을 암군인 것이 문제이지 취미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인이 이해하기 편하게 설명하자면, 옆동네 아무개가 현질가챠에 미쳐 인생을 조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자기 할일 다 하고 게임 좀 하면서 놀겠다는것을 덮어놓고 이런 거 하면 인생 망한다면서 무조건 못하게 하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일까? 그 외에도 취미에 맛들려 나라를 망친 왕들은 많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따지면 취미에 맛들리지 않고서도 나라 말아먹은 왕은 많고, 취미를 즐기면서도 나라 안 망친 왕도 많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나라를 망친 모든 왕들은 숨을 쉬고 음식도 먹었으니 모름지기 왕이라면 숨쉬지 말고 밥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나 다름이 없다. 물론 성종이 예술적 기질에 미쳐 국정을 등한시했다거나 화석강과 같은 사치로 국고를 말아먹었다면 당연히 취미를 자제하고 국정을 살피라는 간언이 필요했겠지만, 정작 성종은 조선 전기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왕이니 자기 할 일은 하면서 적당히 취미를 즐겼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애초에 휘종 자체가 (후술된 것처럼) 대간 말을 지나칠 정도로 잘 들어주던 성종의 성격을 약점삼아 왕을 억지로 갈궈보기 위해 가져다붙인 핑곗거리인데, 현대인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송휘종과 같은 사례도 있으니~ 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다.[22] 성종실록 성종 16년 윤4월 13일 계사 1번째기사.[23] 구리가 귀해진 것도 있지만, 그때는 구리가 어느 정도 생산되고 있었고, 예전부터 궁궐에 구리로 관을 쓰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24] 돌로 고쳐지었는데 비용이 더 들었다고 한다.[25] 성종실록 성종 25년 10월 9일 갑자 3번째기사[26] 대간들이 이렇게까지 밀어붙인 이유는 진심어린 조언보다는 결국 왕에게 자신을 돋보이려는 개인적 욕망이 앞서서였고, 결국 간언의 본질이 바뀐 안 좋은 케이스가 되었다. 아무리 수위가 센 간언을 해도 왕은 벌주지 않고 결국 간언을 따랐으니 대간 생각으로는 '왕이 벌주지 않으니 아무런 걱정도 없다. 이럴수록 더 세게 나가서 나를 더욱더 어필해야지!'라는 잘못된 생각이 결국 사화를 부른 탓도 있다.[27] 유교 사회에서 충효보다 강한 명분은 없다. 유교에서 군사부일체를 주장하면서도, 임금이 걸왕이나 주왕과 같은 폭군이면 신하가 탕왕이나 무왕의 일을 행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폭군이나 암군에 대한 저항이나 반란은 인정했다. 그러나 유교의 그 어떤 부분에서도 부모에 대한 패륜과 불효를 정당화하는 대목은 없다. 대표적으로 신하가 부모상을 당한 경우 3년상 기간 동안은 상례를 방해한다면 왕의 명령이라도 거부할 수 있었다. 물론 임금이 애원하다시피 계속 명령하며 제발 나와달라고 하면 예의상 나가 주기는 했다. 대표적으로 칠천량 해전 직후 모친상을 당하고도 선조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하소연을 듣고 나서 즉시 명량 해전에 출전한 이순신.[28] 사실 연산군의 입장에서 보면 그로서는 옥사의 크기를 조절할 만한 억제장치(사람으로든 자신의 덕성으로든)가 별로 없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태생부터 후계자로 태어난 그는 수성의 어려움은 모르고 단지 명민한 머리로 왕의 권력을 극대화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만 일관했던 것이다.[29] 각각 훈구와 사림이라 하나 훈구 공신 가문 내에서도 대간인 이들이 같은 대신에 있는 훈구 세력을 탄핵한걸 보면 훈구와 사림보다는 대간과 대신의 싸움이 사화라고 보는게 옳다. 물론 양쪽 세력의 주축에 특정 파벌이 있기는 했다.[30] 당시 이극돈은 훈구파가 아니었고 유자광은 훈구파에 끼워넣을 수는 있는데 훈구파 하면 생각할 '기존 정치 권력'이라는 이미지와는 차이가 컸다.[31] 재밌는 것은 김종직이 관직에 나아간 시절이 바로 세조 때였다는 것이다. 성리학적 사고 방식으로는 왕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직접 개기거나 벼슬을 거부하고 초야에 묻혀 살아야 하는데 세조 아래에서 벼슬은 벼슬대로 하고 조의제문을 지은 것이다. 그래서 후대에 허균이 김종직을 위선적이라고 비판했다.[32] 애초에 왕은 김일손 일과 김종직 일을 삼사에 연결시켜 처벌하고자 했었다.[33] 허나 이는 왕을 탓하기보다는 이런 유교적 유산을 남용한 대간의 잘못이 크다. 연산군이 처음부터 폭군의 자질이 있었는지 아니면 숙청을 적당히 하거나, 아무리 심해도 태종과 세조 수준으로 하고 말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초기에는 꽤나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면 성종의 묘호를 두고 대간이나 유생을 벌하기도 하면서도, 대간들이 괜히 트집잡았을 때 화가 나면서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했기에 일단 표면상으로 놓고 보면 대간이 잘못했다. 대간의 임무가 비판인 것은 맞지만 성종 말기에 그들은 건전한 비판이 아니라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즉, 누가 되었건 대간의 지나친 행보를 막을 사람은 필요했다. 하다못해 후대인 선조 초의 대간조차 저정도는 아니었던 걸 감안하면 이들이 얼마나 막나갔는지 알 수 있다.[34] 덤으로 왕이 슬슬 헤이해지기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대신들이 이를 비판하고 있었다. 물론 대신들 입장에서는 충심을 담은 비판이고 실제로도 그런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왕에게는 그 비판조차도 능멸로 여겨졌을 것이다.[35] 폐비 윤씨도 마냥 억울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든 죄는 폐비로 끝났고 사사는 다른 이유에 있었다.[36] '금삼의 피'라고도 불리는 폐비의 피 묻은 적삼. 야사(기묘록, 파수편)에 따르면 폐비가 사약 먹고 죽을 적에 흰 적삼에 피를 토하고 이를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건네며 훗날 원자에게 전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야사에선 왕이 폐비 사사(賜死, 죄인에게 사약을 먹여 죽이는것)에 대해 알게 된 원인이 자기 어머니의 피 묻은 적삼이라고 말하지만 실록에선 아니다. 다만 실록에서도 연산군이 즉위 후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폐위(廢位)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水剌)를 들지 않았다' 라는 말은 있다.[37] 따지고 보면 이쪽이 훨씬 더 공포스럽다. 공포스러운 분위기 조성에 기어코 죽은 조모를 기록말살형 유사하게 조치한 것이다.[38] 왕의 식사가 얼마나 중요하냐면, 중대 단위의 인력이 투입될 정도였다. 게다가 왕이 굶어서 건강이라도 나빠지면... 유교적으로 보면 왕의 심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이 신하들로서는 당연한 도리이자 충성의 척도였고, 현실적으로 접근해도 최고 권력자가 앓아누으면 국정이 마비되거나 혼란이 올 수 있었다. 더군다나 시위 형식의 단식 투쟁일 경우 신하들에게 '니들이 이러이러하니까 내가 나라 앞날이 걱정돼서 밥이 안 넘어가서 굶는 거임'하는 식의 명분을 직간접적으로 알리므로, 원인 제공자로 지목당한 신하(들)는 역적으로 몰리기 싫다면 무조건 엎드리며 제발 식사 좀 하시라고 빌 수밖에 없었다. 여담으로,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고 맞이한 첫날 아침 식사가 물에 만 밥 한 그릇이 전부임이 기록되어 있는데, 왕이 식사를 거르거나 간소하게 먹은 걸 괜히 기록한 게 아니다. 이성계는 딱히 시위 목적으로 저렇게 먹은 게 아닌데도 그렇다.[39] 단순한 계모가 아니다. 어머니가 정실적자 기준으로 계모는 아버지가 들인 새 정실 부인을 말하는 것이지만 서모는 을 말한다. 즉 아버지의 정실이건 첩이건 간에 일단은 어머니로서의 예를 다해야 하는 것. 이걸 굳이 지적하는 이유는 문제의 두 귀인들은 일단 부왕 성종의 첩이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패륜이 아니라는 식으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40] 연산군일기 52권(10년 3월 20일)에 의하면, 안양군은 사방이 어두워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매질했고, 봉안군은 어떻게 했는지 눈치를 채고, 차마 매질하지 못했다고 한다.[41] 조선시대 왕들을 보면 아무리 암군이라 할 지라도 왕들은 나름대로 애민의식 정도는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왕이라도 있으니 나라가 어려워도 대부분의 여론은 "우리 임금님은 좋은 분인데 옆에 있는 간신들/위에 있는 수령들이 문제" 라고 여기며 왕조교체까지는 논하지 않게 된다. 물론 후기에 이르면 왕조교체를 노리고 역모를 도모하는 이들도 생기긴 하지만 임술농민봉기에서 어느 누구도 역성혁명에 나서지는 않은데서 보듯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로써 왕이라도 애민정신을 보여준 효과는 컸다.[4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이 가설을 택했다.[43] 애초에 성종이 사슴을 제아무리 잘 길렀더라도 연산군이 즉위할 때쯤이면 이미 죽고도 남는다. 사슴은 5~7년 이상 살기 어렵다. 사육 상태에서 10년을 산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건 현대 의료기술이 뒷받쳐 주기 때문이고, 당시에는 자연수명을 넘기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44] 백부의 부인이니 연산군에게는 혈연상으로 큰어머니이다.[45] 허나 연산군의 왕권이 약했다기 보다는 성종이 밀어준 대간의 세력이 비정상적으로 컸다. 실제 연산군의 왕권은 폐비의 자식이긴 해도 정통성은 확실했기에 숙종을 제외한 후대의 왕들보다 훨씬 강했다. 이 정통성이 왕의 폭정에도 다들 찍소리도 못했던 이유중에 하나이기도 했다.[46] 실록을 보면 대간에게 시달린 대상은 왕뿐만 아니라 대신들도 있었기에 재상들과 육조 판서까지 왕의 대간 숙청에 동참했다. 사실 성종 말 - 연산군 초 막나가는 대간의 행태는 정도를 한참 벗어났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여서, 왕이 대간만 적당히 제압하고 즉위 초기의 모습을 견지했다면 현재의 평가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 무오사화만 해도 김종직과 김일손이 세조 이후 조선 왕실의 정통성을 직접적으로 부정한 사건이라 이 사화만큼은 폭정이라고 하기 애매하다. 오히려 당시 왕실의 정통성을 카더라 통신까지 실록에 적어가며 부정한 김일손을 생각해 보면 되려 왕실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처벌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무오사화 이후에 왕이 대간들과 사림들을 적당히 눌러놓은 선에서 만족하고 즉위 초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면 17세기 유럽의 절대군주 정도로 평가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47] 사실 윤씨 자체가 인격이 좋지 않았다. 성종 10년 왕과 대비, 자성대왕대비(정희왕후) 윤씨가 각기 윤씨를 폐비한 이유를 밝히는데 주술, 독, 모함, 폭언, 거짓말, 직무유기(?)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몇가지는 철거지악을 굳이 꺼내도 되지 않아도 될 충분한 폐위 근거였다. 이런 사람이 어찌 좋은 어머니가 되겠는가?[48] 차라리 남당의 마지막 군주 이욱처럼 그저 단순히 놀고먹기만 했다면(여기에는 이걸 위해 휘종처럼 백성들에게 과도한 징세나 폭정을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암군으로만 평가받을지언정 이렇게 미움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이욱은 그래도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옛 남당의 백성들이 슬퍼하기라도 했다.[49] 민낯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으며 자색은 분칠로 바뀐 것이니, 어찌 분칠한 것을 참 자색이라 할 수 있겠냐는 발언까지 하였다.[50] 유부녀 같은 경우는 중간에 잉태하는 일들이 잦아 잉태 금지법을 세웠으며 남편을 만나는 경우 그 남편과 함께 국문을 당하였다.[51] 실제 기록에는 "동모형제"(어머니가 같은 형제)라는 표현으로 기록하였다. 여자인데 형제라고 쓰는 이유는 당시는 자매라는 표현보다 형제를 더 많이 썼고, 형제가 성별과 상관없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처형이나 처제라는 표현이 현대까지 남아있는데, 여자인데도 형제를 쓴다. 오히려 자매는 "남자"의 누나와 여동생을 칭할때 썼다. 즉 맥락으로 추가설명이 없으면, 여자의 형은 여자고, 남자의 형은 남자고, 여자의 제는 여자이고, 남자의 제는 남자이며, 그게 아닐때만 자(누나), 매(여동생) 같은 다른 한자를 썼다. 여자의 오빠나 남동생이라면 대부분 娚(남)을 조선왕조실록 기준으로 썼고, 오빠는 다 남이 맞았는데, 남자라는 추가적인 설명('그 사람 부인이 누구다'라고 나온다거나 '누구의 아비'라고 나온다거나)이 있을때 여자의 남동생에 "제"를 쓴 예외적 기록도 있긴 있다.[52] 인수대비 사망 전 기사가 연화대를 참관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53] 3.1 운동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54] 야사에는, 왕의 분노에도 눈물로 간언을 계속하는 김처선에게, 왕은 활을 가져오게 하여, 손수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가 꽤나 유명하다. 자세한 건 김처선 문서 참고.[55] 왕이 제일 좋아했던 춤이며, 공교롭게도 김처선을 죽인 그 상황에서조차 처용무를 즐기고 있었다.[56] 경기도에 지나치게 금산이 설치되자 충청도 땅인 안성시평택시땅을 경기도에 덧붙여서 쇼부를 본 것도 이때에 있었던 일[57] 사슴의 혀로 만든 요리를 좋아했다고 한다. 사실 혀는 목구멍 안쪽까지 늘어져 있어서 생각보다 길다. 소 혀 구이 먹어보면 알겠지만 1마리만 해도 그럭저럭 꽤 양이 나온다. 물론 혼자만 먹을 건 아니고 당연히 잔치에 참가한 인원이 다 맛보려면 꽤 많은 사슴을 잡아야 하기는 했을 것이다.[58] 중국 5대10국시대의 정치인 풍도(馮道)의 설시(舌詩)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내용은 풍도 문서 참조.[59] 이것을 보면 왕이 신하들을 얼마나 막 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 현명한 이를 존대하는 것은 대학(경전)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유교의 중요한 가르침이다.[60] 종종 조선시대 양반들은 계속 한자를 썼으니 훈민정음을 천시했을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양반들도 정음의 본래 뜻대로 음을 달아서 공부하다가 정음 없이 한자 읽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은근히 쓰기도 했거니와, 그게 아니라도 선대왕의 행적이고, 또한 애민정신이라는 창제취지도 유교사상에 부합했기 때문에 실용성이든 유교 관점 때문이든 충성 문제 때문이든 대놓고 비하 발언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세간에 훈민정음의 비하어로 알려진 언문이나 암클은 실제로는 훈민정음을 비하하는 단어가 아니였다는 설이 강한 지지를 받고 있다.[61] 그리고 훈민정음에 대한 조선왕조의 공식입장은 '하늘이 내리신 대왕께서 인간으로서는 범접하기 어려운 지혜로 백성들을 위해 만드신 성스러운 문자' 였다.[62] 부왕의 형인 월산대군의 부인. 그러니까 왕의 큰어머니이다. 중종반정을 이끈 핵심 인물인 박원종의 누나이기도 하다.[63] 중종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이모로 어릴적 생모를 잃은 윤씨를 월산대군 사저에 데려와 직접 양육했다.[64] 쉽게 말해 궁에 들이기 전에 세자를 보살피게하다가, 세자가 커서 경복궁에서 살게 되자 세자를 돌보라는 핑계로 궁에 들여왔다는 소리다.[65] 야사에서는 강간당하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고 되어 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이다. 그 재취 부인 박씨를 세자를 보호한다고 핑계대고 궁중에 불러들여 강제로 더럽히고는 그 관복을 특별히 높이고, 은으로 도장을 만들어 비빈의 계급으로 대우하게 하고 또 사은하게 하니, 박씨가 부끄러워서 스스로 죽었다. ㅡ 《동각잡기》 본조선원보록 2"[66] 사실 당시의 박씨는 51세로, 간통하기에는 너무 나이도 많았던 데다, 남편 월산대군의 요절 후 절까지 지어가며 슬퍼할 정도로 부부간 금슬도 좋았으므로 이는 불교적인 색채를 왕실에 들여오며 유학자들과 척을 져 사관에게 밉보인 결과에 따른 루머에 가깝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몰락 문단과 월산대군 항목 참조.[67]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이런 상황이 조용히 숨죽이던 신하들까지 등돌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패널인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고, 참석하면 아내가 왕에게 범해지는 불상사가 벌어지고, 결과적으로 숨죽이고 있던 신하들도 서서히 연산군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자기가 당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내 아내가 모욕을 당하면 참을 수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자고로 치정살인의 상당수가 오쟁이진 남편들의 복수혈극이다. 일단 눈 뒤집어진 남편들에게는 사형이고 뭐고 먹힐 턱이 없다. 게다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 이전까지 아내를 빼앗긴 남자가 복수를 포기하는 것은 사회적 매장은 기본에 바보 취급이 옵션이었으니, 인간 취급 받으면서 사형당할지 밸도 없는 겁쟁이로 살아갈지 양자택일인 셈이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연산군 폐출에 가담한 이들은 그나마 명예라도 찾았지만 이때까지도 들고 일어나지 못한 오쟁이 남편들은 중종 즉위 이후에도 경멸당했다.[68] 글을 쓰는 사관 자신의 주관이 개입될 수 밖에 없고, 실록에 있는 기록이라고 해서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록에도 그런 소문들, 카더라가 도는데 이를 관료들도 확실히 검증을 하지 못하며 소문을 집어 넣는 경우가 종종 있고 연산군일기는 이런 삽입이 고의적으로 보일 정도로 특히나 많이 나오는 경우라고 한다. 또한 내용적으로 앞뒤 안 맞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으며 유독 실록에 곳곳에 빠져있는 기록도 많다.[69] 과도한 성관계로 인해 약해진 오줌발 또는 꼬무룩이 되었다거나 발기부전.[70] 왕이 즉위 초 양기 부족 증상을 앓은 원인도 추위로 인한 것이었으며 일시적으로 나타난 증상이었다.[71] 그러나 실록에서 왕이 백마를 진상하라고 명한 기록이 있는데 진상하라고만 명한 얘기를 가지고 사관은 백마를 진상한 여부에 대해서 양기를 돕기 때문이다 라고 자신이 임금의 입장을 대신하여 멋대로 서술하며 주관적인 추측을 덧붙인 것 뿐이다. 왕은 특성상 진귀하고 좋은 것들을 닥치는대로 모으는 취미가 있었고 당시 힘있고 좋은 말들을 모아 사냥을 자주 하였다.[72] 오히려 다른 기록에서는 왕이 젊고 힘이 좋았기에 그가 간통한 여인은 자신의 남편은 안중에도 없고 상사병에 걸렸다고 전하고 있다.[73] 동의보감에 따르면 수십 가지 곤충으로 약용에 사용했다고 한다.[74] 다만 정사 기록에서는 박씨가 죽기 며칠 전 병을 앓자 연산군이 박원종을 보내어 간호하라고 명을 한 적이 있다.[75] 어린 시절 연산군은 월산대군 집에서 자랐으며 박씨가 보살피고 키웠고 이어서 연산군 장남인 폐세자 이고 또한 박씨가 보살피고 키웠다고 한다. 연산군이 장성하고 나서 이에 보답을 하며 박씨에게 물건을 내리는 일이 잦고 잔치도 내리고 혜택을 많이 주는 등 박씨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왕이 박씨에게 호감을 가진 걸로 오해할 확률이 높다.[76] 명예살인의 의도였을 수도 있지만, 자기 누나가 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불가항력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니 죽음으로써 도피하라는 의도의, 그나마 인간적인 조언이었을 수도 있겠다.[77] 임금에게 간언을 했다가 억울하게 파면 당해서 임금에게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78] 애초에 왕 쪽에 붙은 세력들은 극소수였기에 반정의 성공은 당연한 것이었다.[79] 상세한 위치는 기록에 없으며, 현재 신골, 연산골, 읍내리 세 곳이 연산군의 유배지로 추정되고 있다. 연산군뿐 아니라 희종, 임해군, 영창대군, 광해군 등 많은 왕족들이 교동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연산군이 유배되었던 장소로 유력한 고구리에 연산군 유배지를 조성했다.[80] 애초에 조명관계는 피상적인 형태만 부자/군신관계이지 조선이 명의 완전한 속령이 아니므로 명이 구태여 조선의 내정의 일에 간섭하여 일을 만들 필요도 명분도 없었다. 게다가 이 시기 명나라는 명 4대 암군의 시기였기 때문에 조선 왕이 바뀐 사정에는 그닥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일처리는 꼼꼼히 했던 정덕제 재위기였으면 모를까 가정제가 즉위하면서... 실록에도 관련 내용이 있다.[81] 그런데 세자를 죽인 것은 반정 공신들이다.[82] 신하의 신하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조선의 신하를 가리키는 말. 당시 공식적으로는 조선 국왕이 명 황제의 신하이므로, 조선의 신하는 명 입장에서는 명 황제 신하의 신하, 즉 배신이다.[83] 연산군일기 마지막 쯤 중종반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왕은 자신의 부도덕함을 부끄러워하여 모두를 본인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상도덕을 붕괴시켰다는 구절이 기재되어 있다.[84] 이러한 원인으로는 추정상 왕에게 절대군주로서의 통치이념이 부재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올바른 통치이념을 가졌으면 재위 중후반 시기부터 그리 놀고 자빠지기만 하진 않았을 테고, 절대권력을 얻은 뒤로 원래부터 자유분방한 기질이 통제받지 않자 무절제한 행태로 이어졌던 것으로도 볼 수 있고.[85] 이 점이 광해군과는 대비되는데, 광해군은 재위 기간 내내 실책과 성책이 함께 공존하였다. 반면 연산군은 처음에는 잘 이끌어 나가다가 끝에 가서 피 본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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