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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90033><colcolor=#ff9966> 무령군(武靈君) 무령부원군(武靈府元君) 유자광 柳子光 | |
성명 | 유자광(柳子光) |
자 | 우후(于後) |
작위 | 무령군(武靈君), 무령부원군(武靈府元君) |
품계 |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
본관 | 영광 류씨 |
출생 | 1439년(세종 21) 조선 전라도 남원[1] |
사망 | 1512년(중종 7) 6월 (향년 74세) 조선 경상도 해평 |
국적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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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세조 ~ 중종 초기 때의 정치가.조선 시대 차별의 대상인 얼자로 태어나 당대 권력의 계단에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했던 인물이자 조선 초기 정치판을 크게 휘저었던 풍운아. 업적의 공과를 제외하더라도 인생 자체는 파란만장했고 이 말을 대변해주듯 남이의 옥, 무오사화, 갑자사화, 중종반정 등을 비롯한 조선 초기의 굵직한 정치적 사건에 관여했으며 말년에 결국 몰락하여 유배지에서 죽었다. 간신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현대에 와서는 간신이 맞다는 의견과 역사의 승리자 사림파에 의해서 간신으로 이미지가 덧씌워진 인물이었다는 평가가 대립하고 있지만 나라의 안위는 없고 자기 신분 처지에 따른 열등감 속에 여러 정치 공작으로 자신의 안위만 바라보는 간신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다만 조선의 사직을 위태롭게 했다거나 한 수준은 아니었는데도 다소 가혹한 평가를 받아 온 감도 있다.
병조판서, 한성판윤, 의정부 좌찬성을 거쳐 삼정승과 동렬인 정1품 상계 대광보국숭록대부까지 이르렀으나 적이 많아 끝내 고점에서 그대로 고꾸라졌다.
2. 생애
유자광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류규(柳規)의 서얼[2]로 태어났다. 야사에 따르면 류규가 백호 꿈을 꾸고 난 뒤 부인과 동침하려 했다가 거절당하자 부인의 몸종과 동침하여 유자광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는데 이 말대로면 서자도 아니고 홍길동처럼 얼자였다는 이야기. 얼자는 부친이 이런저런 형태로 봐줘서 그렇지 원칙적으로는 천민 취급이다.[3] 어린 시절 유자광이 적자인 형들을 제치고 총명함을 드러내자 유자광의 친부는 이를 위험으로 판단해 유자광을 제거하고자 한다. 하루는 장마철 물이 불어나자 유자광 친부는 유자광을 강으로 데려가 강을 헤엄쳐 건너에 있는 메밀밭을 확인하게 한다. 본래 어린이인 유자광을 급물살이 있는 강에 빠져죽게 할 생각이었으나 총명한 유자광은 큰 나무판자를 배로 삼아 무사히 강을 건넌다.사족으로 유자광의 고모부가 권채인데, 유자광의 고모, 즉 권채의 아내가 첩을 학대하여 《조선왕조실록》에까지 오르는 일이 있었다. 고모는 사대부의 처였기에 처벌을 받지 않았다.
유자광은 가문의 견제를 피해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다가 무예에 일가견이 있었는지 경복궁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甲士)가 되었다.[4] 이후 1467년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공을 세울 기회를 줄 것을 청했고 그를 만나 직접 무예를 선보이며 무용을 드러냈고 이를 보고 크게 마음에 들어한 세조 덕에 연락관에 임명되어 남이의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1467년 건주여진 이만주를 토벌할 때도 공을 세웠는지 이만주의 수급을 벤 장수가 유자광이라는 다산 정약용의 기록도 있다. 이시애의 난과 건주위 토벌전 이후로 세조에게 큰 총애를 받아 벼슬이 정5품인 병조정랑[5]에까지 이르렀는데 모든 과정이 단 3개월만에 이루어졌다. 세조의 유자광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며 1468년 유자광으로 하여금 온양온천에서 별시[6] 문과를 치르게 하였다.[7] 신숙주는 유자광의 답안을 "고어(古語)를 전용(全用)하고 문법이 소홀하다."는 이유로 낙방시켰지만 세조가 "묻는 본의(本意)에 어그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자광을 장원 급제로 삼았다. 그 해 정3품 병조참지에 올랐는데 서얼이 서른이 되기도 전에 갑사 신분이었던 때로부터 채 1년도 걸리지 않은 그야말로 벼락 출세를 했다. 그 해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도 녹훈되었다. 대간이 천한 서자에게 말도 안 되는 특혜라고 반발하자 세조는 "니들이 유자광 발끝이라도 따라가냐? 난 절세의 인물을 얻었다고 본다!"라고 화를 내며 반발을 모조리 잠재웠다. 세조가 이토록 유자광을 밀어 주었던 것은 재위 기간 동안에 지나칠 정도로 세력이 커져버린 구 공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특히 이시애의 난을 치르는 동안에 한명회, 신숙주 등이 역모를 꾀한다는 유언비어를 듣고는 한명회와 신숙주를 잠시나마 옥에 가두고 신숙주의 칼을 헐겁게 채웠다고 형리를 극형에 처한 사실을 보면 비록 세조가 공신들을 아끼기는 했으나 그 세력이 비대해지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경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자광뿐 아니라 난을 진압한 구성군 이준이나 남이도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것을 보면 세조는 공신들과 이들의 측근을 중심으로 기존 공신 세력과 대립하는 세력을 만들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유자광은 세조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전에 존재했던 공신 세력과 이시애의 난 이후로 생겨난 신진 무신 세력의 싸움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신진 무신 세력의 대표 주자였던 남이는 세조 시절부터 자신들을 견제해오던 공신 세력들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던 중에 세력을 규합하여 공신 세력과 한바탕 권력 다툼을 벌일 준비에 들어갔다. 이 때 남이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유자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로 결심하고 그와 접촉하여 여러 불온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유자광은 오히려 공신 세력에 붙어서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유자광이 남이가 자신을 찾아와 정변을 일으켜 한명회, 신숙주를 비롯한 대신들을 제거하자고 설득했다고 진술하였던 것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남이, 강순 등을 비롯한 신진 무신 세력은 역모 혐의를 받아 대부분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며 25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유자광은 역모를 막은 공을 인정받아 익대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남이가 살던 집을 받고 무령군 자헌대부에 봉해졌다. 예종의 신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실세였던 공신 세력의 눈에 띄게 되어 정치적인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남이의 옥 사건에는 유자광의 철저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었다는 설이 있다. 일단 유자광은 출신부터가 한미한데다가 세조가 죽은 이후로는 자신을 지지해줄만한 세력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공신 세력과 신흥 세력의 갈등을 철저하게 이용하여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유자광이 함께 싸우며 같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높은 벼슬을 얻은 남이를 질투한 나머지 남이를 모함하여 죽였다고 한다.[8] 다만 유자광이 관직을 받는 것조차 쉽지 않은 얼자임에도 왕의 총애로 분에 넘치는 지위에 올라놓고 종친인 남이를 질투했다는 것은 간사한 유자광의 이미지에 후대에서 적용한 것일 수 있다.[9][10]
다만 과거에는 연려실기술 등 야사의 서술 때문에 예종이 유자광 등의 간신들의 모함에 속아서 충신인 남이를 숙청했다는 인식이 대중들에게 일반적이었지만, 실록 완역본이 나온 후로는 남이의 옥사 사건에서 실제로 주도권을 쥐고 있던건 사실 국왕인 예종이었다는 해석이 대세가 되면서 유자광의 역할에 대한 해석도 달라진다. 예종 입장에선 남이 등이 속한 젊은 신 공신 쪽을 오히려 자신의 왕권에 대한 더 큰 위협으로 느꼈고, 그래서 늙은 구 공신들과 손 잡고 신 공신들을 숙청한 것. 이는 한명회 등의 구 공신들이 남이 뿐 아니라 영의정이었던 구성군 이준까지 연좌해서 죽이자고 했을때에 예종이 선을 긋고 그들을 면박 주면서 구성군의 목숨은 지켜준 것을 보면, 해당 옥사에서 누굴 죽이고 살릴지 결정하고 칼을 휘두른 쪽은 엄연히 예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왕인 예종이 이미 남이 일파를 숙청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걸 유자광이 눈치채고 국왕이 원하는 숙청의 명분을 제공한 보조적 입장일뿐, 예전의 통설처럼 주도적인 역할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비록 남이의 옥 사건으로 유자광은 본격적인 탄탄대로에 올랐다고 하지만 서자 출신이라 여러 곳에서 공격을 받았으나 왕실의 비호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례로 성종 1년에 자신의 부하였던 박성간이 유자광이 남이처럼 반역을 계획했다고 고변하여 유자광이 고문과 심문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가 불과 하루만에 유자광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석방을 지시했고, 오히려 박성간이 무고를 저지른게 확인되어 참형당했다. 유자광이 오랫동안 가진 무령군(武靈君) 칭호도 성종 초에 받은 칭호였다.
승승장구해온 유자광은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한 탓인지 성종 7년에는 한명회에게 개겼다가 파직되는 굴욕을 겪었다. 다만 이 과정이 훈구파, 특히 한명회를 억제하고자 한 성종의 눈에 들기 위한 정치적 모험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한명회는 성종의 친정을 반대해서[11] 여러 곳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고, 유자광은 훈구파의 중진이기도 하지만 근왕파에 가까운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서 한명회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 성종의 눈에 들었는지 유자광은 반 년 만에 관직에 복귀하고 다음 해에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총관에 임명됐다. 그러나 정치적 능력과는 별개로 행실은 나빠서 1478년에는 부정부패 사건이 터져서 조정을 더렵혔다 하여 공신적을 박탈당했다가 1481년 다시 되찾는 일도 있었다. 또 다혈질인 대간 현석규가 왕 앞에서 팔을 걷어붙인 일을 가지고 임사홍 등과 함께 "그 새끼 막나가는 거 아니야? 완전 소인이구만!"하고 몇 마디 씹었던게 화근이 되어 임사홍과 같이 나란히 쫓겨났다가[12] 4년이 지나서야 종1품 숭정대부 겸 도총관으로 복귀했다가 임사홍과 함께 공신에서 물러나 삭탈되는 등 다사다난한 시기를 보냈다. 천한 출신이 세조의 총애 덕에 과분한 출세를 했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대신들에게도, 사림(士林) 출신 대간들에게도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연산군이 즉위하여 전대 왕 성종의 실록을 집필하던 중 이극돈이 김일손이 쓴 왕실 모독 사초를 발견했는데, 이 사초에는 김종직이 썼던 조의제문 등이 실려 있어 이 사초란 거의 대역죄의 증거와도 같은 위험한 물건이었다. 이극돈은 대신들과 논의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는지 유자광에게도 찾아가 이 일을 왕에게 알려야 할지에 대해 조언을 구했는데, 좋은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한 유자광이 그 길로 달려가 연산군에게 조의제문에 세조와 계유정난을 비판하는 등 반체제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고변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아버지와는 달리 왕의 권위를 대단히 중요시하는 성품의 소유자로 왕권에 도전하는 사림들을 고깝게 여기고 있었다.[13] 그렇지 않아도 왕을 길들이기 위해 즉위 후 4년 내내 시위를 벌이던 사림과 알력 관계에 있던 연산군의 손에 굴러들어온 조의제문은 좋은 빌미가 되었고, 연산군은 조의제문의 반체제적인 내용을 빌미로 삼아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조의제문을 썼던 김종직은 이미 죽었으나 죽은 몸이 관짝에서 끌려나와 부관참시당하였고 그것을 실은 김일손은 살아있었기에 처형당해 죽은 몸이 되었다. 그의 제자들이었던 수많은 사림들도 이에 연루되어 처벌받았다. 이 때 유자광이 선두에 서서 사림파들을 때려잡으며 남의 목숨으로 자신의 권력을 벼려냈다. 흔히 무오사화를 주도한 사람이 유자광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진정한 주체는 조의제문을 철저히 이용한 연산군이다.[14]
그러나 연산군은 자신의 권력을 더 확고하게 굳히려했는지 유자광도 길들이고자 했는데, 연산군은 이극균과의 교분을 빌미로 여러 차례 유자광을 겁주고 의금부에서 형량을 정해오면 짐짓 이를 용서해주기도 하고, 심지어 갑자사화 중에는 "너는 뭐했냐?"라고 죽일 듯 화를 내며 옥에까지 가뒀다가 풀어준 적도 있었다. 유자광은 천출인데다 워낙 벼락출세 이미지가 강했고, 자기 입지를 위해 왕의 칼잡이 역할로 날뛰면서 적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어차피 왕의 총애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데 길들이기가 지나쳐서 오히려 유자광이 비빌 언덕을 찾아 중종반정에 가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문신인 성희안이나 무술은 뛰어났지만 실전 경험이 없었던 박원종에게 이시애의 난 토벌과 여진 정벌 등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유자광은 큰 도움이 될 수 있었고, 안 그래도 불안감을 느끼는데 반정세력이 적극적으로 설득하기까지 하자 결국 마음을 돌리는 데까지 이른 것.쿠데타에 참여해 성공시키는 뛰어난 처세술을 부린 것이다. 해동잡록의 기록에 따르면 유자광이 중종반정에 합류할 때 기름종이를 많이 가지고 가서 반정군을 지휘할 장수들에게 종이를 잘라 표식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중종반정에도 앞장선 덕에 그는 다시 공신이 되어 녹을 받아먹으면서 어느 정도 큰소리를 쳤으나, 연산군의 축출 이후 조정에 대거 진출한 사림들이 유자광의 철천지 원수들인데다 중종과 반정공신들도 그를 불신했기에 그 위세도 오래 가지 못했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김공저 등이 박원종, 유자광 등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민 일도 있었는데 중종은 관련자들을 대충 처벌해서 중종반정의 공신들과 유자광을 매우 불만스럽게 만들었다.[15] 그러던 중 창녕과 고창의 수령이 부패하다는 이유로 벌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유자광은 그들에게 로비라도 받았는지 중종이 구언의 언지를 내리자 "창녕과 고창 사람들이 자기네 수령들이 자기들을 잘 다스렸는데 대체 뭘 잘못해서 쫓겨났는지 모르겠다네요."라는 말을 올렸다가 사림의 표적이 됐다. 사림들로 가득한 삼사는 "유자광이 폐주에게 빌붙어서 무오년에 그 많은 사림을 죽여놓고도 정신 못 차리고 청탁이나 받는다"고 비판하며 유자광을 궁지로 몰았다. 이에 유자광은 자신은 무고하다며 적극적으로 항변하지만 중종과 공신들조차 그를 탄핵하기로 결정하자 궁지에 몰렸다. 그래서 유자광은 당시 최고 실세였던 박원종을 찾아가 지금 자신이 공격받는 것은 무신 출신이기 때문이며 자신이 쫓겨나면 역시 무신인 박원종도 위험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박원종은 "지금 네가 위기에 처한 건 무신이어서가 아니라 악행을 많이 한 것 때문이거든? 무오년에 댁이 한 일 때문에 사림이 이를 간 걸 모르고 하는 말이냐?"라고 비웃으며 무시했다. 결국 누구도 옹호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유자광은 공신위를 박탈당하고 귀양을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늘그막에는 병환까지 앓는 바람에 장님이 되었다고 하며 결국 귀양간 지 5년 만에 유배지에서 병으로 향년 74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래도 당시 기준으로 매우 오래 살았고 서자로 태어나 정치적 줄타기를 반복하며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야사에는 귀양간지 얼마 안 되었을때 꿈에서 남이의 혼령이 나타나 그의 눈을 벤 뒤 유자광이 장님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시체가 부관참시당하고 두 아들도 참형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조선왕조실록》과는 다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오히려 중종은 유자광이 죽자 공신 녹훈도 두 아들에게 돌려주고 복권시켜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도록 배려하였다. 대간들이 몽땅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었음에도 중종이 밀어붙여 자기의 뜻을 관철한 것이다. 간사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유자광이 자신이 저지른 죄가 많아 시체조차 무사하지 못하리라 보고 자기와 닮은 거지 노인을 발견해 시체를 대역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유배당한 죄인으로서 이렇게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의 풍란에서는 비슷한 설로 자신이 부관참시 당할 걸 예측하고[16] 자신의 무덤은 작게 만들고 하인의 무덤은 크게 만들어 부관참시를 면했다라는 야사를 인용했다.
3. 평가
유자광은 원래 미천한 출신이라서 벼슬도 무관에서 출발했다. 그 때문에 세조 이후에 공신 집단이 형성한 관료층과는 꽤 달랐지만 세조의 총애 덕분에 정5품 병조정랑으로 출세가도를 달라 마침내 최종적으로는 삼정승 급의 고관인 정1품 대광보숭정대부까지 차지했는데 이것은 문과에 급제한 양반도 노리기 힘든 자리다.[17] 이렇게 유자광은 그야말로 벼락 출세한 남자로 손꼽히는데, 바닥에서부터 출발해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고관대작까지 갔으며 그만큼 파란만장하게 살았다. 최명희의 소설 <혼불>에서는 농민들의 입에서 "자식을 낳으려거든 유자광 같은 자식을"이라는 말이 나온다. 조선 시대 당시에는 유자광이 사림을 탄압했던 일 때문에 희대의 간신으로 두고두고 까였지만 파란만장한 삶 때문에 현대에서는 당대 정치판의 풍운아라고 일컫는 경우도 있다. 보통 그를 간신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남이의 옥사와 무오사화를 내세운다. 전자는 이시애의 난에서 과감하고도 타고난 무재로 공을 세운 남이에 대한 세조의 총애를 시기하여 세조 사후 예종에게 남이를 무고해 극형을 받도록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후자는 사초에 기록된 김종직이 자기 시를 불태워버리자 앙심을 품고 김종직 사후에 조의제문을 이용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는 것.남이의 옥에 대해서는 보통 유자광이 이시애의 난 이후 정5품 밖에 승진하지 못해서 앙심을 품었다는 설도 존재하지만 갑사(甲士)라는 한미한 직책과 서자라는 출신적 배경에 얽매여 있던 그로서는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출세였다. 때문에 사실은 벼락 출세 이후 더이상 승진하지 못하거나 밀려난 것을 우려했다는 것에 가깝다.[18] 유자광은 비록 정5품이기는 했지만 얼마 안가 치러진 과거에 급제해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해 남이의 옥 당시에는 당상관이었다. 이 정도면 명문가 출신이라고 해도 10년 이상은 벼슬 생활해야 가능할까말까 한 자리에 앉은 거라 인생 역전 수준이다. 반면 남이의 경우 그의 위치와 했던 짓으로 보면 유자광이 비견할 수 없었으며 그의 질투 대상이 되기나 했을지 의문이다. 물론 28세 병조판서의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타이틀을 가지기는 했지만 왕에게도 공신에게도 견제받는 그의 신세를 보면[19] 유자광이 당시에 질투를 하기는 했을까? 설령 남이에 대한 질투가 있었다고 쳐도 그게 주된 감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이의 옥이 터진 까닭은 바로 남이 본인이 보여준 처신이었다. 남이는 지극히 오만하고 돌출적인 성격인지라 종친이면서도 예종에게 미움을 받아, 처신에 밝았던 구성군 이준이 남이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했는데도 공신들에게는 적대당했을지언정 예종이나 왕비가 끝까지 두둔해준 반면 남이는 혈연의 옅고 짙음을 고려해도 너무 쿨하게 버림받았다. 남이가 기반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신 세력에게 도전했다 패배하는 걸 지켜본 유자광은 무리하게 공신들과 권세 싸움을 벌이려는 남이를 지지하다 자기 목숨까지 버리기보다는 공신들을 지지하는 편이 더욱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일을 벌인 것뿐이라는 것이다.[20]
무오사화 때 분명 유자광은 김일손의 사초를 고하고 조의제문을 해석하는 등 무오사화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나 왕을 부추겨 무오사화를 주도적으로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본질적으로는 연산군이 대간들과의 집요한 줄다리기를 끝내기 위해 사건을 키운 것이며 사실 관계를 따져보면 무오사화는 연산군이 폐위되고 사림파가 집권해서 사화로 인정받았지 내용을 살펴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준역모급 사건이었다. 괘서급 유언비어와 왕을 역적으로 치부하는 글을 사초에다 실어버렸으니 연산군이 아니라 그 어떤 성군이라도 대규모 처벌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조의제문은 유자광이 왜곡하거나 과장해서 뜻풀이한 것이 아니라 김일손이 단종의 살해 소식에 김종직이 충성심과 분노에 차서 쓴 글이라고 김일손이 직접 증언했고 사초로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서 매우 객관적으로 보고한 것이다.[21] 유자광이 무오사화 때 다른 사림파 인물들도 모두 연계시켜 죽이려 했다가 노사신에게 면박당했다는《조선왕조실록》정리 기록도 뭔가 모순이 있는게 오히려 《조선왕조실록》에서 유자광은 6명의 처형 대상자 중에서 강겸은 정상 참작 사유가 있다고 주장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강겸은 참수형에서 곤장 & 유배로 감형을 받는다. 물론 본인은 얼마 안가 남효온이 지은 시를 핑계로 몇 명 더 잡아패자는 주장을 펼쳐 연산군이 받아들인 일이 있기는 했다.
유자광이 이런 행보를 보인 이유는 그가 등용된 배경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세조 때 집권 세력인 훈구파의 기원은 세조의 계유정난과 관련된 구(舊) 공신 집단인데, 유자광은 세조가 구(舊) 공신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이시애의 난에서 활약한 젊은이들을 밀어준 신(新) 공신 집단에 들어갔다. 그러나 신(新) 공신 집단은 일종의 세대였지 남이나 구성군을 필두로 한 구심력있는 정치 집단은 되지 못했다.[22] 결국 남이의 성급한 일 처리와 유자광의 배신 등으로 인해 신(新) 공신들은 뭉치기도 전에 와해되고 말았는데, 그렇다고 구(舊) 공신들이 유자광을 진심으로 자기들과 한 패거리로 받아줄리 없었고[23] 온갖 더러운 일을 처리하느라 청렴결백함을 내세우는 사림 세력에게 소인 간신배로 찍혔으며 본래는 이런 자리에 오를 수가 없는 비천한 출신 성분[24]이라는 약점까지 있었다.
결국 유자광은 당연히 왕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며 왕의 권위에 기대어 벼슬과 권력을 유지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권신이었지만 실제 그의 권력 기반은 극도로 취약했기에 세조부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에 이르기까지 오직 역대 왕들의 총애에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왕들이 유자광에게 권력의 대가로 요구했던 것은 공신의 영애와 문벌, 좋은 출신 가문, 맑고 깨끗한 선비의 명성 같은 것들을 내세우는 신하들이 감히 할 생각을 낼 수가 없는 더러운 일들이었다. 처음부터 유자광은 세조에게 아첨하여 눈에 띄었던 것이고 남이를 제거하고 싶어한 예종을 위해서 남이를 숙청했으며 젊은 대간들[25]을 숙청하고 싶어한 연산군을 위해서 무오사화에 가담했다가 마지막에는 중종에게 붙어서 연산군을 배신했다. 이런 일에 나서면 나설수록 원한을 샀기에 모두들 유자광을 더욱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이렇게 모두에게 욕을 먹을수록 왕의 입장에서 유자광의 이용 가치는 더욱 올라가는데 왕에게 절대 충성하며 기댈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유자광이 배신한 임금은 오직 연산군 뿐으로 이 역시도 연산군이 말년에 유자광에게 뜬금없이 화를 내며 협박하는 등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모두가 유자광을 싫어해 기댈 곳은 왕밖에 없었는데 왕마저 자신에게 돌변하며 겁주고 위협을 가하니까 당연히 유자광 입장에서는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유자광은 왕의 충실한 사냥개 정도의 위치였으며 왕을 대놓고 욕하지 못하는 신하들에게 충분한 악의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중간에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과 결탁한 것도 결정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만약 연산군이 왕권을 남용하고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했던 잔인무도한 폭군이 아니라 자신의 현조부[26] 태종처럼 수단적인 측면에서는 잔혹했어도 왕권을 통해 국가 발전의 성과를 이루고자 하는 군주였거나 하다못해 세조같은 군주였으면 유자광도 단순히 왕 대신에 손을 더럽힌 부하 1인에 불과했다고 평가받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태종의 측근이었던 이숙번, 하륜, 조영무가 이러한 평가를 받았다.[27][28] 예종도 대중적인 인식과는 달리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모습의 군왕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렇게 하지 못해 결국에는 유자광은 폭군에게 아첨하는 간신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맹꽁이 서당》이나 고우영의 《한오백년 만화》, 신동우의 《만화 한국사》, 김삼의 《야사 만화》 등에서도 한결같이 간사한 악역으로 나온다.[29]
4. 기타
역사속 간신이라고 기록된 인물들이 사실 능력이 출중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도 실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커리어 자체를 갑사로 시작했기에 무재가 뛰어나, 세조의 이만주 정벌 때 이만주에게 돌격하여 그의 목을 친 사람이 바로 유자광이었다고 하며, 조선에서 쓰는 병선의 문제점을 분석하여 성종에게 간언하기도 하였다. 또 조선 최고의 음악 이론서인 악학궤범의 편찬에도 참여했으며 연산군 대에는 왕실의 음식을 총괄하는 사옹원 제조로 있기도 했다. 세조가 유자광을 중용하면서 절세의 인물을 얻었다고 말한게 허풍은 아니었던 셈. 애초에 그가 무능했다면 세조가 숨지자 마자 몰락했을 것이다.5. 대중매체에서
- 1962년 개봉한 영화 <연산군>에서는 배우 최삼이 연기했다.
- 1962년 개봉한 영화 <폭군 연산>에서는 배우 최삼이 연기했다.
-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배우 변희봉이 연기했다. 유자광의 대표 연기라 할 수 있고 변희봉의 대사 "이 손 안에 있소이다"가 유행어가 되었으며 그가 출연한 광동제약의 광고에도 등장하였다. 간신 이미지보다는 무예가 뛰어나고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나 현자 비슷한 이미지까지 부여됐다. 뭐 그래도 연산군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에 임사홍 부자가 경계하는 부분에서는 간신 이미지도 나타나기도 한다.
- 2015년 개봉한 영화 <간신>에서는 배우 송영창이 연기했다. 초반부 판부사라고만 불리는 변태 늙은이로 등장해 중반부부터 본명이 나오는데 장녹수와 편먹고 설중매를 연산군에게 보낸다. 중종반정 때 수문장과 함께 도성을 지키다 재빨리 수문장을 죽이고 반정군에 합류한 후에 박원종에게 공신 자리를 달라고 한다. 궁궐의 비밀을 말해주고 반정군을 안내하며 연산군을 대놓고 모욕하지만 박원종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데다가 살려고 배신을 하는 행위에 혐오감을 드러내며 멸시한다.[30]
- 이우정의 꼰두쇠 팔보에서 최만길을 암살하려고 온갖 수단을 쓰다가 결국 성공, 분노한 팔보가 복수하러 오자 애걸복걸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찌질한 모습을 보여준다.팔보는 하도 기가 막혀서 죽이기를 포기한다.
[1] 아버지 유규(柳規)의 고향이 영광이라 영광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2] 양첩의 아들인 서자와 천첩의 아들인 얼자를 함께 이르는 말로, 유자광은 얼자였다.[3] 금성출판사에서 낸 신동우 화백이 그린 한국 역사 만화에서는 양반은 아니지만 양민도 아닌 중인 출신이라고 그의 출생을 소개한 바 있다. 삼남매 또는 세자매, 삼형제에서 애매한 둘째 포지션인 셈이다.[4] 보통 양반의 자제들이면 문음을 통해 할 수 있었다. 비슷하게 가문은 좋았던 한명회가 개경 경덕궁직에 있었다.[5] 근데 자기를 천대한다고 잘못 생각하여 남이와 갈라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6]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또는 인재의 등용이 필요한 경우에 실시되었다.[7] 과거를 본다는 것은 양반 자격을 준다는 의미와 같은데 이전에는 편법으로 양반에 들게 해줬다면 이번에는 정식으로 준 것.[8] 지경사에서 나온 조선왕조 오백 년 상편에서는 이 설을 채택했다.[9] 서자 신분으로 한직이라도 한다는 것 자체가 가문이 좋아야 되고, 역모를 막거나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 혹은 가문을 잇는(예를 들면 아버지에게 자식이 없어서 서자를 계승자로 삼는 것) 등의 힘든 조건을 충족시켜도 유자광처럼 정5품까지 오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10] 단, 이것도 충분히 신빙성이 있는것이 얼자 출신이라고 할지라도 성공한 순간부터 사람이 달라지는건 유자광도 동일했을 것이다. 오히려 이쪽이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될 수 있다. 자신은 아득바득하여 겨우 올라왔는데, 같은 동시대 나이에 전왕의 외손자라는 이유로 상관이 된걸 보면 경외심보다 질투심이 더 느껴지는건 사람의 심리아닐까?[11] 성종실록 7년 1월 13일[12] 유자광, 임사홍 모두 이 일에 있어서는 억울한 것이 이들을 탄핵한 게 대간인데 현석규 일로 조정이 시끌시끌할 때 현석규를 소인이라 탄핵한 게 바로 대간이었다. 그야말로 내로남불이었던 격.[13] 세조는 기존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남이나 이준과 같은 종친들을 등용했지만 종친 등용은 성종 대에 공신 사환 금지법으로 완전히 막혀버린 상태였다. 이에 성종은 사림을 동원해서 공신들을 견제하려 했지만 지나치게 사림을 키워줘서 기존 공신들보다 더 왕권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늑대를 쫓으려다 호랑이를 들인 꼴이었다.[14] 연산군 일기에 사관이 써둔 일화로 유자광이 함양을 유람하다가 자신의 시를 현판에 적어 달아놨었는데 김종직이 함양 군수로 부임하던 중 이를 보고는 불태워버려서 유자광은 김종직과 사림들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고, 김종직은 네임드였던지라 그가 죽을 때까지도 해코지를 하지 못했으나 무오사화 때 이 때의 원한을 갚으려 김종직의 제자들을 죽였다고 사관이 평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데, 박성간 사건 때문에 일개 군수인 김종직이 그런 짓을 했다가는 박성간의 공범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유자광이 복귀할 때 김종직이 그를 지지했으며 반대로 김종직의 사후 시호를 정할 때 유자광이 우호적인 의견을 내는 등 사이가 안 좋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더불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도 후일담처럼 잠깐 언급한 내용이지 이 사건을 두고 정쟁이나 논의가 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이 일화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내용이다.[15] 박원종은 그래서인지 김감, 류숭조를 무죄로 하는 걸 격렬히 반대해 결국 그들을 귀양보냈다.[16] 이전 시리즈인 설중매 때부터 무술에 능하고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다고 묘사되었다.[17] 중국의 전국시대 조나라 인물 조사를 인용한 상소가 대표적이었다.[18] 유자광의 출세 자체가 대놓고 세조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으니 세조가 죽으면 끝이다. 그렇다고 새 임금이 될 세자(훗날의 예종)에게 잘 보이자니 시간이 많지 않았고 정작 그 예종도 2년도 못가 죽었다.[19]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병조판서에서 쫓겨났다.[20] 유자광의 정치적 입지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는데 남이, 구성군이야 고속출세를 해도 왕족 혈통이라(남이는 외가로) 공신들 입장에서는 그런 자리에 오른 것 자체보다는 그렇게 올라서 자기들과 맞먹으려고 하는건 아닌지나 자신들도 못해본 초고속 출세에 대한 경계 뿐일 것이고 달리 말하자면 남이의 처신이 유자광 같았다면 숙청당할 일도 없다. 하지만 유자광은 서자 출신이기에 시대상 그 자리에 오른 것 자체가 문제였다. 이렇게까지 오른 것도 세조가 힘써줘서 가능한건데 그런데 그렇게 오른 사람이라면 기반이 없다. 이는 시간을 들여가며 만들어야 하는데 세조가 자리에 올려주자마자 죽었다. 세조가 10년, 20년은 더 살거나 아니면 유자광이 10년 전에라도 총애를 얻었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았으니 유자광의 처지는 누란지위와 같았고 결국 공신과의 대립이란 선택지가 없어진 것이다.[21] 김일손이 계유정난을 비난하려고 올렸으니 그렇게 보고하는게 사실상 옳은 일이었다.[22] 같은 신(新) 공신인 남이는 구성군을 질투하고 깎아내리려 했었다.[23] 유자광 본인이 서얼 출신인 것도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구 공신들은 계유정난과 함께 크게 떠오르기는 했지만 이들은 권력의 밖에는 있을지언정 권람, 한명회는 개국공신의 후손들. 신숙주는 세종 시기부터 일한 관료. 정인지는 아예 태종때부터 일한 노신. 황수신은 황희 아들로 대부분 고위관료와 명문자제들이었다. 한 마디로 내가 자리가 없고 권력이 없어도 집안빨 있다 이거야~ 할 사람들이 포진한게 구 공신이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계유정난 때부터 이 때까지 함께 부대끼며 한편이 된 상태였다.[24] 유자광은 서얼 출신이자 어머니가 노비인 얼자로 원래대로라면 노비 신분이어야 했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해서 출세한 뒤엔 노비 출신인 자신의 어머니를 한양으로 모시고 올라와서 봉양했다고 한다.[25] 주로 사림파 출신이었다.[26] 고조할아버지의 아버지[27] 그나마도 조영무는 외려 졸기에 "소박, 공정하며 바른말 하기를 잘했다."라고 기록되면서 무신임에도 문신에게 호평을 받았다. 물론 이는 처신이 좋지 않은 이숙번이나 하륜과는 달리 처신에 발군이었던 이유도 있기는 하다. 이숙번과 하륜도 사관들에게 까이기는 했지만 간신 수준의 폄하는 당하지 않았으며 '나름대로 유능하며 공적이 있다' 정도의 평가는 받았다.[28] 사실 하륜은 태종 즉위 당시에도 나이가 많아서 곧 물러났기 때문에 욕에 비해 큰 문제는 없었고, 이숙번은 문제가 되기 전 태종이 쳐냈다. 그래서 생각보다 평판은 나쁘지 않았던 것. 원래라면 하륜은 재물을 탐하던 자였고 이숙번도 교만해져서 문제가 있던 자였으므로 이들이 오래 자리에 있었으면 무슨 말이 나왔을 지는 대체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29] 특히 김삼의 《야사 만화》 한토막에서는 다소 호러틱한 얘기도 실려 있다. 유자광은 갖은 아첨과 모함으로 권세를 얻어 초헌을 타는 특권을 받았는데 초헌을 탈 때마다 늙은 하인 하나가 엎드리게 해 밟고 올라 타곤 했다. 어느 날 하인이 골병이 들어 죽어감에도 억지로 밟고 가려 하자 그의 딸이 아비를 위해 안된다고 따졌다. 노한 유자광이 두 부녀를 몽둥이질한 후 광에 가둬 굶겨 죽였는데 마침 그 광은 초헌을 보관한 곳이었고 부녀의 원혼이 초헌에 붙어 제멋대로 움직여 유자광 주변의 친척이나 친구들을 뺑소니해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었다. 온갖 수를 썼지만 이미 피맛을 본 초헌은 더 미쳐 날뛰었고 유자광은 결국 공포와 불안에 미쳐 폐인이 되었다가 중종반정 후 몰락해 비참하게 객사했다. 유자광이 죽자 귀신붙은 초헌도 홀연히 사라졌다는 얘기.[30] 그런데 원 역사를 보면 사실 박원종과 유자광은 동류다. 신분차만 빼고 신세를 보면 그랬는 것이 둘 다 연산군의 총신이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