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4-01 18:14:25

사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1. 개요2. 사화 이후3. 관련 사항

1. 개요

사화()[1]란, 조선 시대 관료 및 선비 계층이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공격 당해 화를 당한 일을 말하며, '사림의 화'를 줄여서 이렇게 일컫는다. 극단적으로는 암살과 그 성격이 일맥상통하지만, 사화는 정치적인 명분 싸움이었으며, 상대방을 제거할 때도 임금의 재가를 거치며 합법적인 과정을 밟았다. 군주가 손수 숙청한 경우도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4번의 사화를 4대 사화라 칭하며, 그 외에도 정미사화(을사사화 시즌2), 기사사화(기사환국), 신임옥사[2] 등의 사화가 있으나, 정식 표현은 아니다.

연산군 때 1차로 김종직세조계유정난을 비판한 조의제문으로 발생한 무오사화, 2차로 자기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훈구와 함께 썰려나간 갑자사화, 중종 때 3차로 주초위왕이라며 조광조 숙청으로 발생한 기묘사화, 명종 때 4차로 대윤과 소윤의 충돌로 대윤이 썰려나간 을사사화(+그 여파인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더 크게 숙청된 정미사화)의 순서이다.

대립의 주축은 조선 건국 100여 년 후, 구 정치 권력을 대변하는 훈구파성종 이후 신진 세력으로서 삼사에 등용된 대간을 주축으로 한 사림파였다.[3] 참고로 훗날 사림이 집권한 뒤 학풍에 따라 갈라진 파벌간 다툼인 붕당과는 다르다.

세조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를 때,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등 세조를 도운 관료와 학자들은 공신에 책봉되며 막대한 토지와 정치 권력을 얻었다. 이들은 국가적 서적 편찬 작업 등 다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들은 하나의 거대한 기득권 세력으로 변모한다. 이들이 바로 훈구파이다.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훈구파와 사림파는 특별히 눈에 띄는 정치적 갈등관계는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이 대신 내의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 등 재야에 파묻혀 지내던 학자들을 등용하면서 양측은 서서히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양측의 갈등은 1498년 훈구파가 사림을 공격하며 무오사화로 비화했고, 이후 세 차례에 걸친 사화를 거치며 사림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다만 이름이 사화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네 사화 모두 훈구파가 일방적인 가해자, 사림파가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림파 스스로 원인을 제공한 사화도 있고, 가해자(로 여겨지는) 측에도 본래 사림파 출신이거나 적어도 훈구파로 보기 어려운 인물들이 있기 때문.
  • 무오사화는 사림이 큰 피해를 입은 사건이긴 하지만 이 사건은 사림 측에서 실록에 출처가 불명확한 설을 기재했다는 점에서, 그것도 왕실을 모욕하는 글들과 무오사화에 핵심이 되는 조의제문을 실록에 남겼다는 점에서 스스로 자초한 면이 있고[4] 피해 규모도 다른 사화나 조선시대 다른 대규모 숙청 사건에 비하면 크지 않았다.[5] 오히려 훈구파이자 사화를 주도했다고 알려진 이극돈은 늦게 보고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했다. 그리고 사화를 어느 정도 주도했던 유자광은 세조 대의 공신 출신으로서 넓은 의미의 훈구파에 해당하긴 하지만, 실상은 한명회 등 기존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세조가 의도적으로 밀어준 면이 있었고 또 성종 대에 한명회를 저격하는 등 흔히 생각하는 훈구파로 분류하긴 어려운 면이 있다.
  • 갑자사화는 폐비 윤씨에 대한 보복이 표면적인 이유였던 만큼, 윤씨가 폐비되고 사사될 당시 대신에 다수 포진해 있었던 훈구파의 피해가 사림 못지않게 컸다. 무오사화 당시 친위세력이었던 유자광과 (야사에서는 갑자사화의 주동자로 알려진) 임사홍도 벌을 받을 뻔했을 정도로 갑자사화 당시 연산군의 숙청 대상은 광범위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친위 쿠데타이다.
  • 기묘사화는 무오사화와 마찬가지로 사림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조광조 일파의 경우 성급한 정책으로 정적들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또한 조광조의 몰락에 동조한 남곤도 본래는 사림파에 더 가까웠고, 중종이 조광조를 죽이려고까지 하는 것에는 절박하게 반대했다. 기묘사화는 중종의 친위 쿠데타이다.
  • 을사사화는 직접적으로는 인종의 외척인 윤임을 필두로 한 '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을 필두로 한 '소윤'의 대립 끝에 소윤이 대윤을 숙청한 사건이다. 사림파는 대체로 인종을 지지하는 대윤 측에 더 많았으나 대윤의 수장 윤임은 무과에 급제해 무관으로 일하는 등 출신성분 자체는 사림파와 거리가 있었다. 대다수의 피해자가 사림인건 맞지만 가해자 측인 소윤 측에도 사림 출신이 있었다.[6]

2. 사화 이후

선조 대에 이르러 사림이 정국을 장악하면서 훈구파는 몰락하게 된다. 하지만 사림은 학풍에 따라 동인서인으로 갈라지며 새로운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3. 관련 사항


[1] 무오사화의 경우 史禍로도 불린다. 영어로는 Literati purges로 번역되는데, 로마자 그대로 Sahwa라고 써 놓으면 이슬람에 있었던 신앙 각성운동과 헷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2] 경종 - 영조 시기의 왕위 계승 문제. 노론의 입장에서 기사사화와 함께 신임사화라고도 불리나 신임옥사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인다.[3] 보통 알려진 바와 다르게 대간에도 훈구 세력이 있었으며, 이들도 같은 훈구파인 대신들을 적극 탄핵하는 경우가 많았다.[4] 무오사화의 경우에는 조의제문으로 세조와 세조의 후손들의 정통성에 도전을 해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사림의 잘못이지 훈구파가 무고한 사림들에게 누명을 씌운게 아니다.[5] 무오사화에서 사형당한 인물들은 겨우 6명 정도로 직접적으로 조의제문을 실록에 올리고 왕실을 모욕한 글을 남긴 혐의가 확실한 김일손과 일부 사관들 뿐이다. 나머지는 유배형이나 파직으로 마무리 되었는데 이는 오히려 온건파의 의견이 최대한 받아들여져서 선처한 것에 가깝다.[6] 대표적으로 본래 조광조 계열 사림파 출신인 정순붕. 아이러니하게도 중중 대에는 '왕이 살아있는데도 세자를 따르는 자는 소인배일 것이고, 세자도 아닌 대군을 따르는 자는 역적일 것이다'라고 소윤 측에 더 비판적인 발언을 했으면서 을사사화 중에는 본인이 소윤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