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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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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시대의 환국
갑인환국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신축환국 정미환국


1. 개요2. 배경3. 환국의 사례
3.1. 1680년 (경신환국)3.2. 1689년 (기사환국)3.3. 1694년 (갑술환국)3.4. 1721년 신축환국과 1727년 정미환국
4. 기타5. 관련사항

1. 개요

환국(換局)은 정국(政局)이 전환(轉換)되었다는 것으로, 한국사에서는 특히 조선 시대인 17세기에서 18세기, 붕당 정치에서 서인남인 사이 정권의 교체와 관련해 일어난 대규모 숙청 사건, 또는 이 숙청이 일어났던 시기를 일컫는다. 당시 일어난 여러 차례의 환국 사태는 조선 후기 붕당 정치의 균형과 합리성이 붕괴한 주요 원흉으로 꼽히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탕평책이라는 처방이 나오게 되었다.[1]

대대적인 환국은 현종 시기부터 시작되었으며, 피의 정치보복이 정점에 달한 것은 숙종 때에 이르러서였다. 그 이전에는 역모가 얽히는 것을 제외하면 논쟁을 벌였고, 파직이나 유배를 제외하면 환국 이후보다 심각하진 않았지만 숙종이 환국을 남용하여 다른 당파들끼리 서로 죽이고, 자기들은 충신, 군자이며, 상대당은 소인, 역적이라 했다. 흑백 논리와 정치적 보복의 살벌함은 환국 이후부터 만연해졌다고 할 수 있다.

2. 배경

환국의 목적은 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여당)을 왕이 결정하면서, 그 와중에 붕당간 대결을 이용해 신하들을 숙청하고 신권을 약화시키며 왕권을 강화하고자 함이었다. 정치의 주도권을 왕이 쥐고 사대부를 통제하려고 한 것으로, 환국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왕권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인조 이후, 소현세자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로 왕은 신하들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인조는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삼아 광해군인조반정으로 몰아내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도와준 신하(서인 세력)들의 눈치를 안 볼 수 없었고, 그나마도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면서 역시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효종은 인조의 삽질로 추락한 왕권,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에 더해 인조가 소현세자의 아들(즉, 손자)이 아니라 차남이었던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적장자 계승 원칙을 벗어난 찬탈 비슷한 상황에까지 처해지게 되어 어떻게든 왕권을 강화시켜야 했다. 덕분에 재위 내내 형수인 민회빈 강씨와 조카들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를 왕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조카들을 견제하는 데 힘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효종은 이렇게 왕권이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재야의 으뜸'인 송시열을 끌어들여 서인의 협조를 구하려고 했고, 송시열과 서인에게 저자세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현종은 그나마 결격 사유가 크게 없어서 효종부터 시작된 정통성 문제로 예송논쟁까지 벌어지자 말년에 남인의 손을 들어줘 어느 정도 왕권을 세웠다. 이처럼 왕의 권위에 문제가 있었고, 그래서 신하들의 협조가 절실했다. 왕권이 약하고 신권(臣權)에 기대는 바가 많다 보니 왕실이 사대부 권력층의 변동을 견딜만큼 튼튼하지 못했고, 환국으로 인한 충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정국을 주도할 동력도 부족했을 뿐더러 설사 환국을 하더라도 그 여파에 왕권까지 흔들릴 가능성 때문에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숙종 때 오면서 완전히 뒤바뀐다. 소현세자 후손과 봉림대군 후손간의 정통성 문제는 3대를 지나 숙종 때 이르러 왕위 계승이 안정화되면서 숙종은 더이상 소현세자 후손들에게 정통성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숙종 본인도 적자, 원자, 세자의 이상적인 단계를 밟으면서 정통성에 흠결이 없어서 누구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왕실의 정통성 문제가 해결되자 신권에 기대어 정국을 이끌 필요도 감소했고, 환국으로 사대부를 갈아엎어도 왕권에 미치는 영향이 적었다. 덕분에 나중에는 자기 부인과 아들까지 환국에 연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숙종의 권위 자체는 여전히 확고했고, 왕실도 환국으로 인한 여파에서 대체로 무사할 수 있었다.

문제는 환국으로 신권이 지나치게 약화되는 바람에 예송논쟁 같은 평화롭고 조화로운(?) 붕당 정치 또한 무너지게 되었고, 급기야 영조 대에는 척신이 등용되는 사태가 벌어져 훗날 세도 정치로 인해 조선 왕조는 파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3. 환국의 사례

숙종 이래로 '환국'이라 부를 법한 정치적 격변은 6번 있었으나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4개를 주로 '환국'이라 부른다. 연도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이 중에서 경신환국은 '경신(대)출척'이라고도 불리고, 기사환국은 '기사사화'라고도 불리며, 갑술환국은 '갑술옥사'라고도 불린다. 출척은 '반대파를 쫓아낸다' 정도를 뜻하고, 옥사는 '감옥에 가두는 사건' 정도를 뜻하며, 사화사화 항목 참조.[2] 또한 예송논쟁, 즉 갑인예송의 처리를 새로 즉위한 숙종이 마무리하며 서인을 쫓아내고 남인을 기용한 것을 갑인환국으로 부르기도 한다.[3][4]

환국을 즐겨 시전한 군주이자 처음으로 환국이란 개념을 도입한 군주는 다름아닌 숙종이었다. 대개 '숙종 시대' 하면 '장희빈' 외에도 '환국'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꽤 많다. 숙종 스스로는 환국을 통해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결국 노론의 손을 들어주어 조선 후기 노론의 일당 독주와, 더 나아가 세도정치의 원인을 제공해 버렸다.(숙종이 3번의 환국을 일으킨 기간인 20년보다 이후에 재위한 기간이 26년으로 더 길다.)

다만 영조 3년의 정미환국은 자신의 탕평책을 밀어붙이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노론에서 소론 탕평파로 일시적인 환국을 단행한 것이라 숙종과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 그보다는 차라리 경종 때인 1721년 ~ 1722년의 신임옥사(신임사화)도 노론을 전격적으로 숙청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환국과 다를게 없는 편. 요새는 '신임환국'으로 부르기도 한다.

3.1. 1680년 (경신환국)

숙종이 즉위한 직후의 갑인환국은 신임환국보다도 유명하지 않은데, 숙종이 즉위하자마자 예송을 잘못 이끈 죄를 물어서 서인들을 모조리 내쫓고 남인들로 정권을 채운 것을 말한다. 천하의 송시열도 귀양을 가야 했고, 송시열을 옹호하던 송시열의 제자들은 죄다 쫓겨났으며, 김수항은 노골적으로 남인을 편드는 숙종에게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박살이 났다. 이때 김좌명의 아들 김석주와 왕의 외할아버지인 김우명[5], 왕의 장인 김만기, 《사씨남정기》, 《구운몽》을 지은 대문장가 김만중 형제를 제외한 모든 서인들이 쫓겨났다.

하지만 왕의 장인 김만기는 남인들의 유화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골수 서인, 그것도 송시열을 추종하는 입장에 있었고 김석주와 허적의 사이를 계속 이간질했다고 한다.[6] 그러나 이 때는 주로 서인 또한 여당 같은 야당이었는데, 비록 야당이었음에도 김석주가 병조판서 직을 차지하고[7] 김만기, 김만중 또한 조정에서 나름 관직을 맡거나 외척으로 우대를 받았고 또한 이상진 또한 남인 정권에서 판서 직을 맡았다.

그 뿐 아니라 정치화, 정지화 등도 남인 정권에서 숙청되지 않았으며 김익훈[8]도 남인 정권에서 서인임에도 군권을 나름 쥐었다. 그 뿐 아니라 서인인 정재숭, 남용익, 홍처량, 오두인 등이 남인 정권에서 판서, 참판 또는 판중추부사로 지낸 적이 있다. 또한 민정중도 남인 정권 집권기 후반에 잠깐 복권되어서 판중추부사가 되었던 적이 있다. 민정중 등을 비롯한 22명의 서인들이 복권된 1678년은 청나라와의 국경이 벌어진 때인데, 이 때는 남인 정권에 대한 여론이 점점 좋지 않아져 가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병조판서 자리만큼은 서인이 계속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는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지만 병조판서 자리만큼은 서인이 계속 차지를 했고 형조판서, 대사헌, 한성부판윤도 한 때 서인이 차지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외에 예조판서도 한 때 서인이 차지한 적이 있었다. 어쨌거나 야심가였던 김석주는 남인들이 탁남과 청남으로 갈라져 개싸움을 벌이면서 세력을 소진하길 기다렸다가 숙종이 자기들끼리 물어뜯는 남인들을 보며 불쾌해하고 있을 때[9] 탁남의 영수 허적의 서자, 허견의 역모를 밝혀내어 탁남을 박살내고 사사건건 강경하게 나가면서 왕의 눈에 거슬렸던 윤휴도 죽임으로 청남도 날려버렸다.[10] 이것이 경신환국이다.[11]

이로 인해 서인은 복권되었고 서인의 소원이던 우율종사[12]가 이루어졌으며,[13] 한편 정개청의 사당은 허물어졌고 윤선도의 작호도 거두어졌다. 다만 남인 전부가 조정에서 쫓겨난 건 아닌데 목내선, 김덕원, 심재, 이우정 등 남인 일부가 서인 조정에서 능력을 인정받아서 계속 등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3.2. 1689년 (기사환국)

하지만 십년이 채 못되어 명성왕후가 1683년에, 장렬왕후가 1688년 사망하여 왕실어른들이 모두 승하하자 내심 장희빈(남인)을 중전에 앉혀주고 싶었던 숙종이 서인 왕비인 인현왕후를 내쫓기 위해 기사환국을 일으킨다. 장희빈이 아들을 낳자 숙종은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들에게 원자의 칭호를 내리려 했다.[14] 이에 서인 조정은 조심스럽게 너무 이르다고 만류의 의사를 비추었으나 숙종은 막무가내였고 훗날 경종이 되는 장희빈의 아들, 이윤은 그렇게 원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송시열이 왕의 나이가 젊은데 서자에게 원자가 웬말이냐고 딴지를 걸었고 격노한 숙종은 바로 송시열을 귀양보내버렸다. 결국 정권이 도로 뒤집히고 남인의 최고 원로들인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에게 삼정승 자리가 제수되었고 민암, 오시복, 민종도 등도 다시 권력의 실세로 복귀한다. 숙종은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 김수항을 사사하고 허새의 역모를 수사한 전 훈련 대장 김익훈을 체포하였다. 숙종은 남인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일흔이 넘은 노인인 그를 곤장을 쳐서 죽여버렸고(척살) 당시 고변자 김환, 이회 등도 모조리 처형했다.

그리고 남인들의 의례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15] 허적을 신원하는 한편 우율종사를 무르고 정개청의 사당도 도로 지어주었다. 그리고 소론을 중심으로 한 잔여 서인 세력의 결사적인 반대와 남인들의 조심스러운 만류에도 인현왕후를 폐서인했고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맞아들인다. 연명 상소를 올린 오두인, 박태보 등은 혹독하게 고문당해서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송시열이 사사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남인 2차집권기에는 1차집권기와 다른 점들이 있다. 1차집권기에는 서인이 실각하고 제2당으로 내려앉았어도 여전히 여당 같은 야당으로 영향력을 행사했고, 무엇보다도 국혼은 남인세력에 내주지 않았으며, 게다가 병권과 군권만큼은 절반 이상이 서인세력에게 가 있었고 병조판서 만큼은 남인에 절대 내주지 않고 서인세력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2차집권기 때는 달랐는데 국혼도 남인에게 뺏겼고 군권과 병권도 다 남인에게 뺏겼으며 서인 또한 완벽한 야당으로 전락했고 병조판서 자리도 남인에게 내주었다.

왕의 변덕 덕분에 남인들은 실로 근 십년만에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이미 3번이나 환국을 본 터라 남인들은 실세 민암을 중심으로 숙종의 입맛에 맞게 철저한 예스맨으로 행동하는 한편,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이나 이우정, 이현일 등이 민암과 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남인 중진들은 대부분 실세였던 민암과 장희재의 계보에 붙었다.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의 계보에 붙은 남인 중진들은 몇 안된 것으로 보인다. 희빈 장씨의 오라버니 장희재를 극진히 대접하며 장희빈의 눈에도 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숙종의 변덕은 어디 가지 않아서 인현왕후를 모시는 몸종이자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를 총애하면서 장희빈을 슬그머니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16]

3.3. 1694년 (갑술환국)

이 무렵 김춘택, 한중혁, 이시회, 이시도, 강만태, 최격 등의 젊은 서인들이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이것이 민암의 정보망에 걸려들었고 신이 난 민암은 이것이 서인 세력을 박살내버릴 기회라고 판단, 이를 숙종에게 고했다. 숙종은 특별히 엄한 형벌을 쓰라고 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공교롭게도 장희재 집안 사람들이 민암, 오시복을 비롯한 남인 수뇌부와 결탁하여 최 숙원(훗날의 숙빈 최씨)를 해치려 한다는 정반대의 고변이 들어왔다. 그러자 숙종은 즉시 민암을 비롯한 남인 세력을 개발살내버리고 다시 서인 정권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이다.

그리고 김춘택과 한중혁 일당은 은화를 모으고 해상진인 운운한 탓에, 인현왕후의 복위에 공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모자들은 처음에는 변방에 정배하나 이후에는 재조사에 들고 와서 이시도와 강만태는 갑술환국이 일어난 같은 시기에 처형되었고, 김춘택, 한중혁, 이시회, 최격은 1697년에 다시 한번 조사에 들어가서, 이때는 한중혁, 이시회, 최격이 죽임을 당하고 김춘택은 유배 생활을 들어가며 곤궁한 삶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인현왕후의 복위를 논하는 자는 세자를 흔드는 자니까 역적이다! 라고 선언하더니 며칠도 못가서 인현왕후에게 별궁에 들어와 살것을 명하고 급료도 지급했다.

그러더니 "폐비가 하는 걸 보니까 뉘우치는 것이 간절하더라고, 폐비를 신구해도 역률로 다스린다는 거 취소"라고 선포했다. 그러곤 얼마 가지 않아서 인현왕후를 다시 중전으로 삼고 희빈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해버린다. 한편 남인들은 대부분 조정에서 축출되어, 민암, 이의징은 사사가 되었고 조사기와 목창명은 처형되었으며,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은 유배와 향리로 추방하는 등, 대대적인 남인 숙청을 감행해서 완전히 세력을 없앨 정도로 몰락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보고 분노한 희빈 장씨는 오빠 장희재의 첩 숙정과 결탁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하는 한편 이홍발을 비롯한 남인 세력을 규합하여 장희빈의 아버지의 무덤과 비석을 파괴하고 저주의 상징물을 묻어둔 다음에 장희재의 종인 업동을 시켜 고변하게 했다.

그리고 서인 정권의 핵심인 병조 판서 신여철의 종인 응선의 호패를 훔쳐서 증거물로 바쳐 서인의 행위라고 뒤집어 씌울 속셈이었지만 응선은 매를 맞아 죽으면서도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여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업동이 술에 취해서 내일이면 묘소에서 재밌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증언이 나왔고 이를 수사하던 남구만, 유상운은 장희빈 일가의 자작극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세자의 위치를 걱정하여 국청을 여기서 접자고 건의했으나 삼사가 반발하면서 수사는 재개되었고 이홍발을 비롯한 남인 7명이 처형되었다.

희빈 장씨 일가는 다행히도 피를 보지 않았으나 인현왕후가 죽은 이후 숙빈 최씨가 희빈 장씨가 중전 마마를 저주했다고 고변하면서 일이 커졌다. 숙종은 희빈 장씨를 사사할 것을 명령했고 결국 창경궁 통명전 앞에서 죽음을 맞는다. 이 시기 장희재의 아내 자근아기가 인조의 첩인 소용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 이징의 아들 동평군 이항, 이의징, 김덕원 가문의 자제들, 오시복 등이 장희재와 결탁하여 한 각종 '불순 행위'를 낱낱이 고변했고 덕분에 장희재와 동평군은 함께 죽게 된다.

3.4. 1721년 신축환국과 1727년 정미환국

갑술환국 이후에 남인 처분 문제를 놓고 소론 남구만, 유상운 등이 온건론을 펼치자 송시열 등 핵심 인물들이 대거 죽임을 당한 범서인계가 격노하였고 강경론을 주장한 노론이 압도적인 다수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숙종은 남인에 대해서는 사사나 처형보다 유배나 방귀전리[17]를 선호해, 남인들은 과거에 북인들이 처참하게 당할 때와 다르게 목숨을 많이 보전하게 된다.[18]

더군다나 숙종은 중앙 관직을 노론과 소론에게 적절하게 배분되며, 노론이나 소론 모두, 권력이 견제되어서 권력 독주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무고의 옥, 임부의 옥사, 이잠의 옥사 등을 기점으로 노론이 점점 권력을 확대하고 숙종이 능력이 안 좋은 세자(경종)를 안 좋아하고, 연잉군(영조)과 연령군을 친하면서 서서히 조정의 기류가 변하기 시작되더니 병신처분으로 권력 균형을 없앴다. 그리고 숙종의 의중에 따라 정권을 잡은 노론은 세자를 흔들기 위해 세자에게 대리 청정을 시켰지만 세자가 무난하게 일을 처리하면서 일이 꼬이게 된다. 결국 숙종이 예순을 일기로 승하하고 당시 왕세자였던 이윤(훗날의 경종)은 왕좌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압도적인 힘을 가진 여당이었던 노론은 경종을 만만하게 보고 안하무인으로 굴었는데 경종이 누구 피를 이어받았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바람에... 자세한 것은 신임옥사 참조. 경종이 4년만에 승하하자 경종 연간에서 죽을 뻔 했던 영조는 김일경 문제를 들고 나와 소론을 내쫓아버리고 삼수의 옥을 주도한 김일경, 목호룡을 처형한다. 어찌보면 이것도 환국이라면 환국이다. 최석항,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의 실세들이 죄다 쫓겨나고 삼정승, 승정원, 대간이 모두 노론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죽은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을 비롯한 노론 4대신을 신원하여 대충 당쟁을 수습하려 했는데 골이 너무 깊어진 노론은 정호, 민진원을 비롯한 강경파들이 주도하고 있었고 왕의 당쟁 자제 요구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살아남은 소론인 이광좌, 조태억, 최석항 등을 모두 죽일 것을 청했다. 결국 영조는 하는 수 없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필살기를 가동하니 자세한 것은 정미환국 참조.

그런데 숙종이 희빈 장씨, 인현왕후를 위해 환국을 한 것이 아니라 환국을 위해 희빈 장씨, 인현왕후를 이용했다는 주장도 강력하게 제기된다. 확실히 훗날 병신처분을 통해, 소론과 노론 간의 권력 균형을 무너뜨리며 장희빈의 아들이라 껄끄럽기도 하고, 영 똘똘해보이지 않는 세자 (경종)를 쫓아내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해석이 강하다. 하지만 기사환국까지는 몰라도 갑술환국이 터지는 시점에서는 남인 정권이 숙종의 의중을 철저히 따르는 경향이 강해서 숙종이 굳이 남인들을 내쫓을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 있다. 게다가 이때는 세자를 숙종이 나서서 보호하던 시점이니 세자 문제도 관여가 되지 않았다.

4. 기타

환국과 비슷하게 정국이 전환되지만 그보다는 강도가 약한 것으로 처분이라는 표현이 있다. 예컨대 숙종의 병신처분이 있는데, 병신년(1716년)에 회니시비 문제를 재평가하여 윤증은 스승을 모욕한 패륜아로, 그리고 윤선거와 유계의 공저로 결정되었던 《가례원류》는 유계의 단독 작품으로, 송시열이 윤선거를 모욕한 증거가 없다고 종전의 판단을 모조리 뒤집으면서 결과적으로 2년 전 죽은 윤증을 단박에 격하시키고 노론의 손을 들어준 처분을 뜻한다.

영조의 경우, 1725년 즉위 직후의 을사처분(노론 복권), 1729년 단행한 기유처분(노소론 협상 - 탕평파)과 1740년 단행한 경신처분(소론 배제, 노론 복권) 등이 있다. 이렇듯 처분은 아버지 숙종보다는 영조가 주로 시전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현대 대한민국에서 민주화 이후 집권 여당이 바뀌고 정국이 뒤집힐 때 '환국'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친이-친박이 총선을 앞두고 공천 학살을 번갈아 했던 것도 환국과 비슷한 현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19]

5. 관련사항



[1] 영조의 탕평은 붕당 활동을 원천적으로 불허하는 완론 탕평(기계적 탕평), 정조의 탕평은 붕당 활동을 허용하되 당파의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리는 준론 탕평(능동적 탕평)을 채택했다.[2] 이 용어들은 이후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에서 붙인 표현들이다. 그래서 남인들을 밀어내면 '출척'이 되고, 자신들이 쫓겨나면 '사화'가 되는 것이다.[3] 다만 '갑인예송'은 뒤에 환국과는 달리, 피 흘리는 일은 없었고, 서인이 실각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김만기, 김만중, 김익훈, 김석주, 김우명, 남용익, 이상진, 정치화, 정지화, 정재숭, 박신규, 박태상, 오두인, 홍처량, 조사석, 남구만, 이정영, 홍만종, 민시중 등의 서인들이 나름 조정에 남아있었다. 당시의 서인은 야당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영향력이 많았고, 여당 같은 야당으로 군림했다. 그 외에도 한 때 민정중도 판중추부사로 복직했었던 적이 있다.[4] 근데 세 번의 환국(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은 각자 환국마다 다른 측면도 있다.[5] 당시만 해도 김우명은 서인이지만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과 사이가 나빴다.[6] 다만 이 때까지는 피 흘리는 일은 없었고 이 때까지만 해도 서인과 남인은 철천지원수까지는 아니었다. 그냥 정책적으로 대립했을 뿐이다.[7]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닌데 병권의 경우 안전을 위해 외척에게 맡기는 일이 많았다. 김석주의 경우에는 그의 사촌이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이므로 명백히 외척이다.[8] 송시열의 스승인 김집의 아들이다.[9] 더 큰 문제는 남인들이 정권 말기로 갈수록 권력에 대한 탐욕이 커졌다는 것으로 특히 군권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여 숙종을 불안하게 만들었다.[10] 청남의 영수 중 윤휴는 사약을 먹고 죽는데 또 다른 당수인 허목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별세했다.[11] 사실 여기서부터 환국정치의 문제점이 드러나는데 이 때에 남인의 거물들이 다수 죽어나가고 이 때문에 후일 벌어지는 보복에서 서인들이 죽고 다시 정권이 바뀌니까 남인들이 죽고... 이런 식으로 개싸움 정치가 되어버렸다. 물론 붕당정치라는게 기축옥사, 광해군의 옥사들, 인조반정처럼 피가 많이 흐른 사건도 존재하긴 했지만 그래도 상대 당파를 완전히 멸절시키려는 식의 대립은 아니었고 예송논쟁처럼 피가 흐를 수 있던 사건도 잘 조율해서 안 죽고 끝났지만 한번 정치보복이 벌어지자 그걸 보복하겠다고 또 보복하는 식의 막장극이 시작되어버렸다.[12] 이이와 성혼을 문묘(文廟)에 배향하는 것.[13] 서인들은 인조 때부터 꾸준하게 요청하였으나 인조는 당쟁을 워낙에 혐오하여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효종과 현종은 너무 강력한 서인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여 들어주지 않았는데 그제서야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14] 이는 장렬왕후가 1688년 9월 즈음 세상을 떠나고, 그 직후에 원자인 경종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만약 장렬왕후가 경종 출산 직후까지라도 살아있었다면 원자 책봉 자체는 늦어질수도 있었다.[15] 적어도 남인들은 대놓고 찬성할 수는 없었다. 왕과 신하가 군신관계이듯 왕비와 신하도 마찬가지로 군신관계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16] 이때 남인 정권의 레임덕도 이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17] 죄를 지은 관리가 지방에 있는 고을에서 아전으로 생활하는 형벌로 당시에 아전이 녹봉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무거운 형벌에 가까웠다.[18] 참고로 1623~1624년 인조반정이괄의 난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에 있었던 북인 숙청은 참혹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때는 이이첨, 기자헌, 류희분, 유몽인,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 대신들이 죽임을 당하고, 박승종은 처벌이 두려워 자결할 정도였다.[19] 다만 공천 학살을 환국과 비슷한 현상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공천 학살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항상 행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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