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2-02 21:31:31

김만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Kim_Man-jung.jpg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48호 서포 김만중 영정
대전역사박물관 소장. 위키 이미지

金萬重
(1637년 ~ 1692년)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조선시대 때의 인물. 호는 서포. 본은 광산(光山).

2. 생애

아버지 김익겸이 정축호란(병자호란 이듬해) 당시 강화도에서 순절[1]한 탓에,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태어났다. 그 유명한 전쟁 통에 태어난 유복자. 어머니 해평 윤씨[2]에게서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어머니 윤씨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녀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고, 어린 김만중이 집안 살림을 걱정해 보고싶은 책을 사지 않자 회초리를 치면서 자기가 하루종일 짠 옷감 절반을 뚝 잘라 줬을 정도였고, 또 자신이 직접 서책을 빌려와서 교본을 만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만중은 대단한 효자였다. 그의 소설 구운몽이 홀로 되신 어머니의 여흥을 위해 읽기 쉬운 한글로 지어진 소설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3][4]

그의 형 김만기는 숙종의 장인[5]으로, 현종 말엽부터 숙종 초엽까지 막강한 권세를 행사했던 인물이었으며 숙종의 환국(조선) 정치에도 적극 관여하여 남인들을 박살내는 데 큰 몫을 한 인물이었다. 당파적으로 김만기와 김만중은 모두 서인에 속했고, 만기 - 만중 형제 모두 송시열의 열렬한 추종자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김만중 형제의 증조부가 다름 아닌 이이의 학통을 이어 조선 중기 서인의 사상적 흐름을 주도한 김장생이다. 또한 우암이 김장생의 학통을 이어받은 입장이기도 했고.[6]

어쨌든 이런 어머니의 정성과 김만중 본인의 노력으로 1665년에 과거에 급제,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도와 충청, 전라, 경상도를 시찰했고 이듬해에는 동부승지가 되었지만, 효종인선왕후의 사망으로 불거진 제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배하자 서인이었던 김만중도 파직되어 처음으로 관직 생활에서 쓴맛을 보게 된다.

1679년에 복직하여 예조 참의, 공조 판서, 대사헌 등을 지냈지만 탄핵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고, 1686년에는 장희빈 일가에 대해서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분노를 사서 처음으로 선천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최근 발견된 서포연보에서는 그간 알려진 것과는 달리 구운몽이 선천 유배 시절에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듬해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 세력이 대거 축출되면서 김만중도 다시 탄핵을 받아 남해의 노도[7]로 유배되었다. 어머니 윤씨는 아들을 걱정하다가 사망했으며, 김만중은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채 유배지인 남해에서 1692년에 끝내 사망했다. 알려지기로는 남해에서 숙종을 참회시키기 위해 사씨남정기를 집필했다고 한다. 실제로 숙종사씨남정기를 보다가 주인공[8]의 처사에 분노해 책을 집어던졌다고 한다.

3. 기타

조선 시대의 다른 사대부들과는 달리 한글로 소설을 쓴 인물인데, 실제로도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고 한다. 이런 면모는 2003년 KBS판 장희빈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구운몽의 경우는 한문본과 한글본이 모두 존재하는데, 대체로 학자들은 가장 오래된 구운몽 필사본이 한글판인 것으로 보아 김만중이 한글로 구운몽을 썼을 것이라 본다. 이로 인해 김만중은 한글로 쓴 것이 국문학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인정받는다. 당시 조선 사회의 상류층들이 한글을 '언문(諺文)', 좀 더 심하게 얘기하자면 '암클'(여자들이 쓰는 글), '중글'(승려들이 쓰는 글), '아햇글'(아이들이 쓰는 글), '상말글'(상민들이 쓰는 글)이라고 푸대접했던 데 비해, 김만중은 한글을 국서(國書)라고 칭할 정도로 한글을 높이 평가했다.

김만중이 정철의 문학 3편(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좌해진문장[9]이라며 높게 친 것도 한글 비중이 높고 표현이 수려했기 때문이며, 그 중에도 한글 비중이 가장 높은 속미인곡을 최고로 쳤다.[10]

2010년에 김만중 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개최함으로써 그의 활약상을 현대에도 기리고 있다.참조


[1] 강화성이 청군에게 무너지자, 책임자가 아님에도 화약으로 자폭한 김상용(아우가 김상헌이다. 형이 이렇게 죽었으니 더더욱 청을 증오할 수 밖에)과 같이 자살했다. 정작 책임자인 찌질이 김경징은 달아났다가 사약을 먹고 죽는다.[2] 윤두수의 손자인 윤신지(尹新之)의 손녀. 할머니는 선조인빈 김씨의 딸인 정혜옹주(貞惠翁主)이다.[3] 그런데 저게 사실이면 굉장히 해괴한 상황이 벌어지는 게, 구운몽은 공부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현대 미연시 구조와 굉장히 흡사하다. (특히 하렘) 이런게 어머니의 취향에 맞았다면 그 어머니는 설마 여덕후?(…)[4] 여성들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춰 보면 그 시대의 순종적인 여성상과는 다른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이 어머니를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다.[5] 숙종의 첫째 왕후인 인경왕후 김씨가 그의 여식이다.[6] 하지만 의외로 교조주의 성리학적 관점을 가지진 않았을거란 설이 많다. 그의 소설을 봐도 알겠지만 불교적, 도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하기도 하고 별로 대접받지 못한 소설을 그것도 한글로 쓴 것만 해도... 때문에 그가 과연 당대의 교조주의자였던 송시열의 추종자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부분. 근데 송시열이 열혈 주자 추종자였던 것이야 이론이 없지만 그렇게까지 꼴통이었던 건 또 아니다. 송시열 항목 참조. 그리고 김만중의 행위는 송시열 추종자가 아니면 도무지 안할 짓들이 많아서리... 송시열을 위해 유배까지 간 양반이 김만중이다.[7] 렛츠고 시간탐험대가 이곳에서 조선 시대 유배 생활을 재현했다. 김만중이 살던 집도 복원되어 있었다.[8] 공부한 사람은 알겠지만, 이 주인공의 모델이 숙종이다.[9]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10] 비록 정철과 시대는 다를지언정 김만중과 마찬가지로 서인으로 영수까지 지낸 인물이고, 정철의 미인곡의 주 내용은 유배 중이던 정철이 '임금님 싸랑해요, 그러니까 나좀 풀어줘요라는 식의 내용' 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역시 유배중이던 김만중에게는 더더욱 마음에 와 닿았을 것이다. 단 차이점이라면 그의 경우엔 사씨남정기를 쓰면서 숙종을 모델로 한 유연수라는 남자 캐릭터를 창조하여 숙종을 대차게 깠다. 단, 여기에는 김만중이 노론으로 인현왕후와는 인척이라서 인현왕후 옹호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