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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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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부원군 한경 상산부원군 강윤성 김천서 여흥부원군 민제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청천부원군 심온 화산부원군 권전 여량부원군 송현수 파평부원군 윤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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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백 최한기 서원부원군 한확 능안부원군 구사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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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릉부원군 조문명 영풍부원군 홍봉한 풍은부원군 조만영 }}}
조선 왕비 · 조선 추존 왕비 · 대한제국의 국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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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태조 ~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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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하부사
홍영통, 안종원, 권중화, 심덕부, 이화, 이거이, 조준, 김사형
초대

이서
제2대

이거이
제3대

성석린
제4·5대

조준
제6대

성석린
제7대

이화
제8대

하륜
제9대

이서
제10대

하륜
제11대

성석린
제12대

하륜
제13대

성석린
제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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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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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이직
제20대

황희
제21대

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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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하연
제22대

황보인
제22대

황보인
제23대

이유
제24대

정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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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손
제26대

강맹경
제27대

정창손
제28대

신숙주
제29대

구치관
제30대

한명회
제31대

황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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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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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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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문
제35대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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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대

박원형
제37대

한명회
제38대

홍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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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대

윤자운
제40대

신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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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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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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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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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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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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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태조 ~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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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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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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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남지
제28대

김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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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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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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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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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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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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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자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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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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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세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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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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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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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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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근
<colbgcolor=#c00d45,#94153e> 역대 정승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역대 영의정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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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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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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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역대 영의정
(태조-연산군 · 중종-광해군 · 인조-경종 · 영조-정조 · 순조-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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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11월 8일 단종에 의해 책록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1등)
권람 김효성 박종우 박중손
이계전 이사철 이유 정인지
최항 한명회 한확 홍달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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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충협책정난공신 (2등)
곽연성 권준 류수 류하
봉석주 신숙주 양정 엄자치
윤사윤 전균 홍윤성
수충정난공신 (3등)
강곤 권경 권언 김처의
류사 류서 류자환 설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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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진 한서구 홍순로 홍순손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좌익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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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년 9월 5일 세조에 의해 책록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 (1등)
권람 신숙주 윤사로 이곤
한명회1 한확 이증2
수충경절좌익공신 (2등)
강맹경 권반 양정3 윤암
이계린 이계전 이사철 전균
정인지1 정창손1, 4 최항 홍달손
윤형5
추충좌익공신 (3등)
구치관 권공 권자신6, 7 박강
박원형 성삼문6, 8 원효연 윤사윤
윤자운 이극감9 이극배 이예장
이징석 이휘6 정수충 조득림
조석문 조효문 최유 한계미
한종손 황수신 황효원 홍윤성10
김질11
1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한 제명, 1506년 중종 때 복권
2 1458년 6월 29일 세조에 의해 책록
3 1466년 연회에서 세조에게 양위를 종용한 혐의로 인한 제명
4 1456년 7월 3일 세조에 의해 3등에서 2등으로 책록
5 1455년 10월 22일 세조에 의해 책록
6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으로 인한 제명
7 1699년 숙종 때 복권
8 1691년 숙종 때 복권
9 1504년 아들 이세좌와의 연좌로 인한 제명
10 1455년 11월 12일 세조에 의해 책록
11 1456년 7월 3일 세조에 의해 책록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익대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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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8년 10월 28일 예종에 의해 책록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 (1등)
신숙주 신운 류자광 한계순
한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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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충보사정난익대공신 (2등)
박원형 박지번 심회 이극증
이복 이부 이서 이준
이침 정현조
수충정난익대공신 (3등)
강곤 권감 권찬 김효강
노사신 류한 박중선 서경생
신승선 안중경 어세겸 윤계겸
이존명 정인지 정창손 정효상
조득림 조석문 조익정 한계희
한백륜 홍응 }}}}}}}}}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좌리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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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년 3월 2일 성종에 의해 책록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 (1등)
권감 김국광 신숙주 윤자운
정현조 조석문 최항 한명회1
홍윤성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2등)
김질 송문림 심회 윤사흔
이정 이침 정인지1 정창손1
한계미 한계희 한백륜 구치관
순성명량좌리공신 (3등)
강곤 김겸광 강희맹 노사신
박중선 서거정 성봉조 신승선
양성지 윤계겸 이극배 이극증
이숭원 임원준 정효상 한계순
한치형1 홍응
순성좌리공신 (4등)
구문신 김교 김길통 김수녕
김수온 김순명 류수 류지
박거겸 선형 신정2 신준
심한 어유소 오백창 우공
윤필상1 이극돈3 이석형 이수남
이숙기 이승소 이철견 이현
이훈 정난종 정숭조 한보
한의 한치례 한치의 한치인
함우치 허종 황효원
1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한 제명, 1506년 중종 때 복권
2 1482년 성종의 인신을 위조해 남의 재산을 탈취한 혐의로 인한 제명
3 1504년 조카 이세좌와의 연좌로 인한 제명, 1511년 중종 때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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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 역대 종묘 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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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 태조 조준, 의안대군, 이지란,
조인옥, 남재, 이제, 남은
정종 익안대군
태종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세종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 양녕대군, 효령대군
문종 하연
세조 권람, 한확, 한명회
예종 박원형
성종 신숙주, 정창손, 홍응
중종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정광필
인종 홍언필, 김안국
명종 심연원, ■이언적
선조 이준경, ■이황, ■이이
인조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능원대군
효종 김상헌, ■김집, ■송시열,
인평대군, 민정중, 민유중
현종 정태화, 조경, 김좌명, 김수항, 김만기
숙종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경종 이유, 민진후
영조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장조 이종성, 민백상
정조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순조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남연군, 조만영
문조 남공철, 김로, 조병구
헌종 이상황, 조인영
철종 이헌구, 익평군, 김수근
고종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순종 송근수, 이완용, 서정순
: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동배향)
: 문묘 배향 18현을 겸하는 6인(서배향)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단군
동명성왕 온조왕
이사부 백결선생 의자왕 계백
김관창 김유신 문무왕 원효
혜초 장보고 고왕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죽림고회
김부식 지눌 의천 이종무
정몽주 문익점 최충 일연
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이 이황
신사임당 곽재우 조헌 김시민
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 생육신 논개 권율
홍길동 임꺽정 삼학사 박문수
한석봉 김홍도 김병연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이상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colbgcolor=#7e2f22><colcolor=#ffd400>
조선 예종, 성종의 장인 | 장순왕후, 공혜왕후의 부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충성공(忠成公)
한명회
韓明澮
출생 1415년 12월 5일한성부
[1]
(음력 태종 15년 10월 25일)
사망 1487년 12월 7일[2] (향년 72세)
(음력 성종 18년 11월 14일)
묘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속창리
재임기간 제30대 영의정
1466년 12월 5일[3] ~ 1467년 5월 18일[4]
(음력 세조 12년 10월 19일 ~ 세조 13년 4월 6일)
제37대 영의정
1469년 2월 13일[5] ~ 10월 6일[6]
(음력 예종 1년 1월 23일 ~ 8월 22일)
서명 파일:한명회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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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7e2f22><colcolor=#ffd400> 봉호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7]
시호 충성(忠成)
본관 청주 한씨
자준(子濬)
압구(狎鷗),[8] 압구정(狎鷗亭), 사우당(四友堂)
공훈 계유정난 1등 정난공신
좌익 1등 공신
익대 1등 공신
좌리 1등 공신
비고 연산군 때 부관참시
중종 때 사후 복권
부모 부친 - 한기(韓起)
모친 - 여주 이씨
부인 황려부부인(黃驪府夫人) 여흥 민씨
자녀 9남 7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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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려부부인 소생 - 1남 4녀 ]
장녀 - 고령 신씨 신주(申澍)의 처
차녀 - 파평 윤씨 영천군(鈴川君) 윤반(尹磻)의 처
3녀 - 장순왕후
장남 - 낭성군(琅城君) 한보(韓堡)
4녀 - 공혜왕후
[ 측실, 정경부인 연일 정씨 ]
서장남 - 한복(韓福)
서차남 - 한임(韓林)
서3남 - 한수(韓壽)
[ 측실, 정경부인 전주 이씨 ]
서4남 - 한목(韓睦)
서5남 - 한석(韓碩)
서6남 - 한서(韓恕)
서7남 - 한우(韓佑)
서8남 - 한온(韓瘟)
서장녀 - 강희건(姜希蹇)의 처
서차녀 - 신승손(申承孫)의 처
서3녀 - 홍갑생(洪甲生)의 처
}}}}}}}}}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3.1. 가계도
4. 평가5. 기타6.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전기의 권신이자 외척이며 정치가다. 수양대군으로부터 "나의 장량이로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조선 초기 세조 ~ 성종 연간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호(號)는 그 유명한 압구정압구(狎鷗).

예종의 첫 번째 왕비인 장순왕후와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의 아버지가 되어 두 왕의 국구라는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며 손자 한경침(韓景琛)은 성종의 서녀인 공신옹주(恭愼翁主)와 혼인했다.[9]

2. 생애

대표적인 칠삭둥이 인물. 7개월만에[10] 태어났으며 배 위에 별 모양의 점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 태어났을 때는 칠삭둥이답게 사람의 형체마저 갖추지 못해 부모는 아이의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다고 한다. 그래도 살아서 꿈틀대기에 차마 버리지는 못해서 유모로 내정되어 있던 여종이 몰래 이불을 둘둘 말아 따뜻한 방에 뒀다. 놀랍게도 아기는 죽지 않고 무럭무럭 자랐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나 사람의 모양새를 다 갖춘 뒤에야 비로소 유모는 집안 어른들에게 한명회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보통 이렇게 조산하여 태어난 아기들은 일찍 죽거나 건강이 좋지 못한데 기적적으로 건강하게 컸다고 한다.

굉장한 명문가 출신으로, 7대조 한강(韓康), 6대조 한사기(韓謝奇), 5대조 한악(韓渥), 고조 할아버지 한공의(韓公義), 증조 할아버지 한수(韓脩) 등은 <고려사> 열전에도 입전된 고려 말기의 정치적 권력이 강성한 유력자였다. 특히 한수는 고려 공민왕 대의 정치가이며 대학자였고 학문 실력 및 과거 급제 연령으로 보면 목은 이색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색보다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인지도가 낮은 편. 거기에 고려 말 권문세족이자 대신이었던 경사만(慶斯萬), 권적(權適), 원경(元卿)의 외손이기도 했다.

할아버지 한상질명나라에 가서 조선 국호를 허락받아 왔고, 한상질의 동생, 즉 한명회의 종조부인 한상경은 개국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대부분의 사극에서 초년기엔 별 볼일 없는 인물로 묘사되지만, 실은 당대 손에 꼽는 금수저 출신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40살까지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곳곳의 명산을 둘러보기 위해 전국을 유람하느라 해가 다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등 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였고 아무래도 소위 말하는 공부머리와 잔머리가 따로 노는 인물이었는지 번번이 낙방했다. 결국 문종 2년인 1452년 음서로 관직에 들어가[11] 태조가 왕이 되기 전 살던 집인 개성에 있는 경덕궁의 관리직을 맡았다. 이 때 개성에 와서 벼슬하는 서울 출신 사람들끼리 송도계(松都係)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었는데 한명회가 이 자리에서 가입을 희망했으나 말단직에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단순한 거절 정도가 아니라 "경덕궁직도 벼슬이냐?"라고 한바탕 비웃음을 당해 아주 개망신을 당했다.[12] 그러나 세종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기 시작한다.

과거 공부 때부터 친했던 권람의 추천으로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던 수양대군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참모가 되어 수완을 발휘했다. 특히 많은 깡패 무뢰배들을 포섭하고, 홍달손을 비롯한 무장들을 끌어들였으며 수양대군의 정적인 김종서안평대군 일파의 정보를 수집해서 마침내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계유정난의 주역으로 공신 반열에 오르면서 일약 인생 역전에 성공한다.[13] 또 수양대군이 무사들을 불러놓고 거사를 종용하자 무사들의 의견이 서로 분분하게 갈라져서 생각보다 호응이 신통치 않았다. 수양대군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한명회가 "길가에 집을 지으려면 3년이 지나도록 다 짓지 못합니다."라면서 결단을 촉구했고 홍윤성도 "군사를 내어 적을 치는데 가장 큰 문제가 결단하지 못하는 문제입니다."라고 거들었고 이에 수양대군이 "죽고 사는 건 하늘에 달렸다. 떠날 자는 떠나고 따를 자는 따라라."라고 외치고 김종서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이는 세조의 결단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14]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 움직임을 간파한 것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별운검을 폐하여 사육신의 계획을 좌절시켜 세조의 목숨을 구했다.[15] 이런 지대한 공 때문에 세조는 그를 "나의 장자방이다."라고 평가했다.[16] 이후 왕실에 두 딸을 시집보내고 정승이 되면서 최강의 권력자로서 권세를 휘둘렀다. 세조 사후 예종, 성종 초반까지 그 권세가 계속되었다.

야사에는 술자리에서 취한 나머지 세조의 팔을 꺾어버리는 실수를 저지른 신숙주를 도운 일화도 남아 있다. 세조가 먼저 신숙주의 팔을 잡아 비튼 후에 "경(卿)도 따라해 보라"고 하자 신숙주가 정말로 세조의 팔을 비틀어 버린 것이다. 어찌나 세게 비틀었는지 세조가 비명을 크게 질렀을 때 동석하고 있던 세자가 심기가 뒤틀렸는지 신숙주를 쏘아보자 세조는 분위기상 세자에게 "나는 이러고 놀지만 너는 이러고 놀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원복의 만화 <사랑의 학교>에서도 나오는데 비명을 지른 세조가 정색하고 굳은 얼굴로 쳐다보는 걸 한명회가 보고 '주상께서 정말로 기분이 상하셨군!'이라고 알아차린다. 신숙주는 술에 취해도 조금만 깨면 책을 읽는 습관이 있었는데[17] 연회가 끝나고 한명회가 신숙주의 하인에게 "오늘 들어가서 주인이 드러누우면 꼭 옆에 있는 촛대를 전부 치우거라."라고 당부했다. 술에 정말 취한 신숙주는 헤롱헤롱거렸지만 버릇대로 자다 깨서 책을 읽기 위해 어둠 속에 초를 한참 찾다가 불을 켜려 했지만 촛대를 찾을 수 없어서 도로 누워서 코를 골면서 잤는데 세조가 신숙주가 정말 취해서 벌인 행패였는지를 확인하려고 신숙주의 집에 내시를 보낸 상태였다. 만일 신숙주가 깨어서 책을 읽고 있었다면 내시는 신숙주가 술이 안 취하고 멀쩡히 깨어서 책을 보고 있더라고 보고를 올렸을 것이고 의심이 많은 세조는 "신숙주가 제정신으로 취한 척을 해 왕인 나를 능멸했다!!!"라며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한명회의 기지 덕에 몰래 찾아온 내시는 코고는 소리와 같이 불이 꺼져있는 걸 보고 신숙주가 술에 취해 자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면서 세조는 "신숙주가 그렇게 취했으니 그랬겠지."라며 피식 웃으면서 넘어갔다고 한다.[18]

백수 시절부터의 친구인 권람이 미녀였던 젊은 여종에게 마음이 있었으나 아내 눈치를 보느라고 어쩌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한명회가 권람에게 상사병을 앓는 것처럼 하라고 한 후 회화나무 꽃을 삶은 물을 권람에게 줘서 "이걸 온몸에 바르고 황달 걸린 것처럼 해."라고 했다. 그리고는 권람의 부인에게 우는 척하면서 "아이고. 부인께서 계집 하나를 아껴서 내 친구 죽게 생겼다!"고 통곡하는 연기를 하자 권람의 부인은 길일을 택해 여종을 권람에게 보냈다고 한다. 다음날 한명회가 권람을 찾아가니 권람이 "대사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자 두 사람이 껄껄 웃었다는 야사도 남아 있다.[19] 야사에는 한명회의 꾀나 지혜와 관련한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사극 등지에서 꾀 많은 책략가처럼 묘사되는 것은 이런 면모 때문인 듯하다.

훈구파의 영수로 정국을 이끌었고 한명회의 도움으로 재상이 된 인재도 많았으며 도량도 컸다는 평가를 당대에 들었고 사재를 털어 성균관의 도서 및 시설 등 보충에 도움을 줘서 당시 선비들이 비범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보스 기질이 강했던 인물답게 통도 컸던 대인배 기질도 있었다. 한명회의 권세가 어찌나 막강했는지 대간들이 한명회를 비판하지 못했고 사간원의 간원 1명이 한명회가 몸담고 있던 원상제 폐지를 권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대간들이 "너 미쳤냐? 원상제가 얼마나 좋은 제도인데 그걸 왜 없애? 왜 네놈이 멋대로 한 일 때문에 우리까지 피봐야 하는 거냐고?"라고 몰아세웠고 대사간까지 "죽기 싫으면 당장 철회하라."고 협박했는데 이 과정이 공개되면서 사간원이 죄다 갈려버리는 사간원 입장에서 망신살스러운 사태까지 있었다. 예종 때는 왕도 못 보는 <조선왕조실록>의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들이 대신들의 비행을 적기가 두려워 이미 제출된 사초를 빼돌려 대신들의 허물을 감추는 식으로 수정하다가 들켜서 목이 달아나는 일이 있었다.[20]

그러나 성종에게 시집보낸 막내딸 공혜왕후가 후사없이 요절하고[21] 성종이 장성하면서 한명회의 권세도 수그러진다. 특히 수렴청정을 거두고 성종에게 친정을 시키겠다고 언문교지를 내린 정희왕후에게 "대비마마께서 물러나시면 우리가 불안해서 술 한 잔도 못 한다니까요."라고 오버하는데 성종이 "그럼 날 못 믿는다는 거냐?"라고 정색하면서 상당히 궁지에 몰렸다. 대간의 탄핵이 시작되면서 결국 한명회는 좌의정 직에서 자진해 물러나 보통 신하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후에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와중에 생겼던 압구정 사건[22]으로 직첩이 거둬지는 수모를 당했으나 쓸쓸하기는 해도 영화롭게 살다가 73세로 생을 마감했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성종에게 한 유언은 명언. 이 말은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말을 마치고 생을 마감했다.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이니, 원컨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
- 성종실록 209권, 18년(1487년 정미 / 명 성화(成化) 23년) 11월 14일(기유) 2번째 기사,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졸기

한명회의 묘는 충청남도 천안시에 있는데 묘역 밑에 한명회의 사당충모사(忠募寺)가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묘역 바로 앞을 지나가고 있어서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모르는 사이에 지나치게 되는 셈. 서울에서 부산 갈 때 천안휴게소에서 차로 5분 정도 지나면 좌측에 큰 무덤이 2개가 있다. 앞의 것이 한명회의 묘소이고 뒤의 것이 한명회 부인 민씨의 묘. 그 뒤 연산군 때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와 관련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무덤이 파헤쳐졌고 시신의 목이 베어져 해골이 부서진 채로 길바닥에 내걸리는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한명회의 사후는 비참했다. 이후 중종 때에 신원된다.

3. 가족관계

정실 황려부부인 여흥 민씨단종비인 정순왕후의 모친인 여흥부부인과 사촌지간이다.

정실 부인 민씨와 여러 첩이 있었으나, 첩실의 존재는 네 명이 확인되고 있다. 이 중 정종화(鄭宗和)의 딸 연일 정씨전주 이씨는 세조가 형수라고 부르며 특별히 정경부인에 봉작하였으므로, 이후 정식 부인으로 대우하게 되었다.

장녀는 신숙주의 며느리, 차녀는 정현옹주의 며느리이며 그 중에서 3녀는 예종의 왕비인 장순왕후, 4녀는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로 시집보내어 왕의 장인국구(國舅)로서도 군림했다. 그러나 장순왕후공혜왕후가 요절하는 바람에 외손을 전혀 얻지 못하여, 대대로 외척은 되지 못했다.

아들 중 한보(韓堡)[23]가 적자인데, 장순왕후의 동생이자 공혜왕후의 오빠이다. 연산군갑자사화에 연루되어서 처형될 뻔했으나 살아남아 중종 때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한보는 측실이 많아 거기서 본 아들들도 많아서[24] 현재까지도 가게가 이어져 오고 있다.[25]

한보의 장남인 한경기(韓景琦)는 젊은 나이에 여자를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병에 걸려서 여성들과의 접촉을 일체 피하는 바람에[26] 후손을 두지 못했다는 말이 있지만[27], 한경기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28] 아들 협(勰)을 뒀다. 그런데 김안국이 쓴 한경기의 묘지문을 보면 "아들 협은 정실인 두 부인에게서 낳은 게 아니라 측실을 통해 얻었다(其配曰先娶李氏 宗室鶴林君頤之女 後娶金氏 肅川府使克鏘之女 皆無子 只側室生一子曰勰)"라고 되어있다. 충성공파는 이 서자를 통해 현재까지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29]

3.1. 가계도

조상
  • 고조부 : 한공의(韓公義) - 호부상서(戶部尙書)
    • 증조부 : 한수(韓脩) -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 조부 : 한상질(韓尙質, 1350 ~ 1400) - 예문춘추관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
      • 조모 : 창화군부인 경주 이씨 (昌化君夫人 慶州 李氏) -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이성림(李成林)의 딸
      • 조모 : 창화군부인 청풍 송씨(昌化夫夫人 淸風 宋氏) - 청풍도사(淸風都事) 송신의(宋臣議)의 딸
        • 아버지 : 한기(韓起, 1393 ~ 1429) - 사헌부감찰 증 영의정(司憲府監察 贈 領議政)
        • 어머니 : 정경부인 여주 이씨(貞敬夫人 驪州 李氏) - 예문관 대제학 이척(李逖, 1370 ~ 1419)의 딸
          • 동생 : 한명진(韓明溍, 1426 ~ 1454) - 서원군(西原君), 불교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의 선조
          • 제수 : 안동 권씨(安東 權氏) - 문경공(文景公) 권제(權踶)의 딸, 길창부원군 권람의 동생

배우자와 자녀
  • 정부인 : 황려부부인 여흥 민씨(黃驪府夫人 驪興 閔氏)[30] - 민대생(閔大生)[31]의 딸
    • 적장남 : 한보(韓堡, 1447 ~ 1522) - 낭성군(琅城君)
    • 며느리 : 한산 이씨(韓山 李氏) - 한성군 이훈(李塤)의 딸
      • 손자 : 한경기(韓景琦)
      • 손자 : 한경종(韓景琮)
      • 손자 :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 - 공신옹주의 남편
      • 손자 : 한경환(韓景環)
      • 손자 : 한경순(韓景珣)
      • 손자 : 한경함(韓景{王+咸})
      • 손녀 : 이광(李光)에게 출가
      • 손녀 : 조은량(趙殷良)에게 출가
      • 손녀 : 이경손(李敬孫)에게 출가
    • 적장녀: 고령 신씨 신주(申澍)[32]의 처
    • 적차녀: 영천군(鈴川君) 파평 윤씨 윤반(尹磻)[33]의 처
    • 적3녀: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 ~ 1461) - 예종의 정비(正妃)
    • 적4녀: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 ~ 1474) - 성종의 정비(正妃)
  • 첩부인 : 연일 정씨(延日 鄭氏) - 정종화(鄭宗和)의 서녀, 포은 정몽주의 서손녀
    • 서장남 : 한복(韓福)
    • 며느리 : 흥덕 장씨(興德 張氏)
    • 서차남 : 한림(韓林)
    • 며느리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이한기(李漢奇)의 딸
    • 서3남 : 한수(韓壽)
    • 며느리 : 안동 권씨(安東 權氏)
  • 첩부인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선천 공조의 딸
    • 서4남: 한목(韓睦)
    • 서5남: 한석(韓碩)
    • 서6남: 한서(韓恕)
    • 서7남: 한우(韓佑)
    • 서8남: 한온(韓瘟)
    • 서장녀: 강희건(姜希蹇)의 처
    • 서차녀: 신승손(申承孫)의 처
    • 서3녀 : 홍갑생(洪甲生)의 처
  • 첩부인 : 연일 정씨(延日 鄭氏) - 정종성[34](鄭宗誠)의 서녀, 포은 정몽주의 서손녀(庶孫女)
  • 첩부인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성수량(成守良)의 서녀

4. 평가

실록의 사관은 "도량이 크고 성격이 활달했으며 결단력이 뛰어났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만큼 열정과 능력은 지략가로서 대단히 출중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한명회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오가작통법과 면리제가 있는데 세조 대에 오가작통법을 만들면서 면리제를 실시했고 오가작통법은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35] 면리제는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일제강점기와 현대 남한과 북한의 행정 제도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그 능력을 악용해 치부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으고 비정상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수완은 뛰어나지만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명분이 없는 계유정난의 실질적 설계자였다는 것 때문에 해당 사건을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역적 취급을 받는다.

공신을 무려 4번 그것도 모두 1등을 수여받았지만 모두 부정적으로 볼만한 소지가 높은 공신이다. 정난공신과 좌익공신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가담해서 받은거라 오히려 역적으로 볼만하고 익대공신은 후대에 비운의 인물로 숭상받는 남이의 옥에 참여해 받은거라 멀쩡한 사람 잡은 간신 취급 받기 좋은 일이다. 좌리공신은 성종을 잘 보필했다는 도저히 객관적 기준이 없는 뜬구름 잡는 사유로 수여한 공신이라 당대에도 말이 많았던 퍼주기식 공신이기에 역시나 좋은 소리를 못 듣는다. 세조 ~ 성종 연간의 공신 중에서 그나마 반란군인 이시애를 토벌한 공으로 수여한 공신이라 찝찝한 것 없는 진정한 국가 공로자라 할 수 있는 건 적개공신인데 정작 한명회는 여기엔 명단을 올리지 못했다.

또 한명회는 단종과 관련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난언죄등으로 참소했다. 이들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참소된게 아니라 단종에 대한 충을 지키기 위한 것 때문에 참소된 것인지라 명분이 전무한 정적 공격일 뿐이다. 결국 숙종 때 정몽주의 후손들이 신원되고, 정조정몽주 후손의 절의에 대해 살아있는 사육신이라고 인정했다.

한명회는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기에 이에 관련해서도 부정적 인식이 있다. 그러나 한명회는 본인 실력이 아닌 잘나신 조상을 두었다는 것 하나로 특혜를 받고 관직에 진출한 사람으로만 평가절하하긴 어렵다. 음서로 얻은 관직 이래봐야 한양도 아닌 개성의 경덕궁직이라는 미관말직에 불과했으며 음서로 관직에 들어와야 주요 요직과 고위직에 진출이 가능했던 고려와 달리 조선은 의외로 현대사회와 비슷하게 실력이 아닌 금수저식 특혜 짓거리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가 엄청난 출세가 가능했던건 잘나신 조상덕보단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와 같은 비정상적인 사건들을 설계하고 진두지휘한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러모로 평가가 엇갈리지만 뭔가 캐릭터가 튀는 인물이고 책사의 대명사 같은 이미지 때문인지 사극 작가들에게 예전부터 꾸준히 사랑받아온 인물이였다.

삼국지 인물에 비유하자면 사마씨 밑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한편, 황제에게 딸을 시집보내 국구(國舅)[36]의 자리에 오른 가충과 비슷한 행보를 보였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5. 기타

  • 음흉한 계책을 잘꾸미는 책사라는 이미지, 미숙아(칠삭동이)로 태어났다는 전승, 한명회를 연기했던 사람의 외모 때문에 키가 작고 목이 꺾인듯한 외모가 볼품 없을거라고 생각을 하지만 의외로 기록에 보면 미남미녀가 많기로 유명한 청주 한씨 집안답게 키도 크고 잘생겼다고 나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키가 큰 미남이라고 기록된데다가 야사인 <신도비명>에서는 "얼굴이 잘나고 키가 커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대하였고 규모와 기개가 우뚝 서 무리에서 돋보였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그런지 드라마에서는 미남 배우들이 맡기도 하지만, 만화에서는 대중적인 인식을 따른 것인지 추남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그의 일가 친척이자, 성종의 외할아버지인 한확 역시 당대의 미남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한확의 누이 2명 역시 빼어난 외모를 가진 미녀라 각각 영락제선덕제의 총비가 되었다.
  • 말년에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에서 보내게 되었는데[37] 압구(狎鷗)[38]라는 이름처럼 갈매기 보기 좋은 한적한 한강 남쪽의 풍치 지구였지만 1970년대 본격적인 강남 개발이 시작되어 압구정 현대아파트, 압구정 한양아파트와 같은 고급 아파트들이 대거 건설되면서 국내에서 손꼽히는 부촌 중 1곳으로 자리매김하였다.
  • <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그가 유자광과 작당해서 남이를 모함했다고 하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코미디다.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한건 사실이지만 여기에 불만을 품은 남이가 유자광에게 반역에 가까운 언변을 내뱉어 스스로 자초한 화이다.[39][40] 유자광은 한명회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한명회는 명문가에 조정을 장악한 구훈의 대표격이고 유자광은 구훈을 견제하기 위해 육성한 신훈 중에 출신이 서자 출신이라고 여러 사람에게서 차별을 받았다. 유자광이 성종에게 한명회의 비리를 고한 상소를 올리고 이에 한명회가 반박하는 상소문을 올려 유자광은 파직됐다.[41]
  • 2013년 한명회의 17대손인 한 모씨가 자신의 직계(?) 조상인 한명회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한 언론인을 고소했지만 승소하지 못했다. #

6.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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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사육신>의 박용철, <왕과 나>의 김종결, 왼쪽 아래부터 <조선왕조 오백년>의 정진, <왕과 비>의 최종원, <한명회>의 이덕화)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최강의 권력자로 군림했던 인물이다. 이 무렵을 다룬 사극에서는 세조의 장량이라는 말 때문인지 참모 스타일의 캐릭터로 비중있게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참모 스타일보다 보스형 정치가였다. 사극계에서도 오래 전부터 한명회의 이름은 유명했지만 수양대군 앞잡이 정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다가 그런 그가 당당히 주인공 노릇을 하게 된 것은 1980년대 MBC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가 히트를 치면서부터였는데 특히 설중매-풍란-임진왜란으로 이어지는 3편의 공이 컸다. 역사 만화책 같은 데서는 '초인목후이관이라는 욕을 들었다'는 기록 때문인지 원숭이 같은 비주얼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 1980년 MBC 드라마 <고운임 여의옵고>에서는 배우 오지명이 연기했다. 한명회를 안방에 끌어들인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파일:6d17ef42-4d90-466e-8dff-3f6d2ed3917e.png*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편에서는 배우 정진[42]이 연기했다. 사실상 사극 속 한명회의 캐릭성을 정립하고 침체기에 몰렸던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를 다시 살려낸 역할을 했다. 특히 한명회와 변희봉이 맡은 유자광 캐릭터의 압도적인 설득력과 미친 듯한 싱크로율은 장안의 화제였는데 지금도 중장년 사극 팬들은 '칠삭둥이' 한명회와 유자광의 유행어 "이 손 안에 있소이다"를 기억할 정도.
  • 1990년 KBS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성우 겸 배우 주호성[43]이 연기했다. 개성있는 외모와 유니크한 캐릭터의 한명회를 잘 소화했으며 세조 역의 배우 유동근과의 케미도 좋았지만 본인이 의욕을 갖고 준비했던 배역이라 높은 시청률을 유지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주호성은 한명회 역이 아니면 출연하지 않겠다고 했었던 기획 당시 캐스팅 비화를 언급한 적이 있다.
파일:e7f8d995-af7d-4fd8-a24c-1b7c99af342d.png*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배우 이덕화[44]가 연기했다. 추남 이미지로 밀고 나가는 한명회의 캐릭성에 더해 귀까지 당나귀 귀처럼 꾸몄으며 배우의 익살스러운 연기가 잘 어우러졌는데 이덕화가 잘생긴 외모이다보니 당나귀 귀를 달았어도 추남같지가 않다.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최종원이 연기했다. 특유의 악역 포스가 살아 있었다는 평을 받았다.
  •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는 배우 이희도[45]가 연기했다. 간교한 책략가의 이미지는 여전하며 청풍관 왈패들의 두령으로 등장하여 책략가의 이미지와 역사상 모습에 가까운 '보스'의 모습을 둘 다 살리고 있다.[46] 특히 수양대군에게 받은 재물을 만지면서 부하들에게 하는 "돈이란 말야. 권력을 잡으면 저절로 굴러들어오게 되어 있어"라는 대사는 권력에 대한 야심과 물욕을 지닌 한명회의 모습을 잘 설명하는 대사라고 할 수 있다.
  • 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배우 조희봉이 연기했다. 밀본 조직원인 한가놈이 한명회가 아닐까 하고 시청자들이 추측하고 있었는데 마지막화에서 자신의 이름이 한명회임을 밝힌다.
파일:external/cphoto.asiae.co.kr/2013092614175820539_1.jpg* 2013년 개봉한 영화 <관상>에서는 배우 김의성[47]이 연기했다. 영화 초반부에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다 못해 강박 증세까지 보이던 노인이 한명회였다. 비열하고 간교한 이미지로 묘사되는데 젊은 시절 수양대군의 참모로 각종 책략을 통해 계유정난을 성공으로 이끄는 주역으로 그려진다. 영화 러닝타임 내내 얼굴이 안 나오는 캐릭터로 등장하며 관상가 김내경을 괴롭히다가[48] 수양대군이 이끄는 자객들의 손에 김종서가 죽은 이후부터 얼굴을 보여준다. 마지막에는 초야에 은거한 김내경을 회유하러 방문했다가 오히려 김내경에게 끝이 좋지 않다는 말과 함께 "당신, 목이 잘릴 팔자요."라는 예언을 듣게 되고 그 날 이후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지내다 결국 목이 잘려서 죽지 않았음에 안도하면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죽은 이후 연산군 시기에 관 밖으로 꺼내어져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만다.[49]
  • 대체역사물인 웹소설 <근육조선>에선 수양대군에 빙의된 주인공 최영직에 의해 역사가 개변되면서 거의 한시도 못 쉬고 출항해 바다로 내돌려지는 신세가 된다.[50] 압구라는 자신의 호에 대해 한탄하기도 하고 캥거루와 사투를 벌이기도 하는 고초를 겪었고 자신의 처지에 지친 나머지 희망봉을 발견했을 때는 해당 지명의 후보로 사허, 윤직, 희망으로 제출하는 등 관직에서 물러나고 싶어하는 속내를 은근히 비친다. 후대에는 청해군이라 불리며 항해사로서 존경받는다.
  • 2021년 KBS 드라마 <연모>에서는 한명회를 모티브로 한 한기재라는 인물이 메인 빌런으로 등장하며, 배우는 윤제문[51]이다. 실제 역사와는 달리 반정을 일으켰다가 결국 주인공 이휘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인과응보를 치른다.[52]


[1] 율리우스력 11월 26일[2] 율리우스력 11월 28일[3] 율리우스력 11월 26일[4] 율리우스력 5월 9일[5] 율리우스력 2월 4일[6] 율리우스력 9월 27일[7] 청주 한씨이므로 청주백제 때의 이름인 상당을 봉호로 받았다. 오늘날 청주시 상당구가 여기서 나왔다.[8] 호를 따서 정자를 세웠는데 정자 이름이 압구정.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의 유래로 현재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인근에 압구정 터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9] 왕비가 된 두 딸은 안타깝게도 나이 20살도 안되어서 모두 요절하였고 장순왕후는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인성대군도 요절하고 공혜왕후는 자식을 두지 못했다.[10] 원래 아기는 10개월이 되어야 태어나는데 한명회는 7개월만에 나왔으니 거의 미숙아로 태어나 사람의 형체를 갖추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36주 이하에 출산하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고 임신 7개월(28~30주 이하)에 태어나면 인큐베이터에서 현대 의학을 총동원해 3~4개월 정도 치료를 받고서야 퇴원하는게 가능한데 조선 시대에 칠삭둥이로 태어나서 생존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11] 조선 시대에는 고려 시대와 달리 음서로 관직에 오르면 제 아무리 명망있는 가문이더라도 말단의 자리밖에 못 오르는 데다가 차별도 심했다.[12] 물론 한명회가 출세를 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자 그 시절 동료들은 크게 후회했고 여기서 송도계원(松都契員)이라는 말이 나왔다.[13] 계유정난 때 살생부를 들고 조정 대신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한 일화는 정말 유명하다. 살생부 내용은 정사에는 없고 야사에만 전해온다.[14] 훗날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 실패 사례와 대비된다.[15] 다만 별운검을 폐한 이유는 연회 장소가 협소하다는 것이였고 동일한 이유로 세자 및 일부 인원들의 참석도 막았다. 이에 사육신 내에서도 원래 계획대로 그냥 진행하자는 측과 세자 및 제외된 일부 인원 중 제거해야될 인물들까지 한번에 제거해야 한다는 측으로 분열되었고 이 때 계산이 빠른 김질은 실패를 예감하고 장인 정창손에게 고변하여 결국 실패하게 되었다.[16] 사실 이 장자방이라는 표현은 당시에 상투적으로 쓰이는 표현이었다. 관직에 오르고도 군사 부문 업무를 담당하며 북방 순시를 즐긴 것 때문에 모사형 인물이라기보다는 뚝심과 과단성이 있으며 아랫사람들을 휘어잡는 독장형 인물에 가깝다는 평이 있다. 계유정난에 관련된 일련의 행동들도 정작 정변의 주체와 설계자는 수양대군(=세조)이고, 한명회 등 심복들은 정보 수집과 도청 및 수하 무사들을 모은 정도였다.[17] 아무래도 세종 시절에 당한 적[53]이 있어서. 그걸 기억하는 놈이 세종 손자는 잘도 쫒아냈지[18] <소문쇄록>이라는 책에서는 단순히 한명회가 하인을 시켜 신숙주에게 빨리 자라고 전해줬다는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다.[19] 이 일화는 MBC의 조선왕조 500년과 KBS 사극 한명회에서도 다루었다. 권람의 코믹한 꾀병씬이 압권.[20] 왕은 사초와 실록을 볼 수 없지만 대신들은 실록 편찬을 위한 기구가 구성될 때에 감독관으로 임명되어서 편찬 내용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왕이 죽은 아버지의 잘못을 바꾸는 것을 방지하며 여러 사초의 내용들을 당시 국정에 흐름을 알고 있었던 대신들의 기억으로 하나로 묶기 위한 것이었다. 사관들 입장에서는 왕보다는 직접 사초를 확인할 수가 있는 대신들이 더 무서웠던 셈.[21] 예종에게도 3녀인 장순왕후를 시집보냈으나 이쪽도 예종이 세자 시절 요절하면서 딸 복은 지지리도 없었다.[22] 한명회가 명나라 사신을 자신의 별장인 압구정에서 접대할 것을 청하자 "명나라 사신이 거기가 좋다고 하면 개나 소나 거기로 가서 백성들에게 민폐가 될 걸 왜 모르냐? 정자에서 술먹고 노는게 아름다운 일이냐?"고 성종이 꾸짖자 다른 곳으로 접대 장소를 옮긴 다음에 항의 표시로 "사실 아내가 아파서 전 안 갈랍니다"라고 한다. 그러자 신하들이 "지난번 접대 때는 안 간다고 안 했는데 이건 전하께 개기는 겁니다."라고 탄핵했고 성종도 "언제는 아내가 다 죽게 생겼는데도 굳이 명나라에 가더니 이번에는 별로 안 아픈데도 안 간다고? 속셈이 훤하다!"고 직첩을 거두어버린다. 몇 달만에 돌려주기는 했지만.[23] 생몰년: 1447 ~ 1522[24] 한경기 외에도 한경종(韓景琮), 한경침(韓景琛), 한경환(韓景環), 한경순(韓景珣), 한경함(韓景瑊)이 있었다.[25] 조선시대 양반가 중 한명회가 나왔을 정도의 명문가라면 자손이 없으면 가까운 친척의 아이를 양자로 들여 어떻게든 대를 잇게 한다. 양자를 들여 대를 이으면 DNA상으로는 대가 끊어졌을지언정 호적상으로는 계속 대를 이어간 셈.[26] 부인과 함께 있는 것조차 꺼렸다고 하며 여성의 목소리조차 듣는 것을 두려워하여 수제 몽둥이를 만들어놓고 여종의 목소리가 들리면 몽둥이를 들고 나와 내쫓았다고 한다. 말그대로 경기를 일으켰다.[27] 일설로는 할아버지인 한명회의 행적을 수치스럽게 여겨서 죽림칠현을 자처하며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공신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벼슬에 임명됐다고 한다.[28] 종친인 학림군 이이(鶴林君 李頤)의 딸과 김극장의 딸이다.[29] 조선시대 집안의 제사와 종통을 잇는 건 반드시 적출의 장손을 우선으로 했다. 장손이 요절했다면 적출의 둘째가 대를 이었고 적출이 없다면 양자가 대신했다. 때문에 서자가 제사를 받드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서자가 집안의 대를 이은 건 진주 하씨 하륜의 종가, 덕수 이씨 이이의 종가 등이 있다.[30] 정순왕후의 모친 여흥부부인과는 친사촌지간[31] 정순왕후의 외조부인 민소생의 형이다[32] 신숙주의 장남[33] 정현옹주의 장남.[34] 신성군의 장인[35] 북한에선 그 악명높은 오호담당제(주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수단)로 변형되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36] 임금의 장인[37] 다만, 이 정자는 1481년에 왕명으로 철거되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 내에 한 비석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38] 狎鷗 : 갈매기와 친하게 놂.[39] 하지만 애시당초 남이가 불과 28세에 병조판서가 된 것부터가 문제투성이였다. 남이가 여진족 정벌과 이시애의 난에서 세운 공훈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너무 이른 나이에 판서가 된 것, 더욱이 동기인 구성군 이준을 질투[54]했으니 남이가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서 과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똑같이 초고속 출세를 했지만 구성군 이준은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남이처럼 오만방자하게 굴지 않고 처신에 신경을 썼기 때문에 적어도 남이와는 달리 역적까지 되지는 않았던 점을 보면 남이의 문제다.[40] 남이는 세도정치 시기 영의정을 지낸 방계 후손 남공철이 순조에게 상소문을 올려 사후 복권되었다.[41] 다만 한명회도 피해를 안 입은건 아닌데 유자광의 상소에 자극을 받은 대간들이 한명회를 처벌하라고 주장했고 결국 한명회가 병을 핑계로 파직되었다.[42] 이전까지 인지도가 없었던 정진은 한명회 역 이후 일약 스타로 떠올랐지만 임진왜란 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훗날 <태조 왕건>에 이르기까지 모략가의 이미지를 평생 벗지 못했다.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의 책사 능환 역. 2016년 6월 2일 투병 중 별세.[43] 가수 장나라의 아버지.[44] 수양대군 역할은 서인석이 맡았는데 여기서 호흡을 맞춘 서인석과 이덕화는 훗날 이의방, 이의민 역할로 호흡을 맞추고 다시 노태우, 전두환 역할로 호흡을 맞추면서 쿠데타 전문 콤비가 되었다. 고려, 조선, 대한민국을 전부 뒤집어 엎은 쿠데타 콤비.[45]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허문도 역.[46] 실제 역사에서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일파가 당시 세력들 중에서 가장 위치가 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무사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한명회의 수완 때문이었다.[47]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고려 최후의 충신 정몽주를 연기하는데 이 때문에 정몽주가 환생해서 자기를 죽인 이방원의 자손들이 골육상쟁을 벌이게 하여 복수에 성공했다는 섬뜩한 배우개그가 생겼다.[48] 얼굴을 가린 책략가라는 설정 자체가, 얼굴만 보면 상대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는 천재 관상가 김내경을 카운터치는 존재다. 또한 단순히 얼굴이 안 보인다는 점 뿐만이 아니라, 책략으로 수양대군과 그의 수하를 바꿔치기하면서 문종의 명으로 역심을 품을만한 용의자들을 물색하던 김내경을 속이거나, 김내경의 아들 김진형의 눈을 멀게 하여 장님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이를 김종서 일파의 짓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등 시종일관 김내경과 그의 동료들을 위기로 몰고 간다.[49] 내경이 그의 얼굴을 정확히 본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묘사되며, 내경의 천적으로 작중 내내 포스 있는 모습을 보여주던 그가 내경의 마지막 한 마디에 평생을 괴로워하다 세상을 떠난 것을 보면 미묘하다. 후에 감독이 직접 내경은 그가 '죽어서' 목이 잘릴 거라는 것까지 꿰뚫어 보았으나, 인과응보의 복수를 위해 시기는 말하지 않았다고 직접 밝혔다. 어떻게 보면 잠시나마 내경을 가지고 놀다시피 했던 천적인 그가 한평생을 내경에게 놀아난 셈.[50] 이 소설에선 한명회뿐만 아니라 온갖 역사상의 간신들이 주인공의 역사 개변으로 실세, 권력 근처에도 못 가보고 내돌려지는 일이 많다.[51] 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세종의 정적이자 밀본의 수장인 정기준 역을 맡았는데 정기준의 부하가 바로 한명회였다.[52] 물론 실제 역사의 한명회도 죽고 난 후에 연산군에게 부관참시당하는 것으로 인과응보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