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3:43:06

진주 하씨

진주 하씨 (晋州 河氏)
진양 하씨 (晋陽 河氏)
관향 <colbgcolor=#fff,#191919>경상남도 진주시
시조 시랑공파(侍郞公波) - 시조 하공진(河拱辰)
사직공파(司直公波) - 시조 하진(河珍)
집성촌 경상남도 진주시
경상남도 창원시
경상북도 영천시
경상북도 안동시
인구 226,143명(2015년)

1. 개요2. 역사
2.1. 시랑공파(侍郞公波)2.2. 사직공파
3. 집성촌4.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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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주 하씨(晋州 河氏), 진양 하씨(晋陽 河氏)는 한국의 성씨이다. 백제 때 사대부(士大夫)의 문벌이었던 토성(土姓)이지만 입증할 문헌이 없어 두 계통이 시조를 달리 하고 있다. 같은 조상을 뿌리로 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고 한다. 진주 강씨, 진주 정씨, 진주 소씨와 더불어 진주의 유력한 씨족이였다고 한다.

2. 역사

2.1. 시랑공파(侍郞公波)

시조 하공진(河拱辰)은 994년(성종 13)에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다. 목종 때 중랑장(中郎將)으로서, 목종이 병들어 자리에 눕자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庾方), 중랑장 탁사정(卓思政) 등과 함께 목종이 거처하는 궁궐 주변을 숙위했으며, 얼마 뒤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이 되었다.

1010년(현종 1)에 일찍이 동서계(東西界)에 있을 때 임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동여진(東女眞)의 촌락을 치다가 패한 일이 드러나 유배당하였다. 그 해 요나라의 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핑계로 고려에 침입하자 유배에서 풀려나버렸다.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군사 20여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요군의 철수교섭을 자청, 국왕의 사절로 요성종을 만나 '현종은 이미 남쪽 수천리 밖으로 피했으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오' 라고 요성종을 속여 거란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고영기와 함께 요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요성종에게 신임을 받았지만 고려로의 탈출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연경(燕京)으로 옮겨져 양가(良家)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살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평소 저자에서 준마(駿馬)를 많이 사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하여 두고 귀국을 꾀하다가 탄로가 나 요성종의 국문(鞠問)을 받게 되었다.

요성종은 온갖 악형과 회유로 신하가 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심한 모욕적인 말로 응대하여 요성종을 크게 격분시킴으로써 살해된 뒤 간마저 꺼내져 씹히기까지 하였다.

현종은 후에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으로 추증하였다.

2.2. 사직공파

시조 하진(河珍)은 고려 성종문종초에 사직을 지냈다. 9세손 하즙이 1324년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사로 치사하고 진주군에 봉해졌다.
10세손 하윤원이 공민왕 때 전리총랑으로서 개경수복공신이 되었다. 강주원수로 있을 때는 태조 이성계(李成桂), 정세운(鄭世雲)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였다. 우왕 때는 예문관 제학에 이어 사헌부 대사헌에 올라 집무시에는 知非誤斷皇天降罰(잘못된 것을 알고서 그릇 판단한다면 하늘이 벌을 내릴 것이다)이라는 글귀를 걸어 놓고 공무를 청렴하게 수행하였으며 우왕으로부터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청렴성과 강직성은 이미 공민왕 때 신돈(辛旽)이 왕의 신임을 등에 엎고 권세와 만용을 부리자 다른 모든 신하들이 신돈에게 아첨할 때에도 그만이 홀로 공직자의 바른 기품과 자세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예담촌) 입구에 있다.
11세손 하자종은 황해도 관찰사, 공안부윤, 판청주목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인 12세손 하연은 조선 세종 때 예조판서, 대사헌, 대제학, 영의정 등을 지냈다. 1423년 대사헌으로 재임시 조선 불교가 7종파로 분리된 것을 선종과 교종, 2종으로 통합하고 사찰의 땅과 노비를 줄여 국고로 환수하였다. 또 1437년에는 이조의 일을 맡아 조세제도를 개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며 세종 때에는 영의정에 올라 태조 때의 정도전, 태종 때의 하륜, 세종 때의 황희와 더불어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명재상으로 각인되었다.
1455년 하연을 추모하는 소산재를 건립했으나 소실되었고 1995년 소산서원을 다시 새웠다. 하연의 묘는 시흥시 소래산 중턱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문신석과 석양을 두었다. 문종의 스승으로서 문종의 묘에 배향되었다.
하연의 동생인 12세손 하결은 1444년 통정대부에 올랐고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며 1451년(문종 1)에는 첨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 또 그의 아들 13세손 하금은 단종 때 태인현감을 지냈다. 그의 증손 14세손 하주는 제주판관을 지냈다. 하성의 8세손인 사육신 하위지의 윗세대가 1828년에 발간된 사직공파가 발굴되어 사직공파의 계보로 밝혀졌다.

1989년 현풍 곽씨와 결혼한 한 여성(공파는 불명)의 묘에서 유물 발굴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관이 송진으로 완전히 덮여있어 관 내부의 의복류와 편지들이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었고, 민간에서의 한글 전승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2005년 역사스페셜로도 방영되었다.

3. 집성촌

경상남도 진주시
경상남도 함양군
경상북도 영천시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경상남도 창원시
전라북도 정읍시
전라북도 김제시
경상북도 성주군
경기도 가평군
경기도 남양주시
경기도 수원시

4. 인물


[1] 노덕술, 김덕기와 더불어서 일제강점기때의 고문왕 그리고 진주 하씨의 매국노이다! 그래도 노덕술과 다르게 죽기전 "일경의 간부를 지낸 과거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분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며 마지못해 잘못을 시인했다. 그러나 이후 행적을 보면 과거 독립투사들을 고문한 내용을 거들먹거리며 조롱하는 등 거짓된 반성쇼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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