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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종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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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제7대 대왕 목종 | 穆宗 | |||
의릉으로 추정되는 동구릉 전경. | |||
출생 | 980년 7월 10일[1] (음력 경종 5년 5월 20일) | ||
고려 황도 개주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
즉위 | 997년 12월 4일[A] (음력 성종 16년 10월 27일) | ||
고려 황도 개주 정궁 (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
사망 | 1009년 3월 8일[B] (향년 28세) (음력 현종 즉위년 2월 3일) | ||
고려 관내도 파주군 적성현 (現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 |||
능묘 | 공릉(恭陵) → 의릉(義陵)[4] | ||
재위기간 | 고려 개령군 성종의 후계자[5] | ||
990년 12월 31일[6] ~ 997년 12월 4일[A] (음력 성종 9년 12월 7일 ~ 성종 16년 10월 27일) | |||
고려 제7대 대왕 | |||
997년 12월 4일[A] ~ 1009년 3월 8일[B] (음력 성종 16년 10월 27일 ~ 목종 12년 2월 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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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송(誦) | ||
부모 | 부왕 경종 모후 헌애왕후 | ||
형제자매 | 부왕 기준 외아들 모후 기준 2남 중 장남 | ||
배우자 | 선정왕후 | ||
후궁 | 요석택 궁인 김씨 | ||
종교 | 불교 | ||
자 | 효신(孝伸) | ||
봉호 | 개령군(開寧君) → 양국공(讓國公) | ||
묘호 | 민종(愍宗) → 목종(穆宗) | ||
시호 | 정공극영위혜효사선양대왕 (靖恭克英威惠孝思宣讓大王) | ||
절일 | 장녕절(長寧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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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제7대 대왕.묘호는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대왕(宣讓大王), 능호는 의릉(義陵), 휘는 송(誦), 자는 효신(孝伸). 경종(제5대)과 헌애왕후 황보씨의 아들로 왕자 시절의 봉호는 '개령군'(開寧君)이었다.
고려 초기 왕실 내의 극단적인 족내혼 풍습으로 인해 목종은 모든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가 모두 왕과 왕비였다.[10] 또한, 증조모들은 각 지역의 유력한 호족 출신이었고[11], 게다가 부인 선정왕후도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친손자 홍덕원군이었으며, 어머니는 광종(제4대)의 딸 문덕왕후였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가계도인 셈이었다. 목종 이전이나 이후로도 이런 핏줄을 가진 왕은 탄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막강한 정통성을 가진 목종의 마지막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왕조 최초로 폐위되어 최초로 유배에 처해져 최초로 시해된 왕이었다.[12]
2. 시호, 묘호, 능호
목종은 고려 왕사에서 첫 번째로 시해당한 왕이다. 그를 시해한 강조는 죽은 군주의 묘호를 민종(愍宗), 시호를 선령대왕(宣靈大王)이라 했다. 이어 능호를 공릉(恭陵)이라 짓고, 자기 맘대로 태묘에 올렸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당시 많은 사람이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처음 강조가 올린 묘호, 시호, 능호는 영 좋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묘호 민종(愍宗)의 '민'(愍)은 '근심할 민' 자였다. 그러나 묘호는 기본적으로 찬양의 의미를 담은 한자를 쓰기 때문에 '민'이라는 단어는 전혀 좋은 묘호가 아니었다. '민'(愍)은 시법상으로는 동정이나 위로에 가까운 의미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군주의 시호로 사용하게 된다면 보통 불행한 삶을 살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단 악시는 아니지만, 찬양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호였던 '선령'(宣靈)은 '베풀 선(宣)' 자까지는 좋았다. 근데 뒤의 '령'(靈) 자는 시법 항목에도 나오듯 후한 말기 최악의 암군이었던 영제 등 나약한 군주에게 주어졌던 시호였기에 강조는 묘호와 시호 모두 좋지 않게 올린 것이었다. 능호마저 공릉(恭陵), 공손하다 할 때의 '공'(恭)으로 그다지 좋지 않은 능호였다.
후계자 현종이 고쳐 올린 묘호는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대왕(宣讓大王)이었다. 묘호는 나름 괜찮은 한자였다. 시호가 의미심장한데 앞의 '베풀 선'(宣) 자는 유지했지만 뒤 '령'(靈) 자를 '사양할 양'(讓) 자로 바꾸었다. 즉, "목종이 현종에게 양위했다."는 의미의 시호인 것이다. 강조 때문에 어정쩡한 상태로 즉위하게 된 현종의 고심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이후 시호가 계속 추봉되어 공식 존호는 목종(穆宗) 정공극영위혜효사선양대왕(靖恭克英威惠孝思宣讓大王). 능호도 의로울 의(義) 자를 써서 의릉(義陵)으로 바꾸었다.
3. 생애
고려의 역대 개령군 | ||
대수 | 작호 | 이름 |
초대 | 정윤(正胤) 개령군(開寧君) | 왕치(王治) |
2대 | 개령군(開寧君) | 왕송(王誦) |
성종 재위 9년(990년) 12월, 교(敎)하다.
"주(周)가 인적(麟趾)[13]들을 봉(封)하여 번병(藩屛)[14]을 예우해준 것과 한(漢)이 제후를 봉한 제(制)는 종지(宗支)[15]를 의(義)로써 대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대명(大命)[16]을 사방(四方)에 펼쳐 본지(本支)[17]를 백세(百世)동안 전했다. 나(予) 또한 성공한 전례를 당연히 따를 것이다.
숭덕궁(崇德宮)[18]의 적남(嫡男) 송(誦)은, 태조영손(太祖令孫)이자 과인(寡人)의 유자(猶子)[19]이다.
어려서부터 바름(正)을 길러냈고 빼어난 재주를 가졌다. 덕을 키우는데 있어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니 이미 성인의 그릇(成人之器)을 가졌다.
옛 일을 떠올리고 되뇌이니 친족을 아끼는 것은 백세(百世)의 양규(良規)이고 어린 친족을 보다듬는 것은 5상(五常)의 아지(雅旨)이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감히 소봉(疏封)[20]함을 아낄 수 있겠는가? 곧 아름다움을 펼칠 것이라 믿고 오늘을 시작으로 은혜를 내리겠다.
지금 공관어사(工官御事) 지도성사(知都省事) 박양유(朴良柔)와 사부전중감(使副殿中監) 조광(趙光) 등을 보내 지절(持節)과 예(禮)를 갖추어 널(爾) 개령군(開寧君)으로 책봉한다.
나라를 자신의 집으로 삼고 효(孝)를 바꾸어 충(忠)으로 삼으라. 군신(君臣)을 부자(父子)의 규범으로 대하고 위엄과 의례를 잃지 말라. 예(禮), 악(樂), 시(詩), 서(書)의 가르침을 배우고 열심히 살라.
사치해지지 말고 주색을 탐하지 말라. 씨앗을 심고 거두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조정을 보조해야 한다.
존경하라! 진중하라! 내 명령을 저버리지 말라."
《고려사》 <성종 세가> 중 발췌. -왕이 조카 왕송을 개령군으로 봉하는 교서를 내리다.-
"주(周)가 인적(麟趾)[13]들을 봉(封)하여 번병(藩屛)[14]을 예우해준 것과 한(漢)이 제후를 봉한 제(制)는 종지(宗支)[15]를 의(義)로써 대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대명(大命)[16]을 사방(四方)에 펼쳐 본지(本支)[17]를 백세(百世)동안 전했다. 나(予) 또한 성공한 전례를 당연히 따를 것이다.
숭덕궁(崇德宮)[18]의 적남(嫡男) 송(誦)은, 태조영손(太祖令孫)이자 과인(寡人)의 유자(猶子)[19]이다.
어려서부터 바름(正)을 길러냈고 빼어난 재주를 가졌다. 덕을 키우는데 있어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니 이미 성인의 그릇(成人之器)을 가졌다.
옛 일을 떠올리고 되뇌이니 친족을 아끼는 것은 백세(百世)의 양규(良規)이고 어린 친족을 보다듬는 것은 5상(五常)의 아지(雅旨)이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감히 소봉(疏封)[20]함을 아낄 수 있겠는가? 곧 아름다움을 펼칠 것이라 믿고 오늘을 시작으로 은혜를 내리겠다.
지금 공관어사(工官御事) 지도성사(知都省事) 박양유(朴良柔)와 사부전중감(使副殿中監) 조광(趙光) 등을 보내 지절(持節)과 예(禮)를 갖추어 널(爾) 개령군(開寧君)으로 책봉한다.
나라를 자신의 집으로 삼고 효(孝)를 바꾸어 충(忠)으로 삼으라. 군신(君臣)을 부자(父子)의 규범으로 대하고 위엄과 의례를 잃지 말라. 예(禮), 악(樂), 시(詩), 서(書)의 가르침을 배우고 열심히 살라.
사치해지지 말고 주색을 탐하지 말라. 씨앗을 심고 거두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조정을 보조해야 한다.
존경하라! 진중하라! 내 명령을 저버리지 말라."
《고려사》 <성종 세가> 중 발췌. -왕이 조카 왕송을 개령군으로 봉하는 교서를 내리다.-
왕송은 경종(제5대) 재위 5년 차에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 경종이 1년만에 붕어해버린 탓에 어머니 헌애왕후 황보씨와 함께 숭덕궁에서 살게 되었다. 왕송은 10세가 되던 날에 재위 중이던 삼촌 성종(제6대)을 따라 서도(西都)[21]에 행차했다. 성종은 장락궁에 도착한 뒤, 자신의 조카인 왕송에게 한 때 본인의 봉호였던 개령군(開寧君)을 물려주어 그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봉지로 하사된 개령은 현(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김천이다.
현화사비 기록에는 993년, 목종이 13살 때 헌정왕후가 붕어(崩御)하자 성종은 잠룡(潛龍)[22]인 목종을 시켜 제사를 대리하게 했다. 아마 동생의 제사를 통해 2대 개령군의 입지를 다져 놓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왕송은 삼사청(三司廳)[23] 안에 빈소를 차리고 제궁빈비(諸宮嬪妃)[24]와 문·호 양반(文虎兩班)[25]을 이끌고 금봉문(金鳳門)[26] 앞에서 발상(發喪)했다고 하며, 5년 뒤에 17살의 보령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초기에는 제법 의욕적인 면모로 정사를 돌봤는데 어머니 헌애왕후가 섭정을 맡았다는 기록을 통해 목종이 이룬 업적들의 전부 또는 대부분이 사실 그녀의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27] 하지만 실제로 강조의 정변을 보면 헌애왕후는 종교 정책을 제외하면 그냥 아들을 좀 도운 수준일 뿐 실권은 목종이 다 쥐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목종의 업적이 맞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오늘날에는 17세가 미성년 고교생이지만 과거에는 15세에 관례식을 하여 성인으로 보았다. 하지만 의욕적인 종교 관련 정책과 친인척들을 통해 목종의 즉위를 돕는 등 헌애왕후도 아들에게 꽤 도움을 주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목종은 본래 서경과 인연이 깊었는데 본래 선왕 성종의 '개령군'(開寧君)이라는 봉호를 서경에서 이어받았다. 다시 말해서 목종이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임명된 장소가 바로 서경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연 탓인지 목종은 즉위하자마자 서경을 호경(鎬京)[28]으로 개칭하는 한편 서경의 관부도 유수관에서 태조때의 낭관으로 환원시켰으며, 자주 행차하여 제사까지 지냈다. 뿐만 아니라 서경에 대한 조세 감면과 사면 조치도 여러 번 내렸고, 서경의 관리들과 군인들을 진급시키거나 포상했으며, 서경 안의 노인들과 과부들에게 물건이나 명예직을 내리는 등 후히 대접했다. 또 오랫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50세 이상의 남자들에게 모두 벼슬을 내리는 등 재위 기간 내내 서경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의 모친 헌애왕후 황보씨(皇甫氏)를 왕태후(王太后)로 승격시키고,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는 존호를 올렸다. 흔히 천추태후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천자인 자신의 생일을 장녕절(長寧節)로 명명했고, 선왕과 선후(先后)들의 휘호(徽號)를 덧붙였으며, 해당 관청에 선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법식을 확정지었다. 과거법을 정비해 확정지었고, 필요없다고 판단되는 직책과 지방관들을 심사하여 정리했으며, 3품 이상의 관료들에게 훈호를 내리고, 9품 이상으로 벼슬한지 만 20년이 된 자는 개정된 관복을 착용하게 했다.
즉위하자마자 성종의 붕어로 인해 진사(進士)가 되었음에도 등용이 지체되었던 사람들을 급제시켰다. 그리고 매해 꾸준히 인재를 등용하여 확인되는 숫자만 해도 약 250여 명이었고, 이름이 확인되는 경우만 해도 주인걸(周仁傑), 강주재(姜周載), 송굉(宋翃), 박원휘(朴元徽), 황주량, 최충, 주저, 조원, 손원선(孫元仙) 등이 있었다. 1006년에는 6품 이상의 문관들에게 유능한 사람들을 각각 1명씩 추천하게 하여 사실 여부에 따라 추천자에게 상벌을 내리는 조치를 공표했다.
즉위하자마자 승려들의 계급을 1등급씩 올려주었고, 개경 남쪽에 진관사(眞觀寺)를 지어 태후의 원찰로 삼았으며 몇 년 후에는 그 절에 9층탑을 쌓았다. 또한 숭교사(崇敎寺)를 창건해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1006년에는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승려로서 대덕(大德)[29] 이상에게는 법호를 덧붙여주었고, 환갑을 넘은 승려들에게는 차등을 두어 승직을 올려 주었다.
즉위 직후 합문사(閤門使) 왕동영(王同穎)을 거란에 보내 왕위를 계승한 사실을 알렸고, 거란에서도 수 차례 사신을 보내 목종의 작위를 높이는 등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이부시랑(吏部侍郞) 주인소(朱仁紹)를 북송에 보내서 "우리나라는 중국의 풍속을 사모하는데 거란에게 위협당해 방해를 받고 있다."고 하는 등 북송과 요나라 양국 사이에서 무난한 외교를 전개했다.
전시과를 개정하고, 덕주(德州)[30], 평로진(平虜鎭)[31], 등주(登州)[32], 귀성(龜城)[33], 용진진(龍津鎭)[34], 흥화진(興化鎭)[35], 익령(翼嶺)[36], 울진현(蔚珍縣)[37], 통주(通州)[38] 등 많은 곳에 성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1003년에는 새로 쌓은 덕주성을 포함하여 가주(嘉州), 위화(威化), 광화(光化)의 성들을 보수했다. 새로 쌓은 많은 성들이 훗날 여요전쟁에서 주요 전장이 된 것을 고려하면 매우 현명한 조치였다. 또한 많은 공사들로 군사들이 힘들어하자 6위(六衛)의 부대에 소속된 군사들에게는 잡역을 면제해주는 등 사기 저하를 막으려고 노력했고, 동여진의 침공에도 장수를 보내 대응했다. 또한 군역을 개편해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정상적인 모든 남자에게 군역의 의무가 부과되는 병제를 완성했는데, 이는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징병제가 완성된 것이다.
즉위하자마자 국내 산천의 신령들에게 모두 훈호를 붙였다. 불교가 도입된지 오래되었으나 토착 신앙도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이는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조치로 추측된다. 행차가 지난 주와 현은 1년치의 전조(田租)[39]를 감면했다. 군주의 행차가 지나가는 지역은 여러가지 준비를 해야 돼서 힘들었는데 흔히 군주가 사냥을 자주 나가면 백성들이 힘들어했다는 이유도 같은 이유이다. 1006년 흉년이 들자 백성들의 조세와 공물을 탕감하고, 창고의 곡식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빌려주었다. 경주 사람 융대(融大)가 보낸 노비들을 사실 양민인 줄 알면서도 받은 평장사 한인경(韓藺卿)과 이부시랑(吏部侍郞) 김낙(金諾)을 유배보내고, 마찬가지로 노비를 받은 궁인(宮人) 김씨(金氏)에게는 구리 100근으로 벌금을 내게 하니 많은 사람들이 이를 듣고 경하했다.
자신을 호종하거나 자신의 행차가 지난 주와 현의 관리들에게 잔치를 열어주며 물건을 하사하고, 진급시키기도 하며, 여러 군과 현의 호장(戶長)으로 70세가 된 자를 안일호장(安逸戶長)으로 삼아 직전을 내려 대우했다. 제1차 여요전쟁에서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으로 유명했던 서희가 57세의 나이로 죽자 예를 갖춰 장사지내고, 후한 부의와 창위(彰威)란 시호를 내린 후, 선왕 성종의 묘정에 배향했다. 문하시중 한언공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그의 본관인 중원부(中原府)[40]에 행차했을 때 그 곳을 단주(湍州)로 승격시켰다. 그가 병에 들자 의원과 약을 보내주고, 온천에 가서 목욕하게 하면서 타고 갈 수레도 보냈으며, 그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줄 것을 각 주현에 명하고, 왕실에서 쓰는 말 세 필을 내려 쾌차를 기도하는 제물로 쓰게 했다. 그러나 결국 한언공이 죽자 서희 때와 마찬가지로 후한 부의와 정신(貞信)이란 시호를 내리고, 내사령(內史令)을 증직하여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
일본에서 도요미도(道要彌刀) 등 20호가 와서 의탁하자 이들을 이천군에 정착시켰다. 5품 이상의 중앙 관리들에게 나랏일을 지적하게 하여 폭넓은 의견을 경청했을뿐 아니라 화폐 제도가 실익은 적고, 백성들의 불편은 가중된다는 한언공의 상소를 받아들여 다점이나 주점 등 일부에서만 화폐 사용을 강제하도록 제도를 완화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괜찮은 군주의 무난한 행보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를 잘해나가던 목종의 불행은 섭정을 맡은 그의 어머니 헌애왕후가 초래했다. 원래 대부분 섭정자는 임금이 성년이 되면 섭정을 거두지만 헌애왕후는 목종이 섭정이 필요가 없는 나이임에도 섭정을 맡으며 권력을 장악했다. 헌애왕후는 오래 전 함께 통정하다가 그녀의 친오빠 성종에 의해 쫓겨났던 김치양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맺고 권력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목종은 이를 저지하고 자신의 권력을 정돈하기는커녕 자신의 동성연인인 유행간이 권신으로 커지는 것을 막지 못해 국정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마침내 헌애왕후가 김치양의 아들을 낳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급기야 그 둘은 자신들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음모까지 꾸미며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당시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였던 대량원군까지 제거하려고 했다.[41] 이에 목종은 대량원군을 불러들여 확실히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계획을 세우고, 이내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를 개경으로 불러들여 일단 김치양은 제거했지만 우발적이건 계획적이건 도리어 강조에게 뒤통수를 당해 폐위당했다. 그리고 어머니 헌애왕후와 함께 충주로 내려가던[42] 도중 적성현[43]에서 강조의 명령으로 김광보, 안패 등에 의해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고 만다. 강조의 정변 항목 참조.
사후 적성현의 남쪽에서 화장을 해 공릉에 안장됐지만 현종 때 성의 동쪽으로 이장하고 능호를 의릉으로 고쳤다.
4. 가족관계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목종 | 경종 | 광종 | |
태조 | |||
신명왕후 | |||
대목왕후 | |||
태조 | |||
신정왕후 | |||
헌애왕후 | |||
대종 | |||
태조 | |||
신정왕후 | |||
선의왕후 | |||
태조 | |||
정덕왕후 |
고려 초기에는 태조의 아들들[44]과 손자들이 근친혼[45]을 많이 했기에 목종의 조부모는 모두 형제자매였으며, 외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아예 친남매였다. 즉, 목종의 증조부는 친가, 외가 모두 고려 태조 단 한 명뿐이다. 족내혼을 하지 않았다면 증조부가 4명, 증조모가 4명이 되어야 하나 족내혼으로 인해 증조부가 1명, 증조모가 3명인 것이다.
왕후인 선정왕후 유씨는 목종과 사촌[46] 겸 6촌[47]지간으로 슬하에 자녀가 없다.
후궁인 요석택 궁인(邀石宅 宮人) 김씨 사이에서도 자녀가 없다.
5. 평가
목종(穆宗)은 어둡고 유약하여 위로는 그 어머니의 잘못을 막지 못하고 아래로는 흉간(兇奸)들을 제압하지 못하였으므로, 내란[蕭墻之禍]이 양성(釀成)되어 번신(藩臣)이 이런 약점을 이용해서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향하게 되니, 임금이 탄 가마가 분주히 달아나다가 마침내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위급할 즈음에 마땅한 사람을 얻어 부탁하여 신기(神器)가 흔들리지 않게 하니, 이는 족히 칭찬할 만하다 하겠습니다.
《동국통감》 <고려 공양왕 4년, 임신년(壬申年), 1392년> -총평-
《동국통감》 <고려 공양왕 4년, 임신년(壬申年), 1392년> -총평-
오랜 기간 목종에 대해서는 정무를 보지 않고, 정국의 혼란을 방치한 뒤 헌애왕후와 김치양의 전횡을 막지 못한 무능한 군주라는 부정적 시선이 강했으며,[48] 이제현은 목종의 비극에 대해 는 식으로 평가를 내릴 정도였다. 다만 목종이 과연 기존 평가처럼 실권도 없던 나약한 군주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상당한데 업적이 생각보다 많고, 그 업적을 섭정직에 있던 헌애왕후가 모조리 했다고 보기에는 목종의 실권이 생각보다 상당했던 것으로 여겨질법한 대목도 많기 때문이다.[49]
성격도 상당히 군자스러운 면모가 보이지만 어찌됐든 결국 효심이라는 핑계로 어머니의 전횡을 제때 막지 못해 본인과 어머니 둘 다 끝이 좋지 않았다는 점과 집안 단속을 제대로 못한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본인이 신뢰하기도 한 다음 임금 현종이 여요전쟁을 마무리짓고, 고려를 중흥기에 올리면서 존재감이 묻히는 경향도 있다. 다만 강조가 멋대로 목종을 폐위하고 묘호와 시호, 능호를 올리자 신하들과 백성들이 불쾌해했다는 것을 보면 어찌 되었든 당시 사람들은 목종이 마땅히 폐위당해야 할 폭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대 사람들이 강조를 손가락질한 것은 일개 신하가 감히 정변으로 임금을 갈아치웠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전근대에 왕권은 신성한 것이었으며, 또한 아직 건국 100년도 되지 않은 고려는 용손임을 주장하여 왕권신수를 공고히 하였으므로 더더욱 그러하다.
6. 기타
- 한국사에서 명시적으로 기록된 첫 번째 동성애자 임금이다. 세계사를 통틀어 양성애자 성향으로 추측되는 군주들은 많으나, 목종의 경우 동성애자 성향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낸 군주 중 하나이다. 목종 이전 신라 제36대 혜공왕도 "본래 여자로 태어나야 했으나 상제에게 부탁하여 억지로 남자로 태어나게 한 탓에 행동이 여성스러웠다"는 설이 적혀 있으나 《삼국유사》 자체가 불교 설화적 뉘앙스가 짙은 기록이고, 시녀들과 어울려 여성의 놀이를 좋아하고 여성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기록들은 있어도 구체적으로 남성과 성관계를 했다는 암시 등의 동성애 성향은 서술되지 않았다. 신라 혜공왕의 경우, 기록대로라면 동성애자라기보다 트랜스여성 내지 굳이 성애적으로 봐도 양성애자로 볼 수 있다.
목종 이후 동성애 관련 언급이 알려진 왕은 원 간섭기 충선왕(제26대)인데 그는 한 명의 남자 애인과 다수의 여자 애인을 거느린 양성애자였다. 제31대 공민왕도 이런 언급이 있긴 하나 공민왕 이후 《고려사》 기록이 조선 왕조의 개국 과정에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한 <우창비왕설>을 아예 사전에 깔고 서술되어 있는 지라, 목종, 충선왕의 사례와 달리 오늘날에는 공민왕의 피를 이은 자식이 없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조선 건국 세력들이 곡필했거나 과장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 목종은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에게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아내도 선정왕후(宣正王后) 유씨 1명[50] 뿐이었거니와 슬하에 자식도 없었으며 이 때문인지 젊은 나이에 후사를 걱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 그는 왕으로 있는 동안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사내들을 곁에 끼고 살다시피했다. 《고려사》 <유행간 열전>에서는 '목종은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였던 유행간을 매우 아껴서 용양(龍陽)의 관계까지 맺었다'고 했는데 여기서 용양이란 소위 남색(男色, 동성연애)을 했다는 의미이다.[51] 이후 유행간은 목종의 측근이 되어 별다른 공이나 재주가 없으면서도 합문사인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라 목종의 곁에서 정사를 좌지우지했는데 성품이 오만해서 신하들을 깔봤으며, 고개와 눈짓으로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유행간이 소개[52]한 발해 유민 출신인 유충정 역시 목종의 총애를 받아서 유행간과 더불어 측근으로 활동했는데 유충정 또한 동성 연인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은 있지만 유행간과는 달리 목종과 유충정이 동성애를 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유행간은 강조의 정변 이후, 국정을 농단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으나 유충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불확실한데 목종이 궁궐에서 도망쳐 나올 때 유충정이 옆에서 보좌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유충정을 목종과 유행간을 죽일 때 같이 죽였다고 썼지만 《고려사》 원문에는 '유행간 등 7명을 죽였다'(殺行簡等七人)라고만 했지, 유충정도 죽였다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목종이 죽고 20여 년 뒤인 1030년 발해부흥운동 세력인 흥료국에서 고려에 지원을 부탁할 때 유충정의 이름이 다시 언급되는데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름이 한자까지 같다. 유충정이란 동명이인은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한국의 주요 역사서를 통틀어 더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라서 흔한 이름이라고 보기 힘들다. 또 발해계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목종의 실각 이후, 발해 땅으로 가서 발해부흥운동에 몸 담았을 여지도 있다.
- 태조 왕건 사후 제4대 광종에게서 이어진 광종계 왕통의 마지막 대왕이다. 이후 고려 왕은 제34대 공양왕까지 전부가 안종 왕욱의 혈통이다. 참고로 고려 초기의 족내혼으로 인해 목종은 친가, 외가, 처가가 모두 태조의 직계 후손이다. 아버지 경종은 태조의 친손자이자 외손자이며, 어머니 헌애왕후 황보씨도 태조의 친손녀이자 외손녀이다. 게다가 이는 부인 선정왕후도 비슷한데 선정왕후의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 수명태자의 아들 홍덕원군이었으며, 어머니는 태조의 아들 광종의 딸 문덕왕후였다. 누구인지 불분명한 선정왕후의 친조모를 제외해도 그녀의 조부, 외조부, 외조모 모두가 태조의 후손이다. 결과적으로 목종의 조부, 조모, 외조부, 외조모, 아버지, 어머니, 장인, 장모가 모두 태조의 자식이자 손자들인 셈. 고려의 왕 중에서 이 정도로 막강하게 태조의 핏줄을 타고 난 왕은 없다. 그러나 정작 목종 본인은 폐위당하고 시해당한 점은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 한국사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제주도의 한라산이 분화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002년 6월에는 5일간의 분화가 있었고, 1007년에는 1주일간 분화가 일어나 산이 솟아 올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을 끝으로 한라산은 분화 기록이 없으며,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간간히 지진 기록이 나오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한때 휴화산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4년부터는 한라산 내부에 마그마방이 여러 개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면서 다시 활화산으로 지정해 관리에 들어가고 있다.5년(1002년) 6월. 탐라산(耽羅山) 네 곳에 구멍이 나면서 붉은 물이 솟아나더니 닷새만에 그쳤으며 그 물은 모두 와석(瓦石)이 되었다.10년(1007년) 탐라(耽羅 : 지금의 제주도)에 상서로운 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아났기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 살펴보게 했더니 탐라(耽羅)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산이 처음 솟아나올 때에 구름과 안개로 어두컴컴했으며 땅이 진동하여 우레가 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레 밤낮 만에야 비로소 걷히니 산의 높이는 백장(丈)이 넘고 둘레는 40리(里)가 넘었으며 초목은 없고 연기가 그 위를 덮고 있어 바라보면 석류황(石硫黃)과 같기에 사람들이 두려운 나머지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전공지(田拱之)가 직접 산 아래까지 가서 그 모습을 그려서 바쳤다.
- 《고려사》에서는 목종에 대해서성품이 침착하고 굳세어 어려서부터 임금의 도량이 있었고 궁술(弓術)과 기마(騎馬)를 잘 하였다. 술을 즐기고 사냥을 좋아하여 정사(政事)에 뜻을 두지 않았고, 총애하는 자들[嬖倖]만 믿고 가까이하다가 화(禍)를 당하였다.《고려사》 <목종 세가>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킨 후 시해하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옹립하다- 중에서
라고 기록했는데 궁술과 기마술에 능했던 무인적인 기록이 남아있다.
7. 대중매체
7.1. 드라마
7.1.1. 강감찬
- 1973년 KBS 일일 사극드라마 <강감찬>에서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53]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27화부터 62화까지 그의 치세가 묘사되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불륜에 분노했다가 침식을 전폐하고 술로 날을 보냈다고 하며, 김치양을 물리치기 위해 강조에게 밀서를 보냈다고 한다.
7.1.2. 천추태후
드라마 <천추태후> |
7.1.3. 고려 거란 전쟁
자세한 내용은 목종(고려 거란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
신하들 사이에선 김치양이 문제되는 것을 알면서도 어머니 천추태후 때문에 일단 딱히 조치를 안 한다는 사실 및 정사에 무관심한 면모 때문에 크게 신망을 받지는 못하는 듯하지만, 최소한 개경에서는 임금으로서의 권위는 인정받는 듯하며 백성들을 위해 노약자를 포함하여 연회를 베풀던 중 김치양 일당이 저지른 화재로 인해 놀라서 도망가는 도중에도 쓰러진 노인을 보고 도와주려고 하기도 하는 등 3회에서 퇴장하기 전까지 분량은 적지만 드라마 <천추태후>의 목종과 다르게 특이하고 복잡한 캐릭터성을 지닌 점으로 인해 호평을 받았다.
7.2. 출판물
- 과학&역사 학습만화 《Why?》시리즈 <쫒겨난 임금> 편에서 등장, 흔히 알려진 속설 그대로 김치양과 천추태후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고려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강조를 호출하지만 목종은 강조에게 "태후께선 업적이라도 있는데, 당신은 모든 걸 태후와 김치양 탓으로 돌리고 놀기에만 바빴다."는 일갈을 듣고 태후와 함께 쫒겨난다. 이후 역사대로 강조가 보낸 자객들이 목종에게 사약을 마시라고 요구하지만 목종은 이를 거부하였으며 이에 군사들이 사약이 싫다면 칼로 죽으시라 외치자 목종은 "어명도 없이 날 죽이려는 것이냐?'는 일갈과 함께 태후에게 강조는 "내가 살아있으면 복위 운동이라도 일어날까 봐 두려운 것 같다."고 한탄하며 결국 군사들 손에 죽는다.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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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사(高麗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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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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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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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우왕) (신창(창왕)) | }}}}}}}}}}}} |
[1] 율리우스력 7월 5일[A] 율리우스력 11월 29일[B] 율리우스력 3월 2일[4] 개성 동쪽에 조영되어 있다고 하나, 현재는 소재 불명 상태이다. 개성 동쪽에 위치한 묘주 불명의 왕릉 동구릉을 의릉으로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5] 목종이 정윤 즉 공식적인 후계자로 책봉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990년에 개령군이라는 작위를 계승한 것을 보면 사실상 성종의 후계자로 책봉된 것으로 본다. 참조문헌: 10~13세기 高麗王室의 構造와 編制, <<서울대학교>> pp. 110-111, 2022.8.[6] 율리우스력 12월 26일[A] [A] [B] [10] 심지어 부계와 모계 어느 쪽을 거슬러 올라가도 증조부가 태조 왕건이다. 아버지의 조부/외조부, 어머니의 조부/외조부가 전부 태조 왕건이다.[11] 게다가 친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신정왕후로 같은 동복남매였다. 친남매끼리 사돈이 된것.[12] 단, 혜종(제2대)과 정종(제3대)도 시해되었다는 의심이 있기는 하다. 그래도 그들은 의심일 뿐, 공인된 건 아니라서 현재 공식적으로 시해 사실이 확인된 최초의 고려 왕은 아직 목종이다.[13] 기린의 친족, 즉 왕실의 일원들을 의미.[14] 제후국의 별칭. 한국사에선 고구려계 보덕국이 신라의 번병을 자처했다.[15] 역시 왕실을 의미.[16] 임금의 천명(天命).[17] 국가, 왕조의 다른 말.[18] 목종의 어머니인 헌애왕후의 관저.[19] 조카를 의미하는 고대 한자어.[20] 봉토(봉)를 내려줌(소).[21] 지금의 평양시.[22] 현화사비 원문 기록.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상태[23] 삼사 부서의 관사. 삼사는 정부의 재정을 담당했다.[24] 고려는 후비나 여성 왕족들에게 궁(宮), 전(殿), 원(院)을 하사하여 작위로 봉했다. 그래서 '제궁의 비빈들'이라 한 것이다.[25] 조정의 문신과 무신들. 원문 기록으로 제2대 혜종의 이름 '무'(武)를 피휘했다.[26] 발해 상경성과 조선 경복궁에도 금봉문이 있었다.[27] 《천추태후》에도 이러한 시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28] 고대 중국 서주 왕조의 수도명이었다.[29] 고승 중 최하위 등급[30] 現 평남 덕천[31] 現 평북 영변[32] 現 함남 안변군[33] 現 평북 귀성군[34] 現 함남 정평군[35] 現 평북 의주군[36] 現 강원 양양군[37] 現 경북 울진군[38] 現 평북 선천군[39] 토지세[40] 現 장단군[41] 물론 대량원군 이외에도 태조와 동양원부인(태조 왕건의 제9비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유씨 - 평주(평산) 유씨(平州 庾氏) 유금필의 딸)의 소생인 효은태자의 직계 자손들이 있었다. 다만 광종대 반역자로 몰려 왕족 신분을 박탈당한 처지였다. 만약 대량원군이 제거되었다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소생이 다음 고려 왕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왕씨 왕조의 유지를 바란 강조와 같은 대다수 신료들은 효은태자의 자손들을 끝끝내 찾아내 왕위에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강조는 현종을 보위에 올리고도 효은태자의 자손들을 찾아내 종실에 입적시켜 현종 유고 시의 대안을 마련한 바 있다.[42] 목종이 최항에게 새 임금(현종)을 잘 보좌할 것을 당부하며 '시골에 가서 늙고 싶으니 새 임금에게 그렇게 전해 달라.'라며 충주로 내려갔다.[43] 지금의 파주시 적성면.[44] 왕건은 9명의 딸이 있었는데, 경순왕 김부와 결혼한 2명을 뺀 나머지 7명 중 6명이 이복 형제와 결혼했다. 이들 중 유일하게 남편이 미상인 순안왕대비도 이복형제인 안종의 정실로 추정된다.[45] 목종의 조부모와 외조부모가 그 대표적 예다.[46] 선정왕후의 어머니 문덕왕후는 목종의 아버지 경종의 누이이다.[47] 선정왕후의 아버지는 홍덕원군으로 왕건의 손자(수명태자의 아들)로 목종에게는 5촌 당숙이 된다.[48] 고려 초 康兆의 政變과 中臺省의 등장 — 선휘원·은대와 중대성의 치폐과정에 담긴 의미 —[49] 고려 목종·현종대 실시된 사면과 은전의 내용 분석과 그 특징[50] 물론 첩이지만 요석택 궁인 김씨도 있기는 하다.[51] 용양지총이라고 하여, 전국시대 위왕의 총애를 받던 용양군의 군호에서 따왔다.[52] 가끔 "유충정이 신체가 뛰어난 탓에 유행간의 소개를 받아 목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 돌아다니고 있으나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53] 당시에는 필름을 아끼기 위해서 방영 후 다른 촬영에 재사용했다.[54] 2003년 대하사극 <무인시대>에서는 강종(청년기) 역, 2004년 KBS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광해군 역, 2010년 KBS 수목드라마 <추노>에서는 봉림대군 역, 2010년 KBS 대하사극 <근초고왕>에서는 아직기 역[55] 그래도 작중 후반부 모친에게 내정에 한해 실권을 받은 이후에는 꽤 무난하게 정사를 돌보는 모습을 보이기는 한다.[56] 이 역할을 맡은 사람은 배우 박진우인데 훗날 <정도전>에서 똑같은 고려 시대의 왕이자 폭군인 우왕 역할을 맡게 된다. 박진우는 이 작품에서 우왕 연기할 때 <천추태후>에서 목종 역할을 맡았던 이인의 연기를 참고했다고 한다.[57] 요석택 궁인 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