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洪君祥, ?~1309[1]고려 출신의 원나라 인물로, 자는 쌍숙(雙叔)이며, 홍대순의 손자이자 고려의 반역자 홍복원의 5남이다.
2. 생애
남양 홍씨 출신으로, 그의 나이 14세 때 연경으로 가 형인 홍다구와 함께 글을 배웠다. 연경에서 세조를 알현하였는데, 유병충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이 아이의 눈매가 평범하지 않으니 뒤에 반드시 공로로 이름이 드러날 것이니, 다만 마땅히 학문에 힘을 다하여야 할 뿐입니다.
이에 쿠빌라이는 스승이 될 선비를 선발하여 그를 가르치게 하였다.1266년에는 고려인 병사 300명을 통솔하여 만수산 축조에 참여하고 통주의 운하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269년에는 두련가가 이끄는 몽골군을 따라 고려의 권신 임연을 토벌한다.[2]
1271년에는 하남을 지켰으며 1272년에는 회서(淮西)를 공략하고 그 큰 요성(凹城)을 파괴한다. 1273년에는 원수(元帥) 패로한(孛魯罕)을 따라 회동(淮東)의 사양호(射陽湖)[3]를 습격하여 그 남녀와 소와 말을 포로로 하였다.
1274년 바얀이 이끄는 군대와 함께 남송 원정에 참전한다. 바얀이 회안을 점령한 뒤 회서 지역을 공격하자 회서제치사 하귀가 우도통을 보내 공격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속담에 이르기를, ‘10,000명을 살인하면 스스로는 3,000을 잃는다.'라고 한다. 원하건대, 국력을 피폐하게 하면서 변방의 성을 공격하여 빼앗지 말 것이니, 만약 행재(行在)가 귀부한다면, 변방의 성이 어디로 가겠는가?
이에 바얀은 홍군상에게 우도통을 데려가 쿠빌라이를 알현케 하였다.1276년에는 남송 조정의 항복 문서 작성에 관여하였고, 그 해 2월 남송이 항복하자 무략장군 중위친군천호(武略將軍 中衛親軍千戸)로 임명된다.
1278년 강남의 민병을 선발하는 일을 담당하고 명위장군 중위친군부도지휘사(明威將軍中衛親軍副都指揮使)로 임명된다.
1280년에는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에 임명되었고 2년 뒤 추밀원판관(樞密院判官)에 임명되었다.
1286년에는 동첨추밀원사(同佥枢密院事)를 지냈고 이듬해 쿠빌라이를 따라 나얀(乃顔)을 토벌하였는데, 《동정록》을 기록하였다.
1290년 11월 충선왕이 원의 서울인 연경(燕京)에 왔을 때 동첨추밀원사(同僉樞密院事)인 홍군상의 집에 머물렀다. 1292년 8월 황제가 일본 정벌에 관하여 의견을 묻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사 행동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므로 먼저 사신을 보내 고려의 사정이 어떠한지 알아본 후에 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옵니다.
9월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서 일본인을 호송하는 일로 고려에 파견되어 충렬왕과 함께 일본 정벌에 관하여 의논하고 돌아갔다.
1293년에는 탐라에서 압록강 하구 수역 11소 설치를 주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또한 당해 12월 충렬왕이 연경에 갔을 때 홍군상의 집에 머물렀다. 당시 충렬왕은 일본 원정 준비가 여의치 않음을 황제에게 고하고 그 준비를 늦추고자 하였는데, 1294년 세조가 죽자 승상 완택에게 일본 원정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충렬왕에 의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삼중대광(三重大匡)·익성후(益城侯)에 책봉되고 얼마 후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수문전 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세자사(世子師)·임안공(臨安公)에 책봉된다.
1298년에는 어사대가 그를 탄핵하여 횡령과 수뢰로 파직되었다. 1299년 강절 지역에 사신으로 가서 민간의 어려움을 물어본다.
1305년 사농(司農)으로 임명된 뒤 얼마 후 중서우승(中書右丞)으로 임명된다. 1306년에는 강절행성의 우승으로 출세했고 이후 요양행성의 우승으로 임명된다.
1309년 사망한다.
3. 가족관계
4. 기타
- 그의 형 홍다구는 고려를 원망했으나, 그는 온 힘을 다해 고려를 도우려 애썼다.
영녕공(永寧公)을 원망할지언정 나라를 배반할 수는 없다.
- 민국 시기 커샤오민에 의해 편찬되었던 《신원사》에서는 아버지 홍복원[4], 영녕공 왕준과 같은 반열에 놓였다. 또한 홍군상 본인의 부록에는 홍만(洪萬)이 실렸다.[5]
- 《원사》에 수록된 그의 아버지 홍복원 열전의 부록에는 그의 형인 홍다구, 아들 홍만(洪萬)과 함께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