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24 02:01:11

신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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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사
新元史
New History of Yuan
저자 커샤오민
시기 20세기 중화민국
언어 한문
권 수 257권
분량 1206년 ~ 1388년 (182년)
원 태조 원년 ~ 천원제 11년

1. 개요2. 편찬 과정3. 비판
3.1. 자체의 한계3.2. 배경
4. 구성
4.1. 본기
5.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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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新元史

청사고》의 편찬에도 참여한 커샤오민이 《원사》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중화민국 시기에 편찬한 사서이다.

현대에 편찬된 중국 정사로 평가받는 사서이며, 흠정 24사와 함께 묶어 25사 중 하나로 부른다.

2. 편찬 과정

기존의 《원사》는 편찬 당시부터 졸속으로 만들어 졌다는 평가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원사》의 편찬이 요구되고 있었다(《원사》 문서 참고).

원조비사》, 《황원성무친징록》(皇元聖武親徵錄), 원대의 비문 등과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의 《집사》와 같은 이슬람의 기록을 참고하여 편찬되었다. 많은 부분이 추가되었으나 후대에, 역사적 혼란기에 저술된 역사서라 그런지 오류나 결점도 많이 있다.

서술의 일관성이 부족하고 단순한 사료의 나열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사》를 개정, 증보한 부분의 근거나 출처 등을 표시하지 않은 부분도 많다. 저자 스스로 이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신원사고증》을 추가로 펴냈지만 그래도 부족한 부분이 많다.

《신원사》가 편찬되는 과정에서 서양에서 전래된 연구결과뿐만 아니라 청나라 시대 학자들의 성과도 많이 반영되었다. 예를 들어 위원(魏源)의 《원사신편》, 소원평(邵遠平)의 《원사류편》 등이 있다. 이외에도 홍균의 《원사역문증보》(元史譯文証補) 같은 책도 참고했다. 그렇기에 당시의 관점으로 봤을 때 참고한 자료가 상당히 풍부하여 굉장한 저작으로 평가되었다.

저자 본인의 경력이나 《신원사》의 결점이 분명히 있지만 당시의 열악한 환경하에, 제한된 자료와 시간에서 사서를 완성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24사 중의 《원사》는 대부분 틀렸고, 《신원사》는 그런 틀린 내용을 개정한 것이라는 오해만 제거하고, 여러 가지 자료와 대비하여 읽는다면 의미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비판

3.1. 자체의 한계

커샤오민은 중국 구 시대의 독서인으로 전통적인 사서의 체계에 관해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생각에 사서의 <본기>는 중요하고, 강령이 되는 내용만 기록하고 나머지는 전부 지워서 간략하고 우아하게 적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겼다. 그의 시야에서 《원사》 <본기>를 보면 번잡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아래에 몇 조목을 나열해 구 사료를 지나치게 삭제한 예시를 든다.
  • 본래 《원사》 <세조 본기>, <성종 본기>는 각 연도의 말미에 호구의 숫자와 사형 당한 사람의 숫자를 기록했는데 이런 기록이 모두 삭제되었다.
  • 《원사》 <태종 본기> 5년조에 새로 금나라의 남경(곧 개봉)을 함락시키고 8월에 '중주의 호수를 포괄하여 73만여 호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몽고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얻은 황하 이남 호수의 전부에 해당하는 중요한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삭제되었다.
  • 《원사》 <성종 본기> 대덕 7년 3월 경인일에 각 도에 선무사를 파견하는 내용이 있다. 《원사》에서는 각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고, 어떤 도로 파견됐는지 설명하고 있지만 이를 일률적으로 삭제하고, 다만 '학천정, 탑출 등 14인이 선무사로 제도(諸道)를 순행하였다.'로 간략화시켰다. 이렇게 기록함으로써 다만 7개 도에만 파견했던 선무사가 혹 전국의 다른 도에도 파견한 것처럼 오해되기 쉽다. 또한 이런 순행의 결과, 혹 탐관오리로 틀켜 형벌을 받게 되는 기록이 있게 되면 정확히 어떤 사람이 어떤 도에 파견됐는지 정확히 알아야 연계해서 실정을 고증할 수 있는데도 모두 없애버려서 《원사》의 다른 부분과 유기적으로 연동하여 고증할 수 있는 근본을 없애버렸다.
  • 진종 태정제는 몽골에서 제위한 황제로 그의 구어문으로 된 조서는 굉장히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지만 모두 삭제되었다.
  • 회통하는 원대 경제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운하였다. 해마다 굉장히 많은 양의 세금과 상품이 운반되는데 원조 말기 혜종의 통치시기에 이르러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회통하를 점거해 통행을 막는 내용이 삭제됐다.
  • 《원사》 <순제(혜종) 본기>에는 지정 12년, 13년, 15년, 18년에 지폐 인쇄의 기록이 있어 원말의 경제에 관해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는데 이 역시 삭제되었다.
  • <본기> 이외에 <지>(志)도 각각 관련되는 주제에 관해 중요한 서문격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는데도 삭제되었다.
  • <열전>에서 삭제하지 말아야 할 곳을 자기 마음대로 삭제하여 오류를 일으킨 곳이 많은데 예를 들면 《원사》 <원명선 열전>에는 동사선이 원명선에게 '우집은 현명한 사람으로 조정을 위해 쓰일 인재이니 장차 다른 사람의 이간질로 인해 그를 남인이라는 이유로 꺾지 말라'고 부탁하는 부분이 실려 있어 당시의 북방에 있었던 사인들과 남방에서 올라온 사인들간의 대립 분위기에 관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삭제되었으니 이는 다만 문장의 간결을 중요하게 여길 뿐 역사학의 관점은 거의 결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커샤오민은 여러 가지 사료를 비교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굉장히 떨어져 어떤 책에서 오류가 있어도 바로잡을 줄 모르고 틀린 것을 다시 틀리게 써서 전한 데 불과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다른 학자가 잘못 고증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뭐가 맞고 틀린지도 따지지 않고 올바른 《원사》의 내용을 고쳐 틀리게 바꾼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홍균은 콘스탄틴 도손의 기록을 받아들여 사마르칸트의 수비군이 몽골족을 그들과 같은 튀르크족으로 여겨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는 견해를 피력했는데 앞뒤도 안 가리고 이 한 구절을 읽고서는 《신원사》의 1권에다
'몽고의 선조는 돌궐(투르크)에서 나왔다.'(蒙古之先、出於突厥)
고 당당하게 쓰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신원사고증》에서 도손의 기록을 인용하며 이게 바로 확증이라 했다. 그런데 실정은 달랐다.

칭기즈 칸이 몽골를 통일할 때 모든 부족을 95개의 천호로 나누고, 하나의 대몽골족으로 통일했는데 이 당시 소속된 사람 중에 튀르크계 돌궐족이 가장 많았다. 그렇기에 당연히 사마르칸트의 수비군들은 몽골 군인들이 대부분 튀르크어를 하는 것을 듣고, 몽골인들이 튀르크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지만 이것을 보고 몽골족의 기원이 튀르크족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잘못된 부분이 굉장히 많은데 일일이 들지 않는다.

커샤오민은 또한 곳곳에서 《원사》에 대한 이의를 표시했다. 본래 《원사》는 몽골인, 색목인을 앞에서 기술하고 한족을 뒤에 서술하며 한 집안에서도 지위가 현저한 사람을 본전에 기록하고, 나머지 사람은 부대하여 기술했다. 그런데 그는 민족을 뒤섞고, 기존의 《열전》을 재편성해 사천택 같은 유명한 개국공신을 별로 지명도가 없는 <사병직 열전>에 부대했을 뿐이다. 또한 본래 <선거지>에 있는 내용을 <백관지>로 옮겨서 인사관련 규정과 정부조직 관련 규정을 복잡하게 뒤섞어 놓았다.

무엇보다 중대한 결점은 저자 본인이 어떤 사실에 관해 무단으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의 《신원사고증》을 보면 곳곳에서
'옛날 사료가 틀린 게 심하다.'(舊史誤甚)
는 말을 남발하는데 구 사료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표출한 것이다. 예를 들어 《원사》에서 기록한 고려의 연호를 자신의 의견에 기대어 고친 게 많지만 한반도의 기록과 대조해보면 대부분 틀렸다. 또한 원 세조가 일본을 정벌할 때 쓰시마에 겨우 80명의 기병밖에 없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오하시 도쓰안(大橋訥庵)의 《원구기략》(元寇紀略)에서 80명이라고 쓴 것을 보고 아무 근거도 없이 八十은 八千의 오류일 것이라 여기고 《신원사》에다 그렇게 기록했다.

3.2. 배경

책이 완성되자 일본에서는 커샤오민에게 도쿄제국대학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고, 당시의 북양정부는 정식으로 이 책을 정사(正史)의 반열에 들도록 명령하였다. 다만 이것은 표면적으로 관찰한 결과이고, 위의 문단에서 지적하듯 심층적으로 들어가면 오류나 결점이 많이 발견된다.

이 책이 정사의 반열에 들고, 일본으로부터 찬사를 들은 이유는 당시 일본이 중국의 반일감정을 완화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일어난 이래로 반일 감정이 극도에 치달았다. 일본은 이런 반일 감정을 감소시키기 위해 신축조약으로 약속된 배상금을 중국의 문화사업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북양정부와의 협약을 통해 동방문화사업위원회를 발족했다. 위원으로는 중국인 11명, 일본인 10명으로 일본 외무성 문화사업국에 예속했다. 이를 일본의 중국에 대한 문화적 침략으로 여긴 중국 지식인들은 분분히 반대했지만 1925년 정식으로 설립되어 베이징에 총회를 두고 상하이에 분회를 두었다. 커샤오민은 이 동방문화사업위원회의 총회장을 맡았다. 실제로 위원회에 속한 중국인은 대부분 친일 중국인이 발탁되었다.

다만 이는 《신원사》의 우열 문제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이다.

4. 구성

<본기>(本紀) 26권, <표>(表) 8권, <지>(志) 70권, <열전>(列傳) 15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4.1. 본기

권1 본기 제1 서기(서문)
권2 본기 제2 태조1
권3 본기 제3 태조2(예종 없음)
권4 본기 제4 태종
권5 본기 제5 정종
권6 본기 제6 헌종
권7 본기 제7 세조1
권8 본기 제8 세조2
권9 본기 제9 세조3
권10 본기 제10 세조4
권11 본기 제11 세조5
권12 본기 제12 세조6
권13 본기 제13 성종(상)
권14 본기 제14 성종(하)
권15 본기 제15 무종
권16 본기 제16 인종(상)
권17 본기 제17 인종(하)
권18 본기 제18 영종(英宗)
권19 본기 제19 태정제(천순제 없음)
권20 본기 제20 명종
권21 본기 제21 문종(상)
권22 본기 제22 문종(하), 영종(甯宗)
권23 본기 제23 혜종1
권24 본기 제24 혜종2
권25 본기 제25 혜종3
권26 본기 제26 혜종4, 소종(평황제 없음)

5.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