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09:03:08

남제서

중국의 정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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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서
南齊書
Book of Southern Qi
저자 소자현
시기 6세기
언어 한문
권 수 60권
분량 440년 ~ 502년 (62년)
송문제 17년 ~ 제화제 2년

1. 개요2. 편찬 과정3. 구성
3.1. <본기>(本紀)
4. 의의와 평가5. 여담6. 관련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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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南齊書

중국의 정사인 24사 중 하나다. 《남제서》는 479년 소도성(蕭道成)이 유송순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남제를 건국한 후 502년 화제 소보융(蕭寶融)이 피살될 때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양나라 때 이부상서를 지낸 소자현(蕭子顯)이 기전체 방식으로 편찬했다. 원래는《제서》(齊書)라고 불렀으나 북송 때《남제서》로 부르게 되었다. 원본은 60권이었으나 <자서> 1권이 산일[1]되어 현재는 59권으로 남아있다.

2. 편찬 과정

오균이 제사(齊史)를 편찬할 것을 황제에게 올렸으나 거부당하고 소자현이 편찬을 스스로 맡았으니《남제서》는 형식상은 사찬이나, 관찬이나 마찬가지이다. 심약(沈約)과 위수(魏收)가 각각《송서》와《위서》를 스스로 편찬했듯이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사관의 역할에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자가 많았다. 따라서 당나라 때 형성되었다고 보는 설관수사(設官修史)가 이미 남북조시대 때 만들어졌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남제의 고제 소도성은 등극한 후 1년 뒤인 480년에 사관을 두기 시작했다. 남제에 대한 역사서로는 단초와 강엄이 편수한《제사》(齊史) 13권이 있었는데, 이로서 이미 10지가 만들어졌다. 양나라 때 편찬된 소자현의《남제서》와 더불어 심약의 《제기》(齊紀) 20권, 오균의 《제춘추》(齊春秋) 등은 모두《제사》를 참조했다.[2]

소자현은 제나라의 건국자인 고제 소도성의 손자로서, 특이하게 전 왕조의 자손이 그 왕조의 역사를 스스로 편찬한 유일한 예로 남아 있다.

3. 구성

남제서(南齊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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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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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2권 「고제기(高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4권 「전폐제기(前廢帝紀)」
소도성 소색 소소업
5권 「중폐제기(中廢帝紀)」 6권 명제기(明帝紀)」
소소문 소란
7권 「후폐제기(後廢帝紀)」 8권 「화제기(和帝紀)」
소보권 소보융
※ 9권 ~ 19권은 志에 해당. 남제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3797e8> 20권 「황후전(皇后傳)」 ||
진도정 · 유지용 · 배혜소 · 왕보명 · 하정영 · 왕소명 · 유혜단 · 저영거 · 왕순화
21권 「문혜태자전(文惠太子傳)」 22권 「예장문헌전(豫章文獻王傳)」 23권 「저연등전(褚淵傳)」
소장무 소억 저연 · 왕검
24권 「유세륭등전(柳世隆等傳)」 25권 「원숭조등전(垣崇祖等傳)」 26권 「왕경칙등전(王敬則等傳)」
유세륭 · 장괴 원숭조 · 장경아 왕경칙 · 진현달
27권 「유회진등전(劉懷珍等傳)」 28권 「최조사등전(崔祖思等傳)」 29권 「여안국등전(呂安國等傳)」
유회진 · 이안민 · 왕현재 최조사 · 유선명 · 소간 · 원영조 여안국 · 주산도 · 주반룡 · 왕광지
30권 「설연등전(薛淵等傳)」 31권 「강밀등전(江謐等傳)」 32권 「왕곤등전(王琨等傳)」
설연 · 대승정 · 환강 · 초도 · 조호 강밀 · 순백옥 왕곤 · 장대 · 저현 · 하집 · 왕연지 · 원도
33권 「왕승건등전(王僧虔等傳)」 34권 「우완지등전(虞玩之等傳)」
왕승건 · 장서 우완지 · 유휴 · 심충 · 유고지 · 왕심
35권 「고조십이왕전(高祖十二王傳)」
소영 · 소황 · 소엽 · 소고 · 소장 · 소삭 · 소감 · 소봉 · 소예 · 소갱 · 소구 · 소현
36권 「사초종등전(謝超宗等傳)」 37권 「도휘등전(到撝等傳)」
사초종 · 유상 도휘 · 유전 · 우종· 호해지
38권 「소경선등전(蕭景先等傳)」 39권 「유환등전(劉瓛等傳)」
소경선 · 소적부 유환 · 육징
40권 「무십칠왕전(武十七王傳)」
소자량 · 소자경(卿) · 소자향 · 소자경(敬) · 소자무 · 소자륭 · 소자진 · 소자명 · 소자한 · 소자륜 · 소자정 · 소자악 · 소자문
소자준 · 소자림 · 소자건 · 소자하
41권 「장융등전(張融等傳)」 42권 「왕안등전(王晏等傳)」 43권 「강효등전(江斅等傳)」
장융 · 주옹 왕안 · 소심 · 소탄지 · 강석 강효 · 하창우 · 사약· 왕사원
44권 「서효사등전(徐孝嗣等傳)」 45권 「종실전(宗室傳)」 46권 「왕수지등전(王秀之等傳)」
서효사 · 심문계 소도도 · 소도생 · 소면 왕수지 · 왕자 · 육혜효 · 소혜기
47권 「왕융등전(王融等傳)」 48권 「원단등전(袁彖等傳)」 49권 「왕환등전(王奐等傳)」
왕융 · 사조 원단 · 공치규 · 유회 왕환 · 장충
50권 「문이왕명칠왕전(文二王·明七王傳)」
소소수 · 소소찬 · 소보의 · 소보현 · 소보원 · 소보인 · 소보유 · 소보숭 · 소보정
5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최혜경 · 장흔태
52권 「문학전(文學傳)」
구영국 · 단초 · 변빈 · 구거원 · 왕지심 · 육궐 · 최위조 · 왕준지 · 조충지 · 가연
53권 「양정전(良政傳)」
부염 · 우원 · 유회위 · 배소명 · 심헌 · 이규지 · 공수지
54권 「고일전(高逸傳)」
저백옥 · 명승소 · 고환 · 장영서 · 하구 · 유규 · 유역 · 종측 · 두경산 · 심유사 · 오포 · 서숙
55권 「효의전(孝義傳)」
최회진 · 공손승원 · 오흔지 · 한계백· 손담 · 화보 · 한영민 · 봉연백 · 오체지 · 왕문수 · 주겸지 · 소예명 · 악이· 강필 · 두서 · 육강
56권 「행신전(倖臣傳)」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여문도
57권 「위로전(魏虜傳)」 58권 「만・동남이전(蠻・東南夷傳)」 59권 「유목전(遊牧傳)」
위로 고려· 가라 · 왜국 · 임읍 · 부남국 · 교주 예예로 · 하남지 · 양씨저 · 탕창
60권 「자서전(自序傳)」
소자현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3797e8><tablebgcolor=#3797e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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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本紀) 8권, <지>(志) 11권, <열전> 40권으로 총 59권이다.

3.1. <본기>(本紀)

  • 본기 제1권 고제 소도성(상)
  • 본기 제2권 고제 소도성(하)
  • 본기 제3권 무제 무제
  • 본기 제4권 울림왕 울림왕
  • 본기 제5권 해릉왕 해릉왕
  • 본기 제6권 명제 소란
  • 본기 제7권 동혼후 동혼후
  • 본기 제8권 화제 소보융

4. 의의와 평가

《남제서》는 양나라 때 찬술된 까닭과 편찬자인 소자현이 종실의 구성원이었기 때문에 사서에 주관적인 입장이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인 고제 소도성의 등극이 아름다운 선양 과정으로 미화되어 있는가 하면, 아버지인 예장왕 소억(蕭?)의 활동이 극찬된 것은 소자현의 가치가 개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좋은 대목이다. 하지만, 양무제와 그의 부친인 소순지의 이름을 냉정하게 피휘(避諱)한 점을 미루어 보아 소자현도 양나라의 신하로서의 자세를 지키고 있다. 그야, 자칫 피휘를 안 했다가는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으니 당연하다. 또한, 제나라 말기 동혼후(東昏侯)의 폭정, 사치, 살육 등의 묘사를 적나라하게 서술하여 남제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논찬에서 밝히고 있다. 이것은 어찌보면 남제의 멸망을 애석한 심정으로 집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편협한 사고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소자현은 동시대의 목격자로서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를 저술할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남제서》는 사료가 비교적 충실한 편이며, 객관적인 인식과 가치 판단을 고결한 문체로 잘 표현한 역사서이다.

심약과 소자현은 동시대 인물로 비슷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는 곧 《송서》와《남제서》의 비교로 이어진다. 두 사람 모두 유사한 직업과 지위를 갖고 있었기에 남조의 문벌귀족체제에 대한 호평이나 유•불교를 함께 수용하는 종교 관념 등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지>의 체례도 <식화지>(食貨志)와 <예문지>(藝文志)가 빠진 것을 제외하면 《송서》와 거의 똑같다.

단 서술 방식에서 차이가 드러나는데 《송서》는 예와 제도 등의 연원을 한나라, 위나라 시대 또는 진나라 시대까지 서술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남제서》는 철저히 남제의 상황과 변화에만 초점을 두어 정리했는데, 두 사서 중《남제서》가 더욱 치밀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종족 집단의 통치에 대해서 《송서》보다 세세하게 풀어썼다.

<열전>에서는《송서》와 극명하게 쌍방을 이룬다.《남제서》는 똑같은 유형의 인물을 '전'(傳)으로 편제하는 유서법을 채택하고 있지만,《송서》는 대서법을 선택하고 있다. 청나라의 고증학자였던 조익(趙翼)은 《이십이사차기》에서《남제서》는 과학기술자나 의술인 혹은 수절(守節)로 유명한 사람 등 특수한 부류의 인물들을 한 열전에 나열하여 더 많은 인물들을 포함할 수 있도록 했다고 칭찬했다. 이를테면, <심문계전>(沈文季傳)에서 당우지의 반란을 상세하게 기록한 점이나 <경릉문선왕자량전>(竟陵文宣王子良傳)에서 조세와 부역의 포, 건설, 개간 등에 대한 내용이 방대한 점 등을 비추어 볼 때 《남제서》의 사료적인 가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5. 여담

  • 한반도 남부의 가야가 <열전>으로 있는 유일한 중국 정사이다. 479년[3] 가야의 하지왕이 사절단을 보내 보국장군 본국왕으로 책봉됐기 때문이다. 이 하지왕은 가야의 여러 나라 중 고령군대가야 왕으로 주로 추정된다. 서기 5세기 후반 대가야는 호남까지 영향력을 뻗어 관련 유적을 다수 남길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기 때문이고, 중국에 사신단을 보낸 것도 섬진강 유역을 장악해서 가능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 웅진백제가 당대에 북위와 교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이 《남제서》에 기록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동성왕 문서 참고.

6. 관련 고사성어



[1] 흩어져 일부가 빠져 없어짐[2] 그 외에도 진나라 때 유척의《제기》(齊紀) 10권, 왕일의 《제전추》 5권, 웅양의 《제전》(齊典) 10권 등이 편찬되었는데 지금은 모두 산일되어 현존하지 않고, 오로지《남제서》만 남아있다.[3] 그런데 이 해는 고제 소도성이 선양을 받아 막 즉위한 해였다. 사신단 준비 및 물리적인 이동 시간을 고려했을 때, 가야의 하지왕은 그 전 왕조인 유송에 사절단을 보내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