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3:41:14

기전체

1. 개요2. 구조
2.1. 본기(本紀), 또는 기()2.2. 세가(世家)2.3. 열전(列傳)2.4. 표()2.5. 지()
3. 주의점4. 한국사의 기전체 사서5. 여담

1. 개요

기전체()는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으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전통적 사서(史書, 역사책) 서술방식 중 하나이다.

고대 동아시아 역사저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사마천이 집필한 《사기》가 최초의 기전체 사서이다. 이를 모범으로 삼아 이후 중국의 정사(正史)인 '이십사사'는 모두 기전체로 기록되었다. 한국에서도 이 형식을 받아들여 정사인 삼국사기고려사가 기전체의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일반적으로는 후임 왕조가 전임 왕조에 대한 국가 공인 역사서를 기전체로 펴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많은 국가 공인 역사서가 기전체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정사체라고도 부른다. 한편 고려사절요동국통감같이 편년체로 작성 된 관찬사서도 많다.

2. 구조

기전체 사서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2.1. 본기(本紀), 또는 기()

천자, 특히 황제의 전기(傳記). 각 왕조의 연대기 역할을 한다.

삼국사기마냥 여러 왕조를 서술한 특이케이스가 아니라 하나의 왕조만 다루는 사서라면 본기만 쭉 따라 읽으면 편년체 사서를 읽는 것과 별 다름이 없다. 명분보다는 실세를 중시한 사마천의 《사기》에는 항우, 여후의 전기가 본기로 분류되어 있는데 항우는 잠시 천하의 제후들의 위에 군림했으며 여후는 혜제를 대신한 사실상의 황제였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반고의《한서》에서는 항우는 열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혜제 시기의 경우 '혜제기'가 따로 있다. 다만, 한서에서조차 여후는 본기에 들어있다. 여후 본인의 기록과 두명의 소제에 관한 기록은 고후기(高后紀)라 하여 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각각 본기(本紀)로 작성했는데, 보통 하나의 정통 왕조만 본기로 삼고 나머지는 열전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인 데 비하면 특이 케이스다. 물론 중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어서 원나라 시기에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역사서를 편찬하면서 송나라만 본기에 기록하느냐 요와 금을 묶어 북사로 남송은 따로 남송사로 편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뉘었는데 결국 세 왕조 모두 정통성을 부여하고 각각의 역사서를 편찬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렇게 해서 나온게 송사, 요사, 금사다.

한편으로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왕조의 외왕내제적 역사관을 나타내기도 한다. 고려는 스스로도 삼한일통을 다시 달성했다는 자부심이 있었으며 건국 이후 비교적 꾸준하게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냈으며 동시에 또 내부적으로 아무래도 처음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를 계승했다는 의식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고구려나 신라 둘 중 하나를 버릴 수 없는 처지였다.

2.2. 세가(世家)

제후국, 특히 의 전기로, 고대 중국 이후로는 제후국이 몰락하여 중국 사서에서는 오직 《사기》와 《신오대사》에만 세가가 존재한다. 오대십국시대에는 춘추전국시대 이후로 드물게 제후국이 존재했다. 물론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를 다 조공국이라 하면 사실 외부의 제후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은 이들을 모두 자기네와는 근본이 다른 나라로 여겼다. 내부의 제후국은 바로 오월 그리고 잠깐이지만 남당도 국호를 강남국으로 바꾼 채 송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유교의 교조인 공자를 높이 평가하여, 실제로 공자가 제후는 아니었지만 열전이 아닌 세가에서 다뤘다. 조선시대에 쓴《고려사》는 고려의 역대 왕들을 제후의 예에 따라 세가에 올렸다. 고려는 외왕내제 국가였지만, 사서 고려사는 후임 조선왕조에서 편찬한 책이니 이는 조선왕조 당시의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진서(晉書)》의 경우 서진, 동진을 제외한 역대 군주의 기록은 (본)기도, 세가도 아닌 재기(載記)라는 편명으로 다루고 있다. 참고로 당나라 시기에는 당태종 이세민(李民)의 피휘하여 계가라고 불렸다.

2.3. 열전(列傳)

본받거나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신하나 일반인의 이야기. 일종의 전기 문학이라 할 수 있으며 기전체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딱딱한 본기에 비해 개인을 주인공으로 서술해 재미도 있기 때문에, 국내의 《사기》 번역서들을 보면 열전만 발췌, 번역한 경우가 많다.

한국의 기전체 사서는 열전 부분이 중국 사서에 비해 좀 부실한 편이다. 특히 《삼국사기》는 김유신열전 빼고는 거의 날림 수준. 이는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인물들 대부분이 삼국시대 당시에서 이미 수백년이 지난 삼국사기 집필 당시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은 인물들인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오죽하면 김유신 열전도 그 외의 기록이 부실했기 때문에 원래라면 사료로 쓰지 않을 김유신행록(행장)을 설화적인 내용을 줄이고 줄여서 만든 것이라 기록해 두었겠는가. 게다가 그 설화적인 내용을 줄였는데도 김유신 열전을 보면 설화적인 내용이 많다.

또한 인물의 전기 외에 주변국에 관한 기록도 열전에 기록한다. 가령 《명사》조선에 관한 기록을 다룬 조선전, 일본에 관한 기록을 다룬 일본전 등이 열전에 실려 있다. 이 역시도 기전체의 시조인 사기에서 시작된 것으로 사기에는 흉노, 조선, 남월, 서남이 등의 역사를 모두 독립된 열전에 기록했다.

유비손권,[1] 궁예견훤,[2] 우왕, 창왕[3] 등 실제로는 군주였더라도 사서 편찬자의 판단에 비정통 군주로 보는 경우도 열전에 쓴다. 항우와 여후를 본기에 썼던 사마천의 사기가 특이 케이스.

열전의 경우는 수많은 인물을 한가지 특징을 잡아서 묶기 때문에 본기에 비해서는 양이 적으며 한명이 열전 2~3권을 차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사와 중국사의 차이점을 보자면 일단 나라가 지속했던 기간에 비해 양이 중국사에 비해 적으며 정도전, 조준 같은 인물이 아닌 이상 한권에 중국사에 비해 수많은 인물이 묶이는게 특징이다. 또한 제후 이하 신하라 하더라도 서술자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배치되는데 가령 고려사에서 역대 신하들은 <제신전>. <폐행전>, <간신전>, <반역전> 등에 실리는데 목종을 폐위시켰다고는 하나 자신에게 만세를 부르는 부하들을 말렸으며 거란의 침공에 몸소 싸우다 잡히고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고 죽은 강조는 반역전에 실렸고 역대 무신정권 집권자들은 대부분 반역전에 실렸으나 경대승과 두경승은 반역전에 실리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다른 집권자들과는 달리 자제하며 살기는 했다.

2.4. 표()

연표, 가계표, 인명표 등.

2.5. 지()

본기, 열전에 들어가지 않는 사회적인 사항. 주로 법률이나 경제, 자연 현상 등이 여기에 들어간다. 이 표현은 반고의 《한서》에서 처음 썼고, 기전체의 효시인 사기에서는 '서'()라고 했다.

3. 주의점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 관련된 이들의 전기에 흩어져 있어서 각 사건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는 문제가 있지만,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데에는 유용하다.

기전체 사서는 일반적으로 전의 주인공의 공은 제대로 기술해도, 흑역사나 허물은 편집해서 빼주거나 덮어주는 일이 많은 편이다. 일종의 주인공 보정. 어떤 사람의 짧게 기술되거나 아예 생략된 내용이, 다른 사람의 전에는 자세히 서술되었거나 같은 사건이라도 온도차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따라서 기전체 사서를 읽을 때는 해당 인물의 전기에 안 나온다고 그런 기록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섣부른 행동이다. 다른 필법에 비해 교차검증을 신중히 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적벽대전의 경우 조조 중심으로 서술한 무제기에는 역병이 돌아 조조가 그냥 물러난 것처럼 설명되어 있으나, 촉지 선주전, 오지 주유전, 위지 정욱전 등 다른 전들을 읽어보면 조조가 참담하게 패배하고 물러간 사실을 알 수 있다.

4. 한국사의 기전체 사서

한국의 전통 사서는 편년체기사본말체가 주를 이루는 데다 왕조 평균수명이 길어 왕조 변천이 중국에 비해 적어서 왕조가 망한 뒤 후대 왕조에서 편찬하는 기전체 정사를 편찬할 기회도 적다보니 기전체 사서는 많지 않으나, 대표적인 정사인 《삼국사기》, 《고려사》는 기전체로 쓰였다. 한치윤의 《해동역사》는 편명에 세기(世紀), 고(考) 등 독자적인 용어를 사용했으나 기전체 사서로 분류된다.

5. 여담

  • 조선왕조실록은 기전체가 아니다. 편년체로 쓰여진 당대의 기록이며 아직 조선의 역사를 기전체로 나타낸 국가 공인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후임 왕조가 전왕조의 실록과 기타 자료를 참고해 기전체 사서를 편찬해온 동아시아의 관습을 따져본다면 조선이 멸망한 이후 이를 펴내야 했다. 그러나 일제는 역사를 파괴하는데에 혈안이 되어있었지, 기전체 사서 편찬에 관심이 없었다.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해 조선사를 펴냈지만 기전체가 아닌 편년체 형식이었다. 또 여기서 말하는 조선사는 조선 왕조의 역사가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역사를 의미한다.
    오늘날 대한민국북한도 조선시대를 다루는 기전체 역사서를 편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만약 현대 한국에서 조선에 대한 기전체 역사서가 작성된다면 학자의 개인적 연구물이거나 정부 문화 사업의 일부 정도로 그칠 것이다.
  •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는 오늘날에도 여러 저자에 의해 새로운 기전체 사서들이 편찬 중인 듯 하다. 가령 해당 목록에 있는 2000년에 출간된《진사(秦史)》의 경우, 무려 2,200여 년 전의 일들을 기전체 사서로 편찬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과 달리 근현대에도 국가 공인 정사로써의 기전체 역사서가 편찬되고 있다. 중국사 최후의 전근대 왕조인 청나라의 경우 1961년에 중화민국, 즉 대만에서 청사(清史)를 펴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2020년대에 자국판 청사를 펴내려 했으나 공산당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 고려 후기에 나타난 가전체(假傳體)라는 문학 양식이 바로 이 기전체 구조 중 열전의 형식을 빌려온 것이다.
  • 어떤 의미에서는 나무위키도 기전체 구조다. 어떤 역사상의 사건, 시대상이나 전쟁, 전투에 대한 내용을 그 사건이나 전쟁, 전투가 벌어진 시기에 재위하고 있었던 왕이나 대통령이었던 인물 문서에 서술하거나 장군으로서 지휘했던 인물의 문서에 서술한 경우도 많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작품이나 저술에 대한 내용 역시 그러한 저술을 지은 작가인 인물 문서에 서술된 경우도 많다. 물론 그런 사건이나 전투를 왕이나 대통령이 주도했다면 그런 서술 방식도 문제가 없겠지만 심한 경우 왕이나 대통령이 그 사건이나 전투에 별달리 관여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냥 그 사건이 그 군주나 대통령의 재임 시기에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개별적인 사건이나 전쟁에 대한 내용을 전부 군주나 대통령 문서에 때려박는 경우도 있다.


[1] 정사 삼국지조위정통론에 입각했기 때문에 조위, 사마진 황제들만 본기에 있다.[2] 삼국사기에서는 후삼국시대의 경우 경순왕까지의 신라, 고려사에서는 왕건부터 시작되는 고려 왕통만을 정통으로 간주해 본기 및 세가에 실었다.[3] 당시 정권을 잡은 이성계 일파는 이들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식으로 몰아붙여 주살하고 고려왕조의 정통성이 훼손되었음을 주장, 공양왕 과도기를 거쳐 본인이 왕위에 올랐다. 고려사 열전에도 신씨라고 바꿔서 신우, 신창으로 썼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