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정사(正史) 국가 공인 역사서 | 삼국사기 | 고려사 | |||
실록(實錄) 제왕의 일대기를 다룬 편년체 기록물 | †고려실록 | 조선왕조실록 | ||||
절요(節要) 방대한 정사 기록을 요약한 기록물 | 고려사절요 | 삼국사절요 | ||||
통감(通鑑) 통치에 도움이 되는 기록물 | 동국통감 | |||||
강목(綱目) 강목체를 적용한 기록물 | 동사강목 | 동국통감제강 | †본조편년강목 | |||
여사제강 | 동사회강 | 대동사강 | ||||
휘찬려사 | 국조정토록 | |||||
사략(史略) | †본조사략 | 동국사략 | ||||
일기(日記) 국가 공문서 | 승정원일기 | 일성록 | 동궁일기 | |||
각사등록 | 비변사등록 | |||||
역사시(歷史詩) | 응제시주 | 제왕운기 | ||||
기타 | 삼국유사 | †개황력 | 대사편년 | |||
대사기 | 속무정보감 | 국조통기 | ||||
발해고 | 해동고승전 | 동국병감 | ||||
단군세가 | 기자지 | 동사 | ||||
해동명장전 | †단군고기 | †신라고기 | ||||
†백제고기 | †해동고기 | †본국고기 | ||||
†삼한고기 | †고려고기 | 연려실기술 | ||||
동사보유 | 동국역대총목 | 동사세가 | ||||
해동역사 | 열조통기 | 동사찬요 | ||||
기타 실전(失傳) | <colbgcolor=#fff,#191919>고구려 | †유기 | †신집 | |||
신라 | †국사 | †제왕연대력 | †화랑세기 | |||
백제 | †백제기 | †백제신찬 | ||||
†백제본기 | †서기 | |||||
고려 | †구삼국사 | †가락국기 | †편년통록 | |||
†왕대종족기 | †성원록 | †금경록 | ||||
위서(僞書) | 환단고기 | 규원사화 | 단기고사 | |||
부도지 | 화랑세기 박창화 필사본 | 격암유록 | ||||
†: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 ||||||
번외: 현대 역사서 한국사 | }}}}}}}}} |
[clearfix]
1. 개요
東國通鑑. 조선 세조 9년(1463)에 서거정(徐居正)[1] 등이 왕의 명을 받아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16년(1485)에 완성한 관찬 역사서.단군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했으며 총 56권 28책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었다.
제목인 동국통감의 의미는 '조선(東國) 통치에 배움이 되고 도움이 되는 역사(通鑑)'라는 뜻이다. '통감'이라는 단어는 자치통감에서 따왔다. 자치통감 편찬 당시 신종이 통지(通志)라 불리던 책을 보고 '통치에 도움이 되는 역사'라는 뜻으로 책의 제목을 '자치통감'이라고 바꾼 것이 유래이다.
1484년에 편찬된 동국통감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1485년에 편찬된 동국통감은 네이버에서 국역된 버전으로 볼수 있다.링크
2. 편찬 역사
조선 세조는 삼국사기와 동국사략을 공부하던 중,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서들이 몇 권 남지 않은 데다가 남은 책들도 서술이 탈락된 부분이 많고 난잡하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아직 우리나라엔 편년체 고대 통사가 없음을 절감하고는 세조 4년(1458) 신하들에게 우리나라도 상고 이래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중국의 자치통감에 준하는 사서를 편찬함이 어떻겠느냐고 말을 냈다.이후 세조 9년(1463) 9월 5일 서현정(序賢亭)에서 다시 신하들에게 빈약한 고대 역사기록을 한탄하며 편년체 역사서가 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결국 양성지를 중심으로 동국통감청(東國通鑑廳)을 만들어 집필을 시작했다. 세조는 생전 계속 동국통감의 편찬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세조 10년 8월에는 자신이 직접 동국통감청의 당상관과 낭관들을 불러 목차를 물어보고 범례를 직접 써서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국통감은 세조 생전에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예종 대에도 예종의 단명으로 다시 중단되었다가 성종 대에야 신숙주가 재개하고 서거정이 완성했다.
3. 내용의 특징
上下千四百年前者覆而後者戒彙稡五六十卷義欲正而辭欲嚴
위아래로 천사백 년 동안 앞 사람의 실패가 뒷 사람의 경계함이 되게 하였고, 모아놓은 오륙십 권의 책은 의(義)에 대해서는 바르게 하려고 하였으며, 이야기는 엄정히 하려고 하였다.
『진동국통감전(進東國通鑑箋)』[2], 서거정 등
위아래로 천사백 년 동안 앞 사람의 실패가 뒷 사람의 경계함이 되게 하였고, 모아놓은 오륙십 권의 책은 의(義)에 대해서는 바르게 하려고 하였으며, 이야기는 엄정히 하려고 하였다.
『진동국통감전(進東國通鑑箋)』[2], 서거정 등
내용은 크게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外紀), 삼국시대에서부터 신라 문무왕 때까지를 삼국기(三國紀), 문무왕부터 고려의 건국 까지를 신라기(新羅紀), 이후 고려말까지를 고려기(高麗紀)로 나누었다.
외기는 단군이 단군조선을 건국했다고 전하는 기원전 2333년, 즉 단군기원이 최초로 제시된 역사서이다.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외기로 처리해버린 것은 15세기 당대에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고대 왕조들이 남긴 자료가 매우 부족하여 삼국시대 이전의 내용은 체계적인 왕조사 서술이 불가능하다는 객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다.
삼국시대 이전 기록은 현재에도 부실하고 삼국시대 기록마저도 국내 기록으로는 부족해 일본의 기록까지도 참고해야 한다. 일본서기 같은 책은 역사왜곡이 심하지만 고대사 자료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삼국기의 경우 기존 역사서들과 얼마전 만들어진 권근의 동국사략 등과는 달리, 신라 중심 서술을 뒤집고 처음으로 삼국이 대등하다는 균적론(均敵論)을 내세웠다. 이는 세종 시대부터 이어져온 인식으로 세종이 삼국의 시조들 중에서 신라의 조상에게만 제사를 지내자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삼국 모두의 시조들에게 제사를 지내었다.
연대 표기 또한 동국사략과는 달리 당대에 쓰이던 대로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을 사용했다. 새 왕이 즉위한 바로 그 해부터 왕의 즉위기간으로 치는 방법. 유교적 예법에서는 유년칭원법이라 하여 선왕이 죽고 새 왕이 즉위한 해는 선왕의 재위기간으로 잡고, 그 다음해부터 새 왕의 즉위기간으로 계산한다. 이처럼 그 당시 썼던 것들을 사실 그대로 온전히 보전했다. 대신 신라기를 따로 독립시켜 신라 통일의 중요성과 그 의미는 확실히 부각시켰고 발해는 한국사로 포함하지 않았다.[3]
참고로 한반도 국가들이 가진 전쟁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와 논평을 하지 않았다. 기성 역사서대로 정치/외교사가 주를 이루고 전쟁 이야기도 상벌의 기준이나 내부의 문제와 같은 정세판단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로 하지 전쟁사의 기록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시성 전투, 황산벌 전투, 기벌포 전투의 승리나 김경손의 결사대의 활약 등이 등장하지 않는다. 본시 역사서의 편찬도 유학자들이 말하듯 문무의 도는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듯 전쟁사가 구체적으로 적히지 않은 것은 아쉽다.
전쟁만 치르고 다닌 요나라의 역사서 요사나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의 경우엔 상대적으로 전쟁 기록이 많은 편이다. 국방부에서 역사 교육을 가르칠 때 귀주 대첩의 경우 고려사와 더불어 요사의 내용을 많이 참고로 한다. 조선 후기에는 동사강목이 이 문제에 대해서 보완을 하려했으나 자료 미비로 한계가 있었다.
대체적으로 동국통감 이전에 동국병감이 나왔으나 전쟁사를 다룬 동국병감 또한 서문이나 구체적인 기록이 동국통감은 아니더라도 미비한 실정이다. 결과적으로 동국통감 편찬 당시 문관 출신들과 혹은 전쟁에서 공을 세운 문관 출신들과 무관들의 참여를 제한해, 정치사 못지 않게 전쟁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겐 꽤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대체로 동사강목에선 전쟁사에 대한 기록이 추가가 되었지만 자료 미비로 인해 보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후 현종 13년(1672)에 홍여하(洪汝河)가 동국통감제강을 편찬했다. 동국통감제강은 기존 동국통감을 주자의 존화양이(尊華壤夷)적 역사서술 방법으로 새로 구성한 것이다. 1644년 새롭게 중원의 지배자가 된 청나라를 오랑캐로 격하하고 몰락한 중국 대신 조선의 문화적 우월성과 국가 권위를 드높이려 한 것이다. 명나라에서 끝난 중국 제왕(帝王)의 정통을 신라 → 조선으로 연결하고 기타 다른 국가들을 신하나 찬탈자 형식으로 서술했다.
3.1. 1484년본과 1485년본의 차이
1484년 서거정과 훈구파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최초의 동국통감은 엄격한 유교적 명분론을 깔지 않았고 사실을 온전히 보전하자는 목적으로 찬자 자신들의 사론을 적어넣지 않았다. 이후 1485년에 신진사림이 중심이 되어 개찬한 신찬동국통감은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한 서술이 주를 이루며 사론 약 400여 편을 추가했다. 초창기 동국통감과 신찬동국통감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초창기 동국통감은 단군기원을 제시하고 단군조선을 띄웠으며 삼국의 경우 자치통감의 예를 따라 무통(無統) 즉 정통이라 쳐줄 왕조가 없다고 주장하며 균적론(均敵論)을 폈다. 신찬동국통감에서는 이전의 내용들을 크게 부정하진 않되 좀 더 기자조선 → 마한 → 신라를 주류로 정립하였다.
- 초창기 동국통감은 고려 태조 왕건의 숭불정책에 대해 크게 비난하는 내용이 없었으나 신찬동국통감에서는 고려 태조의 팔관회 실시, 신라의 삼보(三寶), 훈요십조 등을 모두 비난한다.
- 초창기 동국통감은 사론이 아예 없었지만, 신찬동국통감에서는 중국에 사대한 행적이 있으면 찬자들이 사론으로 칭송하는 반면, 중국에 대항하거나 사대를 소홀히 한 행적은 사론으로 철저히 비판한다. 다만 한 가지 중국 사대와 관련해 반론을 하자면 당태종의 한계를 당현종, 송태조와 비교를 하며 중국 역사에 대해 날선 비판을 했으며 또한 오대십국의 혼란상황과 또한 정관정요만 내세운 근시안적인 것도 비판을 한다. 또한 수양제를 비롯해 많은 암군이나, 여불위를 비롯해 시황제도 비판을 가했다. 한 마디로 중국이 몰락하거나 한계를 만들어준 군주와 혼란기는 다 비판한 것으로, 가사도를 간신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태종은 칭송과 비판이 공존하며 균전의 회복과 무과를 도입시킨 측천무후를 무조라고 낮추어 칭하며 중국에 대한 사대의 관점도 어느 정도 없앴기에 동북공정의 반박 사료로도 쓰일 수가 있다. 또한 오대십국체제를 부정해도 서희를 통해 거란을 중원의 또 다른 주인으로 봐서 하나의 중국을 역사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계기도 될수 있었다. 그래서 이 사서를 통해 거란을 인정하며 친명배금 이론도 부정할수도 있었다. 특히 당태종에 대해 공과 사를 따짐은 자칫 명나라에게 빌미를 주기 때문에 쉬운 비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선 동국통감을 두고 명나라 사람들이 웃으리라며 평가절하하였다. 단순히 웃는 것을 넘어서 정관정요 문제로 명과 역사논쟁이 붙어 자칫하면 외교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었다. 동국통감에 논평을 주로 쓴 최부(표해록을 쓴 사람)는 고구려빠였으며, 당태종을 거품이라고 평하고 명나라의 환관도 비판하였다.
- 논평에서 앞뒤의 말이 서로 안 맞는 부분이 많은데, 이는 훈구와 사림이 동시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고려 현종이 토지를 불교 사찰에 주는 것을 문무왕과 비교해 비판하면서도 성군으로 평가한다. 원래 역사기록이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성향이 있다. 충분히 알아보고 평가하기에는 역사기록이 별로 없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3.2. 삼국, 고려시대의 재평가
- 권근이 계백을 두고 아무리 나라 위한 일이라지만 가족을 모두 죽여 대를 끊음은 옳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을 두고, 동국통감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에 대한 비판으로 옳지 않다.'고 깠다.
- 신찬동국통감은 신라정통론을 내세우며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 재평가하며 후기 신라를 띄워주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신라의 몰락을 진성여왕을 시작으로 한 9세기 말을 몰락의 기점으로 잡았다.
- 경순왕의 항복을 유선과 손호와 동급으로 보며 격하하고 마의태자를 띄운 첫 사례이다. 이는 너무 논란만 가중시킨 비판으로 가뜩이나 조선왕조에서도 옛 신라계 김씨들이 과거를 통과해 관료생활을 하고, 그들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후손들은 대체로 삼국사기를 선호해서 문무왕, 신문왕기의 신라를 극찬했다.
800년대 사찰이 널부러지고 신라의 귀족 세습과 녹읍 체제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에, 신라보다 고려, 더 나아가 조선이 낫다고 보기에 경순왕의 항복은 고려는 물론 더 나아가 조선을 위한 거라고 생각하기에 괜한 논란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왕족들의 수 많은 찬탈행위는 왕이나 왕족들 스스로 자신들의 왕위를 부정하고 친족들을 죽인 패륜적인 행위까지 더해지며 이후 견훤 등에게 찬탈의 명분을 주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우왕, 창왕, 공양왕은 경순왕과 태도가 매우 달랐기 때문에 이후에는 경순왕을 그들보다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어찌보면 고려 태조의 정당성을 내리기 위한 시도라는 설이 있다.그리고 실제로도 경순왕은 유선이나 손호에 비하면 굉장히 나은 축이다. 그래도 나라를 어떻게든 유지해보려다가 안 되자 그래도 자신과 백성들을 더 보존해줄 쪽을 잘 골라 항복한 점에서 그들과 동급 취급받는건 경순왕에겐 모욕이다. 유선은 나라를 구할 기회가 있었는데도[4] 걷어찬 암군이고 손호는 손권의 실책과 손준-손침의 막장라인도 있었지만 그래도 손휴가 되살리던 것을 다시 망친 폭군이다. 그러나 골품제 등의 문제가 있던 신라말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고려말의 막장 상황을 결코 무시할 수 없고 뿐만 아니라 고려 초기부터 고려의 문제등 그런 것을 살펴보지 못하고 정권을 내준 신라도 근시안적이긴 했다. 한나라의 헌제가 위나라가 한나라보다 더 나락이 되는줄 모르고 넘겨준 것에 근시안적인 것이라는 비판에 자유롭지 않았던 것과 비슷하며 여기서 비판을 받는 유선 역시 촉나라는 이릉 대전을 시작으로 진창성 전투때부터 군사적, 정치적으로 멸망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해서 저러한 결정을 한것이었다.
- 신무왕을 띄우고 장보고를 띄우며, 염장을 간신배로 묘사한다. 장보고의 죽음에 문성왕은 실책을 범하게 되고 반역의 의심을 받아 죽었다고 장보고를 더 높이 평가했다. 삼국사절요와 더불어 장보고가 신라의 충신으로 기록된 사서이다. 삼국사기에선 장보고의 반역에 대한 논평은 없고, 대신 그의 동반자 신무왕이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당연하지만 동국사략과 마찬가지로 신라적통론을 밀며 신라의 후반부를 띄워주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또한 저자들이 신하라서 신권주의에 근거해 장보고를 띄운 것이다. 고려의 경우는 고려 광종 시절부터 장보고와 같은 호족 세력들은 위험했기에 높은 평가가 없었고 김부식이 있던 시절에는 반란으로 혼란했고 외척들까지 눌러야 하기에 실추된 왕권을 되찾는게 우선이라 장보고에 대한 높은 평가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고려 태조는 개경의 호족이었고, 계림공이라고 불린 고려 숙종 역시 왕위를 찬탈하고 문벌귀족들을 더 키웠다.
- 고려에 대해서도 꽤나 깐깐한 평가를 내린다.
- 윤언이의 평가가 안좋게 나오는데 유학자이면서도 불교와 도교 등을 믿었다는 이유이다. 윤관의 평가도 생각만큼 크게 높지 않다. 당시 윤필상도 건주여진을 토벌하고 경상도 지역 백성들에게 재산을 주는 등 같은 파평 윤씨인 윤언이와 비슷한 길을 가고 있었다. 사실 이는 윤필상의 견제를 노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이러니하게도 윤언이의 후손이 문정왕후, 윤원형이다.
- 고려 성종을 고려조 최고 성군으로 치켜세우나, 정작 장원제도로 공음을 강화하고 공신후손 우대로 음서의 빌미가 되어 이걸 뜯어고친 이가 개국공신들이다. 반면 고려 광종을 평가절하한다. 이는 조선왕조의 공신 우대와 신분제 유지와 같은 현상유지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어차피 고려 성종 시절 나온 여러 제도들은 조선왕조에 혁파되었다. 향, 소, 부곡 등 특별행정지역의 폐지, 장원제 폐지와 과전, 그리고 무과의 도입과 정착까지 그로 인한 음서의 축소가 고려시대에 있다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개혁된 제도들이다.
그럼에도 성종에 대한 평가가 좋은 이유는 아무래도 저자인 사관들이 신하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신하들에게 이것저것 퍼 준 왕이 더 곱게 보일지, 숙청하고 빼앗는 왕이 더 보기 좋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5]
그래도 고려 성종도 자기 집안 단속이나 잘할 것이지 남한테 뭐라하냐며 깐다. 그리고 고려 성종의 치세는 성종으로 끝났다고 한다.
- 만부교 사건을 처음으로 비판한 사서다. 고려조 이제현은 어차피 고려 태조의 일은 모를 일이고 어차피 서희 대감처럼 하지 않아도 만부교 사건 안 해도 쳐들어온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고려 말 권문세가들이 명나라 사신 채빈을 살해한 것을 언급하며 '이들의 주장은 말도 안 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제현은 이에 대해 논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전에 죽었기 때문에.
서희의 담판외교를 근거로 만부교 사건은 방도를 잃었다곤 하는 시각으로 썼다. 몽골과 달리 거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으로, 송을 옹호해도 오대십국체제를 부정한 셈이다.
- 공양왕이 아니라 공민왕 때 고려가 사실상 끝났다고 평가한다. 드라마 정도전은 이를 통해 공민왕을 다뤘다. 단 막판 공민왕과 정도전의 만남으로 공민왕이 사람된다는 이야기는 각색이다.
그런데 조선 초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이유는 진짜로 공민왕 대에 고려가 망해서라기 보다는, 신우 신창의 '우창 비왕설' 문제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초기 사서에서 우왕과 창왕은 모두 신돈의 자식으로 여겨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둘을 반역자로 취급한다. 이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공양왕은 명목상으로 이성계에게 선위를 해준 장본인이기 때문에 비판하기가 뭐하고, 우왕과 창왕은 조선식 사관으로는 고려 왕이 아니라 반역자이니 고려의 실질적 마지막 왕은 공민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공민왕이 워낙 까인 덕택에 충정왕을 재평가했다. 이유는 공민왕이 조카 충정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반역자로 만들어 위화도 회군과 관련해 조선 태조의 문제를 덮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사실 공민왕과 똑같이 조카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이 분을 돌려까기한 건지도 모른다.실제로 왕에 맞선 반역자가 세운 왕실과 나라는 궁예같은 왕족이라도 왕건이 아니더라도 그 누구라도 궁예와 그 아들까지 죽이고 왕위에 올라도 할말이 없다.[6] 물론 궁예는 그 아들도 죽이고 견훤과 달리 신라 황궁에 들어가 직접적으로 왕을 몰아내지 않았지만 경문왕의 그림에 칼을 꽂은 행위나 양길을 배신하며 신라의 동의없이 자신이 왕조를 연것과 신라를 멸도라 칭하며 싸울 의지가 없던 신라인들까지 몰살시킨거부터 신라 입장에선 살인자이며 역적이다. 신라 역시 왕족들이 우선적으로 왕위를 찬탈한 사례가 빈번해서 역성혁명을 해도 딱히 할말은 없었다. 결국 그 최종 후보가 고려였고 그로 인해 신라가 알아서 정권을 고려한테 내줬다.
- 공민왕과 달리 궁예에 대해선 재평가를 한 사서로 고려왕조에서 암군이었던 의종, 충혜왕, 공민왕 등의 실정이 궁예를 아득히 넘어 재평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고려 현종과 같은 왕도 발견되었다는 점과 궁예의 실정이 견훤과 비교해도 제법 많아서 암군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 견훤에 대한 엄청난 혹평이 쏟아진 사서로 삼국유사와 달리 궁예보다 더 악랄한 역적으로 평가되었는데 이유는 신라를 처들어가서 경애왕을 쫓아내며 경애왕이 죽은 과정과 자신의 아들들을 편가르기한 덕택에 궁예 이상의 암군이 되었는데 이것도 웃긴 게 자신들이 태조로 모신 이성계가 공양왕한테 했던 일이나 이성계가 자신의 아들을 편가르기하며 왕자들간 반란을 야기시킨 것과 고려 역시 태조로 모신 왕건도 궁예 문제나 수 많은 왕자들을 생산하며 뒷수습도 제대로 안한 점에서 고려나 조선이나 두 나라 다 딱히 뭐라할 입장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자식들을 치기 위해서 고려를 끌어들여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이 바친 한국사 초유의 일을 벌인게 커서 고려든 조선이든 졸장부로 조롱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입장에선 견훤이 본인들이 싫어하는 그런 고려에게 항복했으니 조롱을 넘어 분노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삼국유사에서 재평가를 받은건 노장사상을 빌려서 만족하면 화를 면한다는 말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크게 문제삼지는 않았다.
- 계사의 난을 일으킨 김보당을 고려사 열전에 넣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김보당이 고려사 열전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김보당이 무신정권에 붙었다가 이후 의종 복위에 가담해서이다. 김보당이 말과 행동을 바꾸었고 죽기 전에 실토해버린 바람에 기회주의적인 면모 때문에 열전에 넣지 않았다. 그리고 단종과 달리 의종은 폐위당해도 할 말 없는 암군이었다.
- 무신정변 대신에 이의방, 정중부의 난 등으로 규정해 그들을 무관이 아닌 권신으로 규정한 사서로 고려의 경우는 최충헌의 예만 봐도 그가 문관인지 무관인지 뚜렷하지 않아 고려 자체도 문관과 무관이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과 자체도 없거나 있어도 유명무일했고, 그리고 군인하면 적국과 마주치는 곳에서 경계를 서며 야전에서 몽골군 같은 적국과 직접 싸우는 무관이 아니란 점에서 그들을 군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조선 태조인 이성계와 그들과 구별을 짓기 위함이 크고 무과가 본격적으로 운영되던 조선과 분리시키는 의도이기도 했다. 동사강목에선 이들을 군인으로 인정했지만 동사강목을 공식 사서로 보기 힘들다
4. 기타
- 1476년에 동국통감의 단군조선부터 삼국 멸망까지의 내용을 따로 증보, 개수하여 삼국사절요가 10년 먼저 편찬되었다.
- 일본에서는 하야시 가호(林 鵞峰 1618∼80)가 1667년에 신간동국통감(新刊東國通鑑)을 판목으로 만들어 일본 전역에 배포하였고 이후 일본의 대표적인 한국사 교과서로 여겨졌다.세계일보, 연합뉴스
2015년 3월에 동국통감(東國通鑑) 일본 판목본 56권 완질본을 일본 교수가 한국에 기증하였다.관련 기사 임진왜란 때 동국통감이 일본에 전해진 후 에도 시대에 일본 전역에서 필독서가 되어 널리 읽히며 일본에서 따로 판목본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 동국통감은 일본 국학자와 지식인들로 하여금 자국 역사서인 일본서기를 불신하게 만드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유는 이주갑인상처럼 연대를 억지로 끌어올려 동국통감에 나온 사건과 일본서기에 나온 사건이 동일한 사건이어도 연대가 다르고 일본서기의 기술이 뒤죽박죽에 난장판이 따로 없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진구황후 관련 기사와 같이 모토오리 노리나가조차 말이 안 된다고 비난한 무리수들이 남발해 있었기에 결국 자국 역사서를 불신하게 된 것. 게다가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 중국인들이 관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일본서기는 '외래 물이 든 역사서'로 폄하되기에 이른다. 반대로 고사기는 모토오리 노리나가 이후 '일본 고대정신의 결정체'라고 칭송받았다.
[1] 동인시화, 동문선, 태평한화골계전, 오행총괄, 사가집, 경국대전, 필원잡기 등을 저술한 조선 전기의 문인[2] 동국통감을 올리는 전(箋)이라는 뜻으로, 현대의 서문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의 진삼국사기표에 비해서 표가 전으로 격하되었는데, 고려시대의 외왕내제가 원ㆍ명의 압력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3] 발해를 한국사로 보는 시각이 비로소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기고, 그나마 후기에도 발해가 한국사라고 보는 유득공 등과 아니라고 보는 안정복 등이 양립했다.[4] 구할 기회 정도가 아니라 당시 정세(고평릉 사변, 사마소 시군, 독발수기능의 발호)를 볼 때 제 할 일만 했어도 강유가 준비한 일발역전의 패가 (정난의 변과 비슷하게) 먹힐 수 있었다.[5] 사실상 고려 성종부터 유교식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점도 조선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6]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면서 궁예와 그 아들들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각의 이야기일뿐이다.